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71)

챙!

작업과 훈련이 끝나자말자 두 사람은 선술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축하의 잔을 강하게 부딪쳤다.

"사부님, 24퍼센트의 경지에 오르신 걸 축하드립니다."

"아니,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확연하게 경지가 달라진 느낌이 들었는데 전에는 23퍼센트였으니까 이제는 24퍼센트라고 생각한 거죠."

"눈치 하나는 제법이구나. 너도 8퍼센트의 경지에 오른 걸 축하한다."

"예? 저도 올랐어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개소리를 하려는 거냐?"

"느낌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정말 올랐을 줄은 몰랐어요. 하하!"

"올랐어. 확실하게."

"8퍼센트 맞죠?"

"맞으니까 건배하자, 건배!"

"건배!"

두 사람은 애인 사이보다 더 그윽한 눈빛으로 마주 보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쾅!

그런데 선술집의 문이 세차게 열리더니 누군가 급히 뛰어 들어왔다.

"잠깐만! 바깥사돈, 나도 같이 건배합시다. 주모! 여기 술잔 하나 더 주시게."

"아니, 영욱 아버님이 아니십니까?"

"아버지. 이 새벽에 여기는 대체 무슨 일이죠?"

"새벽이 아니라 어젯밤에 네가 일하는 곳이 내려다보이는 저 앞산에 도착했다. 두 사람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그곳에서 기다리다가 조금 전에 대폿집으로 향하는 걸 보고서 바로 달려 온 거지."

득환은 막무가내가 아니라 나름대로는 아주 치밀한 사람이다. 만일 그가 밤중에 나타났다면 진중권과 영욱 둘 다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벽이라는 게 오늘 실패하면 내일 넘을 기회가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영리하게 처신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방해하지 않은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득환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기계체조를 배우고 있었다. 아침부터 술이나 마시자고 달려온 것은 결코 아니다. 영욱이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긴 하지만.

"조커 녀석의 정체는 확인했어요?"

"그래. 지난번 행정고시에 패스해서 얼마 전에 우리 부서에 배치된 젊은 녀석이었어. 아직도 새파란 녀석이 아버지뻘 되는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괘씸해서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고 싶었지만 그 새끼가 나보다 훨씬 더 강한 줄 아니까 어쩔 수 없이 꾹 참았다."

"포기할 생각이 아니던가요?"

"아냐. 나는 포기하겠다고 약속하더군. 하지만 너에게는 자존심이 상해서 설욕전을 하겠다고 벼르기에 너에게도 알려주려고 온 거야."

영욱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과 춘천 사이가 그리 멀지는 않지만 오밤중에 달려올 일도 아니고 밤을 꼬박 새우면서 기다릴 만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용건이라면 그냥 전화로 하셔도 되잖아요."

"이참에 사돈 얼굴도 보고 싶어서 왔다. 왜 안 돼?"

"안 될 리가 있나요. 어서 드세요."

"자, 건배!"

"건배!"

두 사람의 오붓한 자축 행사는 득환의 가세로 갑자기 떠들썩해지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득환은 진중권과 술잔을 부딪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영욱의 존재는 이제 두 사람의 안중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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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사돈. 행정고시 출신이라면 젊은 나이에 사무관이 된 녀석인데 대체 뭐가 아쉬워서 주변 사람들의 돈을 탐내는 겁니까?"

"그 녀석의 말로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예쁜 여자 친구를 사귀는데 돈이 아주 많이 든다고 하더군요."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예쁜 것 자체가 사치를 의미하는 것인데."

자신의 딸 소희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예쁘니 진중권은 당연히 조커 괴물의 편을 들었다. 영욱도 경험상 그 말이 사실임을 알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득환도 대충이나마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사법고시에 패스했다면 여자 쪽에서 외제차도 사주고 집도 사주겠지만 행정 고시 정도로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입디다."

"나름대로 애로 사항이 있다는 소리군요. 아무튼 사퍼모어 급의 드림헌터 녀석이 하는 행동치고는 좀 치졸하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두 사람은 영욱을 유령 취급하면서 술잔을 기울이고 조커 괴물을 안주삼아서 대화를 나누었다. 아무튼 득환도 그 녀석이 자신을 괴롭히긴 했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는 견해를 비쳤다.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현실 세계에서야 결국 돈이 장땡 아닙니까? 치졸하긴 하지만 요점을 잘 아는 녀석이라고 봐야겠죠. 아무튼 그런 똑똑한 녀석이 내 아들을 노리니까 기분이 별로군요."

"영욱 저 녀석은 타고난 싸움꾼이니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러니 그 자식이 춘천까지 직접 원정 오기 전에는 쉽지 않을 겁니다."

"하하하! 그럴 줄 알고 제가 녀석에게 일감을 잔뜩 안기고 왔습니다. 이곳 춘천에 올 시간이 없도록 말이지요. 그런데 학창 시절에 쳐맞고 다니던 녀석이 대체 언제부터 싸움꾼이 된 거죠?"

"그야 워낙 성품이 착해서 참은 거였겠죠. 설마 찌질이였겠어요?"

진중권과 득환은 영욱을 졸지에 찌질이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영욱으로서는 항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게 진실이니까.

