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1/71)

"그런 사고방식을 고집하면 장가가기는 힘들 거예요."

"내게 시집오겠다고 줄을 섰는데 그런 말이 나와? 너도 줄을 섰잖아."

"큰일 날 소리를 하시는군요. 저는 줄을 선 사람이 아니랍니다."

확실히 진소희의 태도가 전과는 달라진 듯했다. 예전 같으면 화를 내고도 남을 상황인데 대충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줄을 선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마음만 먹는다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다는 표정이었다.

"뽕밭에서는 갓 끈을 고쳐 매지 말라고 하잖아. 오해 받을 짓을 왜 해?"

"고작 도서관에 데려가는 걸로 너무 과한 생색을 내는 거 아닌가요?"

"네 입으로 말했잖아.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도서관이 아니라고. 그런데 고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 거야?"

"너무 생색을 내니까 그러잖아요."

"내가 언제 생색을 냈다고 그래? 이래서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말이 나오는 거야."

"매사에 이런 식으로 공격적이면 적이 많아진다는 것도 모르세요? 아무튼 저와는 대화가 잘 되지 않는 사람이군요."

"그럼 대화하지 말자고. 나도 골치 아프니까."

영욱이 대화 중단을 선언하고 빠르게 앞서가자 진소희도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더니 또다시 입을 열었다. 그 걷는 속도가 어지간한 사람들 달리는 것보다 빨랐다.

"아빠께선 왜 이렇게 꽉 막힌 사람과 결혼하라고 하시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나도 그래. 사부님은 꽤 괜찮은 분인데 딸은 왜 180도로 틀린지 모르겠어."

"그야 엄마 닮아서 그렇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우리 아빠가 좋다는 분은 흔치 않은데 정말 끼리끼리 노는군요."

"끼리끼리 논다고? 자기 아버지까지 엮어서 말하는 소리 하고는……. 그리고 유유상종類類相從이 세상 살아가는 진리 아냐?"

"그만하자니까요? 귀가 잘 안 들리세요?"

"뭐라고? 안 들려."

영욱은 귀머거리 흉내를 내며 일방적으로 대화를 중단했다. 시작부터 어긋난 두 사람은 무슨 말을 해도 삐걱거리면서 다투기만 했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많이 부드러워진 셈이었다.

영욱의 설명을 들은 진중권은 버럭 화부터 냈다.

"안 돼!"

"기초 동작도 안 된다고요? 저희 아버지에게는 기본 동작도 가르쳐 주시면서 왜 안 된다는 거죠?"

"사승 관계나 하다못해 친인척 관계라도 되어야 전수가 가능한 거야. 너는 비인부전이라는 말도 몰라?"

"그렇다면 저희 아버지가 친인척이라도 된다는 겁니까?"

"사돈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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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작업 도중 은영에게 기계체조의 기초 동작을 가르쳐 줘도 되냐고 사부에게 물었다가 혼쭐이 나고 말았다. 영욱이 따져 보았지만 진중권의 입에서는 납득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만 나왔다.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소희랑은 결혼 안 합니다. 결혼하고 싶어도 걔 눈이 워낙 높아서 나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아요."

"하지만 네 아버지와는 이미 결정했다. 너희 둘이 따르든지 따르지 않든지 우린 사돈 맺기로 했다."

"하여튼 두 분 다 특이하신 분들입니다."

"그래. 우리도 특이한 편이지만 너희 둘도 정말 특이하다. 서로 그 정도면 조건이 아주 좋은 편인데 왜 싫다고 난리들이야?"

진중권과 득환은 이미 사돈 이상의 관계가 되어 있었다. 득환은 일주일에 3일 이상 춘천에 내려와서 진중권과 술을 마시고 그로부터 기계체조를 배웠다. 이젠 아들인 영욱을 봐도 별로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말로는 요즘 들어 다시 득환을 괴롭히던 조커 괴물을 피해서 자주 춘천으로 내려온다고 하던데,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걸로 보아서 오히려 득환이 높은 지위를 이용해서 갈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조커 괴물은 영욱과의 싸움에서 입은 부상 후유증이 적지 않은지 춘천에는 아직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지만 득환이 춘천을 찾는 이유는 바로 그 조커 괴물의 준동에 대비하기 위함이라는 대전제大前提가 늘 따라 다녔다. 소전제는 물론 사돈이 될 진중권과의 친목 도모다.

