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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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말이 되어서야 영욱의 기계체조 기본 동작 제 3식 풍차 돌리기 초식의 습득이 어느 정도 끝났다. 

배우는 첫날부터 상당한 소질을 보이기는 했지만 움직이는 속도 조절과 원활한 방향 전환을 일정 수준으로 올리는 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물론 초식의 완벽한 숙달은 아직도 요원했지만 일단 입문 수준에는 간신히 올랐다고 판단한 사부 진중권이 다음 초식으로 넘어가고자 했다. 그는 요즘 들어서 마음이 더 급해진 듯했다.

"오늘 배울 초식은 기본 동작 제 4식 좌충우돌左衝右突이다."

"하지만 3식도 아직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4식은 무리가 아닐까요?"

"언제까지 기본 동작 3식만 붙들고 있을 거냐? 그래서 언제 심화 동작 4초식을 배우고, 경시 동작 2초식도 배울 거냐?"

"죄송합니다. 사부님."

"네 불찰이 아니니까 죄송할 것은 없다. 원래 몇 년씩 걸리는 게 정상이니까 죄송할 이유도 없다."

진중권은 성화를 부려놓고는 영욱의 잘못이 아님을 깨닫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영욱의 배우는 속도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인데 진중권이 마음이 급해서 그런 소리가 나온 것이었다.

"예. 사부님."

"그리고 오늘 배우게 될 이 초식은 네가 이미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것 같으니까 오히려 더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제가 할 줄 아는 거라면 혹시 급발진과 급정거를 반복하는 것인가요?"

"그래. 다만 어디로 튈지를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해야 한다는 게 좌충우돌의 핵심 포인트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시범 동작을 잘 지켜보도록 해라."

"예. 사부님."

사부 진중권은 자신의 포클레인을 이족보행처럼 몰면서 지그재그로 현란하게 움직이거나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동작을 반복했다. 영욱은 그 동작을 바라보면서 눈을 반짝거렸다.

빠른 중심이동으로 급발진과 급정거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공격이나 회피의 수단으로 활용될 수도 있겠지만 훨씬 더 위력적인 공격이나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진중권의 시범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영욱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좌충우돌의 진수를 전수해 주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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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모처럼 만에 새로 배운 4식의 수련에 깊이 빠져들었다. 진중권이 보여준 좌충우돌 초식은 홍금보의 취권이나 김흥국의 호랑나비춤을 연상케 하는 어지러운 춤사위와도 같았다.

서너 번의 페인트 모션에 가까운 예비 동작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스텝을 거쳐서 마지막 동작이 완성되는 비교적 복잡한 형태의 초식이었다.

하지만 그게 곧 중심을 빠르게 무너뜨리고 다시 바로 잡는 것의 반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풍차돌리기가 마치 전후좌우로 텀블링을 하는 것과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영욱은 그 동안 풍차돌리기의 집중훈련으로 몸의 중심이동에는 어느 정도 이력이 붙어 있어서 좌충우돌 초식을 연습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금이나마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학교를 그만두고서 벌써 한 달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수련했으니 3식 풍차돌리기에 비해서 훨씬 더 어려워야할 제 4식 좌충우돌이 오히려 더 쉽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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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저 녀석은 어째서 4식이 더 쉬운 거지? 나는 1년도 더 걸려서 겨우 흉내만 낼 정도였는데 세상 정말 불공평하다."

진중권은 투덜대면서도 모처럼만에 환하게 웃었다. 영욱이 자퇴한 후 훈련하는 시간은 많았지만 오히려 진도가 더 나가지 않아서 마음을 끓이고 있었는데, 그러한 고민이 일거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사실 훈련 시간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성취가 빠르고 큰 것은 아니다. 진중권은 그동안 영욱이 빠른 성장을 거듭했던 비밀이 주독야경의 치열한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겨우 받아들이고 있었다.

옛사람들이 주장했던 문무겸전이라는 말이 그저 말장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영혼의 목마름을 해소시켜줄 자양분이 없으니 오히려 맹훈련이 역효과가 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다른 수련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기계체조는 육체의 단련보다는 영혼의 효과적인 이용과 단련을 위한 것이니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슬럼프 기간이 무려 한 달에 육박할 즈음에야 막무가내로 대학무용론을 부르짖었던 자신의 성급함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튼 새로운 초식의 배움으로 인해 영욱이 그 슬럼프를 벗어날 수 있게 되니 노심초사하던 그의 마음도 한결 누그러졌다. 

사실은 다음 초식으로 넘어갈 수준이 아직 되지도 않았는데 혹시나 하고 분위기 전환용으로 시도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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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슬럼프를 겪은 영욱의 훈련은 다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야! 박영욱!"

하지만 첫눈이 내린 10월의 마지막 날에 불청객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내리는 첫눈을 맞으면서 열심히 훈련 중이던 영욱에게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었다.

"아, 아버지. 여긴 어쩐 일이세요?"

"너야말로 이 시간에 공부는 하지 않고 여기서 대체 뭐하는 거냐?"

"사실은……."

