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4/71)

야영지로 돌아가니 박상태와 두 노예들이 아직도 비트를 파고 있었다. 땅이 얼어붙어서 단단한 돌과 같았고, 하나가 아니라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파야하니 쉬운 일이 아닌 듯했다. 

그나마 천하장사를 능가하는 박상태가 있어서 두 개까지는 판 듯했다. 물론 박상태의 삽질은 예전부터 엉성하기로 유명해서 영욱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은영과 소희는 석유버너를 피워서 밥과 김치찌개를 끓이고 있었다. 손이라고는 까딱하지 않을 것 같던 된장녀 진소희마저도 꽤나 익숙한 솜씨로 찌개의 맛을 보면서 간을 맞추고 있었다.

영욱은 된장녀 진소희에게 평생 빨대를 꽂히기 싫어서 파문 당하는 것을 택했지만 그녀가 조신한 모습으로 요리하는 것을 보니 자신이 오판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자신이 섣부른 예상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은영 역시 개과천선이라도 한 듯했다. 예전 같으면 손에 물 한 방울도 묻히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후회는 있을 수 없었다.

'저건 100% 연출이야. 여자들이란 외모와 행동을 보고 믿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야. 특히 저 두 사람은 요물이니까 절대로 눈에 보이는 것을 믿어선 안 돼.'

영욱은 흔들리기 시작하는 자신의 마음을 다독거리며 둘의 요리하는 모습을 애써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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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서둘러서 고라니의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제거하고 다리와 몸통을 해체했다. 그리고 간단하게 불을 피워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불의 초능력을 가진 학과장 진필명으로부터 기인된 초능력이지만 아직은 그 힘이 미비해서 일으킨 불 자체로 고기를 구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불로 나뭇가지를 태우면서 일단 붙은 증폭시키거나 조절할 수는 있었다. 물론 쉽지는 않아서 노력이 필요했다.

모든 게 훈련이니까 영욱은 모든 정신을 불에 집중한 채로 화력 조절을 하면서 고라니 고기를 구웠다. 불이 세면 겉은 타고 속은 익지도 않는다. 반면에 불이 약하면 내일 아침이 될 때까지 익지 않을 것이다.

영욱이 조절하는 불은 당연히 보통의 불과는 달랐다. 영욱의 의사意思에 따라서 춤을 추거나 길게 늘어나기도 했다. 심지어 두꺼운 부위의 고기를 잘 익게 하기 위해서 칼집을 내어둔 그 틈으로도 스며들었다. 그리고 뼛속의 빈 공간은 굴뚝이 되어서 연기를 밖으로 뽑아내기도 했다.

자취생활이 벌써 3년째인 영욱이지만 원래 요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이제는 180도로 달라졌다. 고라니 고기를 먹는 것이 곧 드림헌터로서 강해지는 것이니 정성을 들일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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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걱우걱! 쩝쩝.

하루 종일 눈밭을 뚫으면서 이동했고, 비트를 파느라 힘을 소진했던 박상태와 두 노예는 준비된 밥과 김치찌개 그리고 잘 구워진 고라니 구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후루룩! 쩝쩝!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먹기는 은영과 진소희 두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영욱 역시 충분히 먹어두었다. 소화는 얼마든지 시킬 자신이 있으니까 과식으로 고생할 우려는 전혀 없었다.

식사가 끝나자 영욱은 소화도 시킬 겸해서 기계체조를 천천히 수련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파문당했으니 남에게 함부로 가르치면 안 된다는 금기 사항이 사라진 셈이라 굳이 모닥불 곁을 떠나지 않아도 되었다.

진소희도 그러한 영욱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 역시 영욱의 곁에서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영과 경쟁하느라 너무 많이 먹은 탓에 소화를 위한 체조가 절실한 듯했다.

소희가 움직이자 은영도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했고, 박상태와 두 노예들도 그 체조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영욱과 소희는 마음속으로 구결을 암송한다는 점이지만 겉으로 보아서는 다를 바가 별로 없었다.

지지직. 지지직.

물론 영욱과 소희가 외우는 구결이 서로 같은 것은 아니지만 둘 다 체조를 하는 몸과 몸의 근처로 내뿜어내는 전기의 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영욱은 은영과 박상태 등이 따라할 수 있도록 가장 쉬운 기초 동작만을 반복했다. 하지만 구결을 외면서 수련하는 소희의 기계체조를 보자 문득 호승심이 발동해서 기본 동작과 심지어 응용 동작의 잔상수족 초식까지도 다 동원하고 말았다. 

진짜 구결이 없더라도 별로 아쉬울 것 없다는 일종의 시위였다. 하지만 영욱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자신이 외우는 엉터리 구결로는 도저히 쫓아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희의 부드럽고 숙달된 기계체조를 보면서 울컥하고 눈물을 쏟을 뻔했기 때문이다.

'초식을 외우는 리듬은 비슷한 것 같은데 역시 진짜 구결이 다르긴 다르구나.'

