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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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의 명령에 따라 현실 세계로 돌아갔던 노예가 잠시 후 영욱의 옆에서 나타났다.

-이제야 겨우 진짜로 항복한 모양이군.

-예. 주인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2QB 세상으로 넘어오면 너는 어떻게 되지?

-주인님께서 말로든 마음으로든 부르시면 언제든지 자동적으로 소환됩니다.

박상태는 영욱이 원하는 집사 모드로 마치 입안의 혀처럼 굴었다. 이제 지겹던 매타작이 끝났으니 날아갈 것 같은 표정이었다. 노예가 되었다는 자괴감 따위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현실에 있는 네 몸은?

-의식을 잃고 쓰러지게 됩니다만 잠깐 잠이 든 것이니 제 몸에 대해서는 신경 쓰실 것은 없습니다.

-운전 중에 의식을 잃으면 치명적인 사고로 직결되잖아.

-그건 노예의 운명이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영욱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들 중에는 드림헌터의 노예도 섞여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영욱은 자신의 첫 번째 노예 박상태가 그런 식으로 비명횡사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까 빠뜨리지 않고 차근차근 물어보는 것이다.

-현실 세상의 육체가 죽으면 계속 2QB 세상에서 머무르게 되는 건가?

-예. 주인님이 없을 때에도 주인님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대기하게 됩니다. 

-혼자 힘으로는 내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

-예. 하지만 제 노예들이 저를 따라왔던 것처럼 주인님과 함께라면 벗어나는 것도 가능합니다. 명령을 내려도 가능하고요.

-지금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확실하게 확인하는 중이야. 너는 그냥 대답만 하면 돼.

영욱은 박상태가 사용한 단어들 중에서 아직 주인근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노예가 된 주제에 '제 노예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게 바로 그것이다. 물론 그런 빌미가 없었더라도 영욱이 원하는 대답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야단을 들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그렇다면 돌연사를 당하거나 갑자기 의식불명이 되는 경우는 노예들인 경우도 있겠군.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좋아. 너도 자칫하면 돌연사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낮에는 항상 내 근처에서 머물도록 해라.

-고맙습니다. 주인님.

박상태의 입에서는 주인님 소리가 절로 나왔다. 군대 시절 겨우 한 달 차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선임이었으니까 별로 어색해 하지도 않았다.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너희들의 직업은 뭐냐?

-저희들도 강원대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그렇다면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아예 도서관에서 살도록 해라.

-예. 주인님.

-그럼 오늘은 돌아가도록 해.

-예. 주인님.

세 노예를 서둘러서 돌려보낸 것은 영욱도 정신력 보충을 위해서 활인심방을 운용하기 위함이다. 물론 새로 알게 된 사실들에 대해서 고찰도 좀 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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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활인심방을 운용하면서 박상태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곰곰이 되씹었다. <비몽사몽>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드림헌터가 직업적인 노예사냥꾼이라는 사실과 노예를 사가는 노예상인들의 존재 그리고 골드라는 화폐의 존재는 2QB 세상이 그렇게 단순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영욱은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약한 자의 경우는 노예로서의 가치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비교적 안전한 편인데, 강해지면 노예로서의 가치도 커지기 때문에 노리는 자들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안전하지 못하다는 의미다.

2QB 세상이 약육강식이 판치는 정글이라고 하더니 이제야 비로소 그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박상태가 영욱의 노예가 되기를 자청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드림헌터에게 굴복 당하면 틀림없이 노예상인에게 팔려갈 것이고, 그것은 박상태의 영혼이 소멸할 때까지 두 번째 조용한 바벨탑을 쌓는 중노동을 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안면이 있는 영욱의 노예가 되기를 자청한 것이다. 물론 영욱이 박상태를 팔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정보가 궁한 영욱으로서는 박상태를 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또 다른 생각의 요점은 2QB 도서관은 상대적으로 안전하지만 문제는 그 안에서는 기계체조라는 훈련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튼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영욱은 서둘러서 현실 세상으로 되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조금 지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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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 길로 진중권을 찾은 영욱은 박상태로부터 들을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구결을 알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진중권의 표정은 분노로 이글거리기만 했다. 