영욱은 아주 빠른 속도로 자신이 결행했던 자퇴와 새로운 삶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성질이 매우 급한 아버지 득환이 듣고 있을 리 없었다.

"야 이 새끼야! 누가 너보고 돈 벌어 오라고 했어?"

"그, 그게 아닙니다."

"물론 나름대로는 사정이 있었겠지."

"예. 제가 자세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내 말부터 들어."

"예. 아버지."

"이런 일은 먼저 이 아버지와 상의부터 했어야 하는 거 아냐? 어떤 일이든 간에 말이야."

"혹시 뉴스를 보고 알게 된 건가요?"

영욱은 노발대발하는 자신의 아버지를 보면서 약간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자퇴한 사실을 알린 바는 없었으니 아마도 다른 경로를 통해서 알게 되었을 것이다. 

요즘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무소불위 이희승 교수'에 대한 내용을 아버지도 모를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 은영의 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요즘 들어 방문이 뜸해지긴 했지만 그녀는 득환과도 가끔씩 통화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서슬을 시퍼렇게 세우고서 역성을 내는 아버지를 보니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반갑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릴 때는 무섭기만 하던 아버지가 어느새 오십 중반을 넘어서 중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자신이 가장家長임을 주장하면서 핏대를 세우고는 있지만 이제는 다 자란 영욱 자신이 아버지 득환을 보살피며 챙겨야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아니다. 오늘 아침에 은영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휴가를 내고 달려온 거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야 임마! 그 정도로는 설명이 부족하잖아. 이젠 대학생도 아니라고 기승전결도 몰라?"

득환도 영욱의 자퇴가 이미 오래 전의 일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영욱을 나무라기보다는 부모로서 자식이 힘든 결정을 내릴 때 도와주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더 큰 듯했다.

"아버지도 혹시 드림헌터라는 말 아세요?"

"그게 뭐냐? 대낮에 꿈꾸는 소리를 왜 하는 거야?"

"말로 설명하기는 곤란하지만 꿈속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게 드림헌터란 말이냐? 그런데?"

득환은 영욱의 설명에 솔깃한 반응을 보였다. 듣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영욱이 판타지소설을 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했다.

"드림헌터들이 저를 노리고 있어서 강해지지 않으면 잡아먹힐 입장에 처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문제의 그 이희승 교수와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고요."

"그 빌어먹을 교수 새끼도 드림헌터냐?"

"예. 아버지."

중앙 부처에서 근무하는 4급 공무원이 말귀가 어두울 리 없다. 그리고 모른다고는 했지만 전혀 모르는 것 같은 눈치도 아니었다. 

평소의 철두철미한 성격을 고려하자면 이미 어느 정도 정보를 파악하고서 춘천으로 향했을 것이다. 은영으로부터 들어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을 테니까.

"내 귀에는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서나 볼 수 있는 아프리카 정글 속 이야기처럼 들리는구나."

"맞아요. 그게 바로 진실이에요. 현실과 2QB라는 두 개의 세계가 한 공간에서 공존하는 게 바로 이 세상의 숨겨진 본질이었어요."

"꿈이 그저 꿈이 아니라는 말이지?"

"예. 그저 꿈일 수도 있지만 아닐 확률이 더 많다는 게 진실이죠."

"그럼 꿈에서 가위에 눌리는 게 그저 꿈만은 아니라는 말이겠지? 그렇지?"

박득환이 급히 휴가를 내고 부랴부랴 춘천으로 달려온 이유는 오늘에야 아들의 자퇴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는 듯했다. 

인터넷상에는 현실 세계에서의 영욱과 박상태의 싸움에 대한 몇 장의 사진과 함께 그 내용도 언급되어 있는데, 목격자들에 의하면 그 싸움이 마치 몬스터끼리의 싸움처럼 무시무시했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드림헌터들의 싸움이라고 주장하는 댓글들도 더러 달려있었다. 그래서 득환이 당장 처리해야할 바쁜 일들도 팽개치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영욱도 아버지 득환의 반복되는 질문과 함께 나이에 비해 몇 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은 퀭한 얼굴을 보고서 그러한 사정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자신도 박상태에게 이유도 모른 채로 두들겨 맞을 때는 정말 미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어떤 새끼가 아버지를 괴롭혀요?"

"요즘 들어서 꾸는 꿈인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나타나서 나를 죽이려고 하지 뭐냐. 대항하려고 해도 온몸이 파김치처럼 축 늘어져서 움직일 수조차 없어."

"혹시 그 자식이 아버지의 몸을 뜯어먹었나요?"

"그건 아니고 나보고 돈을 바치라고 협박했어. 그러지 않으면……."

"돈을 바치지 않으면 그 새끼가 어떻게 할 거래요?"

영욱은 신종 드림헌터의 출현에 관심을 보였다. 상대에게서 뜯어먹을 만한, 영양가 있는 부위가 보이지 않으니까 돈이라도 뜯어내려는 듯했다. 

"그 개새끼가 너희들과 네 엄마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더구나."

"그래요? 그래서 돈을 줬어요?"