"참을성이야 아주 뛰어난 녀석이었죠. 아무튼 별로 걱정스럽지도 않은 걸 보니까 저 녀석이 다 컸나 봅니다."

"저도 자랑스러운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말씀들 나누세요. 낯이 간지러워서 저는 이만 물러갈게요."

술 따르는 도우미 신세가 된 영욱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쏟아지는 칭찬 아닌 칭찬 세례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다가 결국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가긴 어딜 가?"

"학교 가야죠."

"때려치웠다면서?"

"어제 학과장실에 들렀더니 그냥 다니랍니다."

"뭐야? 중간고사도 안 쳤는데 학점을 준대? 그런 게 어디 있어?"

득환은 너무 좋아서 기뻐해야할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예상되는 문제점부터 따지고 들었다. 매사에 꼼꼼한 성격이 바로 공무원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라면 비결인 셈이다.

"다들 빤히 아는 사정이니까 리포트로 대체시켜 준다고 했어요."

"잘 됐네. 그러지 않아도 네 엄마 이 여사가 눈치를 챘는지 분위기가 수상했는데 정말 잘 됐어."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들키면 큰일이니까 자퇴 소동은 아예 없었던 걸로 해요."

사퍼모어 급의 고수 셋을 이긴 영욱이지만 어머니 이 여사 이야기가 나오자 안색이 창백해졌다. 힘으로 싸울 상대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그럼 가봐라. 그동안 밀린 공부를 하려면 바쁘겠구나."

"아버지는 서울 안 가세요?"

"가야지. 하지만 갈 땐 가더라도 사돈이랑 진하게 한 잔 꺾어야겠다."

득환의 행동을 보면 조커 괴물이 영욱을 노린다는 사실을 직접 알려주려고 왔다는 말은 아무래도 빛이 바랬다. 그런 면도 없지는 않겠지만 목적은 진중권과 술을 마시기 위해서라는 게 명백했다. 물론 술도 마시고 술보다 진한 이야기도 나누겠지만…….

"저는 결혼할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두 분은 벌써부터 사돈지간이세요?"

"양가 부모님이 맺어주면 하늘에서 맺어준 짝이나 마찬가지야. 잔소리 말고 너는 시키는 대로만 해."

"그럼 은영은 어떡하고요?"

"걔와는 헤어졌다며?"

"아버지에게 중재仲裁를 부탁했다면서요."

"나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은영의 일은 무척 안타깝지만 본인이 먼저 끝내자고 했으니 좋은 인연은 아니라고 본다."

은영의 가족은 딸만 셋인데 그녀의 아버지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득환은 그 점을 늘 옥에 티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중권은 말술이라서 두주불사斗酒不辭는 기본이다. 그 점이 득환의 마음을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진소희에게로 기울게 한 것이다. 

개인적인 목적으로는 기계체조를 얻어 배우기 위함도 있지만 그렇다고 사돈을 사부로 모시면서까지 배우겠다는 것은 아니니까 입 밖으로는 꺼낼 수가 없었다.

"사돈 될 사부님이 좋아서가 아니고요?"

"며느리도 좋고 사돈도 좋으면 금상첨화지, 안 그래?"

"아무튼 전 가요."

"열심히 공부해. 공부에도 다 때가 있는 거야."

"제가 앤 줄 알아요?"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하라는 거야. 네가 보살펴야할 가족들의 수가 워낙 많으니까 말이야."

"눼."

노파심 삼아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제는 부모님들까지 챙기라는 소리였으니 그 육중한 부담감에 영욱의 입이 댓 발이나 나왔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볼멘소리로라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의 아니게 가장家長이 된 셈이다.

*어긋난 만남

은영은 학교 정문 앞에서 영욱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환한 표정을 보아하니 영욱의 귀환 소식을 이미 학과장으로부터 전해들은 듯했다. 

"오빠!"

영욱이 시야에 나타나자 큰소리로 부르며 안길 듯이 달려갔다. 하지만 영욱이 긴팔을 앞으로 내밀어서 안기려는 은영을 거부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일이 잘 처리되어서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 그동안 부학회장에게 일을 너무 많이 미뤘으니까 개인적으로 장학금이라도 줘야겠다."

영욱은 이야기가 사랑 쪽으로 흐르지 않도록 업무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다. 

한때 연인이었던 은영과 영욱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부학회장과 학회장으로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은 것이다. 선물이 아니라 돈을 주겠다는 소리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준다면 사양하지 않을게. 오빠가 주는 것이라면 뭐든지 대환영이야."

"돈은 줄 수 있는데 마음은 줄 수 없으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마."

선을 그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시에 대시를 거듭하는 은영에게 결국은 못을 박아야만 했다. 

하지만 은영은 충격을 받거나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 전혀 아니었다. 영욱을 다시 손아귀에 넣을 수만 있다면 이 정도의 모욕쯤은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럼 사랑은 진소희 언니에게 줄 거야?"

"당연하지."

"하지만 소희 언니에게는 오빠보다 훨씬 더 멋진 남자친구가 있어. 그러니까 오빠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걸?"

"나보다 멋진 남자친구라고? 웃기고 있네. 그런 놈이 어디 있어?"

