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욱이 서운함을 토로하자 진소희는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영욱을 공격했다. 졸지에 사기꾼으로 몰린 영욱은 혈압이 올라서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사기라니? 말 다 했어?"
"인터넷에 널린 게 그 활인심방의 구결인데 그걸 10만 원이나 받겠다는데 사기가 아니면 뭐죠?"
진소희의 주장 역시 옳았다. 사실 영욱이 유료 강습을 한 것은 무리수였다. 하더라도 진소희가 없는 장소에서 해야만 했다. 물론 영욱도 나름대로 돈을 받으려는 이유가 있었다.
"너는 사금을 어떻게 캐는 줄 모르지?"
"여기서 갑자기 사금 이야기가 왜 나와요?"
"모래인지 금인지 구분할 수 없으니 캐고 싶어도 캘 수가 없을 거라는 말이야."
"엉터리 구결을 구하느라고 큰돈을 지불하더니 우리까지 그 멍청이 대열에 끌어들이려는 거군요. 하지만 나는 절대로 꼬리를 자를 수 없어요."
영욱의 선문답에 진소희 역시 선문답으로 화답했다. 꼬리 잘린 여우는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실수로 덫에 걸려서 꼬리를 잘린 여우가 동료들에게 꼬리 무용론을 부르짖어서 다들 꼬리를 자르도록 설득하는 내용인데 어느 누구도 꼬리를 자르지는 않았다.
옥석을 구분할 줄도 모르는 눈으로 활인심방에 대해서 잘못된 평가를 내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소리에 진소희는 영욱의 행동이 명백한 사기에다 자기합리화라고 주장하며 공격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누가 뭐래? 하지만 네가 내 쪽박을 깼으니까 내 도움을 바라지는 말라고."
"이제는 도와준다고 해도 내가 싫어요. 흥!"
박상태 등과는 달리 진소희는 영욱에게 굽히지 않았다. 사실 굽힐 이유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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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나는 좀 도와줘. 네 마리나 죽었는데도 도망가지 않으니 완전히 미친 멧돼지가 틀림없어."
역시 세 마리의 멧돼지에게 둘러싸여 사경을 헤매고 있던 은영이 구조 요청을 해왔다. 진소희와의 대화를 들었으니 구조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소리였다.
"숨이 끊어진 멧돼지는 아직 한 마리뿐이니까 도망갈 리가 없지."
"나도 10만 원을 줄 테니까 제발 좀 처리해줘. 응?"
"너는 처리비가 20만 원이야."
"나만 왜 차별 대우야?"
"그걸 몰라서 물어?"
"몰라."
"너를 공격하고 있는 멧돼지는 세 마리나 되잖아. 삼십만 원이 정가인데 깎아주는 것도 모르고 짜증이야."
세 마리를 합쳐도 큰 녀석 한 마리만큼도 못하니 깎아준다는 말은 과장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시비를 걸면 아예 판을 깨겠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음을 영리한 은영은 대번에 알아차렸다.
"알았어. 더러워서라도 내가 주고 만다."
"네가 그런 짓을 하고도 더럽다는 말이 나와? 둘이서 적반하장 사먹는 계라도 만들었어?"
"그건 오빠의 강습이 내게는 10만 원만큼의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야. 본인이 엉터리 강습을 한 것은 생각지도 않고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냐?"
은영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영욱의 강습이 매끄럽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영욱으로서도 여전히 할 말이 남아 있었다.
"그건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야. 너는 예전부터 나를 믿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나를 믿어야 내 말에 믿음이 가는 거야. 그러니까 믿음이 갈 리가 없겠지."
"오빠가 다른 박수무당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나까지 그 피해를 나눠야 해? 솔직히 그건 아니잖아."
"이런 답답한 중생을 보았나? 진짠지 가짠지 신통방통한 네 언니에게 전화해서 물어봐. 내 말은 도통 믿지도 않으면서 대체 왜 따라나선 거야?"
"더러워서 못 따라다니겠네. 잡아주지 않아도 되니까 여기는 관심 끄셔."
"그러지."
끄에엑! 꽥!
진소희와 최은영은 자체적으로 멧돼지를 해결해버렸다. 죽일 정도는 아니지만 쫓아버릴 정도의 실력 정도는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약한 척하고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실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함인 듯했다. 그것은 뭔가 좋지 않은 저의를 가지고 있거나 영욱을 동료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일종의 방증傍證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푼돈을 아끼려다가 몸보신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활인심방의 구결이 없거나 있더라도 그 효과를 믿지 않으니 많은 피를 마시고 흡수할 수는 없겠지만 강해질 기회를 놓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좀 틀어지긴 했지만 멧돼지 고기 정도는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듯했다. 하지만 영욱은 수컷 멧돼지를 제외한 다른 멧돼지들을 죽이지 않았다.
