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2/71)

"아무튼 너는 못난 놈이야."

"인정합니다. 그리고 막걸리는 틀림없이 사드릴 테니까 염려 마십시오."

"사주지 않아도 네 녀석의 이름으로 달아놓을 거니까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사부님."

영욱은 야간작업 겸 기계체조 수련을 포기하고 공원묘원을 벗어났다. 

서로의 공식적인 관계가 끝났는데도 얼굴을 마주하면서 일을 할 정도로 비위가 좋지는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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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 고사를 앞두고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하지만 중간고사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 영욱은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공부에 전념했다. 진중권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동안 공원묘원에도 나가지 않았다. 

다른 일에는 신경 쓸 정신적 여력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작정하고 공부에만 매달렸더니 다행히 기말시험을 잘 치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2QB 도서관이 없었다면 결코 해내지 못했을 성과였다. 

2QB 세상에서 공부한 것이 현실 세계에서 모두 생각나지는 않지만 영욱은 기시감을 이용해서 상당히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그저 막연한 기시감이 아니라 2QB 세상에서 십여 차례 이상 읽은 책임을 알기 때문이다. 

무의식 속으로 깊이 가라앉아 있던 지식들은 영욱의 기시감에 대한 확신의 도움으로 의식의 표면 위로 세차게 솟구쳐 올랐다. 

그러니 현실에서는 열 번이 아니라 다섯 번만 읽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암기도 가능했다. 암기 수준이 아니라 소화가 워낙 잘 되어서 흡수되자마자 살아있는 지식이 되어버렸다.

시험이 무사히 끝나자 공원묘원에도 출근을 재개했다. 물론 주간 근무다. 이제 겨울방학이니까 현실 세계에서는 물론이고 2QB 세상에서도 도서관에 가는 횟수를 조금 줄이고 미뤄두었던 포크 수련에 나섰다. 

다만 이제는 낮 시간에 작업해야 하는 지라 포크를 탄 채로 기계체조 초식을 운용할 시간이 없으니 2QB 세상에서의 수련을 활용해야만 했다.

우우웅.

영욱은 자신의 정신력이 상당히 늘어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엄청난 양의 독서와 사색으로부터 기인된 것이었다.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으로도 정신력이 크게 늘어났지만 다른 정신들의 산물과 교감하고 공부하는 것 역시 정신력의 증대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듯했다. 

물론 그것으로도 기계체조의 경지가 늘어나지는 않았다. 다만 포크를 소환할 수 있는 시간이 두 시간 남짓으로 늘어나서 훈련의 량을 늘일 수는 있었다. 

훈련의 성과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것들이 모여서 기계체조의 경지가 늘어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 믿고 또 믿었다. 

*노예

진중권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야간작업을 포기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야간에 잠을 자지는 않았다. 잠을 자긴 하지만 밤새도록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2QB 세상을 들락거리느라고 바빴다.

오늘도 영욱은 자신의 영역에서 고된 훈련을 끝내고 현실 세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손에 잡힐 듯했던 10%의 경지가 아무리 애를 써도 손에 잡히지 않아서 요즘은 초조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자신의 영역을 찢어발기면서 불청객 하나가 찾아들었다. 바로 박상태였다.

-박영욱! 만나기가 더럽게 힘들구나.

-박상태 너 이 자식, 또 반말이야?

-이미 말했잖아. 내가 생일이 더 빠르다고. 그러니까 네 녀석이 나를 형이라고 불러라.

-선배이자 선임에게 그런 말이 나오는 걸 보니까 이제는 완전히 미친 모양이구나.

-내가 미친 거야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 아무튼 오늘은 맛 좀 봐라.

분위기를 보아 하니 제법 준비를 한 듯했다. 게다가 영욱이 힘을 전부 소진하는 타이밍까지 계산해서 나타나는 교활함도 보여 주었다. 게다가 두 명을 더 데려와서 박상태까지 합치면 무려 세 명이나 되었다.

-내가 훈련을 마칠 때까지 몰래 숨어서 기다린 거야?

