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욱은 아무리 진한 향수를 사용한다고 해도 결코 노린내를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풀이 죽었다. 완전히 복종시키지 않은 채로 남의 피와 살을 탐한 대가가 아주 크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자식이 별 것도 아닌 놈이었나 보군. 네가 하도 괴물이라고 해서 꽤나 강한 줄 알았더니……."
"프레시맨이라고 하니까 강해봐야 별 거 있겠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거인으로 변신하지 않고 탱크를 소환해서 공격하기에 꽤나 고전했어요. 애들 말로 정말 뒈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뭐라고? 그렇다면 프레시맨 중에서는 제법 수준이 높다는 소린데 정말 운이 좋았던 모양이군."
사부 진중권도 드림헌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욱의 승리를 폄하하려던 태도를 갑자기 180도로 바꿔서 반응했다. 그 정도라면 운만 좋아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예. 수련했던 기계체조가 포탄을 피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어요."
"이제야 기계체조의 숨은 효용을 깨달은 모양이군."
"예. 그리고 소화 흡수에도 상당한 도움이 되더군요."
"소화 흡수라니?"
"사실은……."
영욱은 박상태와 싸웠던 이야기를 자세하게 보고했다. 녀석의 목을 물어뜯고 살점과 피를 삼킨 사실까지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사실 기계체조를 잘 활용하면 상대로부터 완전한 굴복을 받아내지 않아도 상대의 힘을 빼앗을 수가 있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알아내다니 제법인데? 하하하!"
진중권은 자신이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즐거워했다. 하지만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감추지는 못했다.
"이렇게 대단한 것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런데 사부님. 왜 자꾸 고개를 갸웃거리시는 거죠?"
"가능한 줄은 알지만 이제 겨우 5퍼센트의 경지에서는 쉽지 않을 텐데 소화시킨 것이 신기해서 그래."
"당연히 쉽지는 않았습니다. 녀석의 피와 살점들이 제 뱃속에서 펄펄 날뛰는데 하마터면 창자가 뚫어져서 죽을 뻔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삼킨 양이 적어서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아직까지는 시기상조인 것 같은데 아무튼 창자에 구멍이 나지 않고 흡수했다니까 정말 다행이다. 아무튼 기계체조가 대단한 줄 몸으로 알았을 테니까 오늘도 열심히 수련하기로 하자."
말을 하지는 않지만 진중권의 심각한 표정과 반응으로 보자면 적어도 10퍼센트 혹은 20퍼센트는 되어야 가능한 일인 듯했다. 하지만 정확한 추정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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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얼른 수련을 시작해야지. 나중에 물어봐."
"간단한 질문이라서 나중에는 까먹을 지도 몰라요."
영욱은 평소와는 달리 고집을 부렸다. 지금이 바로 질문을 해야 하는 타이밍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질문이라는 것이 뭔데?"
"지금 사부님은 몇 퍼센트의 경지죠?"
영욱의 질문이 의외였는지 진중권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별로 시원치는 않아. 이제 겨우 23퍼센트야."
"그렇다면 제가 나중에 50퍼센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이론적으로는 120퍼센트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으니까 열심히 하다보면 되겠지."
"꽤나 긍정적이시네요."
영욱은 사부 진중권의 경지가 고작 23퍼센트라는 소리에 솔직히 실망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약간 시니컬하게 반응했다.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자면 23퍼센트의 경지에만 올라도 상당한 수준의 기계체조를 구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제자가 사부를 추월하는 청출어람靑出於藍 경지에 이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또한 추월한다고 해도 겨우 24퍼센트의 경지에 머물며 25퍼센트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것은 더 높은 단계로 이끌어주어야 할 사부의 가르침과 경험이 없으니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욱의 냉소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의 기분은 여전히 좋았다.
"사실 너와 함께 수련한 이후에 22퍼센트에서 23퍼센트로 올랐어. 15년 동안 전혀 오르지 않은 걸 고려한다면 긍정적일 수밖에 없지."
"아무튼 저랑 함께 달밤에 체조하는 게 사부님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소리군요. 그럼 시작하시죠."
"좋았어. 네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오늘은 멋진 걸 보여주도록 하지."
"기대됩니다. 사부님."
진중권의 포클레인이 오늘따라 유난히 현란하게 움직이더니 어느 순간 기계 팔이 두 개로 보이기 시작했다. 워낙 움직임이 빨라서 생겨나는 잔상殘像 효과였다.
하지만 작업 속도 역시 두 배 가까이 빨라지는 기현상이 벌어지자 영욱은 그게 단순한 잔상 효과만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봤어?"
"예. 기계 팔이 두 개로 보이네요."
"기계체조의 기초 동작은 팔이 하나이고, 기본 동작은 팔이 두 개인 셈이지. 물론 진짜로 두 개는 아니지만 꿈속 세상에서는 진짜로 두 개가 될 수도 있어. 이것은 기본 동작 중에서도 제 1식 잔상의 팔 혹은 잔상지수殘像之手라고 부르는 초식이야."
"그게 정말이세요?"
2QB세상에서는 기계 팔이 두 개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제법 그럴 듯한 초식 이름이 나오자 영욱은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것 봤어?"
