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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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일행들에게도 선심 아닌 선심을 쓰기로 했다. 그것은 자신에게 눈알을 하나 더 빼준 박상태의 상태가 더욱 좋아졌기 때문이다.

"상태야!"

"예. 선배님."

"눈알을 몇 개나 더 뽑을 수 있지?"

"최대한으로 뽑아낸다면 다섯 개까지도 가능합니다."

박상태도 영욱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반색을 했다. 그로서는 아직도 사혈瀉血의 필요성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냥 피를 뽑아 버려서는 다시 돌아와 버리기 때문에 아프기만 하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리하지 말고 네 속이 편해질 정도로만 뽑는다면?"

"두 갭니다. 선배님."

"그렇다면 호진과 승언에게 하나씩 뽑아주도록 해라."

"쟤들의 지금 수준으로는 속이 많이 부대끼지 않을까요?"

"발을 딛는데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테니까 기계체조 역시 좀 더 나아질 거다. 그리되면 조금 더 부대껴도 견딜 만하지 않겠어?"

영욱도 구결이 없던 시절에 박상태의 눈알을 삼키고 흡수했으니 불가능하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다만 쉽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러한 도전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영욱으로서는 노예들의 힘을 키우는 게 곧 자신의 힘이 되는 상황이니까 아낄 이유가 없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잠깐! 뒤로 가서 해. 저 여자들도 욕심 부리면 너만 곤란하니까."

"예. 선배님."

은영과 진소희에게 나눠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녀들은 벌써 상당한 고수이기도 하지만 그녀들의 힘이 곧 영욱의 힘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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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이리로 와."

"예. 선배."

박상태는 호진과 승언을 데리고 일행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꿀꺽. 꿀꺽.

그리고는 자신의 눈알 두 개를 빼내서 삼키게 했다. 호진과 승언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는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감동스러운 표정으로 눈알을 삼키고는 기계체조를 운용하면서 소화 흡수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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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하게 저희들끼리만 나눠먹고 난리야."

"그러게요. 언니."

하지만 뭐라도 얻어먹을 게 없나하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두 여자가 그러한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두 여자는 영욱에게 들으라는 듯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징그러운 걸 먹을 수 있어?"

"피도 마시고 지렁이도 먹는데 그깟 눈알이 문제겠어?"

"하지만 사람의 눈알이잖아."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지금 누굴 바보로 아시나?"

둘의 반발은 예상보다 훨씬 더 강했다. 최근 고분고분하게 굴던 은영마저도 툴툴거리니 영욱으로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손해가 되는 일은 아니다. 맞서 싸울 적은 아니니까. 

박상태에게 무리가 가지 않는다는 조건이 따르지만 다섯 개를 언급했으니 두 개를 나눠주어도 하나가 남는 셈이니 무리한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았다.

"나중에 상태에게 여력이 생기면 나눠주도록 할게."

"여력은 지금도 충분히 있는 것 같은데요?"

"상태 말로는 두 개가 적당하다는데?"

"제가 보기에는 두 개는 더 뽑아야 속이 편안할 것 같은데요."

특히 진소희는 더 집요하게 굴었다. 강해질 수 있는 거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듯했다. 영욱도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가르침이 있으니 박절하게 굴기도 어려웠다.

"그런가? 상태, 너도 들었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선배님."

"부탁해."

현실 세계와 2QB 세상은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두 여자는 주먹 크기의 눈알을 눈도 꿈쩍하지 않고 삼켜 버렸다. 그것이 진짜 눈알이 아님을 안다고 해도 결코 쉽지 않은 행동임이 분명했다. 그만큼이나 두 여자의 강해지려는 욕구가 강하다는 것이다.

누군들 강해지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소화 흡수에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드림헌터들은 상대를 어느 정도 수준까지 굴복시키기 전에는 신체의 일부를 뜯어먹는 것도 불가능하다. 

또한 굴복시키고 나서 뜯어먹어도 완벽한 소화 흡수는 어렵다. 그 증거가 바로 박상태인데 무려 200명 이상을 뜯어먹고도 영욱을 당해내지 못해서 결국은 노예가 되어 버렸다. 그만큼 남의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와 같은 기계체조가 그러한 문제점을 어느 정도는 해결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아주 소량만 흡수가 가능하고, 소화율도 떨어지고, 심지어 몸에서 악취가 발생한다는 게 문제지만 적어도 그냥 삼킨 것보다는 효율이 나았다.