"우리 형편에 그 새끼에게 줄 돈이 어디 있냐? 공무원의 박봉으로는 너희 둘에게 보내줄 용돈도 빠듯한데 차라리 나 혼자 당하고 말지."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제가 나서서 해결해 볼게요."

영욱도 해결할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설령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부터는 자신의 힘으로 가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2QB 세상과 관련된 일이라면 가족들 중에서는 자신이 제일 강할 테니까.

"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래?"

"그럼 하지 말까요?"

"아냐. 해! 임마. 꼭 말을 그렇게 해야겠어?"

"하하! 당연히 해야죠. 오늘 제 방에서 주무시고 가세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예요."

"하지만 너는 매일 철야 작업이라며?"

득환은 은영으로부터 영욱에 대한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듣고 왔다. 그래서 이런 말까지 나오는 것이다. 사실 득환은 은영을 예비 며느리로 생각하고서 가끔씩 전화 통화를 시도하는 만행蠻行을 저지르곤 했다.

은영도 싫다고 내색할 수는 없어서 겉으로만 상냥하게 응대하는 척했지만 요즘 들어서 영욱이 자꾸 자신을 피하자 오히려 그녀가 먼저 득환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영욱도 대충 짐작할 수는 있지만 캐묻지 않고 그냥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낮에 좀 더 열심히 해두면 작업 일정에는 큰 차질이 없을 테니까 문제없어요. 그리고 하루 정도는 빼먹어도 되니까 염려마세요."

"그러자꾸나."

"이 책이 바로 꿈속 세상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한 책이에요. 읽어 두시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예요."

"비몽사몽이라…… 책이름이 조금 거시기하구나."

"내용은 예상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니까 읽을 만할 겁니다. 그럼 전 일하러 갈게요."

"그래."

득환은 자신의 승용차로 돌아와서 영욱이 건네준 책을 펼쳤다. 부모와 상의도 없이 대학을 자퇴한 아들을 혼내러 왔다가 오히려 아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으니 왠지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으니까 오히려 즐거워하면서 금방 책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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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환이 독서삼매경에 빠지자 영욱은 잠깐 시간을 내서 두 나노캡슐의 위치를 옮기기로 했다. 2QB 세상에서 아버지 득환의 돈을 뜯어내려는 신종 드림헌터와 싸울 때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으려는 의도였다.

위치를 옮기기로 결심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제 뇌로 공급되는 산소와 포도당의 농도 센스가 높게 세팅되어 있어서 나노캡슐들이 부스터로서의 역할을 그다지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혀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에 비하면 미미한 편이었다. 사실 생체란 산소와 포도당을 퍼붓는다고 무조건 힘을 쓰는 곳도 아니고, 나노캡슐로는 쏟아 붓는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릿속에 있던 두 나노캡슐들을 심장으로 옮기는 게 더 효율적일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심장은 강력한 수축력을 지닌 근육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다. 그러한 심장에 피를 공급하는 혈관이 바로 관상동맥인데, 그 부위가 좁아지거나 막히면 협심증 혹은 심근경색증이 발생해서 심장근육이 괴사하고 결국 심장마비가 와서 죽게 된다.

영욱이 관상동맥으로 나노캡슐을 옮기려고 하는 이유는 강한 심장을 가지기 위해서는 심장 근육 부분에 좀 더 많은 포도당과 산소 농도가 필요하다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진 결정이다. 

물론 의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겪어보면 알게 될 일이니까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옮겨 놓고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면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되니까.

하지만 이 이전 작업은 초반부터 난항을 겪어야만 했다. 이미 대뇌피질 근처에서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던 두 개의 나노캡슐들을 떼어내는 일이 그리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제길, 쉬운 일이 하나도 없군.'

생체 방어 시스템은 체내에 이물질이 발견되면 백혈구나 대식세포의 탐식 작용으로 직접 제거하거나 혹시 그 작업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아예 덮어 씌워서 몸과 격리시키고자 하는데, 나노캡슐의 경우에는 하도 작아서 아예 그런 취급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나노캡슐 자체에서 가지고 있던 부착 능력과 생체 조직과의 유착이 강하게 발생해서 영욱이 발휘할 수 있는 미약한 염동력으로는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욱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기로 했다. 염동력을 주무기로 삼는 이희승 교수의 팔 하나를 통째로 삼켰으니까 손의 미세한 감각을 얻은 것은 물론이고, 노력한다면 염동력도 지금보다는 더 강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희승의 머리를 통째로 뜯어먹었다면 좀 더 강한 수준의 염동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고작 팔 하나로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 그것도 2QB 세상이 아니라 초능력이 극단적으로 제한되는 현실 세계니까 더욱 더 그럴 것이다.

그러나 영욱은 자신이 삼킨 팔에는 상당한 양의 혈액이 들어있으니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자신을 세뇌하면서 재차 염동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마인드컨트롤 작업을 통해서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영욱은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가능성을 믿고 훈련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기계체조를 수련하는 것처럼 염동력 역시 수련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양의 수련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면 염동력이 훨씬 더 추상적이고 어려운 능력이기 때문이다. 아님 말고.'

