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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의 설명을 듣고 난 이 교수는 정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을 착각하고 있군."
"예? 뭐가 착각이라는 거죠?"
"개당 1억 원이 넘는 나노캡슐을 그런 일회용 소모품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게 바로 착각이라는 말이지. 물론 그보다야 목숨이 더 비싸긴 하겠지만 말이야."
"예? 1억이라고요? 제 예상보다는 훨씬 더 비싼 물건이었군요."
"그것도 제조 원가만을 말한 거야. 만일 내다파는 거라면 최소한 10억은 받아야 할 걸."
대량으로 찍어내는 공산품이라면 그렇게 높은 마진을 붙일 수는 없겠지만 이건 완벽한 독점에다 아주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니 10억이 아니라 20억에 팔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영욱은 자신이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하지만 만일 이 교수가 박상태와의 싸움을 말리지 않았다면 나노캡슐이 필요하지 않았을 거라고 여기기로 했다. 물론 그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그렇게 비싼 것이라니 공짜로 제공해 달라는 말씀을 드릴 수는 없겠군요. 하지만 교수님의 말처럼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비싼 소모품 취급은 좀 그렇군요."
"또 혼자서 착각하는군."
"제가 또 무엇을 착각했다는 거죠?"
"내가 언제 제공할 수 없다고 했던가?"
"개당 1억이 넘는다면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것도 한두 개가 필요한 것도 아닌데……."
"생체에서 흐르는 수준의 낮은 전기를 이용해서 산소를 자체 생산하는 나노장비와 그 생체 전기로 포도당을 자체 합성하는 나노엽록소를 장착한 나노캡슐이라면 그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도 가능할 걸세. 생산량도 적지 않고 일회용 소모품도 아니니까 말이야."
이 교수가 제시한 단가는 단순한 나노캡슐의 비용만은 아닌 듯했다. 사실 전기분해로 산소를 발생시키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나노 사이즈의 장비로 겨우 생체 전기 수준으로 산소와 포도당을 만드는 과정은 그리 간단치만은 않을 것 같은데 이미 충분히 연구가 진행되어 있는지 이 교수는 별로 어렵지도 않다고 단언했다.
"그게 가능합니까?"
"자네의 결단에 찬 행동을 내가 뜯어 말렸으니까 불가능해도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그렇다면 언제쯤 가능할까요?"
"거의 완성 단계니까 얼마 남지 않았어."
"그 얼마가 어느 정도입니까?"
영욱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는 이 교수의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대답할 테니까 좀 보채지 말게. 워낙 작고 복잡한 물건이니까 아무리 빨라도 몇 년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몇 년이라면 그 동안 제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군요."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한 이 교수의 대답은 확실히 영욱의 예상 밖이었다.
게다가 영욱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이미 원천기술을 확보한 상태거나 거의 개발이 완료되었다는 인상을 심어주던 이전의 대화 내용과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흔히 하는 속된 표현으로 간을 보는 게 분명했다.
"그게 제일 빠른 거야. 세계적으로 살펴보아도 10년 내에나 말고 그런 나노캡슐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되는가? 자네 생각에는 미국의 로버트 킹 교수가 가능할 것 같은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 입장이 워낙 급해서 그러는 거죠."
"아무리 바빠도 바늘허리 매어 쓰지는 못하는 법일세. 그런데 말이야. 겨우 그것만으로 강해질 수 있을까? 산소와 포도당이 체력을 좌우하는 줄은 알지만 2QB 세상에서 주된 동력은 정신력이니까 아무래도 효과가 덜하지 않을까?"
말투로 보아하니 이 희승 교수는 같은 양으로 수만 배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특수 약물이나 호르몬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인내나 노력이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결국 강한 정신력은 강한 체력에서 나옵니다. 포도당과 산소의 충분한 공급은 강한 체력의 원동력이고요."
"이제 보니 자네는 정신도 물질의 일종이라고 주장하는 유물론과 흡사한 견해를 가지고 있군."
"그야 정신도 생명 활동의 일부분이니까요."
"아무튼 본인이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니까 내가 특별히 신경 써서 빠른 시간 내에 만들어주기로 하지."
"고맙습니다. 교수님."
"일상생활은 마음대로 해도 좋아. 하지만 잠은 반드시 내 연구실에 와서 자야 할 걸세.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 교수는 영욱에게 나노캡슐을 제공하는 대신에 그 대가를 요구했다.
영욱은 이 교수의 연구실에 정밀한 뇌파腦波 측정 장치와 심전도心電圖 측정 장비 그리고 근전도筋電圖 측정 장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잠자는 영욱의 상태를 측정하려는 듯했다.
"이제 보니까 제 몸을 가지고 실험을 하시겠다는 거였군요."
"당연하지. 자네가 꿈속 세상에서 그 몬스터와 싸울 때의 뇌파 상태나 신체 각 기관의 활성 상태 등을 연구할 수 없다면 그런 고가의 장비를 제공할 리가 없지 않는가?"
