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이 나노캡슐을 이용한 연구는 이희승 교수의 주요한 연구 프로젝트다.
리포트를 쓰기 위해서 도서관과 관련 논문을 뒤지던 영욱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대학무용론을 부르짖으며 영욱의 자퇴를 종용하는 사부 진중권에게 반쯤은 농담 삼아서 하는 소리였다.
연구답지 않은 연구 이야기로 진중권의 억지 주장을 분쇄한 영욱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대학을 그만두기는 아깝기 때문이다.
영욱의 연구는 허점투성이지만 이희승 교수는 보다 더 정밀한 나노 측정 장비를 이 나노캡슐 속에 넣어서 인체 내에 이식한 다음 진단과 치료에 실시간으로 개입하는 것을 목표로 연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욱이 생각해낸 방법은 그나마 간단한 만큼 당장이라도 실현이 가능할 것 같았다. 문제는 염동력이라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몸의 내부를 전자현미경처럼 예민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하며, 고가의 나노캡슐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어마어마한 전제가 따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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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학회장들이 해야 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 그러니까 학회장들이 근로 장학금의 형식으로 전액이나 반액 장학금을 받는 것이다.
전체 엠티나 축제 등의 학과 행사 준비는 물론이고, 강의시간 변경 등의 사소한 문제까지도 모두 학회장의 손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가장 고역苦役은 학과 구성원들 간의 분쟁을 중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성인의 길에 첫발을 내디딘 대학생이지만 좁은 입시 관문을 통과하느라고 바빠서 독서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독서량의 부족은 곧 시야의 좁음을 가져와서 편협한 성격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아직은 젊은 혈기를 가진 젊은이들이다 보니 상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격한 언쟁은 물론이고 주먹다짐까지 번지는 사태도 종종 발생했다.
무식한 놈이 오히려 힘이 세다는 말처럼 싸움이 벌어지면 어김없이 코피가 터지고 심하면 뼈가 부러지거나 큰 상처를 입기도 한다.
동급생끼리는 물론이고 선후배 간에도 그런 불미스러운 사태가 종종 벌어지기도 했다. 툭하면 발생하는 이러한 분쟁을 공개적으로 해결하거나 공권력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할 수는 없으니 주로 학회장들이 잘 중재해서 조용히 해결해야만 했다.
그게 바로 대학에서 학회장이 존재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대학교 측에서도 그런 불미스러운 일들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고, 학생들 역시 그러한 생각을 기본적으로는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이 꼭 그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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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바쁜 시간을 쪼개서 선배로부터 폭행을 당한 예비역 동급생을 설득하고 있었다. 부학회장 은영이 처리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욱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원통하겠지만 이쯤해서 참아라."
"싫어. 경찰에 신고할 거야."
"박 선배가 사과하잖아. 그리고 치료비도 전액 부담한다고 했으니까 진욱이 네가 좀 참아라. 응?"
"그게 사과와 치료비를 대는 걸로 해결될 일이야? 선배라는 작자가 술에 만취해서 후배의 팔을 부러뜨린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조폭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설마 박 선배가 부러뜨리려고 했겠어? 어쩌다 보니까 부러진 거겠지."
영욱은 벌써 몇 번째 했던 이야기를 또 하면서 설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팔이 부러졌으니 최소한 6주 상해 진단이 나온다. 그러니 경찰에 신고하면 학교는 물론이고 전국이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럼 내 팔이 수수깡으로 만들어졌단 말이야?"
"그러니까 서로 운이 나빴다는 거잖아. 물론 나도 네 마음처럼 이런 폭력적인 일은 사법처리를 하는 게 옳다고 봐.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인터넷상에서도 폭력 대학교라고 벌떼처럼 씹어댈 텐데 우리 학과와 대학에 오려고 하는 후배들이 있겠어?"
영욱도 자신의 처리 방법이 꼭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실 박 선배는 자신의 힘을 믿고 툭하면 폭력을 행사하기로 유명한 개망나니였다. 언젠가 큰 사고를 칠 것이라고 염려하고 있었는데 결국은 복학생 모임에서 후배 복학생의 팔을 꺾어놓고야 만 것이다.
학교의 명예 실추를 거론하자 진욱도 흥분을 어느 정도 가라앉혔다. 하지만 영욱의 중재 내용이 어떤지에 따라서 형사 고발 여부를 결정할 태세였다.
"네가 재발 방지를 약속할 수 있겠어?"
"네가 원한다면 박 선배의 팔을 부러뜨려 놓을게. 두 번 다시 폭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말이야."
"그럼 너도 구속을 면치 못할 텐데 정말이야?"
영욱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뜨끔했다. 예전 같으면 남의 팔을 부러뜨린다는 말을 뱉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2QB 세상을 경험한 후로는 현실 세계에서도 많이 튼튼해졌기에 가능한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그러한 느낌을 진욱도 느꼈는지 다시 한 번 묻게 만들었다. 자신이 원한다면 진짜로 부러뜨리고도 남을 거라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하하! 내가 무슨 힘이 있냐? 마음이야 그러고 싶다는 거지. 대신에 교수님들과 의논해서 그 인간이 올해에는 졸업하지 못하도록 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수는 있어. 그 정도면 되겠지?"
"흥! 그 정도로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아. 학회장인 너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법대로 해야겠어."
사실 진욱으로서는 부러진 팔이 문제가 아니라 무너진 자존심이 문제였다.
피해자인 진욱도 나름 힘 좀 쓴다고 자부하던 사람인데 많은 지인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박 선배의 우악스러운 힘에 밀려서 개망신을 당했으니 이렇게 합의가 잘 되지 않는 것이다.
"좋아. 그렇다면 그 인간의 머리를 빡빡 깎게 만들면 되겠어?"
"그게 어떻게 제재制裁라는 거지? 일부러 깎는 사람들도 있는데다가, 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니면 아무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면 머리를 빡빡 깍은 채로 학교 정문 옆에서 일주일 동안 꿇어앉아서 자숙自肅하게 만들 테니까 제발 좀 용서해줘라."
"……."
영욱은 박 선배가 점점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분노를 담은 어투로 기상천외한 방법을 제시했다. 금쪽같은 자신의 시간을 소비하게 만들었으니 후배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하게 만들고 싶었다. 진욱도 영욱의 제의에 깜짝 놀랐는지 말을 잃고 말았다.
"졸업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폭력 사건으로 퇴학이라도 당하면 그 인간이 대체 뭐가 되겠냐? 바로 그 길로 바로 깡패 놀음이나 하러 가지 않겠어? 불쌍한 인간 구제 차원에서라도 살려주자. 응?"
"좋아. 네가 말한 그 정도라면 다시는 주먹을 내세우지는 못할 테니까 용서해주지. 다만 그 일주일이란 기간을 꼭 채워야 해."