하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더 단단하게 붙어있는지 도무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박상태의 눈알을 삼켜서 생겨난 제 3의 눈은 뒤통수만이 아니라 영욱의 내부를 보는 데에도 큰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니 전혀 엉뚱한 곳을 붙들고서 애를 쓰는 것은 아니었다.

전자현미경 수준의 시력까지는 아니지만 분명히 느낄 수는 있었다. 느낌으로도 위치를 알 수 있는 나노캡슐들이 결제조직Connective Tissue으로 뭉쳐있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러다가 혹시 사고라도 나는 거 아닐까?'

실패를 거듭하던 영욱은 이렇게 어려운데 굳이 다른 장소로 옮겨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뇌 조직이 아니라 두개골 쪽에 붙어 있으니 큰 후유증은 없겠지만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곤란해질 수도 있다. 

흔히 말하는 뇌일혈腦溢血이 바로 그것이다. 두개강 내부의 출혈로 인해 늘어난 혈액이 뇌세포를 압박하면 바로 실신이나 발작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냥 두는 게 낫겠어.'

게다가 나노캡슐에서 제공하는 미량의 산소와 포도당 농도로는 격렬하게 움직이는 심장의 운동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기 시작했다. 

'아냐! 내 사전에 포기는 없어. 일단 도전한 이상 꼭 옮기고야 말겠어.'

머릿속처럼 일정한 범위로 제한된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효용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 포기하려고 하는 순간 영욱 특유의 오기가 생겨났다. 

도전이야말로 젊음의 상징이다.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하는 순간 젊은이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노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니 나노캡슐의 이동 설치 계획을 이제 와서 없던 일로 돌릴 수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젠장, 남자가 칼을 빼들었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영욱은 포클레인에 장착하는 커다란 드릴을 연상하면서 나노캡슐을 감싸고 있는 결제조직을 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조금이나마 효과가 있었다. 

막연히 염동력을 동원해서 나노캡슐을 잡아당기려는 것보다 결제조직을 헤집는 등 구체적인 형태의 염동력을 발현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물론 나노 사이즈의 포크가 소환되어서 굴착공사를 한 것은 아니다. 2QB 세상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 세상이니까 그럴 수는 없다.

'좋았어!'

구체적인 형태의 염동력에 의해서 나노캡슐 하나가 분리되자 영욱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심장 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일단 목 부위를 흐르는 정맥을 통해서 혈류를 타고 일단 심장 안으로 옮겼다.

부착해야할 곳까지는 혈관을 타고 이동해야만 했다. 하지만 혈관은 마치 미로처럼 얽혀있어서 관상동맥을 찾아내는 데에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기다.'

나노캡슐이 신체의 곳곳을 수십 차례나 순환하고서야 겨우 관상동맥의 출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관상 동맥은 좌우로 2개가 있는데, 심방과 심실을 관상冠狀으로 둘러싸고 있는 데서 연유된 이름이다. 심장 근육에 산소와 포도당 등의 영양소를 공급하는 혈액이 흐르는 혈관이다.

위치는 대동맥의 밑뿌리에서 갈라져서 한 쌍을 이루는데, 각각 좌左관상동맥, 우右관상동맥이라고 부른다. 심근에 다수의 작은 혈관들이 나무뿌리처럼 형성되어 있다.

심근에서 돌아오는 정맥은 관상동맥과 병행하는 굵은 정맥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을 관상정맥동冠狀靜脈洞이라 부르고 우심방으로 직접 개구開口한다. 

'부착 부위는 당연히 왼쪽이다.'

영욱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해야 하는 좌심실이 있는 좌측 관상동맥 입구에 나노캡슐을 부착시키기로 했다. 두 개씩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는 않으니 일단 우선순위를 정할 수밖에는 없었다. 

'뭐야? 이건?'

그런데 혈압이 상당히 강하고 매끄러운 동맥의 안쪽이라서 쉽게 부착시킬 수가 없었다. 나노캡슐에는 부착을 위한 미세한 털이 있어서 어지간하면 쉽게 고정시킬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친 혈류 때문에 어림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염동력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포기할 것 같아? 어림도 없다.'

혈류가 거친 계곡물처럼 쏟아져 내리는 곳이라서 일단 나노캡슐 앞에 작은 실드를 치기로 했다. 사실 실드라기보다는 장애물을 설치해서 빠른 혈류가 잠시 갈라지도록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좋았어.'

영욱의 의도대로 장애물 역할의 실드를 치자 혈류는 약해졌고, 그 짧은 틈을 이용해서 나노캡슐의 부착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또 하나의 나노캡슐 역시 같은 방법으로 떼어내고는 어렵지 않게 부착을 완료했다. 이제는 두 나노캡슐들이 잘 붙어 있도록 당분간 혈압만 올리지 않으면 될 것 같았다.

"온! 온!"

"오프! 오프!"

여전히 작동은 잘 되었다. 하지만 성능 확인은 뇌와는 달리 심장에 과부하가 걸려야만 가능할 테니까 일단 뒤로 미루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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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나노캡슐의 설치 장소 변경에 성공한 영욱은 작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래야 밤에 아버지와 함께 잘 수 있을 테니까.

