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영욱은 정중하게 노크한 다음 학과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찾으셨습니까? 학과장님."
"그래, 어떻게 되었나?"
"그리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제가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이 교수는 사퍼모어 중에서도 상당히 강한 편인데……."
학과장은 영욱의 대답이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가시게만 굴어도 충분하다는 등의 그저 이희승의 시간을 뺏는 용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염동력이 정말 대단하더군요. 저를 하늘 높이 솟구치게 하더니 그대로 땅으로 처박아 버리더군요."
"당연히 그러고도 남을 자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하지만 제 운이 더 좋아서인지 몇 번 정도는 밟아줄 수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냥 달아나버리더군요."
"뭐라고? 자네도 벌써 거대화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프레시맨 중에서도 중간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데……."
"아닙니다. 저는 제 소유의 포클레인을 소환해서 싸웠습니다."
영욱은 학과장의 질문 수준에 딱 맞추어서 대답했다. 자신으로서는 학과장의 정확한 경지를 짐작할 수 없으니 처음부터 있는 대로 다 까발리는 것은 지양해야만 했다.
"포클레인이라고?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그런데 겨우 그 정도에 녀석이 도망쳤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저도 그게 의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학과장님과의 대결을 염두에 두고 실력을 드러내지는 않은 듯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밤에 잠을 자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왜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와의 대결에서 조금이나마 타격을 입었다는 소린데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군."
김진명으로서는 느려터진 포클레인으로 이희승과 대등하게 겨루었다는 말을 아직도 믿지 않는 듯했다.
사실 2QB 세상에서 드림헌터들이 움직이는 속도는 2배속이나 3배속으로 재생하는 액션 영화 수준이니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의구심이다.
영욱의 포클레인 역시 그 정도의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기계체조의 덕분이라고 봐야 하고 정상적인 움직이라면 상대가 되지 않아야 정상이다.
"학과장님이 너무 강해서 그러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도 않아. 나도 같은 사퍼모어 급이긴 하지만 이 교수의 염동력에 비할 바는 아니지."
"그렇다면 실력이 달리는데 왜 결투를 하려는 겁니까? 자존심 때문입니까?"
"그야 당연히 이길 자신이 있어서이지. 자존심 따위는 개나 주라고 해."
"이 교수의 능력이 더 강하다면서 어떻게 그런 계산이 나올 수 있죠?"
영욱은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고 하면서도 승부에서는 당연히 이길 자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김진명을 의아스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가위바위보 게임처럼 서로 간에 우열이 엇갈리는 경우가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자신감이기 때문이다.
"그야 나의 초능력은 화염 공격에 특화되어 있어서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여기는 거지. 사방에서 덮치는 사나운 불길을 염동력으로 방어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물론 싸워본 것은 아니니까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어."
"드림헌터의 초능력은 뭐든지 가능하게 하는 만능이 아니라 저마다 특화된 능력이 있나 보군요."
"당연하지. 자네도 잘하는 게 있듯이 누구나 잘하는 분야가 따로 있는 법이지."
"그렇다면 주니어나 시니어 급은 대체 어떤 능력을 사용하는 겁니까?"
이희승이라는 사퍼모어 급의 고수를 상대해 본 경험이 있으니까 하는 소리였다.
원래 경지란 자신보다 조금 높은 것만 쳐다보이기 마련이라서 까마득히 먼 고수의 경지는 눈으로 본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거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영욱도 이러한 질문을 할 정도로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이 질문을 받은 학과장 김진명의 표정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나도 몰라."
"예? 왜 몰라요?"
"그리 흔한 경지가 아니니까 모를 수밖에……. 하지만 들리는 이야기로는 우리처럼 무식하게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지는 않는다고 하던데 직접 본 적은 없으니까 알 수가 없지."
"그렇게 말씀하시니 황당하군요."
영욱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희승의 염동력만 해도 상상 그 이상의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했는데 그보다 급이 높은 드림헌터들은 대체 어떤 능력을 가졌을지 도무지 짐작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기도 중이나 꿈을 꾸다가 신을 만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런 경우가 바로 주니어나 시니어 급의 드림헌터를 만난 것이라고 보면 될 거야."
