화리는 영욱이 가진 제 3의 눈보다 더 넓은 범위를 관측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 듯했다. 환수 사냥꾼들이 2QB 세상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떼거지로 돌아다니는 걸 보면 두 세상이 겹치는 곳을 알 수 있거나 환수의 출현을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스캔이나 디텍트 기능을 가진 초능력이나 마법 아이템을 보유했거나 레이더와 같은 최첨단 관측 장비의 도움을 받았든지 간에.
"일진日辰 정말 사나운 날이군요."
"그 일진이라는 게 2QB 세상에서 일으킨 일과 관련이 있다는 게 더 무섭지요. 호호호!"
"그렇다면 제가 자초한 일이라는 소리군요."
"예. 2QB 세상에서 강력한 환수를 건드리면 그 화가 현실 세계에까지 미치죠. 녀석들은 성격이 워낙 급해서 문제의 드림헌터가 다시 2QB 세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거든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화리는 영욱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그게 지렁이를 포식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강력한 환수들을 건드리면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변종 환수
"대룡산에서 눈사태를 만났어요."
"2QB 세상의 대룡산을 말하는 건가요?"
"예."
"맙소사! 그래서 토룡이 두 마리나 움직인 거군요."
토룡에 대한 반응과 대룡산의 눈사태에 대한 화리의 반응이 살짝 엇갈렸다. 그것은 다른 산에도 토룡이 있을 수 있는데 대룡산의 토룡이 제일 강력하거나 성질이 더럽다는 의미인 듯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눈사태를 일으킬 정도로 강한 토룡이든지.
"상인들이 경고하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까 어쩔 수 없죠. 그리고 또 다른 환수를 건드린 적은 없나요?"
"환수랄 것 정도는 아니지만 늑대 무리들의 공격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저한테 두들겨 맞던 우두머리 수컷 늑대가 껍질만 남겨놓고 달아나더군요. 그런 허약한 녀석들이 환수일까요?"
"그 녀석은 아닐 수도 있지만 늑대들에게도 왕이 있어요. 늑대의 왕은 환수가 분명할 테니까 가서 일렀을 지도 모르겠군요."
"자기들이 먼저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해놓고 누구한테 일러요?"
대충 분위기를 보아하니 2QB 세상의 늑대 무리들도 현실 세계로 넘어온 듯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도망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처리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강적이 나타났으니까 당연히 보스에게 보고해야 피해가 줄어들지 않겠어요?"
"그럼 절대로 놓치면 안 되겠군요."
"맞아요. 그게 2QB 세상에서 사냥할 때 꼭 지켜야할 점이에요."
"제가 무식해서 일을 크게 만들었군요."
한극상은 환수 사냥꾼으로서 꼭 알고 있어야할 기본 상식조차도 없는 영욱을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영욱 역시 한극상을 힐끗 쳐다본 후 자신의 무식함을 자발적으로 인정했다. 무식한 한극상도 아는 내용을 자신은 몰랐으니 고해성사를 해도 싸다고 생각했다.
"원래 무식하면 약해서 일을 만들지도 못하는데 영욱 씨는 너무 강해서 큰 사고를 친 것 같네요."
"2QB 세상의 환수들은 원래 이렇게 뒤끝이 강해요?"
"원래는 이러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언젠가부터 드림헌터들이 현실 세계에서는 그리 강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나 봐요. 그러니 효과적인 응징 수단이라고 생각하고서 이런 일을 벌이는 거죠."
환수들의 집요함은 진화 내지는 적응의 산물이었다. 게다가 녀석들은 현실 세계로 오더라도 상당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물론 토룡의 힘을 겪어본 영욱의 느낌이 그랬다.
"머리가 아주 좋은 녀석들이군요. 그리고 그 녀석들은 그다지 약해지지도 않은 것 같던데……."
"환수의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가진 힘의 10% 전후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해요."
"그렇다면 드림헌터들은 얼마나 사용할 수 있어요?"
무식함을 면하기 위해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배워두는 방법밖에 없다. 그래서 영욱은 다소 껄끄러울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대놓고 질문했다. 결례가 되더라도 몰라서 그런 것으로 치부될 수 있으니까.
역시 곤란한 질문인지 잠시 망설이던 화리가 이내 마음을 정했는지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는 3%가 최고예요. 그러는 영욱 씨는 몇 %죠?"
"저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1% 남짓인 것 같아요. 화리 씨는 어느 정도죠?"