"다시 말하지만 결혼 없이는 구결도 없다. 그러니 네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라."

"사방에 노예사냥꾼들이 득실거린다는데 꼭 그런 조건을 걸어야겠습니까?"

"어차피 정글의 삶을 택한 것은 내 강요가 아니라 너의 선택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마라."

한밤중에 찾아왔기에 마음을 바꾼 것인가 하고 좋아했는데 결혼은 여전히 하지 않겠다면서 기계체조의 구결만 가르쳐달라니 진중권으로서도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습니다. 차라리 구결 없이 맞서 싸우겠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구나. 남들이라면 좋아서 펄쩍 뛸 정도로 좋은 조건인데……."

"유치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저는 정신적인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정신적인 사랑만으로 결혼할 수는 없어. 생물로서의 숙원 사업인 대를 이어가는 작업은 지극히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니까."

"아무튼 죄송합니다. 사부님."

영욱은 흥분이 가라앉자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도 괴롭지만 진중권 역시 괴로울 텐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 셈이었다.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노예사냥꾼과 노예상인에 대한 공포 때문에 부모나 다름없는 사부에게 강짜를 부렸으니 얼굴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것은 사부가 속물근성을 찬양하고 그런 목적으로 자신을 제자로 들인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더 이상 사부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 미안하지만 나도 이제는 새로운 제자를 찾아봐야 하니까."

"그렇다면 저는 이제 완전히 파문당한 건가요?"

"제자는 딱 하나만 들일 수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렴."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나야말로 욕심이 너무 많았던 것 같다. 그럼 잘 가거라."

진중권의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니 강해보이기만 하던 사부는 간 데 없고, 어깨가 축 처지고 왜소한 초로의 늙은이만 보였다. 진중권 역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죽은 진소희 모친과의 약속일 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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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 같던 기계체조의 전수가 상당히 복잡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삼배지례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사부의 딸과 결혼해야 수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오래된 중국 무협 영화의 단골 레퍼토리라고 볼 수 있다. 

기계체조에는 그러고도 남을 만큼의 효용이 있고, 진소희 역시 까무러칠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있으니 누구라도 그런 제의를 받으면 혹할 것이다. 

영욱도 그러겠노라고 대답만 하면 진짜 기계체조를 배울 수도 있고, 경국지색의 미녀를 아내로 삼을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결국은 거부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게 거부를 해야만 하는 뚜렷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고작 정신적인 사랑을 하고 싶다는 핑계를 댔지만 그런 사랑은 이미 지구상에서 멸종했다는 것을 영욱도 잘 알고 있었다.

요즘 들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은영 역시 강해지겠다는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영욱을 따르는 것이지 그게 정신적인 사랑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그런 사랑을 찾아 나설 시간이나 있냐면 그것도 아니다. 이제는 혼자의 힘으로 강해지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사냥을 당해서 노예로 팔려가게 될 지도 모른다. 물론 노예가 되는 고통스러운 과정도 본의 아니게 당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잠을 자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 2QB 세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 셈이다. 영욱은 이 세상이 바로 요지경 속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근원을 알 수 없는 책임감을 느꼈다. 

책임감이라고 해야 모호하기만 하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험한 정글 속에 방치해 둘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도서관은 아주 훌륭한 도피 수단이자 낙원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러한 도서관이라고 해도 노예사냥꾼들로부터 결코 안전할 수 없음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도서관을 만들고 지키는 동료가 고작 열 명 남짓이니 그보다 더 강하고 많은 수의 적들이 침입하면 속절없이 당하게 될 것이다. 