의심할 것도 없이 당연히 믿었다. 하지만 너무 진지하게 반응하는 사부 진중권을 보자니 슬슬 장난기가 도지기 시작했다. 영욱은 군대까지 다녀온 복학생이지만 아직 이십대 초중반이니까 기회만 생기면 언제든지 장난치려고 들었다.
"예."
"뭐라고? 내가 언제?"
"며칠 전에 우연히 산 아래 선술집에서 찬모를 상대로 사부님이 총각이라고 주장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어요. 그게 참말이라고 생각하세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누구 혼삿길 막을 일이라도 있어? 나, 총각 맞아."
"그렇다면 사부님의 지갑 속에 든 예쁜 여자 사진은 첫사랑인가요? 제가 보기에는 영락없는 딸이던데……."
대부분의 술값을 영욱이 계산했지만 며칠 전에 일하는 아주머니가 새로 온 다음부터는 진중권이 술값을 계산하곤 했다. 보나마나 자신의 주머니가 빵빵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서 작업을 걸려는 수작이었다. 예쁜 여자만 보면 밝히는 걸 보면 아직 시한부인생까지는 아닌 듯했다.
아무튼 영욱도 마음속으로는 대환영이지만 겉으로는 자기가 내겠다고 우기는 척했다. 그 과정에서 진중권의 지갑 속에 들어있던 예쁜 여자 사진이 영욱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두 사람의 눈이 붕어빵처럼 닮았잖아요. 그걸 말로 해야 아나요?"
"내 딸 맞아. 하지만 결혼은 안 했으니까 그래도 총각이야."
"좋아요. 법적으로는 총각이니까 총각이라고 쳐요. 그게 뭐 중요하나요. 그런데 걔, 몇 살이에요?"
"스물세 살이야. 예쁘지?"
진중권은 딸의 나이를 의외로 쉽게 알려주었다. 아마도 자랑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총각이라고 주장하는 그도 어쩔 수 없는 딸 바보였던 것이다.
"예. 그런데 나랑 동갑이네요. 잘 됐다."
"뭐가 잘 돼?"
"동갑끼리는 궁합도 보지 않는다잖아요."
"꿈도 꾸지 마. 그리고 넌 24살이잖아."
"아뇨. 생일이 빨라서 학교를 한 해 일찍 들어갔어요. 그런데 어디서 살아요? 같이 사는 것 같지는 않은데……."
"걔가 사는 곳을 알아서 뭐하게? 미안하지만 너에게 소개시켜줄 생각은 전혀 없어. 그리고 걔가 어떤 앤 줄 알면 깜짝 놀라서 까무러칠 거다."
딸 자랑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더니 정작 교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얼핏 듣기로는 자신의 딸에 비해서 영욱이 많이 부족하다는 소리인 듯했다.
매사에 과장하는 버릇이 전혀 없는 사부 진중권의 평소 성격에 의하면 진짜 대단한 딸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아 보였다. 딸 바보의 눈 먼 자랑일 가능성도 크지만.
"왜 안 되죠? 수제자와 사부님의 외동딸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모습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너처럼 냄새를 팍팍 풍기는 녀석은 안 돼. 보통 사람들이 그 고약한 냄새를 맡으면 주눅이 든다는 걸 몰라서 그래? 물론 내 딸이 기죽지는 않겠지만."
사부 진중권이 반대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금지옥엽처럼 키운 딸의 기를 죽일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말이 오락가락했다.
"주눅이 든다고요? 그래서 제가 그렇게 역한 냄새를 피웠는데도 우리 학과의 학생들이 따지지도 못하고 잔뜩 움츠려들었던 거군요."
"몇 명이나 되는데?"
"마흔 명이 조금 넘어요."
"한심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그 많은 학생들 중에 따지는 놈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거야?"
"딱 한 놈 있긴 있었어요. 곧 꼬리를 말고 찌그러지긴 했지만……."
"그렇다면 그 놈도 부족하지만 드림헌터라고 봐야겠군. 이제 세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잘 알겠지?"
"드림헌터들이 그보다는 훨씬 더 높은 비율로 존재한다는 말인가요?"
"내가 알기로는 그래. 아무튼 수련이나 하자."
"예. 사부님."
우우웅. 우웅.
영욱은 사부 진중권의 딸도 아마 강원대에 재학 중인 학생일 거라고 짐작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진중권이 입버릇처럼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중얼거리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춘천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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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이야기를 하는 건가……."
이야기의 주인공인 진소희는 자신의 원룸에서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더니 화장대 서랍 속에서 면봉을 꺼내서 귀를 후벼 팠다.
사실 영욱의 짐작처럼 진중권의 딸 진소희는 강원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그리고 4학년이라서 몇 달만 더 다니면 졸업을 하게 된다.
그래서 진중권이 늘 영욱에게 조급하고 서두르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딸이 졸업하면 자신도 어디론가 훌훌 떠나려고 했는데 졸지에 영욱이라는 혹이 달렸으니 얼른 가르쳐 놓고 떠나려는 것이다. 물론 조급하게 구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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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의 친동생인 박영길은 올해 서울대학교에 진학할 정도로 공부에 대한 애착심이 크고 머리도 좋다. 그에 반해서 영욱은 공부에 대한 애착도 거의 없는 편이고, 머리도 썩 잘 돌아가는 편이 아니라서 강원대에도 겨우 진학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영욱의 머리도 친동생 영길처럼 핑핑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게 활인심방을 맹렬히 수련한 덕분인지 기계체조의 성취 덕분인지 아니면 궁지에 몰린 쥐 신세라서 젖 빨던 힘까지 발휘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예전의 영욱이 아니었다. 물론 멘사 회원 수준으로 머리가 좋아진 것은 아니다.