하지만 사부의 간결하면서도 딱딱한 움직임과는 달리 소희의 복잡하면서도 부드러운 움직임을 훔쳐보면서 얻는 것도 많았다. 

같은 기계체조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구사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느낌과 속도가 판이하게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소희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에 영욱은 자신만의 맞춤 기계체조가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저것은?'

영욱은 어느 순간 소희의 움직임이 자신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으로 바뀐 것에 주목했다. 움직이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박상태와 두 노예들은 눈을 뜨고서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영욱은 달랐다.

'잔상수족과 비슷한데 손에 해당하는 부분의 움직임이 마치 권법과 비슷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면 저것이 바로 제 2식 잔상권인가?'

비록 배우지는 못했지만 심화 동작의 초식 이름들은 옛 사부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영욱은 소희의 동작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에 불을 켰다. 

모닥불의 불길을 크게 키울 수도 있지만 진소희가 알아차리는 것은 곤란해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니 자동적으로 제 3의 눈을 동원했다. 

'또 바뀌었다. 이번에는 잔상수족과 비슷한데 다리 부분이 활발하게 움직이는구나. 그렇다면 이게 바로 제 3식 잔상각이겠지.'

소희의 기계체조 성취는 영욱의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어려서부터 기계체조를 수련한 그녀는 또다시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저게 바로 제 4식이라는 잔상무殘像舞로구나. 정말 아름답다. 춤보다 더 춤다운 움직임이야.'

진소희는 잔상수족부터 잔상무까지의 심화 동작 네 초식을 빠르게 반복하면서 저녁에 과하게 먹은 음식을 소화시키고 있었다. 어지간한 남자 뺨칠 정도로 먹고도 날씬한 몸매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기계체조였던 것이다.

그녀는 주변이 워낙 어둡고, 그녀가 체조를 하는 곳은 특히 불빛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이니 눈치 볼 것도 없이 마음껏 초식을 펼쳤다. 

영욱이 멀리서 제 3의 눈으로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도 못했다. 설령 본다고 하더라도 구결이 없으면 채 10퍼센트의 위력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서 걱정하지도 않는 듯했다.

어쩌면 영욱의 시선을 즐기고 있는 지도 몰랐다. 그녀는 몸으로 자신이 된장녀가 아님을 몸으로 항변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다고 된장녀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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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일부러 보여주는 거야? 아니면 구결이 없으면 소용없으니 보여 주어도 무방하다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일부러 보여주고 나서 내 생각을 돌려 보겠다는 것인가?'

영욱은 얼떨결에 횡재를 해서 날아갈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사실 진소희가 고생스러운 겨울산행을 따라나설 이유는 전혀 없다. 

그것도 밤이 되면 정말로 위험할 수 있는 2QB 세상에서의 겨울산행을 떠나야 하는데 아쉬울 것 하나도 없는 그녀가 이런 고행의 길에 기를 쓰고 동참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갈 길이 훨씬 더 험하다는 것을 알기에 미래의 머슴이 될 수도 있는 영욱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영욱이 예상 밖의 고라니를 잡아오자 그녀가 반색했던 것을 고려하면 그녀도 강해지는 방법을 잘 아는 듯했다. 또한 총도 없이 사냥에 성공한 영욱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하기로 한 것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맛있게 구워진 고라니 고기를 충분히 얻어먹었으니 그 대가로 기계체조 심화 동작을 구경이라도 시켜주는 것일 지도 몰랐다. 물론 소희 본인은 과식한 고기를 완벽하게 소화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그녀로서는 영욱이 한두 번 본다고 해서 다 배울 거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녀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영욱의 감각이 아무리 예민하고 기억력이 좋다고는 하지만 그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초식을 겨우 한두 번 보고서 기억할 수는 없다. 그것도 한 초식이 아니라 무려 세 초식이나 되었다.

하지만 진소희는 흥에 겨워서 다섯 번이나 되풀이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또한 영욱 역시 특유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대부분의 동작을 기억하고야 마는 기염을 토하고 말았다.

진소희의 움직임이 다시 기본 동작으로 돌아가자 영욱은 모닥불의 빛이 비치지 않는 곳으로 좀 더 이동했다. 

그리고 자신의 두 눈과 제 3의 눈으로 배운 잔상권과 잔상각 그리고 잔상무로 짐작되는 초식들을 몸으로 익히기 시작했다. 눈으로 보고 머리로 기억한 동작은 언제 잊어버릴지 모르니 서둘러 몸으로서 익히고자 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휘이이잉.

겨울의 산 그리고 깊은 산의 밤은 너무나도 춥고 매서웠다. 하지만 각자 오늘 배운 기계체조를 연마하고 있는 일행들에게는 그리 춥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오히려 후끈 달아올라서 다들 수련에 깊이 몰두했다.

영욱은 어차피 밤새도록 잠을 잘 생각이 없었다. 하루에 쪽잠 두세 번으로 이어온 지 어언 십 개월째이니 모닥불 앞에서 잠깐만 졸면 충분했다. 