"경영학과 4학년 배경태라고 있어. 집안도 빵빵하고 키도 커서 완전 킹카야. 의심스러우면 둘의 모습을 찍은 이 사진들 좀 봐!"

은영은 그동안 조사했던 것을 영욱 앞에서 몽땅 풀어놓았다. 심지어 스마트폰으로 진소희와 배경태가 다정한 포즈를 취한 채로 찍힌 사진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사진들을 대충 훑어본 영욱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낮에 이렇게 다정한 포즈를 취할 정도라면 이미 틀 것은 다 튼 사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상황이니까 화를 낼 것도 없지만 막연하게나마 환상을 품고 있었던 진소희에게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내색할 수가 없었다. 진소희와 사귀지 않더라도 은영과 다시 시작할 생각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럴 시간적인 여유도 없고, 무엇보다 이러한 은영의 농간에 놀아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상관없어.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

"하나도 안 웃겨. 그게 언제 유행했던 유먼데……."

"내키지 않더라도 이미 부모님들이 정한 결혼이니까 나도 어쩔 수 없어."

결국 영욱은 아버지 득환까지 동원해서 은영의 대시를 포기시키고자 했다. 그런 말을 하니 정말 내키지 않은 결혼을 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꿀꿀해졌다.

"설마 아버님께서 배신했다는 거야?"

"늘 오빠 아빠라고 한계를 분명하게 그어놓고 부르더니 갑자기 웬 아버님?"

"그래. 오빠 아빠가 왜 배신한 거지?"

믿고 있었던 응원군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은영은 별로 흔들리는 표정이 아니었다. 여자의 결심에는 의외로 독한 구석이 있는데 은영 역시 의지가 아주 강한 여자였다. 은영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영욱과 다시 사귀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기세였다.

"청교도주의자인 누구 아빠와는 달리 그쪽 바깥사돈 될 사람이 술을 아주 잘 마시거든."

"흥!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알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네가 대체 뭐가 부족해서 나한테 매달리는 거지?"

"나도 한때 그렇게 착각한 적이 있었어. 하지만 이젠 그게 아님을 잘 알고 있어."

"아니면 뭔데?"

"오빤 숨겨진 보석이야. 킹카 중의 킹카라고."

영욱은 은영의 극찬을 들으면서도 기분이 좋다기보다는 그녀의 표적이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목이 잘려서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수컷 순록이나 호랑이의 머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자신의 머리를 잘라서 장식용으로 쓰지는 않겠지만.

"콧대가 높기로 유명한 너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니 좀 쑥스럽군. 하지만 그렇지도 않아."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해. 그러니 내 말이 확실해."

"그런데 왜 날 걷어찬 거야?"

"내가 착각 때문에 실수했다고 그랬잖아."

"좋아. 내가 숨겨진 보석이라고 치자. 하지만 일단 드림헌터의 길로 들어선 이상 내 인생은 피비린내와 악취로 진동하게 될 거야. 그러니 너는 이런 것과 상관없는 남자를 만나서 잘 살아. 그게 행복할 수 있는 길이야."

"세상이 두 개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나의 세상에서만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어?"

"하지만 2QB 세상은 그야말로 정글이야. 약자에게는 지옥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러니까 내가 오빠와 다시 사귀려는 거잖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은영이 영욱을 킹카 중의 킹카라고 칭찬한 이유는 바로 드림헌터로서의 가능성 때문이다. 그녀는 영욱의 성장 가능성을 아주 크게 보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현실적이고 속물근성이 있는 은영의 판단이기에 맞아떨어질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영욱으로서는 기쁘지 않았다. 마치 가축시장에 팔려가기 위해서 내놓은 송아지가 된 기분이었다. 

"과대평가는 사절이야. 솔직히 나 한 몸 돌보기도 벅찬 실정이니까 너는 제발 좀 참아줘."

"오빠가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있는 게 내 눈에도 보여. 그러니 곧 나를 돌봐줄 여유도 생길 거야. 아니, 돌봐주지 않아도 되니까 옆에서 머물 수 있게만 해 줘. 그러니 제발 나를 내치지만 말아줘."

"네가 먼저 떠나지 않았다면 당연히 이런 말이 나오지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니까 포기해. 그럼 나 먼저 갈게."

"오빠! 같이 가."

말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영욱은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멀어져갔다. 서둘러서 은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마음도 있지만 각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님들을 찾아가서 중간고사를 대신해서 평가받을 리포트를 부여받기 위해서였다.

사실 은영의 집요한 대시는 영욱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애원하는 은영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늘 도도하기만 하던 은영이 순종적인 면을 보이니 그녀의 이런 집요함이 싫다기보다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제는 갑과 을의 관계가 바뀌었으니 다시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물론 진소희를 만나보고 나서야 확실하게 가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진소희가 자신을 거부하면 은영과의 재결합도 어느 정도는 고려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진소희와의 관계뿐 아니라 사부 진중권과 심지어 아버지 득환까지도 얼기설기 엮여버렸으니 순간의 감정에 휘둘려서 결정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

끼이익.

