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라니까 그래! 그 큰 바위를 가루로 만들 정도로 강력한 포탄의 위력을 보지 못했어? 그것도 마치 물 붓듯이 발사할 정도로 여유가 있어. 그러니까 승산은 전혀 없어.'
'아냐! 포탄 한 발이 어마어마한 정신력 덩어리라는 걸 몰라?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기회가 올 거야. 녀석도 어차피 정신력을 소모해서 하는 공격이니까…….'
영욱의 마음속에서는 너무 힘드니까 이제는 저항을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과 그러면 더 곤란하다는 마음으로 반씩 나뉘어서 서로의 주장을 팽팽하게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욱의 몸은 한계 상황에서도 여전히 포탄을 피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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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인데? 하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 있는지 보자.
타타타타.
아슬아슬하기는 하지만 영욱이 계속해서 포탄을 피해내자 이번에는 박상태가 포탄 대신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닭 잡는데 굳이 소 잡는 칼을 휘두를 필요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로서도 힘이 드는 게 분명했다.
'좋았어.'
영욱으로서는 기관총을 피하는 것이 훨씬 더 까다로웠지만 드디어 기다리던 기회가 왔음을 느꼈다. 서둘러서 자신의 애마 포크를 소환한 다음 힘차게 시동을 걸고는 탱크를 향해서 힘차게 뛰어내렸다.
따다다당.
영욱의 예상대로 총알은 기계 삽을 뚫지 못하고 양철 지붕에 떨어지는 우박 소리만 내고 튕겨나가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박상태가 타고 있는 탱크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뭐하는 짓이야? 아,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이제 죽어라!
영욱은 거의 직각에 가까운 벽을 마치 봅슬레이를 타고 미끄러지듯이 내려가서 포크의 거대한 기계 삽으로 탱크 위에서 기관총을 난사하고 있던 박상태의 머리를 정통으로 가격해 버렸다.
-크아악!
거의 50미터 이상을 떨어지면서 붙은 가속도와 함께 오로지 기계 삽에 집중된 힘이 박상태의 머리와 몸 전체를 납작하게 뭉개버렸다. 아니, 그랬으면 정말 좋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곳은 2QB 세상이었다.
-뭐야? 그래도 살아있어? 좋아, 그렇다면…….
전혀 예상치도 못한 영욱의 반격에 정통으로 당한 박상태는 거의 실신 직전의 상태였다. 하지만 2QB의 세상이라서 그런지 뭉개지거나 죽지는 않았다. 그리고 겉으로도 금방 멀쩡해졌다.
"맛 좀 봐라!"
다만 그가 타고 있던 탱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영욱은 포크의 기계 삽으로 박상태를 꾹 찍어눌러놓은 채로 얼른 운전석에서 내려갔다. 그리고는 녀석에게로 달려가서 녀석의 목덜미를 사납게 물어뜯었다.
우걱우걱.
혹시라도 녀석에게 붙들리면 곤란하니까 몸을 빼낼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녀석의 피를 빨고 닥치는 대로 뜯어먹었다. 마치 뱀파이어가 사람의 피를 빠는 것과도 흡사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영욱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지만 <비몽사몽>에서 읽었던 내용과 이미 녀석에게 당한 김 병장의 이야기를 토대로 녀석의 힘과 능력을 빼앗으려는 것이었다.
물론 상대가 완전히 굴복한 상태라야 가능하다고 했지만 지금은 거의 기절한 상태니까 굴복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간주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상태 녀석의 의식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하자 이미 영욱의 뱃속으로 들어온 녀석의 피와 살점들이 강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2QB 세상이었다. 떨어진 피와 살점도 주인이 부르면 돌아가서 제자리를 찾는다.
-우욱!
영욱은 내장이 뚫리는 것 같은 지독한 고통으로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하하하! 미친놈. 그냥 뜯어먹으면 되는 줄 알았던 모양이구나. 그랬다면 너를 두들겨 팰 것도 없이 처음부터 묶어두고서 그냥 뜯어먹었겠지. 회칼로 저며서 육회로 먹거나. 아무튼 넌 이제 좆 됐다. 병신아.
