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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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간이 욕심이 많은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자네를 핍박할 줄은 몰랐네. 아무튼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까 자네는 하던 학회장 일이나 잘 맡아서 처리해주게."

"하지만 전공 필수 과목인 나노공학을 이수하지 못하면 어차피 졸업은 무립니다."

"곧 다른 교수가 그 과목을 맡게 될 거야. 그러니까 염려하지 말게."

학과장은 이번 기회에 이희승 교수를 쳐내기로 결심을 굳힌 듯했다. 

술을 전혀(?) 마시지도 않은 학생을 상대로 노골적으로 F학점을 운운하며 강의실에서 내쫓았으니 교수로서의 자질에 문제가 있고, 해직 사유로서도 충분했다.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은 물론이고 학생회의 조직을 동원하면 폭력교수로의 여론몰이도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영욱을 직접 동원해서 법적 소송을 걸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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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학과장의 행보는 아주 빨랐다.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필요한 조치措置를 전부 다 취해버렸다. 이에 분노한 이희승 교수가 학과장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남의 연구실을 대학 측에서 마음대로 걸어 잠그다니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대학에서 연구비를 지원했으니까 그럴 권리가 있지 않겠소? 그리고 윗사람에게 짓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상스럽지 않소?"

"학과장으로 대접받고 싶으면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셔야지요."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요. 우리 학과와 대학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는 학회장 영욱 군을 사사로운 감정으로 강의실에서 내쫓았으니 교수라는 사실이 부끄럽지도 않소?"

"음주 상태로 강의실에 들어온 학생을 쫓아낼 권리도 없다면 나도 이 학교의 교수직에는 더 이상 미련이 없소. 하지만 연구실은 내가 개인적으로 투자한 돈도 많으니까 어서 문을 여시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를 대충 파악한 이희승은 아쉬운 대로 자신의 연구 성과라도 챙기고자 했다. 이젠 영욱이 문제가 아니라 학과장이 자신을 찍어내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대학에 남는 것도 쉽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당연히 열어드려야지요. 하지만 그 전에 개인 돈을 투자했다는 자료를 제시해야할 것이오. 그것도 법정에서 말이오."

"오늘 일은 제가 좀 과했다 치더라도 어제 그 녀석이 저지른 일을 몰라서 옹호하시는 겁니까?"

"박상태 군과 관련된 일을 언급하는 것이라면 개인적으로 영욱 군이 아주 잘 처리했다고 생각하오. 박상태 그 녀석은 감히 내 꿈에도 나타나서 협박을 자행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소."

"개인적인 견해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학과장으로서도 영욱 군의 행동을 나무랄 생각은 전혀 없소. 어차피 폭행의 증거는 전혀 남아있지 않고, 박상태 그 녀석이 괴물이라는 것만 알려지지 않았소?"

학과장 김진명 역시 드림헌터인지 돌아가는 내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실력이 있으니 이희승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대하는 것이다.

"이제 보니까 아예 작정하고 나를 쳐낼 생각이군요."

"당연하지요. 이 교수 당신도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린 영욱 군에게 작정하고서 복수한 것이 아니었소?"

"하지만 내가 그냥 순순히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오산이오."

이희승 교수는 자신이 궁지에 몰렸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그로서는 모든 것을 잃고 떠날 수가 없었다.

"순순히 물러나지 않으면 어떡할 거요? 영욱 군처럼 2QB 세상에서 한 판 뜨겠다는 거라면 나도 마다하지 않겠소."

"당신도 강력한 드림헌터라는 걸 알고 있소. 그러니까 영욱 군이 만취한 상태였다는 것을 잘 알 것 아니오?"

"물론 그 정도의 현혹에 속아 넘어갈 내가 아니지요. 하지만 당신이 또 사람을 실험 재료로 사용하려고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요. 그것도 내가 아끼는 영욱 군을 말이지요. 미안하지만 절대로 그렇게는 되지 않을 거요."

"내가 마치 영욱 군을 마루타로 취급한다는 식으로 말하는군요."

"그렇게 말한 것이오. 그러니까 '또'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소."

"큰일 날 소리를 하시는군요."