"이런 말씀 드리긴 좀 그렇지만, 소희는 사부님과는 달리 속물입니다."

"걔 엄마가 속물이었으니까 당연히 그럴 거다."

"헐!"

"하지만 그럴 만하니까 그러는 거 아니겠어? 우린 2QB 세상이라는 꿈 아닌 꿈을 좇는 사람들이니까 여자라도 현실적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진중권은 놀라운 언변을 발휘해서 영욱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그게 말장난이 아니라 그의 진심이라서 영욱은 더욱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존경스럽습니다. 속물근성마저도 사랑하라는 사부님의 가르침을 뼈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10퍼센트의 경지는커녕 9퍼센트에도 이르지 못했으니까 그런 말을 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인 것 같습니다."

"나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은 왜 너의 실력이 늘지 않는 거지? 혹시 일부러 훈련을 게을리하는 거 아냐?"

"8퍼센트로 오른 지 아직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요? 매달 그렇게 늘 것 같으면 사부님은 벌써 300퍼센트도 넘을 겁니다."

"그게 아냐. 나도 네 녀석이 싸우는 동영상을 보았는데 얼핏 보아도 잔상수족 초식을 사람의 몸으로 재현한 거였어. 그것도 아주 능숙한 솜씨였어. 그런데도 여전히 8퍼센트 경지라니 이상하잖아."

"그렇다면 포클레인으로 시전하는 기계체조의 경지와는 다를 수도 있는 모양이죠."

"웃기지 마! 그러한 경지는 최소 10퍼센트 이상이라야 가능해. 너, 포클레인에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그렇지?"

진중권은 오늘따라 유달리 작업과 훈련보다는 영욱에게 시비 거는 일에만 집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연말까지는 9퍼센트의 경지로 올리고, 내년 2월 진소희가 졸업하기 전까지 10퍼센트의 경지에 오르게 할 참인 듯했다.

그런데 주마가편走馬加鞭의 의미로만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요즘 들어 훈련보다는 도서관에 더 집중하고 있음을 추궁하는 듯했다. 심지어 2QB 세상에서도 도서관에만 틀어박혀 있다는 소리를 어디선가 들은 듯했다.

또한 진중권의 입장에서는 영욱이 자신의 애마 포크에게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라고 오해할 만한 이유가 있긴 했다. 하지만 영욱은 애써 그 오해를 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자면 긴 설명이 필요한데 그걸 사부 진중권이 알아듣는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상대가 사부지만 굳이 그러한 비밀까지 밝힐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 애마에게 무슨 수작을 걸어요? 그것도 윤활유를 치는 게 아니라 녹슬게 만든다는 게 말이 돼요?"

"내가 바본 줄 알아? 요즘 들어서 움직임이 느려지고 무거워졌어. 전처럼 예민하고 경쾌하지가 않단 말이야."

"그야 날씨가 추워져서 그런 거 아닐까요? 저도 손이 시려서 운전하기가 싫을 정도니 차가운 쇳덩어리인 포크인들 오죽하겠어요?"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작을 부렸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으니까 그쯤해서 그만둬. 그러지 않으면 네 아버지에게 일러 줄 거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어려지고 유치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진중권에게도 그런 면이 있었다. 영욱은 이 말을 듣고 정말 뿜을 뻔했다.

그가 꺼낸 히든카드가 설마 이것인 줄은 몰랐던 영욱은 진소희와의 결혼을 거부했다가는 호적에서 파 버린다는 득환의 위협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실 진중권은 영욱이 득환을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런 식의 협박을 자주 하곤 했다. 그 대부분이 비싼 안주를 시켜 달라는 것과 술을 더 마시겠다는 경우였지만, 이번에는 그 내용이 판이하게 달랐다.

"저희 아버지가 무슨 전가의 보도라도 되는 줄 아세요? 툭하면 이른다고 협박하시게?"

