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9/71)

"누가 여자 친구로 대해 달라고 했어? 같은 학과의 후배로 편하게 대하라니까. 그리고 그렇게 게걸스럽게 먹으면서 자꾸 이러지 말라고?"

도시락은 은영의 음식 솜씨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 그러니 말과는 달리 일단 젓가락을 들기만 하면 폭풍 흡입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보고도 본체만체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그렇지만 씹지도 않고 삼키는 것도 예의는 아냐. 예쁜 디스플레이도 감상하면서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먹으면 어디가 덧나?"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그 많던 리포트들도 다 제출했는데 대체 뭐가 바쁘다는 거야?"

"이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몽땅 다 읽고 말거야. 그러니까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나도 오빠처럼 책을 많이 읽고 싶어."

은영도 영욱이 2QB 도서관에서 주구장창 책만 읽는 줄은 알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두 번째 사서가 되었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도서관에서 행패를 부리던 자들이 영욱에게 혼이 났다는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은영이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사서가 도서관의 출입 자격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영욱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책 읽는 것도 싫어하지는 않는다.

"자꾸 치근덕거리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너도 2QB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게 해주지."

"누가 치근덕거린다고 그래? 솔직히 전에는 오빠가 나한테 치근덕거렸잖아."

"네가 워낙 철통방어를 해서 아무런 문제도 없었잖아."

"그땐 왜 그랬는지 나도 내가 한심스러워 죽겠어."

요즘 들어서 은영은 가끔씩 가슴골이 드러나는 야한 옷을 입기도 했고 향수를 진하게 뿌리기도 했다. 하지만 영욱의 마음을 흔들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그러니 이런 말까지 나오는 것이다.

"여자애가 별 소리를 다 한다. 그리고 진도가 좀 나갔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어. 문제는 마음이니까."

"이젠 용서해줄 때도 되었잖아. 내가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닌데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냐?"

"결별 선언이야 박상태의 협박 때문이었다고 치더라도 용식이와는 바람 피웠잖아."

"그것 역시 박상태의 협박 때문이었어. 그리고 오빠의 신경을 거슬리려고 그런 척만 했을 뿐이야. 내가 용식이 오빠를 좋아할 정도로 눈이 낮은 줄 알아?"

"그런데 어떻게 그런 야한 포즈를 취했을까?"

"그, 그건 용식 오빠가 오버한 거였어."

"오버를 했던지 마음이 통했던지 나보다도 진도가 더 나가는 것을 이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까 나로서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아."

농담이 아니라 영욱이 보는 앞에서 키스도 하고 깊은 포옹도 했었다. 그러니 영욱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때는 애써 대수롭지 않은 척했던 영욱이 이제 와서야 그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다. 

"그럼 오빠도 내가 보는 앞에서 바람 피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

"너 바보지? 너하고 다시 사귈 시간도 없는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그리고 상대에게 그런 식으로 염장을 지르는 게 어떻게 사랑이야?"

"오빠가 하도 억울하다고 하니까 해본 말이었지."

"잔소리 말고 눈이나 감아."

"알았어."

영욱은 은영을 데리고 2QB 도서관으로 갔다. 책을 열심히 읽을지 딴 짓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은영 역시 자기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니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주기로 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도 있고, 그것을 만회할 기회를 주어야한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 않다면 재수생과 삼수생이 있을 리 없을 것이다. 물론 사랑에도 재수와 삼수가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기회는 줘보기로 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은영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사랑을 되찾는 것보다는 2QB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것 같으니까 크게 부담 갖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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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여기가 2QB 세상 속의 도서관이야?

-쉿! 다른 사람들 공부하는 거 안 보여?

-별로 다를 것도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완전히 다른 곳이기도 하지. 그럼 열심히 책이나 읽으셔.

-이게 다야?

은영은 현실 세계의 도서관과 똑같은 도서관만 보이자 약간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응으로 보아 그녀는 독서 때문에 이곳을 찾은 것은 아닌 듯했다.

-밖에 나가면 잔디밭이 있어. 

-그 바깥은?