"내가 바본 줄 아시오? 당신의 연구에는 늘 그러한 희생이 따랐다는 것도 잘 알고 있소."

"그런데 왜 침묵하고 있었던 거지요?"

"여태까지는 대학에도 도움이 되었기에 그냥 묵인하고 넘어갔지만 감히 나를 노리는 지금도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 나를 우습게 본 것이오. 그러니까 신상이 다 털려서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곱게 떠나시오."

김진명 학과장은 이희승 교수가 여태까지 저지른 비리 사실을 언급하면서까지 협박했다. 세상에 끝까지 숨길 수 있는 비밀은 없으니 파멸 당하기 싫으면 알아서 행동하라는 소리였다. 

"강원대는 국립대요. 따라서 교수임용권은 엄연히 총장님에게 있소. 그러니 겨우 학과장 주제에 자신이 마치 총장이라도 된다는 듯이 굴지 마시오."

"월권행위라는 주장은 당신의 상상일 뿐, 이미 총장님께 보고를 드리고 허락을 득한 일이오. 믿어지지 않는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보시오."

"당연히 확인해 봐야겠지요. 나노바이오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나, 이희승을 내치는 것은 강원대학교로서도 큰 손실이라는 걸 총장님께서는 잘 아실 거요."

"총장님께서는 당신이 그 큰 실적으로 총장 자리에 도전할 거라는 사실도 잘 알고 계시지요. 당신이 유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적 야망이 너무 커서 생긴 문제요. 그냥 학자답게 연구에만 집중했다면 이런 일까지는 없었을 텐데……."

학과장의 말은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총장이 이희승 교수를 경계한다면 더 이상 이곳에서 발을 붙이기는 힘들다는 소리였다. 

"흥! 여기가 아니면 나를 받아줄 곳이 없을 줄 알아? 연구실에 있는 쓰레기 수준의 나노캡슐들이야 몇 달만 지나면 다시 만들 수 있으니까 어디 두고 보자고."

"그 몇 달이면 당신을 추월할 수 있는 당신의 뛰어난 제자들이 수두룩하지. 그들 중에는 학자답게 연구에만 열심히 매진할 교수 재목이 있을 거요. 그럼 잘 가시오."

"좋소. 다시 볼 일이 없을 지도 모르니 마지막으로 악수나 한 번 나눕시다."

"그야 당연한 수순이지요. 2QB 세상에서 만나려면……."

둘은 서로 웃으면서 악수를 나누었다. 소리장도笑裏藏刀 즉, 웃음 속에 칼을 숨기고 있는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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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이희승 교수가 영욱의 영역을 뚫고 들어왔다. 물론 현실 세계가 아니라 2QB 세상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것도 한낮에…….

-이렇게 일을 크게 벌여놓고도 낮잠을 자다니 정말 겁도 없는 녀석이군. 

-어제는 바빴나 봅니다.

-네 녀석이 벌인 짓 때문에 바빴지.

-누가 시작했는데 그런 말을 하십니까? 일이야 교수님이 먼저 벌인 거라고 봐야겠죠. 그리고 무서울 게 전혀 없는데 낮잠을 자지 못할 이유가 없죠. 

-나야 실험 조건을 조금 더 원만하게 가져가려고 그런 거였지만 너는 처음부터 막무가내였잖아. 그러니까 일은 네 녀석이 벌인 거야.

-치사하게 학점으로 위협해 놓고서도 그런 말이 나와요? 그리고 나노바이오 교실의 대학원생들 중에 정신적으로 장애자가 되거나 심지어 실종된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어요? 내가 그렇게 바보로 보여요?

김진명 학과장은 어제 영욱에게 이희승 교수의 본색에 대해서 말해주며 그의 제의에 응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병신이 될 수도 있다고 엄중하게 경고했다. 

영욱에게 이희승 교수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시킨 후에 필요하면 고소를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희승이 영욱을 실험동물로 삼아 연구 성과를 내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 말을 들을 당시의 영욱은 학과장의 말이 100퍼센트 진실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교수의 깜짝 놀라는 표정을 보니 100퍼센트 사실인 듯했다. 

-이런, 학과장이 말했나보군. 

