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9/71)

"날개가 없다고 날 수 없다는 편견은 버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웃기고들 있네. 그럼 운석은 대체 뭐야?"

"설마 우리를 던지겠다는 것은 아니겠죠?"

"미안하지만 공짜로 던져줄 생각도 없어."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실현 가능한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어떻게 던져야 잘 던졌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가 문제겠지만. 

그리고 던져진 다음 착지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진동에 대해서 두 몬스터가 어떻게 반응할 지도 의문이었다.

"또 돈타령이에요?"

"나무 위로 피하라고 했을 때 소용없다고 방방 뜬 사람이 누구였지? 나의 절묘한 판단 덕분에 살아났는데 고맙다는 말은 전혀 하지도 않고 있잖아. 이러니 내가 대가를 요구하지 않을 수 있겠어?"

"아직 완벽하게 피한 상황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고맙다는 말이 나와요?"

"너희 둘은 늘 이런 식이라니까. 지금 피한 것은 그냥 운이 좋아서 피한 것인 줄 알아?"

영욱의 상식에 의하면 지금도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고, 완벽하게 피하면 그때에도 또 인사를 해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만날 때마다 고맙다고 고개를 조아려도 시원치 않을 상황이다. 하지만 두 여자는 고맙다는 인사를 너무 아끼고 있었다.

"그럼 저 알량한 실드 덕분이라는 건가요?"

"나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진동의 전달을 어느 정도 줄여준 게 틀림없어."

"그렇다면 확신할 수 없는 이야기로 우리들에게 생색을 내시려는 거군요."

"내 말이 맞는지 확인해볼 기회가 금방 올 거야."

확인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냥 진공 실드를 풀어버리면 된다. 다만 진짜라고 판명되는 순간 두 몬스터의 공격이 재개될 것이니까 확인하는 것도 문제다.

"문제가 생기면 같이 당할 텐데요?"

"누가 지금 확인한다고 했어?"

"그럼 언제 확인한다는 거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좀 꺼. 아무튼 너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없으니 제발 좀 조용히 해줄래?"

"꼭 이런 식으로 저를 모욕해야 직성이 풀려요?"

"제발 나를 그냥 좀 내버려둬. 내가 네 머슴도 아니고 네 남편도 아니니까 너와 놀아줘야할 이유가 전혀 없잖아. 그리고 내가 묘수를 떠올리지 못하면 우린 다 죽어. 그리고 너희들도 제발 생각 좀 해봐. 매번 날로 먹으려고 들지 말고."

"……."

영욱의 신랄한 지적에 진소희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를 이제야 겨우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영욱을 머슴 취급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그 머슴에 빌붙어서 살 궁리만 하고 있었다는 것도 이제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토룡피

"상태야. 나를 던지면 어디까지 보낼 수 있겠어?"

"평지라면 10미터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여긴 나무 위라서 그만큼 힘을 쓰기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영욱은 자신의 덩치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덩치가 작은 윤승언이나 여자들을 던지면 더 멀리 보낼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렇다면 지형지물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저 나뭇가지를 여기까지 휠 수는 있겠어?"

"예. 선배님.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조심해서 해 봐.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선배님."

박상태는 조심스럽게 나무를 휘기 시작했다. 나무 위라서 힘을 쓰기도 어려웠지만 가지가 부러지면 그 소리와 진동을 느끼고, 두 몬스터가 바로 공격을 개시할 테니 작업은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다.

"됐어. 이제는 내가 가지를 붙들고 있을 테니까 내가 신호하면 나를 힘껏 밀어."

"설마 그렇게 탈출하시려는 겁니까?"

"방법이 그것밖에 없잖아."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탈출하죠? 다른 사람들이야 그런 방식으로 탈출시킨다고 하더라도……."

박상태도 머리가 아주 잘 돌아가는 학생이었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한다면 결국 마지막에는 자기 혼자만 남게 될 테니까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이었다.

"너희들 모두 이런 식으로 탈출할 필요는 없을 거야. 아마도 내가 땅바닥에 착지하면 저 괴물 녀석들이 그 진동을 알아차리고서 바로 나를 쫓아 올 테니까."

"그럼 저희들은 어디로 도망갑니까?"

"그야 일단은 반대편으로 달아난 다음에 나중에 다시 뭉쳐야지."

"어디에서 뭉치죠?"

"크게 우회해서 등골산 정상으로 와."

"예. 선배님."

"준비, 발사!"

휙!

영욱은 휘어졌던 참나무 가지가 펴지는 힘과 박상태가 힘껏 미는 힘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산의 높은 사면을 향해서 발사된 것이기는 하지만 지상 20미터쯤에서 벌어진 일이다 보니 높이 차이가 10미터 정도는 발생했다. 그러니 아무리 눈이라고는 하지만 착지할 때 요란한 소리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쿵. 다다다.

