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6/71)

영욱은 은영을 내버려두고 진소희를 공격하고 있던 우두머리 수컷부터 공격하기로 했다. 여자라서 만만하게 보고 달려들었다가 잔상초식과 잔상권으로 맞서는 소희를 쉽게 제압하지 못해서 자존심을 구기고 있던 녀석은 영욱의 가세에 기함을 했다.

퍽! 깨갱.

영욱의 강한 공격력은 우두머리 수컷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포크가 기계라서 그런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제 영욱의 잔상수족이 초급 단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동안 진중권의 움직임을 흉내 내기에만 급급했던 영욱은 이제 좀 더 부드러운 동작으로 그러나 훨씬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퍽! 퍽!

영욱은 모든 공격을 우두머리 수컷에게로만 집중했다. 그 길만이 이 싸움을 가장 피해가 적게, 가장 빠르게 끝내는 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영을 돕지 않고 진소희를 돕는 것이다.

영욱은 2QB 세상이야말로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죽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결판나지는 않는다는 게 이런 식으로 좋은 점도 있었다.

깽. 깨개갱.

우두머리 수컷 늑대가 항전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지만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는 강력한 공격은 저항의 의지마저도 꺾어놓는 법이다. 

매에는 장사가 없다더니 우두머리 수컷 늑대는 자신도 모르게 꼬리를 만 채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그 비명소리의 여파는 컸다. 2대 1 혹은 3대 1로 은영과 노예들을 공격하던 늑대들은 공격을 멈추더니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우두머리 수컷이 당한다면 자신들도 이길 가망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영욱은 몰입지경에 빠져서 우두머리 수컷 늑대를 구타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고치삼십육'을 빠르게 암송하면서 패는 속도와 위력을 점점 더 배가하고 있었다. 패는 속도가 증가할수록 우두머리 수컷 늑대의 비명은 더욱더 커져갔다.

-뭐, 뭐야?

어느 순간 우두머리 수컷 늑대는 가죽을 남기고 사라졌다. 도마뱀 꼬리를 잘라주는 것처럼 껍질을 남기고 도망친 것이었다. 환수다운 삼십육계였다.

@

-상태야! 도망치지 못하게 꽉 잡고 있어.

-예. 선배님.

피는 빨지도 못하고 껍질만 겨우 챙긴 영욱은 목표물을 바꿔서 우두머리 암컷 늑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박상태에게 붙들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녀석은 영욱의 강력한 공격에 끙끙 앓기 시작했다.

너무 아파서 그런 면도 있지만 박상태가 붙들고 있으니 달아날 수도 없고, 무엇보다 혼자서 달아난 수컷에 대한 배신감이 컸기 때문이다.

우두머리 수컷이 달아나고 우두머리 암컷마저도 개 맞듯이 맞게 되자 늑대 무리들은 공격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사냥하는 게 아니라 사냥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깨달은 것이었다.

-흥! 누구 마음대로 도망을 가? 놓치면 너희들이 대신 죽을 줄 알아.

-예. 선배님.

하지만 자기들 마음대로 후퇴할 수는 없었다. 영욱의 엄포에 은영과 소희 그리고 호진과 승언이 목숨을 걸고서 붙들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200kg이나 되는 늑대들이 겨우 50kg이 넘는 두 여자들에게 붙들려 낑낑 대는 모습이 다소 어색할 수도 있겠지만 능력이 닿는 범위에서는 무엇이든지 소환할 수 있는 2QB 세상이니 그게 가능한 것이다.

여자들은 영리하게 굵은 쇠사슬을 소환해서는 자신의 몸과 달아나려는 늑대를 나무에 묶고서 버텼다. 강하게 염원하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이니까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 모습이 연출되었다.

물론 그런 쇠사슬쯤이야 날카롭고 강한 늑대의 이빨로 얼마든지 끊어버릴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영욱은 탈출 가능성이 높은 녀석부터 한 대씩 강하게 먹여서 저항 의지를 꺾어 놓았다.

그러한 일방적인 폭행이 꽤나 오랫동안 이어졌다. 영욱의 공격에 견디지 못한 다섯 마리의 늑대들이 거의 정신을 잃고서 축 늘어졌다.

-다들 뭐하고 있어? 어서 피를 빨아. 

현실 세계를 오가는 존재들이 아니라면 죽거나 정신을 잃더라도 사체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영욱은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일행들에게 상기시켜주었다.

다들 알다시피 뱀파이어도 영원한 삶을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피를 빨아야 한다. 드림헌터 역시 뱀파이어와 다들 바가 없다는 것이 평소 영욱의 지론이기도 하고, 그게 일행들에게도 기정사실이었다.