"좋아. 다음 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침 아홉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그러고 있으면 되겠지?"
"좋아."
피해자 김진욱도 영욱이 제시한 내용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선선히 중재를 받아들였다. 박 선배가 한 짓은 괘씸하지만 굳이 전과자로 만들 생각까지는 없었으니까 못이기는 척하면서 합의에 응한 것이다.
또한 빡빡 깎은 채로 일주일이나 무릎을 꿇고 반성하는 것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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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이 중재 조건을 이야기하자 가해자 박형욱은 흥분해서 날뛰기 시작했다.
"미쳤어? 그 짓을 어떻게 해? 쪽팔려서 난 못해."
"그럼 퇴학당하고 감방에나 가세요. 지금 박 선배가 쪽 팔리는 걸 따질 때예요?"
"학회장이 하는 일이 뭐냐? 그러니까 네가 나서서 조건을 좀 더 부드럽게 만들어 봐."
"혹시 진욱이 아버님께서 현직 부장 검사라는 거 알고서 하는 말입니까? 만일 시간을 끌다가 그 분의 귀에라도 들어가면 이마저도 불가능하니까 알아서 하세요."
영욱은 박형욱의 주둥이를 찢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애써 눌러가며 참아야 했다. 진욱의 아버지가 현직 검사라는 말은 당연히 새빨간 거짓말이다. 하지만 진위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박형욱은 금방 사색이 되었다. 영욱의 말이 사실이라면 집행유예 수준이 아니라 실형을 살게 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지, 요즘 세상에 머리를 빡빡 깎고 학교 정문 앞에서 무릎 꿇고 반성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럼 옛날이라면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건가요?"
"나도 몰라. 우리 아버지가 대학 다니던 시절이라면 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러기에 군대에서도 이미 자취를 감춘 폭력을 대학 후배에게 왜 행사했어요? 옛날 죄를 저질렀으니 벌도 복고풍으로 받는다고 생각하세요."
"설마 군대에서 폭력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있던 곳에서 그랬다는 것은 아니겠지?"
"선배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요.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오면 더 이상 중재는 없어요."
옛날보다는 많이 줄었다는 말이지 사람 사는 곳에 폭력이 없을 리 없다. 그리고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얼차려나 언어폭력도 일종의 폭력이니까 박형욱의 말이 꼭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의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기에 영욱은 화를 버럭 내고 말았다. 박형욱은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에게 흥정할 자격은 이미 없다.
"아, 아냐. 하면 되잖아."
"머리를 면도기로 빡빡 깎고 깊이 반성한다는 내용의 대자보를 크게 써서 붙이세요. 그리고 그 앞에 꿇어앉아서 진심으로 뉘우치세요. 아셨죠?"
"아, 알았어."
화가 난 영욱이 육식동물의 냄새를 물씬 피우고 나서야 박 선배는 어쩔 수 없이 중재를 받아들였다. 대자보大字報 게시는 중재 조건이 아니었지만 영욱이 열 받아서 임의로 추가한 내용이다.
요즘처럼 대학 들어가기가 힘든 시기에 폭력으로 퇴학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요즘의 강원대는 인서울 대학에 포함될 정도로 학교의 위상이 높아졌으니 더더욱 쫓겨날 수는 없는 일이다.
해병대 출신의 박형욱은 일주일이라면 원산폭격을 한 상태로도 견딜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머리를 빡빡 깎고 꿇어앉아 있는 것이 육체적으로 불가능할 리 없다 여기고 영욱의 중재를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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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신소재공학과 4학년 박형욱은 지난 25일 복학생 모임에서 같은 복학생 후배의 팔을 부러뜨리는 참담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취중에 벌어진 실수라고는 하지만 깊이 반성하는 뜻으로 일주일 동안 공개적으로 근신하는 모습을 여러 학우들 앞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피해를 당한 후배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 방지를 약속드리겠습니다. 거듭 사죄드리며 앞으로는 지성인답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뭐야?"
"세상에!"
다음날 강원대학교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다. 등교하던 학생들이 머리를 빡빡 깎은 채로 교문 앞에서 꿇어앉아 있는 복학생 박형욱과 그가 쓴 자필 대자보를 읽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일의 자세한 내막을 알지는 못하지만 험악한 인상의 복학생이 머리를 파르라니 깎고 비장한 표정으로 꿇어앉아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니 굳이 법대로 하지 않아도 세상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저 새끼, 결국 저리 될 줄 알았어."
"퇴학을 당해도 싼 놈인데 너무 많이 봐주는 거 아냐?"
"그래도 저 정도면 충분한 죗값을 치르는 거라고 볼 수 있지. 저 새낀 당해도 싸."
물론 박형욱을 알고 있던 학생들은 결국 임자를 만났음을 깨닫고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
"저 새끼, 듣겠다. 조용히 말해."
"들으면 어쩔 건데?"
박형욱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무릎을 펴는 순간이 바로 영욱과의 계약 위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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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학과장이 자신의 사무실로 영욱을 불렀다.
"영욱군, 대자보가 바로 자네의 작품인가?"
"예. 학과장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낸 거지?"
"폭력이라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긴 했지만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원칙적으로는 학교 내부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가 억울하다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가해자도 뼈가 부러진 수준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영욱은 학과장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나름대로는 좋은 의도로 시도한 일이지만 파급 효과가 생각보다 커진 이상 오히려 인터넷이나 언론에 노출되는 등의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학과장의 표정은 아주 밝았다.
"요즘은 사라졌지만 옛날 대학가에서는 가끔씩 볼 수 있던 풍경이었지. 내가 아는 친구 하나가 술을 마시다가 옆 테이블의 취객과 싸움이 붙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고등학교 직속 선배였던 거지."
"그렇다면 그 분도 머리를 빡빡 밀었습니까?"
"당연하지. 잘 드는 면도날로 마치 율 브리너처럼 밀었지. 대학에서 쫓겨나고 고등학교 동문회에서 제명되지 않으려면 저도 별 수 있어? 그런데 그게 오히려 인연이 되어서 평생 동안 잘 지내는 선후배 사이가 되었지. 그처럼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법이지."
"사실 저도 아는 분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중재한 겁니다."
영욱은 자신에게 애견 사료를 보내주곤 하는 이모부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음을 고백했다.
그것은 이모부가 자신의 아버지와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나누던 이야기였지만 어린 영욱도 옆에서 들었고, 그게 무의식중에 남아 있다가 필요한 순간에 그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는 거야 누구나가 다 알 수 있는 일이지. 하지만 그런 빅딜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게 정말 대단한 거야. 정말 수고 많았어."
"아닙니다. 당연히 학회장인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사소한 일은 부학회장에게 다 미뤄놓더니 완전히 엉터리 학회장은 아니었어. 앞으로도 수고해 주게."
"예. 학과장님."
"나가봐."
"예."