-물론이지요. 그리고 교수님의 연구실이 용담호혈이라는 사실은 이미 그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젠장! 동냥을 주지는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 말아야지. 아무튼 너도 이제는 나노캡슐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을 테니까 나와 같이 망한 상황이군.

-나노캡슐이 아깝긴 하지만 이제 박상태 정도라면 별로 걱정스럽지도 않습니다.

-박상태도 문제겠지만 당장 나부터 견뎌내야 할 것이다. 덤벼라!

본색이 드러난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영욱에게 회유를 시도하던 이 교수가 결국은 참지 못하고 먼저 이빨을 드러냈다. 아무리 회유하려고 해도 영욱이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자, 덤벼요.

갑자기 이 교수의 달라진 기세를 느낀 영욱은 얼른 포크를 소환하고는 운전석으로 올라갔다.

-탱크라면 모르겠지만 포클레인과 같이 느려터진 기계에 의존하다니 아직도 드림헌터로서의 수준이 매우 일천하구나. 내가 너에게 사퍼모어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도록 하지.

놀랍게도 이희승 교수는 엄청난 위력의 염동력을 발휘해서 포크와 영욱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려고 했다. 

먼저 주변의 돌과 흙들이 무서운 속도로 하늘 높이 빨려 올라갔다. 결국 육중한 무게의 포크마저도 허공으로 올라가는 느낌이 들자 영욱은 딸려 올라가지 않으려고 주변의 나무를 붙드는 등의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우아악!

하지만 중력이 반대로 작용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강력한 염동력에 결국은 당하지 못하고 허공으로 붕 뜨고 말았다. 

-어떠냐? 경치가 좋지? 하지만 그게 마지막 배려다. 그럼 잘 가라.

이희승은 하늘 높은 곳에서 망연자실하고 있는 영욱을 잠시 동안 올려다보며 빈정거리더니 그냥 땅바닥으로 추락시켜 버렸다.

-흥! 어림없다.

영욱은 포크의 소환을 해제하고 돌려보낼 수도 있지만 그냥 포크와 함께 그대로 떨어지기로 했다. 

잔상까지 포함해서 두 개나 되는 기계 팔로 땅을 짚으면 착지할 때 발생하는 충격을 어느 정도 완화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음 한 수를 노리고 있었다.

쿵. 쿵.

포크는 땅에 닿자마자 마치 럭비공처럼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곳은 바로 이희승 교수가 영욱이 포크를 소환 해제할 것이라 예상하고서 달려드는 방향 쪽이었다.

-아앗!

이희승 교수가 예상치 못한 상황 전개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학과장 김진명

-맛 좀 봐라.

사실 하늘 높이 올라간 이상 무거운 포클레인의 소환을 해제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 편이 훨씬 떨어지는 충격이 덜할 테니까.

하지만 이희승 교수가 그 틈을 노리지 않을까 하는 예상과 함께 영욱에게는 6퍼센트의 경지에 달하는 기계체조가 있었다. 그게 바로 영욱의 노림수였다.

쿵.

-크아아악!

무려 20미터의 높이에서 빠르게 떨어지던 속도를 회전력으로 바꾼 영욱은 순식간에 굴러가서는 이희승 교수를 짓밟아버렸다. 그러한 포크를 막으려는 사퍼모어 급의 염동력이 놀라울 정도로 강했지만 그렇다고 육체까지 강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급한 대로 실드를 쳤겠지만 기계 삽 끝에 포클레인의 무게와 높은 곳에서 떨어진 속도의 일부가 합쳐져서 만들어낸 엄청난 위력을 견뎌내지는 못했다.

쿵. 쿵.

영욱은 이희승 교수에게 그동안 갈고 닦은 이족보행의 진수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2미터 이상의 높이로 껑충껑충 뛰면서 두 개의 기계 팔을 교대로 디디면서 이희승을 마구 짓밟았다. 

평소와 조금 다른 점이라면 이희승이 피하는 곳을 추격해서 밟느라고 그러지 않아도 취권인 걸음이 완전히 갈지자걸음이 되었다는 것과 기계 삽의 등 부분이 아니라 뾰족한 톱니 부분을 이용해서 공격한다는 사실이었다.