"네 녀석이 사부의 말보다 아버지의 말을 더 잘 들으니까 그러는 거지."

"들을 만한 일을 시키면 왜 안 듣겠어요. 소희는 제 능력 밖이라는데 왜 자꾸 그러세요?"

"네 녀석이 부족한 줄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니 걔를 다루려거나 조종하려고 들지 말고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그냥 받아들여. 시키면 시키는 대로 순종하란 말이다."

남존여비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조선 시대의 여자들에게나 할 법한 소리가 진중권의 입에서 나왔다. 결국 요즘은 여존남비의 시대라는 소리였다. 한술 더 뜨자면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장님 3년으로 일컬어지는 처가살이도 감내하라고 할 판이었다.

"소희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인가요? 아니면 사부님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인가요?"

"둘 다가 시키는 대로 해."

"소희는 저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 당사자인 소희의 말에 따라야지요."

"여자는 원래 내숭을 잘 떠는 법이야."

"내숭이 아니라 진심이에요. 가진 재산이 없다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번듯한 외제 차도 없고 별장도 없는 남자와 결혼할 여자가 아니라니까요."

진소희는 10억이 넘는 외제 차를 타고 다니던 배경태마저도 썩 만족스러워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바로 고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영욱의 재주로는 뼈 빠지게 일해도 그녀를 만족시키기는 힘들다고 봐야 했다. 그런 식으로 인생을 소모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럼 마련해. 너도 이제는 돈 잘 벌잖아."

"따지고 보면 억대 연봉이니까 잘 버는 편이긴 하죠. 하지만 20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심지어 세금도 내지 말고 모아야 겨우 가능할걸요. 그때까지 소희가 기다려 줄 것 같아요?"

"그럼 미리 사 주고 천천히 할부로 갚아 나가면 되잖아."

"걔 성격에 10억짜리 외제 차라고 해서 20년이나 몰려고 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20년 동안 빚을 갚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갚아도 빚이 늘어나기만 할걸요. 전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아요."

영욱은 진소희와 결혼하게 되면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했다. 기계체조의 경지가 올라간다고 해서 돈을 더 벌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 일개미처럼 살다가 죽게 될 것이다.

"남자가 자기 여자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요즘 젊은이들이 이기적이라고는 하지만 너만은 아닐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구나. 너 역시도 날로 먹을 궁리만 하는구나."

"그렇게 헌신적으로 봉사하지 않아도 저 좋아해 주는 사람은 많아요. 그러니 소희와의 결혼은 제발 없었던 걸로 해 주세요. 예?"

"내가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네가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어쩔 수 없구나. 걔는 상당한 수준의 드림헌터야. 너보다도 훨씬 수준이 높지. 그러니까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러니 모시고 살 가치는 충분하다는 말이야."

처음부터 데릴사위도 아닌 머슴으로 들이겠다는 소리였다. 이런 분위기라면 진소희와 결혼하더라도 같은 방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잘 수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라 당연하다는 듯이 구는 진중권을 보니 그는 그런 악조건마저도 감지덕지하면서 합방을 했던 듯했다. 그가 총각이라고 주장하니까 결혼이 아니라 한두 번의 합방인 셈이다.

그리고 운이 아주 좋아서 자신의 아내를 쏙 빼닮은 진소희를 얻었고, 그게 딸 바보인 그가 말하는 '모시고 살 가치'인 셈이다.

영욱은 얼핏 진소희가 진중권의 핏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엄마를 닮았다지만 진중권을 닮은 부분이 너무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영욱의 생각일 뿐이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엄마를 닮았다는 진소희의 말에서 뻐꾸기의 탁란托卵을 연상할 수 있었다.

요즘이야 세상이 워낙 좋으니 유전자 검사를 하면 대번에 친자 여부를 알 수 있겠지만, 남의 가정사에 개입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만 영욱으로서는 자신을 전혀 닮지 않은 아이를 자기 자식이라 여기며 키울 생각은 없었다.

"소희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저도 잘 알아요. 솔직히 얼굴만 해도 그 이상의 대접을 받고도 남죠. 몸매는 완전 예술이니까 그 몇 배의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왜 자꾸 딴소리를 해?"

