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쿠.
포크와 함께 도서관의 벽에 패대기쳐진 영욱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투명인간들은 보이지도 않지만 덩치가 거대한 괴물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영욱이 소환한 미니 포크를 마치 장난감 다루듯이 했다.
숫자도 많지만 상대가 보이지 않으니 대적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대충 짐작으로 기계 팔을 휘둘러보았지만 그런 어설픈 공격에 맞아줄 상대들이 아니었다.
영욱은 포크의 소환을 해제하고 그냥 몸으로 투명인간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놓고 두들겨 맞아주는 것이다.
구경꾼들 중에는 자신과 같은 드림헌터들도 있을 테니까 지금 이 싸움에서 이긴다고 해도 투명인간들의 살과 피를 흡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전리품을 얻을 수 없는 싸움을 굳이 이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수단을 강구하려는 것이었다.
퍽!
-억!
영욱이 저항을 포기한 채 몸을 잔뜩 웅크리자 투명하면서도 거대한 발들이 앞을 다투어서 영욱을 짓밟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작전을 바꾸어서 축구공을 걷어차듯이 영욱을 뻥뻥 내지르기 시작했다.
투명 거인은 셋이었다. 영욱의 덩치가 상대적으로 작아서 셋이 동시에 밟을 수는 없으니 웅크린 영욱을 축구공삼아 패스를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표현이 패스하는 것이지 거의 킥에 가까워서 걷어차이는 영욱으로서는 정신줄을 놓아야할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영욱은 끝까지 버티기로 했다. 고통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그냥 기절해버리면 되겠지만 배경태가 보고 있으니까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퍽!
-억!
영욱은 이번 기회에 자신의 맷집을 키워보기로 결심했다. 그 동안 운이 좋아서 공격력은 빠르게 늘어났지만 맷집만큼은 박상태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두들겨 맞는 것도 좋은 훈련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겨우 깨달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냥 공짜로 공놀이를 하게 해줄 수는 없지.'
영욱은 자신의 몸에 실드를 쳐서 충격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리고 벽이나 투명 거인에게 걷어차이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애를 썼다. 그것은 기계체조의 좌충우돌 초식으로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퍽.
-억.
제 3의 눈을 최대한으로 가동한 채 그 타이밍을 잡기 위해서 애를 썼다. 물론 쉽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 걷어차일 때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큰 충격이 와서 그러한 집중력을 유지하기는 무척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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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
영욱은 입을 굳게 다물고서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이젠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먼저 입을 연 쪽은 바로 배경태였다. 그는 지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벌써 한 시간째다. 그러니 포기해라.
-열 시간쯤 지나면 한 번 생각해보기로 하지.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고 싶다면 허세 부리지 말고 어서 항복해라. 내 발에 키스를 하고 무릎 꿇고 빌면 용서해주겠다.
-웃기지마라. 겨우 이 정도로 항복할 거라면 아예 처음부터 항복했을 것이다. 병신아.
-온몸에 선혈이 낭자한데 아직도 그런 말이 나와?
-어차피 내 몸으로 돌아올 내 피들이니까 네가 신경 쓸 것 없다. 저 녀석들의 차는 힘이 왜 이렇게 약해졌지? 겨우 이 정도로 지친 거 아냐?
-웃기지 마라. 다들 봐주지 말고 확실하게 조져!
경태의 지적처럼 영욱의 비주얼은 정말 처참했다. 온몸을 피로 칠갑한 상태였으니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영욱의 눈은 아직도 새파랗게 살아있었다.
*공공장소에서는 공공예절을 지킵시다.
사실 선혈은 영욱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도 있지만 투명 거인들의 발에서 흘러나온 것도 함께 뒤섞여 있었다. 그것은 영욱이 투명 거인들의 킥 순간을 노려서 아주 조그만 포크를 소환했기 때문이다.
영욱을 걷어차는 순간 초미니 포크의 드릴이 거인의 발등을 동시에 찔렀다. 동시에 소환을 해제시켜 버리니 투명거인들은 자신의 발등에서 피가 나오는지를 깨닫지도 못했다.