세 노예들이 배가 터질 정도로 피를 빨고 나자 두 귀와 꼬리를 잘라내고는 그냥 내버려두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죽은척하고 있던 녀석들은 총알같이 달아나버렸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것도 녀석들의 도주를 막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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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자신들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은영이 영욱에게 괜한 지청구를 늘어놓았다.
"왜 안 죽였어? 당장 저녁에 먹을 고기는 어떡하고?"
"큰 녀석만 해도 충분한데 뭘 욕심을 부리고 그래?"
"그 녀석은 수컷 노린내가 진동해서 싫어."
"싫으면 먹지 마. 그리고 누가 공짜로 나눠준데?"
"줘도 안 먹어. 치사하게 먹을 것을 가지고……."
"누가 치사하다고 그래? 혹시 저 아세요?"
영욱은 두 여자들에게 치사하게 굴기로 작정한 듯했다.
아무튼 영욱은 강원도의 농촌들이 몇 달 전부터 고라니를 잡는 엽사에게 1마리당 5만 원의 포상금을 지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멧돼지는 8만 원인데 포상금은 고라니의 양쪽 귀를 모두 잘라서 제시해야 지급하고, 멧돼지는 귀와 꼬리를 제출해야 한다. 그래서 노예들을 도와주면서 귀와 꼬리는 자신이 챙겼던 것이다.
그리고 영욱이 잡은 살인멧돼지는 포상금이 무려 200만 원이나 붙어 있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 녀석임을 증명해야 하니까 통째로 가지고 가서 보여 주어야 포상금을 지급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영욱은 처음부터 은영에게 고기를 나눠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피를 실컷 마셔서 배가 전혀 고프지 않으니까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침낭과 등에 짊어진 배낭만 해도 무거운데 돼지고기를 운반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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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는 일행의 뒤쪽에서 처져 걸으면서 갑자기 180도로 달라져버린 영욱의 태도를 두고 숙의에 들어갔다.
"언니, 오빠가 갑자기 돌아버린 것 같은데 어떡하죠?"
"그러게. 우리가 좀 심했나?"
"전에 사귈 때에도 그랬지만 남자가 좀스러운 면이 있어요."
"아무튼 완전히 삐친 것 같은데, 어떡하지?"
"그렇다고 강습료라고 쓰고서 삥이라고 읽어야 하는 10만 원을 헌납할 수는 없잖아요. 솔직히 10만 원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사기당하는 줄 뻔히 알면서 어떻게 줘요? 쪽팔리게."
"문제는 영욱 선배 본인이 활인심방의 효과가 꽤나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야. 그리고 생각보다 뒤끝이 오래 가는 타입인 걸 몰랐다는 거야."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성격이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이제 어떻게 할 거죠?"
"어쩌겠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진소희로서는 최악의 경우 여행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가뜩이나 첫 만남부터 좋지가 않았는데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절이 싫지 않으면 어떡하죠?"
"그럼 숙이고서라도 머물러야지."
"나야 우리 언니의 점쾌에 따라서 같이 움직여야 하지만 대체 언니는 왜 따라나선 거죠?"
"너도 알다시피 내 애인 배경태가 영욱 선배 때문에 떠났잖아. 그러니까 남자라면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냐?"
은영도 떠날 의사가 없고 진소희 역시 억지를 쓰는 걸 보니 떠날 의사가 전혀 없는 듯했다. 아무튼 진소희의 억지주장에 그 광경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있었던 은영으로서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언니가 그 사람의 급소를 가격한 게 아니던가요?"
"어머나, 보았니?"
"그 동영상을 제가 찍은 줄 몰랐어요?"
"그, 그랬었구나. 하지만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배경태 그 자식은 영욱 선배의 노예가 되었을 지도 몰라. 다 좋은데 간이 워낙 작아서 말이야."
"오빠의 노예가 되는 게 뭐가 어때서요? 혹시 오빠와의 관계가 불편할까봐 일부러 제거한 거예요?"
