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71)

"그러라고 내놓은 것일세. 얼마든지 보게."

"라벨을 보아하니 이것과 이것이 바로 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글루코스Glucose와 옥시젠Oxygen 생성 나노캡슐이군요.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 만들어 두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영욱으로서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겉으로는 자신이 원하던 게 확실했다.

"그자가 나노공학 방면에 실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 한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는 게 말만으로 가능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이 교수의 말로는 자신이 다 가지고 있다면서 저와 협상하자더니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군요."

학과장이 내놓은 열두 개의 나노캡슐에는 총 네 종류의 라벨이 붙어있는데 모두 영어로 적혀있었다. 물론 나노사이즈의 나노캡슐이 눈에 보일 리 없다. 라벨이 붙은 1밀리리터 용량의 앰플 안에 맑은 액체가 들어있는데 아마도 그 안에 섞여있는 듯했다.

포도당과 산소 나노캡슐 말고는 영욱도 잘 모르는 의학용어로 적혀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제법 쌀알 크기 정도로 눈에 보이는 걸 보니 아마도 생체 반응을 측정할 장비가 들어있는 듯했다.

이렇게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 공연히 영욱 길들이기에 나섰다가 오히려 큰 낭패를 당한 셈이었다.

"말도 안 돼. 이렇게 작고 예민한 것을 그 작자가 소지하고 다닌다니 말이 되는 소리야? 사실 어젯밤에도 이 캡슐들을 훔치러 왔다가 대기하고 있던 무장 경비원들에게 격퇴 당했지."

"무장 경비원이 지키고 있었다면 그가 훔치러 올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씀이군요."

"당연하지. 자, 자네가 필요한 것을 가져가게. 전부는 곤란하니까 딱 두 개만 골라서 가져가게."

학과장이 나노캡슐을 줄 것처럼 굴기는 했지만 이희승 교수처럼 터무니없는 조건을 제시하지도 않고 그냥 주겠다는 소리에 영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딱 두 개뿐이라지만 20억을 주어도 구할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으니 학과장의 난데없는 호의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정황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나노캡슐의 엄청난 가격이 들어서 영욱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엄청나게 비싼 것이라던데 그냥 주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있나? 이제 곧 기나긴 소송을 진행해야 할 테니 자네에게 미리 선금조로 주는 일종의 급료라고 볼 수 있겠지."

"그렇다면 제가 직접 이희승 교수를 고소해야 하나요?"

"그 인간이 자진해서 그만두면 굳이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그럴 것 같지가 않아서 그래."

"법정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은 있나요?"

"자네에게 사사로운 이유로 공공연한 장소에서 학점을 주지 않겠다는 망언을 쏟아냈으니 승산은 충분히 있어. 사실 재판에서 꼭 이길 필요도 없이 그냥 시간만 질질 끌면 되는 것이니까 어려울 것도 없겠지."

재판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재판에 회부된 사실을 이유로 들어서 이희승 교수의 임용을 취소하겠다는 소리였다. 학교 당국과 교수의 관계는 갑과 을이니까 충분히 가능한 발상이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당연히 밥값을 해야겠지요."

"진흙탕 개싸움에 휘말리는 것도 인생살이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실패와 실수도 경험해봐야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으니까. 잘 부탁하겠네."

"예. 학과장님."

생각지도 못했던 무상 증여에는 결국 그럴만한 조건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나노캡슐을 제공할 만큼의 대단한 일을 시키려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영욱이 이희승 교수와 거래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고단수 술책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어제는 서로가 피터지게 싸웠지만 필요하면 언제든지 손을 잡을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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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학과장의 면전에서 두 개의 앰플을 깨고는 액체와 함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두 개의 나노캡슐을 삼켰다. 그리고 허리를 구십 도로 숙여서 인사를 한 뒤 학과장의 방을 빠져나왔다. 비싼 것이니까 다른 곳에 팔아먹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몸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영욱은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나노 사이즈의 포도당 생성 캡슐과 나노 사이즈의 산소 생성 캡슐을 자신의 염동력으로 움직여서 머릿속으로 보냈다. 

확대는 물론이고 몸속까지도 마음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제 3의 눈이 있지만 전자현미경 수준의 엄청난 확대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굳이 볼 것도 없이 두 개의 나노캡슐들의 위치가 그냥 느껴졌다.

원래 머리로 흐르는 피는 바이러스 크기도 거를 수 있다는 뇌 혈류 장벽에 막혀서 적혈구조차도 통과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나노캡슐은 바이러스보다도 적어서 이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영욱은 두 나노캡슐들이 대뇌피질의 바깥 부위에 자리를 잡도록 유도했고, 잠시 후 어렵지 않게 장착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작동 여부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온on! 온!'