영욱은 지금의 이 유리한 상황이 이희승 교수의 방심에서 비롯된 유일한 기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끝장내지 못하면 결국 죽임을 당하거나 자신이 항복할 때까지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박상태를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긴 적이 있으니 이희승 교수 역시 죽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이곳은 2QB 세상이니까 감옥살이를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상대를 죽일 수도 없는 세상이지만…….

<비몽사몽>에는 가끔이지만 영혼이 소멸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영혼과 영혼끼리 혹은 드림헌터와 드림헌터 간의 분쟁 수준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명시되어 있다.

드림헌터들은 사냥감 영혼들의 신체 일부를 뜯어먹는 정도지 전체를 다 뜯어먹지도 못했고, 누구도 상대를 죽이지는 못했다.

쿵. 쿵. 쿵.

-이 세상에서도 두더지 게임을 하게 되다니 정말 기분이 묘하군.

-끄아아. 내가 겨우 이 정도로 죽을 것 같으냐?

-물론 안 죽겠지. 하지만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짓밟아주겠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영욱은 반말로 일관하고 있었다. 자신을 공격했으니 이희승에게 더 이상 교수 대접을 해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2QB 세상에서는 교수와 학생의 사이도 아니니까 더더욱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희승 역시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문제 삼지도 않았다.

-프레시맨들 중에서는 제법 강한 편에 속하는 박상태가 당하는 것을 직접 보고서도 믿지 않았는데 역시 숨겨둔 수가 있었군.

-누구나 잘하는 게 있는 법이지.

-이젠 존댓말도 하지 않는군.

이희승은 이제야 영욱이 반말로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포크의 이족보행에 밟히는 와중에도 그런 정신이 남아있다니 말만 사퍼모어가 아니라 정말로 대단한 실력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서로 죽이려고 달려드는 중인데 굳이 그런 격식까지 차릴 필요까지야 있을까? 그리고 넌 이미 줄 떨어진 연 신센데 말이야.

-말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리고 내가 너를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하지. 

이희승은 계속해서 도망치고자 했고, 영욱은 포크로 이족보행 초식을 전개하면서 공격을 계속했다. 그런 상황에서 서로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아주 잠시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영욱은 대화를 한다고 해서 고삐를 늦추지는 않았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유리할 때 계속해서 몰아붙여야만 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나의 나노캡슐을 너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넘겨주겠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자.

-그런 거 이제 필요 없다. 그리고 연구실도 빼앗긴 주제에 나노캡슐이 어디 있다고 개소리야?

-너 같으면 그렇게 귀중한 것을 연구실에다 놓고 다닐 것 같으냐? 병신아.

이젠 회유가 아니라 항복의 조건에 대한 협상이라도 하는 듯했다. 이 교수는 공격을 멈추기만 하면 나노캡슐을 주겠다는 식으로 영욱을 유혹했다.

-지랄. 마치 주머니 속에 들어있다는 식으로 말하는군. 하지만 이제는 나노고 지랄이고 정말 싫다. 지긋지긋하단 말이다.

-너도 슬슬 지치기 시작할 텐데 이제 제발 좀 그만하자. 많이 맞았다 아이가.

-웃기지 마라. 하룻밤 정도는 끄떡없다. 그리고 넌 좀 더 맞아도 싸.

영욱은 여전히 변함없는 태도로 이희승을 밟고 또 밟았다. 도망가는 표적을 상대로 이족보행 초식을 연습하니 훈련의 성과가 더 좋은 것 같아서 너무나도 즐거운 마음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첫째, 박상태와의 싸움에 개입한 것.

-어차피 네 녀석의 실력으로는 그 녀석을 죽일 수는 없었다.

-둘째, 나를 실험동물로 만들려고 한 것.

-그건 나의 판단 실수였음을 인정한다.

-셋째, 그동안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희생시킨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

-그건 너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러니까 제발 이쯤에서 타협하자.

-내일이라면 몰라도 오늘은 절대로 타협 안 해. 사람을 패는 게 이렇게 즐겁기는 처음이니까 말이야.