그런데 그 금쪽같은 기계체조가 마구 퍼져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욱의 조장助長 하에 박상태, 김호진, 윤승언 그리고 최은영까지도 진중권의 기계체조를 훔쳐 배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은영은 이미 알고 있는 듯했지만.

더 큰 문제는 진중권의 딸 진소희마저도 이 퍼주기 자선행사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로서는 구결이 없는 기계체조는 그저 태권도와 다를 바가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아니면 태극권이든지.

영욱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에 아낌없이 베푸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영욱의 입장에서는 박상태와 김호진 그리고 윤승언이 자신의 노예들이니 어느 정도의 구결까지는 제공할 용의도 있었다.

무조건 주인에게로 귀속되는 노예라고는 하지만 주인보다 강해진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진짜로 효과가 큰 구결을 알려줄 생각은 없다.

그리고 알려줘도 꼭 자신과 같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른데 똑같은 구결로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영욱 자신은 비싼 돈을 치르고 구한 구결이기에 더욱더 공을 들여서 수련했지만 공짜로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노예들이 활인심방의 구결을 안다고 해서 같은 결과를 얻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활인심방의 구결이야 인터넷을 검색하면 얼마든지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니까.

게다가 활인심방의 수련이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오르기 전에는 그저 공염불에 가까울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사를 같이할 동료들이니 활인심방의 수련법과 구결을 제공하느냐 마느냐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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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의 고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혀 고려할 가치도 없는 은영에게마저도 활인심방의 구결을 제공하느냐 마느냐하는 고민이 생겨난 것이다. 이미 고수인 듯했지만 진소희처럼 구결을 가지고 있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애인 사이에다 결혼할 사이라면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옛날 애인일 뿐이니 그런 고민을 할 이유가 없는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스럽다는 것이다.

또한 활인심방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계체조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활인심방의 수련과 적당한 편법의 활용은 기계체조의 위력과 수련 효율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중권의 제자로 있는 상태라면 활인심방의 구결을 알려주는 것도 불가능하겠지만 파문당한 이상 그런 제한은 완전히 사라졌다. 

물론 아무에게나 퍼뜨려서 한때나마 사부였던 진중권의 노여움을 사게 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정식 구결을 배운 적이 없는 기계체조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보았다.

사실 영욱이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직은 은영과 진소희를 여자로서의 매력을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하룻밤 같이 자면서 어느새 정이 들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강해지겠다는 같은 목적으로 여행을 하는 사이다 보니 어느새 동료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사실 여행 첫날 2QB 세상에서 당한 공격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갈수록 첩첩산중일 가능성이 더 높다. 왜냐면 넘어야할 산들이 점점 더 험해지니까.

만일 갈수록 태산이 될 거라면 고작 활인심방의 구결 따위를 아낄 이유가 없었다. 거듭되는 이야기지만 인터넷만 검색해도 알 수 있는 것이니 아끼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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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서 그냥 듣기만 해. 내가 상태 너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박수무당을 찾아갔지 뭐야."

"정말이십니까? 선배님."

"듣기만 하라니까? 별 뾰족한 내용을 듣지는 못했지만 나로서는 큰 도움이 되는 이야기였어."

"그, 그게 뭐죠?"

"듣기만 하라니까."

"예. 선배님."

"그래서 큰 감명을 받은 내가 자발적으로 복채로 50만 원이나 내놓았더니 그 박수무당이 너무 많이 받는다 싶었는지 덤으로 활인심방이라는 도인술의 구결과 수련법을 알려주더라."

"오빠! 우리 언니가 훨씬 더 용하다고 했잖아."

은영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이야기가 공개되자 다들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복채 50만 원이라는 소리에 은영은 뾰족한 소리를 내면서 따지고 들었다.

"네 언니가 용한지를 내가 어떻게 알아?"

"우리 언니가 오빠를 물고 늘어지라고 해서 내가 이러는 거잖아. 그러니까 아주 용하다고 봐야지."

"그럼 네 언니도 활인심방을 알아?"

"아는지 모르는지 나는 몰라."