사실 낮에는 다른 사람들의 쳐다보는 눈이 있어서 기계체조를 연마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정상적인 수준의 움직임만으로 작업해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묘기 수준의 움직임을 보일 때도 있다.

다들 작업에 열중하다보니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더 많지만 득환의 경우는 달랐다. 이제 오십대 중반의 그는 눈에 약간의 안구건조증眼球乾燥症이 있어서 책을 조금만 읽어도 눈이 뻑뻑해지기가 일쑤였다. 

눈의 피로를 풀 겸해서 아들 영욱의 작업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전혀 가능할 것 같지도 않은 포클레인의 움직임을 몇 차례나 목격하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열심히 수련하고 있다는 영욱의 말이 사실임을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영욱과 영욱의 사부라는 진중권의 작업 속도가 다른 사람들의 네댓 배에 달한다는 사실에도 주목했다. 

"짜식, 저 정도면 굶어죽지는 않겠구나. 정말 예술이 따로 없군."

첫아들을 낳았다고 기뻐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다 자라서 한 사람의 몫을 단단히 하고 있으니 득환은 아버지로서의 감동이 남달랐다. 

이상한 세상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겨우 알게 되었지만 별로 두렵지는 않았다. 이제는 훌쩍 커버린 영욱이 어느새 늙어버린 자신과 아내를 잘 보호해줄 것이니…….

게다가 세상은 어차피 정글이었다. 9급 말단 공무원에서 시작해서 4급 서기관에 이르기까지 쉽지 않은 일들이 적지 않았다. 

직장 상사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잠을 아껴가며 야간 대학과 대학원 심지어 박사 과정까지도 밟아야 했다. 

그러니 2QB라는 새로운 정글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리 두렵지는 않았다. 더구나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더욱더 두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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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작업이 끝나자 하루 종일 겉돌면서 득환의 눈치를 보기만 하던 진중권이 용기를 내서 득환에게로 다가갔다. 난리를 칠 때에는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대충 분위기가 좋아진 것을 보고서 이제야 한 다리를 걸치려는 것이었다.

"영욱의 아버님이시죠? 저는 진중권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박득환이라고 합니다. 제 아이를 잘 가르쳐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워낙 열심히 노력하니까 별로 가르쳐준 것도 없는데 잘 하네요. 저를 따라 오십시오."

진중권이 인사를 나누자말자 득환을 끌고 향한 곳은 바로 단골 선술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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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한 잔 받으시지요."

"어이쿠, 영광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술잔을 부딪치면서 마치 초등학교 동창생이라도 만난 것처럼 빠르게 친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따님이 아주 예쁘다고 자랑하시는 거로군요."

"자랑이 아니라 정말로 예쁩니다. 영욱이 녀석이 군침을 흘리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는 자격이 되지 않아서 만나지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자격이라는 게 대체 뭡니까? 혹시 돈은 아니겠지요?"

딸 바보 진중권의 거듭되는 자랑에 득환의 눈도 솔깃해졌다. 은영이 그동안 영욱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으면서 다시 사귈 수 있게 다리를 놓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진중권이 보여준 진소희의 사진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솔직히 진소희가 더 예뻐서가 아니라 진중권과 사돈 관계를 맺으면 더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술이 말술이라서 영욱은 두 사람의 빈 술잔에 술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럼요. 이왕 내친걸음이니까 드림헌터로서 좀 더 강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제 식구들의 보호도 가능할 테니까요. 결국 수련을 좀 더 쌓아야 한다는 게 제 소박한 요구랍니다. 하하하!"

"하하하! 결국 그거였군요. 저도 그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남자라면 제 여자와 가족 정도는 보호할 능력이 있어야지요."

"사실 워낙 열심히 하니까 제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조건이 충족되면 당연히 제 딸과의 교제를 허락할까 합니다. 물론 제 딸아이가 영욱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다소 문제겠지만요."

"부모가 정해준 대로 혼사를 치르는 경우는 드문 세상이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하지만 어디에 가더라도 우리 아들 정도 되는 신랑감 구하기는 힘들 겁니다. 키도 크고 인물도 멀끔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젊은 아이들의 생각이 우리와 같다는 보장은 없지요. 아무튼 아직까지는 아비의 뜻을 잘 따르는 착한 아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다소 난관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두 사람은 벌써 사돈이 된 듯 굴었다. 만일 진소희가 진중권의 말을 듣지 않으면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영욱에게 시집보낼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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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학교 앞 커피 전문점에서 어떤 남자와 데이트를 즐기고 있던 진소희는 갑자기 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파기 시작했다.

"누가 내 얘기를 하나?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지?"

"내가 파줄까?"

"됐어. 남들 보는 데서 망측스럽게 그런 짓을 어떻게 해? 그리고 추한 부분은 보이지 않는 게 여자의 에티켓이라는 거 몰라?"