빠르게 달려가던 영욱은 교내를 아주 빠르게 달리던 외제차와 거의 충돌할 뻔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100퍼센트의 확률로 충돌했겠지만 드림헌터인 영욱은 놀라운 동체 시력과 반사 신경으로 아슬아슬하게나마 차를 피해서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중력의 법칙에 따라서 아래로 떨어졌다.

쿵.

"조심해! 새끼야!"

"너야말로 조심해! 개새끼야!"

영욱과 운전자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고함과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조심하라는 의미가 서로 엇갈렸다. 

영욱이 수직 점프로 간신히 충돌을 모면하고는 급정거한 외제차의 보닛 위에 착지했는데, 운전자는 자신의 차에 스크래치가 날까봐서 고함을 지른 것이었다. 물론 영욱은 운전 조심하라고 소리친 것이다. 

"안 내려가? 남의 차 위에서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이 새끼가 지금 사람을 칠 뻔 해놓고 그런 말이 나와? 그리고 교내에서 레이스를 펼쳐?"

"내가 바쁜 일이 있어서 좀 밟았다. 그렇다고 남의 차를 망가뜨리는 게 말이 돼?"

"이 자식이 정말 기본이 안 되어있군. 차에서 내려!"

"잘하면 치겠다. 그래, 내렸다. 어쩔래?"

교통사고 미수를 처벌할 수 있는 형법은 없으니 영욱은 직접 손을 봐주기로 했다. 하지만 외제차 운전자도 망설이지 않고 내리는 걸 보니 힘 좀 쓰거나 보는 것처럼 돈이 아주 많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까 외제차 중에서도 꽤나 비싼 차종인 듯했다.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 그러니 일단 좀 맞자."

영욱은 이번 기회에 몸으로 직접 수련한 기계체조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복학생 모임에서 싸가지 없는 이 운전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후배임이 분명했다. 사람을 칠 뻔하고도 외려 큰 소리를 치는 이 무례한 녀석에게 따끔하게 본때를 보여주기로 했다.

영욱이 싸우려는 자세를 잡자 녀석도 자세를 잡더니 망설이지도 않고 달려들었다.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일단 패고 나서 개 값을 물어주겠다는 험악한 기세였다.

"미친 새끼! 넌 오늘 내 손에 죽었어."

아니나 다를까 어마어마한 괴력을 가진 녀석이었다. 녀석도 상당한 수준의 드림헌터였다. 하지만 영욱을 당할 수는 없었다. 영욱에게는 벌써 8퍼센트에 이른 기계체조가 있었다. 

퍽. 아고고.

영욱의 빠른 발길질에 복부를 세차게 강타 당한 녀석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 일단 뒤로 비칠비칠 물러섰다. 자신의 돌격을 간단하게 막아낸 이상 상대가 보통 인간이 아님을 이제야 겨우 알아차린 듯했다. 영욱 역시 상대가 상당한 수준의 드림헌터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맷집이 제법인데? 그래서 적반하장이었던 거였군."

"네 녀석 역시 마찬가지겠지."

"어린놈이 선배에게 막말을 하다니 아직도 혼이 덜 났군."

"웃기는 녀석이군. 네 녀석이 선배라는 보장이 어디 있다고 망발이야?"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나? 복학생 모임에 나오지 않는 놈이니까 넌 무조건 내 밑이지. 주먹부터 앞세우는 깡패 새끼에게 그런 게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대학교 캠퍼스 내에서 박상태와의 싸움처럼 피를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영욱은 얄팍한 서열 논쟁을 들고 나왔다.

"사돈 남 말 하고 있네. 그리고 복학생이라고 해서 나보다 선배라는 보장이 어디 있어? 나는 4학년인데……."

"복학하고도 3학년이면 당연히 너보다 선배지.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선배를 차로 치려고 하더니, 그것도 모자라서 주먹으로 패려고 들어?"

서열을 정하는 것이 싸움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명분이나 정당성의 확보에는 어느 정도 관련이 있어서 누구나 싸움에 임해서는 나이나 학번 타령을 하게 된다. 어린 새끼라는 등의 욕설도 그런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

"시발, 싸우는데 선후배가 어디 있나? 그리고 내가 누굴 차로 치었다는 거야? 어디 다친 데라도 있어? 다친데 있으면 증거 대봐."

서열 경쟁에서 밀린 외제차 운전자는 막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명분에서는 자신이 밀린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선배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막말을 한 셈이니까.

"시발? 지금 막 나가자는 거지? 제한속도가 30km/h인 학교 내에서 시속 100km도 넘게 달리고도 그런 말이 나와? 만일 내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중상이나 사망사고가 났을 텐데 지금 배 째자는 거야?"

"어쨌든 무사하잖아. 교통사고 미수를 처벌하겠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데?"

운전자는 이미 상습법인지 도로교통법을 잘 알고 있었다. 법을 잘 아는 게 아니라 법의 맹점을 잘 아는 것이겠지만 이미 이러한 경험이 여러 차례 있는지 살인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사실 교통사고로 인한 살인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한 경향이 있다. 그것은 워낙 차가 많으니 전과자의 양산을 막기 위한 일종의 배려인 셈이다. 엄격하게 적용하면 국민의 절반이 전과자가 될 테니까.