영욱은 염동력을 동원해서 투명거인들이 흘린 피를 모은 다음 주인들에게 돌아가지 못하도록 자신의 피와 엉키게 만들었다.
인간 축구공 신세가 된 상황에서도 영욱은 최선을 다했다. 걷어 채이면 채일수록 고통도 컸지만 인내력을 동원해서 참아냈다. 그럴수록 견디는 힘이 조금이나마 커져갔다. 이른바 맷집이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실드 역시 좀 더 질겨지고 두꺼워져서 충격을 조금이나마 더 완화시켜 주었다. 무엇보다 기계체조의 수련이 아주 다양한 체위에서도 가능해지고 있었다.
전에는 무조건 지면을 기준으로 한 공격과 이동 그리고 중심이동이라면 이제는 측면과 심지어 머리 위에서 내리꽂히는 투명거인의 발에 저항해서 초식을 전개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가능해졌다.
그게 공격으로 작용할 정도는 결코 아니지만 적의 공격의 강도를 줄여주는 쿠션 역할은 어느 정도 수행했다. 물론 처음에는 1퍼센트 수준의 완화였지만 그게 2퍼센트가 되고 또 3퍼센트로 늘어나고 있었다.
2QB 세상에서는 누구나 불사신이다. 불사신이지만 상대 불사신에 비해 힘이 약하면 비참한 축구공 신세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만 바짝 차리면 절대로 죽지는 않는다. 그게 바로 불사신이다. 조커 괴물은 죽을 수도 있다고 했지만 경험상 겨우 이정도로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튼 영욱은 바로 그 점을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상대가 자신을 꿀꺽 삼키거나 소멸시킬 수는 없으니 두들겨 맞으면서 몸으로 하는 기계체조의 수련에 몰두했다.
그리고 틈틈이 투명거인들의 피를 한 방울 두 방울씩 주워 모았다. 졸지에 각다귀 신세가 되어버린 영욱이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텼다.
-하하하!
오히려 앞으로는 상대를 공격하기보다는 맞아주는 게 오히려 더 좋은 수련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은영은 박상태에게 실컷 두들겨 맞고 난 후부터 드림헌터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런 그녀와 자신의 생각이 신통하리만치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어쩌면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내친 전력이 있으니 다시 사귀는 것은 불가하다는 생각과 그래도 구관이 명관이라는 생각이 치열하게 영욱의 머릿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아하하하!
-웃어? 드디어 미친 거야?
-덩치만 컸지 공격력은 별 거 아니군. 이런 솜방망이 공격이라면 이박삼일이라도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은 거다. 병신아.
영욱은 배경태를 좀 더 도발하기 위해서 말끝마다 욕을 추임새로 사용했다. 투명거인들이 자신들의 발등에서 출혈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좀 더 거친 공격을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축구공 신세로 전락한 주제에 끝까지 큰 소리를 치는군. 정말 이박삼일 동안 버틸 수 있는 지 어디 구경 좀 하자.
-얼마든지 공격해봐라. 병신아. 내가 눈이나 껌뻑 하는지 잘 지켜보라고……. 병신아.
-뭐해? 더 강하게 차지 않고? 그래놓고도 월급을 받겠다는 거야? 응?
배경태는 영욱의 거듭되는 욕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투명거인들을 질타叱咤했다. 그도 학과장과 비슷한 부류라는 걸 깨달은 영욱의 도발이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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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 뻥.
도발에 성공했다고 해서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배경태의 짜증 섞인 명령에 투명거인들의 걷어차는 힘 자체가 달라졌다. 전에는 점잖은 패스였다면 이제는 정말 슛을 하는 것으로 바뀐 듯했다.
영욱은 또 다시 속으로 비명을 토해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킥을 당하는 순간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실드와 기계체조의 초식을 최고 수준으로 발휘해야만 했다.
그리고 투명거인 녀석들의 힘을 조금이라도 빼놓기 위해서 초니미 포크를 소환하고 돌려보내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것은 영욱 자신이 피를 많이 흘려보니 빈혈이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곳이 현실 세계가 아니라 2QB 세상이지만 이런 면에서는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상처 난 부분이 금방 복구된다는 점만 제외하고는.