영욱은 진중권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가르쳐주는 기계체조 기본 동작 제 1식 잔상지수 초식을 따라하면서 문득 자신의 경지가 3퍼센트도 아니고, 4퍼센트도 아닌 왜 5퍼센트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체중이나 키처럼 숫자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사부 진중권은 영욱의 경지는 물론이고 자신의 경지까지도 명확하게 숫자로 표현했다.
만일 사부 진중권의 경지가 50퍼센트를 넘는다면 마치 바둑의 급수나 당구의 실력처럼 기계체조의 숙련도라는 무형의 경지가 눈에도 보이고 숫자로도 표시할 수 있겠지만 겨우 23퍼센트의 경지로는 그런 게 보일 수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한편으로는 23퍼센트의 경지가 '겨우'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은 평생 동안 노력해야 오를 수 있는 경지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또 한편으로는 경지가 얕은 편이라고 해도 자신이 이미 거쳐 갔던 경지니까 쉽게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봐야 자신의 경지와 비교해서 상대적인 경지를 산출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최근 사부의 경지가 1퍼센트나 늘어난 것은 함께 훈련하는 효과일 수도 있지만 자신을 조금이라도 잘 가르치기 위해서 기본기를 보여주고 그 과정에서 기본기를 다지다보니 벌어진 효과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욱도 5퍼센트 경지에서 6퍼센트 경지로 오르는 그 1퍼센트와 22퍼센트에서 23퍼센트로 오르는 그 1퍼센트의 의미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임을 짐작하고는 있었다. 그러니 자신은 언제쯤이나 6퍼센트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지가 자못 궁금했다.
그것에 따라서 앞으로 자신이 오를 수 있는 경지와 기간을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0일 만에 5%의 경지에 올랐으니까 지금으로서는 20일 정도만 열심히 하면 1퍼센트가 오른다는 단순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갈수록 힘들어질 테니까 그런 계산 방식으로 실력이 늘 리는 없다.
그리고 무척이나 아쉽게도 박상태의 피와 고기를 취한 것이 기계체조의 경지를 올리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듯했다. 현재로서 느낄 수 있는 달라진 점이라곤 육식동물의 노린내를 물씬 풍긴다는 사실뿐이다.
혹여 나중에는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효과를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튼튼한 다리나 팔을 통째로 뜯어먹은 것이 아니라 피와 목덜미 부분의 살점을 조금 뜯어먹은 것뿐이니까.
막연한 느낌상으로는 혈액 순환이나 호흡 능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수치의 형태로 계량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줄 알았다면 박상태 녀석을 뜯어먹지 말았어야 했는데 무식하고 용감한 탓에 괜히 역한 냄새만 풍기게 되었다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영욱은 오늘 따라 유난히 훈련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낮에 은영의 생뚱맞은 제안을 받은 것도 그렇지만 진소희의 이야기까지 겹쳐서 그런지 그만 한 눈을 팔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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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해?"
"예?"
"잡생각이나 할 작정이라면 당장 집어치워."
"죄송합니다. 사부님."
그러자 대번에 진중권의 날벼락이 떨어졌다. 사부의 호통소리에 놀란 영욱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고민을 날려버리고 훈련에만 집중하고자 했다.
열심히 하더라도 포크의 기계 팔이 두 개로 보이게 하려면 꽤나 긴 시간 동안 수련에 투자해야할 것 같았다. 기본 동작 제 1식은 말만 기본 동작이지 그만큼이나 어려운 동작이고 초식이었다.
기초 동작의 난이도도 장난이 아니지만 기본 동작은 수준 자체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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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짬짬이 활인심방도 수련하면서 기계체조의 기본 동작 제 1식 잔상지수의 수련에 몰입했다. 수련이 곧 작업을 하는 것이니까 돈도 벌면서 훈련도 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고 있었다.
"앗! 따가워."
그런데 오늘따라 유독 영욱의 몰입을 방해하는 방해꾼이 또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각다귀였다. 특히 산에 사는 각다귀들은 그 침이 강하기로 유명해서 옷을 입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게다가 영욱은 아직도 아토피 환자라서 모기가 주는 가려움이 상상 이상으로 컸다. 그래서 달려드는 각다귀들을 처리하지 않은 채로 훈련에 집중할 수는 없었다. 물론 뾰족한 방법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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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몽사몽>에서는 꿈속 세상 2QB의 드림헌터들이 가지는 초능력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초능력은 현실에서 사용하던 물건이나 익숙한 물건을 2QB 세상으로 소환하는 일이다.