영욱은 몸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기계체조를 믿고서 벌인 일이었지만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중간에 중심을 잡기 위해서 버둥거리긴 했지만 아무튼 십여 미터를 날아가서 무사히 착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잔상수족의 초식을 시전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돌덩이와 나무뿌리만 먹고서 열심히 소화 중이던 몬스터들이 영욱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맹렬한 속도로 추격하기 시작했다.

퉤. 퉤. 퉤.

그뿐 아니라 자신들이 삼킨 것이 맹탕임을 깨닫고는 영욱을 향해서 대포알처럼 발사하기 시작했다. 

물속과 수면 위를 오가며 빠르게 유영하는 돌고래처럼 땅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를 반복하면서 아찔한 속도로 추격해왔다. 

으라차차.

하지만 영욱은 잔상수족은 물론이고 삼족속보, 풍차 돌리기, 조충우돌 초식을 적절하게 섞어서 지그재그로 달아나면서 통째로 삼켜지는 위기를 모면했다. 

직선주행 속도는 몬스터들이 훨씬 더 빠르니 이런 식으로 잔꾀를 피우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는 속도를 유지해야 가능한 도주이기 때문에 산 위로 오르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능선을 타고 달아나거나 산 아래로 방향을 잡아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영욱이 새로 조합한 구결들이 꽤나 큰 효용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기계체조의 성취가 올라갈수록 발생하는 생체전기의 전압과 전류량이 높고 많아져서 나노캡슐들의 역할들이 더욱더 커졌다. 

우다다다.

영욱은 마치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빠르게 달아났다. 영욱은 능선을 지나서 자신이 지나쳐왔던 품걸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물안봉 근처에 거대한 암석지대가 있음을 알고 있으니 그 점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몸으로 돌을 감아서 으스러뜨리긴 했지만 바위 째로 삼키거나 바위를 뚫고 지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포위되어서 죽을 뻔했으니 그 대가로 얻을 수 있는 정보도 있어야만 했다. 

이 엄청난 위력을 지닌 몬스터들이 설마 바위에 부딪쳐서 죽지야 않겠지만 그 틈을 이용해서 떼놓고 도망갈 기회가 생기기를 강력하게 희망했다.

목적지가 정해지자 영욱은 속도를 최대한으로 높이기 시작했다. 군대에서도 행군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당연히 포클레인으로 이동했다. 그래야 목적지에 도착해서 작업이 가능하니까.

그런데 전역 후에 보병보다도 더 빨빨거리면서 뛰어야 하니 기가 막혔다. 인간지사 새옹지마라더니 복과 화가 계속해서 뒤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기계체조를 포클레인이 아닌 몸으로도 수련했고, 특히 심화 동작은 격렬한 맨손체조와 닮아 있어서 영욱의 근육 상태와 심폐 능력은 이미 극상이었다. 게다가 나노캡슐의 놀라운 효용은 영욱의 몸을 한계 상황으로 몰고 갈수록 빛이 났다.

영욱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움직이면서 속도를 점점 더 높이기 시작했다. 속도를 높인다는 것의 의미는 목적지인 물안봉에 도착하기도 전에 탈진하게 되거나 겨우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속도를 유지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그러니 목숨을 걸고서 하는 도박인 셈이었다.

헉. 헉.

심장과 허파와 근육이 버텨준다고 해서 고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영욱은 주저앉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면서 달리는 속도를 점점 더 높였다. 

일직선으로만 달리니 추격하는 괴물들의 속도도 점점 더 빨라져서 불과 영욱의 10미터쯤 뒤에서 머리를 치켜세웠다 땅속으로 들어갔다 하는 것을 반복했다. 

괴물의 입김이 목덜미에서 느껴질 정도로 섬뜩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서로 간의 거리를 좀 더 좁혀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9미터, 8미터, 7미터, 6미터 그리고 5미터까지 좁혀지자 괴물은 땅속 자맥질을 멈추고는 입을 크게 벌린 채로 달리는 영욱을 통째로 삼키려고 했다.

계속해서 4미터, 3미터, 2미터, 1미터, 50센티미터, 10센티미터까지 간격이 좁혀졌다. 그리고는 결국 영욱을 덮쳤다. 하지만 영욱은 마지막 순간에 좌충우돌의 초식을 이용해서 간발의 차이로 피해버렸다.

쾅! 우지지직.

괴물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영욱이 사라지자 눈앞에 거대한 바위가 나타났다. 영욱에게 너무 몰입하고, 너무 가까이 붙은 탓에 전면에 바위가 나타난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커다란 바위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다. 그게 바로 영욱의 작전이었다.

헉! 헉!

"더, 더는 못 가."