"저는 3%예요."
"우와! 대단하군요."
"제 능력이 아니라 제가 착용한 아이템 덕분이에요."
화리는 자신의 왼손에 착용하고 있는 보석 팔찌를 가리키면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이템을 사용한다든지 어떤 게 아이템인지를 알려준다든지 그리고 2QB 대비 몇 퍼센트의 힘을 현실에서도 발휘할 수 있다든지 하는 것은 상대에게 알려져서 결코 좋을 게 없는 내용이다.
이처럼 특급 비밀일 수도 있는 내용을 굳이 밝힌 것은 결국 아이템 자랑을 하기 위함이라고 봐야 했다. 물론 100퍼센트 진실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영욱도 1퍼센트 남짓이 아니라 얼추 2퍼센트는 되는 것 같은데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건 얼마짜리죠?"
"몇 년 전에 134골드를 주고 샀어요. 지금은 200골드를 호가하는 귀물이지요."
"우와! 화리 씨는 대단한 실력을 가진 헌터였군요."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것 역시 실력이니까 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영욱은 감탄하는 것과는 달리 화리가 그렇게 강해보이지는 않았다. 본심이 새어나와서 영욱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를 눈치 챈 화리가 발끈해서 입을 열었다.
"고개를 갸웃거릴 것까지는 없잖아요. 사실 집이 부자라서 현금 동원 능력이 좋은 편이죠."
화리는 직접 사냥해서 번 돈으로 장만한 게 아니라 부모의 도움을 받았음을 또 솔직하게 밝혔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무슨 능력을 가진 아이템인데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제가 혹시 착각한 건가요?"
"얼핏 느끼기에는 능력의 두 배 증폭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요? 아니면 터보 기능인가요?"
영욱은 화리가 싸움에 개입하려고 할 때 기세가 갑자기 두 배 이상으로 강해진 것을 느꼈다. 그래서 이런 대답이 나오는 것이다.
"전자前者예요. 후자後者는 가진 능력을 더 빨리 소진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따르니 싸구려 기능이라고 봐야겠죠."
"혹시 세 배 증폭이 가능한 아이템도 있나요?"
"제가 알기로는 두 배가 최고예요. 그게 고스톱의 피박, 광박, 흔들기처럼 곱해서 몇 배로 늘어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헉! 전문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군요."
아이템으로 증폭시킬 수 있는 최고의 배율은 두 배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여러 개의 아이템으로 중첩되지 않는다는 소리기도 했다. 하지만 예쁜 여자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고스톱 이야기가 나오자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전문가까지는 아니지만 한때 강원랜드 카지노를 전전했던 적이 있기는 해요."
"그렇다면 내 토룡피의 가격을 후려쳤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겨우 두 배의 증폭 기능을 지닌 아이템이 200골드라면 상당한 방어력을 가진 토룡피의 가격이 겨우 20골드일 리가 없다.
게다가 한극상의 바인딩 마법에 저항하는 것을 도와주기까지 했으니 마법에 대한 내성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이렇듯 귀한 물건이니까 영욱은 사기를 당했다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결정된 일이니까 이제 와서 알아차려도 소용없어요. 가격은 이미 정해졌으니까요."
"나와 두 번 다시 거래할 생각은 없는 것 같군요."
"그게 무슨 소린가요? 또 거래해야죠."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지 않고도 또 거래가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시는가요? 뜨내기장사처럼 어처구니없는 가격을 매겨놓고서 말이죠."
등골산 정상을 향해 이동하면서 영욱은 이 잘못된 가격을 바로잡기로 했다. 그것은 이것이 마지막 거래가 아니기 때문에 바로잡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리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가격을 정하는 것은 본인의 몫이에요. 그걸 남의 탓으로 돌리다니 남자답지 못하군요."
"이 거래를 뒤엎겠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화리 씨가 다음의 거래를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가격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20억도 무척 큰 금액이지만 토룡피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말이죠."
"그 주장에 대한 정당한 근거라도 있나요?"
"한극상 아저씨의 바인딩 마법에 저항한 힘의 원천이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영욱이 굳이 이런 말까지 꺼낸 것은 원래 그런 기능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그저 자신만의 느낌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당연히 확인 절차를 거칠 필요가 있었다.
"호호호! 토룡피에 마법이나 초능력에 대한 내성이 있다는 소리는 저로서는 처음 들어보는군요."
"저도 확실히 알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강력한 힘을 어떻게 이겨낸 것인지가 나도 궁금해서요."