"강신降神을 의미하는 건가요?"
"맞아. 신내림이나 계시啓示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이미 사람의 경지가 아니군요."
"당연하지. 2QB 세상은 어차피 영혼들의 세상이고, 상태나 조건 등으로 제한받지 않는 능력이니까 사람이어야 할 이유가 없지. 다만 우리나라에는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할 지도 의문일 정도로 드물다는 것이지."
영욱의 혼란스럽다는 표정과 존경심이 줄줄 흐르는 말투는 김진명으로서 하여금 이야기보따리를 술술 풀어놓게 만들었다.
영욱은 <비몽사몽>에서도 접하지 못한 높은 수준의 이야기들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기 위해서 감동적인 표정을 지으며 귀를 쫑긋 모았다. 물론 감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높은 경집니까?"
"그렇기도 하지만 아직 2QB 세상이 알려진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봐야겠지. 아무리 부지런하고 운이 좋고 능력이 뛰어난 자라도 불과 30여 년 만에 신의 경지에 버금갈 정도로 강해질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학과장님께서도 <비몽사몽>을 읽고 나서 드림헌터가 되신 건가요?"
30여 년이라면 비몽사몽의 출판 시기와 거의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 영욱은 자신의 추정이 사실인지를 김진명으로부터 확인하려고 했다. 그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결정적으로 떠벌이기를 좋아하는 드림헌터를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다.
"이은석 박사에 의해서 2QB 세상이라고 명명되기 전에도 조금씩 돌아다니기는 했지. 하지만 그저 흥미로운 꿈 정도로 여겼던 게 사실이지."
"학과장님은 현실 세계에서 불의 초능력을 어느 정도나 사용할 수 있습니까?"
"원래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은 비밀이지만 자네에게만 특별히 말해주기로 하지."
"고맙습니다."
"반경 10미터 내에 있는 어떤 물체라도 불로 뒤덮을 수 있어. 불가연성을 가진 흙이나 돌은 태우지 못하겠지만 그 외에는 나의 초능력을 벗어날 수가 없지."
김진명의 말은 자신의 능력이 특정 물체를 불로 태운다기보다 불로써 코팅해버린다는 식처럼 표현했다. 불로 코팅된 가연성 물질은 결국 전소될 수밖에 없는데 벗어날 수 없다는 표현은 바로 그런 의미인 듯했다.
"일단 화염에 휩싸이면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인가요?"
"맞아. 자네가 전에 내 앞에서 술 냄새를 숨기기 위해서 실드를 친 것과 다를 바가 없지. 다만 내가 자네에 비해서 좀 더 강력한 위력의 불을 일으킬 수가 있다는 점만 빼고는 거의 같다고 볼 수 있지."
"사퍼모어 급은 정말 놀라운 초능력을 지녔군요. 저는 박상태 그 녀석만 해도 감당 불가의 몬스터인 줄 알았는데……."
"그 녀석이 몬스터인 것은 사실이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프레시맨은 주로 몬스터로 변신하고, 사퍼모어는 주로 초능력자로 불리니까 하는 말이야. 주니어는 수준 높은 마법을 구사한다고 들었어. 그리고 시니어는 농담 삼아 마법의 조종祖宗 드래곤과 반신半神으로 불리기도 하니까 만나지 않도록 조심하게."
김진명 학과장은 원래부터 떠벌이기를 좋아하지만 영욱이 이희승 교수에게 어느 정도의 타격을 주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기분이 더 좋아져서 상당한 양의 고급정보를 알려주었다.
"가급적이면 외출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킁.
"그래야지. 그런데 자네에게서 악취가 나는 것 같은데?"
영욱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진명도 함께 일어나면서 뒤늦게 냄새의 출처를 캐물었다.
코를 찌르는 냄새야 처음부터 맡았겠지만 이제야 묻는 이유는 굴복당하지 않은 영혼의 살과 피를 취할 수는 없다는 드림헌터로서의 상식과 선입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영욱의 방심을 노렸을 수도 있으니 그만큼 노련하다는 의미기도 했다.
킁. 킁.