모른다는 소리도 아니고 안다는 소리도 아니었다. 결정적인 순간이면 이런 식으로 한 발 빼는 것이 은영의 특기인 셈이다.

"그럼 입 닥치고 있어. 아무튼 내게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더라. 그래서 말인데……."

"고맙습니다. 선배님."

"가르쳐 주신다면 더욱더 분골쇄신粉骨碎身해서 모시겠습니다."

박상태와 윤승언이 영욱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몸을 바짝 들이댔다. 물론 공짠 줄 알고 그러는 것이다.

"오빠! 나도 가르쳐줘."

"닥치고 들으라는데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워? 그럼 영어로 이야기할까?"

영욱은 아직 결론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다들 날로 먹으려 들자 진짜로 화를 내고 말았다. 그러자 가장 간절한 박상태가 정색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느낀 듯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쉽게 말씀해주십시오."

"흠, 모두 다섯 명이니까 십만 원씩만 내면 가르쳐주겠다는 소리지 뭐겠어."

"뭐야? 그럼 오빠는 공짜로 배운 게 되잖아."

활인심방의 구결쯤이야 공짜로 구할 수 있음을 아는 다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활인심방마저도 진짜 구결이 아님을 아는 진소희는 더욱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먼저 투자한 사람이니까 그 정도의 이득은 봐야지. 대신에 내가 수련하면서 깨달았던 가장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줄 테니까 배우고 싶은 사람은 돈부터 내."

"지금 돈이 어디 있어? 돌아가면 줄 테니까 후불로 가르쳐 줘."

"네가 떼먹고 도망갈 수는 없을 테니까 좋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래?"

"저도 후불로 드리겠습니다."

"저도요."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은영이 돈을 내고 배우겠다니까 박상태와 김호진 그리고 윤승언까지도 마지못해서 돈을 내겠다고 했다. 그냥 내놓으라고 해도 내놓아야하는 노예 신세니 어쩔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좋아. 너희 넷은 됐고, 소희 너는 배우기 싫어? 혹시 이미 알고 있는 구결이야?"

"아뇨. 하지만 별로 관심이 가지는 않군요. 저는 배우지 않겠어요."

"싫으면 말고. 그럼 저쪽으로 좀 떨어져 주겠어? 지금부터 유료 강습을 해야 하니까 말이야."

"그러죠."

모른다고는 했지만 모를 리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영욱이 쫓아내자 아쉬운 기색도 전혀 없이 거리를 띄워주었다. 사실 소희는 별 것도 아닌 것을 돈까지 주고 배우겠다는 은영과 박상태 등을 곁눈질로 쳐다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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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소희가 멀찌감치 떨어지자 영욱은 활인심방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미리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게 정말로 효과가 있다는 거야. 물론 어느 정도는 수련을 쌓아야 효과를 느낄 수 있어. 그리고 효과가 있을 거라고 무조건 믿어야 해. 그 믿음을 씨앗 삼아서 조금씩 커져가니까."

"오빠! 혹시 엉터리 아냐? 사전事前 정지整地 작업이 왜 그렇게 길어?"

은영은 영욱의 부연 설명이 길어지자 일단 의심의 눈길부터 보냈다. 당장 효과가 안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나중에도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는 소리니 누가 들어도 그런 의심이 들 만한 상황이었다.

"내키지 않으면 너도 빠져."

"솔직히 내키지는 않는데 우리 언니가 무조건 오빠 말을 믿으라고 해서 빠질 수는 없어."

"그 정도의 믿음으로는 돈만 날릴 테니까 어서 꺼져."

은영이 돈을 주고 배우겠다는 이유는 의외였다. 무녀巫女 언니의 말에 따르겠다는 것은 언니가 제법 용하다는 것을 믿는다는 소리였다. 아무튼 본인의 신념이 아니니까 활인심방을 제대로 수련하기는 어려울 듯했다.

"싫어. 돈을 날려도 내 돈을 날리는 거니까 어서 유료 강습이나 해보셔."

"구결은 총 25자야. 폐목명심좌, 악고정사신, 고치삼십육, 양수포곤륜, 좌우명천고인데 취해야할 자세와 각 구결의 뜻을 설명해줄게. 폐목閉目은 글자그대로 눈을 감는 거야. 그리고 명심좌는……."