-바깥에도 뭔가가 있겠지만 위험하니까 가능하면 나가지 마. 사실 잔디밭에 나가는 것도 위험하니까 나가고 싶으면 나를 불러.

-보디가드는 해주겠다는 거야?

-나도 당할 확률이 훨씬 더 높겠지만 너 대신 맞아줄 수는 있겠지.

사서로서의 권한은 도서관 내부에만 해당된다. 영욱은 그 사실을 모르고 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떠드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치다가 망신당했던 적이 있었다.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강한 상대들은 아니었지만 숫자가 워낙 많아서 당해내지를 못하고 도서관 안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르고 뒤따라 들어온 녀석들은 모두 요가 고문을 당하면서 눈물을 쏟아내야만 했다. 

그 소문이 한때나마 강원대학교 내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당한 학생들 중에서 영욱의 얼굴을 아는 학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상태 사건 이후 이제는 2QB 세상을 모르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고, 그들 중에는 2QB 세상의 도서관에 다니고 싶어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서 용감한 학생들은 영욱을 찾아오곤 했다. 

-고마워, 오빠.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죽지는 않는 곳이니까 별 것도 아냐.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

-너는 아주 영리한 애니까 이 도서관이 큰 도움이 될 거다. 다른 학생들이 애원하는 데도 비워둔 자리니까 열심히 해.

-알고 있어. 그런데 책만 읽어도 좋지만 그게 강해지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지?

영욱이 최근에는 책만 읽는데도 불구하고 가파르게 강해지고 있는 걸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밤마다 기계체조 수련에 열중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전에는 2QB 세상에서도 끊임없이 수련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하는 질문이었다.

-만류귀종이라는 말 혹시 알아?

-알아. 

-진짜?

-모든 강은 바다로 흐른다는 그런 뜻 아냐?

-맞아. 책만 열심히 읽어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2QB 세상이야.

-선심 쓰는 김에 오빠가 하는 그 이상한 체조도 좀 가르쳐주지 않을 거야? 포클레인 운전을 배울 수는 없겠지만 그건 배울 수 있을 것 같던데.

꼭 그런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영욱이 선뜻 하나를 베푸니 그 기회를 노려서 하나를 더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처세술과 상술에 아주 능한 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고단수 움직임인 셈이다.

계산적인 성향의 은영에게는 물건 A를 사러온 손님에게 B까지 파는 것이 영업이지 그냥 A만 팔고 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영업적인 마인드가 배어 있었다.

-까짓것 원한다면 가르쳐주지. 자세한 건 사부님에게 여쭤봐야겠지만 기초 동작 정도는 가르쳐 줘도 될 거야. 

-고마워, 오빠.

-너도 나 때문에 험한 꼴을 당했으니까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알긴 아네.

-그리고 우리들이 했던 사랑이 모래성 위에 쌓은 것이라는 것도 잘 알지.

-그땐 솔직히 우리 둘 다 어려서 사랑을 너무 몰랐어. 하지만 이젠 아냐.

-많이 안다고 사랑을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냐.

영욱은 둘 사이의 분위기가 좋아지는 것을 본능적으로 경계했다. 

방관하고 있다가는 은영의 페이스에 말려서 홀리는 수가 있으니까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면서 좋아지려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나도 알아. 하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진 않겠지.

-그럼 열심히 내공을 쌓아보든가.

-공부라면 나도 좀 하는 편이니까 기대해도 좋아.

-그래. 열공.

-오빠도 열공.

만류귀종이 통한다는 것을 영욱으로부터 들은 은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어쩌면 영욱보다 강해지는데 더 관심이 많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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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의 2013년은 정말 파란만장波瀾萬丈 그 자체였다. 박상태의 표적이 된 탓에 어쩔 수 없이 드림헌터의 길로 들어선 것은 그의 인생에서 기념비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진중권이라는 아주 걸출한 인물을 사부로 모시게 된 것도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리고 2학기 들어서 이희승 교수와 싸우고 자퇴서를 제출한 것도 평범한 삶을 살았던 영욱으로서는 나름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그리고 고생 끝에 낙이 있다는 말도 겪어보니 사실이었다. 