학과장은 영욱의 등을 두들겨주며 따뜻한 시선으로 배웅했다. 앞으로 학장과 총장의 자리에도 도전할 마음이 있는 그로서는 자칫 곤란할 뻔했던 자신을 구해준 구세주니까 마냥 예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학회장의 평소 직무에 태만한 영욱에게 일침을 놓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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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너희들은?"
그런데 학과장뿐만이 아니라 강의실에서도 또 다른 움직임이 있었다.
악취를 풍긴 후로는 잠잠한 편이지만 그동안 영욱을 집단적으로 따돌리던 같은 학년의 학과 학우들과 복학생 동기들이 한꺼번에 영욱에게로 몰려든 것이다. 그리고 앞을 다투어서 입을 열었다.
"그동안 우리가 형에게 한 짓에 대해서 사과하려고 해요."
"정말 미안해요."
"솔직히 이번 삭발 퍼포먼스를 보고서 깜짝 놀랐어요."
"맞아요. 이렇게 멋진 학회장을 돕지는 못할망정 따돌리려고 했으니 정말 미안해요."
"게다가 우리는 같은 복학생 동기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앞장섰으니 정말 할 말이 없어."
"미안해."
다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자신들이 지은 죄를 고해성사라도 하는 것처럼 고백하고 사과했다. 영욱은 그동안 동기생과 후배들에게 서운했던 마음이 봄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냐.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지. 알고 보면 나 때문에 당한 협박이니까……."
"아니에요. 그 놈이 나쁜 놈이지, 형이 문제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겨우 깨닫게 되었어요."
"아무튼 이해해 줘서 고맙다."
"우리를 용서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그 놈은 내가 반드시 처리할 테니까 혹시 꿈속 세상에서 나타나더라도 기죽지 말고 버텨. 알겠지?"
"그놈과 싸워봤으니까 오거보다도 더 커질 수도 있고 더 강력한 건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양심선언을 하긴 했지만 솔직히 견뎌낼 자신은 없어."
같은 복학생 친구 하나가 몬스터인 박상태를 견뎌낼 용기는 도저히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것마저도 용기를 많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알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너희들의 의지야. 끝까지 굴하지 않으면 고통을 줄 수는 있어도 잡아먹지는 못해."
"좋아. 한 번 버텨볼게."
"너희들에게서 빼앗은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더 괴롭히게 되니까 약한 소리 하지 말고 무조건 버텨. 알겠지?"
"응. 버텨볼게."
영욱은 과 학우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거나 용기를 내라는 의미에서 등을 두들겨 주었다.
그런데 악수를 하거나 신체 접촉을 하고 나자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2QB 세상에서 그들의 집 혹은 영역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육식동물의 냄새를 풍기게 된 이후 접촉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풍기는 초식동물 고유의 냄새를 맡을 수도 있게 된 것이다.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이제 안개 따위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까 박상태가 군대 시절 몸으로 부대꼈던 선임이나 후임을 대상으로 헌팅을 시도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녀석은 신소재공학과의 학생들과도 접촉이 있는 놈이라는 소리기도 했다. 심지어 은영과도 신체적인 접촉이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만 알아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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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센터까지 동원해도 박상태를 찾을 수가 없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된 것이거나 얼굴과 신분을 바꾼 것일 가능성이 높다.
신체적인 접촉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과 함께 그런 가능성들까지도 함께 고려하니 비로소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그렇다면 김상태 바로 그 새끼였군. 이 고문관 새끼가 얼굴을 성형하고 성까지 바꿨을 줄이야……."
"형,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학과의 신입생 김상태가 바로 그 몬스터야."
"사실이에요?"
"가서 확인해 보면 알겠지. 지금 그 새끼 어디 있어?"
사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녀석을 보았을 때 분명히 처음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영욱을 슬슬 피하는 것이 수상했지만 끝까지 추궁할 이유가 없어서 그냥 넘어갔었다. 바로 눈앞에 두고도 찾지 못했으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야 1학년들이 수업 받고 있는 곳에 있겠죠. 하지만……."
"가자. 현실에서는 그리 강하지 못할 테니까 모두 함께 몰려가서 반쯤 죽여 버리자."
"하지만 학교 폭력을 앞장서서 막아낸 형이 폭력을 행사하려고요?"
영욱이 학우들을 선동했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서기만 했다. 그만큼이나 박상태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 새끼는 같은 학우가 아니라 드림헌터야. 그것도 가까운 친구들이나 선후배를 골라서 노리는 악질 중의 악질이란 말이다."
"미안하지만 저는 자신 없어요."
"저도 자신 없어요. 그러다가 꿈에 나타나서 더 잔인하게 보복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너희들도 그래?"
"예. 죄송해요."
"창식이 너도?"
"미안해."
"기태 너는 어때?"
"나도 자신 없어. 미안해."
"좋아, 알았어. 나 혼자 갈 테니까 맡겨두라고."
"형. 미안해요."
마흔 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두 고개를 내젓자 영욱은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혼자서 처리하기로 했다.
효과적인 공격을 위해서는 뭔가 치명적인 무기를 들고 숨어 있다가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끌게 되면 박상태가 자신의 정체가 노출된 것을 알아차릴 가능성이 높으니 바로 결행하기로 했다.
증인 확보 및 병력의 보충이라는 의미로 여러 명의 피해자들을 함께 데리고 가려던 시도는 비록 실패했지만 같이 수업을 듣는 신입생들과 같이 있을 테니까 싸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녀석의 정체가 드러날 것이라고 여겼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1학년 중에도 박상태에게 당한 학생들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여겼다. 녀석이 200명 이상이라는 희생자의 숫자를 채우려면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공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드러난 정체
학회장인 영욱은 학과사무실에 가서 물어볼 것도 없이 1학년들의 대부분이 교양 필수 과목인 '소재열역학 개요'라는 수업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의실의 위치도 잘 알고 있었다.
쾅.
영욱은 강의를 끝난 교수가 앞문을 통해서 나가자마자 213호 강의실의 뒷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깜짝 놀라서 자신을 쳐다보는 후배들 중에서 박상태를 찾기 시작했다.
"형, 왜 그래요?"
"박상태 어디 있어?"
"상태라면 혹시 김상태를 말하는 건가요?"
"그래, 김상태."
"저기 구석에서 자고 있는데 무슨 일이죠?"
"넌 비켜!"
녀석은 고교 시절 일진처럼 창가에 있는 뒷자리에서 엎어져 자고 있었다. 밤에 숙면을 취하지 못할 테니까 그 역시 낮잠을 즐기는 듯했다. 어쩌면 영욱 자신을 찾으러 나선 길일지도 모른다.
영욱은 빠르게 달려가서 들고 갔던 각목으로 김상태로 개명한 박상태를 패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는 실드를 만들어서 방어할 것이라 믿고서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위력으로 각목을 휘둘렀다.