영욱은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간 피들을 최대한으로 흡수하는 한편 네 개에 이르는 나노캡슐들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빈혈은 결국 산소 부족 때문에 증상을 나타내는 것이니 산소의 원활한 공급은 빈혈 증상을 조금이나마 줄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영욱은 이제 자신의 몸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인내력과 의지력이 아무리 강해도 부상을 심하게 당하면 결국은 기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영욱은 끝까지 버티기로 했다. 정신을 집중하면 할수록 당하는 고통이 줄어들기 때문에 실드와 기계체조의 초식을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으로 발휘하려고 애를 썼다.
'보인다.'
그러던 어느 순간 투명거인들이 킥하는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투명거인이었지만 이제 피가 묻어서 더 이상 투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전체는 아니지만 발 부분은 희미하게나마 보였던 것이다.
사실 워낙 빠르게 움직이는 발이라서 투명하지 않다고는 해도 킥하는 타이밍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제 3의 눈을 동원하니 피하지는 못해도 볼 수는 있게 되었다.
'좋았어.'
매 맞는 순간을 안다는 것은 아무래도 큰 도움이 된다. 정확한 자세로 충격에 대비하고 직격당하는 부분에 집중적으로 실드를 치니 고통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초미니 포크의 드릴이 투명거인의 발등을 정확하게 뚫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영욱은 고통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을 이용해서 투명거인들이 흘린 피와 자신이 흘린 피를 조금씩 삼키기 시작했다. 어차피 기계체조를 실시하고 있는 중이니 소화 흡수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빈혈이 심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배경태는 물론이고 투명거인들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 제 3의 목격자들도 영욱이 피를 삼키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다. 피를 삼켜도 몸 전체가 시뻘겋게 변해 있는 것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좋아. 빈혈이 사라지기 시작했어.'
나노캡슐의 도움도 있지만 영욱의 피는 흡수되자마자 다시 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현실 세계에서라면 수혈의 형태로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자신의 피라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그저 선짓국을 먹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은 2QB 세상이었던 것이다.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고통스럽고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킥을 당하는 충격으로 인해 여전히 피를 흘리는 부위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지럽기는 투명거인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알게 모르게 흘린 피의 양이 적지 않았고, 거대한 덩치를 유지하려면 아무래도 정신력도 많이 소모되고 산소 역시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덩치를 키우게 되면 산소의 요구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것은 지구에 공룡들이 살았던 시절의 대기 산소 농도가 최대 35퍼센트까지 증가했다는 사실로써 쉽게 증명할 수 있다.
조금 전부터 영욱은 심각하게 반격을 고려하고 있었다. 투명거인들이 이제 대충이나마 보이고, 거칠어진 숨소리가 들리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냥 당해주기로 했다. 그게 더 얻는 게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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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좀 조용히 합시다. 공공장소인 도서관 안에서 축구라니 좀 심한 거 아니오?
-허깨비 주제에 무슨 헛소리냐? 맛 좀 봐라.
배경태는 영욱이 만들어낸 허깨비가 하는 소린 줄 알고 참견하는 학생 하나를 조지려고 했다. 영욱을 걷어차는 일에 참여할 수 없어서 몸이 근질거리던 참인데 잘 되었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배경태는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사지가 기이한 각도로 꺾이기 시작했다.
-아, 아파! 넌 대체 누구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 A다.
-무슨 개소리냐? 이름을 밝혀라.
-더 이상은 가르쳐줄 수 없어. 내가 바본 줄 알아?
-거짓말마라. 여긴 박영욱이 만들어낸 영역이다. 이 공간에 다른 영혼이 있을 리 없어. 허깨비 주제에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배경태는 말을 뱉어놓고도 전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 배경태를 공격하면서 말을 하는 학생이 박영욱의 허깨비라면 곧 박영욱의 능력이라는 소리가 되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져버린 셈이었다.
-그럼 넌 뭐냐? 혹시 바보 아냐?
-나는 지금 사냥 중이다.