"문제는 제가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소희가 여왕 대접을 받으면서 살게 그냥 놔두세요. 남자 고르는 재주도 상당하던데 괜히 방해나 하지 마시고."

"너는 기계체조가 남에게 물려줄 수 있는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절을 세 번씩이나 하고서 사승 관계를 맺었잖아요."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야. 사실 사승 관계야 아무런 법적인 효력도 없잖아. 그러니까 내 딸과 결혼하라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진중권은 영욱이 끝내 자신의 뜻에 따를 것 같지 않자 태도를 바꾸어 협박 모드로 나갔다. 영욱은 그게 진중권의 진심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보니 잔상수족 다음 초식을 가르쳐 주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었군요."

"맞아. 나는 너를 믿지만 그 믿음을 좀 더 공고히 할 필요는 있겠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도 있는데 그게 결혼 동맹보다도 못한 것이었다니 실망입니다."

영욱은 사부 진중권에게 정말로 실망했다. 딸 바보인 줄은 알았지만 그에게 자신의 인생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정도로 바보였던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의미가 없으니 제자 양성이 의미를 가질 리 없다. 그저 대를 이어서 딸의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한 머슴을 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진중권이 그토록 서두르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자신이 떠나더라도 진소희의 수발을 들 머슴은 있어야 하니까.

"군사부일체라는 말을 참 오랜만에 들어 보는구나. 하지만 군君은 이미 없는 세상이고, 사부와 아버지가 시키는데도 끝까지 개기는 네 녀석이 할 말은 아니라고 본다. 심지어 사부를 속이기까지 하는 놈이니……."

"속이는 거 없다니까 자꾸 그래요. 아무튼 수제자에게 가르치는 것이 따로 있고, 허드레 제자에게 가르치는 것이 따로 있다는 말이군요."

"당연하지. 속물근성이라 욕할 수도 있겠지만 제자라고 해서 다 같은 제자일 수 있겠냐?"

"듣고 보니까 일리는 있군요. 하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그럼 가서 훈련이나 할게요."

영욱은 화가 치밀어서 얼굴이 홍시처럼 벌겋게 변했다. 어지간하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성격이지만 아버지만큼이나 믿었던 사부 진중권의 본심을 알게 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딸자식을 가진 부모의 입장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이건 도가 지나치다고 여겼다. 더구나 사제의 연을 맺은 것마저 아무런 의미가 없다니, 여태까지 배웠던 기계체조에 대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렇다고 사부에게 다른 드림헌터들처럼 막말을 하거나 공격할 수는 없으니 조용히 한쪽 구석으로 찌그러져서 화를 삭여야만 했다. 하지만 진중권은 영욱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냥 못 이기는 척하고 결혼하겠다고 말하면 되잖아. 소희가 너를 끝까지 거부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제가 약속을 하면 다음 초식을 가르쳐 주겠다는 건가요? 그런 거죠?"

"당연하지. 원칙대로 하자면 혼인신고를 하고 난 후에야 가능한 것이지만 너와 나 사이에 그렇게 박절하게 굴 수는 없으니."

영욱은 너와 나 사이라는 말에 정말 울컥했다. 정말 소중한 사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이였다는 게 너무나도 서글펐다.

영욱이 느끼는 배신감은 은영이 자신을 떠났을 때 느꼈던 것보다도 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벌써 10개월 가까이 밤낮으로 부대끼면서 쌓아 온 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 느낌으로는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심리를 이용하시려는 것 같습니다만, 나쁜 조건은 아닌 것 같네요."

"알면 그냥 포기해. 소중한 기계체조를 얻은 대신에 네 인생은 내 딸 소희를 위해서 봉사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래야 서로가 공평하잖아."

"며칠만 더 생각해 볼게요."

"잘 생각해야 할 거다. 늘 이런 기회가 오는 것은 아니니까."

"눼."

