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줘. 아악!"
진소희는 돌려차기와 내려찍기로 배경태의 몸을 무차별 난타하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춤추는 것 같기도 하고, 태권도와도 비슷한 동작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기계체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드림헌터인 진소희 역시 현실 세계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무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배경태가 감히 맞서지 못하고 피하기에 급급한 걸 보니 발길질의 위력이 장난은 아닌 듯했다.
퍽. 우지직.
"끄어어억."
"맙소사!"
결국 진소희는 배경태를 한 방에 함락시키고 말았다. 하필이면 남자의 급소 부위가 결정타가 되었기에 영욱도 깜짝 놀라서 고개를 옆으로 돌려야만 했다.
뭔가 줄줄 새는 것도 새는 것이지만 충격음으로 예상하건데 배경태가 앞으로 정상적인 남자로 살아가기는 어려울 듯했다.
배경태도 자신의 운명을 짐작했는지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도서관학파의 결성
"꼼짝 말고 손들어!"
진소희가 배경태를 처리하고 나서 채 1분도 지나지 않아서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전혀 놀라지도 않는 걸 보아하니 진소희가 신고한 듯했다.
"제가 신고한 사람이에요. 이 사람들이……."
그녀는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서 경찰들에게 설명했다. 자신이 배경태의 급소를 공격한 것을 감추기 위함인 듯했다.
그래도 결론은 똑같으니까 영욱은 입을 닫고서 듣고만 있었다. 간혹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러니까 권총까지 동원해서 학생을 성추행 하려던 강도 네 명을 두 분께서 처리하셨다는 말씀인가요?"
"예. 이 선배님은 근처를 지나가고 있다가 저 흉악한 짐승 넷이 저를 덮치려는 걸 보고서 도와주시려고 하셨는데 세 녀석들이 권총을 꺼내들고는 쐈다는 말이에요."
"상대가 아무리 권총을 꺼내들었다지만 정당방위라고 보기에는 좀 과한 것 같군요."
그런데 경찰의 반응이 왠지 시큰둥했다. 그리고 오히려 영욱과 소희를 가해자로 의심하기까지 했다.
"꺼내든 것만이 아니라 총을 쏘았고, 그 총알이 선배님의 팔을 스친 것이 보이지 않나요? 그 총알에 정통으로 맞았으면 저 선배님도 죽고, 저도 강간을 당한 후에 죽는 것으로 끝났겠지요."
"총알에 스친 상처가 분명하나요?"
"경찰이 총상을 보고도 몰라요?"
"여기가 미국인 줄 알아요? 총상환자가 즐비하게?"
"아무튼 총알이 명중하지는 않았고, 피를 보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든 저 선배님께서 맹활약을 펼쳐서 무사히 제압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경찰의 무성의한 태도에 진소희가 짜증을 내면서 이미 했던 설명을 또 다시 반복했다. 보아하니 배경태나 국정원 요원들이 미리 손을 써놓은 부패경찰인 듯했다.
"그러니까 저 녀석들이 강간범이라는 말을 하시는 게 아닙니까?"
"살인 미수에다 불법 무기 소지죄에다 성 추행범이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댁들이 가해자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오히려 더 많이 다친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우리 경찰들이 보기에는 저들이 오히려 더 피해자로 보입니다."
경찰들은 기절했다가 서서히 깨어나는 국정원 요원들은 내팽개쳐두고 오히려 영욱과 진소희를 서서히 포위하기 시작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게다가 저들의 총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누구 것인지 알 수 없고요."
"그렇다면 지문이라도 확인해 보시면 알 거 아니에요?"
"확인해 보나마나 저들의 지문은 없을 것 같습니다. 보시다시피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말이죠. 오히려 당신들의 지문이 묻어있을 공산이 크지요."
"당신들, 경찰 맞아요?"
"맞습니다. 112 신고하시지 않으셨나요?"
"무늬만 경찰인 모양이군요. 살인미수범을 보고도 눈만 멀뚱거리시니……."