요즘 영욱은 이곳 2QB 도서관에서 그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것도 현실 기준으로 보자면 하루 평균 열 차례씩 2QB 세상으로 넘어오고, 한 번에 72시간 정도 머물다가 돌아간다. 

남들이 보기에는 보통 20분에서 30분 정도를 계속해서 조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게 하루에도 열 차례나 되니 결국 영욱의 별명이 도서관의 수면 벌레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모두 책을 읽는 시간이고, 영욱이 자는 시간의 전부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은영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지만 도일부터 시작해서 도구까지 아홉 명이나 더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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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뚱맞게도 진소희가 여러 권의 책을 들고 와서 영욱의 맞은편에 앉았다. 게다가 잔소리까지 늘어놓았다.

"병든 닭처럼 조는 것은 말리고 싶지 않지만 잠꼬대는 좀 그렇지 않아요?"

"다른 곳에도 빈자리가 많은데 하필 그곳에 앉아서 그래요?"

"도서관의 빈자리에 임자가 정해진 건 아니잖아요."

"내 말은 일부러 시비를 걸기 위해서 내 맞은 편 자리에 앉은 게 아니냐는 거지요."

진소희도 무슨 목적을 가지고 영욱을 찾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요즘도 매일같이 배경태와의 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자신을 찾은 게 의아하기만 했다.

"제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요?"

"예. 오늘은 무척이나 한가해 보이네요. 그 날라리 재벌 2세 룸펜 녀석은 대체 어디에 떼놓고 오셨어요?"

  

"제 남자친구에게 그렇게 당하고서도 그런 말이 나와요?"

"2QB 세상에서는 항복만 하지 않으면 당해도 당한 게 아닙니다. 잘 아실 텐데 왜 그런 말을 지껄이는 거죠?"

배경태와 그의 세 경호원들은 2QB 도서관에는 나타나지 못하고 현실 세계의 도서관에 나타나서 영욱을 괴롭히곤 했다. 그것도 매일같이.

진소희가 위로하려고 온 것도 아니고 대신 사과하려고 온 것도 아닌데 왜 영욱을 찾아왔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실 세상에서 워낙 많이 당하니까 하는 말이죠."

"보디가드 녀석들이 워낙 강하니까 당해주는 척하는 거죠. 배경태 그 녀석 하나라면 당하고 있겠어요?"

"혹시 메조키스트 아닌가요? 매일 그렇게 당하면서도 즐거워하는 것 같으니……."

"당연히 즐겁죠. 그 놈들이 아니라면 제가 어디에서 그런 강자들과 대련할 수 있겠어요?"

영욱을 괴롭히는 경호원 녀석들은 특전사 출신의 인간 살인병기들이었다. 그런 녀석이 셋이나 되니 영욱이 당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영욱은 그 상황마저도 즐기고 있었다. 배우는 것도 있고, 기계체조가 있으니 맞아서 죽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맷집 하나는 정말 대단해요. 하지만 이젠 그만 하세요."

"뭘 그만하라는 거죠?"

"저를 포기하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겁니다. 잘 아시잖아요."

"제가 소희 씨를 포기하겠다고 사부님께 말씀드렸다가 정말 초상 치르는 줄 알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동안 진중권과 득환의 사이가 더 돈독해져서 이제는 진소희과 결혼하지 않으면 파문이라도 시킬 기세였다. 영욱은 잘못된 첫 만남 이후 자신의 마음속에서 진소희를 지웠지만 아직도 사부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아버지에게는 제가 알아서 말씀드릴 테니까 이젠 제발 그만 하세요."

"아시겠지만 소희 씨를 사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포기한다는 말을 할 수는 없어요. 왜냐면 그 녀석들과의 대련에서 배우는 게 아주 많으니까요."

"그들이 언제까지 패고만 말 것 같아요."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리는 수도 있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호락호락하지는 않으니까 걱정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보니 진소희는 영욱에게 경고하려고 온 것이었다. 저항이 너무 길면 진짜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넌지시 언급했지만 이미 영욱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럴 시기가 임박했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가 있어요? 제아무리 영욱 씨라도 총알을 피할 수는 없잖아요."