-역시 애송이들은 어쩔 수 없군. 겨우 드림헌터 하나가 이런 거대한 도서관을 소환할 수 있을 것 같아? 145만 권에 달하는 책 속에 글자가 가득할 수 있겠어?
-놔, 놔라. 아파 죽겠다.
-몸에 좋은 요가를 가르쳐주는데 참을성이 매우 부족하군. 더 이상 당하기 싫으면 어서 꺼져라.
-얘들아. 도와줘.
배경태는 달아나는 대신에 투명거인들을 불러 모았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투명거인들 역시 공중에 떠오르더니 요가를 하는 것처럼 기괴한 구조로 몸이 꼬이더니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도련님. 살려주세요.
-내가 지금 너희들을 어떻게 도와?
-아아아. 아파 죽겠어요.
배경태와 투명거인들은 몸이 꽈배기가 되는 듯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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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염동력을 가진 드림헌터가 도와준 덕분에 겨우 한 숨 돌린 영욱은 몸에 묻은 피들을 삼키고 소화 흡수를 하기 위해서 기계체조를 시작했다.
겉으로는 자신과 투명거인 때문에 쑥대밭이 된 도서관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면서 기계체조의 초식들을 수련했다.
쓰러진 책장을 세우고 책들을 꽂아 넣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았지만 영욱은 포기하지 않고 작업을 계속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 투명거인들과 배경태가 요가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느낌상 정리 작업을 멈추는 그 순간에 자신도 요가 고문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비록 자신이 당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이 난장판은 자신 때문에 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짜 책들이야. 언젠가 내가 읽은 적이 있던 시집과 소설책도 진짜야.'
영욱은 펼쳐진 책들을 정리하는 도중에 틈틈이 글자들을 읽어 내렸다. 겉만 책이 아닌 속이 꽉 찬 진짜 책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 도서관은 공부하는 학생 A의 말처럼 자신이 만들어낸 영역이 아니라 여러 드림헌터들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곳이라는 확실했다.
'공공장소에서 공공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저렇게 혼이 날 수도 있구나. 나로서는 천만다행이지만…….'
영욱은 굳이 책을 소환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이 도서관에는 자신이 소환했던 것과 같은 책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신기한 점은 영욱 자신이 마치 숙련된 사서처럼 모든 책들이 있어야할 위치를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능숙하게 정리 작업을 돕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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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태와 세 투명거인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기절하고 말았다. 그들이 도서관에서 사라지자 영욱의 소화흡수 작업도 한결 더 수월해졌다. 영욱은 더욱더 열성적으로 기계체조를 하면서 정리 작업에 몰두했다.
-형! 이제 그만 치워도 돼요.
-누, 누구신지?
-신소재공학과 후배예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자신도 고문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던 영욱은 공부하는 학생 A가 자신의 후배라는 소리에 얼굴이 활짝 펴졌다. 설마 선배를 고문하지는 않을 테니까.
-2QB 세상에서 현실의 얼굴을 굳이 고집할 필요가 있나요?
-이름이 뭔데?
-그냥 후배라고만 알고 계셔도 돼요.
-그러지. 그런데 아까 그 작자들을 네가 혼낸 거 맞아?
영욱은 후배가 자신보다 그리 강할 것 같지 않아서 하는 소리였다. 혼자서 넷을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의문스러웠다.
-제 힘만으로는 무리죠.
-그럼 다른 사람도 거들었다는 거야?
-지금 이곳엔 형과 저밖에 없어요. 그냥 도서관을 이용하는 학생들은 몇 명 더 있지만 그들이 힘을 보태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네 힘만이 아니라는 건 대체 무슨 소리야?
-이런 공공장소에는 플러스 효과가 있어요. 아직 모르셨던 모양이군요.
-응. 이런 공공장소 자체가 처음이니까 모를 수밖에. 그런데 플러스 효과라니?
-여러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영역이니까 여러 사람들의 힘이 십시일반으로 모여진 것이라고 봐야겠죠.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도서관의 사서로서의 권한인 셈이죠.
영욱은 어제 자신을 반기던 사서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어쩌면 그녀도 2QB 도서관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도서관에서 사서의 권한은 절대적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그녀가 영욱에게 2QB 도서관의 출입을 허용한 것일 수도 있었다.