영욱은 심장에 걸린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땅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거대한 몬스터가 정신을 잃거나 머리가 으스러져 죽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제법 충격이 컸는지 주둥이 부분에서 피와 비슷한 액체가 제법 흘러나오고, 가벼운 뇌진탕이라도 생겼는지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렸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영욱이 드러누워 있는 곳을 향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입을 크게 벌린 채로.

영욱은 심장을 너무 혹사시켜서 거의 심장마비 직전의 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니 이무기와도 비슷한 몬스터가 다가와도 손가락도 꿈쩍할 힘이 없었다.

'젠장! 작전은 성공했는데 괴물의 머리가 바위보다 강할 줄이야. 완전 돌대가리였잖아.'

농담이 아니라 몬스터의 앞을 가로막았던 그 겁 없는 바위는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런데 왜 한 마리만 쫓아온 거지? 그게 아니라 뒤에서 편하게 따라왔었군. 쳇! 기회주의자에게 먹히다니 체면이 말이 아니군.'

앞에서 추격하는 몬스터가 파둔 굴을 따라서 편하게 이동해 온 다른 녀석은 여차하면 찌꺼기라도 얻어먹을 심산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앞의 녀석이 커다란 바위와 들이받고는 잠시나마 비틀거리는 것을 보고서 이때다 싶어서 먹잇감을 가로채려고 앞의 몬스터를 우회해서 영욱을 덮쳐왔다. 영욱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쿠어어! 캐액!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선두의 몬스터가 즉각 응징에 나섰다. 

평소의 친분을 고려한다면 상대를 공격할 정도까지는 아닐 지도 모르겠지만 바위를 들이받아서 잔뜩 자존심이 상한 녀석은 얌체 녀석에게서 그 대가를 구해내려고 했다.

쿠어어!

선두의 몬스터가 너무 세게 물었는지 뒤따라왔던 얌체 몬스터도 화를 내면서 반격에 나섰다. 둘은 서로를 새끼줄처럼 배배 꼬더니 있는 힘을 다해서 서로를 조이기 시작했다. 물론 입은 상대를 물고서 놓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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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의 먹이가 되는 것과 심장마비의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영욱은 도망치는 대신 녀석들이 흘리는 피와 진액을 마시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는 운이 너무너무 좋아서 살아남았지만 저런 녀석들을 또 만나게 되면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다. 그러니 도망보다는 조금이라도 강해지는 것을 택하기로 했다.

"이 맛은……."

사방으로 흩날리는 녀석들의 피를 염동력으로 모아서 마셔보니 아주 익숙한 맛이었다. 그것은 바로 2QB 세상에서 먹은 적이 있는 거대한 지렁이들의 맛이었다.

썩 좋은 맛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미 경험이 있으니 오히려 마시기가 수월했다. 영욱은 기척을 최대한으로 감추는 한편 두 녀석이 서로를 쥐어짜는 바람에 넘쳐나는 피와 진액들을 대량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폐목, 명심좌, 악고, 정사신, 고치, 삼십육, 양수, 포곤륜, 좌우, 명천고, 앙수, 포곤륜, 좌우……."

물론 원활한 소화 흡수를 위해서 활인심방의 구결을 동원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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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르릉.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치열하게 서로를 감고서 쥐어짜던 두 몬스터는 어느새 땅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는 걸 보니 땅속에서도 여전히 싸우고 있는 듯했다.

"정말 지독한 토룡들이군. 겨우 먹이 하나 때문에 아직까지도 싸우고 있다니……."

영욱의 생각에는 자신을 삼켜본들 입가심거리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저렇게 사생결단을 내려고 드니 얼마나 지독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인지를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영욱은 도망치는 대신 두 녀석이 땅속으로 들어가면서 파놓은 굴 안으로 들어갔다. 집요하고도 지독한 성격들을 보니 도망쳐봐야 결국은 잡혀 먹힐 게 분명했다. 그러니 어부지리를 노려서 이번 기회에 두 녀석들을 확실하게 처리하려는 것이었다.

"사실 엄두가 나지도 않아. 하지만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어."

영욱은 지렁이들의 피 맛을 보는 순간 2QB 세상에 있는 대룡이 노해서 벌어진 일임을 직감했다. 밤이 되면 다시 돌아갈 텐데 그 사이를 못 참고 현실 세계에서 능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그러니 몬스터들의 목표는 지렁이들을 학살한 영욱과 은영일 것이고, 그것은 피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소 비관적인 판단일 수도 있지만 그게 가장 진실에 가까울 것 같았다. 그러니 영욱으로서는 더 이상 피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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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장난이 아니군."

두 몬스터 녀석들이 꽈배기가 되어서 몸부림을 친 흔적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처음에는 굴로 시작했는데 얼마나 거칠게 싸웠는지 거대한 지하 공동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놓고도 모자라서 아직도 몸으로 확장공사를 하고 있었다. 두 마리의 토룡들이 흘린 피가 내를 이루고 깊은 웅덩이를 형성하기조차 했다.