"내성이 있다고 쳐도 이미 끝난 거래예요. 설마 계약서를 운운하지는 않겠죠?"
반응을 보아하니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 듯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물리적 방어력보다는 마법적인 내성을 먼저 발견했을 가능성이 컸다.
"원래는 계약서를 써야 하는 건가요?"
"드림헌터들의 계약서는 바로 말로써 한 약속이죠."
"그런 말이 있었는지를 어떻게 증명한다는 거죠?"
"서로의 말이 맞지 않으면 힘이 모든 것을 말해주니까 증명하기는 쉬워요."
"아주 좋은 룰이군요. 당장 뺐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하라는 그 말씀이죠?"
화리와의 대화를 통해서 영욱은 많은 것을 빠르게 배워가고 있었다. 2QB 세상에서 통용되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현실 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 그다지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러고 싶지만 우리 측에 혹시라도 피해가 발생할 지도 몰라서 참고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정말이지 살벌한 세상이군요."
"당연하죠. 현실 세계에서는 가히 초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는 드림헌터들을 통제할 수 있는 법률 같은 게 있을 리 없으니까요."
"역시 정글의 법칙인가요?"
"예. 그게 유일한 진리죠."
"좋은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경고로 들리지 않았다니 다행이에요."
영욱과 화리의 이야기가 말 속에 날카로운 칼을 담고서 팽팽하게 오가고 있었다. 화리는 거래 조건을 갱신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뜻을 확실하게 표현했고, 영욱은 그게 못마땅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표현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화리 씨 일행처럼 현실 세상에서도 사냥을 다니는 팀들이 많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강원도 지역만 해도 다섯 팀은 되는 것 같아요."
"죄송한 질문이지만 그 중에서 어느 정도의 레벨인가요?"
"죄송할 것 없어요. 다들 고만고만하니까요. 아직까지는 말이지요."
다들 각축角逐을 벌이는 상황이니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강해지려고 하는 듯했다. 문제는 뒤끝이 장난이 아닌 영욱이 그 희생양이라는 점이었다.
@
영욱과 화리 일행이 가리산 정상을 넘자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환수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늑대들이 아니었다. 열 마리가 넘고, 덩치가 도사견만큼이나 큰 것까지는 비슷했는데 늑대가 아니라 거대한 덩치를 가진 사냥개들이었다.
"이건 또 뭐죠?"
"환수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교묘하게 위장하기도 해요. 그런데 사냥개라니 정말 놀랍군요."
"뭐가 놀랍다는 겁니까?"
"늑대 환수들이 현실 세계의 사냥개들과 합체했다는 소립니다. 그것은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소리기도 하지요."
화리는 영욱이 몰라서 묻는다는 걸 아니까 귀찮게 여기지 않고 자세하게 대답했다. 환수 사냥 실력은 어떤지 몰라도 사냥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어느 정도 급소 체계를 가지고 있을 거 아닙니까?"
"물론이죠. 하지만 그 급소를 가격당할 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거예요. 이미 보통 사냥개들이 아니니까요."
"확실히 움직임이 날렵하군요. 아무튼 이제 여러분들의 아이템 구경을 할 차례군요. 그래야 화리 씨가 원하시는 대로 현금 대신 골드를 선택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녀석들의 숫자를 보니 영욱 씨도 좀 거들어야할 것 같은데요? 원래 이건 영욱 씨의 일인데 설마 나 몰라라 하지는 않겠죠?"
영욱이 발을 빼자 화리가 난색을 표했다. 주객이 완전히 전도되었다는 주장이었다.
"그럼 화리 씨가 원하는 가죽이 줄어들 텐데요?"
"쉽지는 않을 거예요. 녀석들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은 우리들이 될 테니까요."
"도와봐야 저로서는 남는 게 전혀 없을 것이라는 말이군요. 그렇다면 저는 일찌감치 포기하렵니다. 전리품을 탐내지 않을 테니까 일행들끼리 열심히 싸우십시오. 그동안 전망 좋은 나무 위에서 싸움 구경이나 하겠습니다."
화리에게 크게 사기를 당한 적이 있는 영욱은 매사에 조심스럽게 대했다. 가죽에 관한 언급도 그러한 맥락이었는데 덕분에 화리로서는 나눠줄 생각이 전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개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늑대 가죽에 대한 욕심은 별로 없지만 죽 쒀서 개 주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다.