영욱은 입을 조잘거리면서도 잠시도 쉬지 않고 이희승을 짓밟아댔다. 이희승은 밟고 또 밟아도 오뚝이처럼 일어났고, 계속해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 도주 거리가 조금씩이라도 줄어들고 있었다.

-정말 지독한 녀석이군.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지는 않을 테니까 사정 봐줄 여유가 전혀 없지. 그러니 오늘 여기서 끝장을 내자고.

-끝장을 내봐야 내일이면 멀쩡해져서 나타날 테니까 제발 좀 그만 하지.

-내일 더 강해져서 나타나더라도 오늘은 절대로 그만 못 해.

-제, 제발 좀 그만하자고.

-왜? 괴롭니?

-제발 좀 살려줘.

-어차피 죽지는 않잖아. 그러니까 너무 엄살떨지 마.

-아악. 정말 아파 죽겠어.

이희승은 엄살 반 진담 반으로 소리 높여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소리를 지르면서도 속으로는 자존심이 엄청 상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영욱의 공격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그로서는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영욱은 아직 드림헌터로서의 수준이 얕아서 결정적인 공격을 하지는 못했지만 질기기가 소의 힘줄보다도 더 질겼다.

-지랄! 쇼하고 있네. 아직도 멀었으니까 고통을 음미하면서 즐기라고.

영욱은 이희성이 아직도 멀쩡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공격을 멈추는 순간 자신이 공격당하게 될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박상태와의 전투 경험을 통해서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으면 나타났던 것처럼 스르륵 사라질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기회를 노리고 있는 이희승의 말에 속지 말고 사라질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는 길만이 유일하게 살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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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은 포크의 기계 삽에 계속 밟히면서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친 새끼. 대체 몇 시간째인 줄 알아?

-꿈속 세상에서의 시간이야 아무리 많이 흘러도 현실의 시간으로 치자면 아주 잠깐이지. 

-벌써 12시간이 넘었어. 너는 지루하지도 않아?

-아니. 나도 지루해. 정말 지루해서 미치겠지만 네 녀석이 괴로워하는 걸 보니까 충분히 견딜 수 있어. 

영욱은 아무도 없는 공원묘지에서도 12시간 이상 작업을 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지루하다는 말은 그냥 립 서비스에 불과했다. 

-겨우 이 정도의 공격력이 전부라면 석 달 동안 계속 밟더라도 죽지 않는다는 것만 알아둬.

-좋아. 그럼 석 달하고 하루 동안 계속해서 밟아주지. 어차피 수련도 되니까 나쁘지는 않네. 

-좋아. 오늘은 네가 이겼다. 하지만 내일은 그럴 기회가 없을 것이다.

-학과장님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면 그럴 테지.

이희승이 항복 선언을 해도 영욱은 전혀 흔들림 없이 밟고 또 밟았다. 그런 달콤한 말에 속아서 공격을 멈출 영욱이 아니었다.

-그걸 네 녀석이 어떻게 아느냐?

-내가 네 녀석의 힘을 최대한으로 빼놓으면 학과장님이 처리하기로 했거든. 당연한 거 아냐?

이 교수와 학과장이 싸우기로 한 것은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이고, 그것을 알 리 없는 영욱은 당연히 넘겨짚은 것이었다. 영욱은 이제 거짓말도 상당히 잘했다. 

-흥! 내가 잠들 것 같으냐?

-그럼 내일 낮에 아주 나쁜 컨디션으로 나와 다시 싸우게 되겠지. 또 밟히게 되면 자존심이 상해서 어쩌지?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는 상태 군과 연합할 수밖에…….

-그러든지 말든지. 하지만 그 녀석이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아무튼 내일은 용서하지 않겠다.

-누가 보내 준다고 했어? 웃기지 마.

-지, 지독한 놈 같으니라고. 아악!

영욱이 결코 공격을 멈출 것 같지 않자 이희승은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 공격을 벗어나지는 못해도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욱도 그 사실을 알기에 이희승 교수가 달아나기 전에 한 대라도 더 때리기 위해서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더욱더 빠르게 공격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힘이 들고 호흡이 가빠지더라도 개의치 않고 빠른 공격을 퍼부었다.