진소희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던 경찰들은 이미 배경태와 요원들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영욱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을 줄 알고 출동했다가 오히려 그들이 부러지고 떡이 되어 있어서 깜짝 놀란 듯했다. 그들로부터 이미 얻어먹은 게 있는지 체포하기를 꺼렸다.
"방금 경찰의 명예를 훼손하셨으니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우리도 당신들을 부패경찰로 신고하겠어요."
"그러시다면 무고죄를 포함해서 고소하겠습니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오히려 진소희와 영욱을 고소하겠다고 하기까지 했다. 분위기로 보아서는 여차하면 두 사람을 이곳에서 묻어버릴 기세였다.
분위기를 살피던 영욱은 얼른 진소희의 손을 잡고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부패경찰이 분명하지만 경찰을 상대로 싸우기는 좀 찝찝했기 때문이다.
"그럼 법정에서 봅시다."
"잠깐!"
"가긴 어딜 가? 너희 두 사람을 폭행죄로 체포하겠다."
"범인을 놔두고 피해자를 체포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두 사람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체포영장 있나요?"
출동했던 열 명의 경찰들이 모두 권총을 꺼내들자 영욱은 싸울 태세를 취하며 으르렁거렸다. 만일 2QB 세상이라면 이 정도는 눈도 꿈쩍하지 않을 테지만 이곳이 현실 세계라는 걸 깜박하지는 않았다.
"현행범은 영장 없이도 긴급체포가 가능하다."
"누가 현행범이라는 겁니까? 당신이 봤습니까?"
"범행 현장에 있으니까 당연히 현행범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 보세요. 우리가 신고했어요. 그러니까 범행 현장에 있는 게 너무나도 당연하죠. 아무리 많이 받아먹었어도 그렇지, 신고한 사람들을 현행범으로 모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죄질이 무겁고 폭행의 강도가 워낙 커서 체포하는 것이니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도 마라."
"정말로 환장하겠네."
경찰들이 정말 쏠 것처럼 보이자 영욱은 맞서 싸울 생각을 버렸다. 혼자라면 싸워볼 수도 있겠지만 진소희가 있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경찰들과 싸워서 득 될 일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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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경찰들에게 체포당한 후 춘천경찰서로 압송되고 말았다. 유치장에 갇힌 두 사람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CCTV를 몸에 달고 있다더니 거짓말이었어요?"
"평범한 학생이 그런 걸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냥 겁을 주려고 한 소리였지……."
"괜히 그 말에 속아서 나까지 곤란하게 되었잖아요."
진소희는 영욱에게 증거가 있으니 경찰에 잡혀오더라도 문제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아님을 알게 되자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싸우는 게 더 나았다는 생각을 하는 듯했다.
어마어마한 죄를 뒤집어쓰고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든 듯했다. 법체계가 그렇게 허술할 리는 없지만 국정원 요원들이 개입된 일이니 장담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요?"
"그건 경태 집안의 재력을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죄가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경태 편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거지."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경태 녀석에게 손도 대지 않았어요."
"뭐라고요? 저는 영욱 씨가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둘은 유치한 이야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기도 했다. 약혼자라면 영욱이 총대를 메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가 남자니까 소희 씨의 죄까지 뒤집어 써달라는 건가요?"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일은 영욱 씨 때문에 시작된 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나 몰라라 하시는 거죠?"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이 일은 바로 소희 씨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대학생 쯤 되면 조신하게 학교에나 다닐 일이지 남자 친구는 왜 만들어 가지고 일을 이렇게 만듭니까? 발랑 까져가지고는……."
이제는 책임소재 공방에서 벗어나서 슬슬 감정싸움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좋은 감정이 없는 상태에서 더 좋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 바람둥이가 아니라면 제 여자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잘해 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뭐라고요? 이미 성인인데 내가 남자 친구를 사귀든지 여자 친구를 사귀든지 뭐가 문제죠? 괜히 아버지를 꼬드겨서 되지도 않는 결혼 이야기를 꺼내게 만든 주제에 뻔뻔스럽군요."