"왜 못 피해요? 충분히 피할 수 있습니다."

"2QB 세상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총알을 어떻게 피해요?"

"충분히 피할 수 있습니다. 시쳇말로 딱 10센티만 피하면 죽지는 않는데 어려울 게 뭐가 있어요?"

"저랑은 도저히 맞지 않는 분이군요. 아무튼 저는 말씀드렸으니까 알아서 하세요."

진소희는 영욱의 허세에 기막혀 하면서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끝냈다. 잘 나가는  드림헌터라고 해서 현실에서도 초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뭐죠?"

"왜 그런 쓰레기와 어울리는 거죠? 소희 씨는 아직까지 쓰레기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그건 그나마 배경태가 저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무엇 때문에 상류층의 삶을 원하시는 거죠? 화려한 보석이나 크고 넓은 집이 그렇게 좋아요?"

영욱의 입장에서 진소희를 한마디로 평가한다면 된장녀라고 할 수 있다. 

된장녀는 웬만한 한 끼 밥값에 해당하는 브랜드 커피를 즐겨 마시면서 명품 소비를 선호하지만 정작 자신은 경제적 활동을 하지 않기에 부모나 사귀는 남성의 경제적 능력에 소비 활동의 대부분을 의존하는 젊은 여성을 비하하여 일컫는 말이다.

"아직도 모르시나요? 현실에서 크고 넓은 정원을 가진 집에 사는 사람이 2QB 세상에서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상식 아닌가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싶다면 열심히 노력할 것이지 꼽사리나 낄 궁리를 왜 해요?"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수준이 있고, 불가능한 수준이 있는 거예요. 저는 노력 그 이상의 수준을 원해요."

영욱도 재벌 2세쯤 되는 배경태의 보디가드들에게 당하고 있는 중이니까 진소희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진소희의 행동이나 생각이 대부분의 여자들이 가질 만한 보편적인 속물근성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대학무용론을 부르짖는 진중권의 딸이라는 사실은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사부님이랑 그렇게 안 닮을 수가 있죠?"

"그야 저는 엄마를 닮았으니까요. 그런 엄마를 사랑한 것은 바로 아빠였어요."

"사부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 없습니다. 문제는 제 사랑이죠. 다시 말해두지만 저는 환상을 쫓는 사람은 관심 없습니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그것 참 다행이네요."

진소희는 자신의 할 말을 끝내고도 여전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열심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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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소희와 영욱의 독서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배경태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영욱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진소희를 애써 외면하면서 영욱에게 다가갔다.

"좋은 말로 할 때 따라 나와."

"혀가 많이 짧은데?"

"그 대사가 벌써 한 달째 반복되는 것 같은데?"

"네 놈이 한 달째 혀 짧은 말을 하도록 하니까 그러는 거 아냐?"

"그럼 잘난 선배께서 막나가는 후배의 버릇을 고쳐주시든가."

"그러지 않아도 오늘은 그럴 참이었어."

영욱은 보던 책을 덮어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질질 끌려 나가던 평소와는 다른 태도였다.

"어쭈? 오늘은 어쩐 일로 웬일로 자발적으로 나가는 거야?"

"네 애인 앞에서 징징거릴 수는 없잖아. 그리고 오늘은 왠지 몸의 컨디션이 좋아서 이길 수도 있을 것 같고 말이야."

"또 개 맞듯이 맞게 될 텐데 큰소리는 여전하군."

"미안하지만 오늘은 상황이 좀 다를 거다. 어차피 너도 준비한 게 따로 있잖아. 안 그래?"

영욱은 배경태의 몸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희승 교수의 예민한 후각이 영욱에게도 전해진 것도 있고, 진소희의 경고 덕분이기도 했다.

"소희가 말했나?"

"당연하지. 약혼자가 죽는 것을 원하는 여자가 어디 있겠어?"

"미친 놈!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너 같은 독종을 침묵시키는 길은 그 길밖에 없으니까."

