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71)

쿵.

하지만 조커는 간발의 차이로 빠져나가고 말았다. 느려터진 포클레인이라고 비웃더니 과연 잔상을 남길 정도로 움직임이 빨랐다. 

-제법이군.

-흥! 겨우 그 정도로 스피드를 논하다니 어디 한 번 당해봐라. 잔상지수!

영욱은 속으로 간이 철렁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면서 큰소리를 쳐댔다. 서울에서 이곳 춘천까지 왔는데도 이 정도의 힘을 가진 자라면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가 분명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이 아니라면 통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영욱은 기계 팔이 세 개가 되도록 빠르게 움직이면서 조커를 공격했다.

-제법이구나. 하지만 그 정도의 스피드로는 어림도 없다.

-흥! 웃기지 마. 누구 마음대로 도망을 쳐?

영욱의 필사적인 공격이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었다. 그 공격에 조커가 당하지는 않았지만 당장으로서는 겨우 겨우 피해내는 데에만 급급했다. 아무래도 너무 먼 거리를 이동한 후유증인 듯했다. 

그러던 조커가 애써 큰소리를 치면서 영욱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지만 영욱은 더욱 빨라진 이족보행으로 바짝 추격하면서 연신 공격을 퍼부었다.

-정말 성가신 녀석이군. 좋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대응해주지. 으악!

조커가 본격적으로 대응해 주겠다고 말하면서 잠시 멈추어선 순간 포크의 기계 삽이 정확하게 녀석을 짓이기고 말았다. 녀석이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영욱은 계속해서 밟고 또 밟았다.

-이 미친놈이 감히 누굴 뭉개는 거야? 

-병신아. 그럼 안마라도 해줄까?

-그만 두지 못해? 아프잖아.

-사퍼모어라도 유세를 떨더니 겨우 책상물림이었군. 그러니까 사냥은 겁이 나서 하지도 못하고 주변 사람의 돈이나 뜯으려는 거겠지. 

-감히 너 따위가 사퍼모어를 모욕하다니 죽을 줄 알아라.

-병신아. 2QB 세상에서는 누구도 죽지 않는다는 걸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도 죽지 않는다고 누가 그래?

조커 괴물의 반응을 보건대 죽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았다. 비몽사몽의 내용이 100% 정확한 것은 아니니까 영욱도 더 이상 우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니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더욱더 힘을 내기 시작했다. 

-죽든지 말든지 상관없겠지. 만일 죽는 자가 생길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네가 될 것이다. 

-흥! 겨우 이 정도의 공격으로는 어림도 없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런 말이 나와? 아무튼 간에 오늘 잘 걸렸다. 2QB 세상이 책상물림에게는 얼마나 더 무서운 곳인지를 확실하게 알려주마.

-감히 나를 모욕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제발 용서하지 마. 부탁이야. 나도 너를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말이야.

영욱은 최선을 다해서 녀석을 도발했다. 그래야 녀석의 숨겨둔 반격이 나올 테니까. 이왕이면 집중하고 있는 순간에 반격이 나와야 피하든지 처리하기가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프리즈 필드freeze field!

쩌저적.

영욱이 녀석의 반격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상상치도 못한 반격이 이루어졌다. 녀석이 비명처럼 고함을 지르며 주문을 외우자 포크와 영욱 그리고 조커마저도 일순간에 꽝꽝 얼어버렸다. 

그래서 정지한 장면의 사진처럼 모든 것이 멈추어서고 말았다. 움직일 수도 없고 심지어 숨마저도 쉴 수 없었다.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텔레파시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그건 얼지 않는 듯했다.

-뭐, 뭐야, 이건?

-어떠냐? 이젠 꼼짝도 못하겠지? 너 이젠 죽었다. 하하하!

조커 괴물 녀석은 자신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얼어붙은 것도 모르고 별로 우습지도 않은 멘트를 날렸다.

*새로운 방식의 수련

-병신아! 얼어붙기는 너도 마찬가지잖아. 