'오프off! 오프!'

마음속으로 온오프를 외치는 것이 바로 학과장이 알려준 나노캡슐의 작동 방법이었다. 

강원대학교는 거액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대가로 이희승 교수로부터 나노캡슐의 연구 과정에 대한 보고를 주기적으로 받았을 것이다. 그 중간 책임자가 학과장임은 자명하다. 그러니 기본적인 작동 요령은 그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놀랍게도 반응이 있었다. 작동 결과로 미루어보아 앞의 명령에 반응한 나노캡슐은 포도당 생성 나노캡슐이고, 뒤의 명령에 반응한 나노캡슐은 산소 발생 나노캡슐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포도당과 산소는 고체와 기체의 상태가 아니라 물에 완벽하게 녹은 채로 공급되었다. 그리고 나노사이즈의 나노캡슐치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 공급되었다. 

그러나 많은 양이라고는 하지만 나노사이즈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는 소리일 뿐 계량이 가능할 정도로 많은 양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마저도 아쉬운 한계 상황에서는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의 성능이라면 아쉽게도 근육에서는 그리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여러 개의 나노캡슐을 장착하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지만 재벌이 아닌 이상 비용 상의 문제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평소에도 켜두는 것이 조금이나마 더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영욱은 눈물을 머금고서 꺼두기로 했다. 오랜 시간 동안 작동시키면 그만큼 빨리 망가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작동 가능 시간이 이미 정해져 있을 지도 모르니 아껴두었다가 정말 목숨이 위험할 때에만 사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이 뒤집히는 데는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아냐! 히든카드도 중요하지만 평소의 실력의 함양이 더 중요해. 그러니까 평소에도 켜두는 게 정답이야. 온! 온!"

영욱이 그런 결론을 내린 이유는 아주 복잡했지만 행동은 아주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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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벌써 고장 난 건가?"

잠시 후 영욱은 난처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불과 3분도 지나지 않아서 두 나노캡슐이 활동을 멈추고 말았던 것이다. 

그냥 일시적으로 과부하가 걸려서 멈춘 것인지 완전히 망가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20억이 그냥 허공으로 사라진 셈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머릿속에서 폭발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만일 이희승 교수의 손을 통해서 나노캡슐을 얻었다면 그런 자폭 장치가 부착되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이유가 있으니 학과장 김진명이 영욱에게 공짜로 준 것이다. 결과를 보고 나서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면 자신도 사용하려고 들 게 분명했다. 

폭탄의 설치가 불가능하다면 다른 방법도 있다. 독약이나 그 수준의 약효를 발휘하는 호르몬이라면 나노캡슐 사이즈에서도 충분히 영욱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이 나노캡슐을 만든 이희승 교수가 옆에 있다면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도 싶지만 무장 경비원의 제지로 학교로 들어오지도 못하니 그럴 수는 없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는 물어봐도 대답할 리 없다.

출근을 제지당한 그는 바로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서 학교를 상대로 부당 해고에 대한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영욱도 이러한 진흙탕 개싸움의 선봉에 서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 매우 꺼림칙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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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 된다. 좋았어!"

하지만 10분이 지나자 두 나노캡슐 모두 다시 작동했다. 일각이 여삼추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난 다음이라서 영욱은 큰 소리를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정확하게 3분 후 다시 작동을 멈추었다. 

"젠장, 뭐가 이리 부실해?"

몇 번을 더 반복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그러니까 기계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10분 동안의 휴식 시간을 가진 후에 다시 3분 동안의 작동 시간을 갖는 것인 듯했다. 

계속 작동하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냐 싶었다. 생체 전기가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나노장비의 과부하를 막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것인지는 아직은 알 수가 없었다. 다소 실망스럽긴 했지만 그렇게 만들어졌으니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튼 영욱은 그냥 계속해서 켜두기로 했다. 두 나노캡슐이 작동하는 동안에는 학업 능률이 크게 증가해서 수업을 듣거나 잡다한 궁리를 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이 수련했던 기계체조의 동작을 반추하는 데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활인심방의 수련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피로해진 머리를 회복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지닌 활인심방과 뇌에 꼭 필요한 산소와 포도당의 추가 지원으로 폭발적인 두뇌 활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나노캡슐의 궁합은 매우 좋아서 상당한 정신력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그 상태로 몇 시간이 지나자 몸속에서 아주 이상한 움직임이 관찰되었다. 물론 몸에 해로운 움직임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뇌 내부의 산소와 포도당의 정상 농도를 상향 조정해서 설정하고 이에 맞추려는 움직임이었다.