-당연하지. 이곳 세상이 정글인 줄도 모르고 힘을 다 뺄 때까지 훈련하는데 그걸 말릴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내가 훈련으로 힘을 다 뺐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오산이다. 나도 이곳이 정글인 줄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웃기지 마라. 그동안 시간이 조금 지나긴 했지만 전에는 겨우 한 시간이 한계였는데 오늘은 무려 두 시간이나 지랄을 했잖아. 

-그게 나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뻥 치지 마! 벌써 몇 배로 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야 확인해보면 알 테지. 그런데 그 두 녀석들은 졸병인가?

사실 영욱에게 남아있는 정신력은 거의 없다. 그래서 바로 전투에 돌입하기보다는 대화를 통해서 시간을 벌어 조금이라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졸병이라기보다는 탱크의 운전과 기관총을 맡아줄 동료들이다.

-졸병 맞네. 너도 쟤들을 돈 주고 샀냐?

-그건 알 거 없고 오늘 너의 포클레인을 고철로 만들어 주지.

-눈알이 하나 빠졌었는데 정확하게 조준이 되겠어?

-오늘은 네 눈알을 두 개 다 뽑아줄 테니까 각오해라.

-내가 할 소리다. 

영욱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박상태는 별로 흥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영욱이 시간 끄는 것을 알고는 K2 전차를 소환하더니 일방적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영욱은 어쩔 수 없어서 다시 포크를 소환해야만 했다. 하지만 싸울 수는 없으니 얼른 간격을 벌렸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을 거다.

-병신아. 저번에는 눈 감고 쏜 거냐?

-혼자라서 제대로 운전하지 못했으니까 네 놈에게 그런 기회가 생겼던 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기회가 없을 것이다.

-여전히 입만 살았군. 이젠 삼대일도 자신 있으니까 얼마든지 덤벼라.

-큰소리는 여전하구나. 공격!

펑! 타타탕. 부우우응.

박상태의 명령과 함께 탱크가 쏜살같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또한 포탄과 기관총도 난사하기 시작했다.

-우웃! 제법인데?

영욱은 전과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걸 곧바로 깨달았다. 가만히 서있는 사람이 쏘는 화살과 달리는 말에서 쏘는 화살의 차이처럼 위력 차이는 극명했다. 또한 포크보다 빠르게 거리를 좁히니 피하거나 막기가 더욱더 힘들어졌다. 예전의 박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영욱 역시 예전의 영욱이 아니었다. 피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거리를 좁히면서 달려들었다. 

-병신! 죽으려고 작정했구나.

펑. 펑. 쾅.

도망가기는커녕 오히려 달려드는 영욱을 보고 박상태가 비웃으면서 대포를 발사했다. 하지만 영욱은 기계 삽으로 흘려서 막거나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면서 달려드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달려들던 포크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신력이 부족해져서 포크의 소환이 해제되거나 움직임이 둔해져야 마땅한 순간인데 오히려 더 빨라지고 움직임도 더 매끄러워졌다.

'이제야 겨우 10퍼센트의 경지에 올랐군. 역시 나는 실전 체질이야.'

단 한 발이라도 정면으로 허용하면 큰 충격을 받을 게 분명했다. 그리되면 이어지는 공격을 피해내지 못하고 자멸할 게 분명했다. 남아있는 정신력이 간당간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단 한 발도 맞지 않으려고 정신을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그래핀 실드를 최대한 두껍게 바른 채 정신을 집중하니 평소보다도 훨씬 더 정확한 동작을 구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활인심방의 구결도 더욱더 리드미컬하게 읊을 수가 있었다. 

그 두 가지 요소가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영욱의 경지를 한꺼번에 두 단계나 올려놓았다. 이제 명실상부한 10퍼센트의 경지에 올라선 것이었다.

찌릿찌릿.

영욱의 몸과 포크의 차체를 흐르는 전기의 강도는 확실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한 자리 수의 경지와 두 자리 수의 경지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잔상수족이었군.'

영욱은 달려드는 탱크를 향해서 질주하는 거대한 덩치의 포크를 느낄 수 있었다. 

찌릿찌릿.