-그런 거였나? 하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소화시킬 수 있다.
영욱은 특유의 포커페이스를 동원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하지만 영욱의 말과는 달리 뱃속에 있는 박상태의 피와 살이 주인에게로 돌아가기 위해서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지만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리고 인내는 영욱과 아주 친밀한 친구 사이라서 참는 것이라면 지독한 가려움이나 내장에 구멍이 날 것 같은 고통을 가리지 않고 견뎌낼 자신이 있었다.
-네 녀석의 위장이 아무리 튼튼해도 내가 포기하지 않은 내 피와 살을 절대로 흡수할 수 없을 것이다. 하하하!
-닥쳐! 싸움에서 진 주제에 깝죽거리기는…….
영욱은 얼른 녀석에게서 떨어진 다음 포크의 운전석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기계체조의 동작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기계 삽으로 녀석을 찍어 누른 상태에서 포크로 물구나무를 서기도 하고, 녀석을 못으로 여기며 강하게 망치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녀석은 끄떡도 없었다. 현실 세계에서라면 벌써 오징어포가 되었어야 정상이겠지만 마치 액체 금속으로 만들어진 터미네이터처럼 찌그러졌다가도 곧바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욱은 등골이 서늘했다. 하지만 기계체조를 이용한 공격을 결코 멈추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처음의 충격이 컸는지 여전히 영욱의 추가 공격으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물론 주둥이는 아직도 살아있었다.
-이 정도로 죽을 거라면 벌써 죽었겠지. 하하하!
-웃기지 마라. 네 녀석이 탱크를 더 이상 소환하지 못하는 걸 보면 너도 힘이 다 빠진 게 틀림없다. 누굴 바보로 아는 거야?
-맞아. 이번 라운드는 분명히 너의 승리다. 하지만 다시는 이런 행운이 없을 것이다. 그럼 또 보자. 하하하!
-흥! 내가 곱게 보내줄 것 같아?
-오고 가는 것은 내 마음이다. 아직 드림헌터가 아닌 너로서는 그걸 막을 방법은 전혀 없어. 하하하!
그 말을 마친 박상태가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마치 나타났을 때처럼…….
잠이 들거나 기절해야만 벗어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것은 순간이동으로도 가능한 듯했다. 그만큼 둘 사이의 수준 차이가 크다는 소리였다.
-젠장. 가버린 거야?
아무튼 박상태는 자신의 아까운 피와 살점의 일부를 포기하고 사라져버렸다. 그걸로 영욱에게 고통을 주는 것보다 자신이 당하는 피해가 더 많다고 판단한 듯했다.
박상태가 사라지자 녀석의 피와 살점들이 저항을 포기하더니 서서히 소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욱은 소화 흡수를 돕기 위해서 계속해서 기계체조의 기초 동작을 반복해야만 했다.
보통의 경우에는 운동이 소화 흡수 작용에 방해가 되지만 기계체조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운동 능력뿐 아니라 소화 흡수 능력도 최상의 상태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전기가 찌릿찌릿 흐를 때면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삼켜도 소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정신력이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뇌에 충분한 산소와 포도당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계체조는 정신력을 배가시키는 일에도 큰 도움이 되는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동작을 천천히 하지 않으면 생겨나는 정신력보다 소모가 더 크다.
박상태와의 싸움을 냉정하게 평가해 보자면 운이 좋아서 겨우 따낸 승리였다. 하지만 박상태가 얼마나 강한 괴물인지를 다시 한 번 알게 된 싸움이기도 했다.
드림헌터 중에서도 겨우 프레시맨이라고 하지만 영욱이 보기에는 이미 극강의 몬스터였다. 영욱은 또 다시 승리했다는 기쁨보다 넘기 힘든 높은 벽을 만난 절망감이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나마 기계체조가 통한다는 사실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이제 겨우 5퍼센트의 수준인 기계체조의 성취를 50퍼센트나 60퍼센트까지 끌어올린다면 승산이 전혀 없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그게 정말 쉽지 않은 일임을 영욱도 잘 알고 있다.