결국 도서관이란 산속 마을의 작은 울타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영욱은 자신의 영역이나 도서관에서 머물지 말고 바깥세상을 향해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 더 이상 숨지 말고 2QB 세상과 직접 부딪쳐보기로 했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다.

다음날 영욱은 박상태를 포함한 자신의 노예들을 자신의 영역으로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앞으로는 선배라 불러라.

-예. 선배님.

-이제부터 여행을 떠날까 한다. 출발하기 전에 상태 네가 가 본 적이 있는 2QB 세상의 이야기부터 듣기로 하자.

-저는 강원도 일대와 서울의 일부를 다녀보았습니다. 선배님.

놀랍게도 박상태는 힘이나 수준에 비해 상당히 넓은 영역을 돌아다녔던 것이다. 영욱은 꼭 힘과 능력의 크기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게다가 무모함이 꼭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도 배웠다.

-우리보다 강한 드림헌터들이 많겠지?

-우리라고 하심은?

-너희들도 힘을 보태야지.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하지만 큰 길로만 다녀야할 겁니다.

-골목길로 가면 큰일이라도 당한다는 소리냐?

-예. 제 경험이지만 현실 세상의 뒷골목이랑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영욱은 군 생활을 통해서 박상태가 남들이 다니지 않는 길을 선호하는 버릇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 그가 하는 말이니 대충이나마 짐작이 갔다. 노예사냥꾼과 노예상인들이 있는데 뒷골목 깡패들이 없다면 오히려 뭔가 허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산이나 숲은?

-그곳 맹수들과 몬스터들이 득실거려서 오히려 더 위험합니다.

-지형이나 모습은 현실 세상과 비슷한데 그 속에서 서식하는 것은 완전히 딴판인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영욱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고 박상태의 의견을 물었다. 이 방면에서는 그가 바로 선배이기 때문이다.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전국일주라고 생각합니다.

-길에서 위험과 직접 부딪치자는 건가?

-예. 위험은 곧 기회이기도 하니까요. 제가 이 정도라도 강해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여행을 통해서였습니다.

영욱은 박상태가 어쩌면 제 실력을 전부 다 드러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전투 중에는 그가 가진 힘의 10%도 표출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런 그가 왜 그리 맥없이 노예가 되어버렸는지는 여전히 숙제지만.

-너는 별로 두렵지 않은 모양이구나.

-선배님께서 아주 특별한 분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노예인 저야 어차피 결정권이 없으니까요.

-두려움은 리더의 몫이라는 건가?

-예. 저희 노예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존재는 바로 생사여탈권을 지닌 주인님이니까 주인님의 명령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서열의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진리가 바로 두려움은 리더의 몫이라는 사실이다. 리더가 아닌 자들은 리더가 가장 무섭기 때문에 다른 두려움들이 두려움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용맹스러운 특수 부대가 존재하는 것이고, 사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하이에나 무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개들도 서열을 만드는 것은 비슷하지만 리더는 주인이어야 하니까 논외다.

-그렇다면 일단 강원도 일대부터 돌아보기로 하자.

-가장 안전한 이동 루트는 강릉까지 동쪽으로만 직진하는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게 아니고?

-예. 고속도로는 일반 도로와는 달리 훨씬 더 위험합니다. 

-산이나 숲이 더 도로보다 위험하다고 하더니 고속도로는 도로가 아닌가?

-노예상인이나 드림헌터들 중에서도 주로 강자들의 이동로니까 반드시 피해야할 곳 중 하납니다.

-또 피해야할 곳은?

-강력한 환수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입니다.

-맹수가 아니고 환수라고? 

-예. 환상 속의 맹수라는 의미로 그렇게 불립니다.

영욱은 또 <비몽사몽>에서 읽어보지 못한 단어를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현실 세계의 맹수들과 전혀 다른데 같은 맹수로 분류한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기 때문이다.

-길에서 마주 치는 노예상인들과 드림헌터들입니다.

-모든 게 다 버거운 상대라는 말이군.

-우리 수준에서는 솔직히 그렇습니다.