박상태가 덩치를 거대하게 불리면서 저항을 시도해 보았지만 영욱의 더 강한 공격만 받게 되었을 뿐이다. 영욱은 기계체조 10% 경지에서 발휘하는 심화 동작 잔상수족의 초식으로 박상태를 응징하기 시작했다. 덩치는 비슷했지만 가진 힘과 속도는 비교 불가였다.

영욱은 거인 박상태를 간단하게 패대기치고는 그 위에서 껑충껑충 뛰면서 밟아 대기 시작했다. 그 위력이 몰라볼 정도로 강해져서 박상태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지?

-열심히 훈련했으니까. 

-악! 제발 살려줘.

-2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영혼을 뜯어 먹었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겨우 이 정도라니 실망인데? 어서 숨겨둔 수를 꺼내봐.

-이, 이게 전부다. 너무 많이 뜯어먹어서 그런지 오히려 더 소화시킬 수가 없었다. 제발 좀 그만 밟아!

-남의 영혼을 뜯어먹고도 소화를 못 시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군.

박상태가 애원하면 그 이야기를 듣는 척하면서 잠시 공격을 멈추었다가 다시 공격을 재개하곤 했다. 그것은 영욱의 정신력이 거의 바닥이 나서 연속 공격을 펼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박상태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생겼다는 장점도 있다.

-아야! 너처럼 소화력이 좋은 경우는 아주 드물지. 아무튼 항복할 테니까 제발 그만 좀 때려. 제발!

-겨우 이 정도로 항복해? 대체 무슨 흉계를 꾸미려는 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제발 좀 그만해. 아파 죽겠어. 너는 네 공격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는 것 같은데 이건 정말 견디기 힘든 수준의 공격이야.

영욱의 달라진 초식과 공격력은 박상태와 두 부하들을 자지러지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처럼 쉬어가면서 공격하지 않고 평소처럼 소나기 공격을 퍼부었다면 견디지 못하고 벌써 기절했을 게 분명했다.

-아부는 사절이야. 그리고 아직도 반말지거리라니 넌 좀 더 맞아야 해. 

-선배님! 잘못했습니다.

영욱의 지적에 자신이 지금 무슨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지를 깨달은 박상태는 넙죽 머리를 숙이면서 목숨을 구걸했다. 농담이 아니라 너무 아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제 와서 사과한다고 네가 저지를 죄가 사라지는 건 아냐. 좀 더 맞고 나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자.

퍽. 끄아아아.

-제발 살려주세요. 형!

-웃기고 있네. 네 생일이 더 빠른데 내가 왜 네 형이야? 내가 조폭이라도 되는 줄 알아?

-아고고. 제발 때리지 마세요. 뭐든 시키는 대로 할 게요.

영욱은 자신의 정신력이 거의 남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포크의 소환이 해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아마도 곧 승리가 임박했다는 즐거운 생각이 영욱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듯했다. 정신력은 고통 속에서도 성장하지만 기쁨 속에서도 성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너를 어떻게 믿어? 믿고 싶지도 않고.

-남의 영혼을 뜯어먹어서는 결코 사퍼모어의 경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제발 믿어주세요.

세 녀석 모두 납작하게 엎드리자 영욱도 포크의 소환을 해제하고 직접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퍽. 퍽. 퍽. 아고고.

포크보다는 못하겠지만 몸으로 하는 기계체조 역시 10%의 경지라서 세 녀석 모두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끙끙 앓아댔다. 영욱은 한참 동안 푸닥거리를 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박상태가 했던 말 중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대체 뭘 믿어 달라는 거였지?

-저는 이제 한계에 이르렀으니까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형을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저항을 포기하고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미쳤다고 너에게 일을 시켜? 그런데 왜 다들 드림헌터라고 부르는 거지? 대체 뭘 사냥한다는 거야?

다른 영혼을 뜯어먹으면 성장에 제한이 생기니 그걸 사냥하면 득보다 실이 더 많아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헌터라고 칭하느냐 하는 말이었다.

-노예를 사냥합니다. 그래서 헌터입니다.

-노예? 그렇다면 이 두 녀석은 네 노예야?

-예. 그렇습니다. 이 녀석들을 패다가 우연히 노예로 거두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패야 노예로 만들 수 있다는 거야?