그런데 그게 먹혔는지 결국 이희승이 진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마도 그의 회복 속도보다도 영욱의 공격 속도가 더 빨랐던 게 주효한 듯했다. 

결국 이희승은 팔 하나를 잘리고 나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영욱은 얼른 포크에서 내린 다음 아직도 살아서 퍼덕거리는 이희승의 왼팔을 들어서 얼른 집어삼켰다. 

2QB의 세상에서는 현실처럼 물리적인 법칙이 절대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입보다 훨씬 큰 팔 하나가 마치 작은 알약 삼키듯이 수월하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물론 삼킨다고 해서 상황이 종료되는 것은 아니다. 영욱은 삼킨 팔을 소화시키기 위해서 기계체조 기본 동작의 수련에 열중해야만 했다.

만일 팔의 주인이 있는 상태에서 삼켰더라면 큰일 나겠지만 이희승이 달아난 후라서 그런지 팔의 저항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물론 기계체조라는 소화 보조 수단도 없이 삼킨 것이라면 쉽게 흡수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영욱은 이족보행이 아니라 이족속보速步를 구사하게 되었다. 이희승과의 기나긴 전투를 통해서 보행보다는 적어도 두세 배쯤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빠르게 뛰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영욱은 팔의 형태로 삼킨 이희승의 영혼 조각을 소화시키는 작업과 아울러 새로 얻은 초식 연습에 몰입했다. 잔상지수와 이족속보는 기본 동작의 1식과 2식이지만 향하는 방향만 다르게 하면 같은 원리나 마찬가지여서 서로 시너지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제 잔상으로 만들어내는 기계 손 혹은 기계 팔의 숫자가 희미하게나마 세 개에 이르렀다. 두 개는 진하지만 아직 하나는 거의 윤곽만 보이는 형태였다. 

하지만 영욱의 기분은 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았다. 마법으로 치자면 1서클의 경지에서 2서클로 올라선 것처럼 즐겁고 또 즐거웠다. 물론 그 정도로 강해진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이희승은 당분간 나타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영욱만을 상대하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학과장 김진명이라는 강적도 함께 상대해야 하니까 그럴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영욱의 공격이 제대로 먹히니 겁도 날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떨어져나간 팔을 복구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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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2QB 세상에서 꼭 12시간만 머무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실의 세상처럼 밤낮의 구별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이곳에서도 밤과 낮이 있음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거의 자지 않고도 잘 버티는 영욱이니까 활인심방과 기계체조를 열심히 반복하다가 24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팔의 소화 흡수를 마치고 잠을 청했다. 

2QB 세상에서 잠이 든다는 것은 곧 현실 세계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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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

영욱은 낮잠을 아주 개운하게 자고 일어났다. 사실 눈을 감자마자 이희승 교수와 싸우기 시작해서 2QB 세상의 시간으로는 하루 이상을 보냈지만 현실 세계에서 흘러간 시간은 겨우 20분 남짓에 불과했다. 

당하거나 싸우는 것으로 끝을 냈다면 정신력의 소모와 관련해서 마치 악몽을 꾼 것처럼 머리가 띵하고 온몸이 찌뿌듯할 것이다. 

하지만 몰입해서 기계체조를 수련하고 활인심방의 구결을 반복해서 정신력을 다시 채운 덕분인지 숙면熟眠을 취한 것처럼 기분이 아주 좋았다.

두 세계 사이에는 이렇게 큰 시간의 흐름 차이가 있으니 수련이나 공부하는데 사용하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문제는 현실로 돌아오면 2QB 세상에서의 기억이 그리 선명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그것은 마치 2QB 세상에서 발휘하는 능력의 겨우 일 퍼센트에서 몇 퍼센트까지만 현실에서 사용하는 게 가능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몸으로 익히는 수련이나 깨달음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알다시피 체득 전과 체득 후의 효과는 그 차원이 다르니까 몇 퍼센트라도 아주 크기 때문이다. 

물론 영혼이니까 몸이 아니라 머릿속에 새겨지겠지만 그것도 역시 체득하는 것이니 크나큰 시간의 흐름 차이를 이용해서 훈련하는 의미는 충분히 있을 것 같았다.