"그런 조건이라면 저는 싫습니다. 저도 엄연히 사생활이라는 게 있는데 발가벗겨진 채로 실험실의 청개구리 신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영욱은 이희승 교수의 제안이 죽음의 덫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일단 실험이 시작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과 발에 수갑이 채워져서는 연구실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물론 아직까지 확인된 것은 아니고, 그저 영욱만의 상상이지만 최근 들어서 깨어나기 시작한 육감이 강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자네를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닐세. 그리고 어차피 잠은 어디에서든지 자야 하지 않는가? 자네는 그저 내 연구실에 있는 침대에서 편안하게 자기만 하면 되는 것이네."
"원하신다면 제 몸의 상태를 원거리에서 체크할 수 있는 나노 측정 장비를 삼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자는 건 싫습니다. 그리고 박상태 그 녀석을 피해서 밤에 잠을 자는 적은 거의 없으니까 정상적인 실험이 되지도 않을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밤에 자지 않으면 잠은 대체 언제 자나?"
"낮 시간 동안에 몇 차례 잠깐씩 졸면 충분합니다. 그 짧은 와중에도 그 녀석을 만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면 낮 시간에 30분만 내 연구실에서 자고 가게. 자네가 말하는 나노 사이즈의 측정 장비는 아직도 꿈이라는 걸 몰라서 그러나?"
이 교수가 조건을 좀 더 느슨하게 바꾸긴 했지만 영욱은 여전히 개미지옥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밤이 아니라 사람들의 출입이 있는 낮 시간이니까 바로 납치나 감금 상태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좋아요. 하지만 낮잠을 10분 이상 자지는 않으니까 10분으로 하죠."
"좋아. 내일부터 바로 시작하지."
"내일부터라고요? 나노캡슐은 몇 년 뒤에나 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하지. 하지만 나노캡슐을 장착하기 전의 실험 자료가 있어야 장착 후에 변화된 정도를 알 수 있을 게 아닌가? 실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이희승 교수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에 영욱은 나노캡슐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100퍼센트 옳은 주장이지만 실험을 시작하는 시기가 지금이라는 데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었다. 실험에 응한다고 하더라도 나노캡슐을 받고 난 다음이 되어야 한다는 게 영욱의 생각이다.
"그런 거라면 먼저 나노캡슐을 제공하고 나서 삼키기 전 며칠 정도만 측정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럼 전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또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교수인 내가 자네를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생각하나? 굳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말이야."
영욱이 순순히 협조하지 않자 결국은 이희승 교수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처음부터 나노캡슐을 제공할 생각은 별로 없었던 듯했다. 그로서는 상대의 굴복을 받아내지도 않고 피와 살을 흡수한 영욱의 내장 구조와 뇌 구조가 궁금했던 것이다.
"교수님이시니까 학점으로 위협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설마 그러시겠어요?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실험을 해야 할 사인데……."
"미안하지만 내 말에 순순히 협조하지 않으면 내 과목에서 학점받기는 어려울 걸세. 그리고 몇몇 과목도 같은 결과를 경험하게 될 거야."
"끝까지 학점으로 협박할 생각이라면 정말 실망입니다. 그러니 언급하신 나노캡슐이 준비되면 연락을 주십시오. 그럼 이만."
순순히 지시에 따르지는 않겠다는 대답이었다. 영욱은 이희승 교수가 학점까지 들먹이는 걸 보고서 결코 좋은 의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만일 그랬다면 이렇게 복잡한 조건을 붙일 리가 없다. 영욱은 이 교수로부터 빠르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당장 그 자리에 서지 못하겠나?"
이 교수가 노발대발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지만 영욱은 아랑곳하지 않고 멀어졌다. 어쩌면 순수한 실험만이 진행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부터 실험실의 청개구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학점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고 노골적으로 위협하기까지 하니 솔직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학점이란 정당한 방법으로 실시된 평가에 의해서 공정하게 주어져야 하는 것인데 사사로운 용무로 인한 협박의 수단이 되는 게 정말 싫었다.
"자네는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일세. 이제 자네의 성적은 F일세."
성질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학교를 집어치우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득 될 일은 없다. 먹고 사는 거야 포클레인 기사로 살아도 충분하겠지만 그 동안 대학 졸업장을 따기 위해서 들인 노력과 시간과 돈이 아까워서 그럴 수는 없었다.
사실 초중고 12년 동안을 나름대로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에 진학한 것이니 강원대가 비록 일류대는 아니지만 영욱의 입장에서는 애착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이희승 교수의 화난 목소리가 영욱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지만 영욱은 졸업이나 학점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여기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장차 실험을 핑계로 무슨 수난을 당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니 최대한으로 버텨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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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좀 심한 거 아냐?"
"그러게."
"무슨 이윤지는 모르겠지만 백주대낮에 F를 주겠다고 공언을 해 대니 어디 무서워서 학교 다니겠나."