-거짓으로 항복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항복하면 노예가 된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영욱은 박상태로부터 전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힘은 자신이 더 강할지 모르지만 박상태는 200명의 영혼을 뜯어먹은 덕분에 아는 것도 많았다. 그러니 그 지식을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야만 했다.

-진짜로 항복하는 걸 어떻게 구분해?

-일단 노예가 되면 결코 주인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원하면 언제든지 소환과 소환 해제를 반복할 수 있습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아무튼 네가 뜯어먹은 200명은 모두 가짜로 항복했다는 건가?

-예. 일단 그 순간만 모면하려고 신체의 일부를 떼어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완벽한 소화 흡수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로 항복한 이 두 녀석은 모자라는 녀석들인가? 

-수십 번의 항복을 받아내다 보면 진짜로 항복하는 순간이 옵니다. 저도 최근에 강해지고 나서야 겨우 상대의 항복을 받아내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그럼 너도 앞으로 수십 번 죽도록 맞아야 진짜로 항복하겠네? 그치?

영욱은 박상태를 자신의 노예로 만들기로 작정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럴 생각이 전혀 없지만 박상태만은 항상 예외였다. 그래야 더 이상의 피해를 막을 수 있고, 발을 뻗고 잘 수 있을 테니까. 

-저는 진짜 항복입니다. 형님의 주먹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겨우 그걸 못 견뎌? 힘은 제법인데 맷집은 허무할 정도로 약한 녀석이었군.

-저도 그런 문제가 있다는 걸 지금에야 깨달았습니다. 늘 피라미들만 상대하다 보니까 맞아본 적이 전혀 없어서…….

-그래도 넌 좀 더 맞아야 해.

-제, 제발 좀 살려주십시오.

-어차피 죽지는 않는 곳이잖아.

-이렇게 강한 공격을 계속해서 당하면 제 영혼이 소멸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영욱의 공격으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맷집이 유난히 약한 박상태의 입장에서는 그런 기분이 들 정도로 영욱의 주먹과 발길질이 위력적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너를 소멸시켜야겠어.

-김 병장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제가 아는 것을 모두 제공하겠습니다.

-네가 대체 무엇을 아는데? 드림헌터가 노예사냥꾼이라는 것도 최근에야 알았다면서.

-이곳에는 노예들을 사가는 노예상인들도 있습니다.

박상태의 노예들이 오히려 주인보다 맷집이 강했다. 하지만 그들은 박상태의 명령에 따라 넙죽 엎드린 채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니 영욱의 공격이 박상태에게로만 집중되었고, 그 매를 견디지 못한 박상태가 매를 줄이기 위해서 쉴 새 없이 말을 걸어왔다.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은 잠시 매질을 멈추기 때문이다.

-뭐라고? 너도 노예를 팔았어?

-아닙니다. 쟤들은 워낙 약해서 사가지도 않습니다.

-노예를 팔면 노예상인들이 대가로 뭘 주는데?

-2QB 세상에서 통용되는 골드를 구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영욱은 박상태에 의해서 또 한 겹을 벗은 2QB 세상에 대해서 솔깃하다기보다는 섬뜩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긍정적인 부분이 있으니 부정적인 부분도 있는 것이 자명하지만 노예사냥꾼과 노예상인이라면 이야기의 수준부터가 달랐다. 숨어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니까.

-화폐가 존재한다면 설마 시장이 있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재래시장도 있고 백화점도 있습니다. 골드만 있다면 뭐든지 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노예상인들은 노예를 사서 어디에 쓰는데?

-바벨탑 건설 현장의 노예로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진짜 항복한 것인지는 몰라도 박상태는 초지일관 공손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영욱의 궁금함을 해소해 주고 있었다. 매질을 멈추게 할 수만 있다면 간이라도 빼줄 기세였다.

-조용한 바벨탑?

-예. 신의 영역까지 쌓아올린다고 들었습니다.

-쌓아서 뭐하게?

-바벨탑을 통해서 신들이 사는 나라에 가면 신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주니어나 시니어 수준이라면 가능하지도 않을까요?