"이보세요! 결혼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내가 아니라 바로 사부님입니다. 기계체조가 10퍼센트 경지에 오르면 결혼시켜 준다고 하시더군요."
"맙소사! 그건 결혼시켜 주지 않겠다는 소린데 그것도 몰라요? 10퍼센트가 되려면 아무리 빨라도 20년은 걸릴 텐데 누굴 처녀로 늙혀 죽일 작정인가요?"
"내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런 내가 왜 배경태에게 시달려야 하는 거냐고요."
"아빠가 저에게는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라고 하셨는데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니에요?"
"내가 거짓말이나 늘어놓을 사람으로 보이세요?"
진소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사실이 다름을 알고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영욱을 견제하거나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는데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녀가 그렇게 알고 있으니 배경태도 당연히 그렇게 알고서 서둘렀던 것이다. 그녀의 졸업이야 이제 몇 달 남지 않았으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썩 남자다워 보이지는 않는군요."
"흥! 자기들 마음대로 남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려는 걸 보니까 사부님이나 딸이나 똑같군요."
"누가 남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려고 했다는 거예요? 괜히 남의 인생에 끼어든 주제에."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배경태에게 알려서 한 달 동안이나 나를 괴롭히고 결국 총을 빼들게 만든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누가 미련하게 한 달이나 버티라고 했어요? 그리고 이길 수 있는데 왜 사람들 앞에서 두들겨 맞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혹시 변태 아닌가요?"
영욱이 정확하게 짚어내자 진소희는 오히려 콧방귀를 끼며 영욱을 메조키스트로 몰고 갔다.
"흥! 변태라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댁과 결혼할 것은 아니니까 상관없잖아요."
"이번 기회에 분명히 말해두지만 영욱 씨와 저는 여러 면에서 도저히 맞지 않아요. 그러니 아빠를 핑계 삼아 저랑 결혼할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마세요."
"나도 성불구性不具가 되고 싶은 마음 없어요. 이종격투기에서조차 로 불로low blow가 중대한 반칙이라는 것도 모르는 무식한 여자 같으니라고."
영욱은 몸서리를 치면서 자신의 주요 부위를 보호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누구든지 진소희와 살다가는 결코 그 부분이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일종의 시위였다.
"정말 무식한 꼴을 보고 싶어요?"
"이보다 더 무식한 모습도 보여줄 수 있다니 기대가 되는군요. 사부님을 믿고서 벌이는 수작이라면 후회하게 될 겁니다."
"수작이라니요? 좋은 말로 할 때 그 말 취소하세요."
"취소할 거라면 뱉지도 않았어요. 내가 했던 말을 번복하는 계집애라도 되는 줄 아세요?"
"누가 말을 번복했다고 그래요? 아빠의 말에 한 번도 동의한 적 없어요."
"그런데 사부님이 졸업하면 결혼하라는 말을 해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지……."
보지 않아도 비디오고, 듣지 않아도 오디오다. 진중권 앞에서는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서는 애먼 영욱에게만 사나운 야생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우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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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조용히 안 해?"
"그러니까 남녀를 따로 분리해서 수용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빈 곳이 없어서 그래.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결국 유치장을 관리하던 경찰 하나가 둘의 다툼을 제제하고 나섰다. 분위기를 보니 여차하면 한 판 붙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경찰도 두 사람 모두 상당한 수준의 드림헌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자칫하면 굵은 창살이 휘어질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상 교도소나 구치소 같은 교정 시설에서는 남성과 여성을 반드시 분리하여 별도의 공간에 수용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이 분리 수용 규정은 경찰서 유치장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앞장서서 법을 수호해야 하는 경찰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영욱은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법조문을 인용해서 조목조목 따지고 들어서 경찰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티격태격한다는 것 자체가 불안해서라기보다는 여유가 철철 넘쳐서 하는 행동인 듯했다. 진소희와는 달리 영욱은 어디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듯했다.