-사서라면 그렇게 강력한 고문을 할 수 있다고? 아주 멋졌어.
-칭찬 고마워요. 공부에 쏟을 힘도 부족하지만 저런 무뢰한으로부터 소환된 책이나 기물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필요한 힘이죠.
-요가 고문이 보기보다는 효과적인 것 같더라. 나는 강한 임팩트를 줄 수 있는 공격만이 유용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게 아니었어.
-어차피 죽일 수는 없는 상황이니까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관절을 꺾어서 고통을 지속적으로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죠. 부러지지 않았으니 재생시킬 수도 없으니까요.
마치 ABS<anti-lock brake system >과 비슷한 원리였다. 그것은 자동차가 급제동할 때 바퀴가 잠기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개발된 특수 브레이크를 말하는데, 자동차가 달릴 때는 4개 바퀴에 똑같은 무게가 실리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 급제동을 하면 일부 바퀴가 잠기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면 오히려 제동이 되지 않아서 차량이 미끄러지거나 옆으로 밀려서 운전자가 차의 방향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 원리로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꺾어주는 게 요가 고문의 요체인 듯했다.
-그렇구나. 그렇다고 뼈가 없는 오징어나 문어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을 테니까.
-모습이야 얼마든지 바꿀 수 있겠지만 물이 없는 곳이니까 오히려 더 힘들겠죠.
-네 덕분에 살았다. 정말 고마워.
-겉으로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잘 싸우시던데요. 뭘.
-간신히 버틴 거지 그게 어디 싸운 거야?
-저도 보는 눈은 있어요. 하하!
-그런가? 그런데 혹시 싸움 구경하려고 바로 말리지 않은 거였어?
영욱은 이제야 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싸움을 처음부터 말리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왜 말리지 않았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이른바 불구경 다음으로 재미있다는 싸움구경을 했던 것이다.
-예. 우리 학교에서는 형이 가장 유명하잖아요.
-내가 뭘 유명하다고 그래?
-대자보 아래 무릎 꿇은 빡빡이가 바로 형의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아요.
-그래도 그렇지, 맞아 죽는 줄 알았는데 그걸 구경하고 있었던 거야?
영욱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유명해져버린 유명세를 혹독하게 치룬 셈이었다. 덕분에 얻은 것도 많았으니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적응하시던 걸요. 그리고 저도 사서의 힘이 아니라면 당할 수밖에 없는 상대들인데 정말 대단했어요.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런 녀석들에게 어떻게 버텨야 하는 지를 배웠다는 거야?
-저야 늘 도서관에서 사는 편이니까 그럴 일이야 잘 없겠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런 셈이죠.
-나도 이곳에서 살아도 돼?
싸움을 그리 즐기지 않는 사서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화제는 자연스럽게 도서관에 관한 것으로 돌아왔다.
영욱은 슬쩍 눈치를 보아가면서 입을 열었다. 배경태와 강력한 힘을 가진 투명거인들을 피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밀린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당분간은 도서관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이 분명했다.
-그럼요. 책을 정리하시는 걸 보니까 사서로서의 소질이 있더군요. 그러니 우리로서야 대환영이죠.
-우리?
-이 도서관을 만든 사람들이요. 아홉 명이었는데 이젠 형까지 보태서 총 열 명이 되겠네요.
-영광이구나.
그냥 출입 허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사서로 임명된 것이니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당직 사서가 된다면 사서의 힘이라는 것을 사용할 수 있으니 적어도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에는 배경태나 심지어 박상태의 침입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게 된다.
-저도 형이 학교로 돌아오셔서 기뻐요.
-그것도 알고 있었구나. 정말 고마워.
-당연하죠. 이곳은 강원대생만이 입장할 수 있는 대학 도서관이니까요. 사서로부터 허락을 득한 학생들만 머무를 수 있긴 하지만 어지간하면 퇴짜 놓지는 않으니까 그게 그거라고 봐야겠죠.
-평소에도 이곳에서 공부를 한 거니?
-예. 읽고 싶은 책은 많고 시간은 부족하니까 2QB 세상의 도움이라도 받아야죠.