"그렇군요. 그럼 씻으러 가야겠습니다."
"혹시 이 교수 몸의 일부를 삼킨 건가?"
"그러고 보니까 뒤엉켜서 싸우다가 이 교수를 물어뜯는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손가락 하나를 삼킨 듯합니다."
"뭐라고? 그걸 삼키고도 멀쩡해?"
"멀쩡하긴요. 거의 죽을 뻔했지만 이미 이 교수가 도망간 다음이라서 그런지 내장이 뚫리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이유를 모르고 있었는데 학과장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어렴풋이나마 기억이 나는군요."
학과장 역시 악취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무작정 아니라고 우기는 것보다는 삼킨 규모를 줄여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러한 작전이 먹혀서 손가락을 삼켰고, 운이 좋아서 무사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정말 신기한 능력이군. 아무튼 강해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조심스럽게 사용하도록 하게."
"예. 배탈 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영욱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돌아섰다. 들키고 싶지 않는 비밀이지만 냄새 때문에 숨길 수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애로사항이 되고 있었다.
이제야 사부 진중권이 대학무용론을 부르짖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사람들과 부딪쳐야 하니 기계체조의 경지가 10퍼센트가 될 때까지는 숨어서 훈련에만 몰두하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아무튼 아토피를 앓는 자신의 소화 능력이 남들보다 좋다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피와 살 그리고 팔을 삼킨 것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음식이 아니라 영혼의 일부이기에 소화력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박상태의 눈알은 보편적인 사람들의 눈알은 아니지만 100퍼센트 영혼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러니 소화 능력도 좋아지기는 한 것 같았다.
아마도 자신의 아토피 치료를 위해서 소화력을 높이고자 노력했던 것이 도움이 된 듯했다. 그렇다고 쇠를 씹어 먹어도 소화시킬 수 있다는 불가사리가 된 것은 아니겠지만.
불가사리는 상상 속의 짐승으로 쇠를 먹고 살며 악몽惡夢을 물리치고 사기邪氣를 쫓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영욱도 뼈까지 소화시킬 수 있으니 최소한 하이에나 수준의 소화력은 가지게 된 듯했다.
물론 2QB 세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 강력한 소화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러한 소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기계체조다.
@
영욱은 또 다시 남자화장실 전체의 문을 걸어 잠그고 찬물로 목욕재계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예전에 박상태의 피와 살을 삼켰을 때보다는 악취가 훨씬 덜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은영이 질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냄새가 덜 나는 이유는 이 교수의 팔이 악취를 덜 가지고 있었다기보다는 영욱의 기계체조 경지가 이제 6퍼센트로 올랐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전보다 소화 흡수가 더 잘 되니까 당연히 배출되는 악취의 양이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장실에 구비되어 있는 세숫비누가 다 닳아서 없어지도록 샤워와 세탁을 반복하고서야 겨우 남자화장실을 나설 수 있었다. 물론 냄새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
"또 내 강의 시간에 악취를 풍기다니 자네는 나하고 무슨 억하심정抑何心情이라도 있는가?"
"예? 냄새라니요?"
금속조직학을 강의하는 황정희 교수가 질책叱責했지만 영욱은 모르쇠로 일관하기로 했다. 이미 그런 식으로 버텨본 적이 있으니 표정 변화도 전혀 없었다.
"이번에는 쫓아내지 않을 테니까 굳이 발뺌할 필요는 없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넘어가 주신다니 고맙습니다."
"저번보다는 훨씬 더 능청스러워졌구나."
"저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리포트를 쓰느라 개고생을 했으니까요."
"하지만 개고생을 했던 보람은 있을 거다. 그 리포트는 꽤 잘 썼더구나."
"고맙습니다. 교수님. 평소에도 관심 있던 분야라서 그런지 숙제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금속조직학을 깊이 공부함으로써 포클레인 차체의 경도와 강도를 높이는 것은 물론이고 내구성마저도 높이고 싶은 욕심이 있으니 그저 입에 발린 대답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희승 교수의 손 하나를 통째로 흡수함으로써 전혀 뜻하지 않던 능력을 가지게 된 것도 영욱이 이러한 대답을 진심으로 하도록 만들었다.