"저 녀석들의 가죽 한 장에 1골드나 한다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이겠죠?"
"개가죽이 뭐가 그렇게 비쌉니까? 하지만 내 몫은 이미 없다고 하신 것 같은데요?"
"열심히 싸우신다면 한 장 정도는 나눠드릴 수도 있어요."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개 가죽 따위는 깨끗하게 단념하겠습니다."
"흥! 나중에 후회하지 마세요."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요."
개 가죽 한 장에 1골드라면 토룡피 한 장에 20골드일 리가 없다. 100마리가 달려들어도 이길 것 같지 않으니까 당연한 계산이다. 영욱은 화리와 더 이상 거래하면 자신의 성을 갈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거래할수록 사기 당하는 액수만 높아질 테니까.
@
영욱은 근처에서 제일 높은 참나무로 올라갔다. 풍차 돌리기는 평지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라 높은 나무나 절벽을 기어오르는 데도 매우 유용한 초식이었다.
마치 만화의 한 장면처럼 나무를 직각으로 타고 올라가서 가장 높은 가지 위에서 자리를 잡은 영욱은 눈을 감고서 전투를 감상하기로 했다. 제 3의 눈만큼은 현실 세계에서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니 오히려 눈을 감는 게 상황을 파악하기가 더 좋을 것 같았다.
눈을 감으니 제 3의 눈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사냥개의 모습을 한 환수 변종들은 북극곰을 능가하는 파워를 지니고 있다는 게 대번에 느껴졌다. 그리고 몸놀림의 빠르기는 치타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화리가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크르르.
선두에 선 우두머리 녀석이 낮게 울부짖자 화리 일행들을 일제히 덮쳤다.
탕. 탕. 핑. 핑.
화리 일행쪽에서도 엽총과 활을 쏘고 전투 도끼와 긴 칼을 들고는 변종 환수들을 맞이했다.
"광역 바인딩! 어디 맛 좀 봐라!"
한극상이 우렁찬 목소리로 자신의 초능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상대가 사람이라면 피할 빌미를 줄 수도 있지만 환수 변종이니까 마음껏 외치는 듯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증폭 기능이 있는 아이템을 작동시키기 위해서 명령어를 작동시켰다는 느낌도 들었다. 왜냐면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크게 바인딩을 외쳤기 때문이다.
광역 바인딩이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처럼 여러 마리 변종 환수들이 한꺼번에 바인딩에 당했는지 움직임이 느려졌다. 하지만 사냥개들 역시 영욱 이상으로 힘이 장사라서 그런지 묶여서 꼼짝하지 못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한극상은 커다란 도끼를 꺼내들고 마치 장작을 패듯이 사냥개들을 쪼개려 들었다. 하지만 얌전하게 목을 대주는 사냥개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화구火球!"
화리는 자신의 이름과 유사한 불의 초능력자였다. 그런데 학과장 김진명처럼 상대의 몸에다 바로 불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에서 야구공 크기의 불덩이를 만들어 내더니 마치 장풍처럼 발사했다.
불덩이가 날아가는 속도가 아주 빨랐지만 환수 변종 사냥개들의 반응 속도는 그 이상이었다.
펑. 펑.
그런데 불덩이는 그냥 불덩이가 아니라 폭탄처럼 터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십 개의 작은 불꽃으로 변해서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리고 다시 수백 개의 더 작은 불꽃으로 변해서 퍼져나갔다. 마치 수류탄처럼 일정 범위를 그물망처럼 뒤덮어버렸다.
자그마한 불꽃들이 사냥개들의 몸에 닿자 갑자기 불길이 커졌다. 환수 변종들이 눈밭에 뒹굴어서 몸에 붙은 불을 끄려고 했지만 쉽게 꺼지지는 않았다.
크러러.
하지만 환수 변종들이 강한 기세를 발산하자 맥없이 꺼지고 말았다.
@
"놀라운 힘을 가진 녀석들이었군. 온전한 화구가 아니면 어림도 없겠어."
"총알도 소용없어요."
"화살도 마찬가지입니다."
"젠장. 내 도끼는 통할 것 같은데 도무지 맞아주지를 않네."
"내 칼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를 내야 리버스 힐reverse heal을 사용할 거 아닙니까."