이희승 교수의 히스테릭한 반응에 지나가던 학생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도 나서서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이희승 교수
영욱의 찜찜한 표정을 보더니 촉이 매우 발달한 사부 진중권이 입을 열었다.
"왜? 학교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뇨. 열심히 공부만 하다가 왔습니다."
"내가 바본 줄 알아? 지금 네 표정이 어떤 줄이나 알아?"
"그야 똥 씹은 표정이겠죠."
"그런데도 공부만 열심히 했다고 주장할 거야?"
몇 마디 나눠보니 육감이 생겨난 영욱도 사부 진중권이 벌써 누군가로부터 무슨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박상태의 눈알을 뽑는 등의 살벌한 싸움을 벌였으니 소문이 나지 않았을 리 없다.
"이미 아시는 것 같은데 뭘 자꾸 묻고 그러세요?"
"알긴 뭘 안다고 그래?"
"수백 명에 이르는 구경꾼들 중에서 사부님의 금지옥엽 진소희가 있지 않았을까요? 워낙 경황이 없어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요."
"짜식, 눈치가 보통이 아니군. 아닌 게 아니라 소희가 네 싸움을 보고 전화로 간단하게 알려주긴 하더라. 하지만 나는 네 입으로 직접 들어야겠다."
아직 서로가 정식으로 만난 적은 없지만 영욱이 진소희를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진소희 역시 부친의 제자로 들어온 영욱을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사실임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2QB 세상에서 저를 괴롭히던 드림헌터 박상태가 이름과 얼굴을 바꾼 채 우리 학과 1학년에 입학한 걸 찾아냈습니다. 벌써 200명도 넘는 사람들의 영혼을 뜯어먹은 놈이기도 하고,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압박을 넣는 놈이기도 해서 현실에서 아예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이상한 교수님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괴물 녀석이 쉽게 죽어준대?"
"아뇨. 저를 물 먹이려고 일부러 당해주는 척하다가 눈알 하나를 뽑히더니 버티지 못하고 달아났습니다."
"그 부분은 대충 들었어. 폭행당하는 척해서 너를 곤경에 빠뜨리려다가 오히려 자신의 정체만 드러난 격이 되었겠군. 그런데 그 정도면 할 만큼 한 것 같은데 뭐가 그리 불만이야?"
"이상한 교수 때문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이희승 교수라고, 나노바이오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있는데, 그 작자가 공수표를 남발하면서 저를 실험동물로 삼으려고 하잖아요."
영욱의 말에 진중권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희승 교수가 연구하려는 분야가 그저 나노캡슐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자에게 어디까지 말한 거야?"
"숨기려고 했지만 제가 박상태의 피와 살을 흡수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더군요."
"그렇다면 드림헌터의 생리를 연구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너의 특수한 흡수 능력을 연구하려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진짜 나노캡슐에 대해서 연구하려는 것인가?"
"아마도 세 가지 모두일 겁니다. 드림헌터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나노캡슐 실험을 빌미로 아예 저를 마루타로 만들려고 하더군요."
사실 특수한 흡수 능력은 영욱이 아니라 기계체조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니 설사 해부를 한다고 해도 별다른 연구 결과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이희승이 알 리 없으니 오히려 더 문제인 셈이다.
진중권은 강원대에도 수준 높은 드림헌터들이 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욱에게 대학을 집어치우고 기계체조가 10%의 경지에 오를 때까지 숨어서 수련만 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권했던 것이다. 악취는 주변의 관심을 끌어 모으게 마련이니까.
"그래서 그렇게 골이 난 거야?"
"예. 세상에 믿을 놈은 없더군요. 그리고 저 자신도 그런 얄팍한 수단을 기대했다는 게 창피스럽기도 했고요. 물론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오로지 수련으로만 강해지겠다는 결심을 굳힌 거야?"
"예. 그게 제일 싸게 먹히니까요."
"맞아. 그리고 돈도 벌 수 있으니까 일석이조겠지."
"예. 그럼 오늘도 시작하기로 해요."
영욱은 편법에 의존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편법이 곧 올가미가 될 가능성이 높기도 하고, 수련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기연이나 영약을 찾는 기회주의자가 된 것 같아서였다.
물론 나노캡슐의 도움을 받아서 나쁠 거야 없겠지만 이렇게 나약한 정신 상태로는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할 게 분명했다. 120% 대성大成이 아니라 겨우 6퍼센트의 경지에 도달하기도 힘들 것 같았다.
정신력을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데도 불구하고 괜히 기물에 대한 의존성만 키우게 될 공산이 컸다. 그러한 영욱의 결심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부 진중권이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좋아. 오늘은 새로운 걸 보여주기로 하지. 새로운 초식 이름은 기본 동작 제 2식 이족보행이다."
"잔상지수 초식도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또 새로운 초식을 어떻게 배워요?"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새로운 초식을 배운다면 아마 십 년으로도 부족할 거다. 그러니 일단 배워두고서 천천히 익숙해지도록 해."
"예. 사부님."