-네 말대로 산을 넘으면서 직진하자면 공작산, 아미산, 계방산, 오대산을 넘어야 하는데도 괜찮겠어?

영욱은 지도를 소환해서 이동 중에 넘어야할 큰 산들의 이름을 읊어댔다.

-예. 상대적으로는 그게 가장 안전합니다.

-돌아다녔던 경험이 있다고 하니까 믿어야겠지? 아니, 믿어야지.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현실 세상의 몸은 어떡하지?

-같은 루트를 통해서 이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래야 조금이라도 힘을 더 쓸 수 있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자. 그럼 내일 아침에 도서관 앞에 모여서 출발하기로 하자. 산행 준비는 물론이고 비박 준비까지도 완벽하게 해서 집합하도록.

-예. 선배님.

영욱은 세 노예들을 돌려보내고 강원도 지도를 다시 펼쳤다. 그리고 가야할 코스를 보면서 굵직한 산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2QB 세상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모르지만 현실 세계에서도 가야할 길이기 때문에 미리 숙지해둘 필요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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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김 사장을 찾아가서 휴가 아닌 휴가를 요청했다. 일당을 받는 일용직이니 휴가라는 개념 자체가 있을 리 없지만 포크의 불하 때문에 무급無給 휴가의 형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일주일이나 자리를 비운다고?"

"대신에 그 다음 일주일 동안 철야작업까지 해서 보충해준다니까요."

"학교에서 단체로 봉사활동을 가는 거라면 어쩔 수 없겠지. 그것도 학점도 걸려 있다는데 어떻게 말려? 잘 다녀와."

"고맙습니다. 사장님."

김길태 사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다소 비아냥거렸지만 영욱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최근 자신의 작업량은 그대로지만 진중권의 작업량이 절반으로 줄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라 땅이 얼어서 가뜩이나 작업 속도가 떨어지는데 자신마저 휴가를 간다니 좋아할 리가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진 씨와 따로 놀던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문제 있을 게 뭐가 있습니까? 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학생이다 보니까 어울려야 하는 동료들도 있고 해서 작업 시간을 달리한 것뿐입니다."

"둘 사이에 문제가 있거나 말거나 작업에 차질이 있으면 곤란해. 그러니까 알아서 해."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 사장이 넌지시 진중권과의 불화설에 대해서 언급했지만 영욱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파문을 당했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너무나도 당연한 태도다. 

하지만 김 사장은 둘 사이의 불화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휴가 역시 그래서 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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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약속장소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의외로 은영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은영 몰래 떠나려고 했는데 가장 먼저 도착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은영을 보고 영욱은 기가 막혔다. 

혹시라도 정보가 샐까봐서 회의도 2QB 세상의 자기 영역에서 했는데 완벽한 등산 준비를 하고 나온 걸 보니 정보가 샌 게 분명했다.

"네가 왜 따라나서?"

"무슨 소리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겨울방학이 되었는데 오빠와 함께하는 겨울 산행과 비박Biwak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잖아."

"우린 놀러가는 게 아냐."

"나도 알아. 그러니까 따라가려는 거야."

"여자의 몸인데 걱정도 안 돼?"

"나는 오빠와 엮이기를 바라는 사람이야. 사고라도 쳐 준다면 나로서는 대환영이지."

"흥!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리고 그 소리가 아니라 동상이라도 걸려서 그 예쁜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썩어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으니까 하는 말이야. 그리고 운이 나쁘면 얼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 당장 돌아가."

"흥! 이 두꺼운 스키장갑과 겨울용 등산화가 안 보여? 그리고 오리털 침낭을 준비했으니까 남극에 가도 얼어 죽을 일은 없어. 요즘은 기술이 워낙 좋아서 침낭이 얼마나 따뜻한지 몰랐지?"

"못 말리는 앤 줄은 알았지만 그 이상이라는 것은 정말 몰랐구나. 아무튼 따라오는 건 자윤데 책임질 수는 없으니까 알아서 해."