화리 일행들이 한마디씩 불만을 뱉었다. 그만큼 상황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영욱은 환수 변종 사냥개 녀석들이 힘만 강한 게 아니라 머리도 아주 영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욱이 보기에 지금 상황은 화리 일행의 힘을 빼놓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영욱이 더 영리해서라기보다는 높은 곳에서 전체를 내려다보니 전체적인 그림이 한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임을 영욱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만일 영욱 자신도 처음부터 싸움에 끼었다면 나무만 보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은 조금만 더 정확하게 공격하면 통할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냥개들이 꼭 필요한 만큼만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슬아슬'이라는 단어가 꼭 어울리는 전투였다.
"저 녀석이 우두머리 수컷이군."
영욱은 덩치가 제일 작은 사냥개의 모습을 한 녀석이 오히려 대장임을 겨우 알아냈다. 그 녀석이 모든 싸움을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욱으로서는 개입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개입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의 의미는 화리 일행들이 사냥에 성공할 확률이 높든지 혹은 그들이 전멸을 당하고 난 후에 영욱 혼자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것 둘 중의 하나를 의미했다.
물론 후자였다. 화리 일행은 자기들보다 숫자가 많은 늑대 사냥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더 강하더라도 숫자가 적은 사냥감을 처리하는 데에만 익숙한 듯했다. 팀원들의 조합 역시 그런 듯했고.
그렇다고 해서 화리 일행보다 영욱이 더 강하다는 소리는 결코 아니다. 물론 지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1대 6의 싸움이니 이길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사냥개 무리들과의 싸움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일단 화리 일행과의 싸움에서 다치거나 죽는 사냥개들이 몇 마리는 생길 것이고, 우두머리 수컷과의 싸움에는 다른 사냥개들이 끼어들지 않을 공산이 컸다.
그것은 영욱이 이미 늑대 피를 충분히 마셨기 때문에 늑대 냄새를 피우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두머리 암컷의 냄새를 피우면 오히려 녀석들이 깜짝 놀랄 가능성이 높았다. 늑대들이 사냥개의 탈을 쓰고도 늑대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러한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다고 쳐도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몸은 이미 질긴 토룡 껍질로 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토룡의 피를 흡수하고 소화시켰으니 그냥 토룡 껍질이 아니라는 점도 한몫했다.
사실 영욱이 배터질 정도로 흡수했던 토룡의 기운 중 일부가 영욱이 걸친 토룡의 껍질 속으로 흘러가자 단순한 가죽 이상의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가죽이 아니라 살아있는 피부가 되어버린 듯했다.
느낌이 아니라 진짜 살아있다면 혹시 상처가 나더라도 복구가 가능하고, 탄력성도 더 좋을 것이니 사냥개의 이빨 정도는 별로 두렵지도 않았다.
@
영욱의 예상대로 전투는 장기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환수 변종 사냥개들은 교대로 공격하는 영리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차륜전술이라는 것이 사냥개들로부터 펼쳐진 것이다.
화리 일행은 이렇다 할 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도 못한 채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그나마 한극상이 밥값을 했지만 혼자로는 불리한 전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
견디다 못한 화리가 결국 영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봐요. 대체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건가요?"
"내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그 팔찌 아이템의 위력은 대체 언제 보여줄 건가요?"
"그건 이미 보여주었어요."
"그렇다면 실망이군요. 사냥개 열 마리도 처리하지 못하는 아이템이 무슨 아이템입니까? 그것도 200골드짜리라니 기가 막히는군요."
"빠르게 치고 빠지는 녀석들이라서 힘의 증폭이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어요."
영욱은 화리의 말을 절반만 믿기로 했다. 아직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도 아니고, 아직 팔찌 아이템의 성능을 100% 발휘한 것도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겨우 그 정도의 성능으로 200억이나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럴 거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영욱이 비꼬아도 별로 흥분하지 않는 화리의 모습 때문이다. 숨겨둔 한 수가 있지 않다면 발끈하는 게 정상인 상황이니까.
"그래도 그렇지, 도저히 200골드 가치가 있는 것 같지는 않군요."
"가위바위보 게임처럼 상대하기 버거운 사냥감들도 있기 마련이에요. 그러니 어서 좀 도와주세요."
"나도 개는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요. 다들 나처럼 나무 위로 피하세요. 설마 나무 위에까지 쫓아오기야 하겠어요?"
영욱은 화리 일행을 도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더구나 아무런 계약도 없이 도와봐야 전리품은 하나도 챙기지 못할 공산이 크니 도울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그녀 일행이 영욱에게만 극단적으로 강할 수도 있으니까 괜히 남 좋은 일을 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재들 발톱 좀 보세요. 표범처럼 기어오르고도 남아요."