박득환과 진중권의 희망과는 달리 진소희에게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귀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것도 1학년 때부터 사귄 아주 오래된 사이였다. 그야말로 틀 것은 다 트고도 남을 만큼의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대체 언제 네 부모님들을 소개시켜줄 거니?"

"엄만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밖에 없다고 했잖아."

"그럼 장인어른에게라도 인사를 드려야지."

"누가 장인어른이라는 거야? 누가 너와 결혼한데?"

"그럼 누구랑 결혼할 건데?"

"……."

"설마 나 말고 다른 놈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사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수제자와 결혼하기를 바라셔."

한참 대답하기를 망설이던 진소희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요즘 대학생이라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조선 시대의 여자도 아닌데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할 거야?"

"나도 정말 미치겠어. 연애는 간섭하지 않으시지만 결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

"요즘 세상에도 제자를 키워? 그리고 그 수제자라는 작자가 대체 누군데?"

"혹시 신소재공학과 09학번 박영욱이라고 알아?"

둘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뾰족한 대책이라도 세우려는 것처럼.

"잘 알지. 하지만 걔는 이미 자퇴했잖아."

"우리 아버지께선 학력 따윈 전혀 상관하지도 않아."

"그래도 너와 결혼하려면 최종 학력은 대충 비슷해야 하지 않나?"

"대졸이나 대학 중퇴나 별로 다를 것도 없지, 뭐."

진소희의 목소리는 다소 시니컬했다. 대학을 아주 우습게 아는 아버지 진중권 때문이다. 

"무슨 소리야? 여태까지 학과 수석을 한 번도 놓치지 않는 네가 대학만 졸업하고 만다고? 당연히 석박사 과정을 밟아야지."

"그러고는 싶지만 우리 아버진 내가 대학 따위는 집어치우고 얼른 결혼이나 하기를 바라셔."

"그럼 나랑 결혼하자. 그러면 내가 미국 유학까지 보내줄게. 우리가 그동안 사귄 게 아깝지도 않아?"

둘이서 몰래 결혼하자는 소리였다. 결혼 후 얼른 미국으로 달아나자는 소리기도 했다. 사실 진중권의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않아도 진소희를 공부시키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만큼 남자친구 배경태의 재력은 충분했다. 물론 배경태 부모님의 재력이지만. 

"나도 아까워서 미치겠어. 하지만 아버지를 거역할 자신은 없어. 그러니까 지금처럼 그냥 데이트나 하자."

"그래서 그토록 비싸게 굴었던 거야?"

"당연하지. 나는 순결한 상태로 시집가고 싶으니까."

"잘났어, 정말."

틀 것 다 트고도 남을 만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배경태는 진소희를 넘어뜨리지 못했다. 박형욱처럼 진소희에게 흑심을 품은 남자들은 많았지만 진소희를 넘길 만큼 강한 남자들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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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부터 진중권은 진소희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서 영욱의 대학 생활에 대해서 물어보곤 했다. 

그러다보니 소희는 아버지에게 대답할 거리를 찾기 위해서라도 영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거나 지나가다가도 영욱이 있으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진소희 역시 드림헌터였다. 그녀와 사귀는 남자 친구 배경태 역시 이제 프레시맨의 경지에서는 제법 큰소리를 칠 만한 수준의 드림헌터였다. 

그녀가 본 영욱은 얼마 전에야 겨우 드림헌터의 세계에 발을 디딘 듯했는데, 짧은 시간 동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급성장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게 진소희의 아버지가 가르친 기계체조 덕분임을 알고는 있지만 영욱에게는 뭔가 더 특별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게다가 강원대에서는 손꼽히는 미녀인 은영과 사귄 적이 있다는 사실도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은영의 손을 먼저 탔다는 것이 꺼림칙하긴 하지만 자신의 배필로도 그다지 손색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바로 횟수로 4년째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 배경태다. 재벌의 아들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강남 부동산 재벌의 아들로서 서울대가 아닌 강원대에 진학했다는 유일한 단점만 빼면 완벽한 조건을 다 갖춘 남자 친구였다.

배경태에 대한 감정은 아직도 사랑과 우정을 오가는 어중간한 수준이긴 하지만 첫눈에 반하지 않기는 영욱도 마찬가지라서 그와도 불꽃같은 사랑을 경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

그래서 경태와 계속 사귀면서 결혼은 나중에 아버지 진중권의 눈치를 보아가면서 경태와 하든지 진중권이 정해주는 다른 남자와 하기로 결론지었다. 그게 영욱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영욱이 계속해서 진중권의 마음에 든다는 보장도 없고, 요즘 들어서 대시 중인 은영이 영욱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는 보장도 없으니 미리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사실 은영이 자신의 주변을 맴돌면서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해서 일부러 경태와 좀 더 진한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자신에게 애인이 있음을 알려주면 그녀가 영욱에게 강하게 대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이 헤어진 것은 영욱을 압박하려는 박상태의 협박 때문이라는 것을 드림헌터인 은영이 모를 리 없다. 그리고 계산이 아주 빠른 은영이 영욱을 다시 사귀고자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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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자신의 원룸에서 먼저 샤워를 하고 나오는 득환의 어깨를 쳐다보고는 깜짝 놀라서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건 웬 멍이에요?"