-젠장! 재수가 없으려니까 하필이면 기계 삽에 눌린 상태로 같이 얼어버렸군. 

-병신! 이러니까 책상물림이라는 소리를 듣는 거지.

영욱이 평생 동안 했던 욕설보다 지금 이 순간에 내뱉는 욕설이 더 많았다. 조커 괴물을 도발하기 위해서 일부러 입을 걸레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얼음에 대한 면역이 있어서 전혀 고통스럽지 않아. 

-병신아. 나 역시도 마찬가지야. 어릴 때부터 얼음을 아주 좋아했거든. 하하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마어마한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하지만 영욱은 자신의 몸을 30센티 두께로 뒤덮은 얼음보다는 숨이 막혀서 죽을 지경이었다. 

포크는 무려 직경 10미터도 넘는 거대한 얼음 속에 갇혔지만 영욱은 운전석에 타고 있었던 덕분에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얼음으로 둘러싸여서 전혀 숨을 쉴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조커 괴물과의 대화야 텔레파시니까 상관없지만 벌써 숨이 턱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벌이 신기루가 아니라 2QB 세상에서 존재하는 생명체인 것처럼 2QB 세상의 공기 역시 상상의 산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지금처럼 질식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니 두꺼운 얼음 실드 속에 갇혀서 호흡이 불가능해진 영욱은 추위를 견디는 것과는 별개로 질식해서 죽을 지경이 되었다.

물론 2QB 세상에서는 누구나 불사신이다. 하지만 질식해서 의식을 잃게 되면 곧 바로 2QB 세상에서 추방당하고 만다. 흔히들 알기로는 악몽을 꾸다가 고함을 지르면서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은 상태다. 

한 번의 추방이지 영구 추방은 아니니까 다시 잠을 자면 2QB 세상에 다시 올 수 있다. 하지만 당면한 문제는 영욱이 아니라 영욱의 아버지 득환이었다.

그러니 영욱은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얼음을 깨려고 사력을 다했다. 관상동맥에 설치된 두 나노캡슐들을 가동시켜서 산소와 포도당의 도움을 받으면서 기절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단단하게 얼어붙은 한 뼘 이상 두께의 얼음은 그 속에 갇혀있는 영욱이 깨뜨릴 수 있는 아이스크림 과자가 아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또한 문제는 또 있었다. 벌에게 쏘인 손바닥이 이제 와서 갑자기 화끈거리더니 온몸에서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알레르기의 발현 시점이 쏘인 직후가 아니라 혈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크게 증가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아마도 벌집을 건드리고 도주하던 동물이나 사람이 벌을 피해서 물속으로 숨어든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말벌은 물속에 숨은 적을 물 밖에서 기다리다가 숨이 막혀서 나오면 공격을 재개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필이면 말벌이었나? 졸라 가렵군.'

가뜩이나 아토피를 앓는 영욱으로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 지독한 가려움이란 여태까지 아토피에 시달리던 영욱으로서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버텨내야 해. 저 녀석 덕분에 얼음찜질을 하고 있으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해.'

영욱은 긍정적인 생각만을 하면서 버티고 또 버텼다. 사실 호흡이 완전히 중단된 상태에서 오직 나노캡슐에서 생산되는 산소와 포도당만으로 버틸 수는 없다. 그 생산량이 양이 극히 미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장이 멎는 것만은 겨우 막을 수 있었다. 게다가 체온이 떨어진 덕분에 영욱의 심장은 분당 서너 번 정도로 아주 느리게 뛰면서도 여전히 멈추지를 않았다.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지만 시간의 흐름으로는 겨우 일이 분 남짓한 상황이다. 하지만 2분이 지났을 무렵 또 다른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노캡슐에서 생산된 산소가 체내에서 대사 사이클을 거친 후에 결국 이산화탄소로 변했는데, 온몸이 얼음에 둘러싸여 있으니 그것을 배출할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영욱은 사력을 다해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들이쉴 수는 없지만 조금씩이나마 생산되는 이산화탄소가 있으니 그것을 내보내야만 했다. 그런데 예상보다는 쉽게 숨을 내뱉는 것이 가능해졌다. 