어젯밤 처음으로 전기의 흐름을 느끼고서 기초적인 입문이라고 할 수 있는 5퍼센트의 경지에 올랐지만 앞으로 6퍼센트의 경지가 되려면 얼마나 더 많은 훈련을 쌓아야할 지는 모를 일이다.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자면 처음에는 실력이 잘 느는 법이다.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르거나 벽을 만나야 실력이 더 이상 늘지 않는 법인데 기계체조의 경우는 입문이 그리 어렵지는 않은 대신에 그 다음부터는 아주 극악한 수준으로 실력이 늘어난다는 이야기를 사부로부터 들었다.
아무튼 영욱은 내장이 터져서 죽기는 싫어서 기계체조의 동작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가끔씩 무아지경에 빠져서 느낄 수 있는 찌릿찌릿한 느낌들이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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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억. 꺼어억.
영욱은 요란하게 트림을 해대면서 낮잠에서 깨어났다. 점심으로 급하게 먹은 도시락이 소화되지 않은 것인지 2QB 세상에서 뜯어먹은 박상태의 피와 고기가 아직도 덜 소화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트림 냄새가 아주 지독했다.
"욱! 냄새!"
"뭐야? 이 냄새는?"
근처의 잔디밭이나 나무 그늘에서 한낮의 데이트를 즐기고 있던 캠퍼스 커플들이 비명을 지르더니 사방으로 도망쳤다. 악취의 수준이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제길!"
영욱도 얼른 일어나서 화장실로 직행했다. 급한 볼 일도 해결하고 서둘러서 양치질도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지독한 냄새를 피운 장본인이니까 서둘러서 범죄의 현장을 벗어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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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화장실에 도착하고 보니 트림만이 악취의 원흉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급하게 볼 일을 본 다음 연거푸 물을 내려서 악취의 근원을 씻어 내려고 했지만 지독한 냄새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후각이 마비되어서 냄새가 사라질 만도 한데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온 몸에서 나는 냄새였잖아."
결국 자신이 흘린 땀에서 나는 악취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바디체인지나 탈태환골 과정에서 나온다는 그 유명한 노폐물은 아닌 듯했다. 달라진 게 별로 없으니까.
……
그 악취의 근원은 200명이 넘는 영혼을 괴롭히고 뜯어먹은 박상태의 체취가 분명했다. 바로 2QB 세상에 사는 드림헌터의 냄새이기도 하고, 육식동물들이 풍기는 지독한 노린내였다.
남자 화장실의 문을 통째로 걸어잠그고는 벌거벗은 채로 여러 차례 비누칠을 해서 몸을 씻고 나니 겨우 역한 냄새가 사라졌다. 물론 입고 있던 옷도 여러 차례 비누칠을 해서 세탁해야만 했다.
"어, 시원해!"
아직도 여름이 한창인 9월 초순이지만 계속해서 샤워하기에는 물이 벌써 차가웠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영욱은 꾹 참고서 찬물로 빨래와 샤워를 반복해야만 했다. 인내력 하나는 정말 알아줄 만했다.
아토피를 앓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내용이지만 아토피를 앓는 피부에 물이 닿으면 마치 소금을 뿌린 것처럼 따갑다. 그래서 아토피언들이 목욕을 기피하는 현상이 많은 편이고, 아토피언들의 대부분이 지저분한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더운 물로 씻으면 가려움은 더욱더 커진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겨울에도 찬물로 씻곤 하는데, 그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그게 영욱의 참을성을 키워주고 정신력을 강하게 만들어주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니 세상일은 참으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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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욱!"
"뭐야? 이 냄새는?"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아직 옷이 마르지 않아서 마치 물에 빠진 생쥐 모습으로 5교시 수업에 들어갔는데 냄새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영욱이 여러 차례 씻었지만 그 정도로 지워질 냄새가 아니었던 것이다. 강의실이 난데없는 악취 때문에 술렁거리더니 한 녀석이 용기를 내서 영욱에게로 다가오더니 따지고 들었다.
"이 고약한 냄새 말이야. 영욱 형에게서 나는 냄새 같은데?"
"응. 미안."
"대체 무슨 냄새야?"
"재래식 변소에 빠졌어. 그래도 삼십 분 동안 씻은 것이니까 조금만 참아라."