진중권이 새로 가르쳐주려는 동작은 놀랍게도 잔상지수 초식으로 두 개로 변한 포클레인의 기계 팔을 이용해서 걸음을 걷는 것이었다. 글자그대로 포클레인이 두 다리로 보행하는 것이었다.
쿵. 쿵.
진중권은 두 개로 보이는 포클레인의 기계 팔을 발처럼 이용해서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잔상인 줄로만 여겼는데 위태위태하지만 실제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니까 그저 잔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영욱은 2QB 세상도 아닌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기막힌 광경에 혀를 내두르며 한 동작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사부의 시범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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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봤지?"
"예. 사부님,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왜 갑자기 아부를 떨고 그래?"
"남들은 별 것도 아닌 걸 제공하면서 요구 조건도 많이 거는데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대단한 걸 가르쳐주면서 겨우 막걸리 한 잔만을 원하니 어찌 존경스럽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영욱은 손바닥까지 비비며 사부 진중권을 극찬했다. 잔상의 팔을 이용해서 기계 팔을 두 개로 만드는 것과 그 두 개의 기계 팔로 다리로 바꾸어서 걸음을 걷는 것이 같을 리 없다. 영욱은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있었다.
"흥! 내가 100살까지 살면 과연 그런 말이 나올까?"
"그래봐야 양주도 아니고 막걸린데 몇 푼이나 되겠어요? 아니다. 그렇게 되면 푼돈 수준은 아니네요.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어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아무튼 저는 사부님이 제일 좋아요."
"덩치도 큰 게 아양을 떨어대니 소름 돋잖아. 까불지 말고 얼른 이족보행 연습이나 해."
"네."
영욱이 껴안으려는 시늉을 하자 사부 진중권은 기함을 했다. 진중권은 얼른 자신의 포클레인을 몰아서 영욱으로부터 멀어졌다.
혹시라도 영욱의 포크가 넘어지면 자신의 포클레인이 망가지기라도 할까봐서 그런 듯했다. 그만큼 그가 선보인 동작은 난해하기 이를 데 없었다.
2QB 세상도 아닌 현실 세계에서 포클레인의 기계 팔을 잔상이 남도록 빠르게 움직이는 것도 모자라서 그 두 팔로 차체를 들고 서서 이동까지 한다는 게 상식적으로는 가능할 리 없다. 하지만 진중권이 이미 해냈으니까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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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일단 포클레인의 기계 팔을 오른쪽 아래 방향으로 뻗어서 포크의 차체를 왼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차체가 40도 정도 기울어지게 만든 다음 기계 팔을 얼른 들어서 오른쪽 캐터필러가 땅바닥으로 빠르게 떨어지게 했다.
쿵.
그 탄력을 이용해서 반대편으로 기계 팔 하나로 딛고 일어섰다. 그리고 기계 팔을 지면 방향으로 힘껏 밀어서 점프를 시도했다.
점프라고는 하지만 겨우 1미터 정도라서 걸음을 걷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기계 팔이 지면과 떨어지게 만든 다음 빛과 같은 속도로 다른 곳으로 기계 팔을 옮겨서 디뎠다.
마치 삽을 타고 뛰는 것과도 흡사한 모습이었지만 조금 다른 점이라면 잔상의 기계 팔이 좌우로 오가면서 다리가 두 개이며 마치 거위가 뒤뚱거리며 걷는 걸음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쿵. 쿵.
사실 이런 움직임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가능하다의 논쟁 이전에 어지간한 포클레인이라면 도저히 견뎌내지 못할 정도의 충격이 차체에 전해지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동안 기계체조로 충분히 단련된 포크는 의외로 잘 버텨내고 있었다. 기계체조는 포크의 차체에 생체 전기가 흐르는 길을 내서 영욱의 운전에 빠른 반응을 보이도록 만든 것 외에도 튼튼한 차체로 거듭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영욱도 포크에 대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럴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영욱은 몸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균형을 잡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었다.
"으갸갸갸!"
영욱은 비틀거리면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와중에 포클레인 운전이나 기계체조에 대한 자신의 재능이 생각보다는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록 사부 진중권이 보여준 시범에 비하면 그야말로 취권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포클레인으로 이족二足 보행을 하고 있는 상태라는 게 중요했다.
입이 쩍 벌어지고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사부 진중권의 표정을 보건데 처음부터 걷는 것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게 분명했다.
"이크!"
하지만 영욱으로서는 박상태의 탱크를 때려잡았을 때 이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서 기계 팔에다 모든 중량을 모으는 연습을 본의 아니게 경험했었고, 그게 이족보행 수련에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의 훈련은 걸어가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기계 팔에 차체의 모든 중량을 싣고서 적을 강하게 공격하는 훈련임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캐터필러로도 오르지 못하는 험한 지형을 두 기계 팔로 뛰어서 올라갈 수 있다면 도주와 유리한 장소를 선점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 어? 어?"
비틀거리면서도 겨우겨우 중심을 잡으며 아슬아슬하게 걸음을 걷는 영욱은 기분이 아주 좋았다.