하지만 진실은 자동차를 팔아서 먹고 사는 재벌들이 로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래야 사람들이 자동차를 더 많이 살 테니까.

그러나 이 악랄한 운전자는 그 점을 악용해서 사람의 목숨쯤이야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돈만 있다면 사람을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 오만한 표정에 영욱의 꼭지가 돌아서 대충 훈계 정도로 넘어가려던 생각을 180도로 바꿔버렸다.

"그러니까 법이 아니라 주먹으로 훈계하겠다는 거지. 넌 좀 더 맞아야 해."

"미친 새끼야. 너도 빡빡 깎고 정문 앞에서 반성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아니면 꽤나 오랫동안 철장 신세를 지든지 해야 할 거야."

"진단서가 나와야 그런 일이 벌어지지."

"설마 치유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드림헌터라면 누구나 자신의 정신력을 소모해서 자가 치유를 할 수 있지만 남의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다. 남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진짜 치유 계열의 초능력을 가져야만 가능한데, 그런 능력을 가진 드림헌터는 아주 드물고 물리적으로는 그렇게 강하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 싸가지 없는 운전자는 영욱이 치유 계열의 초능력을 가진 자인 줄 알고 오히려 반색하는 것이다. 

"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 그리고 팰 때 부러지지만 않게 조심하면 되지 않겠어. 덤벼!"

"좋아. 내가 너 같은 깡패를 무서워할 것 같아?"

"별 지랄 같은 소리를 다 듣겠네. 넌 죽었어."

퍽. 퍽. 아고고.

기계체조는 맨손 전투에도 놀라운 효용을 가지고 있었다. 영욱은 여러 개의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면서 녀석을 효과적으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물론 녀석도 만만치는 않았다.

영욱은 때릴 기회가 생기면 찢어지거나 부러지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싸가지 운전자의 근육이 많은 부위만을 골라서 가격했다. 멍이 드는 것 정도는 치유해줄 치유 초능력이 있으니 하루 종일 패더라도 법적인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

퍽. 퍽.

"아이고. 나 죽네."

처음에는 팽팽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구타로 변해갔다. 그러자 조수석에 앉아서 외면하고 있던 여자가 나서서 둘의 싸움을 말렸다. 

"이제 그만하세요."

영욱은 말리는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구타를 계속했다. 그리고 마지못해서 입을 열었다.

"사귀는 놈이라고 같은 편을 들다니 실망이군요."

"무슨 소리죠? 혹시 저를 아세요?"

"국문학과 4학년 진소희 씨 아닙니까?"

강원대에서 여신女神으로 불리는 진소희를 영욱도 모를 리 없다. 진소희 역시 영욱을 모를 리 없겠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누구시죠?"

"신소재공학과 3학년 박영욱입니다. 설마 모르셨다고 하진 않겠죠?"

"아뇨. 전혀 몰랐어요. 하지만 제 남자친구를 두들겨 패는 이유는 대충 알겠군요."

"정말 어이가 없군요. 연적戀敵을 쫓아내기 위해서 패는 것으로 오해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순수하게 교통사고 피해자로서 제 목소리를 내는 것뿐입니다."

진소희는 영욱이 신분을 밝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폭행의 이유를 매도罵倒하려고 했다. 싸가지 운전자 배경태가 교통사고를 일으킬 뻔했다는 것만 빼고 보면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 만한 상황이긴 했다. 

"목소리는 제 남자 친구의 입에서 더 크게 나오니까 이제 그만하시죠."

영욱은 기가 막혀서 항변해보았지만 진소희의 독설毒舌도 만만치 않았다.

"그만 두고 싶어도 녀석이 먼저 사과를 해야 그만 두죠."

"사과하고 싶어도 그렇게 패는데 어떻게 말이 나와요?"

"좋습니다. 잠시 숨 돌릴 시간은 주기로 하죠. 야, 이 새끼야. 어서 사과해. 그리고 앞으로 학교 안에서는 시속 30km 이하로 달리겠다고 약속해."

결국 진소희의 말발에 밀린 영욱은 구타를 멈추고 배경태의 사과를 종용했다. 하지만 배경태는 사과할 의사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발악하기 시작했다.

"개새끼! 네가 바로 박영욱이었구나."

"어라? 너도 나를 알고 있었나? 그랬었구나. 그래서 나를 차로 치려고 한 거지?"

"애석하게도 몰랐다. 만일 알고 있었다면 더 빨리 몰아서 들이받았을 건데……."

"이젠 교통사고 미수가 아니라 살인 미수가 되는 셈이군. 나를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니까……."

이번에는 영욱도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억지가 아니라 배경태가 작정하고 달려든 게 분명했다. 그것은 녀석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영욱을 병신으로 만들지 못해서 아깝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동차 보닛에 자국 생긴다는 이유로 짜증스럽게 굴 리가 없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몰랐다고 했잖아."

"아냐.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해. 차로 치고서 돈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게 분명해.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어 놓고도 합의만 하면 별 문제없을 테니까."

"선배라고 봐주니까 정말 안하무인眼下無人이구나. 겨우 그 정도의 능력으로 나를 건드리다니 정말로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이었어."