학번으로야 영욱이 선배지만 2QB 세상의 도서관에서 공부한 공부하는 학생 A가 선배인 셈이다. 그러니 영욱은 자신보다 먼저 그런 생각을 해낸 선배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그 소중한 경험을 공유하고자 했다.
-여기서 공부한 것이 현실 세상에서도 기억이 나?
-아주 희미한 기억이지만 시간대비 효율에 있어서는 그럭저럭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책을 읽을 때의 기쁨과 슬픔은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돼요. 독서란 그 순간순간을 즐기는 것이기도 하니까 꼭 효율 때문에 공부하는 건 아니라고 봐야죠.
-그건 그렇지. 사실 기시감 정도만 들어도 효과는 충분하다고 봐야겠지.
-맞아요. 데자뷰 현상이 2QB 세상에서의 실제 경험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죠.
-그런데 이 도서관이 수용할 수 있는 학생들의 숫자는 얼마나 되지?
눈으로 보이는 크기는 오히려 현실 세계의 도서관보다 더 큰 듯했다. 하지만 확인 절차는 필요했다. 같아 보이면서도 전혀 다른 것이 2QB 세상이니까.
-현재로서는 스무 명 정도가 한계예요.
-너무 적은 거 아냐?
-책과 공간이야 충분하지만 운영하기 위해서는 사서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아참, 이젠 능력 있는 형이 합류했으니까 최소 서른 명까지는 입장이 가능하겠군요.
-뭐야? 내가 열 명이나 감당할 수 있다는 거야?
-예. 하지만 익숙해지면 저처럼 스무 명도 가능할 거예요.
-그렇다면 다른 친구들은 사서가 아니라는 거야?
-예. 이 도서관을 만드는 데는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사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봐요. 두 번째 사서가 되신 걸 축하해요.
어쩌면 영욱을 사서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 분쟁을 수수방관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서의 권한을 아주 극적인 상황에서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영욱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면 영광이군.
-제가 더 고맙죠. 이젠 2교대가 가능해졌으니까요.
-그동안 혼자서 고생이 많았던 모양이구나. 앞으로는 나도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줄게.
-이젠 도서관학파 결성식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요.
-도서관학파라? 그거 좋지.
도서관에서 취직 공부를 하는 학생들을 흔히 도서관학파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열렬한 운동권에 대비되는 개념인데 요즘은 운동권 자체가 거의 사라진 세상이니까 순수하게 책을 읽는 학생들의 모임과 대비되는 개념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영욱은 그 중에서도 후자이길 원했다. 당장이야 리포트 작성에만 시간을 쏟을 수밖에 없지만 당장은 곧 지나갈 것이다. 그날이 오면 도서관에 있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을 다 읽고 싶다는 욕망이 불끈거렸기 때문이다.
-다 같이 모여서 인사를 나눌 시간을 잡아보고 따로 연락드릴게요.
-그래. 그런데 내 친구들을 이곳으로 데려와도 될까?
-그럼요. 이제 형은 이 도서관의 사서니까 그럴 자격이 충분해요.
-오늘은 얻는 게 상당히 많구나. 처음에는 축구공처럼 걷어 채이다가 끝나는 줄 알았는데…….
-특별히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하던 공부나 마저 하세요. 저도 읽던 책이 있어서…….
영욱이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하자 첫 번째 사서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도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듯했다. 얼굴은 다르지만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영욱이 알아차릴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래야겠지. 정말 고마워.
-아니에요. 제가 더 고마워요. 앞으로도 형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말이죠.
-네 말투가 내 귀에 상당히 익숙하구나. 아무튼 앞으로도 잘 지내자.
-이런, 들켰나요?
-아냐. 이름은 생각나지 않아.
여자 후배들 중에서도 영욱을 오빠라고 부르지 않고 꼭 형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특히 같은 학년의 한 여자 후배가 말끝마다 형이라고 했는데 첫 번째 사서와 그 어조가 비슷한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가 꺼리니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호호호!
-영원히 생각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업무상 익명성이 보장되는 게 훨씬 더 나은 지라 어쩔 수 없어요. 고마워요. 형.