결정을 내리는데 며칠 동안의 말미를 얻었지만 볼멘소리를 보자면 쉽게 결심이 바뀌지는 않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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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홍시처럼 달아오른 영욱은 포크를 타고 기계체조의 초식들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잠시 후, 영욱은 분노를 삭이고는 초식 연습에 푹 빠져들었다. 그동안 배운 초식들의 위력을 비교해 보니 다들 괜찮은 초식이지만 가장 최근에 배운 잔상수족만큼 강력한 초식은 없었다. 그러니 다음 초식은 얼마나 더 위력적일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마음에 들지도 않는 진소희와 결혼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도 고개를 내젓고는 있지만, 만일 태도가 돌변해서 그러겠다고 대답하기라도 하면 더 큰 문제였다. 보나 마나 죽을 때까지 머슴처럼 돈이나 벌어다가 바쳐야 할 것이다.

사실 요즘은 더 이상 강해져야 할 이유가 어느 정도 사라져서 목표 의식이 희박해진 상태다. 박상태도 나타나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고, 이희승 교수나 김진명 학과장과도 싸움을 멈춘 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조커 괴물 역시 아직은 소식이 없었다.

한 달 동안이나 진상을 떨어 대던 배경태와 그의 떨거지들은 어영부영 정리되었고,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그보다 더 강한 자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2QB 세상의 도서관을 발견하고 나서는 굳이 강해질 이유마저도 사라졌다. 그 안에만 있으면 충분히 보호받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아직까지는 넓은 2QB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서관 내부에 머무르면 사서의 권한이라는 사기적인 수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현실적으로 어지간한 수준의 드림헌터들이라도 행패를 부릴 수가 없었다.

물론 사서의 권한마저도 넘어서는 진짜 강력한 드림헌터들이 쳐들어올 가능성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일이 없으니 영욱으로서는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씩이나마 줄어들었다.

우물 안 개구리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이미 어느 정도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있으니까 마음에 들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면서까지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이다.

사실 진소희 정도라면 퀸카 중의 퀸카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상황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뼈 빠지게 일하다가 죽으니 사역마가 된다고 해서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영욱은 묘한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자기 자신을 상대로 예쁘다고 해서 반드시 사랑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사랑스럽지도 않은 여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줄 수는 없는 일이다.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것 같은 기초 동작들과 이족 보행을 위시한 기본 동작 그리고 비록 한 초식밖에 배우지 못했지만 심화 동작의 잔상수족까지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사실 요즘 들어서 기계체조의 경지가 더 오르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포크에 전도성이 아주 좋은 그래핀 실드를 덧씌우자 상당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서 오히려 더 그래핀을 사용하지 않았다.

현실 세상이니까 겨우 1퍼센트 함량의 그래핀에 불과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래주머니를 차고 훈련해도 부족할 훈련 과정에서 그런 도움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전투 중에는 억제할 필요가 없으니 자신의 몸에도 그래핀 코팅을 씌워서 사용했다. 그래서 동영상과 기계체조의 수준이 다르다는 이야기가 사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이다. 대번에 알아차리는 것을 보자면 진중권의 24퍼센트라는 경지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포크를 운전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몸으로 싸우는데 그래핀 코팅을 왜 했냐고 하면 효과적인 기계체조를 위해서는 기계와 조건이 비슷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 역시 전도체로 코팅하는 게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까 기계체조인 것이다.

물론 아이언맨 수준의 두터운 철갑을 두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래핀 성분이 섞인 실드를 두르고서 싸우면 움직이는 속도 면에서나 파괴력 면에서나 공격을 당했을 때 충격 완화 면에서도 꽤나 큰 도움이 되었다. 그야말로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다목적 실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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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영욱은 은영에게 사부의 반대로 기초 동작도 가르쳐 주지 못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는 도서관에서 책이나 열심히 읽자고 했다. 물론 진소희가 도서관학파에 합류할 거라는 말은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사부께서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걸 어떡해?"

"그럼 나도 제자로 받아 달라고 할까?"

진중권이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이는 목적을 알고 있으니 은영의 말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은영에게까지 해 줄 이유는 없었다.

"네가 가서 직접 청해 봐."

"그것 말고는 배울 방법이 없잖아. 그렇다고 친인척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리도 없잖아. 혹시 아들이라도 있대?"