영욱이 끝까지 물고 늘어지자 결국 배경태도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결론만 이야기해. 그러니까 사과할 생각은 전혀 없는 거지?"

"당연하지. 오히려 너를 폭행 혐의로 고소할 거다."

"누가 너를 폭행했다는 거지? 증거라도 있어?"

"당연히 있지. 내 차에는 블랙박스가 있으니까 모든 게 다 녹화되어 있다."

그것을 노리고 일부러 당해주었다는 소리였다. 물론 영욱이 약해서 자신이 두들겨 팼다면 블랙박스가 있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 참 잘됐네. 네 놈이 나를 치려고 했던 장면도 녹화되어 있을 테니까 교통사고 미수로 그칠지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그리고 내가 몇 번 어루만져 주긴 했지만 진단서가 나오지 않으면 폭행을 증명하기는 어려울 거다."

"진단서 문제라면 내가 알아서 하지."

"당연히 알아서 하겠지. 하지만 엉터리 진단서 같은 편법을 사용하면 일이 더 커질 테니까 알아서 해. 일단 좀 더 맞자."

"죽여라. 죽여."

영욱은 다시 달려들어서 배경태를 패기 시작했다. 사실 팬다기보다는 녀석의 몸에 생긴 멍 자국을 치유하려는 것이었다. 중간에 패기도 해서 병 주고 약 주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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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말로써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다시 푸닥거리가 진행되자 이번에는 진소희가 몸으로 막아서면서 둘의 싸움을 말렸다.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아빠가 하도 칭찬하기에 대단한 분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정말 실망이군요."

"나 역시 실망입니다.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을 오랫동안 사귄 것만 해도 실망스럽지만 지금 이 순간도 남자 친구의 편만 들다니 사부님 운운할 자격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저 사람에게 함부로 굴면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서 말리는 거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진소희는 나직한 목소리로 배경태를 건드리면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예?"

"그리고 요즘 세상에 부모가 정해준 결혼을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그러고 나서야 다시 목소리를 높여서 둘 사이의 결혼 요구는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저 역시 일종의 피해잡니다. 그리고 사부님께서도 일방적으로 결혼하라는 말씀은 하지도 않으셨고요. 하지만 내가 그쪽이 싫으니까 잘 보일 이유도 없겠군요."

"그럼 서로가 잘 됐군요."

영욱은 이 사건이 결국은 배경태의 의도대로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차 시도는 영욱을 자동차로 치는 것인데 영욱의 놀라운 반사 신경 때문에 아깝게 실패했다. 그리고 2차 시도는 흥분한 영욱과 시비를 붙은 후에 여자 친구 진소희 앞에서 흠씬 두들겨 패주는 것인데 역시 압도적인 무력 차이로 실패하고 말았다. 

3차 시도는 영욱의 폭행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서 고발하는 것인데, 이 역시도 자신의 과실이 드러날 수도 있으니 실패한 셈이다. 

그리고 4차 시도는 진단서를 끊어서 형사 고발을 하는 것인데 이 역시도 몸에 멍이 전혀 없으니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예상 가능한 5차 시도는 이것을 빌미로 진소희와의 언쟁을 유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성공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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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배경태를 몇 번 더 걷어찬 후에야 음산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여자 친구 덕분에 오늘은 운 좋은 줄 알아라. 다시 한 번 그러고 다니면 바퀴마다 모조리 펑크를 내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내가 이 일을 그냥 넘어갈 것 같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얼마든지 덤비라고. 대적해줄 용의가 있으니까……."

"좋아. 그렇다면 내 악수를 거절하지는 않겠군."

"그렇게 주먹을 섞었는데 아직 내 몸에 손도 대지 못한 거야? 병신아."

영욱은 약을 살살 올리면서 배경태의 손을 꽉 눌러 잡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배경태의 표정을 보면서 자신의 머릿속에서 진소희를 지워버리기로 했다. 

첫 만남부터 어긋났으니 서로가 인연因緣은 아닌 듯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사부 진중권과 아버지 득환이 기함氣陷하겠지만 첫 만남부터 이렇게 어긋난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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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이 도서관에서 리포트 작성에 골몰하고 있는데 은영이 찾아와서 여러 권의 노트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내 강의 노트지 뭐겠어? 리포트를 쓰는데 도움이 될 거야."

은영 역시 학점이 아주 좋은 편이다. 그러니 필기 역시 탁월한 수준이다. 하지만 남에게는 빌려주지 않기로 유명한 그녀가 그런 노트들을 통째로 가져온 것이었다.

"부담스럽다니까 자꾸 이럴래?"

"오빠야말로 자꾸 왜 이래? 진소희와 사귀지 않겠다고 말한 게 농담이었어?"

영욱과 진소희가 설전을 벌이는 것을 지켜보았다는 소리였다. 싸움판을 벌이고 게다가 큰소리로 떠들었으니까 귀가 멀지 않은 이상 듣지 못했을 리 없다. 그리고 영욱에게 계속 반말로 일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선후배 사이가 아니라는 강력한 주장이었다.

"걔랑 사귀지 않는 것이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어. 그 언니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경쟁할 자신이 있으니까."

