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5/71)

다행스럽게도 포크의 소환이 해제되기 직전에 이루어낸 쾌거였다. 영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하마터면 쥐포가 될 뻔했네.

-고생하셨습니다. 선배님.

-고생했어요. 오빠!

-정말 대단했어요. 영욱 씨.

-나만 고생했나? 다들 기민하게 움직인 덕분에 무사한 거지. 그리고 상태와 호진이는 특히 더 고생 많았다.

자연의 놀라운 위력 앞에서 속절없이 희생당할 뻔했던 일행은 앞을 다투어서 리더인 영욱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영욱이 1초라도 늦게 발견했다면 눈사태를 견디지도 못했을 것이고, 또한 영욱의 놀라운 정신력이 없었다면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겨울 산이 무섭다고 하더니 눈사태를 당해보니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너는 이름이 뭐냐?

-윤승언이라고 합니다. 선배님.

-너는 무슨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아주 미약하지만 상처 치유 능력이 조금 있습니다.

-제법 쓸 만한 초능력을 가졌군. 다들 앞으로 잘 해보자.

-예. 선배님.

노예 윤승언에게 치유 초능력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영욱은 쾌재를 불렀다. 앞으로는 상대를 기절시키지 않으려고 공격하는 위력을 조절해야 하는 노고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노예를 만드는 속도와 성공 확률을 획기적으로 높여 준다는 걸 의미했다.

남의 영혼을 노예로 만든다는 것이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이왕 나선 길이니 노예사냥 역시 열심히 할 생각이었다. 자신과 윤승언에게 있는 치유 초능력을 이용하면 누구보다도 노예를 더 쉽게 만들 수 있으니 하늘이 내려준 재능을 썩힐 이유가 없었다. 

물론 팔아먹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병력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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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면서 정신력을 보충한 일행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욱은 이동하는 일행의 맨 뒤에서 잔상수족 초식으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한편 활인심방의 구결을 열심히 외우면서 소모된 정신력을 보충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인간지사 새옹지마라더니 대형 눈사태가 대부분의 눈들을 다 끌고 내려간 덕분에 이동하기가 한결 쉬웠다. 포크를 소환할 기력도 없는 영욱은 맨몸으로 기계체조를 수련하면서 이동했다. 

정신력을 거의 다 소진한 박상태도 다시 거인으로 변신하지는 못했다. 뿐만 아니라 몸속에서 요동치는 기운들 때문에 거의 사색이 되어 있었다.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영욱에게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선배님. 

-왜? 

-제 몸속의 기운을 좀 뽑아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조금 전에 무리했더니 눌러놓았던 기운들이 요동을 쳐서 더 죽겠습니다.

-나야 좋지. 그런데 또 드라큘라처럼 피를 빨아?

영욱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박상태의 목을 물어뜯은 것은 둘만 있을 때였고, 지금은 은영과 진소희가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두 여자들 앞에서 그런 짓을 한다는 게 아무래도 좀 부담스러웠다.

-그렇군요. 쳐다보는 눈이 있으니까 남들 모르게 반대쪽 눈알을 뽑아드리겠습니다. 

-안 아파?

-아프긴 하지만 죽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죽어?

-이대로라면 정말 주화입마를 당할 것 같습니다.

-그럼 안 되지. 내 소중한 후배가 죽게 둘 수는 없지. 어서 빼줘.

박상태의 눈알을 삼키면 이번이 두 번째니까 영욱도 소화불량에 걸리거나 운이 나쁘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컥. 여기요.

-기분 참 더럽군. 또 너의 눈알을 삼키게 되다니…….

-덕분에 이제 좀 견디기가 낫습니다.

-이젠 내 속이 더부룩해서 죽을 지경이야. 꺼억.

역시 예상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마치 알레르기처럼 더 격렬한 거부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튼 미리 각오했던 일이니 내색하지 않고 삼킨 눈알을 소화시키기 위해서 기계체조를 시작했다.

이왕이면 기본 동작 초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심화 동작이 소화 흡수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겠지만 눈알을 자발적으로 제공한 박상태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다.

반응이 상당히 격렬하긴 했지만 기계체조 덕분에 조금씩 소화 흡수되기 시작했다. 박상태의 표정을 보아하니 주화입마를 운운하긴 했지만 주인인 영욱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더 실어주기 위함이 분명했다. 