"소희가 무남독녀 외동딸이라고 들었어. 그보다 우리 사부님이랑 결혼하는 건 어때? 법적으로는 아직도 총각이라던데."

"내가 미쳤어? 애 딸린 노인네와 결혼하게? 그리고 애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신문에 날 일이라도 있어?"

은영도 결혼과 같은 수단이 아니면 기계체조를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듯했다. 그녀로서는 영욱과 결혼하면 배울 수 있으니 무리한 조건의 결혼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첩으로 들어가든가."

"됐네요. 선술집 주모 아줌마와 경쟁하고 싶은 마음은 꿈에도 없으니까."

"아무튼 가르쳐 주지 못하게 되어서 아쉽다. 대신 내가 하는 동작을 눈여겨보고 연습하든지 해. 우리 아버지도 그런 식으로 배우더라."

"쳐다본다고 해서 배울 수 있다면 그게 무슨 무술이야?"

"누가 무술이라고 했어? 그냥 체조야. 호신용 체조."

영욱은 이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막나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술 이상의 기계체조를 그냥 체조로 비하한다는 것은 뭔가 결심을 굳혔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쳐다보고서 훔쳐 배우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체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오빠가 그 기계체조를 수련하면 어떤 줄 알아?"

"왜? 멋있어?"

"당연히 멋있지. 특히 오빠 몸에서는 전기가 찌릿찌릿 흐르는 것 같다니까. 그런 게 어떻게 그냥 체조일 수 있어?"

"아무튼 배우고 못 배우고는 네 팔자려니 생각하고 훔쳐서 배워. 내가 직접 가르쳐 줄 수는 없으니까."

"혹시 구결이라도 살짝 알려 줄 수 없어?"

은영은 영욱의 상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전기가 찌릿찌릿 흐르는 게 바로 기계체조의 요체인 셈이다.

하지만 영욱은 구결이라는 단어에 마치 벼락에 감전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진중권이 내놓지 않고 있는 것이 잔상수족의 초식이 아니라 바로 구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구결? 나도 배운 게 전혀 없는데 어떻게 가르쳐 줘?"

"뭐야? 오빠도 아직 못 배운 거야?"

"그렇다면 구결이 있는데, 진소희와 결혼하지 않아서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말인가?"

"아, 아마도 그럴 거야. 구결도 없는 게 무슨 무술이겠어?"

"그냥 체조라니까 그래."

은영은 실망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녀가 배우기를 원했던 것은 기초 동작이 아니라 처음부터 구결인 듯했다. 구결이 있다고 확신하는 그녀의 행동이 다소 수상했지만 그 주장에는 나름 일리가 있다 싶어서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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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구결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잔상수족 다음의 초식이 아니라 구결이 더 큰 문제일 수도 있겠군.'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펼쳤지만 은영이 언급했던 구결이라는 단어가 영욱의 머릿속을 자꾸만 맴돌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진소희와 결혼할 테니까 제발 구결을 알려 주십시오.'

라고 애원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일 자신이 먼저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구결을 알려 주지 않았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머슴이 지나치게 강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 또다시 얼굴로 피가 쏠렸지만 활인심방의 구결을 외우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흥! 구결이라면 나도 가지고 있다. 비록 활인심방의 구결이긴 하지만…….'

말도 되지 않는 소리지만 오기가 생겨서 억지를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가만히 더듬어 보니까 그냥 머리를 검지로 두들기는 것과 구결을 외우면서 활인심방을 돌리는 것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목명심좌, 악고정사신, 고치삼십육, 양수포곤륜, 좌우명천고 총 스물다섯 자가 영욱이 유일하게 아는 구결이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잔상수족의 초식을 떠올리면서 활인심방의 구결로 박자를 맞추어 보았다.

'조금 나은 것 같기는 하지만 역시 제짝은 아니군.'

사실 말이 되지도 않는 짓이지만 느낌상으로는 그냥 움직이는 것보다 조금이나마 나은 듯했다. 물론 심상 훈련이니까 아직은 확실한 것이 아니라서 나중에 직접 몸으로 움직여 볼 참이었다.