영욱은 은영을 쫓아버릴 수도 있지만 못이기는 척하며 데리고 가기로 했다. 어디에서 정보가 샜는지를 알아내려면 은영을 데리고 가는 것이 가장 쉽기 때문이다.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예쁘고, 등산복도 워낙 예쁘니까 눈요기를 위해서라도 데리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불청객은 은영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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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행 장비를 완벽하게 갖춘 또 하나의 여자가 나타났다. 뭘 입어도 보는 사람의 눈을 튀어나오게 만드는 진소희였다. 

요즘 아웃도어들은 워낙 잘 만들고 색상도 예쁘니까 더욱더 그랬다. 저러니 누구라도 명품을 선호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너는 왜 따라나서?"

"그래야 도서관을 출입할 수 있으니까요."

"당분간 도서관에는 못가."

"그래도 따라갈 거예요."

"너희 아빠와의 관계도 이미 끝났어. 그러니까 이젠 제발 좀 날 치근덕거리지 마."

영욱은 이제 사부라는 말을 버렸다. 그래도 진 씨라고 부르지는 못하고 너의 아빠라고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그 소리를 들은 진소희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했다. 그 단어의 의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누가 치근덕거렸다고 그래요?"

"그럼 어떻게 알고 나온 거야? 혹시 내 주위에 정보원이라도 심어둔 거야?"

"무슨 소리를 하세요? 저는 은영이 함께 가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선 거예요."

"쟤가 무슨 권한이 있다고 초청씩이나 해?"

"여자 혼자서는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같이 가자고 했어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은영도 데려가는데 진소희를 데려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한 이유보다 영욱은 둘의 사이가 보통이 아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알아볼 필요성을 느꼈다. 자신과 얽히기 전부터 잘 알고 있던 사이인 듯했다. 이 역시 쉽게 확인하려면 진소희를 데려가면 될 것이다.

"둘은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별로 좋은 인연은 아닐 텐데."

"우리 두 사람 다 영욱 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친하지 못할 이유도 없죠."

"누가 누굴 버렸다고 그래?"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영욱 씨가 우리 두 사람을 버린 게 맞잖아요."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살다보니 별 소리를 다 듣겠네. 그럼 둘 다 오지 마."

버림받았던 사람은 영욱인데 오히려 가해자들이 피해자 행세를 했다. 이러한 진소희의 억지주장에 영욱은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진소희가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영욱은 무조건 그녀의 머슴이 되었어야 했다는 뜻이었다. 

"오빠! 남자가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게 어디 있어?"

영욱의 축객령에 이번에는 은영이 앞으로 나섰다.

"네 맘대로 불청객을 끼워 넣으니까 하는 소리잖아. 지금 놀러 가는 줄 알아?"

"놀러가는 게 아니까 따라나서는 거라고 했잖아. 누굴 바보로 알아?"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해?"

"지구상에서 여자들만큼 계산이 빠른 종족은 없어. 그러니 죽을 수도 있다는 것쯤은 우리도 잘 알아."

"알면서 왜 따라 나서?"

"어차피 오빠에게 목숨을 걸기로 했으니까 죽더라도 오빠 곁에서 죽을 거야."

이쯤 되면 쫓아낼 수도 없어졌다. 물론 쫓아낼 생각은 별로 없었다. 강해지기 위한 수련행이니 강해지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니 여자라고 해서 신경 쓸 이유도 없으니 숫자가 늘어난다고 나쁠 이유도 없다.

"저도요."

"열녀들 났네. 그리고 소희 너는 든든한 아버지가 있잖아. 뭐가 아쉬워서 따라 나서겠다는 거야?"

"요즘 새 제자를 찾는다고 정신이 없으셔서 저는 완전히 뒷전이에요."

"좋아. 내 통제에 확실하게 따른다는 전제 하에 허락하겠어."

"그야 당연하죠."