힘을 키우는 방법이야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의 하나가 힘을 거의 다 소진한 상태에서 다른 힘을 소화 흡수하는 것이다. 그러한 내용을 박상태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박상태가 생색내지는 않았지만 영욱은 몸으로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영양 과잉에다 만성 소화불량 상태인 박상태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박상태도 한결 안정된 기운을 더욱더 안정시키기 위해서 영욱의 기본 동작을 따라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일행들은 이동하면서도 나름 기계체조를 연마하려고 애를 썼다. 자연스럽게 기계체조와 이동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은 영욱뿐이지만 워낙 경지가 높은 진소희도 빠르게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초보 중의 초보인 은영과 박상태 그리고 김호진과 윤승언은 원래 쉽지 않은 거려니 하면서도 흉내 내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수련 여행으로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출발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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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방인들의 존재가 지워졌을 거라고 생각한 대룡이 다시 똬리를 틀고 잠이 들었다. 그러자 그의 눈치를 보고 있던 산의 동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땅의 진동에 예민한 대룡으로서는 거인으로 변한 박상태의 걸음이나 영욱의 포크가 발생시키던 진동이 사라졌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규모로 보건대 눈사태에 희생된 동물들도 많을 것 같지만 대룡산의 동물들은 간헐적인 눈사태에 대한 적응이 잘 되어 있어서 그런지 거의 피해를 보지 않았다.

자신의 굴이나 바위틈에서 눈사태를 무사히 피해낸 초식동물들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울잠을 자지 않는 이상 말라비틀어진 풀을 뜯어야 연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룡산은 비록 강원도에 위치한 산이지만 지열이 따뜻한 곳이고 주기적인 눈사태가 일어나는 곳이라서 한겨울에도 푸른빛을 띠고 있는 풀들과 나무들이 많은 곳이다.

토끼와 사슴 그리고 고라니들이 일제히 은신처를 빠져나와서 먹이활동을 개시했다. 그러자 이들을 먹고 사는 포식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상위 포식자가 잠이 들자 대룡산은 다시 살벌한 정글이 되어버렸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대룡산 전체가 먹고 먹히는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또한 영욱 일행을 노리는 포식자도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행들 중에서 영욱이 가장 먼저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은밀한 형태의 기습 공격이 준비되고 있었지만 제 3의 눈이 큰 위력을 발휘했다. 박상태의 눈알을 두 개씩이나 흡수했더니 전기장의 위력과 범위가 더 넓어지고 커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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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태를 쳐다보니 여전히 기계체조 연습에 열중이었다. 영욱은 이번에도 자신이 상태보다 먼저 알아차렸다는 걸 알고서 경계경보를 발령했다. 

제 3의 눈은 박상태로부터 비롯된 것인데도 이런 일이 벌어지니 아마도 박상태가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기운들 중의 하나였던 듯했다.

-상태야. 

-선배님, 부르셨습니까?

-늑대 무리가 접근해오고 있다.

-예? 몇 마리나 되는데요?

-열두 마리다. 그런데 웬만한 수사자만큼이나 큰 것 같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우리를 노리는 건가요?

영욱의 경고에 깜짝 놀란 것은 물론이고 박상태의 표정도 심각하게 변했다. 늑대의 접근이 워낙 은밀해서 아직도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늑대라는 녀석들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의미했다.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싸울 준비를 해.

-아직은 거인으로 변신할 힘이 없는데 어떡하죠?

-탱크는?

-역시 무립니다.

-그렇다면 총과 칼을 소환해서 싸워야겠지. 모두 전투준비!

-예. 선배님.

-알겠어요. 영욱 씨.

-오빠! 나는 어떻게 해?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은영이 일행의 발목을 잡을 우려가 발생한 것이다. 

-너는 저 나무 위로 올라가.

하지만 영욱은 미리 생각해두었다는 듯이 지시를 내렸다. 늑대들의 기척을 발견한 순간부터 생각한 것이 바로 은영을 어떻게 보호하는 게 좋을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대단히 뾰족한 수는 아니다.

-난 나무를 못타.

-2QB 세상은 현실 세계와 달라. 저 정도는 갓난아이도 오를 수 있으니 어서 올라가.

-알았어.