'아차차! 그게 아니라 몸으로도 기계체조를 수련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깜박했군.'

영욱은 잠시 도서관 밖 잔디밭으로 가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지금은 책을 읽을 기분이 아니니까 쓸데없는 시도라도 하면서 마음속에 응어리진 울화를 풀어내려고 했다.

찌릿.

활인심방의 구결을 속으로 외우면서 기계체조의 움직임과 박자를 맞추니 아주 조금이지만 전기가 더 강하게 흐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엉터리 막무가내 시도는 주화입마를 유발하는 게 오히려 정상적인 결말인데 미세하게나마 진기를 도인하는 능력이 있는 활인심방과 전기를 발생시키고 원활하게 흘려야 하는 기계체조는 묘하게 궁합이 맞아떨어졌다. 물론 제짝은 결코 아니었다.

영욱은 기계체조에 그래핀 실드와 활인심방의 구결까지 총동원하면 각각 1퍼센트의 증가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시너지 효과가 있어서 2퍼센트 이상의 증가 효과가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그리되면 억지로라도 10퍼센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고, 몸에서 풍기는 육식동물의 노린내를 지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느낌이 오는 지금 당장 실행하지 않으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쇠뿔은 단 김에 빼라는 말처럼……. 

'젠장! 저 여자는 도움이 되는 데가 없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도서관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상황이 더 나빴다. 진소희가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욱은 10%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놓쳤다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었다. 물론 느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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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수련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었어요?"

진소희가 급히 접근한 것도 나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로서는 기계체조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유출되는 것을 막아야할 입장이니까.

"어차피 구결도 없는 건데 뭐가 대수야?"

"그,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구결이 있어야 하다는 게 무슨 비밀이라도 되나? 구결 그 자체가 비밀이지."

"설마 아빠가 그걸 미끼로 결혼을 종용하던가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그런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어. 나도 배울 생각은 전혀 없고. 하지만 바보 취급을 당하는 것은 썩 즐겁지가 않아서 울화를 삭이고 있던 중이었어."

"그럼 10퍼센트 경지에는 결코 이를 수 없을 텐데 괜찮겠어요?"

영욱의 말에서 결심을 읽은 진소희가 쾌재를 부르기는커녕 오히려 설득을 시도했다. 그녀로서도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듯했다. 그녀의 성에 차지 않지만 막상 그냥 떠나보내기에는 아쉬운 듯했다. 마치 계륵처럼.

"기계체조가 탐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할 수는 없잖아. 그것도 나 혼자만 불행한 게 아니라 너까지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니 더욱 그럴 수는 없지."

"아버지께서 그런 극단적인 조건까지 거실 건가 보네요. 하지만 저는 괜찮아요."

영욱이 둘의 결별을 기정사실화하자 마음이 급해진 진소희가 갑자기 매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괜찮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는 나를 사랑할 수가 없잖아. 나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착각하지 마세요. 사랑할 수는 없지만 결혼할 수는 있다는 말이니까요. 사랑하지 않으니 결혼을 해도 함께 사랑을 나눌 수는 없겠지만 경제적인 부양을 받을 수는 있을 테니까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진중권이 본색을 드러내더니 진소희 역시 본색을 드러냈다. 이럴 거라면 처음에 그렇게 비싸게 굴 이유가 전혀 없었을 텐데 이제 와서 왜 갑자기 급해진 것인지 영욱으로서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날로 먹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나라면 학을 떼더니 갑자기 그런 생각을 가진 이유가 뭐야?"

"요즘 영욱 씨의 하루 일당이 60만 원이라는 소리를 아빠로부터 들었어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할 것이고, 약 30개월 후에는 영욱 씨 앞으로 포클레인도 불하받는다니 일당이 두 배는 더 뛰겠죠."

"그래서?"

"그 정도라면 아쉬운 대로 제 품위 유지는 될 것 같아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그리고 주변을 찾아보니 영욱 씨 정도 되는 남자도 흔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칭찬은 고맙지만 나는 이 거래를 사양하겠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도 있는데 버는 족족 마누라 똥구멍에다 몽땅 처넣지는 않을 거야."