다만 2QB 세상에서도 일행들을 모두 모아서 야영하는 이곳까지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함께 잠들 필요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결코 아니었다.

박상태와 두 노예 그리고 은영은 기초 동작 중의 일부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자신들이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으니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동작부터 몸에 익히기로 한 것이다. 다들 그것만으로도 소화 흡수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특히 박상태의 경우에는 삼년 묵은 체증이 함께 내려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을 배우기 위해서 영욱의 노예를 자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열심히 수련에 임하고 있었다.

영욱은 기본 동작의 단순한 반복이긴 하지만 은영의 몸놀림 역시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숨겨둔 한 수는 있는 법이니 개의치 않았다.

영욱은 영욱대로 소희는 소희대로 기계체조의 수련에 심취했다. 하지만 보름달이 머리 위로 떠오르자 영욱은 수련하던 기계체조를 멈추고 노예들이 파놓은 비트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불의 초능력으로 비트의 안에 삐져나온 나뭇가지들을 태워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최대한으로 넓히고, 습기를 제거해서 쾌적하고 따뜻하게 잘 수 있도록 온도를 높였다. 파둔 비트의 수가 고작 둘이니 각 비트 당 세 명씩 들어가서 잠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박상태. 내일은 비트를 사람 숫자대로 파도록 해라.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너희 셋이 함께 자라."

"예. 선배님."

영욱이 두 여자를 데리고 남은 비트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상한 생각을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한 공간이라고는 하지만 각자의 두꺼운 침낭 속에서 각자 자는 것이니……. 

두 여자 역시 추운 바깥에서 자는 것보다는 낫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게 아니라 영욱과 같은 공간에서 잔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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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2QB 세상에서 모습을 나타낸 영욱은 세 노예들을 자신의 곁으로 소환했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니 자신의 영역을 뚫고 은영과 진소희가 나타났다.

-출발!

-예. 선배님.

-여긴 2QB 세상이라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르니까 다들 긴장을 늦추지 마라.

-예. 선배님.

여섯 사람은 온통 안개로 뒤덮인 세상으로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외견상으로는 아침에 출발할 때와 똑같은 장소인 강원대학교 정문 앞이지만 여기는 2QB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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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안개가 사라지고 낯선 거리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길이지만 그 길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판이하게 달랐다. 

와글와글.

마치 5일장이라도 선 것처럼 길을 따라서 난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상인들 중의 하나가 영욱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상인도 이구동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봐! 그 노예를 팔지 않겠어?

-내게 팔면 1골드를 쳐주겠네.

그들의 손가락은 박상태를 가리키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안팝니다.

이것을 필두로 도로변에서 좌판을 펼치고 있던 잡상인들이 앞을 다투어서 흥정을 해왔다. 

대부분이 영욱에게 노예 박상태를 팔라는 소리였다. 그 잡상인들의 눈에는 박상태가 노예라는 게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영욱은 박상태를 팔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은 물론이지만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그 여자 둘을 팔게. 각각 1골드씩 쳐주겠네.

-네게 팔면 3골드를 주겠네.

영욱의 생각을 읽은 잡상인들이 이번에는 은영과 진소희를 팔라고 요구했다. 

대가로 주겠다는 골드가 박상태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걸 보니 그녀들의 미모를 높게 쳐주는 세상은 아닌 듯했다. 외모쯤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곳이니 그도 그럴 만했다.

-이 여자들은 내 노예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같이 다니는가?

-아는 사람이니까 같이 다니는 거죠.

그리고 은영과 진소희 역시 영욱의 노예로 오인하는 걸 보니 일행 중에서 가장 강한 기운을 뿜어내는 영욱을 주인이라고 추정한 듯했다.

-그렇다면 몸에 좋은 건강식들을 사가게. 신선한 사슴고기 말린 육포 100kg을 1골드에 넘겨주겠네. 

-멧돼지 고기가 몸에 더 좋다네. 하지만 가격은 똑같은 100kg에 1골드일세.

-같은 무게에 같은 값이라면 자연산 목청 훨씬 더 좋지. 안 그래?

-목청이 뭡니까?

영욱도 목청이 뭔지 몰라서 물어본 것은 아니다. 잡상인의 목청이 하도 커서 썰렁한 농담을 한 것이었다. 

아무튼 영욱은 1골드의 가치가 상당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연산 목청이라면 현실 세계에서도 고가일 것이다. 그것도 100kg이나 된다면 몇 억을 호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목청도 모르는가? 나무에 달린 벌집에서 채취한 꿀이 목청木淸이고, 바위틈에서 채취한 꿀이 석청石淸이지 뭐겠어?

상대는 산적같이 생긴 외모처럼 둔한지 영욱의 농담을 전혀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영욱이 관심을 보이는 줄 알고 열성적으로 설명하기조차 했다.

-현금으로는 안팝니까?

-왜 안 팔아? 1억이 1골드니까 현실 세계로 나가서 이 계좌로 이체하고 다시 들어와. 