"보는 눈이 있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거고, 보드가드 셋 중에서 누가 총대를 메기로 한 거야?"

"그, 그걸 어떻게 알았지?"

"누구 하나가 책임져야 너한테 불똥이 튀지 않을 거 아냐. 날 바보로 알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총을 쏠 거라는 말은 아니다. 어딘가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서 처리하려고 하겠지만 한 달 가까이 영욱을 팼으니 실종 사건의 용의자가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 준비까지 했는지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인데 화들짝 놀라는 배경태를 보아하니 정말로 죄를 뒤집어쓸 바지사장을 준비해 두었던 듯했다. 그렇다면 협박이 아니라 진짜로 죽일 생각이라는 소리였다.

"알고 있다니 마음의 준비를 어느 정도는 한 모양이군."

"응. 나도 이젠 끝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지독하게 버티더니 결국은 포기한 거야?"

"응. 더는 못 참겠어."

"진즉 포기했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테지만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이제는 이미 늦었어."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교통사고 미수를 처벌할 법률은 없지만 살인 미수는 그렇지도 않거든."

재벌 2세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배경태는 사람의 목숨쯤은 별로 대단치 않게 여기는 인간이 분명했다. 자신을 차로 치려고 했을 때도 간을 보는 게 아니라 정말 병신으로 만들어버리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죽여서 묻어버리려고 했던 듯했다.

"네게 그럴 기회가 있을까?"

"응. 간밤에 꿈자리가 하도 사나워서 내 몸에 도청장치와 CCTV를 달아놓았거든. 물론 내 것이 아니라 춘천경찰서에서 제공한 것이지."

"살고 싶어서 별 헛소리를 다하는군."

"믿기 싫으면 믿지 않아도 돼. 어차피 범행 현장을 덮치기로 되어 있으니까."

"병신! 그런다고 살려줄 것 같아?"

"누가 병신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병신아."

영욱이 뻥을 쳤지만 배경태는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물론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영욱으로서는 자신의 목숨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다 동원해서 배경태의 심기를 거슬러 놓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니 뻥을 치는 것은 기본 전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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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태와 경호원들은 영욱을 끌고 대운동장에서 기숙사 뒷길을 통해서 산으로 데려갔다. 주변에서 아무도 볼 수 없는 숲에 도착하자 배경태가 음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새끼가 완전히 미쳤으니까 오늘 확실하게 끝내도록 해라. 단, 주먹으로 끝내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도련님."

"병신아. 그래봐야 소용없어. 권총은 이미 가져왔을 거 아냐. 그거, 경찰이 수색하면 다 나와."

"경호원들이 권총을 들고 다니는 거야 그리 큰 흠도 아니지. 그리고 사용하고 싶지도 않아. 총으로 죽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경호원과 국정원 요원이 헷갈리는 모양인데 우리나라는 개인의 총기 휴대가 금지되어 있다는 거 몰라?"

"헷갈리는 건 바로 너야. 우리처럼 제대로 사는 부자들은 사설 경호원 따윈 쓰지도 않아."

영욱이 총기를 빌미로 끝까지 약을 올리자 배경태의 입에서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사설 경호원이 아니라면 은퇴를 했거나 투잡을 뛰는 현직 국정원 요원이라는 말일 테니까.

"정말 무시무시한 말이군. 어째 실력들이 만만치 않더라니."

"그 정도는 되어야 큰일을 할 수 있지 않겠어?"

"명품 좋아하더니 경호원까지도 명품을 쓰는 줄은 몰랐군."

"쥐꼬리만 한 월급만으로 품위 유지하기는 힘든 세상이니까 알바는 당연한 거 아냐?"

"돈으로 세상을 사는 놈들이야 그렇겠지. 하지만 그런 직업일수록 사명감으로 살아야 한다는 걸 모르는 놈이니까 목이 달아나도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겠군."

"말로는 완전 고수가 다 되었군. 그럼 잘 가라."

"너야말로 잘 가라."

영욱은 한 달 동안 단련했던 결과물을 꺼내기로 결심했다. 상대는 정보기관의 현직 요원인지라 숨겨둔 수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이긴다는 보장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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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마지막이군. 그동안 즐거웠다."