"걔보다 네가 못한 게 뭐야? 설마 얼굴이 조금 더 예쁜 것 때문에 기죽은 거야?"

영욱은 지금의 자신이 그런 위로를 해줄 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진소희에 대해서라면 이상하리만치 주눅이 드는 은영에게 화를 벌컥 내었다. 

그만큼 진소희에게 큰 실망을 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사실 은영 정도의 미모라면 진소희보다 취향의 차이일 뿐 꼭 부족하다고 볼 수는 없다. 

"얼굴 때문이 아냐. 그 언니도 상당한 수준의 드림헌터니까 기가 죽는 거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 그렇지 않고서야 두 드림헌터 간의 그 험악한 싸움을 어떻게 말릴 수 있었겠어?"

드림헌터가 아닌 은영이 진소희가 드림헌터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능력은 없다. 하지만 은영은 아주 영민했다. 영욱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 그럴 듯한 주장을 펼쳤다. 듣고 보니 꽤나 그럴듯했다. 

은영의 짐작대로 영욱이 드림헌터라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고, 영욱에게 두들겨 맞기는 했지만 거의 대등한 수준의 배경태 역시 드림헌터가 분명하다. 

그러니 둘의 싸움을 몸으로 뜯어 말린 진소희는 누가 보더라도 상당한 수준의 드림헌터가 분명했다. 그것도 영욱과 배경태보다 더 강한 드림헌터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영욱은 아주 은영이 영리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솔직히 그것은 영욱이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이기 때문이다. 영욱은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이제야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걔는 너와는 달리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남자친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노력한 거야. 괜히 찔리는 게 있으니까 별 소리를 다 하네."

"맞아. 찔리는 부분도 없지는 않아. 하지만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는지 정작 분위기를 그렇게 만든 오빠만 모르는 것 같아서 한 말이야. 농담이 아니라 두 마리의 사자가 싸우는 것보다 훨씬 더 살벌했다니까."

"정말이야?"

"다른 애들에게 물어봐. 그러지 않았다면 싸움이 벌어졌는데 뜯어말리지도 않고 쳐다보고만 있었겠어?"

"그건 무슨 소리야?"

"요즘 활발하게 추진되는 학교 폭력 추방 운동 때문에 싸우는 걸 지켜보고 있을 리가 없다는 말이야. 오빠 덕분에 생긴 현상인데 오빠만 모르고 있어."

"두 달 만에 첫 등교인데 그런 일이 있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내가 알려주고 있잖아."

"좋아. 이 노트들은 잘 볼게."

영욱은 자신과 배경태의 싸움이 의외로 살벌했다는 것을 은영의 지적으로 알게 되었다. 자신도 그런 분위기에 말려들어갔다면 배경태의 능력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뛰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자신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서 일부러 돌진한 게 분명했다. 그랬으니까 영욱이 피한 것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차에 치이면 더 좋고, 그게 아니라면 간신히 피하면서 볼썽사납게 널브러지는 모습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간단하게 피하고는 오히려 비싼 자동차의 보닛을 일부러 밟아대니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러나 진소희 앞에서 맞아주면서 그녀의 동정표를 얻어내는 데에는 결국 성공했다. 영욱은 배경태에게 놀아났을 수도 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여태까지는 운이 좋아서 승리의 행진을 이어올 수 있었는데 이제 그 운이 얼추 다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거의 재벌 2세 수준이라니 아마도 고용할 수 있는 드림헌터들의 숫자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강력한 보디가드나 가디언이 현실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영욱은 경태가 청하는 결투의 의식 즉, 악수를 끝까지 받아주지 말아야 했다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배경태가 자신의 손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웃고 있음으로써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젠장! 만만하게 볼 놈은 하나도 없군."

영욱은 투덜거리면서도 은영이 준 강의 노트들을 빠르게 읽어 넘겼다. 그리고 리포트를 쓰기 위해서 산더미처럼 쌓아둔 책들도 빠르게 훑어보았다. 

따로 속독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동체 시력이 많이 좋아져서 대부분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간단하게 훑어 본 다음 2QB 세상에 소환해서 본격적으로 공부할 생각이었다. 손때를 묻히고 대충이나마 읽어봤으니 완벽에 가까운 소환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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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도서관에서 앉은 채로 잠시 잠을 청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두 달이나 밀린 공부와 리포트 작성이 가능할 리 없다. 

그것도 중간고사를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의 품질 높은 리포트를 여러 개나 작성해야 하니 공부해야할 양은 산더미보다도 많았다. 

만일 은영이 건네준 강의 노트들이 없었다면 강의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에서 20센티에 육박하는 두꺼운 원서 서른 권을 죄다 해석하기는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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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어.

영욱은 2QB 세상으로 대부분의 책들을 소환할 수 있었다. 빠르게 넘겨보니 빠진 글자는 별로 없었다. 수많은 그림들과 그래프들도 거의 완벽하게 소환되었다.

영욱은 일단 닥치고 열 번씩 읽기로 했다. 공부를 잘하는 방법에는 왕도가 없다. 타고난 머리와 소질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열심히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누구라도 열 번을 읽으면 어느 정도는 뜻을 깨칠 수 있다. 그래서 영욱이 선호하는 공부 방법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일단 열 번은 읽고 보는 것이다.