영욱은 활인심방의 자세와 구결의 의미를 아주 자세하게 설명했다. 수강료를 받기로 했으니 나름대로는 정성을 다해야만 했다. 가던 길을 멈춘 채 제법 진지한 분위기로 한동안 유료 강습이 진행되었다.

"내 경험으로는 기계체조와 정신력 회복에도 큰 도움이 되니까 틈만 나면 수련하도록 해. 다들 알겠지?"

"예. 선배님."

"오빠! 나는 아무래도 좀 찝찝해. 그래서 하는 말인데 5만 원만 내면 안 될까?"

"5만 원은 아까워서 어떻게 내냐? 안 내도 되니까 저리 썩 꺼져!"

자기 딴에 돈을 절약하겠다는 것이겠지만 박상태 등이 있으니 영욱으로서는 받아들이기가 힘든 요구였다. 무엇보다 열성을 다해서 가르쳤는데도 불구하고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라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욱은 진짜 화가 나서 고함을 버럭 지르며 은영을 내ㅤㅉㅗㅈ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은영과 사귈 때 선물했던 돈을 모으면 모르긴 해도 500만 원은 족히 넘을 거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남자가 주었던 선물을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어서 그냥 헤어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깝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가뜩이나 억지를 부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론데 여자 둘이서 교대로 초를 치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럼 안 내도 되는 거야? 오빠, 미안해."

꺼지라고 했더니 웃으면서 정말로 꺼져버렸다. 두 여자에게는 영욱의 활인심방이 아주 우습게 보이는 듯했다. 

일이 이쯤 되자 박상태와 김호진 그리고 윤승언마저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표정을 보니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다. 아무리 노예 신세지만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눈앞에 보석을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한심한 녀석들이군. 너희들도 저리 꺼져!"

"예. 선배님."

말로만 꺼지라고 했는데 눈치라고는 조금도 없는 노예들마저도 여자들이 있는 쪽으로 가버렸다. 이로써 영욱은 졸지에 집단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 게다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활인심방을 50만 원이나 주고 배운 바보 멍청이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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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이번 기회에 집단 따돌림이 뭔지를 확실하게 경험한 영욱은 활인심방의 구결과 자세 강습을 위해서 잠시 멈추어 섰던 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내가 다시 가르쳐주면 인간이 아니다. 아니, 성을 갈고 만다. 잘난 척하더니 겨우 10만 원에 벌벌 떠는 인간들이었다니 실망이야."

영욱은 이동하는 내내 투덜거렸다. 하지만 대학생들에게 있어서 10만 원은 결코 적지 않은 돈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부모에게 용돈을 얻어서 쓰는 상황이니까 당연했다. 하지만 영욱은 일당이 60만 원이나 되니까 그렇게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남학생들 앞에서 공주나 여왕 행세를 하는 은영과 진소희도 알고 보면 얄팍한 지갑에 돈 몇 푼 들어있지도 않았고, 만 원짜리 하나에도 벌벌 떠는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었다. 눈은 높고 가진 것은 없다보니 본의 아니게 된장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욱은 기분을 잡친 듯이 거칠게 행동했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았다. 박상태 등에게 활인심방의 구결을 풀이해 주다가 오랜 만에 그 심오한 뜻을 다시 음미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욱은 사부 진중권이 자신을 가르치다가 그 어려운 벽을 두 번이나 깼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배움 속에 가르침이 있고, 가르침 속에 배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배움과 가르침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빛과 그림자처럼 한 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제대로 가르쳐주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영욱은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저 구결을 외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구결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기는 수단으로서 구결을 암송해야 한다는 것이다.

'활인심방, 폐목, 명심좌, 잔상, 수족, 잔상, 권, 잔상, 각, 잔상, 무!'

'활인심방, 악고, 정사신, 잔상, 수족, 잔상, 권, 잔상, 각, 잔상, 무!'

'활인심방, 고치, 삼십육, 잔상, 수족, 잔상, 권, 잔상, 각, 잔상, 무!'

'활인심방, 양수, 포곤륜, 잔상, 수족, 잔상, 권, 잔상, 각, 잔상, 무!'

'활인심방, 좌우, 명천고, 잔상, 수족, 잔상, 권, 잔상, 각, 잔상, 무!'