살아오면서 썩 잘하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늘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았고, 그 스트레스를 겉으로 드러내지도 못한 채로 그저 마음속으로만 삭이곤 했었다.
공부도 그다지 잘하지는 못했고, 음악이나 미술은 물론이고 대인 관계 역시 그리 넓지 못했다. 그런데 포클레인 운전만은 처음부터 아주 쉬웠고, 기술적으로도 상당한 수준까지 막힘없이 향상되었다.
이모부가 늘 하던 말씀처럼 누구나 잘할 수 있는 것이 따로 존재했다. 되지도 않는 트리플 엑셀을 붙들고 고민하느니 잘할 수 있는 것을 찾는 편이 훨씬 낫다. 이처럼 활인심방과 기계체조의 경우에도 체질에 딱 맞았고, 셋의 궁합도 아주 잘 맞았다.
이러한 세 박자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서 기계 팔 하나로 이족보행이라는 기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두 다리마저 잘린 외팔이 검객이 마지막으로 남은 한 팔로 물구나무를 서서 반쯤 점프하다시피 이동하는 것과 비슷한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지금은 기계 삽의 뾰족한 날이 아니라 등 부분으로 짚어서 이동이 가능한 상태지만 만일 기계 삽의 뾰족한 부분으로 땅을 짚게 된다면 개펄에 발이 빠지듯이 푹푹 빠질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42톤에 이르는 차체의 무게를 실어서 상대를 공격한다면 결정타가 될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취권처럼 진행 방향을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불규칙하게 움직이니 포탄을 피하거나 적의 공격을 피하는 데도 조금이나마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그래도 점프가 가능하니 앞으로는 피할 수 있는 방향도 다양해질 것이다.
물론 작업에서는 땅을 단단하게 다지거나 깊이 파는 용도로 사용되는 기술이다. 영욱은 포크의 이족보행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평평하게 정리해둔 땅을 단단하게 다지기 시작했다.
다지는 작업의 효율 면에서야 거대한 롤러를 장착한 머캐덤 롤러를 따를 수는 없겠지만 공동묘지 기반 조성 작업을 하는 공원 묘원에 그런 게 존재할 리 없었다. 그러니 영욱의 작업 방식을 따라올 기계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니나 다를까 작업의 진도가 팍팍 나갔다.
쿵. 쿵. 쿵.
영욱은 농촌에서 이른 봄에 보리밟기를 하는 기분으로 작업과 이족보행 연습에 전념했다.
연습에 전념할수록 포크의 이족보행 동작은 조금이나마 더 부드러워졌고, 그 성취감으로 박상태와 이희승 교수로 인해서 상했던 영욱의 마음이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기계체조의 기본 동작에는 기계는 물론이고 운전기사의 몸과 마음까지도 치유하고 강하게 만들어주는 놀라운 효용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아직은 아주 미미한 수준의 치유 효과일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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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났군. 게다가 집중력까지도 좋으니 곧 6퍼센트의 경지에 들어설 것 같군."
진중권은 영욱의 이족보행 연습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작업과 구경을 동시에 하다가 마치 넋두리처럼 혼잣말을 뱉었다.
진중권은 영욱이 10퍼센트의 경지에 올라서면 정말로 자신의 딸을 소개해줄 생각이었다. 물론 영욱이 아직까지 옛 여자 친구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혼자서 일방적으로 하는 생각일 뿐이다.
또한 딸 진소희가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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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박상태의 눈알을 씹어 먹었더니 눈이 하나 더 생긴 거야? 대박이다.'
영욱은 뒤로 돌아보지도 않고 자신의 사부 진중권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바로 박상태의 오른쪽 눈알을 파먹은 효과인 듯했다.
물론 사부 진중권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이족보행으로 비틀거리며 정신없이 걷다보면 제자리를 빙빙 돌거나 절벽으로 떨어지기도 일쑤라서 주변을 미리 살피려다가 깨닫게 된 초능력이었다.
최소한 절벽에서 떨어지는 불상사를 모면하기 위해서 사방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다가 우연히 뒤통수 방향으로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는 달리 흐릿하게 보이긴 하지만 마치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처럼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공격이나 작업의 위력을 더하기 위해서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서 내리꽂든지 빠른 회전을 가미하는 수밖에 없다. 포클레인의 힘도 만만치는 않지만 상대는 탱크나 그 이상일 수도 있으니 영욱으로서는 공격력을 강하게 발휘할 수 있는 초식이 꼭 필요했다.
특히 회전을 위해서는 넓은 시야가 필수적인데 뒤통수에서 생겨난 제 3의 눈은 영욱의 시야가 거의 360도가 되도록 만들어주었다. 거듭하는 이야기지만 진짜로 눈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사람의 시야 각도는 상방 50도, 하방 70도, 내방 60도, 외방 100도 정도인데 영욱은 목을 조금만 더 돌리고, 눈알을 전후좌우로 부지런히 움직이기만 하면 대부분의 사각지대가 사라졌다.