다른 드림헌터들이라면 곤란할 수도 있겠지만 일행에게는 소화 흡수를 위한 기계체조가 있으니 불가능한 발상은 아니었다.

영욱은 혼자서 우두머리 암컷 늑대의 피를 독차지했다. 박상태가 한 마리를 맡았고, 호진과 승언이 한 마리의 늑대를 나누어서 빨았다. 

잠시 망설이던 은영과 소희 역시 한 마리씩을 붙들고 배가 터지도록 피를 빨았다. 

-꺼억.

-입가에 묻은 피는 좀 닦아요.

-그러는 너는 아닌 줄 알아?

-이건 립스틱이에요.

-아니면 말고.

진소희의 입술에 묻은 것은 립스틱이 아니라 피였다.

영욱은 숨이 멎은 암컷 우두머리 늑대의 껍질을 벗긴 후에 심장과 간 그리고 쓸개 등을 차례대로 적출하기 시작했다. 그것들 역시 시장에 내다팔거나 먹을 수 있다는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당장 먹어야할 식량이었다. 현실 세상에서는 비상식량이라도 들고 나섰지만 2QB 세상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니 노린내가 진동하는 늑대의 고기도 버릴 수는 없었다.

영욱이 해체 작업을 시작하자 박상태와 김호진 그리고 윤승언도 영욱을 따라 자신들이 피를 빨던 늑대들을 해체했다. 물론 은영과 소희도 서둘러서 전리품들을 챙겼다.

특히 소희의 칼 솜씨는 아주 좋았다. 된장녀 냄새를 물씬 풍기던 것은 이제 찾아볼 수도 없어졌다. 영욱은 갈수록 진소희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자신의 등에 빨대를 꼽는 게 수월치 않자 기다리지 않고 자신으로부터 뽑아낼 수 있는 것은 뽑아내기로 판단했을 것이 분명했다. 

떡밥을 던져주는 것은 낚시의 기본이니까 심화 동작의 나머지 초식들을 가르쳐준 것이다. 그러니 떡밥의 의미를 평가절상平價切上 할 이유가 없었다.

서둘러서 전리품을 챙긴 일행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기 전에 대룡산의 정상을 넘어야 현실 세계에서처럼 야영이 가능한 곳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동은 역시 소화를 겸해서 기계체조를 열심히 수련하는 것이 되었다. 

@

-불이 아주 세차게 타오르는 모습을 나타내는 의태어가 뭘까요?

진소희가 영욱에게 다가오더니 난센스 퀴즈 같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갑자기 웬 퀴즈야?

-참을 인忍 자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어요?

-자다가 책상다리 긁는 소리 좀 하지 마. 너 미쳤어?

-지금 내가 심심해서 심술이라도 부리는 줄 알아요?

-응.

-방금 방긋 웃은 사람이 방구를 뀐 것 같은데요?

-얘가 이제는 애먼 사람을 잡는 거야? 게다가 갑자기 선문답이라니 기가 막히지도 않는군.

-선문답은 아니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난센스 퀴즈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문답도 아니고 그저 뜬금없는 소리로 들리기만 하는 질문이 무려 네 번이나 이어지고야 겨우 멈추었다. 적어도 농담을 하거나 장난을 치자고 하는 짓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내게 선심이라도 쓰는 건가?

-그렇다고 봐야죠. 그래봐야 진짜는 아니겠지만요.

-진짜는 뭐고 가짜는 대체 뭐야?

-그건 영욱 씨가 직접 알아내셔야 할 부분이에요.

진소희는 자기가 할 말만 빠르게 늘어놓고는 입을 다물었다. 자기 딴엔 영욱이 늑대 피를 마음껏 마시게 해 주어서 한 수 가르쳐주려는 것 같은데 영욱이 듣기에는 그저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말장난을 할 여자가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걸려서 그녀의 질문을 차례대로 반추해 보기로 했다.

'불이 세차게 타오르는 모습은 아마도 활활 타오르는 것일 것이다. 아주 세차게라면 말장난 같지만 '활활활' 타오르는 것이겠지.'

'그리고 참을 인 자 세 번이라면 '인인인'일 수도 있다. 심심과 심술의 심을 합치면 '심심심'이란 글자가 나온다. 그리고 방금과 방긋과 방구의 방을 합치면 '방방방'이다.'