영욱은 새로 깨달은 내용을 구결에 응용해 보았다. 그랬더니 조금이나마 더 효과가 있었다. 좀 더 효과적인 구결은 초식의 내용에 따라서 조금씩 달랐지만 지금은 잔상수족부터 마스터해야 하는 상황이니 첫 번째 구결의 조합이 제일 좋은 듯했다. 

영욱은 이제 대충이나마 구결의 조합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구결의 음미하는 것은 너무나도 지당한 기본 내용이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좌坐는 몸이 앉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여기서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의미였다.

구결을 음미하게 되자 영욱의 기계체조가 눈에 띨 정도로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부드러움이 위력의 증폭을 보장하고 있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영욱은 사소한 깨달음이지만 이렇게도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온 몸이 찌릿할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지금의 기계체조라면 어떤 상대가 나타난다고 해도 한 방 정도는 제대로 먹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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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가리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아주 곤란한 일이 발생했다. 열 마리가 넘는 멧돼지 일가가 등산로 근처의 봉분을 파 뒤집다가 지나가던 영욱 일행을 경쟁자로 간주하고서 달려든 것이다. 

겨울은 산짐승들에게도 고난의 시기인데 누군가 산소에 왔다 가면서 음식물과 술을 남기고 갔던 듯했다. 그것만 주워 먹으면 나쁘지는 않는데 당연히 성에 차지 않아서 묘까지 파 뒤지는 경우가 왕왕 생긴다. 

그래서 요즘의 성묘객들은 절대로 산소에 술을 뿌리지 않아야 한다고 입을 모으곤 하는데 그 묘의 후손들은 조상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했던 것 같았다.

남의 묘가 망가지는 것이야 영욱으로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200kg은 족히 나갈 것 같은 수컷 멧돼지와 얼추 다 자란 새끼들로 구성된 그 가족들의 공격을 받게 되니 기가 막혔다. 

2QB 세상이라면 별 것도 아니겠지만 지금은 무기라고는 과도 하나 뿐인 현실 세계에서의 실제 상황이었다.

물론 기계체조가 있으니 쉽게 당할 리는 없다. 하지만 멧돼지를 거꾸러뜨릴 결정적인 무기가 없으니 대적해서 싸우는 것은 오히려 녀석들의 화만 돋을 공산이 컸다.

그렇다고 몸을 피하자니 녀석들의 공격 속도가 너무 빨랐다. 게다가 자신의 몸을 돌보기에는 무릴 것 같은 일부 노예들과 두 여자가 있었다. 

진소희야 어떻게든 피하겠지만 은영은 달랐다. 그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했으니 신경 쓰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활인심방, 폐목, 명심좌, 잔상, 수족, 잔상, 권, 잔상, 각, 잔상, 무!'

영욱은 기계체조 심화 동작 잔상 시리즈들을 발동해서 수컷 멧돼지와 맞서나갔다. 

물론 정면으로 부딪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멧돼지의 엄니는 아직 사냥에 서투른 호랑이들도 죽이곤 한다. 사냥개들도 그 엄니에 걸리면 최소한 100바늘 이상 꿰매야 한다고 임상수의사인 이모부가 술안주 삼아서 말하곤 했었다.

영욱은 충돌 직전에서야 몸을 움직였다. 잔상각으로 아슬아슬하게 녀석의 엄니를 피해내면서 상대적으로 약해보이는 녀석의 앞다리 하나를 돌려차기로 공략했다.

퍽. 꾸에엑.

둔탁한 타격 소리와 함께 수컷 멧돼지가 분노의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저 분노의 비명이었을 뿐이다. 멧돼지의 다리가 부러지기는커녕 오히려 영욱의 발만 시큰거렸다. 마치 빠르게 달리는 차를 향해서 돌려차기를 시도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약해 보인다는 생각은 완전히 영욱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200kg의 체중을 싣고 시속 70km 이상으로 달리는 다리가 약할 리 없었다. 그야말로 달리는 소형차에 부딪친 셈이니 영욱의 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영욱 역시 잔상각의 초식으로 내지른 공격이라서 그리 큰 피해는 없었다. 잔상이란 너무나도 빨라서 도저히 눈으로 그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욱도 부딪치는 순간 이건 아니다 싶어서 얼른 발을 뺏기에 큰 부상은 면할 수 있었다.