흡수한 이희승 교수의 팔은 영욱에게 또 하나의 팔을 제공해주지는 않았지만 아주 미세한 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가뜩이나 손에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포클레인 운전에 상당한 수준의 재능을 보이던 영욱이 날개를 단 것은 물론이다.
아직까지 완벽한 느낌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을 들여서 갈고 닦는다면 굳이 전자현미경이나 엑스레이에 의존하지 않고도 금속의 표면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경험이 더 쌓인다면 금속의 조직까지도 손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영욱이 이런 말을 늘어놓는 것이다.
"좋아. 전에 비해서는 견딜 만하니까 오늘은 용서해 주도록 하지. 자, 그럼 지금부터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오늘은 교재의 제 5장 금속의 응고 과정이다. 금속은 응고 과정에 따라서 조직학적 구성을 달리하게 되는데……."
수업이 시작되자 영욱은 황 교수가 교보재로 들고 온 금속 샘플들을 만지작거리며 느낌의 차이를 숙지하기 시작했다. 같은 철이라도 탄소의 함량과 담금질의 회수와 냉각 속도에 따라 표면의 느낌은 상당히 달랐다.
만져본 느낌만으로 그렇게 다양한 철들을 만들어낼 수는 없겠지만 2QB의 세상에서는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영욱은 자신의 애마 포크를 소환할 때 얼마든지 원하는 재질로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원하는 재질 100퍼센트짜리는 아니다.
*나노캡슐
사부 진중권 역시 영욱의 몸에서 나는 색다른 냄새를 알아차리고는 알은체를 했다.
"또 한 판 붙은 거야?"
"예."
"이번에는 누구냐?"
"이희승 교수 녀석이 자꾸 갈구기에 아까 낮에 한 판 붙었어요."
"다른 냄새가 진하게 나는 걸 보니까 또 한 조각 집어삼킨 모양이구나."
"하하! 도망가기 바빠서 팔 하나를 떼놓고 가더군요. 열심히 싸웠더니 배가 하도 고파서 그냥 꿀꺽 삼켜버렸죠."
"하여튼 재주도 좋아. 소화력은 더 좋고……."
사부 진중권마저도 영욱의 놀라운 소화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애견사료까지 먹으면서 아토피를 극복하고자 했던 영욱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소양감을 참아내는 인내로 정신력을 키우고 식이요법으로 강력한 소화력을 길렀으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사부님께서 가르쳐주신 기계체조 기본 동작 제 2식 이족보행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벌써 전투 중에 사용할 정도로 익숙해진 거야?"
"그 정도는 아니지만 목숨이 위험하니까 오히려 집중이 더 잘 되더군요."
"너는 워낙 몰입을 잘하니까 실력이 빨리 늘 수밖에 없을 거다. 게다가 간담이 커서 연습보다는 실전에서 실력 발휘를 더 잘하는 타입인 듯하구나."
"아마도 그런가 봐요. 실전이라는 게 배수진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충분히 익숙해졌을 테니까 오늘은 제 3식 풍차돌리기를 수련하도록 하자."
"예. 사부님."
사부 진중권은 포클레인의 기계 팔을 이용해서 차체를 옆으로 회전시키며 거대한 바퀴처럼 구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영욱이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이희승을 짓쳐 들어간 바로 그 동작이었다.
하지만 옆으로 구르는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풍차처럼 돌면서 빠르게 굴러갔다. 그리고 기계 팔이 선명하게 세 개라는 점이 영욱과는 확연하게 다른 점이었다. 특히 구르는 상황이니까 두 개와 세 개의 효율 차이는 극명했다.
@
시범은 꽤나 오랫동안 이어졌다. 영욱은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서 진중권의 시범을 온몸으로 느꼈다.
"봤나?"
"예. 사부님. 정말로 대단하세요."
"짜식! 겨우 이 정도에서 감동한다면 나중에 심화 동작과 경시 동작에서는 눈물을 펑펑 흘리게 될 거다."
"기본 동작에서도 이 정도니 앞으로 어떤 동작을 보여주실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아요."