상인이 건네준 명함에는 현실 세계에서의 휴대폰 번호와 계좌번호 등이 적혀 있었다. 영욱은 명함을 챙겨 넣으면서 태도를 분명히 했다. 이름 역시 적혀있는데 놀랍게도 김산적이었다.

-당장 사겠다는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살 일이 있으면 이 명함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젠장! 사람 헷갈리게 굴지 마.

-죄송합니다. 솔직히 이곳은 처음이라서 그런지 좀 얼떨떨합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다 그렇지. 하지만 곧 익숙해질 거야. 그런데 어딜 가는 길이야?

김산적은 생김새와는 달리 상당히 노련한 상술을 가진 자였다.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거래에 도움이 될까봐 살갑게 굴기 시작했다. 영욱도 정보가 필요하니 잠시 멈추어 서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근처의 산에 가려고요.

-무슨 산?

-대룡산요.

-그 산은 위험하니까 다른 산으로 가는 게 좋을 거야. 나물을 캐려면 소채산이 좋고, 칡을 캐려면 가리산이 좋겠지. 하지만 대룡산은 안 돼.

김산적의 친절한 대답에서 영욱은 자신의 일행이 환수 사냥꾼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일행의 숫자가 무려 여섯 명이나 되는데도 불구하고 고작 약초꾼 취급을 받으니 이 상인의 충고에 따라 소채산이나 가리산으로 돌아서 가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해결하고 난 후에야 번복도 가능하다.

-왜요? 대룡산에 위험한 환수라도 사나요?

-산 이름을 들어보면 몰라? 커다란 대룡 환수가 사는 산이라서 대룡산이라고 부르잖아.

-예? 대룡 환수가 산다고요? 그런 것도 있어요?

-이 세상에 없는 게 어디 있어? 물론 나도 가본 적이 없으니 장담할 수는 없지만 실종되거나 소멸된 드림헌터들이 부지기수야. 겨우 살아서 도망친 자들의 말에 의하면 공통적으로 거대한 대룡의 그림자를 보았다고 했어.

-그렇다면 산의 이름과 산에 사는 상태가 비슷하다는 건가요?

소채蔬菜는 밭에 가꾸는 온갖 푸성귀와 나물 혹은 채소를 말한다. 그러니 약초와도 관련이 있다. 

칡에는 나무 칡과 가루 칡이 있는데 후자가 훨씬 더 맛있다. 사투리로 가리 칡이라고도 부르니 가리산에 칡이 많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대룡이야 중화반점의 상호가 아닌 이상 대룡이라는 존재와 관련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공룡일지 토룡일지 진짜 용일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영욱은 대룡산을 첫 번째 도전 대상으로 결정했다. 코스를 바꾸자니 처음부터 피하는 게 썩 내키지도 않았고, 현실 세계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있으니 다른 곳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바꾼다고 해서 더 안전할 것 같지는 않았다. 

-비슷한 게 아니라 거의 똑같아. 나라면 대룡산에는 절대로 가지 않아. 그것도 겨울의 대룡산은 특히 더 위험하니까 참고해.

-충고는 고맙습니다만 꼭 가야할 일이 있어서요.

-죽는 것은 자유니까 마음대로 해.

-또 뵙겠습니다.

-또 볼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운이 아주 좋으면 볼 수 있겠지. 그럼 잘 다녀오게.

김산적은 영욱을 이미 죽은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만큼 대룡산이 위험하다는 소린 듯했다. 하지만 영욱도 묘한 오기가 발동해서 뜻을 굽힐 생각은 전혀 없었다.

*대룡산

이동하는 동안 호객 행위는 질릴 정도로 계속되었다. 춘천 시내를 겨우 빠져나온 일행이 대룡산의 입구에 들어서자 박상태가 영욱을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배님. 

-왜?

-저는 여름에 지나가서 그런지 대룡산이 이렇게 위험한 줄은 몰랐습니다.

-그때보다는 일행들의 수가 많으니 괜찮을 거야.

박상태가 넌지시 다른 곳으로 방향을 바꾸자고 했지만 영욱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위험이 크면 클수록 얻을 수 있는 열매도 달콤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시다면 이제부터 탱크를 소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포크를 소환해야 하려나?

-아마도 그러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여자들이나 탱크에 태워서 이동해.

-예. 선배님.

영욱은 포크의 소환을 뒤로 미루었다. 아직 적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호들갑을 부리기가 민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탱크와 포크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환수라면 보다 더 강력할 것이 분명하니 자신은 히든카드가 되기로 한 것이다.

대룡산은 등산로가 꽤나 넓은 편이라서 탱크의 이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내를 이동하는 것처럼 그리 순탄하지는 않을 수도 있으니 일단은 힘을 아끼기로 했다. 

-그런데 대룡이 뭔지 알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설마 진짜 용은 아니겠지?

-이 2QB 세상에는 용을 닮은 환수도 있고, 선사 시대에 살던 공룡을 닮은 환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드래곤처럼 강하지는 않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 상인은 기함을 하던데?