영욱은 이희승 교수를 이긴 것보다 2QB 세상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깨닫게 된 것이 바로 진정한 로또라고 생각했다. 영욱은 정말 오랜만에 진한 미소를 지으면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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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잘 잤어?"

"뭐, 뭐야? 언제부터 내 옆에 있었던 거야?"

놀랍게도 영욱의 옆에는 은영이 있었다. 그러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에 왔어. 왜? 내가 싫어?"

"우린 이미 헤어진 사이잖아. 그러니 좋고 싫을 게 뭐가 있겠어?"

사실 은영이 자신의 곁에 있어서 영욱도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애써 냉담한 표정을 고수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뚱한 표정이야?"

"누가 옆에 있으니까 좀 놀래기는 했지."

박상태를 피해서 처음 낮잠을 자기 시작했을 때에도 자신의 곁에는 은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크게 내색하지는 않지만 무척 짜증스러워했음을 기억하고 있기에 더욱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시작하면 안 돼?"

"안 돼."

"왜 안 되는 거야?"

"미안하지만 나도 보기보다는 자존심이 강하거든."

"무릎 꿇고 빌라면 빌게."

은영이 진짜 무릎을 꿇으려고 하자 영욱은 얼른 말리고 나섰다.

"하지 마."

"진심이야. 필요하다면……."

"필요하다면 뭐?"

"오빠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대체 뭘 다해준다는 건데? 장난삼아 하는 말이라면 사절이야."

영욱도 은영의 말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를 리 없지만 애써 외면했다. 사실 아직도 껄떡거리는 놈으로 비춰진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장난이 아냐. 오빠가 원한다면 나의 전부를 다 줄 수 있어. 그리고 오빠를 떠난 건 내 자의가 아니었다고 분명히 말했잖아."

"나는 그게 더 자존심이 상해. 그것은 그까짓 위협에 금방 꼬리를 말 정도로 내가 가치가 없다는 것이니까……."

두 사람은 서로 격렬한 감정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정작 헤어질 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것에 비해서 숨기고 있던 감정들이 상당히 컸다.

"오빠는 강해서 별 것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는 달라. 갑자기 꿈속에서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더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두들겨 패기만 하는데 어떻게 견딜 수 있어?"

"너만 그런 일을 당했던 게 아냐."

"오빠도 그랬겠지만 정말 아프고 두려워서 미칠 지경이었어. 그리고 곱게 자란 내가 언제 그렇게 맞아봤겠어? 게다가 난 여자잖아. 우리 엄마아빠도 때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런 취급을 당하니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어."

박상태로부터 개 맞듯이 맞고 나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영욱과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은영의 높기만 했던 콧대가 많이 수그러져 있었다. 그러니까 영욱이 원하면 몸을 줄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다. 

아마도 박상태는 은영의 미모를 보고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자비하게 폭력만을 행사했던 듯했다. 여자를 고르는 취향이 확실히 다르긴 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나름 퀸카라고 자부했던 은영으로서는 아프기도 하지만 자존심도 무척 상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빼어난 외모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슴속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니 박상태의 무자비한 구타가 꼭 나쁜 결과만을 낳은 것만은 아닌 셈이다.

물론 은영의 착각이다. 사자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미녀는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허무맹랑한 착각이다. 2QB 세상에서의 드림헌터는 육식동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 맞고 있으래?"

"그럼 어떻게 해?"

"끝까지 대항했어야지."

"여자가 무슨 힘이 있어?"

"다짜고짜 여자를 패는 괴물에게 약한 여자 행세를 왜 해? 그리고 만일 그 녀석이 나 대신 네 부모님들이나 언니들을 위협했다면 그렇게 쉽게 포기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영욱은 너무나도 쉽게 포기하더라는 박상태의 말을 미리 듣지 않았다면 은영의 변명에 넘어갈 뻔했다. 그렇다고 박상태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영욱의 질책이 거세게 이어지자 은영은 작전을 바꾸어서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시키지도 않은 고백까지도 늘어놓았다.

"맞아. 사실 오빠를 떠나기 전에는 내가 얼마나 오빠를 사랑하는지 잘 알지 못했어. 하지만 이제는 알아. 오빠가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지를……."