영욱은 그 깊은 웅덩이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서 몸을 담갔다. 이미 흙으로 오염되어서 입으로 먹을 수는 없으니 몸으로라도 흡수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상층부의 맑은 액체 부분은 입으로 마실 계획이었다.

활인심방은 그래도 꼴에 좌식도인법답게 모공毛孔을 통해서 외부의 기운을 흡수하는 묘용도 있었다. 물론 아주 미미한 효과지만 진한 토룡의 핏속이라서 그런지 결코 미미하지 않은 양의 기운이 흡수되었다.

두 마리가 싸우든지 말든지 영욱은 웅덩이에 고인 피의 상층부 액체를 마시고 몸으로는 쉴 새 없이 기운을 흡수했다. 그 지독하고 끈질긴 흡수는 거대한 토룡 두 마리가 동시에 숨을 거둘 때까지 계속되었다.

대룡의 초능력으로 2QB 세상과 현실 세계의 경계를 살짝 허물어뜨려서 넘어온 것이 바로 두 마리의 토룡들이었다. 그 높은 자존감 때문에 하찮은 먹잇감 하나를 놓고서 경쟁하다가 결국은 자멸해버린 것이다.

공간을 뒤틀어버린 대룡의 초능력은 영욱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영욱도 2QB 세상에서처럼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활인심방을 이용한 소화 흡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또한 시간의 흐름 역시 아주 빨랐다. 두 토룡이 싸운 시간과 영욱이 피를 흡수한 시간은 무려 일주일이었지만 현실 시간으로는 겨우 서너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길이 100미터에 달하던 괴물들이 지나친 출혈 때문에 쪼그라들어서 겨우 5미터 남짓이나 되었을 때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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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정말이지 지독한 녀석들이군."

영욱은 만일 자신이 그들의 근처에서 머물지 않았다면 둘의 싸움이 중도에서 중단되었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있으니 싸움에서 이긴 토룡 괴물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도록 피의 웅덩이 속에서 대기하는 걸로 보였던 듯했다.

그러니 서로가 공멸하는 그 순간까지도 자존심 때문에 싸움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게 영욱이 도망 대신 땅굴 속으로 기어들어간 이유였다. 

먹잇감이 옆에서 보고 있으면 도저히 싸움을 멈출 수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고, 그 판단이 정확했음이 무려 일주일 만에 결판이 난 것이다.

"뭐야? 이건?"

전리품을 챙기려고 했지만 애석하게도 남은 것은 토룡의 껍질뿐이었다. 원래 환형동물이니까 뼈가 있을 리 없다. 남은 것이라곤 바위보다도 강하고 질긴 가죽뿐이었다.

그런데 딱딱한 게 아니라 의외로 신축성이 매우 좋은 재질이었다. 그러니 천 배 이상으로 늘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영욱은 얻은 전리품을 얼른 챙겼다. 

등에 지고 있던 등산 배낭은 빨리 도망치기 위해서 팽개쳐두고 왔으니 그냥 스타킹처럼 둘둘 말아서 허리와 가슴에 걸쳐서 입고 가기로 했다. 달아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나뭇가지와 돌에 스쳐서 찢어졌고, 또 독한 피 속에 머물다 보니 옷이 삭아서 걸레가 다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둥이 부분도 좁은 편이고, 꼬리 부분은 막혀 있으니 칼에 다이아몬드 실드를 씌워서 낑낑거리며 잘라내야만 했다. 

실드의 성능이 꽤나 좋아진 것 같은데도 여전히 잘 썰리지 않는 걸 보니 엄청나게 질긴 재질이 분명했다. 아무튼 한참 동안 씨름을 한 끝에 결국은 네 군데를 모두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신축성이 좋으니 엉덩이까지 덮어도 움직이는 데는 불편이 전혀 없었다. 모양으로는 여자들이 목욕하고 나서 큰 수건을 몸에 두르고 나오는 것과 비슷하지만 흘러내릴 염려는 전혀 없었다.  

"제법 따뜻하잖아. 그렇다면……"

꼬리 쪽이라고 잘라낸 부분을 양쪽 발에 스타킹 대용으로 신고, 입 부분을 토시처럼 팔에 착용했다. 그랬더니 엄동설한의 찬바람에 노출되는 맨살 부분이 거의 사라졌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더니 토룡은 죽어서 영욱의 옷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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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자신의 도주로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 혹시라도 박상태 등이 그 흔적을 쫓아서 뒤따라올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노예들이 아니라 상당한 기운을 가진 무리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넌 누구냐?"

"피차 초면인데 말이 좀 짧은 것 같군요."