'된다. 왜지?'

잠시 생각해보니 자신의 피부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면서 열이 올랐고, 미약하지만 그 열이 피부와 접하고 있던 얼음을 약간이나마 녹였기 때문이었다.

얼음의 부피가 물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크니까 녹은 곳에는 약간이나마 빈 공간이나마 생겨났고, 그곳으로 이산화탄소가 가득한 공기를 내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압력이 좀 더 높아지면 탄산수처럼 이산화탄소가 물에 녹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영욱은 새로운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내뱉는 공기가 점점 더 압축되면 자신을 감싸고 있는 얼음에 조그마한 균열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희망이었다. 

다만 나노캡슐이 작동하는 3분 안에 그 희망을 이루어야만 했다. 그러지 못하면 쿨타임 10분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영욱은 벌에 쏘였던 왼쪽 손바닥 근처에 얼음이 제법 많이 녹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 부위를 통해서 염동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희승 교수 역시 두 손바닥을 위로 뒤집어 올리면서 자신을 떠올리는 염동력을 사용했고, 다시 손바닥을 땅 방향으로 뒤집어서 떨어뜨렸으니 염동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하는 출구는 손바닥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삼 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좋은 일만 생긴 것은 아니었다. 얼음에 내성이 있다는 조커 녀석은 농담이 아니었던지 벌써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그 두꺼운 얼음을 다 녹여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을 누르고 있는 포크의 기계 삽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아니, 몇 초만 더 지나면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 되면 영욱의 패배가 결정된다.

'안 돼!'

우우웅!

비록 포크도 두꺼운 얼음에 뒤덮여 있었지만 완벽하게 다 뒤덮인 것은 아닌지 아직 엔진까지 꺼진 상태는 아니었다. 영욱은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조종 레버를 쥔 손 부분이 조금이나마 녹은 것을 이용해서 기계 삽을 조금이나마 더 누르기 위해서 애를 썼다. 다행히 포크의 기계 팔은 얼음을 깨면서 작동했다.

-미친 새끼! 아직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야?

-내가 말했잖아. 나도 얼음을 꽤나 좋아한다고 말이야. 몸에 열이 무척 많은 편이거든. 하하하!

-그래봐야 승부는 이미 끝났다. 네 녀석의 잘난 기계 삽이 더 이상 내려오지는 못하니까 말이야.

-과연 그럴까? 그리고 너도 아직은 탈출할 수가 없잖아. 안 그래?

-지금 땅을 녹이고 있는 중이니까 곧 탈출할 수 있을 거다. 그리 되면 너는 끝장이다. 기대해도 좋아.

-흥! 내가 탈출하도록 내버려둘 것 같아?

포크의 기계 삽을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어지자 영욱은 손 부위의 얼음을 깨기 위해서 정신을 집중했다. 염동력으로 가상의 바늘을 만든 다음 손등을 감싼 얼음 부분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피시시식. 지지지직.

구체적인 상상을 발휘하자 염동력의 효율이 크게 증진되었다. 바늘에 의해 구멍이 뚫리더니 두꺼운 얼음에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 균열이 몸 전체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일단 포크를 운전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영욱은 땅을 녹여서 탈출하려는 조커 괴물 녀석을 기계 삽으로 꾹 눌러주었다.

'안 돼!'

하지만 3분이 지나면서 나노캡슐의 작동이 멈추고 말았다. 영욱은 그나마 공급되던 산소가 중단되자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제 질식해서 기절하는 일만 남았다.

'응? 뭐지?'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호흡이 오히려 더 원활해진 느낌이 들었다. 녹아서 조금이나마 헐거워진 얼음 족쇄 사이로 공기가 들어오면서 조금이나마 호흡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물론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지만 나노캡슐에만 의존하던 것에 비하면 빈집에 소가 들어온 것과 같은 형국이 되었다.