그리고 두 번째 초능력은 특별한 주문이나 보조기구가 없어도 다양한 형태의 마법 같은 능력이나 염동력의 사용이다. 뚜렷한 형체가 없는 영혼들이 부대끼는 세상이니까 정신력만으로도 불로 화살을 만들거나 얼음으로 창을 만들거나 심지어 바람으로 실드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상대 영혼에 보이지 않는 족쇄를 채울 수도 있고, 상대를 하늘 높이 날려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취향에 따라서는 상대를 무거운 중력으로 납작하게 찍어 누를 수도 있다.
그러니 2QB 세상이라면 각다귀 정도는 간단하게 실드를 쳐서 막아내거나 염동력을 발휘해서 짓이겨 버리거나 바람으로 날려 버리거나 날개를 꺾어 버리거나 불로 태워 버리면 간단하겠지만 이곳 현실 세계에서 그러한 마법이 가능할 리 없다.
물론 영욱으로서는 2QB 세상에서도 아직 그런 초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니 현실 세계에서는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뭐, 뭐야 이건?'
그런데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각다귀의 성화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피부에 두꺼운 바른 베이비로션과 같은 실드를 반복해서 상상했더니 어느 순간 각다귀의 침이 원활하게 피부를 뚫고 들어오지는 못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각다귀의 침을 막지도 못할 정도로 부실한 실드이긴 했지만 초능력의 사용이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이 진국에 가까운 박상태의 피와 고기를 뜯어 먹어서 그런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취라는 그림자 뒷면에 현실 세계에서도 이능 발현이라는 빛이 주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비몽사몽>의 저자는 2QB 세상을 이용해서 못 다한 자기 계발이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현실 세계에서의 초능력 발휘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그의 경지가 얕아서 그런 속단을 내린 것이었군.'
물론 지금 이 정도의 얄팍한 실드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지금보다 조금만 더 질겨진다면 각다귀나 말벌 공격 정도는 충분히 방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영욱은 자신의 몸에 두른 실드를 보다 더 두껍게 만들기 위해서 애를 썼다. 상상력을 발휘하면 되는 일이니까 복잡한 모양을 떠올리는 것도 그다지 어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정신력을 물리력이나 물질로 전환시키는 작업이 어마어마하게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도 꽤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야만 했다. 또한 각다귀들에게 막대한 피를 헌납하고 참을 수 없는 가려움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그렇다면 그냥 정신력으로 녀석들에게 압박을 가하는 것이 보다 더 효과적이겠군.'
결국 꾀를 낸 것은 부실하기 이를 데 없는 실드 연습을 포기하겠다는 게 아니라 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을 강구하려는 것이었다.
뭔가 방법을 강구해내지 못하면 오늘따라 유난히 극성을 부리는 각다귀 때문에 온 몸이 벌겋게 변하고 이어지는 아토피 때문에 지독한 가려움에 시달려야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피부가 몹시 약한 자신의 몸에 모기가 기피하는 약제를 바르거나 에프킬러를 뿌릴 수는 없다.
지난여름 동안 태풍이 한반도를 거의 지나가지 않아서 농사나 과수 피해는 적었다. 하지만 모기가 알을 낳고 번식하는 물웅덩이들도 역시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그래서 9월이 되자 장구벌레에서 변태한 각다귀의 숫자는 전국을 새카맣게 뒤덮을 정도였다.
물론 여름방학 때에도 각다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동안 영욱이 사용한 방법은 수컷 모기의 비행 소리를 나게 하는 스마트폰의 앱APP이었는데 100%는 아니지만 절반 정도의 모기를 피할 수는 있었다.
이 방법은 모기가 싫어하는 6개의 주파수를 가진 음파를 지속적으로 내보내서 모기를 쫓아내는 것인데, 영양분 섭취를 위해서 사람이나 동물의 피를 빨아야하는 암컷 모기가 수컷 모기를 밝힐 거라는 상식적인 수준의 짐작과는 달리 기를 쓰고 피하는 걸 보고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모기의 교배가 발칙하게도 성충이 되자마자 이루어지고, 단 한 번의 사랑으로 수컷 모기의 정자를 뱃속에 가득 간직한 암컷 모기는 더 이상 수컷 모기와 사랑을 나눌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컷 모기는 늘 껄떡거리면서 혹시라도 처녀 딱지를 달고 있는 암컷 모기를 기대하며 아무나 귀찮게 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결국 주요 모기 6종의 수컷 모기가 내는 6개의 음파를 발생시켜서 암컷 모기를 쫓아내는 원리를 가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숫자가 너무 늘어난 탓에 배가 엄청나게 고파진 각다귀들에게는 거의 통하지 않았다.
영욱은 자신에게서 나는 육식동물의 노린내를 국화에서 추출되는 살충제 성분인 피레쓰린Pyrethrin의 냄새로 살짝 바꾸었다. 살충제를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냄새까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성분과 냄새가 진짜 살충제로 바뀐 것까지는 아니지만 영욱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서 최면술에 걸린 모기들은 그것이 스치기만 해도 죽는 살충제의 냄새라고 느꼈다.
비록 속임수지만 효과는 아주 좋았다. 새카맣게 달려들던 각다귀들이 마치 에프킬러에 직격탄直擊彈을 맞은 것처럼 혼비백산해서 사방으로 달아났다.
꿈속 세상에 비하면 효과는 아주 적은 편이지만 현실에서도 초능력을 발휘하는 게 가능해졌으니 영욱은 신이 나서 최면술 연습에 몰두했다.