"어린 녀석이 겁이 없구나. 그럴 만한 실력이 있는지 어디 구경 좀 하자."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일행들 중에서 마치 장비를 연상케 하고, 멋진 구레나룻을 기른 중년의 남자가 다짜고짜 영욱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상대는 파공음을 낼 정도로 강하고 빠른 주먹질과 발길질로 영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실력이 있으면 모든 게 용서될 것 같은 분위기군. 좋아."

처음에는 피하기만 하던 영욱도 기계체조의 초식을 동원해서 본격적으로 중년 남자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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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는 장비처럼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영욱 역시 몇 시간 전의 영욱이 아니었다. 그러니 기본 동작만으로도 상대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흥이 좀 날 만하니까 말리는 사람이 생겼다.

"아저씨! 그만 두지 못해요?"

"이 녀석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보지 못했어?"

"그야 아저씨가 초면에 말을 함부로 하니까 그런 거잖아요."

"척 봐도 내가 한참 나이가 많잖아.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은 혼이 좀 나야해."

"그럼 혼자서 놀다 오세요. 우리들은 토룡의 흔적을 추적할 테니까요."

장비를 나무라는 사람은 영욱 또래의 대학생 같은데 제법 예쁜 여자였다. 그녀가 남긴 말은 두들겨 맞아도 장비를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다는 소리였다. 장비는 그 소리에 놀라서 하던 주먹질을 멈추었다.

영욱은 현실 세계에서도 상당한 힘을 발휘하는 드림헌터들이 떼를 지어서 몰려다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더구나 자신을 빈사 상태로 몰아넣었던 토룡들을 오히려 사냥하려는 자들 같아서 제 3의 눈까지 총동원해서 이들의 힘을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이 녀석이 흔적의 반대 방향에서 오고 있는데 궁금하지도 않아?"

"좋게 물어볼 기회를 아저씨가 날렸잖아요. 아저씨 같으면 대답하겠어요?"

"그럼 패서라도 입을 열게 만들면 되잖아."

"그 청년은 확실히 아저씨보다 강해요. 아직도 상대의 힘을 느끼지 못하겠어요?"

"웃기지 마라. 이런 약골쯤은 열 명이라도 이길 수 있어."

"그럼 천천히 오세요."

리더로 보이는 젊은 여자는 영욱에 대한 관심보다 토룡에 대한 관심이 더 큰 듯했다. 그래서 나머지 일행들을 이끌고 영욱이 이동해서 왔던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비도 혼자 남겨지는 것은 마뜩치 않은지 영욱과 싸우다말고 얼른 꽁무니를 뺐다. 그러면서도 한마디 남기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젠장! 너 운 좋은 줄 알아."

"대체 누가 운이 좋다는 겁니까?"

"어린놈의 삭신이 도무지 겁이 없구나."

"겁을 내야할 상대라면 벌써 고개를 조아렸을 겁니다. 제가 보기보다는 겁이 많거든요. 하하!"

"감히 나를 우습게 보다니 용서할 수 없다."

영욱의 도발에 장비는 일행들의 뒤를 따라가려던 것을 포기하고 다시 영욱에게로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오늘 세상 넓은 줄 알게 될 겁니다."

휙. 퍽. 컥.

"너, 나를 찼어? 너 이제 죽었어."

장비 중년 남자는 영욱에게 배를 한 번 걷어 채이고 나더니 그야말로 미쳐서 날뛰기 시작했다. 처음 공격에 비해서 서너 배는 족히 될 것 같은 강력한 공격력이었다.

"이 정도면 정말 죽이겠다는 소린데 저도 어쩔 수 없군요."

"이봐요! 그만두지 않으면 우리가 개입할 겁니다."

영욱이 공격의 강도를 올리며 받아치려고 하자 젊은 여자와 일행들이 다시 돌아와서 뾰족한 소리를 내더니 싸움에 개입할 자세를 취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네 명도 무기를 꺼내들었다. 자기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장비가 죽을 것 같다고 판단한 듯했다.

"활과 엽총으로 사람을 겨냥하다니 제정신들이 아니군요."

영욱은 활과 엽총들이 발사되더라도 죽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단 장비와 위치를 바꿔가면서 싸우는 중이니 쉽게 발사하지도 못할뿐더러 여차하면 장비를 제압해서 방패로 삼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피할 자신도 있었다. 그러니 영욱의 공격이 더 강력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아저씨를 다치게 하지 마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당신 아저씨가 미쳐서 날뛰는데 나보고 어쩌라고요?"

"다치지 않게 제압할 수 있잖아요."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젊은 여자가 애원하기 시작했다. 개입이 쉽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개입하면 오히려 피해가 더 클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애원이 장비를 자극하고 말았다.

"누가 제압당한다고 그래? 너 이제 죽었어."

"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사람이 아니라 강력한 마법사나 초능력자겠지."

"그래. 말 잘했다. 바인딩!"

"어? 내 몸이 왜 이래? 움직여지지가 않아. 살려줘!"