영민한 진소희는 영욱이 마치 만능열쇠처럼 사용하고 있는 구결이 활인심방의 구결임을 알아차린 듯했다. 마음속으로 외웠지만 가끔은 입으로도 웅얼거렸으니 알아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진소희로서는 그 구결이 가짜라는 것을 세 번씩이나 반복함으로써 알려주려는 듯했다. 세 번을 참아봐야 살인을 면할 길은 전혀 없다는 의미인 듯했다. 

놀리는 것인지 알려주는 것인지 헷갈리지만 영욱으로서는 진짜 구결을 구할 길이 없으니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한 야유에 접하자 오히려 오기가 생기기조차 했다. 한편으로는 세 번을 반복하라는 힌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폐폐폐! 목목목! 명명명! 심심심! 좌좌좌, 악악악! 고고고! 정정정! 사사사! 신신신?'

'폐목명심좌, 악고정사신, 폐목명심좌, 악고정사신, 폐목명심좌, 악고정사신?'

'폐목명심좌, 폐목명심좌, 폐목명심좌, 악고정사신, 악고정사신, 악고정사신?'

활인심방의 구결의 조합을 이리저리 바꾸어가며 세 번씩이라는 힌트 아닌 힌트에 맞춰서 조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게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구령처럼 기계체조 동작의 박자를 맞추는 데에만 조금 더 도움이 될 뿐이었다.

영욱이 이리저리 단어를 조합하느라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자 진소희는 영욱 몰래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썼다. 그렇게 간단한 구결이 있을 리 없음을 영욱으로서는 모르는 듯했기 때문이다.

@

'그게 아니라 초식의 이름을 세 번 반복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활인심방은 기계체조의 구결이 아니니까 당분간은 잊어버리는 게 좋을 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잔상수족, 잔상권, 잔상각, 그리고 잔상무라는 초식 이름을 가지고 구결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사실 엉터리로 막 지껄여도 부작용이 전혀 없으니 진짜 구결이 있기나 할지가 의문이었다. 그것을 반대로 해석하자면 위력을 가지는 구결이 존재한다면 가짜 구결은 부작용이 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화입마라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것은 아니다. 

물론 너무나도 다른 것이라서 그런 부작용도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조금이나마 효과가 있다고 느꼈던 것은 아마도 플라세보 효과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태권도의 동작도 기합이나 구령을 붙이면서 실시하면 좀 더 효과적인 것과 다를 바 없다.

'잔잔잔! 상상상! 수수수! 족족족!'

초식 이름과 구결이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관련이 있다면 너무나도 쉽게 구결이 누설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달라지는 것은 전혀 없었다.

'잔상수족! 잔상수족! 잔상수족!'

바꾸어서 외쳐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 번을 반복하는 것도 별다른 의미는 없는 듯했다. 오히려 활인심방의 구결을 외치는 것보다 훨씬 못한 듯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활인심방과 기계체조의 구결이 어떤 접점을 가질 것 같지는 않았다. 활인심방도 일종의 도인술이긴 하지만 정신적인 피로를 푸는 데 특화되어 있는 것이고, 기계체조는 그야말로 무술에 가까운 것이니까.

한편으로는 여기가 2QB 세상이니까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모든 것이 정신력이나 영혼력과 연관되어 있으니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궁합은 아닌 듯했다.

어쩌면 소희가 영욱을 혼란시키기 위해서 그런 수작을 부린 것일 지도 몰랐다. 입 모양이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활인심방임을 알았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자면 오히려 깊은 관련이 있음을 의미했다.

'잔상수족은 활인심방의 폐목명심좌나 악고정사신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순서대로 잔상수족, 활인심방, 폐목명심좌?'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군. 그렇다면 활인심방, 잔상수족, 폐목명심좌? 이것도 아닌 것 같군. 그렇다면 활인심방, 폐목명심좌, 잔상수족? 어? 어? 어?'

영욱은 갑자기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애들 장난 같은 짓거리 끝에 상당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활인심방의 폐목명심좌로 잔상수족 초식을 활성화시킨다는 의미였다. 세 번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세 가지의 다른 구결이 필요했던 듯했다. 

물론 이게 진짜 구결은 아닐 것이다. 진짜 구결을 진소희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알려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영욱은 기존의 단순 활인심방 구결을 반복하는데 비해서 두 배 쯤은 더 강한 전기가 흐르는 진짜에 가까운 가짜 구결을 얼떨결에 얻어내고 말았다.