진중권의 시범을 본 영욱은 가슴이 북받쳐 올랐다. 진정으로 감동에 겨워서 목소리까지 울먹거릴 정도였다.
"잔소리 말고 한 번 해봐."
"예. 사부님."
영욱은 이미 옆구르기를 터득하고 있으니 그 동작은 생략하고서 앞구르기부터 도전하기로 했다.
기계 팔의 숫자가 많을수록 원활하고 부드러운 회전이 가능한데 영욱이 잔상의 팔은 아직도 두 개뿐이어서 굉장히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겨우겨우 굴러갔다. 그래도 굴러가는 게 가능한 이유는 아직은 희미하지만 세 번째 기계 팔이 회전 운동을 돕고 있는 덕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마치 체조 선수가 텀블링을 하는 것처럼 능숙하게 포크를 앞으로 회전시키며 풍차돌리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영욱은 빠른 회전으로 인한 어지러움 때문에 토할 것 같았지만 꾹 참으면서 돌고 또 돌았다. 참는 것이라면 고통이나 가려움 그리고 어지러움 등 종류를 불문하고 무엇이든지 자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제 3의 눈까지 있으니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시야 확보가 가능해서 상대적으로 덜 어지럽다는 점도 한몫했다.
게다가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감각을 가진 이희승의 팔을 흡수한 효용은 영욱에게 한 차원 더 높아진 운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
"저 녀석의 끝은 대체 어디야? 이족보행을 배운지 얼마 되었다고 벌써 3식을 흉내 내는 거야."
영욱의 훈련 모습을 본 진중권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혀를 내둘렀다.
영욱은 앞으로 구르기와 옆으로 구르기 그리고 아직은 가르치지도 않은 뒤로 구르기까지 섞어가며 정사각형 모양으로 빠르게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벌써 속보 수준이잖아. 저런 놈이 왜 이제야 나타난 거야? 맙소사! 팔이 벌써 세 개잖아."
또한 이족보행이 아니라 벌써 이족속보 단계에 들어섰음을 알고 더더욱 기뻐했다. 게다가 기계 팔이 이미 세 개로 늘어난 것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잘래잘래 내저었다.
팔이 세 개니까 이제는 이족보행이 아니라 삼족보행이 되는 셈이다. 아니, 삼족속보라고 불러야 마땅할 듯했다.
@
"그만 정리하자."
"예. 사부님."
새벽이 밝아오자 영욱의 풍차 돌리기 훈련도 얼추 끝이 났다.
다만 아쉽게도 기본 동작 제 3식은 훈련과 동시에 작업도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진중권 혼자서 영욱의 몫까지 작업해야만 했다. 하지만 중노동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대체 뭘 처먹었기에 벌써 그 정도야?"
"팔 하나를 삼켰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세요? 어디, 사촌이 논이라도 샀어요?"
사부의 밝은 표정을 보고서 쑥스러워진 영욱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배 아픈 표정은 분명히 아닌 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분위기로 몰아가고자 했다.
"6퍼센트의 경지에 오른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7퍼센트의 경지에 올라서 배가 아파서 그런다. 이런 내 표정이 아니꼽냐?"
"말도 안 돼요. 그럴 리가 없어요."
"내가 지금 너하고 농담 따먹기나 할 군번인 줄 알아?"
"정말 7퍼센트의 경지가 맞아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래요."
영욱은 정말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희승 교수와의 길고 길었던 싸움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퍼모어 급 드림헌터의 팔을 흡수한 것이 프레시맨의 팔을 흡수한 것과는 달리 상당한 영양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찜찜하다는 기분을 털어낼 수는 없었다. 그것은 6퍼센트의 경지에 올랐을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느낌이 달라지지 않았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오히려 찌릿찌릿한 느낌은 더 줄어든 것 같아요."
"그래? 아무튼 내 눈에는 7퍼센트의 경지가 확실하다. 믿어도 좋아."
"그렇다면 저도 그렇게 알게요."
영욱은 사부 진중권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속으로는 여전히 의문을 버리지 못했다.
'어쩌면…….'