"동료와 테니스를 치다가 넘어졌는데 괜찮은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멍이 들었나보네."

"제가 좀 만져드릴게요."

"그만해. 간지러워. 이 녀석아. 하하하!"

영욱은 혹시나 하고 득환의 멍을 치료하고자 했는데 지우개로 낙서를 지우는 것처럼 깨끗하게 변했다. 

"다 됐어요. 남자가 무슨 간지럼을 그렇게 많이 타요?"

"어라? 멍이 사라졌네? 이것도 네 능력이야?"

"별 것도 아니에요. 드림헌터라면 누구나 이 정도는 가능해요."

영욱은 시큰둥하게 대답했지만 실제로는 드림헌터라고 해서 모두가 남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욱은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과 남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전혀 별개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마법이 아니라 초능력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정신력의 소모로 가능하지만 남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치유라는 특정한 초능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치유 마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불이나 얼음과 같은 특정 초능력을 가진 것과 비슷한 개념이다. 그러니까 영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약간의 치유 초능력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누구로부터 기인된 초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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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렁, 쿨.

영욱은 모처럼 아버지 득환과 같은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아마도 20년 만에 처음으로 같이 자는 것 같았다. 아무튼 바짝 붙어서 자야 2QB 세상에서 불필요한 힘의 손실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별로 어렵지 않군.

예상대로 영욱이 근처에 있는 득환의 영역을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게 벽인가? 하지만 이 정도 쯤이야…….

담벼락 대신 질긴 막이 쳐져있어서 영욱의 출입을 막았지만 포크를 소환해서 간단하게 찢어버리고 안으로 진입했다. 질긴 막은 곧 다시 만들어졌지만 영욱은 이미 안으로 들어선 다음이었다. 

영욱은 아직도 자고 있는 득환을 발견하고는 몸을 흔들어서 깨웠다. 그로서는 눈을 뜨기가 싫었을 것이다.

-아버지. 일어나세요.

-응? 벌써 2QB의 세상인가? 아니, 여긴 그냥 공원묘원이잖아. 네가 일하던…….

-그건 아버지가 그리 생각하셔서 그런 거예요. 아무튼 저도 잘 아는 곳이라서 나쁘지는 않네요.

-과연 그 괴물이 나타날까?

-서울과 춘천 사이의 거리가 좀 멀긴 하지만 찾아오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겁니다. 다만 그 새끼가 거리 때문에 망설일지는 모르겠네요.

득환도 <비몽사몽>을 여러 차례나 되풀이해서 읽었으니 이미 서로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두 사람은 긴장을 풀기 위해서라도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드림헌터가 와도 걱정이고, 오지 않아도 걱정이니 둘 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거리가 멀면 뭐가 문젠데?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서 힘이 빠진다고 하더군요. 바로 옆집에서 이동한 저로서는 그렇게 큰 차이를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거리라는 아주 중요한 변수에서 큰 혜택을 보게 된 상황이라고 하니 득환은 갑자기 마음의 여유가 생긴 듯했다. 그는 평소의 여유를 회복하고는 자신이 만들어낸 주변 경치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비록 공원묘원이지만 꽃도 있고 나비도 있고 벌도 있는 곳이다. 그런데 득환은 현실 세계와는 뭔가 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낮에 본 곳과 같으면서도 조금은 다른 것 같군. 

-그런가요? 어떻게 다른 데요?

-현실 세계와는 달리 유난히 생기가 넘친다고 해야 할까? 좀 그래.

-그래요? 하지만 여긴 그냥 아버지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장소니까 우리 둘 이외에 살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득환이 여유를 가지는 것과는 달리 영욱은 그런 마음의 여유를 전혀 가질 수 없었다. 드림헌터 세계에서 자신은 그야말로 수컷 사마귀 수준밖에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제는 그보다 조금 더 강해졌으니까 이제 참새 정도는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허약하기는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아버지를 괴롭히던 드림헌터가 와도 고민이고, 오지 않아도 고민인 상황이었다. 이 먼 거리를 무시하고 찾아온다면 그만큼 강한 놈이라는 방증이고, 오지 않으면 내일이라도 영욱 자신이 득환을 따라서 서울로 가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피할 수 없는 수순인 셈이다.

그러다보니 주변 경치를 감상할 여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니 대답 또한 건성으로 나왔다. 하지만 득환은 마치 어린 아이처럼 왕성한 호기심을 보였다.

-그럼 저 벌들은 뭐야?

-그냥 상상의 산물이에요. 그냥 신기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런데 저렇게 생생한 움직임을 보여? 정말 신기하구나.

-아버지가 그렇게 날아다니라고 만들어낸 벌이니까요. 저는 아버지가 더 신기해요.

-그래? 하지만 저 녀석이 내 생각대로 말을 듣지는 않는데?

-뭐라고 생각하셨기에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거죠?

-그야 당연히 내 손으로 날아오라고 했지.

-그렇다면 처음에 만들 때 완벽한 자유를 주셨나 보죠.