퍽. 퍽.
"뭐야? 왜 때려?"
구석진 자리에서 졸고 있던 박상태는 난데없는 몽둥이세례에 놀라서 기함을 했다.
"몰라서 물어?"
"학회장 영욱 형이었군요."
그러나 곧 영욱의 공격임을 알아차리고 비릿하고 웃었다. 그리고 대항하려다 말고 영욱이 휘두르는 각목에 대놓고 얻어맞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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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대체 왜 그래요? 이러다가 상태가 죽겠어요."
잠깐 동안 박상태가 초주검이 되자 후배들이 달려들어서 박상태로부터 영욱을 떼놓았다.
"당연히 죽일 거니까 저리 비켜! 저 새끼가 바로 꿈에 나타난 그 괴물이야. 다들 몰랐어?"
"그럴 리가 없어요. 얼굴이 전혀 다른데 어떻게 그 괴물이라는 거죠?"
영욱의 짐작대로 1학년들 중에도 피해자는 많이 있었다. 그래서 영욱이 하는 말을 대부분이 다 알아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박상태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했다.
"꿈속 세상에서는 얼굴 따윈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 게다가 저 녀석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드림헌터니까 몸을 거인으로 바꾸든지 심지어 티라노사우루스로 바꿀 수도 있지. 그러니까 내 말을 믿어."
"그런데 형. 문제가 있어요."
"뭐가 문제야?"
"그걸 어떻게 증명할 거죠?"
"뭘 증명해?"
"상태가 우리를 괴롭힌 그 드림헌터라는 사실 말이에요."
박상태가 그 괴물이라고 하더라도 현실 세계에서 그것을 증명할 방법은 전혀 없다. 또한 적용할 수 있는 법률 또한 없다. 1학년 과대표를 맡고 있는 김지성은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증명이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증명 따위는 필요 없어. 내가 저 녀석을 죽여 버리면 저 녀석에게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이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다른 드림헌터들도 있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나약한 마음을 먹으니까 저런 하이에나 같은 녀석들이 너희들을 노리는 거야."
"막상 당해보니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이더라고요. 아무튼 문제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현실 세계에서 단죄할 수 있다는 것이죠."
"사실 그 문제는 상태와 꿈속 세상에서 해결해야 하는 게 정답인 것 같아요."
"맞아요. 현실과 2QB가 전혀 별개의 세상이니까요."
다들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비록 힘과 용기가 부족해서 당하기는 했지만 바보들은 아니었다. 다들 <비몽사몽>이라도 읽어본 것인지 사태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욱의 견해는 그들과 달랐다.
"전혀 별개의 세상은 아냐. 저 녀석은 현실 세계에서의 접촉을 통해서 꿈속 세상에서 사냥감의 위치를 파악하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거지."
"<비몽사몽> 내용 중에서 괴물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이 바로 그 뜻이군요."
"그래. 나도 오늘에야 알았어. 경험해 보지 않으면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모르는 게 당연할 지도 모르겠지만……."
영욱은 이제 자신도 완연히 드림헌터 혹은 육식동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각목으로만 팬 것이 아니라 발길질과 주먹질도 해댔으니 이제는 자신도 박상태의 위치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박상태를 처리하기로 했다. 그리 되면 사람을 죽인 죄로 감옥에 가게 되겠지만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꿈속 세상에서 그를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까 자신뿐 아니라 많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이 총대를 메기로 했다. 물론 달리 믿고 있는 구석이 어느 정도는 있어서였다.
"비켜!"
영욱은 괴력을 발휘해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후배들을 힘껏 뿌리치고는 사납게 박상태에게로 달려들었다. 후배들로서는 작정하고 움직이는 영욱의 힘을 막아내지 못했다.
퍽. 퍽.
사자처럼 사납게 박상태를 덮친 영욱은 들고 있던 각목으로 녀석의 머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왕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으니까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예전이라면 그런 생각을 할 리 없겠지만 박상태의 피와 살이 영욱의 성격을 사납게 바꾸어 놓은 지 오래였다.
고된 기계체조의 수련은 비단 포클레인의 움직임만 현란하고 강하고 빠르게 만들어준 것은 아니었다. 영욱은 자신의 몸이 예전의 몸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살기殺氣를 품은 각목은 박상태의 머리를 쪼개버릴 정도로 위력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붕!
절체절명의 순간 박상태는 자신의 머리를 빼내고 대신 팔로 각목을 막아냈다.
빠각.
하지만 머리를 대신해서 팔이 부러지고 말았다. 실드를 치거나 제대로 힘을 주면 부러질 리 없겠지만 영욱을 궁지로 몰기 위해서 팔을 주고 상대의 목숨을 취한다는 사소취대의 전술을 사용한 듯했다.
"아악! 사람 살려!"
일단 팔이 부러진 박상태는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영욱을 밀치고는 거리를 벌렸다. 그 놀라운 힘은 영욱보다 약해서 맞아준 게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가볍게 창문을 뛰어넘어서 잔디밭으로 나간 다음 구경꾼과 동급생들의 뒤에 숨어서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는 그의 표정에는 뼈가 부러진 고통보다는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비켜!"
하지만 영욱은 아예 끝장을 보기로 했다. 상태의 팔이 부러졌으니 지금 이대로 끝내면 폭행 혐의로 구속되거나 덤으로 제적除籍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럴 바에야 감옥에 가더라도 녀석을 확실하게 처리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물론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녀석은 아니겠지만…….
영욱은 막아서는 후배들을 다시 한 번 강력한 힘으로 뿌리치면서 인의장막 뒤에서 호들갑을 떨고 있는 박상태를 향해서 빠르게 달려들었다.
"팔이 부러진 것처럼 연기하려면 얼마든지 해. 확실하게 죽여줄 테니까."
"박영욱, 너 완전히 미쳤구나."
영욱이 계속해서 자신을 공격하자 결국은 박상태도 화를 내고 말았다.
"선배에게 반말지거리를 하는 네 놈이 미쳤지. 게다가 넌 나보다 나이도 적잖아."
"또 농담을 하자는 건가? 아무튼 하찮은 사냥감 따위에게 존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2QB에서는 괴물인 드림헌터가 현실에서도 그만큼 강한지 어디 구경 좀 하자."
영욱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모든 드림헌터들이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의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부 진중권을 통해서 이미 확인했다.
그러니까 팔이 부러진 정도는 할리우드 액션처럼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영욱으로서는 부러진 팔을 다시 붙이는 것이 아직은 불가능하다.
"더 이상 당해줄 수야 없지."
박상태는 부러져서 덜렁거리는 오른팔을 왼손으로 맞추더니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잠깐 사이에 치유 초능력으로 간단하게 고쳐버린 것이다. 더 이상 정체를 숨기려고 들다가는 정말로 맞아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받아들인 듯했다.