경찰이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두 사람을 한 유치장에 넣어둔 이유는 빤했다. 둘 사이의 대화를 녹음해서 증거로 삼거나 엮어 넣을 건수가 있는 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원래 CCTV가 달려 있는 곳이니 불법 녹취가 아니라서 증거 자료로도 충분하다.
영욱과 진소희를 현행범으로 몰아서 억지로 체포하기는 했지만 배경태 측에서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고, 발포까지 했으니까 발뺌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배경태 측의 보디가드로부터 총기 사고가 있을 수도 있다는 언질을 미리 받기도 했다.
배경태로서도 영욱을 죽여서 땅에 묻으려는 게 아니라 권총으로 위협해서 겁을 줄 생각이었다. 아무리 패도 굴복하지 않으니 필요하다면 허벅지 정도에 총을 쏘든가 할 생각이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2QB 세상에서는 늘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으니 도저히 건드릴 수도 없고, 현실 세계에서 한 달 동안이나 두들겨 패도 끝끝내 항복하지 않는 놈이니 그런 최후의 수단을 동원하려고 했던 것이다.
경찰도 총성과는 달리 정반대의 상황을 보고는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배경태 측에서 권총을 두 발이나 쏘고도 제압하기는커녕 오히려 제압당했으니 당황해서 오히려 영욱과 진소희를 체포하고 말았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영욱과 진소희를 가해자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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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총성, 그 실체는?
영욱과 진소희가 부패경찰들로부터 아주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을 때 인터넷을 통한 구명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영욱의 뒤에는 늘 은영이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배경태와 부패경찰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진소희조차도 알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영욱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은영의 눈을 벗어나지 못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촬영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가 불충분할 리 없었다.
은영은 또 영욱과 배경태 일당 사이에 시비가 벌어지자 야산까지 몰래 따라간 다음 혹시나 하고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따라서 배경태의 보디가드들이 권총을 꺼내서 경태를 쏜 장면까지도 확실하게 찍었다.
뿐만 아니라 진소희가 배경태의 급소를 걷어차는 장면도 찍었고, 출동했던 경찰들이 오히려 영욱과 진소희를 체포하고, 배경태와 보디가드들은 그냥 방면해주는 모습도 빠짐없이 촬영했다.
은영은 공개의 범위에 관해서 고민하다가 은영의 폭력 장면만을 빼고는 모두 인터넷에 올려버렸다. 부패경찰들이 노골적으로 배경태와 국정원 요원들을 비호하고 있는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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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과 SNS의 파급효과는 컸다. 거의 실시간으로 이 소식을 접한 김진명 학과장은 즉각 강원대학교 로스쿨 박찬식 교수를 동행하고서 춘천경찰서를 항의 방문했다. 이희승 교수 때문에라도 영욱과 동맹을 유지해야 하는 그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 녀석의 끝은 대체 어디야? 더 숨겨둔 게 있었다는 거야?"
김진명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영욱의 놀라운 몸놀림에 탄복을 했다.
2QB 세상이라면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현실 세계에서 총을 쏘는 무장 경호원 하나와 총을 빼드는 둘을 맨 주먹으로 무력화시킨 것은 사퍼모어 급의 드림헌터라고 해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까 영욱을 적극 도와주는 척하면서 자신의 곁에 더 가까이 두려는 것도 목적이라면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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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경찰서장 나오라고 해."
춘천 경찰서 민원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간 김진명은 뒤를 따르던 박찬식에게 눈짓을 했다. 이제 그가 나설 차례라는 소리였다.
"누구십니까?"
"나는 강원대 로스쿨 교수인 변호사 박찬식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변호사시지만 경찰서의 문을 박살내다니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잔소리 말고 서장이나 나오라고 해. 순경 주제에 네가 책임질 거야?"
말단 경찰이 겁도 없이 박찬식에게 따졌지만 김진명은 더 큰소리로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소동의 중심에 박 변호사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춘천 경찰서장이 슬리퍼를 끌고 달려왔다.