그러다가 문득 어제 금속조직학 시간에 만졌던 금속과 비금속을 망라한 조직 샘플들 중의 그래핀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연의 한 조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래핀은 현존하는 그 어떤 소재보다도 월등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두께가 겨우 0.2나노미터에 불과하지만 물리적, 화학적 안정성이 아주 높은 물질이다. 투명하고 탄성까지 좋아서 늘이거나 구부려도 전기적 성질을 잃지 않는다.
또한 강철보다 200배나 강하고 구리보다 100배 이상 전기가 잘 통하며, 열 전도성도 다이아몬드보다 2배 이상 높다고 한다.
게다가 반도체 시대를 열게 했던 실리콘 소재보다도 100배 이상 전자를 빠르게 이동시켜서 지금보다도 월등한 속도의 정보 처리를 가능하게 만들 거라고 기대되는 물질이기도 하다.
영욱은 자신의 애마 포크의 시동을 걸면서 차체에 그래핀 성분이 섞여 있다면 보다 더 원활한 움직임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그러한 의지가 반영된 듯했다.
이곳은 현실 세계니까 2QB 세상만큼은 아니겠지만 아주 일부나마 그래핀 성분이 포크 전체에 코팅된 듯했다. 마치 각다귀를 막기 위해서 고무장갑 실드를 친 것처럼.
너무나도 작은 물질이니까 대부분의 학생들은 직접 만져보고도 전혀 느낄 수가 없겠지만 이희승 교수의 예민한 팔을 삼킨 영욱은 달랐다. 나노캡슐을 조작하던 손이니까 그 예민하고 정교한 움직임은 상상 이상이었다.
전기전도성 등이 향상된 포크 덕분에 아주 수월하게 한 단계를 넘어서게 된 것이었다. 자신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쉽게…….
또한 목숨을 걸고 싸운 덕에 기계체조의 숙달도가 더 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퍼센트의 경지로 올라선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또다시 1퍼센트가 오른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사부 진중권의 표정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삼킨 박상태의 눈알이 없었다면 제 3식 풍차돌리기의 습득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제 3의 눈으로 인해 사각지대가 존재하지 않는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으니, 빠르게 회전하는 포크 속에서 영욱이 가야할 길에 장애물이 있는 지를 살피는 일과 중심을 잡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실 멀미를 줄여주는 것만 해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이 모두 힘을 합쳐서 조금은 맥이 빠질 정도로 쉽게 7퍼센트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러니 영욱이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
사부 진중권은 영욱의 경지가 또 올랐으니까 너무나도 당연한 절차처럼 술을 권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욱이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왜? 한 잔 더 마시려고?"
"예. 사부님."
"이젠 너도 나처럼 아침부터 술타령이구나."
"밤새도록 쉬지도 않고 훈련했더니 온몸이 뻐근하기도 하고, 배도 고픈 참이라서 막걸리가 잘 넘어가네요. 저도 이제 막일꾼이 다 된 거 같아요."
농부나 막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막걸리의 효용은 아주 크다. 진통제의 역할도 하고, 음료수의 역할도 하고, 에너지 보충제의 역할도 한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술 본연의 역할도 잘 수행한다.
"듣자니 학교를 자퇴하기로 했다던데 그게 사실이야?"
진중권은 영욱이 마음 편하게 술을 마시는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전공 필수 과목의 학점을 쥐고 있는 교수와 대판 싸웠으니까 그리될 확률이 높아요. 그래서 자진해서 그만 다니겠다고 했는데 의외로 학과장님께서 완강하게 말리네요."
"그래서 어떻게 하려는 거야?"
"그동안 다닌 게 아까워서라도 일단 다니는 데까지는 다녀보려고 해요."
"이 교수라는 자와 학과장이라는 자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지?"
"그런가 봐요. 어쩌면 둘이서 밤새도록 싸웠을 지도 모를 정도로요."
"그렇다면 너로서는 다행이겠구나."
진중권의 말에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있었다. 그로서는 영욱이 자퇴하는 게 더 좋은 듯했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배우는 영특한 제자니까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서 빠른 시간 내에 더 많은 것을 가르치고 싶은 것이다.