"형이 아무리 학회장이지만 다른 학우들의 수업에 방해가 되면 안 되는 거 아냐?"
같이 수업을 듣는 임창배라는 후배 녀석이 지금은 학회장을 거론할 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시비를 걸어왔다. 하지만 그 녀석 하나를 제외하면 악취 때문에 불쾌하다는 표정보다는 오히려 공포에 질린 듯이 주위를 훑어보는 영욱의 시선을 외면하기에 바빴다.
"내가 강의에 빠져서 학점이 펑크 나면 네가 책임질래?"
"그걸 내가 왜 책임져?"
"그러니까 정말 미안하지만 조금만 참아 줘."
"이건 정말 밭에 거름을 뿌린 것도 아니고……."
"그쯤 해 두라니까……."
"아, 알았어요."
그나마 툴툴거리던 창배 역시 영욱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험하게 인상을 쓰자 바로 꼬리를 말고 말았다. 다른 친구들을 대신해서 나서긴 했지만 그 역시 영욱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욱은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학생들의 행동에서 의미를 찾아내려고 생각에 잠겼다. 박상태의 농간 때문에 1학기를 지나면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영욱에게 냉담하고 싸늘한 반응을 보이곤 했는데 이제는 다들 겁에 질려 있었다. 아마도 박상태의 냄새를 오늘 영욱에게서 맡은 듯했다.
은영은 물론이고 교수님들과 대부분의 학우들이 영욱을 따돌린 이유가 박상태가 저지른 수작임이 백일하에 밝혀졌으니 그들이 가련하다는 느낌보다는 묘한 배신감이 느껴졌다.
이제는 오히려 자신의 눈치를 보면서 설설 기는 걸 보니 그동안의 서러움이 봄눈 녹듯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래서 더욱더 악취와 기세를 뿜어내면서 강의실 내의 학우들을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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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수업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강의하러 들어온 교수도 영욱에게 시비를 걸었다. 놀랍게도 황 교수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게 무슨 냄새야? 학회장 어디 있어?"
"죄송합니다. 제 몸에서 나는 냄샙니다."
"어디 거름구덩이에라도 빠진 거야?"
"예."
"출석한 걸로 인정해줄 테니까 학교 앞 사우나에라도 가서 좀 씻어. 지독한 냄새 때문에 다른 학생들이 사색이 되어 있잖아."
"예. 교수님."
"잠깐! 수업에서 빠지는 대신에 오늘 수업 내용과 연관된 내용을 정리해서 100장짜리 리포트를 제출해."
어째 잘 넘어가는 것 같더니 황정희 교수가 갑자기 폭탄선언을 했다. 금속조직학을 강의하는 그 역시 그 분야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다.
금속조직학은 금속의 성질을 좌우하는 금속의 조직에 대하여 광범위한 응용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기초적인 사항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학문이다.
마치 세포의 조직을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보는 것처럼 금속의 조직을 전자현미경과 엑스레이를 활용해서 관찰하는 최첨단 학문이기도 하다.
"교수님. 그냥 수업을 들으면 안 되겠습니까?"
"안 돼. 정 듣고 싶으면 복도 밖에서 유리창을 열고서 들어. 자넨 키가 커서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고맙습니다. 교수님."
영욱은 비록 복도 밖이지만 리포트를 제출하지 않고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하지만 황 교수는 영욱의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이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리포트는 제출해야 해."
"아니, 왜죠?"
"나노바이오 과목을 가르치는 이희승 교수가 그러더군. 자네가 리포트를 꽤 쓴다고 말이야. 그래서 기회가 생기면 나도 자네의 리포트를 구경하고 싶었어."
친구 따라 장에 간다는 이야기와도 다를 바가 없는 주장이었지만 강의실에서는 교수가 갑의 입장이니 형기로서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그렇지만 술을 마시고 수업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술 냄새를 피운 것보다 똥 냄새를 피운 게 더 죄질이 나쁘다는 거 몰라?"
"알겠습니다. 리포트를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학기에 그런 일이 있었다. 이희승 교수의 다소 부당한 지시였지만 을의 입장인 영욱은 어쩔 수 없이 주독야경의 바쁜 와중에도 나노바이오 분야의 활용에 관한 장문의 리포트를 써서 제출했다.