마법인지 초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인가가 영욱의 몸을 옥죄며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털보 장비에게도 숨겨둔 한 수가 있었던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발휘하는 초능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이러니 토룡을 사냥하겠다고 설친 것이다.

"흐흐흐! 이제 넌 죽었다. 어른을 대하는 예절이 뭔지를 오늘 확실하게 가르쳐주지."

아무튼 영욱이 비명 아닌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자 장비가 음산한 대사를 날리며 영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회가 있으면 개입하려고 했던 젊은 여자와 남자들도 무기를 내려놓고 관전 모드로 들어갔다. 장비가 유리해지니 싸움을 말리지 않고 구경이나 하려는 파렴치한들이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산적 어르신."

"감히 날 보고 산적이라니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 어디 맞고 나서도 그런 말이 나오나 두고 보자."

"내 몸이 이상해요."

퍽. 퍽.

두 사람의 대사와는 달리 두들겨 맞는 사람은 영욱이 아니라 장비 모습의 중년 남자였다. 피하면서 반격하는 것은 물론이고 엄살을 떨어대면서 상대의 약을 올려댔다.

"이 새끼가 비실거리면서도 쥐새끼처럼 피해?"

"제발 살려달라니까요?"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그럴 리가 있나요? 내 몸이 정말 이상해요."

"이상한 것은 오히려 나야. 바인딩 마법에 걸렸으니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꼼짝할 수 없어야 하는 건데……."

"그렇다면 거미줄에 걸린 것은 확실한데 내가 파리가 아니라 참새쯤 되는 모양이죠? 하지만 술에 취한 것처럼 걸음이 정말 이상해요."

사실 영욱으로서는 풍차돌리기와 좌충우돌의 초식을 사용해서야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니 장비가 발휘한 바인딩 마법이라는 것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 셈이다. 

하지만 기계체조의 위력이 더 대단해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거미줄 정도는 무시할 수도 있는 참새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나는 참새를 잡아먹는 무당거미다. 감히 나를 놀리려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개개비라도 되는 모양이죠."

개개비는 참새목에 속하는 여름 철새지만 참새보다는 훨씬 더 크다. 몸길이 18.5cm에 날개길이가 약 9cm이고, 강가나 호숫가 갈대밭에 살면서 파리, 나비, 메뚜기, 벌, 잠자리, 개구리 따위를 잡아먹는다. 물론 거미도 절대로 사양하지 않는다.

영욱은 상대의 마법이 자신을 옥죄는 것을 이용해서 모처럼 이족보행과 좌충우돌 등의 기본 동작 연습에 골몰했다. 처음 이족보행을 배웠을 때처럼 이리저리 넘어질 듯 비틀거렸지만 그 내용은 180도로 달랐다.

마치 취권처럼 상대의 공격 타이밍을 뺏거나 예상치도 않은 각도에서 잔상각과 잔상권을 날릴 수가 있었다. 그러니 상대가 대단한 실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속절없이 두들겨 맞고만 있는 것이다. 

영욱은 자신의 파워가 한 단계 이상 상승했음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가끔씩 실수로 상대의 공격을 허용해도 충격이 별로 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옷 대신 걸친 토룡의 가죽이 상당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린놈이 숨겨둔 실력이 있었구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지."

"고맙습니다. 다리가 풀려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사정을 봐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한 시간 정도를 더 싸우고 나서야 장비도 결국은 싸움을 포기했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긴 했지만 영욱을 상대로 모처럼 땀을 잘 흘렸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맷집이 좋아서 그런지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듯했다.

"이젠 끝났으니까 더 이상 엄살 부리지 마라. 그리고 나는 장비가 아니라 한극상이라고 한다. 나이는 오십 살이다."

"저는 박영욱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스물세 살입니다."

"우리는 드림헌터 겸 환수 사냥꾼들인데 너는 대체 뭐하는 녀석이냐?"

"저는 드림헌터 겸 대학생인데 겨울방학을 맞이해서 체력 단련을 하려고 강원도 횡단 산행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유화리라고 해요. 이분들은 홍수완, 박철권, 김선조, 엄천식이라고 해요."

한극상과의 통성명이 끝나자 리더인 젊은 여자도 인사를 하고 일행들을 소개했다. 총과 활을 겨누었던 사람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반갑습니다. 박영욱입니다. 이렇게 강한 분들을 만나기는 처음입니다."

"우리도 반가워요. 그런데 몸에 걸치고 있는 그 토룡피는 대체 어디서 난 거죠?"

유화리는 인사가 끝나자마자 영욱이 옷 대신 걸치고 있는 토룡 껍질에 관심을 보였다. 처음에는 그녀도 몰랐던 모양인데 한극상과의 싸움을 구경하면서 그 껍질이 충격을 줄여준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다.