"제가 서장입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박 변호사님."
"무고한 피해자를 오히려 가해자로 만들다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박찬식 변호사는 김진명을 대신해서 경찰서장에게 엄중하게 항의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지요?"
"우리 학교 학생인 박영욱 군과 진소희 양 말입니다."
"그 사건이라면 현행범들을 현장에서 체포했다고 보고를 받았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렇게 정보가 늦어서야 진급은 고사하고 어디 정년이나 채우겠소? 인터넷에 해당 동영상이 쫙 깔렸으니까 한 번 보고 나서 그 따위 헛소리를 또 지껄여보시오."
이번에는 김진명이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면서 경찰서장을 압박했다. 인터넷도 할 줄 모르는 무식한 놈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도, 동영상이라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신 부하들이 피해자라고 돌려보낸 그 무장 경호원들이 현행범이라고 잡아놓은 영욱 군을 향해서 총을 발사하는 장면은 물론이고, 현장을 보지도 못한 당신들 부하들이 현장을 보았다고 억지를 부리면서 현행범으로 체포한 장면까지도 빠짐없이 다 있소. 대체 얼마나 얻어먹었기에 그런 짓을 하는 거요?"
"누가 그런 엉터리 동영상을 올렸단 말입니까? 그건 보나마나 합성입니다."
"합성인지 아닌지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전문가들이 판단하겠지만 일단 인터넷 전문가들은 합성이라는 개소리 따위는 일절 하지 않고 있으니까 단단히 각오하시오."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일단 오리발을 내밀었던 경찰서장은 다시 태도를 바꾸었다. 자신이 아니라고 우겨서 막을 수 있는 수준은 이미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착오가 뇌물수수나 고질적인 부패와 관련이 없기를 바라겠소."
"일단 그 문제의 동영상부터 보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김 경위는 이 분들을 유치장으로 안내해 드리지 않고 뭐해?"
"예. 알겠습니다. 서장님."
경찰서장은 꼬리를 말고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면회를 허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더 이상 영욱과 진소희를 잡아둘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경찰서장은 자신의 목이 달아나지 않으려면 도마뱀 꼬리 작전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자면 일단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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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일을 어떻게 처리한 거야? 뭐하고 있어? 어서 김 경사와 박 경사 그 새끼들 데리고 와!"
문제의 동영상을 대충 훑어본 서장은 화를 벌컥 내면서 문제의 그 부하들을 소환했다.
배경태가 영욱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대화 내용은 물론이고, 총탄의 실제 발사 장면까지도 동영상에 확실하게 찍혀 있으니 변명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또한 한 달 넘게 폭행을 가했다는 말도 들었으니까 배경태의 죄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영욱은 한 달 이상 두들겨 맞으면서도 꾹 참다가 결국 죽이겠다는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정당방위로 대항한 것이었고, 그 결과 총탄에 스치는 찰과상과 함께 무장괴한 넷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범인들의 뼈가 부러지는 불의의 사고가 발생했지만 그것을 과잉 방어로 보기는 어려웠다.
사실 서울 소재의 대형 로펌으로부터 이미 배경태 측에 유리하게 일처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는 그렇게 할 참이었다. 잘 처리되면 10억이라는 거액을 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명백한 증거가 있는 한 일개 경찰서장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만 했다. 이제 이 사건은 부하들의 과실로 돌리고 자신은 빠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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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세계에서의 분쟁은 2QB 세상과는 달리 규제와 간섭이 아주 많다. 법이라는 것 역시 일종의 규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재벌들이 막대한 돈을 들여서 입법권과 사법권을 좌지우지한다고는 해도 이렇게 명백한 증거가 있으면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현실 세계에서의 분쟁은 서로가 지양하는 편인데 사랑에 눈이 먼 배경태가 돈의 힘을 과신하면서 아주 큰일을 저질러버린 것이다. 물론 사랑 때문이라기보다는 소유욕 때문이겠지만.