2QB 세상의 위력에 비하자면 겨우 1% 정도에 불과하니까 모기를 죽이지도 못하고 속여서 겨우 쫓을 정도의 하찮은 위력이다.
하지만 반대로 꿈속 세상 2QB에서는 100배 이상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서의 훈련도 꼭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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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욱에게서 달아난 모기들이 갈 곳은 빤했다. 갑자기 늘어난 모기들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던 사부 진중권은 그게 영욱의 소행임을 알아차리고 급기야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야! 박영욱! 각다귀를 나한테 다 쫓으면 어떡해?"
"그럼 사부님도 실드를 만드세요."
"누가 몰라서 그래?"
"만들었는데도 각다귀의 침이 실드를 뚫고 들어오나요?"
영욱은 말투에는 약간 비아냥거림이 섞여 있었다. 영욱이 실망한 것은 사부의 초능력이 부실하다는 것도 있지만 현실에서의 이능 발현이 자신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드림헌터라면 누구라도 가능한 것인데 영욱 혼자 그걸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넌 줄 알아? 하지만 귀에 거슬리는 모기의 비행 소리를 계속해서 들어야 하잖아."
놀랍게도 진중권이 만든 실드는 아주 두꺼웠다. 각다귀들의 침은 진중권의 실드를 전혀 파고들지 못했다. 그도 상당한 수준의 드림헌터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드림헌터의 경지도 그렇게 잘 아는 것이다.
"하지만 제 실드는 얇아서 곤란해요."
"지금 이 사부의 지시를 정면으로 거부하겠다는 거지? 그렇지?"
"그, 그게 아니라……."
"속임수보다는 실질적으로 방어력을 높일 수 있는 실드를 연습하라는 스승의 정당한 지시를 거부할 거야?"
"그게 꼭 각다귀에게 물어뜯기면서 해야 하는 걸까요?"
"응."
"…예. 사부."
영욱이 속임수 최면술 초능력을 중단하자 배고픈 각다귀들이 다시 영욱에게로 새카맣게 몰려들었다. 그리고 각다귀들의 보복이 시작되었다.
"앗! 따가워."
실제로 각다귀들은 사람의 피를 빨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영욱의 피를 빠는 이 모기들은 알을 낳기 위해서는 반드시 흡혈 과정을 거쳐야 하는 암컷 모기인 셈이다.
특히 산에 사는 모기는 새카맣고 억센 침을 가지고 있다. 영욱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흔히 남을 뜯어먹는 것을 일컬어 관용적으로 각다귀라고 표현하니까 그냥 지독한 모기라는 의미에서 각다귀라고 부르는 것이다.
영욱은 기계체조 기본 동작을 열심히 수련하는 한편 사력을 다해서 달려드는 각다귀를 방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실드가 약해서 순식간에 수십 곳이 뚫리고 현기증이 생길 정도로 많은 피를 빨려야만 했다.
사실 실드라는 것은 아주 추상적인 개념이니까 형상화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물론 상상으로도 가능하니까 CAD를 이용해서 디자인하는 것보다는 쉽겠지만 아주 정교한 형태의 실드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그러다보니 실드의 두께가 일정하지를 못했다. 각다귀들은 그 얇은 부분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고는 침을 박아 넣고 피를 빨았다.
"맞아!"
영욱은 각다귀에게 뜯기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다가 문득 고무장갑을 떠올렸다.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빨간 고무장갑이다.
적어도 로션을 바른 것보다는 균일한 두께를 가지고 있으면서 구체적인 형태의 실드의 상상이 가능해졌다. 그러자 영욱의 몸을 감싼 실드 역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고무장갑의 방어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앗! 따가워."
집모기에게는 물리는 것도 잘 모른다. 집모기가 배불리 피를 빨고 날아간 다음에야 가려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에 사는 모기에게 물리면 침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통증을 느낄 수밖에 없다. 또한 잡으려고 해도 너무 빨라서 잡을 수가 없다.
그런데 드디어 영욱에게 복수의 기회가 생겼다. 각다귀들이 영욱의 실드를 뚫고서 피를 빤 것까지는 좋았는데 침이 잘 빠지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그 정도까지는 실드가 강해진 것이었다.
영욱은 자신의 실드를 가볍게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수만 마리의 불구자 각다귀를 양산해냈다. 침이 부러져서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각다귀들이 대량으로 생산되었던 것이다.
터뜨려서 죽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모기의 피가 역류해서 더 가려울 수도 있고, 또 자신의 손에 피가 묻을까봐 그 정도로만 처리하고 말았다. 물론 침만 부러뜨리는 게 더 잔인한 짓이다. 침이 부러진 모기는 결국 굶어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비몽사몽>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이 현실화되었으니 각다귀들에게 뜯기면서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속임수로만 알려져 있는 마술이나 초능력들이 단순한 속임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슬며시 들기 시작했다.
물론 사부 진중권은 이미 알고 있고, 활용하고도 있었지만 영욱으로서는 신세계를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날이 새파랗게 선 작두 위를 걷거나 뛰고, 송곳 위에서 잠을 자며, 불길을 통과하는 것이 정말 신이 내려서도 아니고,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단순한 트릭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겨우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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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이 달려드는 각다귀들을 어느 정도 처리하기 시작하자 진중권이 또 시비를 걸고 넘어졌다.