영욱의 말에 득환은 벌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하지만 벌은 득환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요리조리 피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침을 드러내서 반격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뭐가 저렇게 빨라? 네가 한 마리 잡아봐라.

-아버지, 그러시니까 꼭 어린아이 같아요.

-그럼 이 나이에 내가 잡아?

-아뇨. 제가 잡을게요.

득환의 성화를 견디지 못한 영욱은 이제 제법 강력해지기 시작한 염동력을 이용해서 날아가는 벌 한 마리를 간단하게 사로잡았다. 

사로잡았다기보다는 염동력으로 보이지 않는 파리채를 만들어서 후려쳤더니 정말 파리채에 맞은 것처럼 반대쪽 손바닥을 향해서 날아왔다. 

영욱은 반사적인 동작으로 그 벌을 받아냈다. 그런데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진짜 벌을 잡았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 있어요. 억?

-왜 그래?

-얘가 날 벌침으로 쐈어요.

-그럼 신기루가 아니잖아.

-그런 것 같은데요? 하지만 정말 이상하군요. <비몽사몽>에서는 그냥 신기루 같은 것이라고 적혀있던데…….

영욱도 2QB 세상에서 굴러먹은 지 꽤 오래 되었지만 늘 포크를 타고 수련하느라고 주변을 살핀 적은 없었다. 그러니 철저하게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만 믿고 있었는데 오늘 믿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고 말았다.

벌에 쏘인 자리가 화끈거리는 것보다 믿었던 책 <비몽사몽>에게 속았다는 것 때문에 기분이 더 좋지 않았다. 물론 그 책이 2QB 세상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통증을 당하게 되니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나도 분명히 그렇게 읽었어. 하지만 너무나도 생명력이 넘치잖아. 이런 걸 어떻게 신기루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

-고마워요. 아버지 덕분에 저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나야말로 네 덕분에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어서 고맙다.

영욱과 득환은 꽃구경을 하면서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이젠 득환도 벌을 잡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득환을 괴롭혔다던 그 특이한 드림헌터가 오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걸릴 듯했다. 아니면 오늘밤에는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워낙 거리가 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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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QB 시간으로 한 시간쯤 지나고 나서야 누군가 득환의 영역을 뚫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꽃구경에 한창인 득환과 영욱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겨우 달아난 곳이 춘천이냐?

-그, 그게…….

-저 녀석은 누구냐? 저 애송이가 너의 보디가드라도 되는 거야? 

-넌 누구냐?

영욱이 득환 대신 나서서 말을 받았다. 득환은 이미 녀석의 기세에 눌려서 말을 더듬고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기 때문이다.

-어린 녀석의 혀가 무척 짧구나.

-본모습을 보이지 않고 조커 흉내를 내는데 네 녀석의 나이를 어떻게 알고 존댓말을 해?

배트맨 영화에서 등장하는 조커의 모습으로 분장한 드림헌터였다. 악당의 대명사이기도 하지만 진짜로 찢어진 입이 귀까지 닿아있어서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영욱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보아야 알아? 네 아비 박득환에게 반말지거리를 하는 걸 보면 내 나이를 모르겠나?

-그렇다면 우리 아버지 주변에 있는 자겠군. 그런데 같은 직장 동료를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려고 하다니 질이 좋은 녀석은 아닌 것 같군. 고로 넌 나이를 처먹었어도 존댓말을 들을 자격이 없어. 병신아.

-이 새끼 좀 봐라. 네가 바로 박득환의 큰아들이었구나. 

-잘 아는군.

-아는 게 좀 더 있지. 둘째에 비하면 지지리도 공부를 못하는 놈이라더니 춘천에 있는 걸 보니 그래도 강원대에는 운 좋게 합격했던 모양이군.

-남의 집 일에 대해서 별 걸 다 알고 있군. 하지만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자.

상대가 자신에 대해서 가진 정보가 예상보다 많고, 심지어 격장지계까지 사용할 정도로 교활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영욱은 말싸움 대신에 전투를 택했다. 그리고 먼 길을 온 자이니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좋아. 너를 흠씬 두들겨 패면 네 애비가 정신이 번쩍 들겠군.

-주둥이만큼이나 강한지 어디 구경 좀 하자.

상대가 기세를 뿜어 올리자 영욱은 얼른 포크를 소환해서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 모습을 보더니 포커 괴물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도 포클레인을 소환해서 싸우는 드림헌터는 처음으로 겪어보는 듯했다.

-뭐야? 이곳이 어떤 곳인데 느려터진 포클레인으로 싸우겠다고? 정말 기가 막히지도 않는군.

-까불지 말고 어서 변신이나 해라. 그냥 그 상태로 쥐포 신세가 되기 싫으면…….

-나를 너무 낮추어보는군. 미안하지만 나는 이미 사퍼모어 급이라서 그런 무식한 방식으로 싸우지는 않는다.

-그럼 네 마음대로 해.

영욱은 상대의 공격을 기다리지 않고 오히려 포크를 조커에게로 돌진시켰다. 그리고 강력한 기계 삽으로 힘차게 찍어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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