정신력만 뒷받침되면 날아갈 수도 있는 세상이니까 나무 따위를 오르지 못할 리 없다. 하지만 너무나도 간단하게 오르는 걸 보니 그녀의 말과는 달리 원래부터 나무를 잘 타는 듯했다.

*갈등의 시작

늑대들은 은영이 나무 위로 피하자 자신들의 접근이 드러났다는 걸 깨닫고는 모습을 드러내더니 빠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덩치도 수사자 이상으로 컸지만 회색빛 늑대들의 눈은 섬뜩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눈을 쳐다보니 몸에서 힘이 스르르 빠지는 듯했다.

크르르르.

-늑대들의 눈을 쳐다보지 말고 그냥 무시해.

-초, 총을 쏠까요?

-기다려. 조금 더 접근하면 내가 발사 신호를 보내도록 할게. 그리고 다들 소음기를 소환해서 장착하도록 해.

-예. 선배님.

이곳은 총으로는 사람도 죽일 수 없는 세상이다. 그러니 체중이 200kg은 족히 될 것 같은 거대한 늑대들이 총을 맞는다고 해서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영욱은 조금 더 기다렸다가 공격을 집중하기로 했다.

-소희야. 이번에는 네 초능력을 잘 사용해야 해. 알겠지?

-어떻게 사용해야 잘 사용하는 건데요?

-직접 공격에 나서는 녀석의 눈만 멀게 해. 알겠지?

-할 수는 있지만 저 녀석들 정도라면 길어야 2초 정도일 거예요.

블라인드 초능력을 가진 진소희가 하는 말이니 얼추 비슷할 것이다. 영욱은 10초 동안 눈이 멀었으니 이 늑대들이 얼마나 강한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영욱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전혀 통하지 않는다면 곤란하겠지만 1초라도 눈을 멀게 할 수 있다면 분명히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2초면 충분해.

-그리고 다섯 마리 이상은 무리에요.

-그 정도라도 감지덕지해야지. 하지만 너도 힘을 좀 더 길러야겠구나.

-그럴 욕심에 따라나선 거잖아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 처음부터 우리를 반기는 적들이 너무 많군요.

영욱이 뼈있는 말을 하자 진소희 역시 즉각적인 반격에 나섰다. 코스를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위기는 곧 기회야. 위기를 극복하면서 강해지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니까 큰 위기는 곧 큰 기회라고 봐야겠지. 안 그래?

-아직도 여유만만이군요.

-별로 겁나지 않으니까.

-잘났어요. 정말.

-미녀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니 쑥스럽군. 다들 잘 들어. 절대로 대형을 흩트리지 마. 늑대들이 가장 즐기는 사냥법이 바로 흔들기니까.

영욱은 일행의 리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고급 정보를 제공하고 치밀한 전술을 수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늑대의 공격에 대한 핵심적인 팁을 제공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영욱의 차분한 말이 일행들의 마음을 안정시킨다는 것이었다.

-우리들 중의 하나를 노린다는 말인가요?

-하나는 아니겠지만 한꺼번에 전부를 다 노리지는 않을 거야.

-언제부터 늑대 전문가가 되었죠?

-책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지. 저들은 아주 영리한 사냥꾼이니까 먹을 만큼만 사냥하려고 하지, 대놓고 몰살시키지는 않아. 

-겨울에는 먹잇감이 쉽게 썩지도 않는데 과연 그럴까요?

영욱의 보충설명이 꽤나 그럴 듯해서 다들 고개를 끄덕였지만 진소희는 영욱의 견해見解에 대해서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늑대에 대한 생각 자체가 다르다기보다는 그녀의 성격상 남이 자신보다 똑똑하게 구는 걸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듯했다.

-물론 그런 면도 없지는 않지만 저들은 북극곰이 아니야.

-하지만 배가 부르면 사냥감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자도 아니잖아요.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사자는 배가 불러도 움직여. 물론 손쉬운 사냥감으로 보인다면 말이지.

-이제 완전히 포위되었어요.

늑대들이 20미터 거리를 두고 빙 둘러서자 둘 사이의 언쟁도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나도 알아. 산 정상 방향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는 두 놈이 바로 우두머리 암컷과 수컷이야. 공격은 저들로부터 시작될 테니까 다들 주의해.