-대룡이 글자 그대로 아주 큰 용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여자와 노예를 태운 탱크를 먼저 보내고 영욱과 박상태가 멀찌감치 떨어진 채로 그 뒤를 따르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위험하다고 해도 아직은 산의 초입이니까 대화를 나눌 여유 정도는 있었다.

-너는 겁나지 않아?

-팔려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배님께 배운 게 있으니까 이제는 손 놓고 당하지도 않을 거고요.

-그거 약간으로 도움이 돼?

-이제는 짐작하시겠지만 제 힘은 선배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다만 제 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한 탓에 불안정해서 그 기운들이 폭주하는 걸 막는데 많은 힘을 소모하고 있어서 맥을 추지 못했을 뿐입니다.

박상태는 숨기지 않고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 말은 이제 그런 부분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어서 힘쓰기가 한결 용이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영욱 역시 박상태가 가진 힘의 채 10%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박상태가 가진 힘의 20%라도 발휘했다면 주종의 관계가 바뀌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억울하다는 거냐?

-아닙니다. 선배님께서 제 피와 살 그리고 눈알까지도 간단하게 흡수하시는 걸 보고 여차하면 노예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눈알 하나를 빼주고 나니까 남은 기운을 다루기가 훨씬 더 수월했습니다.

-대충 알고 있는데 설명이 너무 길잖아.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하하하! 기회를 봐서 조금 더 떼어드리고 싶다는 말입니다.

-흡수는 한 영혼에 한 번으로 제한되어 있는 게 아닌가?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이라면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박상태가 슬쩍 자신의 기세를 드러내 보이자 영욱도 그가 두 배 이상 강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영욱에게 조금 더 떼어줄 수 있다면 훨씬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영욱으로서도 대환영이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도 나쁘지는 않겠군. 200명을 삼키고도 이상하리만치 맥을 추지 못하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군.

-예. 상대의 몸을 삼킨다고 해서 모든 기운이 제 것이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무협지에 나오는 흡성대법처럼 말인가?

-예. 그런데 선배님께서도 그런 책을 읽습니까? 별명이 공부벌레라던데.

-공부벌레가 아니라 수면벌레겠지. 그리고 공부벌레는 그런 책 읽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사실 최근에야 읽었어. 2QB 도서관에는 북명신공이란 소설책도 있더라고.

흡성대법은 부작용이 아주 많지만 원조에 속하는 북명신공은 그렇지도 않다는 내용의 무협소설이었다. 황당한 내용이지만 영욱은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그것은 자신도 남의 기운을 흡수한 적이 있으니까 그저 웃자고 하는 소리로 느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공부만 열심히 하시는 줄 알았는데 무협소설까지 읽으셨다니 의외군요.

-세상이 판타지와 무협지를 훨씬 더 능가하는 요지경 속인데 살아남으려면 그런 것부터 최우선적으로 읽어야 하지 않겠어?

-그렇군요. 제 생각에도 선배님의 기계체조는 흡성대법의 부작용을 어느 정도 해결한 북명신공처럼 느껴집니다.

-너도 그 책을 읽었어?

-전 원래부터 무협소설과 판타지 소설 마니아였습니다. 필독서라고 볼 수도 있는 책이니까 읽은 게 당연하죠.

-이러다가 네가 나보다 더 강해지는 건 아냐?

영욱의 우려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200명 이상의 영혼을 뜯어먹은 박상태가 그들의 힘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다면 자신을 능가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말 괴물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 번 노예는 영원한 노예입니다. 저는 선배님의 소유물이니까 선배님의 힘이 강해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니 염려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너와는 지독한 악연인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결말이 나다니 우습지도 않아.

-선배님께서는 제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드림헌터의 방문을 받게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아직은 결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이제부터 시작인 거지?

-예. 선배님.

-그런데 이 산은 정말 큰 것 같다. 현실의 대룡산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영욱은 나무들의 크기가 아주 큰 것은 물론이고 산의 크기도 해발 고도 4,000미터 이상을 자랑하는 에베레스트 산에 필적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 그렇습니다. 저 등 굽은 나무를 현실에서 보았을 때는 높이가 대략 10미터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족히 다섯 배도 넘는 것 같군요. 높이만 큰 게 아니니까 실제로는 125배가 넘겠군요.

부피는 길이의 세제곱을 해야 하니 5의 세제곱 즉, 125라는 숫자가 나온 것이다. 영욱은 문득 현실에서 잡은 고라니 생각이 떠올랐다. 

박상태의 피와 살을 2QB 세상에서 취한 다음에 현실 세계에서 눈알을 취하니 그 효과가 더 증폭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양쪽 세상에서 동일하거나 비슷한 존재를 흡수하는 게 좀 더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거대한 고라니와 사슴을 마주치게 되겠군.

-그뿐 아니라 제 느낌으로는 호랑이나 살쾡이도 있는 듯합니다. 노린내가 장난이 아닌데요.