"배경태와 결혼하면 전부 다 내 재산이 되는데, 그날의 분위기로 봐서는 영욱 선배에게로 몽땅 넘어갈 공산이 커져서 일단은 막고 봐야 했어. 내가 좀 강하게 걷어차긴 했지만, 그렇게 쉽게 고자가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영욱으로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던 내용의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었다. 배경태가 욕을 해서 화가 난 것이 아니라 겁먹은 배경태가 자칫 영욱에게 진짜로 굴복해서 노예라도 될까봐 판을 깬 것이었다.
어떤 게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자들의 생각과 남자인 영욱의 생각은 같은 일을 겪고서도 스토리 자체가 달랐다. 아무튼 불편한 진실이었다.
"언니의 살인적인 발길질에 걷어차이고 살아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 아닌가요?"
"아무튼 돈 많고 잘 생긴 애인이 영욱 선배 탓에 떠났으니까 따라다니면서 뭐라도 대가를 구해야지. 안 그래?"
"하지만 대가를 구하려는 여정치고는 너무 험한 거 아닌가요? 게다가 오빠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건 좀 곤란하지 않아요? 요즘 들어서 잘나가고 있는데 말이죠."
"어차피 영욱 씨와 신혼여행을 함께 떠날 생각은 없으니까 조금 불편해도 어쩔 수 없겠지."
은영은 진소희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했고, 진소희는 영욱의 무책임을 성토하기만 했다. 하지만 두 여자는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 자체가 낯설기만 한 듯했다.
강원대에서 가장 예쁜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영욱의 마음이 뜨거운 여름날 아이스크림 녹듯이 녹을 줄 알았는데 겨우 그 정도의 일로 찬바람이 쌩쌩 불어 닥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기계체조 초식을 가르쳐주고 그래요?"
"그게 동작을 모방한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건 줄 알아? 너도 잘 알잖아?"
"그럼 약 올리려고 그런 거였군요."
"내가 그 사람보다는 훨씬 더 선배라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거였지. 이미 파문당한 사람에게서 선배 소리를 듣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모방치고는 꽤 그럴듯하게 보이던데요? 멧돼지를 잡을 때에도 잔상권과 잔상각의 초식을 사용한 거 아니었어요?"
"사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그럴 듯했어. 하지만 구결이 없는 단순 동작은 앙꼬 없는 찐빵이나 다를 바 없어. 너도 잘 알면서 그래."
둘의 이야기가 점점 더 야릇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원래부터 잘 알고 있는 사이인 듯했고, 기계체조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거기까지는 배우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혹시 활인심방의 구결로도 대체가 가능한 것은 아니겠죠?"
"아무 걸로나 대체가 가능하다면 그게 무슨 구결이야?"
"하지만 언니도 숙달된 몸짓에 비해서 별로 큰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한 것 같던데요?"
"너 역시 진짜 실력을 숨기는 것 같던데 그런 말을 꼭 해야겠어?"
"호호호! 저는 진짜 구결의 위력이 궁금해서 그랬어요. 가짜 구결로도 호그질라를 잡을 정도니까 진짜 구결을 가진 언니의 실력은 어떨지 궁금하지 않겠어요?"
둘은 서로 웃으면서 비수를 겨누는 식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갔다. 진소희는 아직도 실력을 다 드러내지 않았고, 은영 역시 그렇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실력을 숨기는 것이 중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진짜 구결로도 호그질라는 못 잡아. 사실 그게 이상해서 따라나선 거야. 너에게도 진짜에 가까운 구결이 있는데 자꾸만 딴소리 할래?"
"그렇다면 진짜 구결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 구결이 진짜라는 소리잖아요."
"그 정도까지는 아냐. 만일 영욱 씨가 진짜 구결을 안다면 그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진짜 그리고 진짜에 가까운 구결 그리고 가짜 구결이라는 구분 자체가 다양한 구결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것은 효율의 크기에 따른 구분일 뿐 진짜와 가짜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언니가 훨씬 더 선배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죠?"
"그야 나는 미용체조 수준으로 건성건성 수련했으니까 명백히 한계가 있지. 포클레인도 몰 줄도 모르는데 기계체조가 어떻게 늘겠어?"
"그런 건가요?"
"그에 반해서 영욱 씨는 목숨 걸고 수련했으니까 성과가 더 좋을 수밖에. 그리고 너도 선배잖아?"
"나는 정말 미용체조로도 수련하지 않았으니까 예외로 해주세요. 아무튼 언니도 오빠에 대해 연구할 게 있어서 당장 떠날 생각은 없다는 거군요."
"그래. 우린 그냥 라면이나 끓여먹기로 하자."