게다가 현직 국정원 직원 셋이 사사로이 개인의 경호원으로 활동하기까지 했으니 공무원으로서의 겸직 금지 규정 위반 등 문젯거리가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문제가 된 배경태와 세 명의 국정원 요원들은 부상 치료를 이유로 이미 외국으로 출국한 다음이었다.
범인과 증거물이 사라진 이상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것과는 달리 사건 수사는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경찰의 잘못된 초동 대응은 현장에 출동했던 열 명의 경찰 중 상급자에 해당하는 두 경찰이 옷을 벗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인터폴에 수사 협조를 요청했지만 이 역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적극적이던 학과장과 로스쿨 박찬식 교수도 어느 순간부터는 조용해졌다.
상대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빠졌던 것이다. 심지어 배경태 측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챙겼다는 소문도 심심찮게 나돌았지만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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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가해자들은 사라지고 없는데 우린 왜 자꾸 부르고 난리야?"
"그러게요. 했던 이야기를 천 번도 더 반복한 것 같아요."
"두 번 다시 경찰에 신고하나 봐라. 기말 고사가 코앞인데 자꾸 오라 가라 지랄들이야."
영욱과 진소희는 오늘도 투덜거리면서 춘천경찰서를 나섰다. 가해자는 멀리 달아나 버렸는데 애먼 피해자만 가지고 자꾸 경찰서에 출두를 요구하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하지만 도움을 받을 곳이 전혀 없으니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만 했다.
*파문
"더러워서라도 돈을 벌어야겠어요."
"나도 더러워서라도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하든지 해야겠어."
"지금 저 들으라고 하는 소리죠? 그래요. 저는 가난한 집안의 딸이에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전에는 속물로 봤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는 소린데."
영욱은 지금 농담을 하는 게 아니었다. 현실의 쓴 맛을 보니 이제는 돈의 위력을 알 것 같았다. 그런 돈을 쫓는 여자들을 된장녀라고 몰아붙일 수만은 없다는 것도 이제야 겨우 알 것 같았다. 물론 된장녀가 좋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비꼬는 건 아닌 것 같군요. 사실 속물俗物이 꼭 나쁜 의미만은 아니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 거야?"
"아이를 낳아서 키워야하는 여자는 태생적으로 남자들보다 현실적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속물이라는 소리를 듣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너무 비하된 표현이라는 말이에요."
"그건 나도 알아. 엄마가 속물이 되지 못하면 가정 경제가 파탄이 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고. 누가 뭐랬어?"
"그런데 아까부터 왜 반말이세요?"
"내가 선배잖아. 나는 09학번이고 너는 10학번이니까."
어느 순간부터 영욱은 자신도 모르게 진소희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혼잣말을 하다가 그게 자연스럽게 말을 터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같이 시달리면서 많이 친해졌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욱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대신 억지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이는 같잖아요."
"그럼 너도 반말해. 누가 높이라고 했어?"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말을 놓기는 좀 그래요."
"그럼 넌 높여. 난 편하게 놓을 테니까……."
"제가 여자로 안 보이세요?"
진소희는 영욱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자신이 여자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말을 놓는 것이 곧 함부로 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대접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영욱이 자신을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처럼 느낄 수 있었다.
"여자로 보여. 하지만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데 굳이 잘 보일 이유가 있을까?"
"예쁜 여자를 보면 가슴이 떨리고 그러지 않아요?"
"은영을 처음 사귈 때는 그런 적이 있었지만 이젠 예쁜 여자에 대해서 면역이 된 것인지 전혀 떨리지 않아. 그리고 너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싸웠으니까 그럴 이유가 없잖아. 무엇보다……."
"무엇보다 뭐죠?"
"듣지 않는 게 나을 거야."
"괜찮으니까 하세요."
영욱이 뒷말을 끊자 오히려 궁금증이 더 커진 소희가 답변을 재촉했다. 자신이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니까 굳이 두려울 이유가 없었다.