-거대한 용도 산다는데 호랑이 정도는 기본이겠지. 그런데 눈이 너무 쌓여서 그런지 탱크가 거의 맥을 추지 못하는 것 같은데?

-원래 탱크가 눈과 빙판길에는 취약합니다. 게다가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오르지 못할 경사는 아니었지만 미끄러워서 그런 듯했다. 영욱은 다른 조치를 취해야할 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일행의 우두머리니 모든 것은 자신이 다 결정해야 한다는 것도 함께 깨달았다.

-안 되겠다. 탱크의 소환을 취소하고 네가 거인으로 변신하는 게 낫겠다.

-예. 선배님.

박상태는 탱크의 소환을 취소하고 얼른 거인으로 변신했다. 그런데 덩치가 전보다 더 커진 듯했다. 

그래봐야 나무들이 워낙 크고 높아서 보통 사람의 덩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따듯한 탱크 속에서 있다가 갑자기 탱크가 사라지는 통에 눈밭에 엉덩방아를 찧은 은영과 지혜는 거의 햄스터 정도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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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이나마 편하게 이동하던 두 여자의 불평이 시작되었다.

-2미터나 쌓인 눈밭을 대체 어떻게 헤치고 가라는 거야?

-맞아. 탱크라는 이름이 아깝다.

-그럼 둘 다 박상태 어깨에 앉아서 가.

-쟤는 싫어.

-나도 고소 공포증이 있어서 싫어요.

은영과 진수희는 이상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박상태를 벌레 보듯이 했다. 

은영이야 예전에 두들겨 맞아본 경험이 있다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진소희로서는 그런 사연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다가가는 것은 물론이고 쳐다보는 것조차도 꺼렸다. 어쩌면 박상태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까 어깨에 올라타고 이동하라는 이야기에 기겁을 하는 것이다. 

-둘 다 스키 탈 줄은 알지?

-강원대에 다니는 학생들 중에서 스키 못타는 사람도 있어? 하지만 난 스노보드를 더 선호해.

-상태가 앞에서 줄을 끌어줄 테니까 수상스키처럼 타면서 따라가. 잘 알고 있겠지만 녀석의 거대한 발자국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타.

-그러다가 환수가 나타나면 어떻게 해?

-각자 재주껏 피해야겠지.

-눈밭에서 그게 쉬워?

-지금 사파리 투어라도 온 줄 알아? 줄을 끌어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배려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알아.

-알았어. 오빠.

여자라고 해서 챙겨줄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눈이 워낙 많이 쌓여서 이런 배려를 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두 여자들은 벌써부터 공주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곧 여왕 행세를 할 게 분명했다.

태생적으로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살도록 태어났으니 자신들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탱크 속에 곱게 태워서 이동할 거라면 겨울 산행의 의미가 전혀 없다는 것을 모르는 철부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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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과 진소희가 투덜거리면서 각자의 스노보드를 소환하고는 박상태가 던져준 줄을 벌레 만지듯이 잡고 있을 때 영욱은 두 노예들에게도 비슷한 지시를 내렸다.

-너희 둘도 스키를 타고 이동하도록 해. 단, 기관단총이라도 소환해서 환수들의 습격에 대비하도록 해. 너희들도 스키부대는 알지?

-예. 선배님.

-그리고 소희는 무슨 초능력이 있지?

-블라인드 초능력이 있어요.

잠시 망설이던 소희가 자신이 가진 초능력이 무엇인지를 밝혔다. 기계체조만 해도 대단한데 아주 특별한 초능력까지도 보유하고 있는 드림헌터였다. 안타깝게도 아직 사퍼모어 급은 아닌 듯했다.

-블라인드? 상대의 눈을 멀게 하는 거?

-예. 하지만 아주 잠시 동안만 가능해요.

-그럼 내 눈을 멀게 해 봐.

-예. 블라인드! 어때요?

-이런, 하나도 안 보여. 언제까지 지속 가능해?

-10년 정도는 보이지 않을 거예요.

-뭐라고? 그러면 진즉 말했어야지.

영욱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하지만 농담이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호호호! 농담이에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상대의 능력에 따라서 1분 정도까지 가능해요. 그런데 벌써 보이나 보네요.

-10초 정도는 완전 암흑이었어. 정말 대단한 초능력이군.

-그저 잔재주일 뿐이죠.

이런 게 잔재주일 리가 없다. 1초만 눈을 멀게 해도 치명적인 공격을 벗어나거나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무려 1분이라면 두 배쯤 강한 상대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도 급소가 존재하지 않는 2QB 세상에서나 그렇고, 현실 세계에서는 누구든지, 얼마든지 다 죽이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포클레인은 못 몰아?

-예. 예쁜 여자가 어떻게 그런 걸 만질 수 있죠?

-그래도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 받았을 테니까 상당한 소질이 있을 텐데 좀 아깝군.

-타고난 소질보다는 노력이 더 중요한 법이죠. 미안하지만 저는 운전사가 모는 차가 아니라면 차라리 걸어 다니겠다는 주의라서…….