"그러죠. 호호호!"
두 미녀는 아무도 듣지 못하는 줄 알고 절반의 속내를 드러냈지만 선두에서 걸어가고 있는 영욱의 귀가 아주 밝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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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산의 높이는 1,051m이니까 그리 높은 산은 아니다. 산 이름인 가리는 '단으로 묶은 곡식이나 땔나무 따위를 차곡차곡 쌓아둔 큰 더미'를 뜻하는 순우리말로서, 산봉우리가 노적가리처럼 고깔 모양으로 생긴 데서 유래한다.
태백산맥의 일부를 이루고, 제 1봉 남쪽에서 홍천강이 발원하여 북한강의 지류인 소양강의 수원水源을 이룬다. 능선은 완만한 편이나 정상 일대는 좁은 협곡을 사이에 둔 3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험하고 가파른 편이다.
강원 제 1의 전망대라고 할 만큼 조망이 뛰어나서 소양호를 비롯하여 북쪽으로 향로봉, 설악산, 오대산 등의 고산준령이 한 눈에 보인다.
북쪽 산록은 소양호와 이어져 있고, 동쪽 산록에는 홍천 광산이 있다. 산기슭에는 숲이 우거져 있고 갖가지 기암괴석이 즐비하며, 산 정상과 계곡에는 참나무가 주종을 이루며 자라고 있다.
가루 칡이 많이 나기도 해서 가리산의 가리는 가루를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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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적가리 모양의 가리산 정상에 올라온 일행은 주변의 경치 구경은 하지도 않은 채 곧바로 동쪽 사면을 따라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가하게 경치 구경이나 하려고 나선 겨울 산행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두 여자와 영욱 사이의 냉랭한 기운이 추운 겨울을 더욱더 삭막하게 만들고 있었다.
멧돼지 피로 포식飽食한 세 노예들은 이동 중에도 열심히 활인심방의 구결을 외우면서 소화 흡수에 여념이 없었다. 영욱 역시 마음이 불편한 중에도 활인심방과 기계체조의 수련에 매진했다.
전에는 기계체조에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거의 반반 정도로 활인심방의 수련에도 시간과 정신력을 투자했다.
원래는 앉아서 수련하는 좌식도인법이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기만 하면 움직이는 중이나 기계체조의 수련 중에도 별다른 무리 없이 곁들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니 굳이 따로 떼놓고 수련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영욱이 새로 만든 기계체조의 구결이 그러한 수련을 동시에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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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그질라의 출현으로 오늘의 액땜이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강력한 제 3의 눈을 가진 영욱이 거창한 2부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발견했다.
"선두 정지! 전방에서 뭔가가 접근하고 있다."
"예. 선배님. 그런데 뭐죠?"
"나도 몰라. 하지만 멧돼지들의 공격도 경험해 봤으니 뭐가 오든지 무슨 문제겠어?"
말은 대수롭지 않게 했지만 영욱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것의 정체를 느낄 수 있지만 2QB 세상도 아닌 현실 세계에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나콘다보다도 최소 열 배는 큰 뱀 같은데 이 겨울에 무슨 요지경이지? 그것도 무려 두 마리씩이나…….'
영욱은 2QB 세상에서 삼켰던 지렁이들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대룡에 대한 생각까지도 함께 떠올렸다. 그 실물을 본 적은 없지만 그 대룡의 영향력이 이곳 현실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2QB 세상에서 얻은 힘을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니 반대의 경우지만 대룡이 그러지 못한다는 보장은 결코 없다.
<비몽사몽>에 의하면 두 세계는 아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알게 모르게 서로의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적혀 있다.
엄청난 크기를 가진 오징어나 문어들이 가끔씩이나마 발견되고, 실제로 중생대에는 공룡들이 살았던 곳이 바로 현실 세상이다. 그러니 아파트보다 큰 녀석들이 날아다닌다고 해도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지금 접근하는 녀석들은 길이가 무려 100미터에 이르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몸통 두께는 무려 5미터를 넘어섰다. 게다가 땅위가 아니라 땅속을 뚫고서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토룡인가?"
"설마 대룡의 동생이라도 된다는 거야?"
"너하고는 말하고 싶지 않아. 같이 지렁이를 나눠먹은 사실도 기분 나쁘니까."
은영이 다가와서 살짝 말을 걸었지만 영욱은 냉정하게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눌 만큼 그리 여유로운 상황도 아니었다.