"부러진 팔도 간단하게 붙이다니 제법이군."
"이 정도의 치유쯤이야 기본이지. 네 녀석의 주먹도 제법 맵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덤벼라!"
퍽. 우지직.
본색을 드러낸 박상태가 영욱이 휘두른 각목을 자신의 팔로 막자 두께 10센티미터를 넘어서는 굵은 각목이 간단하게 부러져 나갔다.
둘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수백 명의 학생들이 그 광경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제법이군. 하지만 어차피 넌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웃기고 있네."
강력한 무기가 사라진 영욱은 포기하지 않고 주먹과 발길질로 부딪치기 시작했다.
키는 영욱이 조금 더 컸지만 체중은 다부진 몸을 가진 박상태가 족히 10kg은 더 나갈 것 같았다. 그러니 영욱은 다짜고짜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긴 리치를 이용해서 아웃복싱을 구사했다.
이제는 부러졌던 박상태의 팔이 거짓말처럼 다시 들러붙었고, 그것을 본 증인들이 많으니까 더 이상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고 안달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박상태가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강원대학교 내에 널리 알렸으니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학생들과 교수들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영욱은 제법 그럴 듯한 동작으로 박상태에게 타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사실 영욱은 자라면서 친구들과 싸운 적이 거의 없어서 자신이 의외로 격투기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여태까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애마 포크를 타고서 싸워본 적은 있지만 맨손 격투는 지금이 머리털 나고서는 처음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힘은 박상태가 압도적으로 강했지만 동체 시력과 반응 속도는 영욱이 오히려 더 빨랐다. 게다가 리치가 긴 것을 잘 활용하니 정체를 드러낸 박상태에게도 꽤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다.
박상태가 200명도 넘는 사람의 영혼을 뜯어먹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영욱의 싸움 실력은 상당히 인상적인 수준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박상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영욱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더 영리하게 싸우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이토록 격렬한 주먹다짐은 처음이지만 그동안 몸에 익은 기계체조의 움직임을 응용하니 별로 낯설지도 않았다.
박상태는 2QB 세상에서 발휘하는 힘을 현실에서는 채 1퍼센트도 발휘하지 못하는 듯했다. 물론 그 정도만 해도 성인 남자 서넛은 거뜬히 대적할 정도의 괴력을 발휘했지만 이미 그 사실을 잘 아는 영욱이 그의 손에 잡혀줄 리 없었다.
게다가 영욱은 이 기회에 박상태를 죽이기로 독하게 마음먹은 상태였다. 그러니 기회가 생기면 주저하지 않고 팔꿈치나 킥으로 급소만을 골라서 공격했다. 2QB 세상은 아니겠지만 현실 세계는 엄연히 급소가 존재하는 곳이다.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거나 박상태의 목젖을 손날로 치고, 고환을 발로 걷어찼다. 격투기 시합이라면 반칙에 해당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봐야 치유 능력을 발휘하면 멀쩡해지겠지만 무한정으로 발휘할 수 있는 초능력은 아닐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계속 급소를 공격하면서 박상태의 피로도가 쌓이거나 정신력이 소진되기를 진득하게 기다렸다.
겉으로는 아무리 공격해도 금방 회복했지만 당하는 순간만큼은 격렬한 고통을 느끼는 듯했고, 회복되는 속도가 조금씩이나마 느려졌다.
하지만 생각이란 놈은 영욱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너무 흥분한 탓에 박상태가 얼마나 교활한 놈인지를 깜박하고 말았던 것이다.
"악!"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냐? 하하하!"
결국 영욱의 팔이 박상태의 억센 손아귀에 붙들리고 말았다.
팔꿈치로 드러난 녀석의 얼굴을 가격했는데 그걸 일부러 맞아주면서 기어코 영욱의 팔을 붙들어버린 것이다. 박상태가 붙잡은 영욱의 왼팔에 힘을 주자 힘에서 밀리는 영욱의 팔이 속절없이 꺾어지기 시작했다.
'안 돼!'
영욱은 자신의 팔이 완전히 꺾어지기 직전에 가까스로 미끄러운 실드를 소환했다.
"으라차차!"
미끌.
주방세제가 잔뜩 묻은 고무장갑을 상상했더니 꽤 그럴 듯한 실드가 만들어지면서 박상태의 손아귀로부터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퍽!
"아악! 내 눈!"
하지만 영욱은 팔을 빼내자마자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박상태의 두 눈을 손가락으로 깊게 찔러버렸다. 그리고 찌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아예 눈알을 뽑아버렸다.
그리고 연속 동작으로 급소를 걷어차고는 툭 튀어나와서 덜렁거리는 눈알을 마저 뽑아내려고 잡아당겼다. 하지만 눈동자의 뒤편에는 굵은 인대와 질긴 신경 다발이 달려있어서 쉽게 분리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박상태도 자신의 눈알을 보호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방어해야만 했다. 그가 아무리 대단한 드림헌터지만 부러진 팔을 붙이는 것과 사라진 눈알을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이 같을 리 없다.
영욱은 박상태가 당황한 점을 이용해서 고환 등의 급소를 공격하고, 또 다른 쪽의 눈알까지 뽑을 기회를 노렸다. 운이 좋아서 또 천금千金과도 같은 기회가 왔으니 지금 여기에서 끝장을 내야만 했다.
어쩌면 여기서 끝을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싸움이 이런 식으로 살벌하게 진행되자 둘의 다툼을 말리기 위해서 개입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수백 명의 학생들도 개입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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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박상태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조금만 더 공격이 누적되면 천하의 박상태라도 견디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스톱! 거기까지만 해."
그런데 녀석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막아서고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예상 밖에 나노바이오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 이희승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도 드림헌터에 대해서는 잘 아는 듯했다.
"안됩니다. 교수님. 이놈은 벌써 2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영혼을 뜯어먹은 괴물입니다."
"그건 꿈속 세상에서의 일이니까 그 세상에서 해결하도록 하게."
"그게 전혀 별개의 세상이 아닙니다."
"나도 잘 알고 있어. 이미 저 녀석으로부터 너에게 불이익을 주라는 협박을 받은 적도 있었고……."
이 교수의 표정은 협박을 받았다는 사람치고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그것은 은영의 표정처럼 어디를 보아도 박상태를 두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박상태의 사주를 받고는 실제로 영욱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그것은 박상태가 무서워서 한 행동이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말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 녀석은 협박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의 영혼을 뜯어먹어서 능력을 빼앗아가는 괴물입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이곳 세상의 법이 문제지. 저 녀석을 죽이게 되면 너도 살인죄로 평생 동안 교도소에서 썩게 될 거야."
"이미 각오하고서 하는 일입니다. 제 한 몸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 수 있다면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대단한 희생정신이네만 저 녀석만이 드림헌터인 것은 아냐. 특히 한 번 물어뜯긴 영혼들에게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때문에 다른 드림헌터들로부터도 결코 안전할 수가 없지."