심장 치료를 목적으로 개발된 나노바이오로봇과 관련해서 자신의 견해를 조금 보탠 것이었는데 그게 이희성 교수의 관심을 끌었던 모양이다.
영욱의 리포트에 언급된, 사람의 심장을 치료하는 애벌레 로봇Caterpillar robot의 등장은 미국 카네기 멜론 대학의 로봇 연구소에서 만든 작품이다.
이 연구소에서는 심장 표면 안쪽을 기어 다니면서 치료용 약물을 직접 전달하는 애벌레 모양의 로봇을 개발했는데, 지금은 돼지에서 그 성능을 실험하고 있다고 한다.
이 작은 로봇은 불과 2센티미터에 불과하며 분당 18센티미터를 이동할 수가 있다. 이동과 조작은 몸 밖에서 선wires으로 연결해서 직접 제어할 수 있다.
영욱은 이 로봇이 진정한 나노의 경지는 아니지만 앞으로 과학 기술의 발달과 함께 크기가 점점 더 소형화된다는 전제하에 멀지 않은 미래에 나노바이오 제품의 실용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뇌나 근육의 곳곳에서 필요한 약물이나 산소나 영양분을 필요한 시기에 주입할 수 있다면 인간은 오랜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달리거나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크기가 작아지는 대신 많은 숫자를 투입할 수 있으니 꼭 로봇의 형태가 아니라도 괜찮을 것 같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자면 약을 감싸는 캡슐의 형태라도 특정 조건에서 반응하게만 조작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영욱의 아주 소박한 주장이었다.
DDS<drug delivery system> 즉, 약제 수송 시스템은 약물을 전신에 분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부위에만 도달하도록 만드는 방법으로 약을 감싸는 캡슐의 성질을 이용해서 만들어진다.
그 캡슐에 아주 작은 구멍을 뚫어서 약효가 오래오래 지속되도록 만드는 기술은 이미 개발되어 있지만 개구리처럼 동면을 취하다가 필요한 순간에 방출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나노바이오 연구의 단기적인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영욱의 주장이었다.
이희승 교수가 그 리포트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것까지는 좋은데 친구인 황정희 교수에게 자랑삼아 떠벌인 것이 영욱에게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었다.
물론 학생이 대학 공부의 엑기스라고도 할 수 있는 리포트를 쓰는 것이 불행일 리는 없지만 밤에 잠을 잘 수 없는 영욱에게는 대단히 성가신 일임이 분명했다.
아무튼 영욱은 또 금속조직학에 대한 한 편의 대하소설을 써서 리포트로 제출해야만 하게 생겼다. 무사히 졸업하자면 절대 갑의 위치에 해당하는 교수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을의 비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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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나자 영욱은 서둘러서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로서도 밀폐된 공간에서 악취를 피우는 일이 즐거울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 자신에게로 빠르게 달려온다는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은영이었다. 늘 겉돌기만 하면서 영욱을 약 올리기에만 열중하던 그녀가 오늘은 무슨 일인지 남자친구를 떼놓고는 얼굴이 상기된 채로 자신의 곁으로 달려온 것이다.
영욱은 은영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지만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고는 외면하기까지 했다.
"오빠!"
"지금 나를 부른 거야?"
"그래. 나랑 이야기 좀 해."
은영의 말투가 다시 반말로 돌아와 있었다. 그것은 선후배로서 이야기하자는 소리가 아님을 뜻했다. 하지만 영욱은 시큰둥한 표정을 견지堅持했다. 이제 와서 그녀와 다시 교제할 생각은 추호도 없기 때문이다.
"나 씻으러 가야 하니까 용건만 간단히 말해."
"먼저 사과할게. 내가 바보였어."
"뜬금없이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박상태 그 자식이 내 꿈에 나타나더니 오빠와 헤어지지 않으면 오빠를 잡아먹을 거라고 협박하기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지자고 했던 거야."
놀랍게도 은영의 입에서 먼저 사과의 말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잘못해도 사과하는 법이 없었던 그녀로서는 정말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그래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영욱으로서는 상했던 자존심이 어느 정도 회복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영욱이 피운 지독한 악취가 오히려 그녀에게는 용기를 준 듯했다.