"학과장님이 이 교수를 이겨야 저에게는 좋은 결말이 나니까 아직은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까짓 대학, 다니면 뭐해? 그만 두는 게 좋다고 그렇게 노래를 불렀는데 아직도 망설이는구나. 여름방학 때처럼 낮에도 훈련하고 밤에도 또 훈련하면 얼마나 좋아?"
"저도 권모술수와 배신으로 점철點綴된 세상에서 벗어나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훈련이나 하고 싶어요. 하지만 못난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부모님 생각도 해야죠."
"공부는 네 동생이 아주 잘한다고 하지 않았나? 둘 중 하나면 충분한데 굳이 너까지 잘 해야 해?"
진중권은 영욱에 대해서 아는 것도 많았다. 심지어 영욱이 말하지도 않은 영욱의 집안일까지도 훤히 꿰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그걸 어떻게 아시죠?"
"어, 어떻게 알긴? 네가 저번에 술 마시고서 말했잖아."
"아무리 술이 취해도 그렇지, 그렇게 재수 없는 이야기를 제 입으로 할 리가 없잖아요. 사부님께서는 독심술 초능력을 가진 거죠? 제 말이 맞죠?"
잘난 동생에게 치이는 것은 영욱으로서 일종의 트라우마인 셈인데 술에 취했다고 해서 말했을 리가 없다. 사귀던 은영에게조차 숨겼던 일인데 사부 진중권에게 말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독심술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그런데 네 친동생이 서울대학교에 진학한 게 왜 재수 없어? 자랑스러운 일 아냐?"
"아는 사람들에게 매번 비교당하는 게 얼마나 짜증나는지 아세요? 사람마다 잘할 수 있는 게 따로 있다는 것은 모르고 다들 좋은 대학만 찾곤 하죠. 그런 이야기는 정말 재수 없으니까 하지 마세요."
"그러기에 너도 열심히 공부하지 왜 놀았어? 머리가 둔한 놈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게요. 대학에 와서야 겨우 공부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으니까 한참 뒷북인 셈이죠."
만일 박상태의 방문을 받지 않았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처럼 영욱도 공부의 참맛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대자보와 빡빡 깍은 녀석이 바로 네 작품이라며?"
"누가 그래요?"
"내가 정보원이 좀 많은 편이야. 그러니까 일일이 알려고 들지 마."
"그런데 알면서 왜 물어요?"
"전부터 그 새끼가 자꾸만 내 딸을 집적거린다고 해서 벼르고 있었는데 네 덕분에 제적除籍당할 위기를 모면했다니 고마워서 그래."
진중권의 정보원이란 다름 아닌 그녀의 딸 진소희일 것이다. 그런데 진중권의 표현이 좀 묘했다.
"그게 고마울 일이에요? 그런 놈인 줄 알았다면 그렇게 쉬운 조건으로 중재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쉽게 되었군요."
"내 손으로 녀석의 버릇을 고칠 기회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까 고맙다고 하는 거야. 그 새낀 내 손으로 작살낼 테니까 너는 건드리지도 마. 알겠어?"
"예쁜 꽃에는 나비가 꼬이는 게 정상 아닌가요?"
"사귀는 거면 누가 뭐라고 해? 그게 아니라 감히 내 딸을 덮치려고 했다니까……."
진중권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살기가 흘렀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듯했다. 분위기로 보자면 정말 남들 모르게 죽여서 깊은 땅속에 묻을 참인 듯했다. 실제로도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감히 소희 씨를 덮치려고 하다니, 그 개새끼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안 돼. 내가 처리할 거야."
"제 신붓감을 덮치려고 했다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양보하십시오."
"누가 네 신부라는 거야?"
"이제 겨우 3퍼센트밖에 남지 않았는데 정말 너무하십니다. 장인어른."
영욱은 진중권의 살기를 누그러뜨리려고 일부러 과장된 대사와 몸짓을 해댔다. 그리고 은근슬쩍 진중권의 호칭도 변경했다. 진중권이 조금이라도 가르쳤다면 진소희가 박 선배 같은 사람에게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할 리가 없기 때문에 하는 소리였다.