영욱은 조건을 걸고 두 사람의 동행을 허락했다. 은영의 경우는 짐이 될 공산이 크지만 소희는 밥값을 하고도 남을 실력자이니 굳이 내쫓을 이유가 없었다. 

현실 세상에서의 이동이야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겠지만 2QB 세상에서의 이동은 위험하고 고단한 여정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전투력의 향상을 가져올 수 있는 진소희의 가세는 오히려 반가운 면도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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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대를 출발한 영욱 일행은 시내를 가로질러서 춘천의 동쪽에 위치한 대룡산으로 향했다. 그곳이 바로 첫 번째 넘어야할 산이었다.

899미터의 높이를 가진 이 산은 춘천시민들의 등산코스로도 유명하고, 그 등산로 아래에는 맛있는 춘천막국수를 파는 집도 많다. 

겨울이라 등산객들이 조금 뜸하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다. 특히 엠티비를 즐기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띠었다. 그만큼 길이 넓고 좋다는 소리였다.

강원도의 겨울산은 늘 하얀색 일색이다. 내린 눈이 겨울 내내 녹지 않으니 다른 색깔이 있을 수 없다. 유일하게 다른 색깔이라면 등산객들이 입은 등산복들의 울긋불긋한 원색들이다.

헉! 헉!

은영과 소희 두 여자는 물론이고 영욱과 박상태 그리고 두 명의 노예들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산을 올랐다. 경사도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눈길이 미끄러워서 걷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힘들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여정이 얼마나 위험하고 고통스러울지를 아니까 겨우 이 정도로 엄살을 부릴 수는 없었다. 

사실 낮에 이동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나중에 밤에 2QB 세상에서의 이동이 진짜 문제다. 낮에 미리 이동해두는 것은 2QB 세상에서의 지형을 익히고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 위함이다. 가뜩이나 부실한데 거리가 멀어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 더더욱 위험하기 때문이다.

겨울산행은 아주 단순했다. 걷거나 미끄러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영욱은 자신의 키보다 높은 배낭을 지고도 눈길을 잘도 헤치고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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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어렵지 않게 대룡산 정상을 넘은 일행은 묵어가기 적당한 곳에 멈추어 섰다.

"여기에서 일박하기로 하자. 상태는 비트를 마련하도록 해라. 벌써 까먹진 않았겠지?"

"문제없습니다. 선배님."

"나는 먹을 것을 마련해올 테니까 다들 쉬고 있어."

"네. 오빠."

영욱 혼자서 사냥을 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먹을 것은 충분히 가지고 왔지만 이동하는 동안 박상태가 했던 말 때문이다. 자연산 식물과 고기가 드림헌터의 능력 향상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들었기에 괜한 고생을 자처하려는 것이다. 

물론 2QB 세상의 적응 훈련이라 여기고 하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두 여자도 따라나서지 않았다. 겨울 산행이 그리 만만하지 않아서 일어설 힘조차 없는 듯했다. 하물며 겨울 산에서의 사냥이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 듯했다. 엽총도 없으니 너무나도 당연한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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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짐승들의 겨울나기 역시 고달프기 그지없다. 쌓인 눈 때문에 이동하는 것도 힘들지만 먹을 것 찾기도 힘들어서 굶어 죽는 사슴과 고라니도 비일비재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표범이나 호랑이가 사라진 산이라서 천적의 위험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엽총을 든 인간들이 나타나면 그러한 평화도 사라지고 만다.

오늘은 쇠와 화약 냄새를 물씬 풍기는 사냥꾼 대신 책 냄새와 기름 냄새를 물씬 풍기는 대학생 하나가 사슴과 고라니를 찾아서 겨울 산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킁. 킁.

영욱의 후각은 제법 예민한 편이다. 사냥개의 후각 이상임을 자랑하던 이희승 교수의 팔 하나를 삼켰으니 보통 사람들의 후각에 비할 바는 아니다.