일단 소기의 목적을 이룬 영욱은 표정 관리에 골몰했다. 진소희가 계속 힐끔거리고 있는 것을 제 3의 눈으로 느낄 수 있으니 그녀에게 자신의 성과를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왜 숫자 3이라는 힌트를 준 것인지에 대해서 짐작하고자 깊은 사색에 잠겨들었다. 하지만 떡밥을 뿌려서 고기를 불러 모으려는 게 아닐까 하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가짜도 그 정도인데 진짜는 어떻겠어요? 그러니 어서 나와의 결혼을 받아들여요. 오호호호!'

영욱은 진소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환청을 들으면서 깊은 사색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

-뭐야?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기만 하잖아.

영욱은 일부러 화를 버럭 내면서 투덜거렸다. 그러면서 유심히 진소희의 반응을 살폈다. 물론 제 3의 눈으로 살펴서 진소희는 영욱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줄 모르게 했다.

그런데 진소희의 반응이 아주 묘했다. 고소하다는 표정이 반이고 아쉽다는 표정이 반이었다. 그야말로 애증이 엇갈리는 표정이었다. 진소희의 표정을 보자면 절반은 진실이었던 것 같았다. 

아무튼 영욱은 소희의 도움으로 진짜 구결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간 셈이었다. 물론 겉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영욱이 내색하지 않으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 방법은 별로 없다. 

아무튼 영욱은 기계체조의 위력을 조금이나마 더 강하게 시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기계체조 초식이 숙련될수록 점점 더 몸에서 힘을 뺄 수 있기 때문이다.

@

-선두, 잠시 대기해.

-예. 선배님.

영욱은 현실 세상에서 고라니를 잡았던 장소와 비슷한 곳이 보이자 혹시나 하고 소리를 죽이고 접근했다. 현실 세계에서는 눈이 쌓여 있었지만 이곳은 눈사태 때문에 오히려 쌓인 눈이 더 적었다. 그러니 몇 배나 되는 크기의 고라니가 숨어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후다닥.

그러나 그것은 영욱의 착각이었다. 바위처럼 보이던 물체가 영욱의 접근에 놀라서 갑자기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2QB 세상에 사는 거대한 고라니였다. 이 녀석의 덩치도 어지간한 송아지만큼이나 컸다.

퍽! 꾸에엑.

하지만 어느 정도 대비하고 있던 영욱의 공격이 더 빨랐다. 잔상수족에 이은 잔상권이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나더니 고라니의 목을 움켜쥐었다. 고라니의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현실 세계에서처럼 돼지 멱따는 소리로 고함을 질러댔다.

영욱은 고라니의 경동맥을 끊고는 입을 대고 빨기 시작했다. 현실에서도 마신 적이 있는 향긋한 냄새가 나면서 부드럽게 넘길 수 있었다. 늑대의 피는 노린내 그 자체였지만 고라니의 피는 전혀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산삼이나 더덕은 물론이고 이름 모를 산채山菜들을 배가 터질 정도로 먹은 놈이기 때문이다. 여러 종류의 이끼도 먹고, 산열매도 먹어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살이 토실토실 오른 놈이었다. 그러니 피에서 비린내가 아니라 은은한 향기가 났다.

@

그 향긋한 냄새에 일행들은 침을 꼴깍 넘겼다. 영욱이 혼자서 다 마실 것 같아 보이자 진소희가 용기를 내서 말을 걸었다.

-혼자서 다 마실 건가요?

-그럴 수야 없겠지. 하지만 다음 차례는 박상태야. 그 다음은 김호진이고, 그 다음은 윤승언이지. 그리고 은영과 네 차례야. 

-누가 뭐래요? 

-왜 표정이 그래? 내 부하들부터 챙기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에요. 사냥한 사람이 혼자서 다 드셔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 줄 알아요. 그러니 나눠주겠다는데 순서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리 없잖아요.

만일 소희가 말리지 않았다면 배가 터지더라도 혼자서 다 마셨을 것이다. 영욱은 다소 미안한 마음에 얼굴이 벌게졌다. 자기 혼자서 잡았다고 혼자서 다 먹는 것은 아무래도 좀 그렇다. 그럴 거라면 영욱 혼자서 강원도 횡단 여행을 떠났어야 했다.

다행히 모두가 배불리 마셔도 고라니의 피는 부족하지 않았다. 덩치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휴식 겸 목을 축인 일행들은 다시 야영지를 향해서 출발했다. 

현실 세상에서라면 불과 5분 거리에 불과하겠지만 2QB 세상의 대룡산은 몇 배나 더 커서 최소한 30분 이상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주인과 노예라는 수직 관계에다 여자들은 꼽사리를 낀 것이라서 불평할 수가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다들 고라니 피를 소화시키고, 그 기운을 흡수하느라 바빴다.