우우웅! 쿵. 쾅. 쿵. 쾅.

영욱은 포크의 기계 팔을 강하게 움직여서 팔을 감싸고 있던 얼음을 부순 다음 좌충우돌의 초식으로 포크에 강한 하중荷重을 실어서 조커 괴물을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뭐야? 이 미친 새끼가 죽으려고 환장換腸했나?

-죽으려고 환장한 녀석은 바로 너야. 쥐포가 뭔지 알지? 바로 그렇게 만들어주마.

-크아아아!

투두둑.

몸을 녹이기는 했지만 아직은 완전히 녹이지 못한 조커 녀석의 몸 일부가 얼음처럼 부서져나가며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영욱은 아랑곳하지 않고 좌충우돌과 풍차 돌리기 초식을 섞어가며 제 자리에서 공중제비를 뱅뱅 돌면서 녀석을 밟고 또 밟았다.

-죽어라! 죽어!

이 싸움 역시 상대의 방심으로 인해서 우연히 승기를 잡은 것일 뿐 아직 프레시맨에 불과한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영욱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학과장이 불을 다루는 것처럼 얼음을 다루는 조커 괴물 녀석은 자신의 말대로 사퍼모어가 분명했다. 책상물림이라서 아직까지는 마음대로 다루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사실 영욱은 불과 얼음 공격은 물리적인 측면에서 고려하자면 별 거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자기 생겨난 얼음 속에 갇혀보니 상황은 전혀 달랐다. 얼음으로 만든 창을 날리거나 얼음 바위를 날리는 수준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물에 빠진 것처럼 얼음이라는 낯선 환경 속으로 매몰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얼어 죽는 것보다 질식해서 죽는 것이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얼음지옥이 바로 이런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크나큰 고통이었다.

그런 대단한 초능력을 지닌 자가 직장 동료를 괴롭히고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려고 한다는 점 또한 우습게 여겨졌다. 하지만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책상물림이긴 하지만 무력적으로 어느 정도 강해진 점을 이용해서 손쉽게 실속을 챙기겠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게 드림헌터로서의 위험한 사냥보다는 오히려 더 쏠쏠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QB 세상에서는 강력한 힘이 정의겠지만 현실 세상에서는 돈이 정의로 통하기 때문에 그러는 듯했다.

-감히 우리 아버지를 괴롭혀서 삥을 뜯으려고 하다니 어디 맛 좀 봐라.

-끄아아아. 제발 살려줘.

-웃기고 있네. 이곳에서도 죽일 수가 있다니 반드시 너를 죽여 버리겠다.

영욱의 공격은 지루할 정도로 오랫동안 이어졌다. 결국 고통을 견디지 못한 조커 괴물은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 2QB 세상에서도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영욱은 녀석을 온전한 상태로 보내주지 않았다. 

이희승 교수처럼 온전한 팔을 획득하지는 못했지만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살점과 피들이 바로 영욱의 전리품이었다. 살펴보니 잘려나간 손가락도 네 개나 있었다. 

꿀꺽.

영욱은 좀 더 강력해진 염동력을 발휘해서 그 피와 살점들을 깨끗하게 주워 모은 다음 주저하지 않고 삼켜버렸다. 조만간 녀석과 다시 싸우게 될 테니까 조금이나마 녀석의 능력을 흡수해서 다음 전투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더럽고 징그러운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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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괜찮아?

-예. 하지만 거의 죽을 뻔했어요. 장난 아니게 강한 녀석이네요.

영욱은 아버지 득환이 말을 걸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존재를 생각해냈다. 그만큼 싸움에만 몰입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괴물 녀석이 내 직장 동료라고? 무서워서 어디 출근이나 하겠나.

-예. 악수나 신체적인 접촉을 통해서 상대의 영역을 인지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아버지 이름도 알고 있었잖아요.

-그러게. 내 이름을 막 부르는 걸 보니 동료나 상관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나쁜 새끼 같으니라고.