"너는 전혀 예쁘지 않아. 마음이 예쁜 여자가 정말로 예쁜 여자니까."
"호호호! 요즘도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군요."
"나도 처음에는 얼굴과 몸매가 예쁜 여자를 좋아했어. 물론 지금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건 눈으로 감상하는 용도로만 그래."
"그러니까 연애하는 여자는 예뻐야 하고, 결혼할 여자는 예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린가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못생긴 여자와 결혼할 생각은 꿈에도 없어."
"지금 저와 궤변놀이 하자는 건가요?"
진소희는 영욱에게 왜 반말을 하느냐고 따지던 것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예쁜 여자가 여자 취급도 받지 못하고, 예쁜 여자도 아니라는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기도 했다.
그렇다고 영욱에게 손을 내밀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상대의 시선이나 마음을 빼앗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자의 본능적인 욕심 때문이다.
추운 겨울에도 짧은 치마를 입고, 비싼 돈이 드는데도 비싼 메이크업과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게 바로 여자의 원초적인 욕망이다.
"얼굴보다는 마음이 예뻐야 한다는 소리지. 물론 당장 결혼할 생각은 없으니까 여자에게는 관심 없어."
"그런데 왜 은영이랑 같이 다니는 거죠?"
"걔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와? 걔 알아?"
"대충은 알죠."
"같이 다니는 게 아니라 걔가 일방적으로 날 쫓아다니는 거야."
"겉으로 보자면 은영이 전혀 꿀릴 게 없는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죠?"
진소희는 은영을 대충 아는 게 아니라 잘 아는 듯했다. 그러니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는 것이다. 은영이 남자에게 매달릴 여자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아는 듯했다.
"내가 걔 취향을 어떻게 알아? 하지만 한 번 헤어져보니까 내게 숨겨진 매력이 있음을 알게 됐나 보지."
"제가 보기에는 별로 그런 게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래서 나도 잘 모른다고 했잖아. 은영이가 대체 왜 그러는지 말이야."
"그렇다면 이제부터 저도 영욱 씨와 같이 다녀야겠어요."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야?"
또 다시 이야기가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대충 이쯤에서 헤어지려던 영욱은 기함을 했다. 자신에게 시집오기로 마음을 바꾼 것 같지는 않은데 은영의 이야기 끝에 그런 말이 나오니 선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영욱 씨 때문에 경태와 헤어졌으니까 책임지라는 말은 아니에요. 다만 저도 도서관에 다니고 싶어서 그래요."
"도서관에 가는데 왜 나와 같이 다녀? 네가 길도 모르는 어린 아이야?"
"2QB 도서관을 말하는 거예요. 몰라서 물어요?"
"너도 힘 좀 쓰는 드림헌터니까 주변에 알아보면 얼마든지 출입할 수 있으니까 하는 소리잖아."
"정해진 도서관 멤버거나 사서들이 데려가는 학생이 아니라면 무단 침입으로 공격받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출입을 제한당한 적이 있거나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배경태를 통해서 들었을 지도 모른다.
영욱의 경우도 도서관에 처음부터 아무런 허락도 없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도일의 보이지 않는 배려 덕분이었지 허용 절차가 필요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런가? 그렇다면 도서관에는 데려다 주기로 하지. 그런데 책과는 별로 친한 것 같지도 않은데 지루하지 않겠어?"
"지금 누구를 날라리로 아시는 건가요? 미안하지만 저도 도서관학파랍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알아보는 거야 며칠 정도면 충분하겠지."
영욱은 진소희가 도서관학파임을 주장하는 것에 깜짝 놀랐다. 외제차나 얻어 타고 다니던 된장녀가 언제 도서관을 가보았다고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4년 동안 전액장학금을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 기회는 없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싸구려 취급을 받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정말 너무 하시는군요."
"그야 포장지를 너무 예쁜 걸로 싸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막상 본질을 알고 나면 다들 나처럼 대할 거야. 지금도 목적을 달성하고 나니까 바로 막말을 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