영욱은 자신의 노예들에게 기계체조의 기본 동작을 천천히 보여주었다. 잔상지수, 이족보행, 풍차 돌리기, 좌충우돌까지 느리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여러 차례 반복하며 보여주었다. 당연히 세 노예들이 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들이 강해지는 것은 곧 자신이 강해지는 것과도 같으니 아까운 게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은영이야 그래도 한 때 사귀던 여자 친구였으니 아까울 것도 없었다. 이미 고수인 그녀가 왜 배우려고 하는 지는 궁금하지만 진짜 구결을 모르는 이상 크게 대단한 것도 아닌 셈이다. 

'활인심방, 폐목명심좌, 잔상지수!'

물론 영욱도 진짜 구결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새로 만든 구결은 기본 동작에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폐목명심좌가 기본동작과 잘 어울리니 심화 동작은 악고정사신이나 고치삼십육과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기본 동작 중에서도 기초에 해당하는 잔상지수와 이족보행은 폐목명심좌와 궁합이 잘 맞았고,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는 풍차 돌리기와 좌충우돌은 오히려 악고정사신이나 고치삼십육과 더 잘 어울렸다. 

잘못된 구결이라고는 해도 주화입마는커녕 아무런 부작용도 없으니 이리저리 바꿔서 적용해 보면 그뿐이었다. 그러니 초식에 따라서 궁합이 맞는 구결을 찾아내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남들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로 들리겠지만 다소 귀찮을 뿐이었다.

@

-여기에서 일박一泊하기로 한다. 현실 세계에서처럼 안전하게 비트를 판 후에 저녁을 먹고 각자 수련하다가 같은 시각에 취침에 들어간다. 다들 일을 나누어서 하도록 해.

-예. 선배님.

-오빠! 우리들도 일해?

-불을 피워줄 테니까 고기라도 구워.

-고기는 오빠가 구운 게 더 맛있던데?

-그럼 비트를 파든가.

-연약한 여자에게 그런 일을 시켜?

-웃기고 있네. 연약한 여자가 사자보다 큰 늑대와 싸워? 그것도 아주 개 패듯이 패던데?

-그땐 내숭 떨 때가 아니라서 그랬지.

-지금도 그래. 

은영은 영욱과 사귈 때에도 이렇게 강했을 것이다. 그러니 틈만 나면 덮치려고 했던 영욱의 시도가 번번이 무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영욱으로서는 은영이 이렇게 강한 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럼 태워도 책임질 수 없어.

-탄 부분은 당연히 네가 먹어야지.

-오빠! 너무 하는 거 아냐?   

-뭐가 너무 한다는 거야? 단체 생활을 하려면 자신의 몫을 해야 대접을 받을 수 있어. 위급한 순간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그래도 야외에서 여자가 고기를 굽는 경우가 어디 있어?

-너도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봐. 이렇게 뺀질거리면 누가 너를 좋아하겠어?

-알았어, 하면 되잖아.

영욱이 고기를 굽는 게 힘든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잘해주면 금방 옛날 버릇이 나오는 것 같아서 조금 엄격하게 대하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애인일 때나 가능하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은영에게 일침을 가한 것에 불과했다.

@

오늘은 운 좋게 길에서 고라니를 잡았으니 영욱이 사냥하러 떠날 일은 없었다. 

게다가 먹다 남은 늑대고기와 고라니 고기도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러니 내일 다시 이곳에서 눈을 뜨면 늑대 가죽 다섯 장과 고리니 가죽 한 장을 이부자리처럼 깐 채로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게다가 잠이 들면 2QB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니 환수들의 야간 기습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비트를 만든 것은 잠깐이라도 밤이슬을 피하고 획득한 가죽들을 도둑맞지 않기 위한 목적이다.

달리 할 일이 없는 영욱은 새로 얻은 구결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본격적인 기계체조 훈련에 들어갔다. 포크를 소환해서 제대로 훈련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대룡의 비위를 거스를 수는 없으니 꾹 눌러서 참아야 했다. 

대룡의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포크를 소환해서 쿵쿵거렸더니 화가 잔뜩 나서 눈사태를 일으킨 듯했다. 그러니 대룡산을 벗어날 때까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포크의 소환을 자제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늑대와의 싸움에서 소환한 포크는 그나마 미니 사이즈여서 무사히 넘어간 듯했다. 그러니 비트를 파고 있는 박상태가 눈치를 보아도 모르는 척하고 기계체조 훈련에만 몰두했다. 눈치를 보는 것은 거인으로 변신해서 파겠다는 것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

-무슨 지렁이가 이렇게 많아?