원래는 정상 상태였던 것을 이제 와서 뜬금없이 낮다고 여기는 이유는 생체의 센스가 망가진 게 아니라 바로 나노캡슐들의 왕성한 작용 때문이었다. 물론 영욱으로서는 대환영이었다. 

금단 현상이란 담배나 중독성이 있는 마약을 끊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 이 순간 포도당과 산소에 대한 금단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니코틴은 생체에 필요하지 않은 독성물질이지만 흡연자의 경우에는 그게 늘 존재하다 보니 생체는 일정 수치의 니코틴 혈중 농도를 정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만일 그 수치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부족하니까 보충하라고 머리가 몸에 경고를 보내는 것이 바로 금단 현상이다.

나노캡슐이 제공하는 산소와 포도당 때문에 영욱의 머릿속에서도 그러한 현상이 벌어졌다. 하지만 산소 농도와 포도당 농도는 독성물질이 아니라 뇌가 활동하는데 꼭 필요한 연료니까 니코틴과는 이야기가 전혀 달랐다.

물론 당뇨처럼 포도당이 높아서 생기는 병적 상태도 아니었다. 뇌 안에 있는 포도당이 머리를 빠져나가 신장을 통해서 새어나갈 리도 없지만 왕성한 정신 활동 때문에 나노캡슐에 의해서 공급된 포도당이 사라지는 데는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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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두 개의 나노캡슐만으로도 머리가 아주 활발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유난히 머리가 맑고 잘 돌아가는 날에나 느낄 수 있는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천재가 된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이었군. 좋아! 아주 좋아!"

영욱은 이 기회에 미뤄두었던 판단들을 점검해보기로 했다. 

영욱이 점검해야할 판단들은 은영과 다시 사귀는 게 나을까 아니면 사부의 딸 진소희와 사귀는 게 나을까 하는 시시콜콜한 것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드림헌터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나름대로는 고차원적인 내용까지 망라되어 있었다.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의 삶 역시 어떤 식으로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하는 것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법적 소송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고찰해보고 슬기롭게 해결해야만 했다. 

학과장은 진흙탕 개싸움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 같았다. 학생으로서 학점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교수를 찍어내는데 앞장선다는 취지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제자가 스승을 쳐내는 꼴이니 그렇게 좋은 선례를 남기는 것은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희승 교수의 행동에는 과한 면이 있었고, 그런 식으로 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낸 자이기도 하지만 꼭 자신이 들어서 그를 심판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2QB 세상에서의 학과장과 이 교수의 싸움이 어떻게 결말이 날지도 모른다는 변수도 고려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학교를 떠나는 게 나로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겠군."

조금만 더 버티면 3학년 2학기가 끝나겠지만 이 교수를 찍어내는데 앞장서지 않고서는 달라질 것이 별로 없었다. 결국 영욱은 학업을 포기하기로 했다. 

물론 자신이 자퇴하는 것만으로도 이 교수 퇴출 작업에 충분한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이나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영욱이 이 교수의 협박에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는 것으로 비칠 테니까.

학과장으로서도 법정 공방이라는 진흙탕 개싸움에 휘말리지 않고도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테니까 영욱을 나노캡슐만 먹고 튄 놈이라고 욕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영욱이 춘천을 떠나려고 결심한 것은 아니다. 포크의 불하 문제와 관련해서 아직은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부 진중권의 권유처럼 낮과 밤을 오롯이 수련에만 매진하기로 했다.

다른 드림헌터들처럼 남의 영혼을 취하는 방식으로 강해지고 싶지는 않으니 영욱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기계체조의 수련뿐이었다. 

기계체조의 수련과 활인심방의 수련만으로 강해지기로 결심했지만 자신을 노리는 드림헌터들의 피와 살을 취하는 것은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러한 자신의 결정을 서울에 계시는 부모님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겠지만 자신은 이미 성인이니까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은영이냐 진소희냐 하는 문제도 자퇴와 함께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학력 미달로 인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포기하는 것이 될 확률이 더 높겠지만…….

요즘 눈이 높을 대로 놓아진 대졸 학력의 여자들이 대학 중퇴의 남자를 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니 꼭 대를 이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면 그때에 다른 여자를 알아보기로 했다. 물론 드림헌터로서 어느 정도 우뚝 서고 난 다음에나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결국 현실 세계보다는 2QB 세상을 더 중시하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물론 당분간의 일이다. 아무튼 영욱은 나노캡슐의 도움으로 밀린 숙제들을 짧은 시간 내에 해결해 버렸다. 옳은 결정이라는 보장은 결코 없지만 일의 효율만큼은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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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이 그런 결심을 굳히자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아주 단순해졌다. 자퇴서를 작성해서 학과사무실에 제출한 후 일절 등교하지 않은 채 수련에만 매달렸다. 