"토룡피라면 이 지렁이 껍질을 말하는 건가요?"

"맞아요. 지렁이치고는 좀 큰 편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죠."

"저를 노리고 쫓아오다가 제 풀에 죽어버리기에 껍질이라도 챙겨왔죠."

"그걸 우리에게 넘기세요."

"내가 목숨을 걸고 싸워서 얻어낸 전리품인데 왜 화리 씨에게 넘겨야하는 거죠?"

유화리가 토룡의 흔적을 뒤쫓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토룡피를 탐내는 것도 깜짝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다짜고짜 내놓으라고 하니 영욱으로서도 순순히 응할 수는 없었다. 

"꼭 필요해서 그래요. 대신 대가를 치르겠어요."

영욱이 5대 1의 싸움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기세이자 화리는 자신이 놓친 부분이 있음을 깨닫고서 대가에 대한 부분을 뒤늦게 덧붙였다. 하지만 영욱으로서는 이미 빈정이 상한 후였다.

"돈을 주겠다는 건가요?"

"돈이 아니라 골드를 드리겠어요. 10골드."

"2QB 세상에서 통용된다는 그 골드 말인가요?"

"예. 아시겠지만 10억 정도에 해당하는 것이니까 그 정도면 만족하실 거예요."

"싫습니다. 그 녀석들을 직접 봤다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 겁니다."

현실 세계에서 뜬금없이 골드를 운운하니 영욱으로서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2QB 세상이라면 모르겠지만 현실 세계에서 골드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1골드가 1억이라고 말하던 상인 김산적의 말과 일치하기는 했지만 10억을 주겠다는 것과는 어감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게다가 고생한 걸 생각하자면 10억을 준다고 해도 팔고 싶지가 않았다.

"흔적으로 보아서는 길이가 대략 100미터에 이르는 녀석 같은데 아닌가요?"

"맞습니다. 크기를 아시니까 그 녀석들이 강하다는 것도 잘 아시겠군요."

"그 녀석들이라고요?"

"예. 두 마리였습니다."

"이상하네요? 걔들은 같이 다니는 놈들이 아닌데……."

화리는 영욱의 말에 깊은 의문을 제시했다. 토룡의 크기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상식과는 배치되는 이야기인 듯했다.

"그렇다면 연인 사이였나 보죠. 부부 사이였거나."

"대학생이라면서 토룡이 자웅동체雌雄同體라는 것도 몰라? 무식한 놈 같으니……."

영욱의 썰렁한 농담에 한극상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지렁이가 자웅동체인 것은 상식이지만 한극상은 그 이상을 알지 못하고서 하는 소리였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자웅동체라도 번식을 하기 위해서는 두 마리가 필요하답니다. 그러니 무식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아저씨 같은데요?"

"그게 무슨 억지야? 우길 걸 우겨야지. 이 무식한 놈아."

"책 좀 읽고서 이야기하세요. 지금 무식한 거 동네방네 자랑하시나……."

지렁이는 자웅동체지만 난소와 정소는 서로 다른 위치에 존재한다. 그리고 알과 정자가 동시에 성숙하는 일은 없다. 먼저 정자가 생기고 난 다음에 알이 생기므로 동일체 내의 동일생식선 안에서 수정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영욱의 말대로 두 마리의 개체가 교미해야만 수정이 가능하다.

"뭐라고? 무식하다고? 이놈이 혼이 덜나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아저씨! 영욱 씨의 말씀이 옳아요. 그러니 제발 그 입 좀 닥치세요."

"아, 알았어."

"그나마 조금 나은 분도 있었군요. 아무튼 두 마리였습니다. 그래서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요."

영욱의 말이 옳다고 한 화리조차도 번식을 위해서는 두 마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100%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한 마리도 버거울 텐데 혼자서 두 마리를 처리하셨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그렇다면 화리 씨는 한 마리 정도라면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다는 말로 들리군요. 제 말이 맞나요?"

"저 혼자가 아니라 저희 팀이 힘을 합치면 한 마리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죠. 그러니까 녀석의 흔적을 따라가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토룡의 사나운 성질을 보건데 마주치게 되면 죽이느냐 죽느냐 둘 중 하나로 결판날 것 같았다. 그러니 화리의 주장이 그저 허세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영욱으로서는 그 말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두 마리의 토룡이 양패구상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였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라면 한 마리가 아니라 반 마리라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화리 일행도 역시 마찬가지일 듯했다. 

왜냐면 자신이 화리 일행과 싸우면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막연한 자신감이 아니라 제 3의 눈을 동원해서 화리 일행의 힘을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인이 그렇다니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두 마리를 해치운 분이 그런 말을 하니까 기분이 좀 묘하네요. 설마 우리를 놀리는 말은 아니겠죠?"

"놀리다니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라서 한 마리도 버겁습니다."