총 없이 산속에서 만난 멧돼지는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먹이를 지키려는 배고픈 녀석이니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게다가 한 대 걷어차인 수컷 멧돼지는 영욱을 주적으로 삼고 돌진을 되풀이했다. 나머지 녀석들은 흩어져서 일행들을 공격했다.

꺄악!

여자들의 비명이 난무하고 노예들 역시 마땅한 방법이 없어서 이리저리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하지만 영욱이 그들을 돌볼 여유는 전혀 없었다. 별로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고.

'총알을 피하는 것보다도 더 힘들 것 같군. 하지만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대충이나마 알 것 같다.'

총알이 훨씬 더 빠르지만 총알이 정확하게 자신의 심장을 노린다고 가정한다면 불과 30센티만 피하면 된다. 그것도 총알의 발사를 결정짓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읽을 수도 있으니 연속 사격은 몰라도 한두 발 정도는 충분히 피해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돌진하는 멧돼지는 반응 속도가 아주 빨라서 30센티가 아니라 최소한 1미터 이상은 피해야만 했다. 

그것도 피하는 방향을 녀석에게 미리 읽히면 1미터가 아니라 적어도 3미터는 피해야 엄니의 사정권을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니 총알을 피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영욱은 상대가 지능을 가진 생물체이므로 오히려 페인트 모션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잔상수족은 멧돼지 동체 시력 이상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으니 오른쪽으로 피하는 것처럼 속이고, 반대편으로 피하면 조금만 피해도 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었다.

축구를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목숨이 걸려있으니 몇 번 지나지 않아서 익숙해졌다. 그리고 무작정 피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조금씩 나아지는 잔상권과 잔상각 초식으로 멧돼지의 다리 관절 부위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뼈와 부딪치는 것은 그야말로 바위와 부딪치는 것처럼 무식한 짓이지만 관절 부위는 그나마 사정이 달랐다. 

퍽. 꾸에엑.

분노의 포효가 어느새 고통의 비명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수컷 멧돼지는 자신이 몰아친다는 생각에 들떠서인지 여전히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영욱으로서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기계체조의 실전 수련을 도와주는 이 수컷 멧돼지가 고맙기조차 했다. 영욱은 집요하게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녀석을 보면서 살인 멧돼지 호그질라가 떠올랐다. 녀석의 핏발이 어린 눈을 보니 살인의 경험은 물론이고 식인의 경험까지도 있는 듯했다. 물론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냥 보낼 순 없지."

영욱은 현실 세계에서의 유일한 무기인 만능 칼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금속조직학 시간에 만져보았던 공업용 다이아몬드를 떠올리면서 칼의 표면에 절삭력 강화를 위한 실드를 쳤다. 

2QB 세상에서 다이아몬드를 소환한다고 해서 100% 품질의 다이아몬드가 소환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드림헌터로서의 능력이 어느 정도 되어야 품질이 뛰어난 물건을 소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실 세상에서 만들어낸 실드 코팅이 진짜 다이아몬드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겨우 1%나 2% 수준의 다이아몬드 코팅 실드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만로도 절삭력의 향상은 상당했다.

서걱. 꾸에엑.

영욱이 잔상권을 응용해서 멧돼지의 목과 앞다리 관절 부분에 칼을 들이댔더니 질긴 가죽이 맥없이 갈라지면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칼은 역시 다이아몬드군. 좋았어."

영욱은 이제 달려들기를 주저하는 녀석에게 오히려 달려들었다. 

물론 날카로운 엄니가 있는 앞부분이 아니라 뒷부분이었다. 멧돼지가 순순히 뒤를 내줄 리 없으니 정면으로 달려들다가 충돌 직전에 녀석을 가볍게 뛰어넘어서 백 마운트를 점한 다음 뒷다리의 관절과 인대들을 난자했다.

서걱. 서걱. 꾸에엑.

이제는 위기를 느낀 녀석이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아킬레스건이 잘려나가서 추진력을 잃고 만 상태였다. 