"미친 새끼! 게거품을 물도록 터지는 게 즐거웠다니 완전 변태였군."

"게거품이 아니라 비누거품이었다. 병신들아."

"지랄하고 자빠졌네. 죽어라."

영욱이 약을 올리자 세 명의 보디가드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2QB 세상에서는 투명거인으로 변하는 이들의 특기는 현실 세계에서도 역시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공격으로 이어졌다. 

영욱은 한 달 동안 매를 벌면서 두들겨 맞은 것도 바로 그 공격 타이밍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도저히 느낄 수가 없었다. 다만 영욱이 알고 있는 사실은 이들이 죽으라는 말을 끝낸 후 1.2초 만에 주먹이 도달한다는 것뿐이었다.

퍽. 퍽. 퍽.

영욱은 셋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하지만 영욱의 표정은 아주 밝았다.

"이제야 알 것 같아. 이제 니들은 죽었다."

"니들needle이라면 바늘인데 지금 누구를 보고 바늘이라는 거야? 가뜩이나 말라서 기분 나쁜데, 뭐 보태준 거라도 있어?"

셋 중에서 비쩍 마른 놈이 음산한 목소리로 영욱의 말에 대꾸를 했다. 

목소리에서 살기가 줄줄 흐르는 걸 보니 오늘 영욱을 처리하고 여차하면 그 책임을 뒤집어쓸 놈인 듯했다. 배경태가 시키는 대로 하면 큰돈을 만질 수 있겠지만 썩 내키지는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욱이 도저히 양립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제거해야할 정도로 대단한 드림헌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가 아이를 죽이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니 쪽팔린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국정원 출신이라더니 역시 농담도 제법이구나. 바늘허리 부러지는 농담이긴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다니 억울하지는 않겠군."

"이미 너에게 맞아죽은 내 선배들이 많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30년 전에는 문제를 일으키는 대학생들이 많았지."

영욱은 국정원 요원이 하는 소리에 언뜻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당시에는 고문을 당해서 병신이 되거나 행방불명이 되는 학생들이 많았던 시기라는 것과 그 당시에 책을 출판한 이은석 교수가 떠올랐다.

"30년 전이라면 2QB 세상의 존재가 처음으로 밝혀진 시기니까 너희들도 단시간 내에 강해지기 위해서 제물이 필요했겠군."

"고집만 센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제법 센스가 있는 녀석이었구나."

"어쩌면 더 정확한 정보 수집을 위해서 <비몽사몽>의 저자 이은석 교수를 잡아다가 고문이라도 가했을 것이고."

"그건 상상에 맡기겠다."

곧 죽일 예정인 영욱에게도 밝히지 못하는 걸 보니 극비로 분류된 내용임이 분명했다.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이은석 박사를 잡아다가 고문을 가했다는 말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어쩌면 이은석 박사가 알기 이전에 이미 국정원에서 2QB 세상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비밀리에 요원들을 전투력을 강화시키는 용도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 

그런 극비 사항을 세상에 폭로했다면 이은석 박사의 운명은 고문을 당하다가 죽는 것으로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망명이라도 하든지.

"너도 200명 이상 잡아먹거나 죽였나? 내가 아는 괴물 녀석도 숫자 자랑을 하던데."

"나도 대충 그 정도는 되지."

"현실 세계에서 잡아놓고 모진 고문을 가했을 테니까 2QB 세계에서 굴복시키는 것은 장난이었겠군."

"전혀 별개의 세상이 아니니까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하는 게 현명한 거지."

"그런데 너는 30년 이상 잡아먹은 수가 왜 그것 밖에 안 되지? 내가 아는 녀석은 불과 1년 정도밖에 안 된 녀석인데도 벌써 200명이나 먹어치웠다던데."

영욱의 질문이 2차 공격을 연장시키는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것은 영욱의 질문이 공격만큼이나 예리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번에도 국정원 요원들은 움찔하는 반응을 숨길 수 없었다.

"많이 먹는다고 무조건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럼 아닌가?"