영욱은 제 3의 눈을 통해서 우두머리들의 덩치는 비슷해 보이지만 가진 힘의 크기가 두 배 이상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냥 늑대가 아니라 말로만 듣던 늑대 환수였다. 하지만 일행들에게는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포클레인은 왜 소환하지 않아요?

-또 눈사태를 당하고 싶어?

-차라리 눈사태가 낫지 않을까요?

-상태도 힘이 다 빠졌고, 나도 아직은 그로기groggy 상태야. 그런데 무슨 수로 그 엄청난 눈사태를 버티겠다는 거야?

-그렇다면 저 늑대들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소희는 비관적인 견해를 보였다. 늑대들의 포위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포위된 일행들에게 절망을 가속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늑대 환수들도 그 효과를 잘 알고 있는지 일단 포위망을 형성해놓고는 공격을 서두르지 않았다.

-이건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냐. 시내를 통과하다가 짐승들의 가죽을 파는 좌판을 보았어.

-그런데요?

-눈사태야 이겨내도 남는 게 전혀 없잖아. 그럴 바에야 늑대들과 싸우는 게 낫지 않을까? 가죽이라도 팔아먹으려면 말이야.

-지극히 영욱 씨다운 발상이군요.

당연히 이겨야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전리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진소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게 왜 나답다는 거지?

-싸우는 상대를 물어뜯고 먹어치우는 게 바로 영욱 씨의 특기잖아요.

진소희는 진중권으로부터 영욱이 박상태의 목을 물어뜯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듯했다. 게다가 몰래 삼키려고 했지만 조금 전에 박상태의 눈알을 삼키는 것도 본 듯했다. 그래서 영욱이 성격상 피가 튀어야 하는 늑대와의 싸움을 일부러 선택한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보인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나도 이제는 프로라고. 대가가 따르지 않는 일을 할 수는 없지.

-대학생이 언제부터 그런 프로 근성이 생겼죠?

-사는 게 각박해지면 대학생이나 직장인이나 별반 다를 것도 없어.

-그런데 저 녀석들은 왜 빙빙 돌기만 하죠?

영욱을 각박하게 살게 만든 장본인 중의 하나인 소희는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주위를 포위하고서 맴도는 송아지만한 크기의 늑대들만 아니라면 한가하게 이야기나 나누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꽤나 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야 우리가 전혀 흩어지지 않으니까.

-기껏 포위해 놓고서 흩어지기를 바란다고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잘 봐!

-대체 뭘 잘 보라는 거죠?

-3시 방향이 조금 열려 있잖아.

-그쪽 방향으로 우리를 몰아가려는 건가요?

-우리가 아니라 우리들 중의 한둘이겠지. 하지만 아무도 달아날 생각이 없으니 잘못 판단한 거라고 봐야겠지.

-하지만 이런 식의 대치가 길어지면 우리가 더 손해일 것 같아요.

-두려움은 에너지를 급속도로 소모시키지. 하지만 우리 일행들 중에서 두려워하는 사람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왜 더 손해라는 거지?

두렵지 않다는 말은 일종의 마인드컨트롤이었다. 공포로 인해 살이 떨리고 호흡이 가빠져야 정상이겠지만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나 다소 과할 정도의 자신감 표출은 일행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신기하군요. 대체 뭘 믿고 그러는 거죠?

-누굴 믿어? 자기 자신을 믿어야지.

-이제 와요.

영욱 일행이 동요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결국은 늑대들이 먼저 공격에 나섰다. 

공격은 역시 산 정상 방향에서 포위 중이던 우두머리 암수 늑대 두 마리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를 포착한 영욱이 침착하게 지시를 내렸다.

-다들 12시 방향으로 공격해.

타타타탕. 푸슝!

김호진과 윤승언은 일제히 자동소총을 발사했고, 영욱과 박상태는 그들의 임팩트에 대비했다.

-소희야! 지금이야.

-블라인드! 블라인드!

-상태야! 암놈 맡아.

-예. 선배님.

퍽! 우지직. 깨갱깽.

박상태는 몸을 두 배 정도로 불려서 암컷 늑대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고, 영욱은 잔상수족으로 수컷 늑대를 상대로 맞섰다. 

간간히 잔상권과 잔상각을 섞어가면서 녀석을 때리고 차는 것을 반복했다. 그것은 소희가 두 녀석들의 눈을 잠시나마 멀게 했기 때문에 가능한 쾌거였다.