기계체조 훈련이 대충 끝날 무렵 박상태의 투덜거림이 영욱의 귀에 들렸다.

-무슨 일이야?

-선배님, 땅속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지렁이들이 들어있습니다.

-지렁이라면 토룡土龍이잖아. 그렇다면 대룡도 혹시 거대한 지렁이 아닐까?

영욱은 농담치고는 섬뜩한 농담을 늘어놓았다. 그런 생각이 왜 갑자기 떠올랐는지는 몰라도 보통 지렁이들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징그러워서 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비트도 없이 잠들 수는 없잖아.

-어차피 우리들의 몸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니 노숙을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가죽들과 고기들이 남의 손을 타면 어떡하고?

-그건 제가 책임지고 잘 감추어두겠습니다.

-내가 봐도 징그러워서 그만 파는 게 낫겠어. 

어지간하면 그냥 팔 텐데 지렁이가 너무 많아서인지 상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듯했다. 영욱도 더 이상 강요하지는 못하고 일단 작업을 중단시켰다. 무조건 명령만 내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아냐. 이 겨울에 무슨 지렁이가 저렇게 많아? 그리고 저 크기는 대체 뭐야? 지렁이가 아니라 어지간한 구렁이처럼 보이니 원.

-벌써 배가 고프십니까? 주인님.

-자연산이 몸에 좋다며?

-하, 하지만 지렁이를 어떻게 드시려고?

-어차피 맛으로 먹는 것은 아니잖아.

처음에는 농담 삼아 시작한 이야기였는데 점점 지렁이를 먹는 쪽으로 가닥을 잡기 시작했다. 물론 지렁이는 혐오식품의 대명사라서 보통의 비위로는 먹기가 힘들다.

세계 7대 혐오 식품으로는 중국의 삭힌 오리알 요리 피단Century eggs, 필리핀의 지렁이 수프Tamilok, 인도네시아 대두 발효칩Fermented chips, 한국의 개고기와 내장Dog meat and offal, 캄보디아 거미튀김Fried tarantula, 태국의 매미볶음Stir-fried cicadas, 필리핀의 개구리튀김Fried frog인데 그 중에 지렁이 요리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영욱은 원래 개고기도 먹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미 늑대의 피도 마셨고, 말린 육포도 곧 먹을 예정이니 이것저것 가릴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맛은 그렇게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기운에 불과한 것이니 그렇게 기함할 일도 아니다.

물론 지렁이를 잡아먹다가 혹시라도 대룡과 연관이라도 있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만 그렇게 큰 지진을 일으킨 녀석이 토룡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

-음, 징그럽기는 정말 징그럽군. 하지만 맛을 따질 상황은 아니지.

다들 외면을 해도 영욱은 염동력으로 지렁이와 흙들을 분리하고는 살짝 불에 익힌 후에 씹지도 않고 삼켜버렸다. 

우직.

-욱!

혹시나 하고 한 번 씹어보니 지렁이 뱃속에 든 흙이 씹혀서 욕지기가 치미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맛은 시금털털했지만 삼키는 것조차 어렵지는 않았다. 조개라면 해감이라도 시키겠지만 지렁이를 민물에 담가둔다고 해서 뱃속에 있는 흙을 다 뱉어낼 리가 만무했다. 

영욱은 근처의 땅을 전부 다 파서 뒤집은 다음 지렁이들을 닥치는 대로 삼켰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영양가가 훨씬 더 많은 듯했다.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닫자 영욱의 입이 지렁이를 삼키느라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눈치를 보고 있던 은영도 그 대열에 동참하고자 했다.

-나도 먹을래.

-뭐야? 안 먹는다더니 갑자기 왜 그래?

-어차피 강해지려고 나선 길인데 이것저것 가린다는 게 좀 그렇잖아. 그리고 나라도 오빠와 아픔을 함께 해야지. 안 그래?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징그러운 지렁이도 삼킬 수 있는 여자라는 게 영욱으로서는 낯설기 그지없었지만 그게 그녀의 본색임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러니 박상태에게도 빌빌거리는 자신을 포기했을 것이다.

-고마워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래, 선심 썼다. 너만 먹어.

영욱은 염동력으로 잡은 지렁이들을 간단하게 손질해서 은영에게로 건네주었다. 

그게 수십 마리나 되다보니 큰마음을 먹은 은영으로서도 움찔했지만 이내 정상적인 물리학의 법칙을 무시하는 모습을 선보이면서 그 많은 지렁이들을 꿀꺽 삼켰다. 마치 만화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

대룡은 자신의 아이들이 지르는 비명소리를 듣고 깊은 잠에서 서서히 깨어났다. 