"그게 가능하다면 이 지구에는 오로지 하나의 영혼만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어?"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군."

확실한 것은 알 수 없겠지만 소화 흡수상의 문제인 듯했다. 누가나 소화력이라는 게 있어서 먹어서 소화시키고 흡수할 수 있는 양은 제한되어 있으니까.

"더 궁금한 게 없는 모양인데 그럼 잘 가라."

"흥! 가긴 누가 가?"

2차 공격이 시작되자 영욱은 코웃음을 치면서 이번 공격을 피해버렸다.

"아니? 이럴 수가……."

당황한 요원 세 명이 다시 영욱을 공격했다.

"흥!"

영욱은 또 코웃음을 치면서 이어지는 공격을 피해냈다.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한 달이면 도를 틀 때도 되었지. 매번 같은 공격을 받는데 어떻게 느끼지 못하겠어? 내가 너희들처럼 바본 줄 알아?"

영욱은 또 피해내면서 녀석들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투명 공격이 네 녀석의 눈에 보일 리도, 느껴질 리도 없어."

"왜 없지?"

영욱은 또 공격을 무사히 피해낼 수 있었다.

"그건 투명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우리들만의 특권이니까."

"그럼 나에게도 그 투명 초능력이라는 것이 생겼나보지. 완전 투명이라기보다는 눈속임인 스텔스에 더 가깝겠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는 없다."

"아무튼 너희들도 한 번 맞아봐라. 그럼 내 말이 사실인지 알게 될 거야. 좌충우돌."

퍽. 퍼버벅.

영욱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특히 주먹을 내지르는 영욱의 손과 발이 흐릿해져서는 움직임을 도저히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컥. 이, 이건 말도 안 돼. 네 녀석도 투명해질 수 있다니……."

"한 달 동안 친절하게 직접 전수해 주고서는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물론 사부로 모실 수 없는 점은 이해해 줘. 하늘같은 사부가 벌써 있어서 말이야."

퍽. 퍼버벅.

영욱은 경호원 셋을 번갈아가면서 팼다. 원래 투명하다는 점만 빼면 그리 강력한 괴물들은 아니었다. 거인으로 변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도 프레시맨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0년 이상 되었다는 1세대 드림헌터들치고는 자질이 많이 떨어지는 자들인 듯했다. 어쩌면 남을 잡아먹어서 오를 수 있는 한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게 보편적인 성장의 한계일 수도 있고.

물론 투명화 능력 때문에 처음에는 사퍼모어 급이 아닌가하고 착각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피를 흡수한 영욱에게서 전혀 비슷한 능력이 전혀 생겨나지 않은 걸로 보아서는 능력이 아니라 약물이나 특수 장비의 도움을 받은 것인 듯했다. 마치 영욱의 몸에 장착되어 있는 나노캡슐들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공격하는 영욱의 손이 흐릿해지는 것은 투명화가 아니라 그동안 잔상수족의 초식이 많이 숙달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영욱이 이들을 몰아칠 수 있는 것은 이들의 투명 공격이 제 3의 눈에 의해서 보였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고 느낄 수 있으니 별로 빠르지도 않은 공격에 당할 리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말이 끝나자말자 그 말을 신호 삼아서 셋이 함께 움직이는 버릇을 파악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영욱은 그동안 두들겨 맞은 복수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급소보다는 살점이 두꺼운 곳 위주로 공격했다. 한 방에 기절시키면 그동안 맞은 것이 너무 억울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끝없는 싸움을 완벽하게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이들로 하여금 무리수를 두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뺨 등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가격해서 눈이 돌아가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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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못 참겠다. 죽어!"

탕! 탕!

영욱에게 수차례 뺨을 가격당한 자칭 니들 요원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권총을 꺼내들더니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영욱을 향해서 발사했다. 

주먹으로 죽이라는 배경태의 지시를 정면으로 어기면서도 별로 주저하는 기색이 없었다.

억!

하지만 영욱은 순순히 총을 맞아주지 않았다. 영욱의 팔에서 피가 튀었지만 스쳤을 뿐이었다. 