"판단이야 영욱 씨가 해야겠지요. 아무튼 저를 도서관으로 좀 데려다 주세요."

"그러지."

그야말로 아쉬운 대로 영욱을 붙들겠다는 소리였다. 배경태와 재결합할 가능성은 없고, 다른 재벌 2세를 사귀기에는 벌써 나이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욱의 싹수가 생각보다는 파랗다는 것도 큰 몫을 한 듯했다. 게다가 경찰서에 같이 불려 다니면서 티격태격하다 보니 미운 정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영욱으로서는 사부 진중권과 그의 딸 진소희에게 그나마 있던 정과 호감도 다 떨어져 나갔다. 그로서는 아직 속물근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딱히 효자는 아니지만 부모형제를 버리면서까지 데릴사위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도 재벌 가문에 편입되는 것도 아니고, 죽을 때까지 머슴살이를 해야 하는 것인데 응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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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각살우矯角殺牛는 소의 뿔을 바로잡으려다가 소를 죽인다는 말이다. 소의 뿔에는 큰 혈관이 분포하고 있어서 뿔이 부러지면 지혈이 되지 않아서 저혈량성 쇼크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또한 쇠뿔은 단 김에 빼라는 말 역시 소뿔을 달구어서 빼라는 소리가 아니라 호미나 낫 등을 미리 달구어서 미리 지혈할 준비를 하고서 빼라는 소리다.

"제길! 안 되잖아."

진소희를 도서관에 데려다 주고 나온 영욱은 자신이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엉터리 구결의 동원과 그래핀 실드 중첩으로도 10퍼센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었다.

진소희의 방해 때문에 절호의 타이밍을 놓쳤음을 애석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진소희를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도 사람들의 왕래가 워낙 많은 도서관 앞이라 방해 받지 않고 성공하기는 어려웠을 테니까.

"빌어먹을 부녀 같으니라고!"

마음을 비우려고 했지만 그래도 욕이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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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나자 사부 진중권은 눈빛으로 영욱에게 최후의 결정을 내리라고 종용했다. 그 눈빛을 며칠째 모르는 척하며 받아넘기던 영욱은 결국 입을 열어서 자신의 뜻을 밝혀야만 했다.

"죄송하지만 따님과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너를 더 가르쳐줄 수는 없다."

"이 정도만 배워도 충분합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당장 하산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말투가 왜 그래?"

"같이 있으면 서로 불편할 테니까 하산하는 게 아니라 다른 시간대에 작업하려고요. 내일부터는 사부님께서 주간 작업을 뛰십시오."

말로는 아직도 사부라고 부르게 하고, 파문시키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모든 관계가 끝났다. 

가르쳐 준 것을 회수한다는 명목으로 죽이려 들거나 눈을 뽑으려 들거나 손가락을 자르려 들지 않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었다. 구결을 전수한 적이 없으니 겨우 떡밥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런 짓거리를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싫다. 나는 밤이 좋으니까 네 녀석이 주간을 뛰도록 해라."

"그러죠. 곧 겨울방학이니까 제가 주간을 뛰겠습니다. 그럼 강건康健하십시오."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단물만 쏙 빼먹고서 이제는 제 갈 길을 가겠다는 거잖아."

"구결도 가르쳐 주지 않고 단물이라뇨?"

그냥 돌아서려던 영욱이 결국은 참지 못하고서 대꾸했더니 진중권의 표정이 똥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알고 있었더냐?"

"소희가 그러더군요."

"그런데도 그런 판단을 내렸다는 거야? 내 딸이 그렇게도 싫어?"

"따님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모시고 살려면 제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아서 미리 포기하는 겁니다."

"모자라는 놈 같으니라고. 여자 하나 건사할 자신도 없이 그걸 사내라고 할 수 있어? 쓸모없는 고추는 떼어내서 내다버려."

진중권으로서는 그게 남자의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니 자신과는 생각이 다른 영욱을 계산적이라고 보았다. 여자는 더한 속물근성을 보여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남자는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소희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미녑니다. 그러니 제가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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