엄살을 부리면서도 욕까지 하는 걸 보니 득환도 용기를 되찾은 듯했다. 꼼짝없이 얼음에 갇혀서 죽는 줄 알았는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영욱을 보았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래서 조커 괴물과 나눈 대화 내용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부하직원일 수도 있어요. 조커로 변장한 상태니까 무슨 소리들 못하겠어요?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몰라요.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 사이트에서 발생하는 어처구니없는 악성 댓글들을 모르세요?

-그럼 대체 누구지?

-손가락이 불편한 녀석을 찾으면 될 거예요. 

영욱은 곤혹스러워하는 득환을 위해서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자신이 삼킨 손가락만 해도 네 개나 되니까  현실 세계에서도 당분간 불편함을 호소할 게 분명했다.

-여기에서 손가락이 잘리면 현실에서도 잘려나간다는 거야?

-그렇지는 않지만 한동안은 부자연스러울 겁니다. 특히 정교함을 요하는 타이핑 작업은 힘들다고 봐야겠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 밑으로는 모두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하면 되겠군.

찾아낸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꿈속에서 속절없이 당하는 것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또한 자신의 현실 신분이 드러나고도 조커 행세를 계속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일단 찾아내는 것이 문제 해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그 녀석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규합해서 힘을 모으거나 피해자들의 돈이 조커의 계좌로 흘러갔는지 여부를 체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조커 괴물이 부하직원이라면 위계질서가 중시되는 공직 사회의 특성상 일단 들키면 더 이상 만행을 부리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 모르니까 동료들과 상관들도 잘 주시하세요.

-그럴게. 그런데 네 표정이 왜 그래?

-녀석의 손가락을 삼켰더니 배가 아파서 그래요. 지금부터 소화 흡수에 도움이 되는 체조를 해야 하니까 아버지는 따뜻한 잔디밭에서 쉬고 계세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움직여라. 어서!

 -예. 아버지.

영욱은 서둘러서 기계체조를 시작했다. 그리고 득환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 기계체조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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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구나. 정말 멋져.

그런데 한동안 구경하고 있던 득환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몸으로 영욱의 기계체조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기계체조 자체가 비보이의 춤과도 비슷하니 굳이 흉내 내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오십대 중반의 중늙은이가 따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과격한 동작이었다. 

당연히 실패가 잇따랐다. 하지만 득환은 포기하지 않았다. 중심을 잃고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면서도 흉내 내기를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늘이야 무사히 넘겼지만 계속해서 아들에게 짐이 될 수는 없으니 자신도 열심히 수련해서 조금이나마 강해지기로 마음을 독하게 먹은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2QB 세상이라서 부상 걱정은 없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제법 따라 하시네? 어?'

영욱은 제 3의 눈으로 아버지 득환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구경하다말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아버지의 춤 실력 때문이 아니라 기계체조의 수련은 맨 몸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영욱도 곧바로 포크에서 내린 다음 몸으로 직접 기계체조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게 더 소화에 유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포크의 운전으로 기계체조를 하는 일은 상당히 익숙했지만 직접 몸을 움직여서 포크의 동작을 흉내 내는 것은 처음이니 오히려 더 어려웠다. 

하지만 두 부자는 이리 구르고 저리 처박히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드넓은 잔디밭이 모두 엉망진창이 되도록 두 사람의 몸으로 하는 기계체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고집이라면 득환과 영욱 모두 주위에서 알아주는 인간들이기에 포기란 있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둘의 기계체조는 조금씩이나마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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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

두 부자는 새벽이 되어서야 아주 개운한 표정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냄비 밥을 해서 날계란을 깨어 넣고는 간장으로 간을 해서 맛있게 비벼먹었다. 그리고 아쉬운 이별의 시간이 왔다.

"아들! 우리 자주 연락하고 살자."

"그래야지요. 운전 조심하세요."

"걱정하지 마. 밤새도록 수련했더니 몸이 아주 가뿐해. 그리고 네 덕분에 악몽도 잘 해결될 테니까 날아갈 것 같아. 정말 고맙다."