퍽! 우지직.

영욱은 잔상수족의 초식으로 접근해서 총을 쏜 녀석의 손목을 강하게 걷어차 버렸다. 그 결과는 아주 참혹했다. 녀석의 손목 바로 위에 있는 뼈들이 부러지면서 구십 도로 꺾어져버렸다.

퍽. 퍽.

나머지 두 녀석이 놀라서 자신들의 권총을 꺼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쏠 기회조차도 없었다. 

권총 두 개를 피할 자신이 없는 영욱은 빠르게 달려들어서 녀석들의 양쪽 어깨를 완전히 부숴버렸다. 총을 꺼내지도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양 손을 다 사용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양쪽 어깨가 탈골되거나 부러지자 그 엄청난 통증에 못 이긴 세 사람은 모두 기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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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태가 전혀 의외의 결과에 놀라서 자지러졌다. 영욱을 땅속 깊이 파묻으러 왔다가 자신들이 파묻히게 생겼기 때문이다.

"뭐, 뭐야?"

"뭐긴 뭐야? 내가 오늘 끝장을 낸다고 했잖아."

"이럴 리가 없어. 어제까지만 해도 게거품을 물던 녀석이 어떻게?"

"소품으로 준비했던 비누 거품이었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영욱은 학교 동아리에서 연극을 하는 후배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가짜 피는 물론이고 게거품까지도 내면서 실감나게 당하는 척했다. 그러니 배경태의 놀라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사, 살려줘."

"너는 총 없어? 있으면 빨리 꺼내. 그래야 정당방위가 되니까."

"없어. 제발 살려줘."

"총이 없다면 죽일 생각까지는 없어. 너처럼 무자비한 살인자는 아니니까 말이야. 다만 앞으로는 여자들을 농락하지 못하도록 고자로 만들어주지."

영욱도 배경태가 진소희와 사귀면서도 숱한 여자들을 섭렵했다는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거야 영욱과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자신의 약혼자가 될 뻔했던 진소희도 건드렸을 게 빤하니 이번 기회에 손을 봐주려는 것이었다. 

국정원 요원들에게 죽을 뻔했지만 아직도 그들을 죽일 자신은 없었다. 그러니 배경태 역시 죽이지는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 정도의 경고는 필요했다. 

그마저도 하지 않고 풀어준다면 당장이라도 다른 경호원들을 고용해서 복수하려고 들 게 분명했다. 물론 고자를 만들면 더 미쳐서 날뛸 수도 있으니까 협박하는 선에서 그만 둘 의향이었다.

"내가 꺼져줄게. 사실 진소희 그년은 이제 싫증났어. 거지같은 년이 콧대만 높아서 이제는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어."

"그래. 잘 생각했다. 하지만 그동안 나를 팬 게 있으니 오늘은 좀 맞고 가야겠지? 그것도 중요한 부분을 말이야."

"제발 살려줘."

"누가 죽인다고 했어? 하지만 또 내 앞에 나타나면 정말로 죽는다."

"그년과 헤어진다니까 그래. 약속할 수 있어."

영욱이 배경태에게 달려들어서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배경태는 자신의 생식기를 손으로 가린 채로 영욱의 주먹을 피하느라 이리저리 구르면서 통사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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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인적이 끊어진 야산임에도 불구하고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진소희였다.

"영욱 씨! 잠깐만요."

"소희 씨는 아직도 이 자식의 편을 들 겁니까?"

"아뇨. 저도 다 들었어요. 저더러 거지같은 년이라는 데 더 이상 미련가질 일은 없겠죠."

"그럼 뭐하시게요?"

"혹시 거지 근성이 발동할지도 모르니까 이 자리에서 아예 인연을 끊어버리려고요."

진소희가 나타나서 배경태를 구해주기는커녕 손을 봐주려고 들었다. 영욱도 갑자기 변해버린 상황에 놀라 대답을 보류한 채로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진소희는 영욱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몸놀림이나 이동 속도가 보통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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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살려줘. 소희야."

"감히 나를 거지 취급하고도 내 이름을 불러?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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