이희승 교수는 <비몽사몽>에도 적혀있지 않는 이야기까지 늘어놓았다. 그도 상당한 수준의 드림헌터인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대학 교수답게 연구를 통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든지.
"그러니까 저 놈을 기필코 이 자리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겁니다.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현실에서 저 녀석을 죽이게 되면 저 녀석의 영혼이 2QB 세상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는 걸 몰라서 그래? 낮과 밤의 구분도 없이 진정한 악몽을 경험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제법 똑똑한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아니었군."
"하지만 죽은 자의 영혼은 산 자의 영혼에 비해서 힘이 약하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도 맞아. 그러나 저 녀석은 이미 괴물이야. 보통 사람들의 영혼이 당할 수 있는 수준은 오래 전에 넘어섰다고 봐야겠지."
더 많이 아는 이희승 교수가 논리적으로 말리니 영욱으로서는 더 이상 싸움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희승 교수가 개입하면 박상태를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분이 덜 풀려서 좀 더 패야겠습니다."
"죽이지만 않겠다면 나머지는 자네가 알아서 하게."
"교수님! 왜 이러세요?"
박상태를 막아서고 있던 이희승 교수가 얼른 자리를 비켜주자 그 뒤에 숨어있던 박상태가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이희승 교수의 싸늘한 대꾸만이 돌아왔을 뿐이다.
"감히 나를 협박한 주제에 그 아가리에서 교수님이라는 말이 나와? 네가 보기에는 내가 왜 이러는 것 같니?"
크아아.
영욱은 둘의 실랑이를 오히려 기회로 삼아서 박상태에게 기습을 가했다. 박상태가 제자리에 밀어 넣고서 잠시 회복 중이던 두 눈알 중에서 오른쪽 눈을 완전히 뽑아버렸다.
이희승 교수의 적극적인 만류에 잠시 방심하고 있던 녀석은 갑자기 당한 배신의 여파 때문에 영욱의 기습 공격에 대처하지 못하고 허둥거리더니 결국은 한쪽 눈알을 잃고 말았다.
사실은 박상태를 막아섰던 이희승 교수가 박상태의 시선을 가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가 얼른 비켜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뽑힌 눈을 다시 밀어 넣고는 금방 회복하는 걸 보니 어차피 뽑혀나간 눈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200명 이상의 영혼을 뜯어먹은 드림헌터답게 현실 세계에서도 이미 괴물이었다. 그러나 영욱의 예상과는 달리 박상태가 보이는 반응은 조금 달랐다.
아마도 어느 정도 장애가 남든지 완벽하게 회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듯했다. 그렇지 않으면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또다시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박상태는 악독한 표정 대신 애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제발 내 눈알을 돌려줘."
"웃기지 마.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은데 이걸 왜 돌려줘?"
휙!
영욱은 녀석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는 걸 보고는 녀석의 눈알을 입에 넣고는 씹어버렸다.
물론 멀리 집어 던지는 시늉을 먼저 해서 녀석의 시선과 구경꾼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다음이었다. 이유야 어쨌든지 사람의 눈알을 씹어 돌리는 섬뜩한 짓을 공공연히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툭. 우두둑.
물론 씹어서 삼킬 생각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 캡슐에 든 액체를 삼키는 것처럼 눈동자가 터지더니 그 속에 든 비릿한 액체들과 심지어 단단한 각막과 공막들마저도 스르르 녹아서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렸다.
애써 뽑아냈지만 정상적인 사람의 눈알이 아니라 도마뱀의 꼬리 같은 것이었다. 진짜 눈알은 다시 자라날 것이 분명했다.
꿀꺽.
"뭐야? 조금 전의 것은 네 녀석의 눈알이 아니었잖아."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그럼 찡그린 그 눈 속에서 새로 돋아나는 그 눈알은 대체 누구의 것이냐?"
"이 잔인하고 교활한 놈 같으니……."
박상태는 눈알이 뽑혀나간 부위에서 새로운 눈알을 열심히 재생시키고 있는 상태였다. 남이 보지 못하게 손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영욱의 그의 손을 밖으로 꺾어서 들통이 나버린 것이다.
그러한 사실이 많은 학생들 앞에서 드러나자 박상태는 더욱더 인상을 험악하게 찡그렸다. 자신이 괴물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서였다.
사실 눈알이 재생되고 나면 폭행을 당한 증거가 전혀 없으니 영욱의 구속은 불가능하다. 문제를 삼다가는 오히려 자신만 무고죄로 당할 소지가 더 높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영욱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카드가 날아갔으니 더더욱 찡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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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꿈에서 보자."
더 이상 영욱을 곤경에 빠뜨릴 방법이 없음을 깨달은 박상태는 영욱을 뿌리치고서 빠르게 달아났다. 실제로 그가 힘이 부족해서 영욱에게 당한 것만은 아니라는 게 바로 그 모습으로 또다시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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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수업이 벌써 시작되었잖아."
"내가 미쳐!"
박상태가 달아나버리자 이 잔인하고 특별한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학생들은 각자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 중에는 강의가 없는 학생들도 많았지만 싸움이 끝났으니 굳이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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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텅 빈 잔디밭에 영욱과 이희성 교수 둘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영욱은 이희승 교수의 싸움을 말리는 듯한 행동이 오히려 자신을 살렸음을 깨닫고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박상태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신을 압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을 공개적으로 죽이고서 살인자가 되어 경찰에 쫓기는 것이 싫어서 참고 있었을 것이다.
"놀랍군. 자네도 드림헌터였다니……."
"아닙니다. 교수님. 저는 아직 드림헌터가 아닙니다."
"숨길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게. 하지만 상태 군을 궁지에 몰아넣을 정도로 강한 힘을 발휘하는 자네가 굳이 드림헌터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지나가던 개가 다 웃을 걸세."
"하지만 남을 괴롭히고 굴복시켜서 그 영혼을 뜯어먹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맹세할 수 있나?"
"네. 맹세할 수 있습니다."
영욱은 박상태의 피와 살점을 뜯어먹은 적은 있지만 남을 괴롭히고 굴복시킨 적은 없으니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몽사몽>이란 책에 나오지도 않는 이야기를 굳이 이 교수에게 보고할 이유는 없다. 이 교수 또한 자신의 아군으로 남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사실대로 말해주어도 믿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컸다. 그것은 영욱으로서도 기계체조의 도움이 없었다면 소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피와 살점을 뜯어먹은 이야기를 하게 되면 기계체조의 효용까지 털어놓아야 하니까 아예 모르쇠로 일관하는 게 나을 듯했다. 사실 그런 걸 이야기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냐. 뭔가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
"없습니다만."
"싫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그런 걸 알아내는 게 바로 내 전문분야니까 말이야."