"저도 아버지 덕분에 좋은 수련 방법을 깨닫게 되었어요. 정말, 정말 고마워요."

"짜식, 겸손하기는……. 아빠는 네가 자랑스럽다. 오랜 만에 우리 큰아들 한 번 안아보자."

득환은 영욱을 꼭 껴안더니 한참동안 놓아주지를 않았다. 영욱은 예전에 우러러보던 키 큰 아빠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자신의 눈 아래에 등이 구부정한 초로의 늙은이가 안겨 있음을 보고 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제 그만해요. 남들이 쳐다봐요."

"부자지간인데 보면 어때? 그리고 나이 차이가 이렇게 나는데 설마 동성연애자로 보겠어?"

"갑자기 친한 척하지 말고 어서 가세요."

"좀 그런가? 그럼 또 보자."

"엄마에게 말씀 잘 드리세요."

아내 이 여사 이야기가 나오자 득환은 여태까지 친한 척하던 표정을 버리고 분위기를 싹 바꾸더니 입을 열었다. 아내가 조커 괴물보다 훨씬 더 무서운 듯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네가 직접 말해라. 내가 무슨 수로 이경숙 여사를 감당해?"

"예. 그렇게 할 게요."

영욱의 어머니 이 여사는 영욱의 자퇴 사실을 아직도 몰랐다. 그것은 득환이 자신의 아내가 혹시라도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지 몰라서 아직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방문도 그냥 지방 출장이라는 핑계를 대고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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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아버지 득환을 떠나보내고 나서 모처럼만에 학과장실을 찾았다.

"학과장님, 안녕하세요?"

"어험! 자네가 학교엔 어쩐 일인가?"

학과장은 영욱이 자기 마음대로 자퇴서를 내고 사라져서인지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영욱의 자퇴서 제출 사실을 잘 활용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당사자가 직접 이희승 교수를 고소한 것만은 못하기 때문이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들렀습니다."

"진흙탕 개싸움이 그렇게 금방 끝나겠어?"

"예? 벌써 두 달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끝날 기미가 없어요?"

"몇 개월이 아니라 몇 년 이상을 끌 수도 있는 일이야. 그리고 이희승 그 작자가 학교를 떠나지 못하겠다고 저렇게 완강하게 버틸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 교수는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해서 자신을 무단 해고한 강원대 측과 법적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사실 이런 일이 쉽게 해결될 리 없다. 법원의 판결이 나는 것도 어렵지만 그 판결에 불복하고 상급 법원에 상소하면 또 다시 기나긴 재판이 벌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구실에 정말로 중요한 물건이 있었나보죠."

"그렇지 않아도 몇 차례의 불법 침입을 저지해야만 했네. 나로서도 그렇게 집요한 인간은 처음이야."

"그럼 2QB 세상에서 혼내주면 될 거 아닙니까?"

"쩝! 그러지 않아도 한 판 붙었는데 혼내주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당할 뻔했어. 자네에게 팔을 빼앗기고도 염동력의 위력이 정말 장난이 아니더라고……."

학과장 김진명은 이 교수가 영욱에게 손이 아니라 한 팔을 통째로 빼앗긴 사실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둘이 정말로 싸웠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저도 같이 공격하기로 하죠."

"뭐야? 이제 와서 밥값을 하겠다는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뭘 더 바라는 거야?"

"공동의 적부터 무찌르자는 거지요. 바라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하하!"

"다분히 역설적으로 들리는군. 분명히 뭔가 바라는 게 있는데 대체 그게 뭐지?"

의심이 아주 많은 학과장 김진명은 영욱의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한 듯했다. 싸우다가 운이 나쁘면 큰 피해를 당할 수도 있는데 그냥 도우려고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제가 바라는 게 있으면 제공하겠다는 말씀인가요?"

"조건에 따라서는 제공할 수도 있지."