영욱도 공격을 멈추고 녀석의 대퇴동맥에서 분수처럼 쏟아지는 피를 받아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현실 세상이라서 미약하기 짝이 없는 염동력이지만 그래도 허공으로 치솟은 피를 모아서 자신의 입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아직도 박상태와 두 노예들 그리고 은영과 진소희가 다른 멧돼지들을 처리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피하기에만 급급했지만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유료 강습 건으로 빈정이 상해서이기도 하지만 멧돼지들에게 당해서 죽음에 이를 정도로 약한 일행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들 역시 지난밤 2QB 세상에서 많이 강해졌고, 지금은 비록 노예 신세지만 예전에는 나름 잘 나가던 드림헌터들이다.

고수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덩치가 작은 은영이지만 놀랍게도 그녀 역시 민첩한 몸놀림으로 피하는 것만큼은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렇게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험한 겨울 산행을 망설이지도 않고 따라나섰을 것이다. 또한 더 강해지고 싶은 욕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과 사귈 때에는 약한 척, 여린 척을 골라하면서 풀벌레를 보고도 기함하던 은영은 어디에도 없었다.

영욱은 앞발로 기어서 달아나려는 수컷 멧돼지의 등에 올라타고는 대퇴동맥에서 분출되는 피를 계속해서 들이마셨다. 남들이 보기에는 달아나지 못하게 온몸으로 막는 것처럼 보였지만 영욱은 원활한 소화 흡수를 위해서 활인심방과 기계체조의 기초 동작을 응용해서 취한 자세였다.

현실 세계에서도 멧돼지의 피가 알려진 보양식이기는 하지만 피를 마시고 가만히 있으면 선짓국을 포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활인심방은 그 핏속에 함유된 자연산 약초와 농약 성분이 전혀 없는 도토리 심지어 식탁 위의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는 송로버섯의 기운까지도 흡수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것은 건강한 육체와 아울러 강한 정신력을 배양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성분이었다.

'이건 진짜다. 그리고 진짜 구결이다.'

영욱은 멧돼지의 피를 흡수하면서 쾌재를 불렀다. 자신이 마시는 멧돼지의 피도 진짜이고, 그 속에 든 기운을 소화시키고 흡수하는 데에는 활인심방과 기계체조가 최고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특히 활인심방이 인체의 전면을 흐르는 임맥과 후면을 흐르는 독맥을 원활하게 유통시키는 소주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독맥이 소화 흡수를 독려하는 맥이라는 사실은 이제야 겨우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기계체조의 초식 역시 원활한 소화 흡수를 돕는데 큰 기여를 했다. 둘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결여된다면 거대한 멧돼지 한 마리가 죽을 때까지 쏟아내는 피를 모두 소화 흡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영욱은 모처럼 포만감에 젖어서 활인심방과 기계체조 수련에만 몰입했다. 그리고 소화 흡수가 끝나자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수컷 멧돼지로부터 일어섰다.

*진짜 구결, 가짜 구결

상황은 아직도 정리되지 않고 있었다. 다들 결정타가 없으니 여전히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물론 그 정도만으로도 훈련의 효과는 있지만 갈 길이 먼데 언제까지나 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뭐야? 여기서 밤샐 거야?"

"주인님, 제발 좀 도와주십시오."

"누가 네 주인이라는 거야?"

박상태가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영욱은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녀석마저도 돈이 아까워서 자신을 바보로 만들어버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녀석은 그랬다. 그래서 그 배신감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서, 선배님, 제발 부탁입니다."

"누구시죠? 혹시 저 아세요?"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선배님. 활인심방 강습료를 내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수련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살려주십시오."

"내가 그깟 강습료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압니다. 선배님께서 진짜로 화를 내시는 걸 보니 늦게나마 활인심방이 진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배려해주는 걸 오히려 삥 뜯는다고 몰아붙였으니 화가 날 만도 합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정말 알고서 하는 소린지 영욱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소린지는 몰라도 영욱의 서운한 속내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겨우 돈 십만 원에 주인의 심기를 거슬렀으니 무슨 일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제야 파악한 듯했다.

사실 영욱은 서운한 마음에 박상태를 노예상인에게 팔아버릴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박상태 때문에 김호진과 윤승언도 행동을 같이 한 것 같아서 그런 마음이 더 들었다. 물론 진짜로 팔겠다는 것은 아니다.

"상태 너는 보통 사람의 몇 배에 해당하는 괴력을 발휘할 수 있잖아. 그런데 왜 앓는 소리를 하는 거지?"