"그런데 나한테는 왜 아무도 오지 않는 거죠?"
"그야 우리를 상대하느라고 그러는 거겠죠."
"그렇다면 나를 이미 식량 창고 속의 식량으로 본다는 말이군요."
"달아날 곳은 아무데도 없으니까요."
"과연 그럴까요?"
영욱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암컷 우두머리 늑대의 기운을 통째로 흡수했으니 환수 변종들로서도 헷갈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강자임을 알기에 도발하지 않는 것이든지 간에.
"제발 좀 도와주세요. 이러다가는 정말로 전멸당하겠어요."
"토룡을 우습게보더니 정말 실망이군요. 쟤들이 백 마리라도 토룡 하나를 이길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니까 상대적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개는 팰 수 없어요. 애견인이라서 말이죠."
"이 녀석들은 영욱 씨를 노리고 온 늑대 환수들이라고요. 자꾸 딴소리만 하실 건가요?"
영욱이 도와주기는커녕 자존심을 긁어대자 결국은 화리도 견디지 못하고 화를 벌컥 냈다.
"좋습니다. 그럼 거래하기로 하죠. 도와주면 얼마를 줄 겁니까?"
"정말 기가 막히는군요. 이 환수 변종들은 영욱 씨를 노리는 적이라고요. 그러니 우리에게 대가를 지불해야할 판인데 적반하장도 유분수 아닌가요?"
"달리 표현하자면 내 사냥감들을 화리 씨 일행이 통째로 가로채려고 하다가 이제 와서 힘에 부치니까 딴소리를 하는 것으로 들리는데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처럼 영욱의 주장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사실 그게 진실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대가를 준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와요?"
"겨우 개가죽 한 장을 얻으려고 목숨을 걸겠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철수하겠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저 녀석들이 쉽게 보내줄 것 같지는 않는데요?"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해요. 아무튼 다음에 만나면 가만 두지 않을 거니까 단단히 각오하세요."
화리는 영욱과의 거래가 깨어졌음을 선언했다. 하지만 영욱으로서는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눈 뜬 채로 사기당할 뻔했는데 환수 변종들 덕분에 계약을 파기하게 되었으니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다시 만나게 되겠죠. 잘 가요."
"흥! 모두 철수해요."
펑!
화리는 둘러메고 있던 가방에서 연막탄과 최루탄을 꺼내서 터뜨리고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후각에 예민한 사냥개들이 최루가스를 맡고 기함했지만 그렇다고 추격하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물론 변종 환수들 모두가 화리 일행을 추격한 것은 아니었다. 화리 또한 그것을 노리고 전장을 다른 곳으로 옮긴 게 분명했다. 영욱이 보지 않는 곳에서 그 비싼 팔찌 아이템의 위력을 마음껏 발휘하려는 것도 있겠지만.
크르르.
우두머리 수컷과 암컷 변종 환수만이 남아서 영욱에게 포효를 터뜨렸다. 순순히 내려오지 않으면 나무 위로 올라가겠다는 경고였다.
"이제는 내 차례라는 건가?"
영욱은 순순히 내려가기로 했다. 나무 위에서 싸우면 조금이나마 유리하겠지만 겨우 두 마리뿐이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
크왕. 퍽. 깽.
거대하고 민첩한 변종 환수 두 마리와 영욱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두 녀석이 엄청난 속도로 공격했지만 이제 영욱의 기계체조도 그리 만만치 않았다.
'활인심방, 고치, 삼십육, 잔상, 수족, 잔상, 권!'
그렇지만 동작이 크고 위력적인 잔상각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두 녀석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변칙적이고 빨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두머리들이라서 강한 놈들이고, 이제는 한극상의 광역 바인딩 제약조차도 없으니 더더욱 빨랐다.
그나마 잔상권의 동작은 빠르고 경쾌해서 아쉬운 대로 녀석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영욱은 곧 수비를 포기하고 말았다. 팔을 주고 머리를 취하기로 작전을 바꾼 것이다.
우두머리 수컷은 영욱의 왼팔을 물고 늘어졌고, 새로 우두머리 암컷이 된 녀석은 왼쪽 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물고 좌우로 흔들면 강력한 힘에 영욱의 뼈가 부러져야 정상이겠지만 그들의 이빨이 토룡피를 뚫지도 못했으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기회를 일부러 만든 영욱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퍽! 우지직. 깨개갱.