-감히 내 아이들을 집어삼키다니 용서할 수 없다.

의식이 어느 정도 돌아오자 자신이 눈사태를 일으켜서 청소해버린 줄 알았던 인간들이 버젓이 살아있고, 그것도 바로 자신의 목전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서 야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열이 따뜻한 곳에서 겨울잠을 청하던 자신의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땅속의 온도가 높으니 굳이 잠을 잘 필요는 없지만 겨울이라서 먹을 나뭇잎이 없으니 활동을 중단한 채 모여서 잠을 자다가 몰살을 당하다시피 한 것이다.

물론 산 전체에 살고 있는 지렁이들의 숫자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지만 짧은 시간 동안에 수만 마리에 이르는 지렁이들을 잃었으니 결코 적은 피해는 아니었다. 

이에 대룡은 직접 나서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는 간접이 아니라 직접이었다.

@

드드드드.

분노한 대룡이 다시 몸을 움직이자 대룡산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분노한 대룡의 머리가 땅을 뚫고 나오더니 하늘높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몸통의 폭이 무려 20미터에다 땅밖으로 드러낸 몸의 길이만 해도 2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대룡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야영 중인 영욱 일행들을 덮쳐갔다.

지렁이는 원래 이빨이 없는 생물이지만 갯지렁이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있다. 지렁이의 왕 대룡 역시 엄청나게 큰 이빨들이 달려 있었고, 게다가 쫙 찢어진 입의 길이가 무려 30미터에 달했다. 

그래도 덩치에 비하면 귀여울 정도지만 대룡산에 존재하는 어떤 생물이라고 해도 한 입에 삼키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대룡의 실체

"기상! 밤새 전부 다 얼어 죽었나?"

"아, 아닙니다. 선배님."

"얼른 아침 먹고 출발하자. 오늘은 하루 종일 산을 타야 하니 서둘러야 해."

"예. 선배님."

두 여자와 함께 같은 비트를 사용한 영욱은 괜히 쑥스러워서 노예들에게 큰소리를 질렀다. 물론 각자의 침낭 속에서 잤으니 손도 한 번 잡지 않았지만 그래도 같은 지붕 아래서 잤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결코 적지는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은영과 진소희를 여자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자라는 동물은 건강하면 할수록 아침만 되면 중요한 부위에 힘이 잔뜩 들어가기 때문에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물론 방한용 두꺼운 바지를 입고 있으니 눈에 띨 정도로 표시가 날 정도는 아니다. 유심히 쳐다보면 무골장군無骨將軍이 분기탱천憤氣?

天한 사실 정도는 드러나겠지만 그걸 변태로 몰아붙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록 눈곱이 묻어있긴 하지만 강원대에서 제일 예쁜 두 여자와 같은 비트에서 자고, 같이 눈을 떴으니 그런 생리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사실 시각적인 자극도 컸지만 후각적인 자극도 아주 컸다. 

성숙한 두 여자의 몸에서 뿜어내는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겐의 향기가 침낭 속에 진하게 갇혀 있다가 지퍼를 여는 순간 비트 내부로 폭포수처럼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함께 징그러운 지렁이를 삼켰던 은영마저도 아름다운 여자로 보일 수밖에.

아무튼 아주 건장한 남자라서 둘을 애써 여자로 생각하지 않아도 여자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와작와작.

영욱의 아침 식사는 늘 정해져 있다. 다들 고라니 고기를 맛있게 구워먹는데, 영욱은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벌써 아침식사가 끝났다.

"오빠! 아직도 애견사료를 먹는 거야?"

"이걸 먹고 아토피가 많이 좋아졌는데 이제 와서 배신할 수는 없잖아."

"드림헌터가 되어도 아토피를 앓아?"

"조금 덜하긴 한데 그래도 경험상 미리 조심하는 게 나아. 한 번 확 일어나면 산불처럼 걷잡을 수 없으니까."

요즘 들어서 애견사료를 먹는 것은 피부에 도움이 된다는 점보다 거의 의식儀式적인 행동이었다. 

적어도 사료를 씹고 있는 동안은 자신이 20년 이상 앓았던 아토피에 대한 기억이 한꺼번에 몰려들기 때문에 와신상담의 의미로 먹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은 어디까지 갈 거야?"

"약 1,050미터 높이의 가리산과 그 옆에 있는 854미터의 등골산까지 넘을 계획이야."

"하루에 산을 두 개나 넘는다고?"