"사람이라면 여러 명이라도 충분히 대적할 수 있겠지만 멧돼지의 움직임이 너무 빠르고, 녀석들의 엄니가 너무 치명적입니다. 제발 좀 도와주십시오."

"감히 나와의 신성한 계약을 파기해 놓고도 그런 말이 나와?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야할 판에 진짜를 가르쳐줘도 그런 표정들을 지어? 너희들은 이미 내 신뢰를 잃었어."

박상태가 사정한다고 해서 얼씨구나 하고 도와줄 영욱이 아니었다. 게다가 엄살을 떨고 있지만 죽거나 크게 다칠 것 같지도 않았다.

"저희들이 어리석어서 그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믿습니다."

"내가 화를 내니까 팔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건가?"

"제발 살려주십시오.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너희들을 죽인다고 했어? 팔아버린다고 했지."

"그게 그겁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봐. 네가 내 입장이라면 팔아버리지 않겠어?"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믿습니다."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든 이유가 뭐지? 내가 팔아버린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믿는 척하려는 건가?"

"아닙니다. 주인님 혼자의 힘으로 가장 강한 수컷 멧돼지를 간단하게 처리했으니까요. 그리고 녀석의 피도 모두 흡수하셨고요. 그러니까 믿을 수밖에 없지요."

박상태는 멧돼지로부터 도망 다니면서도 영욱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살폈던 것이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는 영욱의 실력을 보고 있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 20만 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계약 파기에 대한 벌금까지 내라는 말이군요. 당연히 내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도와주는데 대한 수고비가 10만 원이다. 그리고 멧돼지의 귀와 꼬리는 내 꺼다."

"피와 몸통을 주시는 것만 해도 100만 원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 같은데 겨우 10만 원만 받으신다면 저로서는 감지덕지입니다."

박상태는 이제야 겨우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했다. 지금처럼 목숨을 구해주고 덤으로 백만 원 이상의 은혜를 베푸는데도 오히려 십만 원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으로 오해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게 마지막 용서인 줄 알아. 두 번 다시 나를 배신했다가는 그 길로 죽을 줄 알아. 노예상인에게 판매할 가치도 없는 노예들이니까."

"예. 선배님."

영욱이 그런 계산법을 동원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은영과 진소희에게서도 수고비를 받아내기 위함이었다. 이제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여자들에게 공짜로 베풀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렸기 때문이다. 

서걱. 꾸에엑. 

서걱. 꾸에엑,

서걱. 꾸에엑,

암컷과 거의 다 자란 새끼 멧돼지 세 마리를 처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구조비용을 확실하게 받기로 한 영욱은 노예들이 멧돼지의 피를 빨기 좋도록 아킬레스건들과 대퇴동맥을 끊어 주었다.

세 노예들은 앞발로 기어서 달아나려는 멧돼지의 등에 올라타고는 거꾸로 매달려서 피를 빨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욱이 가르쳐준 활인심방의 구결을 열심히 외웠다. 

현실 세계에서 삼키는 멧돼지의 기운을 제대로 소화 흡수할 수 있는 방법이 그들에게는 전혀 없으니 활인심방의 효과가 있건 없건 생각할 것도 없이 죽어라고 외워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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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세 마리의 멧돼지를 상대하고 있던 진소희가 앉아서 쉬고 있는 영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리는 왜 안 도와줘요?"

"도와주고는 싶지만 힘이 너무 빠져서 움직일 수가 없어. 무려 네 마리나 잡았더니 어지러워서 현기증이 나."

"멧돼지 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것은 아니고요?"

"그건 이미 소화가 다 되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영욱은 도와줄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젠 진소희가 다치더라도 진중권에게 미안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상 미련을 둘 이유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일을 방해하기까지 했으니 쫓아내지 않은 것만 해도 많이 봐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 우리에게도 10만 원씩을 받겠다는 건가요?"

"그럴 수야 있나? 하지만 네 마리씩이나 잡았더니 그게 무리였나 봐. 아이고, 허리야."

"동료끼리 치사하게 이럴 거예요?"

"남의 유료 강습을 망쳐놓고도 그런 말이 나와?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을 동료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사기를 치려면 주변에 있는 사람을 보아가면서 시도해야죠. 선배 좋은 일 시키려고 나까지 피해를 보아야 할 이유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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