영욱의 예상대로 학과장은 영욱의 자퇴서 제출과 관련해서 이희승 교수의 권한 남용으로 규정짓고, 학생회는 물론이고 심지어 지방언론까지 동원해서 이희승 교수의 영구 퇴출 운동을 유도했다.

둘은 2QB 세상에서의 대결보다는 현실 세계에서의 소송에 주력했다. 꿈속 세상에서의 싸움에서 패하는 날에는 회복하기 힘든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으니까 서로가 그 싸움을 회피했다. 

그것은 육식동물들이 서로의 존재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굳이 싸운다면 상대를 이길 수는 있어도 행여 피해를 당할 수도 있으니 그냥 참는 것이다. 먹을 것은 지천에 널려 있으니까 굳이 포식자끼리 싸울 일은 없는 것이다.

아무튼 진흙탕 개싸움은 영욱이 없는 상태에서도 일어났고, 보기 흉할 정도로 서로를 물어뜯거나 모략하고, 상대에 대한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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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

"오빠! 나야, 최은영."

"……"

은영이 몇 차례나 영욱을 만나기 위해서 공원묘원을 찾아왔지만 영욱은 만나주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음으로써 자신의 확고한 마음을 전달했다. 

사부 진중권은 그러한 영욱과 밤낮으로 함께 했다. 그렇게 또 세월은 흘러갔다.

*박득환

"오빠! 들려?"

"……."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오빠 말대로 강원대에서 나보다 예쁜 여자는 딱 하나 있지."

"……."

"4학년 진소희가 나보다 아주 조금 더 예쁜데 소문으로는 멋진 남자친구가 있다고 하더라."

"……."

"그것도 아주 빵빵한 재력을 가진 부잣집 아들이라더라. 그러니 오빠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영욱이 만나주지 않자 은영은 먼발치에서 큰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진소희와 사귀겠다는 영욱의 계획은 말짱 영욱 혼자의 생각이라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영욱의 예상과는 달리 은영은 대학 중퇴라는 학력 미달에 대해서는 별로 따지지 않고 영욱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집착에 대해서 영욱이 생각하기에는 은영도 <비몽사몽>을 여러 번 읽고, 심지어 드림헌터 박상태에게 당해보기도 했으니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2QB 세상으로 맞추어져 있는 듯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영욱만큼 조건이 좋은 남자친구도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비록 무기력하고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괴물 박상태를 압도하기 시작했으니 드림헌터로서의 영욱의 성장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수련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뒤늦게나마 이렇게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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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은 자신의 실수를 잘 알고 있었다. 영욱을 차버리지 않았다면 지금 안방마님 행세를 하며 큰소리를 뻥뻥 치고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때는 결코 박상태를 넘어서지 못할 거라고 오판하고 말았던 것이다.

무조건 영욱을 취하라는 둘째 언니의 충고를 우습게 여긴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그녀도 자신이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두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2QB 세상에서 초식동물로서 사냥당하며 살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육식동물이기를 원하는 게 그녀의 바람이다. 다만 문제는 힘이다. 

힘이 없다면 원치 않는다고 해도 초식동물일 수밖에 없으니 힘을 가져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장 가능성이 큰 영욱의 도움이 절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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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은영의 생각을 알지 못했다. 그의 생각에는 은영이 여자로 태어난 탓에 약육강식의 세상을 전혀 모르고 살았는데 막상 박상태에게 죽도록 맞아보니 문득 그녀도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았다. 

물론 두들겨 맞는 것을 즐기는 매조키스트가 아니라 자신처럼 박상태를 흠씬 패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자면 힘을 길러야 하는데 가장 쉽게 실현이 가능한 방법은 옛날 애인이었던 자신의 보호를 받든지 자신으로부터 싸우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집요하게 매달릴 이유가 없다. 그녀의 진짜 생각은 알 수 없지만 어긋난 사랑을 다시 바로 잡기 위함이 아니라 그녀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함이라는 것을 영욱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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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빠를 포기할 것 같아?"

"……."

"오빤 내 꺼야! 도망갈 수 있으면 얼마든지 도망쳐 보라고."

"……."

은영은 오늘도 자신의 의지를 담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것은 그녀의 아집과 집요한 소유 의지를 담은 일종의 주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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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태가 오랜만에 중대장 김 대위의 영역을 뚫고서 모습을 나타냈다.

-오랜 만입니다. 중대장님.