'활인심방, 고치, 삼십육, 잔상, 수족, 잔상, 각!'
영욱은 남은 손과 발로 각각 세 개씩의 잔상을 만들어내더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우두머리 수컷과 암컷을 가격하고 밟기 시작했다.
두 녀석은 우두머리라는 체면도 내려놓고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런다고 해서 영욱이 공격 속도를 줄일 리 없었다. 영욱은 애견 사료도 즐겨 먹는 애견인이지만 사람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개마저도 사랑하는 미친놈은 아니다.
특히 개들은 서열이 정해진 상태에서나 사랑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빨을 드러내는 늑대를 살려둘 리 없었다. 물론 보통 사냥개들이 아니다보니 무지막지한 공격을 당하고도 쉽게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녀석들은 물고 있는 팔과 다리를 놓지 않았지만 영욱으로서는 그게 더 좋았다. 흩어져서 도망가면 둘 중 하나를 놓칠 수밖에 없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토룡 껍질로 덮여있지만 물린 자리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참는 것이라면 영욱의 특기였다. 게다가 자가 치유 능력이 위력을 발휘하는 중이라서 혹시 부러지더라도 크게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영욱은 아픈 만큼 아니, 아픈 것의 열 배를 변종 환수들에게 되돌려주었다. 전에는 그럭저럭 예의도 차릴 줄 알고 큰 덩치치고는 상냥한 편이었지만 드림헌터가 되고난 후부터는 성격이 많이 거칠어졌다.
그리고 은영에게 버림을 받아본 후로는 여자들에게도 쌀쌀맞게 대하는 버릇이 생기고 말았다. 여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계산기부터 두드리는 속물들이라는 선입견이 생겨버린 탓이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는 투덜거리고 시비를 마다하지 않아서 문제가 있는 성격으로 보이겠지만 영욱은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자건 남자건 정당한 이유 없이 잘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여자들로부터 속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화리와의 거래에서도 하마터면 큰 손해를 볼 뻔했다. 화리는 토룡 가죽이 두 장일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 전투 중에 드러났다.
한 장을 걸친 부분은 잡종 환수의 사자를 닮은 날카로운 발톱이 조금이나마 파고들었는데 두 겹으로 된 부분에서는 전혀 그러지를 못했던 것이다. 영욱은 가능하다면 몇 장이라도 더 구해서 겹쳐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화리가 속인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니 굳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리고 그들이 변종 환수 사냥개들에게 일방적으로 몰리는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팔찌 아이템의 사용 방법은 물론이고 영욱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비장의 카드라도 있는 듯했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이제 영욱도 없고 우두머리 암수도 없는 곳으로 이동했으니 그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을 것이다. 변종 환수들을 손쉽게 사냥하고 그 기세를 몰아 영욱과 우두머리 암수를 함께 사냥하러 달려올 것이 분명했다.
물론 영욱도 그 이전에 사냥을 끝낸 후 이곳에서 사라져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위기를 느낀 영욱은 서둘러서 이 사냥을 정리하기로 했다. 공격력을 배가시키는 방법은 몸에서 힘을 빼고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몸에서 힘을 빼면 뺄수록 공격속도와 위력이 더 커지는 기현상이 발생한다. 그것은 불필요한 동작이 줄어들고, 공격에 필요한 힘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퍽. 퍽. 깽. 깽.
결국 두 녀석은 매를 견디지 못하고 혀를 내밀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영욱의 잔상권과 잔상각을 수십 대나 맞으면서도 버틴 게 대견하지만 그게 한계였다.
영욱은 녀석들의 서둘러서 녀석들의 피를 빨고 가죽을 벗겼다. 피를 염동력으로 움직여서 마시는 작업과 가죽을 벗기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겉모습이 사냥개라서 좀 찝찝하긴 했지만 지금 그걸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개 특유의 노린내가 진동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 노린내 속에 멧돼지나 노루의 피 맛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피를 뽑아서 마셨다.
80kg은 족히 될 것 같던 거대한 사냥개들이 불과 10kg의 육포로 줄어드는 데는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뼈와 내장을 빼버리니 사냥개 두 마리의 고기로 만들어진 육포가 불과 10kg도 되지 않았다.
영욱은 수분과 피를 빨다가 부수적으로 생긴 육포를 가죽과 함께 챙겨서 자리를 떠났다. 주변에 숨어 있다가 화리 일행에게 기습을 가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도 냉철한 헌터가 되지 못한 증거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는 엄연히 현실 세계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만일 2QB 세상이라면 당연히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을 가했을 것이다.