참을성과 부지런함은 영욱의 강점이다. 그 강점을 앞세워서 수북하게 쌓아 놓은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백 번을 읽는다면 이해를 넘어서 통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읽고 또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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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차례를 반복해서 읽자 그저 모호하기만 했던 책들의 내용이 어느 정도 파악되기 시작했다. 이젠 이해되지 않은 부분들을 골라서 여러 차례 더 읽어야할 대목이었다. 하지만 영욱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자가 나타나고 말았다.

-흥! 여기에 숨어있었군.

-뭐야? 도서관에서 떠들다니 너는 학생도 아니군.

-흥! 여기가 도서관이라고?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데?

-여긴 2QB 세상이니까 꼭 도서관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상관없겠지. 하지만 좁으니까 밖으로 나가자.

영욱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배경태는 오히려 출입구를 막아섰다. 영욱을 내보내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밖으로 내보내줄 생각은 없는데 어떡하지?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여기서 싸우자고?

-네가 만들어낸 허상들이 다칠까봐 그래?

-저들이 모두 허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좋아, 네 녀석이 시작한 싸움이니까 후회하지 마라.

영욱은 도서관 내부에 있는 30명 남짓의 학생들 중에는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 자신처럼 도서관을 이용하는 드림헌터나 영혼들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말벌에 쏘여보고, 불에 구운 곤충을 먹어본 후유증인 셈이다. 사실 구운 곤충은 맛도 좋았지만 영양도 아주 풍부해서 영욱의 능력을 조금이나마 더 강하게 만들어 준 듯했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도서관 내부에서의 싸움이 마뜩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좁아서 포크를 소환하는 데에도 애로사항이 있었다. 물론 크기를 좀 줄여서 소환하면 되겠지만 위력이 줄어들 테니 마뜩치 않았다. 

-후회할 거라면 시작하지도 않았다. 대항할 거라면 어서 변신해라.

-나는 변신할 줄 모른다. 그런데 너는 왜 변신하지 않는 거지?

-나까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이런, 데리고 온 경호원들을 믿는 모양이군. 그런데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대체 어디에 있지?

-그걸 알려준다면 데려온 보람이 없을 것 같으니까 네가 잘 찾아보도록 해라. 그래봐야 어쩔 수 없겠지만…….

배경태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면서 영욱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물론 2QB 세상이니까 죽일 수는 없겠지만 지독한 고통을 안겨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영욱처럼 강제로 신체의 일부를 뜯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영욱은 사방에서 접근하는 기운들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비몽사몽>에서 이러한 초능력에 대해서 읽은 적이 있었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찾아보라는 걸 보니 아마도 투명 초능력을 쓰는 자들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최하가 사퍼모어 급인데 이게 바로 돈의 위력인가?

-당연하지. 가난뱅이 주제에 부자에게 무례했으니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미친 새끼! 부자가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줄 아는군.

-굳이 벼슬을 할 필요도 없는 고위 귀족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겠지. 자본주의 세상의 고위 귀족은 바로 재벌이니까 말이야.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 어쩔 수 없군. 포크 소환!

보이지도 않는 사퍼모어 급 드림헌터가 여러 명이라는 소리에 영욱은 비록 도서관 안이지만 어쩔 수 없이 포크를 소환했다. 

도서관 건물의 천정이 상당히 높긴 하지만 포크의 크기를 상당히 줄여서 소환해야만 했다. 그만큼 위력은 줄어들 것이다.

-하하하! 도랑이나 치는 조그만 미니 포클레인을 소환하다니 정말로 웃기지도 않네. 애들아. 죽여라!

-미친놈.

영욱은 미니 포크를 타고 배경태를 향해서 빠르게 돌진했다. 보이지도 않는 녀석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머리를 치려는 것이었다. 일단 배경태를 사로잡거나 제압할 수만 있다면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다고 판단했다. 

-흥! 제법 빠른 편이군. 하지만 이 정도의 속도로는 어림도 없다.

-나도 잘 알고 있다.

여차하면 영욱이 달아나버릴 수도 있으니까 전장을 도서관 안으로 택한 듯했다. 게다가 장애물이 많아야 이런 상황에서 도망갈 수 있다고 여긴 듯했다. 

배경태가 자신을 노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복도가 아닌 서가書架 쪽으로 피하자 영욱은 길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는 삼족속보로 따라붙었다. 그러자 미니 포클레인이라고 만만하게 보았던 배경태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뭣들 하는 거야? 어서 공격해!

배경태는 미니 포크에게 짓밟힐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하면서 자신이 보디가드로 데려온 투명 드림헌터들에게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였다.

'정말로 보이지도 않고 잘 느껴지지도 않는다. 어지간하면 제 3의 눈으로 느낄 수 있을 텐데 정말 대단한 녀석들인가 보군.'

영욱은 배경태를 빠르게 공격하면서도 자신에게 접근하고 있을 투명인간들의 기척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얼핏 느껴지기는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짐작만으로 휘두르던 포크의 기계 팔이 무엇엔가 걸려서 작동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그 기계 팔을 붙잡고 포크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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