거짓말이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기계체조를 그렇게 배워놓고도 포클레인을 전혀 몰지 못한다는 소리가 쉽게 믿어지지는 않았다. 

만일 사실이라면 그러고도 10퍼센트에 달하는 경지에 올랐다는 게 정말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다가 그게 바로 구결의 진정한 위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처한 상황에 따라서 행동도 달라져야 하는 거 아냐?

-아직 그럴 생각이 들지는 않는군요. 수상스키처럼 매달려서 타는 스노보드도 재미있고요. 아니, 설상보드라고 해야겠군요.

-다치지 않게 조심해.

-예.

영욱은 소희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 원망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임을 잘 알고 있다. 파문을 당했지만 그렇다고 진중권을 영원히 보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자꾸만 신경이 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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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10미터 크기의 거인으로 변신한 박상태를 앞세우고 대룡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자 둘과 노예 둘은 설상보드나 설상스키를 탔고, 영욱은 맨 뒤에서 포크를 소환해서 잔상수족의 초식을 이용해서 마치 거대한 로봇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낮이니까 예민한 시력과 함께 제 3의 눈을 동원해서 주변을 끊임없이 살피면서도 새로 배운 잔상권과 잔상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아직 잔상무는 흉내조차 힘들어서 이동하면서 수련하는 것은 무리였다.

환수나 몬스터 그리고 미지의 존재 대룡과 싸우는 것은 당장의 일이 아니니까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 지금은 꽤나 익숙해진 잔상수족 역시 한 달 이상을 수련해서야 겨우 어색함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숙련되거나 유려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진소희의 움직임은 매우 숙련되었고 유려했으며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했다. 아마도 초식의 수련이 깊어질수록 그러한 단계를 밟게 되는 듯했다. 

물론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아찔한 느낌이 드는 여자의 몸으로 표현하는 움직임이니까 좀 더 유려하고 아름다워 보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영욱은 자신의 잔상초식이 이제 겨우 입문의 경지에 들어섰음을 알게 되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은 아주 흔하디흔한 표현이다. 하지만 그게 세상사의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인지를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사실 영욱도 소희의 잔상수족을 본 이후에야 그 말이 세상의 숨은 진리를 설파하는 말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겨우 몇 번 쳐다본 것만으로도 영욱의 잔상수족은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잔상수족은 그 후의 초식인 잔상권이나 잔상각 그리고 잔상무를 펼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동작이라는 것도 진소희의 잔상수족을 보고 나서야 겨우 알 수 있었다. 결국 잔상수족 초식은 포크를 로봇이나 거인으로 변신하게 만든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평소의 움직임이 안정되고 부드러울수록 에너지 소모는 줄어들고, 힘을 발휘해야할 순간에 빠르고 정확한 동작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긴장해서 온 몸이 뻣뻣해져서는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운동하기 전에는 워밍업의 과정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그런 이유다.

잔상수족의 초식이 부드러울수록 잔상권과 잔상각의 위력이 더 커지고 빨라질 수 있음을 깨달은 영욱은 몸에서 힘을 빼기 위해서 노력했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안정되자 포크는 훨씬 더 부드러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눈이 2미터나 쌓인 가파른 산을 오르고 있는 중이지만 영욱은 마치 가볍게 산보 나온 사람처럼 부드러운 동작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간간히 손을 빠르게 흔들고 회전시켜서 제법 무술 동작과 같은 잔상권을 흉내 내기도 하고, 발을 걷어차고 거두어 들여서 잔상각을 따라 하기도 했다.

비록 훔쳐 배운 것이긴 하지만 영욱에게는 활인심방의 구결이 있었다. 폐목명심좌와 악고정사신은 아무래도 준비 동작의 구결인 만큼 잔상수족과 궁합이 잘 맞는 듯했다. 특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세를 편하게 만드는데 특효가 있었다.

그리고 고치삼십육은 아래와 위의 이빨을 부딪치는 것이지만 손을 흔들거나 발로 차는 것과도 궁합이 잘 맞았다. 활인심방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일 초에 이빨을 서른여섯 번이나 부딪칠 수 있다고 한다. 

손과 팔을 휘젓는 잔상권과 잔상각의 경우에도 일 초에 36번의 동작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30초에 36번 움직이는 것도 어렵다.

양수포곤륜, 좌우명천고 구결은 잔상무와 잘 어울릴 것 같지만 아직 흉내조차도 내기 힘드니 궁합이 맞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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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르르.

대룡산이 낯선 인간들의 침입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겨울에 겁도 없이 대룡산 정상을 향해서 오르는 경우는 아직까지 없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대룡산의 터줏대감인 대룡은 심기가 불편해져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르르릉.

대룡의 움직임은 큰 진동을 만들어서 결국 거대한 눈사태를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

-대규모 눈사태가 발생했다. 방금 전에 지나친 바위 밑으로 얼른 피해!

-예. 선배님.