"나 역시 처음으로 하는 사랑이라서 그리 세련되게 굴지는 못했지만 진심으로 너를 사랑했어. 순탄한 삶이었다면 우리들의 사랑이 틀림없이 이루어졌을 거야."

"아냐. 우리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어. 그러니까 다시 시작해."

"이미 드림헌터들이 망쳐버렸으니까 더 이상 거론하지 말기로 하자. 왜냐면 나는 언제 죽게 되거나 병신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거든."

영욱은 은영의 눈물어린 고백을 듣고서 자칫하면 또 넘어갈 뻔했다. 그만큼 그녀의 말에는 어느 정도 진심이 담겨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보석 반지를 열 손가락에 다 끼워준다고 해도 이런 립 서비스는 하지도 않을 정도로 도도하게 굴던 그녀였지만 확실히 변하긴 많이 변했다.

이렇게 변한 은영과 다시 시작하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이미 한 번 배신한 전력이 있으니 또 힘든 순간이 오면 틀림없이 배신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욱은 같은 여자로부터 두 번이나 배신당하고도 살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은영에 대한 모든 것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확실하게 지워버리기로 했다. 아깝기는 하지만 취하는 것보다는 버리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젠 끝까지 견뎌낼 자신이 있어."

"미안하지만 우리 사이는 이미 끝났어."

"혹시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

"응."

"정말이야?"

"제 정신을 가진 여자들이라면 이렇게 잘생긴 나를 그냥 둘 리가 없잖아. 안 그래?"

나르시스를 능가하는 영욱의 자신감에도 은영은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거듭되는 수련으로 군살이 빠진 영욱의 외모가 상당히 멋있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육식동물의 향기가 영욱의 자신감과 절묘하게 잘 어우러졌기 때문에 은영으로서는 감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악취로만 느껴졌던 육식동물의 체취가 이제는 포식자로서의 아주 자연스러운 냄새로 자리를 잡았다.

"나보다 예뻐?"

"당연하지. 내 안목을 몰라서 물어?"

"그렇다면 누군지 대충 알겠어."

은영은 자신보다 예쁜 여자라는 말을 믿는 듯했다. 그리고 그게 누군지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영욱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당연히 진중권을 보았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진소희를 알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포기해."

"그건 내가 알아서 해. 그리고 학과장님이 오래."

"학과장님이 왜?"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알았어. 고마워."

은영은 학과장 김진명의 심부름을 겸해서 왔던 것이다. 아마도 영욱과 이희승 교수와의 싸움 결과를 듣고서 오늘밤에 있을 싸움을 준비하기 위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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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나보다 예쁘다면 누군지 빤하지. 하필이면 그년이랑 엮일 게 뭐야?"

은영은 영욱의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것은 영욱의 사부가 진중권이고 그녀의 딸이 진소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짜증을 부리는 은영의 반응을 보니 그뿐이 아니라 진소희를 예전부터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젠장! 싹수가 하도 노랗게 보여서 걷어찼더니 그 짧은 시간 동안에 강해져서 사람을 귀찮게 만들고 있어."

"맞아. 진즉 성의를 보일 것이지 뒷북이라니 밥맛이야."

"언니야 무당이니까 알 수 있었겠지만 보통 사람인 내가 찌질이가 용 될 줄을 어떻게 알겠어?"

"그러게 말이야."

"그리고 영욱 오빠도 그래. 내가 언니에게 함께 가자고 할 때 따라갔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텐데 나 몰래 다른 박수무당을 찾아갔으니 내게 걷어 채인 거 아냐."

"맞아. 맞아."

"그리고 둘째 언니는 자존심도 없는 것 같아. 이미 다른 사람의 제자가 되어버렸는데 왜 다시 바로잡으라고 그러는 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네가 참아. 은영아."

"그래. 예쁜 내가 참아야지."

모든 걸 다 주겠다고 하고도 퇴짜를 맞아서 잔뜩 스트레스를 받은 은영은 혼자서 일인이역의 연기를 하면서 어디론가 걸어갔다. 

내용인 즉, 영욱의 능력과 은영의 태도가 직결된 것이며, 무당인 은영의 둘째 언니가 그러한 예상을 정확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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