영욱은 박상태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이런 집사가 있다면 꽤 유용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유능하지는 않아도 이렇게 자신이 모르는 것만 대답해줄 수 있어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너답지 않게 왜 이렇게 싹싹하게 구는 거지?

-저를 노예로 거두어 주십시오.

-정말 내 노예가 되고 싶나? 솔직하게 대답해.

-누가 노예가 되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당장 이 자리에서 맞아죽지 않으려면 항복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박상태는 영욱으로부터 도망치기를 이미 포기한 듯했다. 오늘 운이 좋아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이번에는 노예에 대해서 알게 된 영욱이 끝까지 찾아갈 테니 괜한 도주는 매를 더 벌게 될 공산이 컸다. 

그럴 바에야 오늘 깨끗하게 항복하고 영욱의 노예가 될 생각인 듯했다. 

-네가 내 노예가 되면 저 녀석들은 어떻게 되지?

-당연히 주인님의 노예가 됩니다.

-그래? 그럼 너를 내 노예로 받아들이겠다.

-고맙습니다. 주인님.

-하지만 확인절차를 거쳐야겠지?

-진심으로 항복했으니까 틀림없습니다. 주인님.

박상태가 장담했지만 영욱은 콧방귀를 끼면서 박상태의 노예 하나를 지목했다.

-웃기지 마. 너!

-예. 주인님.

-현실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도록 해. 

-예. 주인님.

영욱이 그런 확인 방법을 생각해낼 줄은 몰랐는지 박상태는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항복 절차와 노예가 되는 것은 아주 간단했지만 진짜 항복인지는 박상태 본인도 잘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주인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다시 소환해 보면 알 수가 있다. 

물론 일부러 속이려 한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가짜로 항복한 것이 드러나면 죽기 직전까지 매타작을 당하게 될 테니 박상태가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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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사라졌던 노예 하나가 박상태의 옆에서 나타났다. 영욱의 노예 행세를 하는 척했지만 그것은 아직도 박상태의 노예라는 증거이고, 그것은 박상태가 진짜로 항복한 게 아니었다는 증거였다.

-감히 나를 속이려고 하다니 좀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사, 살려 주십시오. 주인님.

-오늘 이 자리에서 수십 번의 항복을 받아낼 참이니 제발 소멸 당하지는 마라.

퍽. 퍽.

영욱은 정신력이 제법 회복된 것을 이용해서 포크를 소환한 다음 박상태를 마치 몽둥이로 미친개를 잡듯이 패기 시작했다. 

사실 잔상수족이라는 초식으로 인해서 거대한 로봇처럼 변한 영욱은 자신의 공격이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점점 더 초식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야말로 어깨에는 힘이 빠지고 손끝과 발끝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위력적인 펀치와 발길질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공격하는 속도와 위력도 배가되었다.

영욱은 박상태가 기절하려고 하면 잠시 공격을 멈추고서 상처와 의식을 치유해주는 방식으로 패고 또 팼다. 박상태는 영욱의 어쭙잖은 치유 초능력 때문에 마음대로 기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상처가 치유되는 것도 아니라서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진짜로 항복하겠습니다. 주인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아직 열 번도 되지 않았으니까 여전히 거짓말이겠지? 안 믿어.

-주인님에게 치유 초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더 이상의 저항은 무립니다. 기절할 수도 없으니까 더 이상 버티다간 정말 소멸 당하게 될 테니까요.

-그럼 저 녀석들을 보내보면 되겠지. 너! 현실로 갔다가 와.

-예. 주인님.

어쭙잖은 치유 능력이긴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공포 그 자체인 듯했다. 기절할 수도 없다면 소멸 당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커지기 때문이다. 

영욱은 드림헌터들 수준에서는 소멸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걸로 알고 있었지만 박상태의 공포에 질린 반응을 보면 그런 것도 아닌 듯했다. 

그것도 어쭙잖은 치유 초능력과 관련이 있다니 아이러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치유는 일반적으로 데미지를 주는 게 아니라 회복시켜 주는 것인데, 이 경우에는 소멸을 피하기 위해서 일종의 안전장치로 제공되는 실신을 방해함으로써 더 무서운 무기가 되어버렸다. 이러니 세상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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