"또 딴생각을 하는 거야? 오늘 밤에는 대체 왜 그래?"
"사실 오늘 낮에 일방적으로 저를 떠났던 여자 친구가 몇 개월 만에 저를 보자고 하더니 다시 사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싫다고 했습니다. 그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네요."
"그래서 계속 히죽거리고 있었던 거야?"
"죄송합니다. 사부님."
은영에 관한 일뿐 아니라 박상태를 이긴 것과 초능력을 현실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된 점 등이 복합적으로 영욱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훈련하기 싫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아냐. 살다보면 그럴 때도 있지. 그런데 그 옛날 여자 친구라는 아이는 예뻐?"
"예."
"얼마나 예쁜데?"
"사부님의 딸만큼이나 예뻐요."
"흥! 내 딸은 미스코리아보다도 더 예뻐.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영욱의 말 한마디에 딸 바보 진중권이 발끈하자 영욱은 그를 조금만 더 자극하면 딸의 정체를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눈꺼풀에 씌어 있던 콩깍지가 벗겨진 상태에서 봐도 정말 예쁘다니까 그래요. 적어도 강원대에서는 제일 예쁜 것 같아요."
"웃기지 마. 내 딸이 강원대에서 제일 예뻐. 지나가는 사람을 잡고 물어봐라. 내 말이 틀린지……."
"그래요? 그렇다면 따님이 누군지 알겠습니다. 국문학과 4학년 진소희 맞죠?"
딸의 정체는 금방 드러났다. 진중권의 말이 사실이라면 진소희가 틀림없었다.
"아, 아냐."
"진소희라면 확실히 제 옛날 여자 친구보다는 조금 예쁘다고 볼 수 있죠. 이게 웬 떡입니까? 후르릅!"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예쁜 여대생이 많은 강원대에서도 가장 예쁜 여자는 정해져 있었다. 사실 진소희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 보니까 사부 진중권과 성 씨가 같았다. 진 씨가 그리 흔한 성 씨는 아니니까 그것만으로도 부녀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그녀 사진과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사부의 말을 듣고 보니까 그녀가 분명했다.
"침 흘리지 마!"
"하하하! 장난이에요, 장난."
"그 말이 아니라 꿈도 꾸지 말라고 하는 말이야."
"집적거리지 않을 테니까 염려마세요. 하늘보다도 높은 사부님께서 안 된다고 하시는 데도 대시할 정도로 미련한 놈은 아니니까요."
"쳇! 그렇다고 남자 새끼가 그렇게 금방 포기해?"
"예?"
진중권의 태도가 의외로 오락가락했다. 사귀라는 소린지 말라는 소린지 헷갈릴 정도로 말이 왔다 갔다 했다.
"넌 남자도 아냐."
"그야 사부님이 질색하시니까 포기하는 겁니다. 전에는 제 여자 친구도 상당히 예쁘니까 굳이 그럴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지만……."
"내 말은 네 몸에서 풍기는 육식 동물의 냄새 때문에 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기계체조의 경지가 10퍼센트를 넘어서게 되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지지."
영욱의 예상과는 달리 진중권은 의외로 간단하게 진소희와의 교제를 허락했다. 비록 어마어마한 조건이 붙은 허락이긴 했지만 23%에 이른 진중권도 있으니 실현이 불가능한 조건은 아니었다.
"그 말씀은 제가 10퍼센트의 경지를 넘기면 따님과의 교제를 허락한다는 말씀인가요?"
"그래."
"그런데 따님이 사부님의 뜻에 따를까요?"
"그야 네 녀석의 재주에 달렸지."
"적어도 대시하는 것은 말리지 않겠다는 말이군요. 결과는 보장할 수 없지만."
"당연하지. 나는 내 딸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만한 능력도, 그럴 자격도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네 녀석의 말대로 코가 석 잔데 데이트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
"하긴, 다시 사귀자는 여자 친구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그렇군요. 하지만 이제 다시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된다면 좀 더 아름답고 순결한 정신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욱은 자신의 첫사랑이 자신의 탓에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처음이라서 그저 활활 타오르기만 했을 뿐 사랑을 제대로 키워나가지 못했음을 은영이 떠난 후에야 겨우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자신이 좀 더 상대를 배려하고 서로의 마음을 키워나가는 아름다운 사랑을 했더라면 그렇게 쉽게 떠나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제 사랑에서도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 영욱은 그런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게 바로 지난 몇 달간의 아픔이 승화되어서 만들어진 성숙인 셈이다.
"아직도 젊디젊은 놈이 무슨 플라토닉 러브 타령이야?"
"물론 젊은이답게 키스도 하고 싶고, 진한 스킨십도 나누고 싶죠. 하지만 이제는 불필요한 충동이나 욕망을 참거나 조절할 자신이 있다는 소리지요."
사실 은영과의 만남은 아무래도 태어나고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이성에 대한 사랑이다 보니 감정적인 부분과 아울러 육체적인 부분에도 관심이 많았다. 남자는 다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영욱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깊은 관계까지 맺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욱으로서는 늘 그럴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박상태가 나타나서 방해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별을 한 번 경험해 보고 나니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욕망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다음에 누군가와 사랑하게 되면 좀 더 정신적인 사랑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한 말이다.