"그것도 영욱 씨의 능력이니까 두 마리를 해치울 수 있었던 겁니다. 아무튼 두 마리라니까 이야기가 더 쉽겠군요. 한 마리의 토룡피면 아머로서 충분할 테니까 한 장은 저에게 파세요."

사려는 이유가 영욱처럼 아머로 이용하기 위함인 듯했다. 사실 영욱이 화리 일행의 총과 활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토룡피 덕분이기도 하니까 대단한 방어력을 지닌 아머가 분명했다.

"죄송합니다만 제 노예들이 셋이나 있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20골드를 드리겠어요."

"골드보다 현금으로 20억을 주실 수는 없나요?"

현금 20억이라면 거래할 수도 있다는 영욱의 말에 화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영욱으로서는 토룡피를 팔아서 20억을 벌 수 있다면 진소희와 결혼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해본 소리였을 뿐이다. 그만큼 20억이라는 숫자가 주는 느낌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1억으로 1골드를 사기도 힘든데 왜 그런 말을 하시죠? 설마 골드로 살 수 있는 초능력 보조용품들을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겠죠?"

"모릅니다. 뭐가 있는데요?"

"농담은 아니겠죠?"

"제가 그렇게 실없는 놈으로 보입니까?"

"아, 아닙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방어구와 초능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마법 아이템들입니다. 뭐든지 다 있으니 종류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법 아이템이라고요?"

"예. 현금으로는 살 수 없고, 골드로만 살 수 있죠."

이야기는 다시 2QB 세상에 관한 것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화리로서는 골드의 유용성을 주장하기 위함이지만 영욱으로서는 생뚱맞은 마법 아이템이라는 소리에 눈이 크게 떠졌다. 

아직 마법사의 존재 여부도 잘 모르고 있었는데 마법 아이템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법 아이템을 만드는 사람이 바로 마법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골드면 살 수 있나요?"

"허접한 것이라면 하나 정도 구입할 수 있을 겁니다. 솔직히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현금으로 20억을 주세요. 골드는 2QB 세상에서 직접 모으도록 할 테니까요."

"혹시 사기당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거라면 지금 골드를 보여드릴 수도 있어요."

화리는 영욱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누구라도 20억짜리 거래를 물물교환처럼 할 수는 없을 것이고, 게다가 영욱은 이런 거래가 아직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기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2QB 세상의 물건을 현실 세계에서도 볼 수 있나요?"

"영욱 씨가 경험했던 토룡 환수처럼 2QB 세상과 현실 세상에서 공히 실체를 가진 것들이 존재하죠. 그래서 골드가 골드인 거고요."

화리는 그럴 듯한 설명과 함께 금메달 크기의 골드를 주머니에서 꺼내들었다. 양쪽 세상에서 모두 존재할 수 있기에 화폐 기능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영욱은 선뜻 내키지 않았다. 2QB 세상에서도 골드를 본 적이 없으니 진짜라는 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멋지군요. 하지만 저로서는 현금이 더 급해요."

"영욱 씨가 원하신다면 현금으로 거래해야죠. 하지만 20억이라는 거금을 가지고 다닐 리도 없고, 이 험한 산 중에 은행이 있을 리 없으니 일단 하산하고 나서 다시 거래하도록 하죠."

"좋습니다. 등골산 정상 부근에 일행이 있으니 합류해서 데리고 하산할 테니까 나중에 두촌면 사무소 앞에서 만나기로 하지요."

화리가 현금 20억을 주고 거래에 응하겠다고 했지만 영욱은 일단 화리 일행을 떼놓기로 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본 다음 다시 결정할 계획이었다. 

토룡피 한 장으로 현금 20억이 생긴다면 결코 나쁘지 않은 거래로 여겨지지만 상대 입장에서 더 원하는 거래이다 보니 자신이 손해를 보는 거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리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아닙니다. 저희도 따라가겠습니다."

"왜요?"

"혹시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말이죠."

"제 마음이 어떻게 바뀐다는 거죠? 두 장은 필요하지 않다면서요? 혹시 제가 골드를 원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솔직히 말해서 둘 다입니다. 제 생각에는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을 구경할 기회가 생긴다면 마음이 돌아설 수도 있다고 봅니다."

도중에 영욱의 마음이 변해서 거래가 불발되는 것을 막을 계획까지도 포함되어 있으니 둘이 아니라 세 가지 목적인 듯했다. 그리고 여차하면 힘으로 빼앗을 수도 있을 테니 네 가지 목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같이 갑시다. 나도 그 마법 아이템이라는 게 뭔지 꼭 한 번 보고 싶군요."

"그리될 겁니다. 보아하니 토룡들만 넘어온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그럼 다른 환수들도 나타날 거라는 말인가요?"

"예. 만일 그 환수들이 영욱 씨를 노리고 왔다면 곧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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