'정말 대박이야. 생각보다는 훨씬 더 유용한 기능이군.'
2QB 세상에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에 비하면 겨우 몇 퍼센트에 불과하겠지만 현실 세계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시야가 넓어진 것만 해도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기쁜 마음이 드는 만큼이나 가슴 한 곳이 묵직해졌다. 영욱 자신의 경우처럼 현실 세계에서도 스턴트맨 수준 이상의 초능력을 발휘하는 드림헌터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것임을 이제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욱이 느끼는 그것은 바로 현실 세계 역시 정글의 법칙이 적용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었다.
아무튼 사각지대가 없다는 것은 사방팔방이 거울로 만들어진 방에서 춤을 추는 것과 같다. 그것은 자신의 동작을 모두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것은 수련에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자신의 자세와 움직임의 함수 관계가 실시간으로 이해되었고, 그러한 분석은 이족보행의 동작을 보다 더 정교하게 구사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또한 보다 더 빠른 움직임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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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하늘 위로 새벽이 밝아오자 사부 진중권이 영욱의 수련을 말리고 나섰다.
"그만하고 술이나 한잔 마시러 가자."
"예. 사부님."
역시 너무 열심히 수련한 탓에 지금은 휴식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던 영욱은 얼른 포크의 시동을 끄고 선술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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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받아."
"1교시 수업이 어제 싸웠던 이희승 교수의 과목이라서 곤란해요."
영욱도 오늘따라 유난히 막걸리 생각이 간절했지만 가뜩이나 불편한 관계에 있는 이희승 교수에게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는 않아서 참기로 했다. 하지만 사부 진중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을 권했다.
"한 잔 받으라니까."
"예. 사부님."
"6퍼센트의 경지에 오른 걸 축하한다."
술을 강제로 권하더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기계체조 1식 잔상지수와 2식 이족보행에 입문한 효과는 꽤나 컸다. 물론 영욱은 알지도 못했던 반가운 소식이었다.
"예? 좀 더 찌릿한 느낌이 들더니 그게 바로 1퍼센트가 올랐다는 표시였군요. 그런데 사부님은 그걸 어떻게 아셨죠?"
"바둑 실력처럼 척 보면 그냥 알 수 있는 거야. 물론 너도 10퍼센트의 경지만 되면 네 스스로 알 수 있을 거야."
"수준이 어느 정도 되면 성취를 그냥 알게 되는 것인가요?"
"당연하지. 자신의 경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실력이니까."
지피지기야말로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훌륭한 병법이다. 자신의 경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한 재주인 셈이다.
영욱은 사부 진중권이 따라준 막걸리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이제 술 냄새 정도는 어느 정도 지우거나 사람들의 후각을 속일 수도 있으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전에는 앓고 있는 아토피 때문에라도 술 마시는 것을 꺼려했지만 이젠 정신력 강화를 위해서라도 일부러 더 가려움을 유발한 다음 참을 필요가 있는 상황이니까 진중권이 따라주는 술을 사양하지 않고 다 마셔버렸다.
술을 마시면 아무래도 소양감搔痒感이 더 커진다. 하지만 박상태의 피와 살을 뜯어먹고 나서 지독한 악취를 가진 분변과 땀을 배출한 후로는 아토피 피부염 증상도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아주 특이한 섭식攝食으로 인해서 영욱의 내장이 더욱더 튼튼해진 듯했다.
"오늘 하루 땡땡이 칠 거야?"
"아뇨. 공부하는 학생이 수업을 빠질 수는 없죠."
"술을 마시고 수업을 듣다가 또 감당치도 못할 리포트 세례를 받는 거 아냐?"
영욱이 권하는 술을 남김없이 받아마시자 이번에는 오히려 진중권이 수업에 대한 걱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젠 대놓고 술 냄새를 피울 정도로 하수는 아니에요."
"그래도 이젠 그만 마셔."
"어차피 술값은 제가 낼 건데 뭘 그러세요?"
"아무래도 너 오늘 좀 과해서 그래."
짧은 시간 동안 영욱이 마신 막걸리의 양은 사부 진중권이 말릴 정도로 많았다. 벌써 혀가 꼬이고 눈이 풀렸다. 심지어 사부의 만류에도 대꾸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영욱으로서는 마음껏 취해버리고 싶은 날이기도 했다.
"이제 6퍼센트의 경지에 올랐으니까 조금은 자축해도 되지 않아요? 기분이 꽤나 울적했는데 술이 들어가니까 조금 낫네요. 하하!"
언제 1퍼센트가 오르는 지 늘 노심초사했는데 10월이 되어서야 겨우 그것이 가능해졌다. 당분간은 한 달만 열심히 훈련하면 1퍼센트의 경지를 올릴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상태의 눈알을 삼킨 것과 새로운 초식 두 가지를 배운 것 등을 고려한다면 그게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경지가 오르는 기간이 점점 더 길어질 게 분명했다. 아무튼 오늘만큼은 자축해도 좋은 날이었다.