-저런 녀석들을 혼내주려면 당연히 그래야겠지.
-이해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형.
첫 번째 사서는 말끝마다 형 소리를 붙였다. 이젠 정체를 들킬 걱정이 없기 때문인 듯했다. 이미 들킨 것 같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부르는 이름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나가는 행인 A나 공부하는 학생 A는 좀 아닌 것 같아서…….
-그럼 도일이라고 불러주세요.
-도이, 도삼 그런 식인가?
-맞아요.
-그럼 나는 도열인가? 하하하.
-하지만 형은 그냥 영욱 형으로 부를게요.
-편할 대로 불러. 그리고 말도 편하게 해. 하던 대로.
-알았어. 형.
도열은 제자리로 돌아가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영욱은 아직도 벌렁거리는 심장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활인심방을 잠시 수련하기로 했다. 검지로 머리를 두들기니 청명한 북소리가 나면서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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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책을 읽거나 읽을 책을 고르기 위해서 서가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게 중에는 진짜 영혼도 있고 허상도 있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흥분이 진정되자 영욱은 다시 공부에 매달렸다. 자신이 소환한 책과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책을 비교해보니 오히려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책의 글자가 더 많았다. 그것은 후자가 더 진짜에 가까운 책이라는 소리였다. 물론 진짜 책은 아니다.
영욱은 관련 서적을 마음껏 꺼내놓고서 공부를 즐기기 시작했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진수성찬을 즐기는 것처럼 이 책 저 책 건드리면서 그 맛을 음미했다.
영욱은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보통 좋아하는 게 아니라 아주 좋아한다. 학교 성적이 나오지 않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영욱의 경우 가장 큰 이유는 공부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부를 즐기지 않는 다른 친구들의 경우라면 공부할 시간을 아껴서 게임을 하거나 빈둥거리기 마련인데 영욱은 책을 읽었다. 물론 공부와는 별로 관련이 없는 소설책이나 시집이었다.
그런데 대학에 진학하면 마음껏 읽겠다던 책을 오히려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마음껏 읽을 수는 없었다. 대학생이 더 바쁘기 때문이었다. 학점도 따야하고 데이트도 해야 하니 오히려 책을 읽을 시간은 더 없었다.
그러던 영욱이 모처럼 책 속에 파묻혀 있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만일 이곳이 도서관이 아니라면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영혼들도 있는 곳이니까 참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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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일이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영욱의 어깨를 건드렸다.
-왜?
-형! 이제 도서관 문 닫을 시간이야.
-뭐라고? 벌써 닫아?
-벌써 72시간이나 지났어. 나도 이젠 너무 졸려서 더 버틸 수가 없어. 미안해. 형.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난 거야? 아무튼 너 덕분에 좋은 경험 많이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나도 잘 부탁해. 형.
-그래. 또 보자.
사서로서의 인수인계에 관해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영욱은 굳이 그런 절차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가끔씩 책이나 정리하고 그냥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공부만 하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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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11월 한 달을 아주 바쁘게 보내야 했다. 철야 작업을 끝내고 나면 새벽부터 학교로 직행해서 도서관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또 도서관으로 돌아가서 아예 살았다.
하지만 영욱이 얻은 별명은 도서관의 공부벌레가 아니라 수면벌레였다. 도서관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을 졸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2QB 도서관에서 바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한 번 졸면 최소한 삼사 일은 보내고 돌아왔다. 그런 게 하루에도 열 번 이상 반복되었다.
"오빠! 또 자?"
"자는 게 아니라고 말했잖아."
"거짓말을 하려면 입가에 흐른 침이나 닦고서 해."
"왜 또 왔어? 바빠 죽겠는데."
은영은 아주 집요한 여자였다. 영욱이 싫다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들이댔다. 물론 치근덕거리는 것은 아니라서 영욱으로서도 싫지는 않았다.
"맛있는 도시락을 챙겨오는 사람에게 자꾸 이럴 거야? 내가 직접 싼 거라니까."
"부담스러우니까 자꾸 이러지마. 너한테 관심 없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