이희승 교수는 영욱을 매우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노 바이오 분야는 물론이고 드림헌터를 연구하는 것 역시 그의 주된 관심사인데 이보다도 더 흥미로운 연구 재료가 있을 리 없을 것이다.
"명세컨대 다른 사람의 영혼을 공격한 적은 없습니다. 제 영역 밖으로 나간 적도 거의 없으니까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 없고요. 그러니 저는 드림헌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되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나는 드림헌터라고 해서 꼭 나쁜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그들이 꼭 나쁜 것만은 아냐."
"왜 그런 말을 하시죠?"
반박귀진反樸歸眞은 내공 수련의 높은 경지로써 무공을 익힌 사람이 자신의 내공을 완전히 갈무리해서 무공을 익힌 흔적이 사라지고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는 경지를 일컫는다. 글자 그대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경지인 셈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영욱은 이희승 교수에게서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마냥 평범해 보이는 이 교수가 박상태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잔뜩 긴장하고 있던 영욱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여겼다. 드림헌터로서의 자기합리화가 시작되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다고 해서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잖아. 사자는 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초식동물을 사냥하지 못하면 굶어죽게 되니까 말이야."
"그야 그렇지만 자신의 동료들과 지인들을 대상으로 사냥하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쉬운 사냥감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
"사실 어쩔 수 없이 사냥해야 한다는 것도 아직은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꼭 사냥해야 한다면 면식이 없는 다른 사람들을 택했어야죠."
"그래봐야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이야. <비몽사몽>에서도 잘 소개되어 있지만 그 2QB라는 세상의 영혼은 명백하게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라는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어. 그러니 자네가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어쩔 수 없는 거야."
"그것은 태양으로부터 직접 광합성을 하지 못하는 이상 어쩔 수 없이 남의 살과 열매를 먹어야 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깁니다. 타인의 영혼을 사냥하지 않더라도 굶어 죽는 것은 아니니까요."
영욱은 언쟁이 격렬해지자 이희승 교수가 다짜고짜 자신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서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다.
"자네에게는 다소 잔인하고 몰인정한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네. 2QB 세상이 어쩌면 이 현실 세계보다도 훨씬 더 솔직한 곳일 수도 있어."
"그렇다면 현실 세계의 사람들은 그보다 더한 살인 충동이나 공격 본능을 감추고 살아간다는 말인가요?"
"당연하지. 대부분의 사람들이수십억의 인류가 한꺼번에 죽어나가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고서 열광하는 걸 보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
영욱은 뒷걸음질로 물러나고 이희승 교수는 벌어진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는 술래잡기가 계속되었다. 겉으로는 열띤 논쟁을 벌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영욱의 입장에서는 얼른 이희승 교수를 벗어나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이희승 교수는 영욱의 탈출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인간들의 숨겨진 욕망이나 꿈들이 결국 2QB 세상에서 실현된 것이라는 소리군요. 그러니까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맞아. 사실 현실에서도 고위층이나 재벌이라는 거대하고 강력한 몬스터가 존재하잖아. 설마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그건 사실입니다만."
"또한 수만 명 이상의 사람을 학살하고서 돈과 권력을 움켜쥔 자들이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서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지. 그들의 자손들 역시 대를 이어가면서 안락하고 호사스럽게 살아가게 될 거야."
"그렇다면 교수님의 생각은 2QB의 세상이 긍정적인 부분도 없지는 않다는 거군요."
"당연하지. 나는 다소 잔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행동들이 이 현실 세계에서 억눌린 육망들이 분출되는 일종의 카타라시스라고 생각해. 그리고 자네도 잘 알겠지만 꿈속 세상의 힘을 현실 세계에서도 일부나마 발휘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그게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희승 교수의 말이 제법 그럴 듯해졌다. 하지만 영욱은 가장 중요한 문제점들이 간과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닫고 있었다.
현실 세계에서의 강력한 몬스터가 2QB 세상에서도 더욱더 강력한 몬스터가 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몬스터들에게 뜯어 먹힌 영혼들의 아픔이 바로 그것이다.
"억눌린 욕망의 분출도 좋지만 문제는 그 녀석에게 팔다리를 물어뜯긴 사람들은 현실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장애가 남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진단조차 내리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그 장애는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결국 다시 원상으로 돌아온다고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일종의 헌혈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걸 헌혈이라고 비유하신다면 적절한 헌혈량인 400밀리리터를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40리터 이상의 피를 뽑아내는 것이 되겠군요. 그것도 한꺼번에 말이죠."
"그만큼 피를 뽑는 것처럼 죽지는 않으니까 자네의 비유가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어."
당한 사람들에게 영구적인 장애가 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영욱도 더 이상 뒷걸음질 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희승 교수도 일정거리까지만 다가오고 더 이상은 접근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욱은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했다.
"잘 아시겠지만 뜯어먹는 것도 그리 간단한 작업이 아닙니다. 그냥 뜯어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서 완전히 굴복시킬 때까지 상대를 괴롭히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게 더 문제라는 거죠."
"하지만 영욱 군 자네는 전혀 굴복하지도 않은 상태 군의 피와 살을 흡수하지 않았나?"
"예? 그런 이야기는 저로서도 금시초문이군요. 그런 것도 가능합니까?"
"내 후각이 아주 예민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계속해서 오리발을 내밀겠다는 건가?"
이희승 교수는 영욱이 숨기고자 했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로서는 이미 알고는 있지만 그 이야기를 영욱으로부터 직접 듣고 싶은 듯했다.
"굳이 말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아시는 것 같으니 덧붙이자면 워낙 소량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소량이겠지."
"그 소량을 흡수하는 것도 도중에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만일 그러한 사전 절차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절대로 시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튼 자네 덕분에 상태 군도 그런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거야. 그러니 앞으로는 상대를 완전히 굴복시키느라고 괜한 시간 낭비를 하지는 않을 거야."
"제가 보증하건데 그러다가는 내장이 터져서 죽게 될 겁니다. 아주 소량이라면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겨우 그걸로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자네 덕분에 흥미로운 연구거리가 생겼어. 물론 내가 직접 실험할 생각은 없네만."
이 교수는 앞으로는 영욱이 지적했던 부분이 생략될 수도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물론 영욱으로서도 기계체조와 같은 보조수단 없이는 쉽지 않을 것 같지만 그 사실을 자신이 알려줄 필요는 없으니 일단 그 부분에 대한 지적은 생략하기로 했다.
"교수님의 말을 듣고 있자니 상당히 난감하군요. 피해자들에 대한 동정심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제가 잘못 느낀 건가요?"
"그럴 리가 있나? 그 녀석에게 호되게 당하긴 했지만 연로한 나로서도 끝내 굴복하지는 않았어."
"제가 보기엔 교수님이 더 강한 것 같은데 왜 당해준 거죠? 혹시 일부러 당해주신 겁니까? 아니면 당해주기나 한 겁니까?"