"그 3퍼센트가 10년 안에 오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나?"
"설마 그게 그렇게 어렵다는 말인가요?"
"당연하지. 두 자리 숫자가 되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틀리니까 일찌감치 꿈 깨."
"그렇다면 그 새끼는 장인어른께서 처리하십시오. 저는 그 시간에 수련이나 하고 있겠습니다."
"당연하지. 뭐? 아직도 장인 타령이야?"
뒤늦게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바뀌어있다는 것을 깨달은 진중권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10년이 아니라 내년이 가기 전까지 10퍼센트의 경지에 오르겠습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깨끗하게 따님을 포기하겠습니다."
"그렇게 쉽게 포기해? 정말로 내 딸이 성에 차지 않는다는 거야?"
"따님이 무척 예쁘기는 하지만 저 혼자만의 일방적인 사랑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으니까요. 짝사랑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서……. 하하!"
사실 은영이 영욱의 첫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짝사랑마저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짝꿍들부터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던 여학생들까지 포함해서 열 명도 훨씬 넘는 여자들을 짝사랑했기에 그 아픔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그런 사랑을 다시 하라면 돈을 준다고 해도 거절할 생각이었다. 물론 몇 억을 던져준다면 고려해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10퍼센트나 되고 나면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지."
"예. 사부."
진중권의 눈과 말에서 살기가 사라지자 영욱도 더 이상 진소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사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니 더 이상 소희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갈 수도 없었다.
진중권이 박형욱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마도 자신의 딸이 인기가 많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자랑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허락을 득하지 않고 사귀는 놈은 깊은 땅속에 파묻어버린다는 일종의 협박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영욱에게 경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진소희 곁에서 알짱거리는 남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인 듯했다.
누가 옆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진중권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 듯했다.
@
똑똑.
"들어와."
"학과장님. 박영욱입니다."
"어서 오게. 지난밤에 정말로 이 교수가 나타나지 않았네."
김진명은 영욱의 손을 붙잡으면서 호들갑을 떨어댔다. 영욱의 보고를 받긴 했지만 정말로 이 교수가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잠을 자지 않은 모양입니다."
"자네에게 당한 피해가 정말 컸다면 나와의 대결을 피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정말 그 정도로 큰 타격을 준 건가? 솔직하게 말하게."
"사실 손가락이 아니라 얼떨결에 손 하나를 떼어놓고 달아나더군요. 하지만 그 정도로 타격이 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결투를 신청해 놓고도 나타나지 않을 정도라면 타격을 입은 것이 분명하니까 끝까지 아니라고 대답해서 뭔가를 숨긴다는 인상을 심어줄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니 조금 줄여서 대답하는 센스를 발휘했다. 팔 한 짝과 손의 차이는 아주 크지만 그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전혀 없을 것이다.
"아무튼 대단한 능력일세."
"별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정말로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절 부른 이유가 그 이유뿐이라면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곧 수업이 시작되는 지라……."
영욱은 자신의 우월한 소화 흡수 능력에 대한 김진명의 관심이 부담스러워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관심으로만 끝나면 다행인데 학과장도 이희승 교수처럼 연구 욕심을 부리거나 자신의 팔다리라도 떼어달라고 하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잠깐만 기다리게!"
그런데 김진명이 일어서려는 영욱을 제지하더니 자신의 서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이 교수의 연구실에 굴러다니는 나노캡슐을 몇 개 챙겨왔네. 얼핏 듣자니 이것들 중에 자네가 필요로 하는 게 있다던데……."
"예. 그런데 저에게 주시겠다는 건 아니겠죠?"
"그렇게 큰 공을 세웠는데 못 줄 이유가 없지. 게다가 도움이 된다면 이희승 그 자에게 조금이라도 더 큰 타격을 줄 수도 있을 거고 말이야."
학과장은 이희승이 나타나지 않는 걸 보고 영욱의 힘을 조금이나마 더 강화시켜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 이희승이 무슨 조작을 해두었을지 모르니 자신이 사용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서랍 속에서 그냥 썩히는 것보다 선심이라도 쓰는 게 더 낫다는 판단한 것이다.
"좀 구경해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