게다가 영욱의 이동은 눈밭에서도 자유로운 편이다. 걷는 것이 아니라 잔상수족의 초식을 이용해서 이동하는 것이니 무릎까지 쌓인 눈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다만 눈이 쌓인 지형과 실제의 지형이 달라서 생기는 헛발질은 그의 기민한 중심 이동으로도 아찔한 순간을 맞이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달리 잔상수족이 아니라서 빠른 발놀림으로 다른 곳을 디딜 수 있었고, 중심을 잃거나 추락하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동 자체가 힘든 곳이니 이동하는 그 자체가 완벽한 수련인 셈이다. 온통 눈으로 덮인 세상이니까 바닥의 상태를 알 방법이 없었다. 바람에 날린 눈들이 깊게 패인 부분이나 심지어 절벽마저도 메워버려서 정말 위험천만이었다.

사실 눈으로 안전하게 보이는 길이 더 위험했다. 그러니 오히려 눈을 감고 이동하는 것이 더 안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영욱은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눈으로 뻔히 보이는 나무에 가서 부딪칠 수도 있고, 더 가파른 곳으로 가서 위험을 자초할 수도 있겠지만 영욱은 이미 눈에 보이는 것들을 믿는 수준은 탈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박상태의 눈알을 삼켜서 생겨난 제 3의 눈을 믿고서 시도하는 모험이었다. 그 눈은 시각이 아니라 전기장이라는 초감각이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기계체조와 맞물려서 시너지효과를 내는 제 3의 눈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박쥐나 돌고래의 초음파나 전기뱀장어의 전기장은 시야가 극단적으로 제한된 곳에서 큰 위력을 발휘한다. 영욱 역시 기계체조의 수련으로 생체 전기의 활용도와 강도를 높였기에 그러한 감각을 활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퍽.

"아이쿠!"

물론 아직은 불완전해서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야만 했다. 나무에 얼굴을 정면으로 들이받은 영욱은 그제야 그게 나무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사실 전기장으로 느낄 수 있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전기장을 가진 생물들은 너무나도 쉽고 정확하게 느낄 수 있는 반면 눈에 덮인 겨울나무를 구분하기는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것은 전기가 거의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죽은 게 아니라 생명활동이 아주 느리게 이어지는 것임을 몸으로 직접 부딪쳐봄으로써 차츰차츰 깨닫게 되었다.

"앗! 따가워."

영욱은 나무에 부딪치고 가시에 찔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는 않았다. 데이터가 쌓일수록 영욱의 움직임이 조금이나마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영욱은 커다란 나무 아래에 숨어 있는 고라니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거침없이 이동했다. 

꾸엑!

눈 속에 몸과 머리를 묻은 채로 숨을 죽이고 있던 고라니가 전혀 어울리지도 않은 멧돼지 소리를 내면서 숨을 거두었다. 영욱의 잔상수족에 걷어 차여서 도주의 기회도 없이 절명絶命해버린 것이다.

뚝.

목이 기역자로 꺾어졌으니 머리는 죽었지만 심장은 아직도 간헐적으로나마 뛰고 있었다. 

쭙. 쭙.

영욱은 드라큘라의 이빨보다도 긴 고라니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뽑아서 기념품으로 챙겨 넣었다. 그리고 소지하고 있던 장미 문양의 칼로 경동맥을 끊고는 입을 대고서 피를 빨기 시작했다.

예전의 영욱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만 박상태로부터 강해지는 요령을 전해들은 이상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상대의 능력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피를 마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행동에 옮겼다. 이미 비슷한 경험도 있으니 간을 볼 것도 없었다.

놀러 나온 것이 아니라 강해지기 위한 여정이니 한 시도 헛되이 보낼 수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피 한 방울 헛되이 버릴 수 없었다.

영욱은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피를 빨고 나서야 일행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물론 기계체조의 초식을 천천히 돌려서 소화 흡수에 도움이 되도록 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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