"부실한 놈 같으니라고. 쯧쯧!"
그런데 사부 진중권의 반응을 보아하니 얼른 자신의 딸 소희를 자빠뜨려서 얼른 손자를 만들어내라는 분위기였다. 물론 영욱의 느낌으로 그렇다는 것이지만…….
*실드를 치다
"아무튼 걔가 너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얼른 저기까지만 끝내고 해장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
"지난밤에 먹은 술이 없는데 무슨 해장술이에요?"
"아침에 먹는 술이 해장술이지 뭐겠어."
속을 풀려고 먹는 술이 해장술이지만 이제는 속이 쓰리지도 않은 영욱도 문득 해장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그러죠. 이젠 술 냄새를 피우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끝까지 대적해드리죠."
"나야 좋지만 술 냄새를 피우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어떻게?"
"수업 시간 동안 제 몸에다 실드를 쳐버리면 되죠. 아직 각다귀나 벌침을 견딜 정도는 아니지만 냄새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새로 얻은 능력이 있으니까 그 활용 방법을 다각도로 생각해 보다가 우연히 떠올린 방법이었다. 하지만 사부 진중권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실드로는 막을 수 없는 입에서 술 냄새가 풀풀 날 텐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숨을 안 쉬고도 살 수 있어? 네가 슈퍼맨이라도 돼?"
"그렇다면 술 냄새 대신에 다른 냄새가 나는 것처럼 속여야겠군요. 각다귀들도 잘 속던데 그보다 후각이 둔한 사람들이 속지 않을 리 없겠죠?"
"애쓴다. 남을 속이는 짓거리나 연구할 거라면 비싼 돈을 들여서 대학은 왜 다니는지 몰라."
"그야 스펙을 쌓으려는 것이죠. 대학졸업장 없이는 취직하기도 힘들고 장가가기도 힘드니까요."
두 사람은 기계체조 훈련 겸 남은 작업을 처리하면서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고, 포클레인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둘의 대화는 아주 원활했다. 그것은 마치 2QB 세상에서 대화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텔레파시와도 느낌이 비슷했다.
"스펙 좋아하시네. 내 딸이 있으니까 이런 말을 하면 누워서 침을 뱉는 격이겠지만 어차피 강원대학교 졸업장으로는 대기업에 취직 못해."
"저야 그런 망상을 버린 지 오래 되었으니까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당장 집어치우고 나와 함께 훈련이나 열심히 하자. 결혼할 상대가 도저히 나타나지 않으면 내 딸과 하면 될 것이고……."
"그런 조건이라면 좋습니다. 따님이 허락한다면 당장이라도 학교를 그만 두기로 하죠. 하지만 이제 겨우 세 학기도 남지 않았는데 중퇴는 좀 아깝지 않아요?"
"남은 기간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는 공부나 하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두 사람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혹은 장인과 사위 사이처럼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만큼 함께 훈련하고, 함께 작업하는 것이 즐겁고 신난다는 의미였다. 만일 영욱이 대학을 그만둔다면 여름방학 때처럼 거의 하루 종일 훈련이나 하자고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그렇다면 대학 생활이 도움이 된다는 거야?"
"예. 제가 몇 가지를 연구하고 있는데 어쩌면 상당한 힘을 낼 수 있을 지도 몰라요."
영욱은 진중권의 대학무용론大學無用論에 맞서서 다소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우리나라 대학의 현실상 대학원생이나 박사 과정이 아닌 대학생이 연구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엉뚱하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웃기고 있네. 연구가 그렇게 만만한 거라면 연구소는 왜 따로 차려? 그리고 네 놈이 따로 연구할 시간이 어디 있어? 밤새도록 나와 함께 있다가 낮에는 병든 닭 새끼처럼 졸아대거나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사부님도 참……. 대학생의 수업이 고등학생처럼 하루 종일 있는 줄 아세요? 겨우 18학점만 이수하면 되니까 수업 시간도 일주일에 겨우 18시간이라는 소리죠. 그러니까 하루 종일 병든 닭 새끼처럼 졸아도 연구할 시간은 충분해요."
사실 대학생의 수업 시간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다만 강의를 듣기 전에 예습을 해야 하고, 또 수업을 받은 후에 부여된 과제를 작성하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이다.
영욱 또한 여느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수업이 없는 낮 시간의 대부분을 도서관에서 리포트를 쓰거나 책을 읽으면서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단련이 되어서 병든 닭 새끼처럼 하루 종일 졸지도 않는다.
"그래? 그렇다면 대체 뭘 연구하는데?"
"그 성질 까칠하다는 나노바이오학 이희승 교수님의 연구실에는 나노 사이즈의 캡슐들이 잔뜩 있어요. 물론 빈 캡슐들인데 그 속에 포도당이나 산소를 가득 채운 다음 삼키는 거예요."
"삼키면 끝이야?"
"아뇨. 크기가 워낙 작으니까 그냥 삼키는 것만으로는 도움이 별로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뇌나 심장처럼 산소나 포도당이 도움이 될 만한 신체 부위도 있죠. 그러니까 일단 염동력으로 머릿속이나 심장까지 보내야 해요."