"오빠, 이제 화 풀어. 생각해 보니까 내가 경솔했어. 후배들 앞에서 오빠의 입장도 있는데 우리 둘이 있을 때처럼 너무 투정만 부린 것 같아. 미안."
"저도 사과할게요. 영욱 씨."
"지금은 위급 상황이니까 일단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지. 접근하고 있는 녀석은 정말 거대한 괴물이야. 어쩌면 대룡의 현신일수도 있어."
진소희까지 용서를 구했지만 영욱으로서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얼른 분위기를 바꾸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게 낫지 않아?"
"아주 빠르지는 않지만 우리 속도보다는 빨라. 게다가 직선으로 이동이 가능한 것 같으니까 도망쳐 봐야 얼마 가지도 못해."
"그럼 대적할 방법이라도 있나요?"
"여긴 참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데다 칡뿌리도 많고 바위도 아주 많은 곳이니까 녀석이 뚫고 올라오기가 불편할 지도 몰라."
영욱은 도망치는 대신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기로 했다. 땅속을 통해서 이동하는 녀석들이니 실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곳에서 싸우려는 것이었다.
"요행을 바라는 건가요?"
"싸움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운이지. 어차피 인생은 운이 칠이고 실력이 삼이야."
"어디쯤 오고 있어요?"
"벌써 50미터 전방에 도착해서 멈추어 섰어. 내 생각대로 이곳으로 들어오기는 좀 그런가봐."
진소희와는 아직도 말을 섞기가 싫었지만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니 더 이상 내치지는 못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박상태 등도 들어야 하는 내용이니까 마지못해서 하는 대답이었다.
"우리가 이동하면 꿀꺽 삼키려고 대기하는 것일 수도 있겠군요."
"그 짐작이 정답인 것 같아."
"그럼 여기서 밤을 샐 건가요?"
"그러는 게 더 안전할 수도 있겠지만 여긴 땅바닥이 울퉁불퉁해서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아. 비트를 파기에도 지랄 같은 곳이고……."
그냥 여기서 잘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영욱은 얼른 생각을 바꾸었다. 진소희의 의견대로는 움직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곳을 벗어나실 건대요?"
"그야 뛰어야겠지."
"땅속의 괴물이 우리보다 빠르다면서요?"
"그러긴 하지만 우린 여섯이잖아. 여섯 방향으로 분산해서 도망치면 둘만 당해도 될 거야. 그야말로 복불복이지."
"그게 방법이에요? 전에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더니 이제 그런 말은 쏙 들어갔네요."
"동료일 때나 뭉치는 거지.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뭉치면 한 입에 몰살당하고 말 거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통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솔직히 포탄이 날아오고 수류탄이 터지는데 뭉치면 그야말로 깨끗하게 몰살당하고 만다. 영욱은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미안하지만 나도 뒤끝이 좀 있는 편이라서 솔직히 아직은 동료로 느껴지지가 않아. 그리고 네 사과를 받아들인 적도 없고……."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응. 더 들어."
포위를 당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영욱은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영욱의 오산이었다. 왜냐면 가리산 자체가 나무가 무성하고 돌들이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나무뿌리와 바위가 성가셔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두두둑.
거대한 뱀인지 지렁인지 아니면 용인지 아직도 헷갈리는 몬스터의 공격은 전혀 예상 밖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땅 위로 몸의 절반을 드러낸 다음 입을 크게 벌려서 삼키려고 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뻐벅.
둥글게 포위하고 있던 형태에서 똬리를 틀면서 영욱 일행을 조여오기 시작한 것이다. 참나무들의 굳건한 뿌리가 수수깡처럼 부러지면서 사방으로 넘어지는 모습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후두두둑.
참나무들은 뿌리째 뽑혀서 날아가고 이윽고 바위들마저도 공깃돌처럼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뿌리째 뽑혀 나오더니 괴물들이 조이는 중심을 향해서 일제히 몰려들었다. 바로 영욱 일행이 서있는 곳이었다.
"뭐야? 이런 괴물을 봤나?"
이빨이 없는 닭이 모이를 분쇄하기 위해서 모래나 돌조각과 함께 갈아버리는 것과 다른 바가 없었다. 거대한 괴물들은 바위들을 이용해서 일행들을 짓이겨 버리려고 했다.
"위로 올라가! 어서!"