두 마리가 뛰어들면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라 기대했는지 나머지 열 마리의 늑대들은 동시에 공격하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의외의 결과에 당황하고 말았다.

깨갱.

흩어지기는커녕 우두머리 암수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영욱의 잔상각은 아주 위력적이어서 발길질에 가격 당한 우두머리 수컷 늑대는 그야말로 실감나게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니 순차적으로 기회를 노리려던 늑대 무리들의 작전에 이상이 생겨버렸다.

무리의 움직임을 지휘해야할 우두머리 암수가 목을 졸린 채로 신음하거나 신 나게 두들겨 맞는 중이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달려들려니 김호진과 윤승언의 총알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타타타탕. 푸슝!

총알을 맞는다고 죽는 것은 아니지만 눈알이 터져나가고 쇄골이 부러지니 그것을 회복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조금이나마 시간이 필요했다.

아우우!

하지만 영욱 일행의 우세가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았다. 영욱에게 두들겨 맞고 있던 우두머리 수컷이 몸을 힘차게 털어 내면서 공격사정권으로부터 벗어나더니 총공격 신호를 내리고 말았다.

-제길! 늑대가 아니라 트롤이었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영욱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포크를 소환해서 탑승하고는 보다 강력한 잔상수족의 초식을 발휘했다. 물론 본래의 크기는 아니고 겨우 영욱이 탑승할 정도의 미니 포크였다. 다급하기는 하지만 또 소란을 떨어서 대룡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퍽. 퍽. 깨갱. 깽.

하지만 잔상수족으로 인해 사람의 모습을 닮은 포크의 크기는 4미터를 훨씬 넘어섰고, 위력 또한 서너 배 이상 강해졌다. 영욱은 개떼처럼 달려드는 늑대들을 닥치는 대로 차고 밟고 후려쳤다. 

'고치삼십육! 고치삼십육!'

아직도 1초에 서른여섯 번의 공격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늑대들을 공격했다. 총알이 난무하고 늑대들에게 물어뜯기는 일행들도 하나둘 늘어났지만 2QB 세상이니까 즉사하는 사람이나 늑대는 하나도 없었다.

영욱은 자신도 모르게 다급해진 마음을 추스르면서 좀 더 부드럽게 잔상수족의 초식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동작이 부드러울수록 위력이 더 강해지는 법이다. 몸에서 불필요한 힘과 동작을 빼야만 임팩트 순간에 모든 힘을 쏟아 부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일행들을 걱정할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영욱은 리더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면 되고 팀원들은 그들의 몫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강하든지 강하지 못하든지 간에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싸울 수 있는 힘이 따로 있다. 영욱이 할 일은 리더로서 팀원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고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영욱이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자 싸움판 전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난전을 유도해서 가장 약한 먹잇감 하나를 다른 곳으로 빼돌리려는 게 이 늑대들의 목적이었다는 사실도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다름 아니라 목표물은 은영이었다.

늑대들을 피해서 나무 위에 있던 은영은 난전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나무 밑으로 끌려 내려오고 말았다. 늑대 환수들이 나무를 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현실의 늑대들과는 달리 2QB 세상의 늑대 환수들은 나무를 잘 기어오를 수 있는 표범 발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은영도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놀라운데?

-오빠, 뭐가 놀랍다는 소리야?

-비명을 지르지도 않은 채 열심히 싸우고 있으니까 말이야.

-오빠는 내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따라나선 줄 알아? 이 정도쯤은 충분히 각오했던 일이야. 

-잘하네.

은영은 최근에 배운 기계체조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동작으로 늑대들의 공격을 벗어나고 있었다. 진소희와는 다르지만 그녀 역시 상당한 수준의 고수가 분명했다.

-그런데 도와주지 않고 뭐하고 있어?

-도와주려고 했는데 의외로 잘 버티고 있어서 작전을 바꾸기로 했어.

-나 지금 힘들단 말이야.

-힘들수록 빠르게 강해지는 법이지. 아무튼 네가 버티는 틈을 이용해서 전세를 뒤집어보자.

-오빠! 정말 이럴래?

-버텨. 힘이 부족하면 젖 빨던 힘까지 동원해.

-내가 미쳐!

약한 척하면서 영욱에게 기대려고 했던 작전이 탄로 나서 미친다는 것인지 영욱이 도와주지 않아서 미친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은영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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