-박상태, 내가 포기할 줄 아느냐?

-이젠 포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저항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설마 네가 나를 포기하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포기라니요? 하하하!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입니다. 몰랐습니까?

박상태는 공격 대신 실없는 소리만 늘어놓았다. 철 지난 썰렁 유머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하나도 안 웃겨. 그리고 네 놈이 약 올리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약 올리는 게 아니라니까요. 왜 사람 마음을 몰라 주시는 거죠?

-미친 소리 작작하고 얼른 시작하자. 왜 오늘은 공격하지 않고 쓸데없는 소리만 주구장창 늘어놓는 거지?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박영욱에게서 좋은 기술을 하나 배웠지 뭡니까? 

-뭐라고? 박 병장이 네 놈에게 당했나?

-그런 건 아닙니다. 그 자식에게는 오히려 제가 당했다고 봐야겠죠.

박상태는 의외로 솔직했다. 자신의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할 줄도 아는 놈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박 병장에게 숨겨둔 한 수가 있는 줄은 나도 느꼈거든.

-맞습니다. 그 자식은 샌님처럼 조용히 사는 놈인 줄 알았는데, 정말 숨겨둔 한 수가 있더군요. 그 놈에게서 배운 기술을 중대장님께 사용할 참입니다.

-대체 뭐하는 짓이냐? 아악!

거대한 괴물로 변한 박상태는 중대장 김 대위를 마치 통닭 다리처럼 쥐고는 목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영욱이 자신에게 했던 행동과 흡사했다. 드림헌터라면 금기로 여기는 행동을 따라서 한 것이다.

-우욱. 이게 왜 이렇지?

하지만 결과가 별로 좋지는 못했다. 빨아먹은 김 대위의 피와 뜯어먹은 살이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박상태의 내장을 뚫고 나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박상태는 서둘러서 김 대위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너 미쳤어?

-이제 다시 볼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박영욱도 해낸 일이니까 내가 못할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고통이 정말 장난이 아니네요. 그럼 다시는 보지는 맙시다.

-미친놈! 그게 가능했다면 처음부터 그럴 일이지, 일 년 동안 사람을 괴롭히다가 이제 와서 딴 짓이야?

김 대위는 분통을 터트리며 달아나는 박상태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분노는 상대의 덩치가 비교할 수도 없이 크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박상태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어? 왜 내 영역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거지?

-병신아! 소화시키지 못한 내 피와 살들이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 잘 됐다. 너도 이번 기회에 내 주먹맛 좀 봐라.

퍽. 퍽.

박상태는 자신의 위장을 뚫어버릴 듯이 발광하는 김 대위의 피와 살 때문에 아파서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야했다. 게다가 분노로 인해서 눈이 반쯤 돌아간 김 대위의 공격이 시작되자 무방비 상태로 당해야만 했다. 

때릴 때는 몰랐는데 일단 맞고 보니 김 대위의 주먹질과 발길질이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더 고통스러운 것은 뱃속을 후벼 파는 김 대위의 피와 살이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서 날뛰는 날카로운 손톱과도 같았다.

-시발! 나는 왜 안 되는 거야? 박영욱 그 새끼는 대체 뭐야?

-병신아. 박 병장은 참을성이 아주 강하지. 너도 견디다 보면 내 피와 살들을 흡수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오늘은 아닌 것 같구나.

-으아아아! 그 새끼가 날 속인 게 분명해.

-속은 놈이 바보지. 굴복하지 않은 영혼을 뜯어먹는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 네 녀석이 드림헌터라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아무튼 너도 좀 맞아봐라. 하하하!

퍽. 퍽.

김 대위의 처절한 복수는 이제 시작이었다. 박상태는 김 대위의 영역을 벗어날 수도 없고, 2QB 세상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상태에서 이중고에 시달리며 괴로움에 진저리를 쳐야만 했다.

평소 같으면 김 대위쯤이야 장난이겠지만 뱃속에 김 대위의 피와 살들이 지랄발광을 하니 그 지독한 고통 때문에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날 박상태는 결국 김 대위에게 맞아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박상태가 정신을 잃고 사라지기 직전 김 대위의 피와 살이 배를 뚫고 나와서 다시 김 대위에게로 돌아왔다.

-병신, 네깟 놈이 박 병장과 같을 거라고 생각했나? 뱁새가 황새를 따라하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이지.

박상태는 검증되지도 않은 소화 흡수 방법을 시도하다가 개망신만 당하고 말았다. 기계체조라는 특수한 소화 보조 수단이 없으니 너무나도 당연한 실패겠지만 박상태로서는 그걸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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