"지금으로서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네요. 나중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함께 낮잠이나 한판 때리자고. 지금 당장 어때?"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 학과장은 그런 기분으로 영욱과의 군사동맹軍事同盟을 받아들였다. 영욱이 이교수의 팔 하나를 통째로 뜯어먹었음을 아니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학과장님도 그런 표현을 사용하시네요."

"젊은이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생활하는 직업이니까 당연하지."

영욱은 학과장 김진명의 팔 한쪽이나 피 한 사발을 대가로 요구하려다가 그냥 참기로 했다. 운이 좋으면 함께 싸우다가 자연스럽게 얻을 수도 있으니 일단 싸움이 끝난 후에 필요한 것을 요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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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과장이 진저리를 쳤지만 이희승 교수 역시 피해가 적지 않은 듯했다. <비몽사몽>에 의하면 드림헌터가 사냥 중에 상처를 입게 되면 회복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냄새 때문에 다른 드림헌터들이 꼬이기 일쑤라서 오히려 사냥 당하게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적혀 있다. 부상당한 암사자를 하이에나 무리가 잡아먹는 것처럼…….

그러니 다른 드림헌터들의 활동이 뜸한 시간에 잠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영욱뿐만이 아니라 2QB 세상에서 위협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취하는 상식적인 도피 방식이다. 그게 바로 학과장이 함께 낮잠을 한판 때리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문제는 이 교수가 언제 낮잠을 자는가 하는 것이겠지만 학과장 정도 되는 사퍼모어 급의 드림헌터라면 몇 차례 졸아봄으로써 상대가 2QB 세상에 있는지 여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고 했다.

"됐어. 시작하자고."

몇 차례 졸다 깨다를 반복하던 학과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영욱에게 말했다. 둘은 학과장실의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손을 맞잡고 낮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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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환의 벽에 비해서 상당히 질긴 영역의 벽을 뚫고 들어가자 이희승 교수도 이미 느끼고 있었던지 두 사람을 째려보고 있었다.

-흥! 둘이 함께 몰려올 줄 알고 있었다.

-네가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원수를 졌으니까 적도 많을 수밖에.

-쥐새끼 두 마리쯤이야 문제없으니까 어서 덤벼라.

이희승 교수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싸움을 시작했다. 어쩌면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영욱도 빠르게 포크를 소환하고는 이 교수에게로 짓쳐들었다. 학과장의 화염 초능력은 아무래도 원거리 공격일 테니 자신이 앞장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흥! 어린 녀석이 운 좋게 한 번 이기더니 겁이 없어졌구나. 

이희승 교수는 또 다시 두 손바닥을 위로 뒤집어 올리면서 강력한 염동력을 사용했다. 예전처럼 포크를 하늘 높이 들어올리기 위함이었다. 

-나도 흥이다.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할 줄 아느냐?

포크 주변의 흙과 돌들이 빠르게 하늘로 떠올랐지만 영욱과 포크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은 영욱이 풍차돌리기와 좌충우돌의 초식을 이용해서 염동력 공격 범위를 살짝 벗어났기 때문이다.

2QB 세상에서 발휘되는 초능력 역시 정신력이라는 에너지를 필요하기에 이희승 교수의 염동력에도 범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범위는 영욱을 중심으로 반경 몇 미터 정도일 것이다. 

몸소 체험함으로써 그것을 알게 된 영욱이 이희승 교수의 염동력 공격 범위를 살짝살짝 벗어나면서 서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발이 제법 빨라졌군. 하지만 겨우 그 정도의 실력으로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말로 하는 공격이라면 내가 도저히 피할 수 없겠지.

영욱이 자꾸 피해내자 이 교수는 작전을 바꾸어서 커다란 바위를 염동력으로 들어 올리더니 마치 포탄처럼 날리기 시작했다. 

십여 개의 바위가 영욱이 타고 있는 포크의 운전석을 향해서 대포알처럼 날아오자 마치 운석의 비를 보는 듯했다. 바위들 중에서 하나라도 맞으면 최하 중상重傷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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