"붙어있는 산이라서 하나와 다를 바가 없어."

"거리는 얼마나 돼?"

"직선거리로는 겨우 15km 정도지만 실제로는 산을 오르고 내려가야 하니까 두 배쯤은 될 거야. 게다가 눈까지 덮인 산이니까 서둘러야 할 거야."

"정말 등골 빠지게 생겼군."

은영은 자신이 등골 브레이커 주제에 등골을 운운했다. 산 이름치고는 정말 섬뜩한 이름이었다. 등골을 빼 먹힐지 아니면 등골이 서늘한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

대룡산을 내려오자 가리산까지는 완만한 구릉이 이어지는 평지였다. 영욱 일행은 56번 국도를 가로질러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인가人家나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일행은 마음 놓고 각자의 수준에 맞는 기계체조를 수련하면서 이동했다. 하지만 이 기괴한 모습을 누가 혹시 보더라도 비보이들이 단체로 동계 훈련을 나온 것으로 알 가능성이 높았다. 다들 브레이크 댄스를 추거나 혹은 도마나 뜀틀 운동을 연습하거나 링이나 평행봉 연습을 하는 것으로 알 것이다.

영욱은 그 동안의 경험으로 현실 세상에서의 수련이 더 중요함을 알고 있었다. 기시감을 그저 익숙한 느낌으로만 흘려보내지 말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비지땀을 흘려야만 했다.

공부도 예습과 복습이 중요하듯이 반복해서 하는 훈련이 기계체조를 체득體得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특히 기계체조는 몸에 익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숨 쉬고 걷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반응해야 비로소 전투에서 쓸모가 있는 것이다.

영욱의 몸에서 악취나 노린내가 사라진 걸 보면 이제 기계체조 경지가 10%는 족히 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걸 알려줄 사부가 없으니 그저 짐작일 뿐이다.

진중권의 말로는 두 자리 숫자의 경지에 이르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더니 영욱의 느낌으로는 꼭 그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두 자리 숫자의 경지만큼은 과연 큰 소리를 칠 만도 했다. 기계체조의 초식에 따라서 몸속을 흐르는 생체전기의 전압과 전류량에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따라서 영욱 체내에 있는 네 개의 나노캡슐들이 생산해내는 산소와 포도당의 농도도 훨씬 더 진해졌다. 마치 식물의 엽록소처럼 자체 광합성을 하는 셈이니 덜 먹어도 배가 덜 고프고, 여차하면 부스터로 힘을 보탤 수 있으니 예전보다 훨씬 더 폭발적인 힘을 낼 수도 있게 되었다.

또한 주변으로 전기장을 퍼뜨리는 능력도 크게 늘어나서 제 3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거리가 한층 더 늘어났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10미터 이내의 물체만 자세하게 보고 느낄 수 있지만 전기 반응이 큰 대상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대략적인 느낌은 얼추 50미터까지도 가능해졌다. 물론 현실 세상에서 그렇다는 것이니 2QB 세상에서는 그 범위가 수십 배에 달한다.

하지만 제 3의 눈이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효용은 영욱 자신의 움직임을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동작이 빠른지 느린지 아니면 틀린 부분이나 어색한 부분이 있는지 훨씬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대열의 앞에서 이동하면서 수련 중인 진소희의 움직임 역시 보다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쳐다보지 않고도 쳐다보는 것 이상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게 가능했다. 진소희는 빠르게 발전하는 영욱의 성취에 자극받아서 이제는 아주 진지하게 자신의 기계체조를 수련했다. 그러니 영욱으로서도 덩달아 배우는 것이 더 많아졌다.

진소희가 추는 잔상무는 예술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녀로서도 심화 동작 이상의 초식은 아는 게 없는지 줄기차게 잔상수족, 잔상권, 잔상각 그리고 잔상무의 초식을 춤으로 승화시켜서 추었다. 잔상수족과 잔상권 그리고 잔상각마저도 잔상무의 진짜 초식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제자리나 일정 범위 내에서 수련하는 것과 이동하면서 수련하는 것과의 차이는 아주 컸다. 땅바닥이 고르지 않으니 중심을 잡는 것부터 매번 달라야 했고, 그 중심의 흐트러짐은 초식의 원활한 전개를 방해했다.

영욱은 발끝의 예민한 감각과 제 3의 눈으로 발을 딛는 부분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처럼 인지하고 있기에 그나마 수월한 편이었다. 

하지만 박상태를 제외한 일행들의 경우에는 그게 가장 고역스러운 부분인 듯했다. 발을 디딜 땅을 일일이 내려다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