영욱은 연구라는 미명美名 아래 남의 연구실에 있는 고가의 나노캡슐을 자기 마음대로 이용할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희승 교수가 순순히 내줄 리는 없으니 혼자서 꿈을 꾸고 있는 셈이다.
"그럼 대체 뭐가 도움이 되는데?"
"그야 뇌나 심장이 한계 상황에 이르면 일종의 보험으로 그 나노캡슐들을 뻥하고 터뜨리는 겁니다. 그럼 산소와 포도당이 대량으로 공급되면서 근육과 심장 그리고 허파와 뇌가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죠. 어때요? 제 연구가 괜찮지 않아요?"
"자다가 책상 다리를 긁는 소리를 하는 게 연구라고? 나노 사이즈의 캡슐에서 어떻게 대량의 산소와 포도당을 공급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누굴 나노가 뭔지도 모르는 무식한 놈으로 알아?"
"그, 그러니까 산소와 포도당을 압축하면 될 겁니다."
"물론 압축하면 되겠지. 하지만 그 압력을 견디려면 나노캡슐도 상당히 두꺼워져야 하는데 그러고도 여전히 나노캡슐일 수 있겠어?"
"만일 그게 불가능하다면 많은 수의 나노캡슐을 사용하면 되고요."
심혈을 기울였다는 영욱의 연구는 삼십 년 이상 포클레인만 몰았던 진중권의 질문 몇 개에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사실 진중권이 평생을 막노동 인생으로 살아왔지만 그렇게 무식한 인간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낸 순간이었다.
"나야 잘 모르지만 나노캡슐을 마치 싸구려 약 캡슐처럼 취급하는군. 아무튼 간에 네 생각은 일종의 부스터로 사용하려는 거군. 하지만 부작용이 만만찮을 텐데?"
"무슨 부작용이 있다는 거죠?"
"대학생으로서 엄청난 시간을 들여서 연구했다면서 그것도 몰라? 생체 내에서 산소와 포도당 농도의 증가는 곧 스트레스 호르몬이나 스테로이드 약물의 효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야?"
"그, 그런가요? 하지만 에피네프린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이나 스테로이드의 효과와는 전혀 다른 것이니까 부작용은 거의 없다고 생각해요."
진중권은 영욱이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을 지적하면서 영욱의 연구가 얼마나 추상적이며 피상적이고 부분적인지를 꼬집어냈다.
물론 나노캡슐에서 방출하게 될 포도당의 정확한 양을 모르니 진중권으로서도 인슐린 등의 호르몬 분비와 관련이 있을지를 확신하지는 못했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뇌와 심장에 나노캡슐을 설치하는 것이 가능하긴 한 거야?"
"일단 사부님과 저라면 어느 정도 가능할 것 같아요. 염동력을 전혀 발휘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은 쉽지 않겠지만 말이죠."
"신기하군."
"괜찮은 연구죠? 그렇죠?"
"그게 아니라 네가 벌써 염동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거야? 2QB 세상이 아니라 이 현실 세계에서도 말이야."
영욱은 자신의 연구에 대한 인정을 받고 싶어 했지만 진중권은 그 우스꽝스러운 연구에 대해서는 실망한 지 이미 오래였다. 그는 영욱의 연구가 얼마나 모호하고 추상적인지를 여러 각도에서 지적하고자 했다.
"각다귀 몇 마리 정도의 날개를 꺾을 정도는 되니까 가능할 것 같아요."
"벌써 그 정도야? 각다귀 날개를 꺾는 것도 그리 만만치는 않은데?"
"겨우 몇 마리만 가능해요.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세요? 혹시 사부님께서는 염동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소리는 아니겠죠?"
"무슨 소리야? 지금 나를 바보로 아는 거야? 나 역시 대단치는 않지만 참새 날개를 꺾을 수도 있으니까 나노 사이즈의 캡슐을 운반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겠지. 그런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무슨 수로 조작하려는 거지? 네 눈이 전자현미경이라도 돼?"
영욱의 연구라는 것이 완전 허점투성이지만 진중권은 사부로서 끝까지 지적하는 관심을 보였다. 엉터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영욱의 이야기가 그럴 듯하게 들렸던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역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 모양이다. 물론 진중권도 그 나노캡슐이라는 것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싼지를 모르고서 하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미세한 것을 느끼는 연습부터 먼저 해야죠."
"그런 초능력도 있나? 나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데?"
"현미경이나 전자 현미경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으면 정밀한 스캔 마법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영욱의 이야기가 점점 모호해지고 길어지기만 하자 진중권은 얼굴을 찌푸렸다. 현미경을 만져본 적도 없는 그가 현미경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처음에는 나노캡슐만 삼키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이제 와서는 염동력은 물론이고 수만 배에 이르는 확대 능력까지도 발휘해야 한다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가 틀림없었다.
"뭐가 그리 복잡해?"
"다른 연구에 비하면 별로 복잡하지도 않아요."
"나는 머리 아프니까 그 시답잖은 연구라는 거 너나 열심히 해라."
"그럼 자퇴하지 말고 계속 학교에 다녀도 되는 거죠?"
"네 마음대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