영욱은 교활한 이 교수가 박상태에게 일부러 당해준 것이라고 확신했다.
"내가 더 강하지는 않겠지만 그 녀석이 뭘 하려는지가 궁금해서 대항하지는 않았지. 아무튼 그걸 견디지 못하고 굴복하거나 스스로 살점을 내준 자들이 문제가 더 많다고 봐야겠지. 자네도 짐작하겠지만 그 살점과 피들 때문에 다른 피해자들을 양산해 내게 될 테니까 말이야."
"저도 그런 생각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교수님의 말씀은 사자에게 잡아먹힌 사슴에게 더 큰 죄가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내 말이 도둑질을 한 사람보다 돈을 잃어버린 사람이 더 큰 죄를 지었다는 말처럼 들리는가?"
"예."
"그렇다면 제대로 알아들은 거야. 물론 둘 다 나쁘겠지만……."
자신의 힘을 끝까지 숨기는 이 교수는 교활하기도 하지만 궤변에도 상당히 능했다. 얼마나 능한지 영욱은 자신이 주장하려고 했던 게 뭔지 헷갈리기조차 했다.
"물론 사슴 무리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자의 사냥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늙고 병든 사슴들이 사자에게 희생됨으로써 전염병의 만연蔓延을 막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멀쩡한 사람들의 영혼이 병든 사슴과 같다는 논리는 아무래도 좀 과한 것 같습니다."
"사실 그 비유는 전형적으로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해석 중의 하나야. 대부분의 약한 사슴들은 장거리 이동 중에 낙오되거나 도태되니까 말이야. 사실 사자에게 죽는 사슴들은 그날의 일진이 나빠서라고 봐야겠지."
"무슨 말씀인지 대충은 알아듣겠습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는 큰 실수를 하신 겁니다. 제가 꿈속 세상에서 그 녀석을 처리할 수는 없으니까요."
"상태 군이 그렇게 강한 건가? 아니면 자네가 형편없이 약한 건가?"
이 교수의 질문에는 비아냥거림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욱에 대한 비웃음이라기보다는 동네 꼬마들끼리 싸우는 것을 구경이라도 하는 듯했다.
영욱도 그러한 느낌을 받았지만 내색하지는 않기로 했다. 오히려 전혀 모르는 척함으로써 2QB 세상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나마 얻어 보기로 했다.
특히 사부 진중권이 반응을 보인 이야기를 꺼내면 이 교수도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쏟아낼 것 같았다.
"그 녀석이 저보다는 강한 거죠."
"아까는 그렇게 몰아붙이더니 실망이군."
"그 녀석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니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얼마 전에는 K2탱크를 몰고 나타났더군요."
"설마 대포도 쏜다는 거야?"
영욱의 예상대로 이 교수도 반응을 보였다. 반응으로 보아 탱크를 소환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은 듯했다.
"예. 대포뿐 아니라 기관총까지도 난사하더군요. 뿐만 아니라 시속 60km 이상의 속도로 질주하기도 했습니다. 그 캐터필러 아래에 깔리면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그 정도라면 솔직히 예상 밖이군."
"역시 보통은 아닌 모양이군요."
"그런 타입은 많지는 않지. 아무튼 상태 군의 힘이 전부 다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니 정말 놀라워.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자네로서는 무리수를 두어가면서 이 현실 세계에서 끝장내려고 했던 거였군."
박상태마저도 우습게 여기던 이 교수였지만 역시 탱크 이야기에는 진지하게 놀라움을 표했다. 보통은 강력한 힘을 가진 맹수로 변하거나 가끔씩 오거나 공룡 등의 거대한 몬스터로도 변신하는데 그게 아니라 탱크를 소환했다니 황당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까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자네 둘 사이의 분쟁 해결은 꿈속 세상에서 하는 게 옳다고 보네."
"이제는 그 해결이 쉽지 않을 겁니다. 제가 당할 확률이 훨씬 더 높으니까요."
"아냐! 자네는 쉽게 굴복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당한다고 해서 소멸하는 것은 아니니까 잘 견뎌낼 거라고 믿네."
"저는 그렇다고 치죠. 그 녀석에게 당할 다른 사람들의 고통들은 어떡하죠?"
"그야 당연히 그들 자신이 견뎌내야 할 몫이지."
영욱의 기분은 어느 정도 맞추어 주려고 하는 이 교수였지만 초식동물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영혼들에게는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도 육식동물이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들 중에는 제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문제죠."
"그렇다면 자네가 나서서 도와주면 되잖아."
"그건 저보고 두 번 죽으라는 말입니다. 제 영역을 떠난 상태에서 그 몬스터에게 이길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빨리 강해지게. 약한 것은 자랑이 아닐세."
"자랑이 아닌 줄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해지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현실에서 녀석을 죽이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저라고 교도소에서 평생을 썩고 싶은 줄 아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자네를 도와주겠네."
약하다는 것 그 자체가 죄악이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이 교수는 영욱에게는 이상하리만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물론 연구 대상으로서의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그런데 혹시 교수님의 피라도 나누어주실 생각입니까?"
"미안하지만 나는 빈혈이 있어서 그건 사양하겠네.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도울 수 있을 거야.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렇다면 교수님의 자랑인 나노바이오 캡슐이라도 제공해 주실 생각입니까?"
"그,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았나?"
영욱의 다소 엉뚱하면서도 예리한 지적에 이 교수가 깜짝 놀랐다. 그의 반응을 보니 이미 실용화 수준으로 개발된 듯했다.
사실 학부생에 불과한 영욱이 생각해낸 것을 그 분야의 가장 뛰어난 전문가가 미처 생각지 못했을 리는 없으니 영욱에게 제공하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당장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학기에 제출했던 그 리포트를 작성할 때 나름 자료를 수집하다보니 교수님께서 그런 연구에 가장 앞선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모를 리 없죠."
"그런가? 하지만 박사 과정을 제외한 대학원생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있던 일인데 그걸 알아내다니 정말 대단한 정보 수집 능력일세."
"사실은 그냥 짐작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쉽게 인정하시니까 오히려 제가 더 놀랐습니다."
"아무튼 내 생각은 그걸 자네에게 제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네. 나노캡슐이 자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가?"
"예."
"대답 한 번 시원하게 하는군. 좋아, 어떻게 사용할 생각인가?"
"부스터로 사용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사용 계획이 부스터라고? 자네의 나노캡슐 이용 계획을 자세하게 설명해보게. 설득력이 있다면 기꺼이 자네에게 제공하기로 하지."
"뭐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고……."
영욱은 포도당과 산소를 채운 나노캡슐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이 교수에게 설명했다.
필요한 위치에 가져다 놓는 것은 자신의 염동력으로 가능하니까 이 교수는 그저 제공하기만 하면 된다는 게 설명의 요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