영욱은 제 3의 눈 덕분에 땅의 진동과 눈사태의 진동파를 가장 먼저 느낄 수 있었다. 먼저 알았다고는 해도 겨우 일 초 정도의 차이니 보통의 경우라면 크게 달라질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근처에 피신할 곳이 있었다.

숲과 산의 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눈사태의 규모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다. 그러니 바위 뒤로 피한다고 해서 이 거대한 눈사태로부터 무사할 수 있다는 보장은 결코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이라면 영욱의 경계경보에 모두가 빠르게 반응했다는 점이다. 박상태도 본래의 몸 크기로 돌아왔고, 영욱 역시 포크를 돌려보내고 높이 2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 밑으로 얼른 기어 들어갔다.

-온다.

불과 2초 후에 거대한 눈사태가 일행을 덮쳤다.

@

-맙소사! 이런 눈사태라니…….

-이런, 바위가 움직인다.

-선배님, 어떻게 하죠?

바위를 믿고 그 밑에 숨었는데 바위가 눈사태의 위력을 견디지 못해서 뿌리째 뽑히려고 하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었다. 

-상태야. 변신해서 버텨.

-예. 선배님.

박상태는 다시 거인으로 변신해서 굴러 내리려고 하는 바위를 몸으로 막아섰다. 그리고 영욱도 얼른 포크를 소환해서 기계 팔로 막아섰다. 

하지만 그 정도로 눈사태에 저항하기가 역부족이었다. 눈사태가 마치 빙하의 흐름처럼 끊임없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님! 아무래도 무릴 것 같습니다.

-무조건 버텨야 해! 바위에 깔리면 여자들까지 다친다.

-하, 하지만…….

-죽어도 버티다가 죽는 거야. 알겠지?

-예. 선배님. 끄아아!

영욱도 눈사태에 떠밀리기 시작하는 바위를 막아서기는 중과부적임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포기할 수는 없었다. 눈사태에 밀린다면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운이 나쁘면 소멸에 이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부르릉.

영욱은 포크의 최대 출력으로 바위를 받쳤다. 눈사태는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길게 지속되었다. 이제는 높은 지역의 눈들이 계곡물처럼 영욱 일행이 있는 곳으로 모여서 흘러내린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산에 쌓인 눈의 양에는 한계가 있으니 눈사태가 지속되는 것에도 명백하게 한계가 있다. 그러니 끝날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거니까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아틀라스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끝없이 바위를 떠받치고 있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영욱은 모든 정신력을 동원해서 바위를 떠받치려고 노력했다. 박상태 역시 고통으로 바들바들 떨면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영욱에게 맞을 때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정말 쉽게 포기하더니 이번에는 제법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짜식! 제법이네.'

학질에 걸린 것처럼 온 몸을 떨어대는 거인 박상태를 보면서 벌써 그만큼이나 기계체조가 그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면 주인인 영욱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일 것이다.

-선배님. 눈사태가 얼추 끝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더는 못 버티겠습니다.

-아니다. 아직 한 차례 더 밀려온다. 조금만 더 버텨 봐!

-예. 선배님.

-끄아아아!

박상태만 한계에 이른 것이 아니었다. 영욱은 진소희가 자신에게 블라인드 초능력을 걸었을 때처럼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영욱 역시 한계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다시 눈앞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선배님! 힘을 내십시오.

-이게 뭐냐고?

-보잘 것 없지만 제 정신력입니다. 

작은 기적은 두 노예들 중의 한 노예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인 줄 알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묘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노예로 거두고서도 박상태에 비하면 너무나도 미미한 힘을 가진 녀석들이라서 아직 이름조차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기특하게도 자신의 정신력을 남에게 전해줄 수 있는 트랜스포트 초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보조 기름통인 셈이었다.

-짜식! 너 이름이 뭐냐?

-김호진이라고 합니다. 선배님.

-그래. 호진아. 고맙다. 잘 하면 네 덕분에 이 위기를 넘길 수도 있겠다. 혹시 힘이 남았으면 상태에게도 좀 전해줘.

-예. 선배님.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보조 기름통치고는 정말 보잘 것 없었다. 겨우 눈곱만큼의 정신력을 전달해 주고는 거의 파김치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노예 김호진 덕분에 또 한 차례의 눈사태를 견뎌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굴러 내리려고 하는 바위를 피해야 하는 일이 남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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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태가 지나갔다. 모두들 옆으로 피해. 상태 너도 어서 피해!

-예. 선배님. 

두 여자와 노예 셋이 피하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영욱은 바위의 아래로 잽싸게 파고들었다. 젖 빨던 힘까지 동원해서 이른바 뒤집기를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영욱은 잔상수족을 최고의 출력으로 발휘하는 한편 뒤로 빠르게 넘어지면서 아직은 다소 어설픈 잔상권과 잔상각이지만 최대한으로 발휘해서 자신을 깔아뭉개려고 하는 거대한 바위를 산 아래로 날려버렸다.

쿵쾅쿵쾅.

지름이 20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거대한 바위가 공중으로 10미터쯤 붕 뜨더니 산 아래를 향해서 맹렬하게 굴러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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