넓은 지역을 포위하고서 조이니 그 압력에 의해서 가운데 부분이 융기되어 거대한 묏등처럼 부풀어 올랐다. 영욱 일행은 괴물의 조임을 피하기 위해서 높은 곳으로 뛰어올랐다. 거대한 바위 맷돌에 의해 짓이겨지고 갈리지 않으려면 그 방법뿐이었다.
하지만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두 마리가 교대로 융기된 부분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마치 숙련된 목부가 젖소의 젖꼭지를 안쪽에서부터 순차적으로 눌러서 우유를 짜는 것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만일 이 상황이 2QB 세상에서 벌어지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대응이 가능하겠지만 이곳은 현실 세계였다. 산사태보다도 더 강력하고 피할 곳이라고는 하늘 밖에 없으니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뭐해? 나무 위로 올라가."
"소용없어요. 바위도 부서져서 자갈이 되는 마당에 나무가 무슨 소용이에요?"
"소희, 너보고 한 이야기가 아냐. 모두 저 나무 위로 올라가. 어서!"
"예. 선배님."
영욱은 중심점에 해당되는 곳에 위치한 나무를 가리키며 자신의 노예들을 몰아세웠다.
아무리 잘 조인다고 해도 괴물의 몸 두께가 있으니 어느 정도는 한계가 있을 거라고 보았다. 그리고 높은 나무가 부러진다면 옆으로 넘어질 때 탈출의 기회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 자체로 낙상을 당할 높이겠지만 영욱 일행들은 이미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영욱과 박상태 등이 나무를 타고 오르자 은영과 진소희도 어쩔 수 없이 기어올라야 했다. 침몰하는 타이타닉 호에서 뻔히 다 죽는 줄은 알지만 조금이라도 더 늦게 죽기 위해서 높은 곳으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사람들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영욱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나무 꼭대기로 도망친 것만은 아니었다. 영욱이 전기장으로 녀석들을 느끼듯이 녀석들은 진동을 통해서 영욱 일행의 위치를 느낀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점을 이용해서 아주 어설픈 실드나마 치려고 노력했다.
물리적 방어력은 형편없지만 진동이 전달되는 것을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진공眞空을 포함한 실드였기 때문이다.
진동振動이라는 것은 적당한 매질이 있어야만 전달이 가능하다는 것을 책에서 읽었으니 그것을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빛처럼 진공의 공간에서도 이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이 내는 소리나 기척이 진공의 벽을 뚫고 나가지는 못할 것이라 믿었다. 그 믿음이 결국 빛을 발하고 말았다.
두 마리의 거대한 몬스터가 그 무식하고 강렬한 조임을 갑자기 멈춘 것이었다. 사람 여섯 명이 내는 기척은 물론이고 심장 박동마저도 사라졌으니 이미 바위 맷돌에 의해 분쇄되어 죽었다고 판단한 듯했다.
두 녀석은 자갈이나 나무부스러기로 변한 작은 동산을 거대한 입을 벌려서 진공청소기처럼 흡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소화를 시키기 위해서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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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하죠?"
이번에는 은영이 입을 열었다. 뾰족한 수는 없지만 일단 죽음은 모면했으니 나무 위로 피해서 무슨 소용이 있냐고 주장했던 진소희로서는 입을 열 염치가 없었기 때문에 대변인으로 나선 것이다.
"어떡하긴? 달아나야지."
"어떻게요?"
"포위되어 있으니까 날아서 탈출하는 수밖에 없겠지."
아직도 영욱의 대답이 막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2QB 세상도 아닌 현실 세계에서 이런 일에 직면했으니 맞서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달아나는 게 유일한 살 길이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포위된 상황이니 영욱이라고 해서 뾰족한 수를 가지고 있을 리 없는데, 은영의 말이 해결책을 내놓으라는 독촉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매번 날로 먹으려고 드니 퉁명스러운 대답이 튀어나오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설마 플라이 마법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겠지?"
"내 능력을 빤히 알면서 마법이라는 농담이 나와?"
"먼저 날아야 한다고 이야기한 사람은 오빠야. 자꾸만 까칠하게 굴 거야?"
"은영의 말이 맞아요. 적은 우리가 아니라 괴물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구분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언제 너희들을 적이라고 했어?"
영욱은 탈출 방법을 강구하기도 바쁜데 번갈아가면서 자꾸 말을 걸어오는 두 여자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여전히 대접받기를 원하는 두 여자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탈출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내지도 못하면서 영욱이 내리는 지시에 대해서는 매번 토를 달려고 하니 이야기가 곱게 나갈 리 없었다.
"좋아요. 마법이 없으면 날개라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