"평생 동안 감옥에서 썩을 각오로 싸웠는데 교수라는 작자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나 하고 심지어 협박까지 했다니 그런 개 같은 놈의 수업에 들어가기 싫을 만도 하지. 좋아, 마셔!"
"하루 정도 빠진다고 설마 F를 주지는 않겠죠. 저 오늘 하루 통째로 쉴래요."
"낮 시간이야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야간작업에 늦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
진중권이 다시 술을 권하자 영욱의 생각은 또다시 달라졌다. 멍석을 깔아주면 하던 지랄도 멈춘다는 말이 영욱에게도 그대로 통했다.
"그럼 그만 마시고 수업이나 들어갈래요."
"마음대로 해."
물론 영욱으로서는 엉망으로 취하면 도저히 박상태를 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다시 냉정을 되찾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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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욱! 또 술을 마시고 내 수업에 들어오다니 제 정신이야?"
영욱의 기대와는 달리 이희승 교수는 영욱의 실드와 다른 냄새로 착각하도록 건 속임수 환각 초능력을 뚫고 간단하게 음주 사실을 알아차렸다.
딸꾹!
"무슨 술 냄새가 난다고 그러세요? 야, 너희들! 지금 내 몸에서 술 냄새가 나?"
하지만 술에 취한 영욱은 그야말로 배를 째기로 했다. 이희승 교수가 자신의 음주 사실을 학생들에게 입증할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 교수와 영욱 사이의 분위기가 갑자기 험악해지자 학생들은 일언반구도 꺼내지 못하고 두 사람의 눈치를 보기만 했다.
"이 새끼 좀 봐라! 내가 너의 그 유치한 수작에 놀아날 것 같아? 그렇게 생각했다면 나를 너무 띄엄띄엄하게 본 거야. 너 지금 실수하는 거야."
"교수님의 능력이 설마 이 정도인 줄은 몰랐군요. 하지만 다른 친구들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으니까 이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닌가요? 뭐가 문제죠?"
다른 친구들은 영욱이 풍기는 진한 술 냄새를 맡지 못했다. 하지만 정색하는 이 교수에게 더 이상 우기는 것이 무색해진 영욱은 음주 상태로 수업을 받는 게 왜 문제인지를 따지고 들었다.
음주 운전이야 남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니까 당연히 위법 사항이지만 음주 수업은 그렇지도 않다는 게 영욱의 주장인 셈이다.
"교수인 나에게는 피해가 오니까 하는 말이지."
"그래서 냄새가 나지 않도록 강단과는 거리가 떨어진 뒷자리에 일부러 앉았는데 기어코 찾아오신 분은 바로 교수님이십니다."
"별 소리를 다 듣겠군. 교수가 강의 도중에 강의실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없습니다. 하지만 일부러 코를 들이대고는 얼굴을 찡그릴 필요까지 있을까요?"
"그건 교수인 내 마음이야. 그러니까 당장 내 강의실에서 나가."
이 교수와 영욱의 언쟁이 점점 더 격렬해지더니 결국 추방 명령까지 떨어지게 되자 강의를 듣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던 학생들은 더욱더 당혹스러워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내용은 영욱이 지금 술을 마신 상태지만 친구들을 속인 것이라고 했는데 그들에게는 술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혼란스럽지만 더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영욱이 자신의 음주 사실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나가 드리죠. 하지만 이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괘씸한 놈 같으니……. 감히 교수의 지시를 어겨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무튼 그 문제에 대해서도 더 이상 드릴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 강의실에서도 나가주고, 교수님의 시야에서도 영원히 사라져드리죠."
"잠깐! 지금 나에게 술주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물론 그러지 않는다고 해도 F학점을 받는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겠지만……."
이 교수는 영욱이 과하게 마신 술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사실 이 교수의 짐작대로 영욱은 술의 도움을 받아서 평소라면 내리지 못할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영욱은 이제 학교를 그만 다니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이런 교수에게서 더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떠나더라도 곱게 떠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술주정이라뇨? 말씀이 좀 지나치시군요."
"이젠 나하고 싸우겠다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후각이 아주, 아주, 아주 예민하신 교수님 혼자서만 겨우 느낄 수 있을 정도로만 딱 한 잔 마셨는데 그런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시다니 저로서는 상당히 많이 억울하군요."
"막걸리 두 말은 족히 마신 것 같은데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학생들의 표정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것 같은데 지금 제가 술에 취해서 착각하는 건가요?"
"자네도 지금 상태 군의 흉내를 내려는 건가?"
학교를 때려치우기로 결심한 영욱은 이 교수의 말대로 박상태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 교수를 엿 먹이려는 것이었다.
음주측정기를 불거나 피를 뽑아서 혈중 알코올 농도를 측정하게 되면 이 교수의 말이 옳다는 게 알려지겠지만 그런 절차를 밝아야할 의무는 없으니 진실은 그냥 묻힐 공산이 컸다.