@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화리 일행이 되돌아왔다. 영욱의 짐작대로 이미 변종 환수들의 사냥을 완료한 다음이었다. 화리는 뼈와 내장만 남은 두 마리의 잔해를 보고서 영욱 역시 사냥에 성공했음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실력을 숨기고 있는 놈이었군."
"두 마리 정도야 충분했겠지."
"그냥 두 마리가 아니라 우두머리 암수였어요."
한극상이 영욱의 실력을 애써 폄하하려고 했지만 화리는 냉정하게 진실을 밝혔다. 그 차이는 아주 크기 때문이다.
"그래봐야 별 차이 나려고?"
"보스와 졸개의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커요."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그냥 포기할 거야?"
"그럴 리가 있나요?"
"잘 생각했어. 이번에는 내가 꼭 죽여 버릴 테니까 맡겨두라고."
"하지만 싸우는 것보다는 다시 한 번 협상을 시도해야겠어요."
"생각보다 강하다는 건가?"
"우두머리 변종 환수 두 마리는 솔직히 우리가 잡은 졸개 열 마리보다도 강해요. 그러니 대놓고 싸우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닌 것 같아요."
영욱에 대한 화리의 평가는 상당히 후했다. 약간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지만 그렇게 큰 차이가 날 줄은 한극상도 몰랐던 듯했다.
"그 정도야?"
"예. 제 눈이 정확하다는 것은 잘 아시잖아요."
"그럼 가격 협상을 다시 해야겠지. 하지만 녀석이 가격을 올리려고 들 텐데?"
화리의 판단에 대해서는 한극상도 상당한 퍼센트의 확률로 믿는 듯했다.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지만 일행이 다 달려들어도 영욱을 이기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손해를 보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지불해야겠죠."
"멀끔하게 생겨서 샌님인 줄 알았더니 닳고 달아서 약아빠진 녀석이었어."
"나름 드림헌터로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거겠지요. 그러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니까요. 그리고 혹시라도 우리를 기습하기 위해서 잠복하고 있을 지도 모르니 방심하지 마세요."
"만일 달려든다면 그 녀석은 내가 처리하고 말겠어."
하지만 한극상의 허풍은 아직도 여전했다. 그저 호승심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영욱과 다시 싸우고 싶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혼자서 이길 수 있어요?"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한다면 충분해."
"산이 떠들썩하도록 고래고래 고함지를 일 있어요?"
"필요하다면 질러야지. 아무튼 꼭 주문을 크게 외워야 한다는 게 흠이야. 다 좋은데 말이야."
"빛이 있으면 당연히 그림자도 있는 법이죠. 비싸다는 것과 주문을 외우는 목소리가 커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훌륭한 아이템이 틀림없어요."
한극상이 끼고 있는 팔찌 아이템의 성능을 최대로 발휘하면 영욱을 이길 수 있다는 소리였다. 영욱을 꼼짝하지 못하게만 만들 수 있다면 당연히 이길 수 있을 테니까.
"또 있잖아. 유치한 내용의 주문 말이야."
"주문이야 당연히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저는 아름다운 시의 한 구절 같아서 좋기만 하던데요?"
"제길! 그게 시의 한 구절이야? 그리고 주문 중에
'커져라! 세져라!'
는 또 뭐야? 애들 영양제 선전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이템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큰 목소리로 외쳐서 원하는 마법을 발동시키는 것 이외에도 유치한 내용의 주문이 따로 필요한 듯했다.
"좋잖아요. 호호호!"
"너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제가 무슨 생각을 한다고 그래요? 위력이 커지고 세지라는 의미니까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내가 말을 말아야지. 요즘 애들은 너무 엉큼해."
"누가 엉큼하다고 그래요?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 만화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닌 줄 아시잖아요. 그래도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고 말겠다!'
그런 주문보다는 훨씬 낫잖아요. 호호호!"
화리와 한극상은 유쾌하게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영욱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이 하는 대화는 농담에 가까웠다.
외워야 하는 주문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런 유치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혹시나 영욱이 숨어서 지켜보거나 엿듣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일부러 헷갈리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사실 그 이야기를 영욱도 듣고 있었다. 매복해서 공격을 하려는 게 아니라 예상보다 화리 일행이 일찍 돌아와서 미처 피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 발자국 도망가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숨어야만 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