학생들이 보기에는 후각이 너무나도 민감한 이희승 교수가 딱 한 잔밖에 마시지 않은 영욱을 핍박해서 자퇴로 몰고 간 걸로 볼 가능성이 높았다.
"그 몬스터와 저를 동급으로 취급하시다니 정말로 불쾌하군요. 아무튼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강의실에서 ㅤㅉㅗㅈ아내니 더 이상 학교에 다니고 싶지는 않군요. 물론 자퇴서 제출에 앞서서 학과장님을 뵈러 가야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협박한다고 해서 내가 굴할 것 같은가?"
"협박하려는 게 아닙니다. 제가 자퇴하게 되면 학회장의 업무도 내려놓아야 하니까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보고라도 드리겠다는 겁니다."
"술이 많이 취한 게 확실하군. 겨우 이 정도의 일로 자퇴까지 거론하는 걸 보니까 말이야."
이희승 교수는 강의실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을 느끼고는 난색을 표했다.
자신의 예상보다는 영욱의 능력이 훨씬 더 뛰어나고 다양해서 오히려 자신이 궁지에 몰릴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과장이 학회장인 영욱을 아주 대견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영욱이 학과장을 찾아가게 되면 자신이 곤란해진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희승 교수는 학자로서도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정치적으로도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그는 나노캡슐의 성공적인 활용과 높은 보직補職 교수로의 꿈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현직 학과장과는 라이벌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얼마 전에 발생했던 복학생끼리의 폭행 사건이 원만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형사적인 처벌 수순을 밟게 되면 당연히 현직 학과장이 그 책임을 지고 사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자신이 꿰어 차려고 했는데 영욱의 그럴 듯한 일처리가 그런 기회를 날려버렸다. 그래서 뻣뻣하게 구는 영욱을 길들일 겸 자신의 출세가도를 막은 것에 대한 분풀이도 함께 하려고 다소 무리한 시비를 걸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사부 진중권의 설득에 대학무용론에 대해서 어느 정도 물들어있던 영욱을 오히려 자극하고 말았다.
물론 영욱도 그러한 이 교수의 속내를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기에 자퇴할 때는 하더라도 그 전에 학과장을 물고 늘어지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신력을 소진하게 되면 나중에 곤란해질 수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저도 교수님 한 분 때문에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자퇴까지 고려하게 되어서 정말 유감입니다."
"정말 상종하지 못할 인간이었군. 감히 나를 파렴치한으로 몰아붙이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만드는군."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면 어쩔 겁니까? 이미 자퇴를 결심한 학생에게 F학점을 두 개나 주겠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니면 오늘밤 제 꿈에 찾아오시기라도 하실 겁니까? 아니, 낮에 찾아오겠군요."
흔히 말하는, 계급장을 떼고 한판 붙자는 소리였다. 물론 영욱은 이희승 교수가 박상태보다도 훨씬 더 강한 드림헌터라는 최악의 상황까지도 고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2QB 세상이라면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열 대를 맞고 한 대를 패더라도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흥! 2QB 세상에서라면 자신 있다는 표정인데 못 찾아갈 것도 없겠지."
"기다리겠습니다. 꼭 오십시오."
"좋아. 용기가 있다면 부디 나의 악수를 거절하지 말게."
"그럴 리가 있나요? 악수는 당연히 해야겠죠. 그래야 저를 찾아오실 수 있을 테니까……."
다른 학생들이 보거나 말거나 둘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악수를 나누었다.
드림헌터끼리 결투 신청과 그 결투를 받아들이는 의식이 바로 악수였다. 교수와 학생이 결투를 하려는 상황이지만 대부분의 학생들도 2QB 세상을 알고 있으니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나중에 보도록 하세."
"12시 20분이 오늘의 제 취침 시간이니까 참고하십시오. 그럼 이만."
"잠깐만 기다려! 내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더 하실 말씀이 있으면 나중에 2QB 세상에서 하기로 하죠."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녀석이군."
"누가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가 좀 어렵군요."
"마음대로 해. 나도 더 이상 너에게 관심 갖지는 않을 테니까……."
이 교수로서는 영욱이 자신과 2QB 세상에서 결투를 하기 전에 학과장을 찾아가는 걸 말리고 싶었겠지만 영욱은 그럴 의향이 전혀 없었다.
일단 싸우기로 한 이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상대의 정신력을 소모시키는 것이 자신의 승산을 조금이라도 높이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가 강적이라면 그 길만이 유일한 승리의 수순인 셈이다.
*사퍼모어와의 결투
똑똑.
영욱은 노크 후 학과장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학과장이 아주 반갑게 영욱을 맞았다.
"아니, 자네가 이 시간에 웬일인가? 수업 중이 아닌가?"
"의논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사실은……."
영욱은 단도직입적으로 이희승 교수와의 문제를 학과장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퇴에 대한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영욱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학과장의 표정이 가을 단풍처럼 여러 가지 색깔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