"너를 잡아먹는다는 게 아니고?"
"나는 영양가가 없어서 먹을 가치도 없다고 했어."
"그렇다면 내 안전을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떠난 거야? 정말 눈물 없이는 들어줄 수가 없는 이야기구나."
"좋게 표현하자면 그런 셈이니까 너무 비꼬지 마.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학과 친구들 대부분이 다 그래. 박상태는 우리가 오빠 근처에 가면 오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협박했어."
박상태가 입을 닫은 채로 그저 두들겨 패기만 하는 경우는 상대의 항복을 받아내서 영혼의 일부를 취할 목적이 있을 때나 하는 행동인 듯했다.
하지만 겁이 많은 학과 친구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던 듯했다. 그것은 박상태가 보기보다는 훨씬 더 교활함을 의미했다.
물론 은영의 말이 진실이라는 가정 하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다. 영욱은 웬지 은영의 말에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상태가 그 동안 도합 200명이 넘는 영혼을 뜯어먹느라고 바빴을 텐데 한가하게 그저 협박만 하고 말았다는 게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하지만 캐물어야할 이유도 없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알려줘서 고마워. 그런데 그 사실을 내게 알리면 그 자식이 너를 가만 두지 않을 텐데?"
"그건 이미 각오하고서 하는 행동이야. 그런 식으로 오빠와 헤어져서 늘 마음이 불편했거든. 그런데 오늘 오빠에게서 그 자식의 냄새가 나기에 용기를 낸 거야."
박상태에게 당할 각오까지 했다니 은영으로서는 나름 용기를 낸 듯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영욱에게서 나는 악취였다고 밝혔다.
그녀도 영욱의 사정을 잘 알고 있고, 게다가 예전에 영욱의 이야기를 잘 알아듣기 위해서 <비몽사몽>까지도 읽었으니 대충이나마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욱의 몸에서 진동하는 악취의 의미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 악취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하지도 않는 듯했다.
"이 악취?"
"응. 마치 수컷 고양이의 오줌처럼 지독한 냄새가 바로 박상태의 냄새였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그 녀석을 죽도록 패주고 심지어 물어뜯기도 했지. 이 냄새가 바로 그 승리의 증거인 셈이지. 네가 믿어주지도 않았지만 나는 결국 해냈어."
"그건 정말 미안해. 그런데 그 괴물 녀석을 오빠가 정말 이겼다는 거야?"
"솔직하게 말하지.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겨우 한 번 우세를 점했을 뿐이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오빠! 우리 다시 시작해. 응?"
냄새의 의미를 재차 확인한 은영에게서 의외의 제안이 튀어나왔다. 그녀로서는 영욱이 다칠까봐 어쩔 수 없이 헤어졌는데 이제는 영욱이 박상태를 이길 수 있으니까 원래의 관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리였다.
논리상으로는 별로 문제가 없는데 그녀는 사랑을 원하는 게 아니라 강자를 사귀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영욱의 생각과는 달리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고 생각지는 않는 듯했다.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났지만 영욱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아직도 식지 않은 듯했다. 영욱은 어쩌면 처음부터 식을 만큼의 감정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어. 그리고 그 자식이 너에게 진짜로 해코지를 할지도 모르니까 그냥 지금처럼 선후배로 지내자. 어쩌면 너를 인질로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 네 안전을 위해서도 그게 더 나을 거야."
"오빤 벌써 내가 싫어진 거야?"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아직도 너뿐이야. 하지만 지금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비상 상황이니까 내 말 들어."
영욱은 자신이 내뱉는 말과는 달리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미련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서 매정하게 단언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가 온 뒤에 땅이 굳어지는 것과 쏟아진 물을 주워 담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난 다음이었다. 지금 영욱이 느끼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그저 미련일 뿐이다.
"알았어. 학회장으로서 오빠가 해야 할 일들은 부학회장인 내가 다 처리할 테니까 훈련이나 열심히 해."
"내가 훈련하는 걸 본 적이라도 있어?"
"응. 여름 방학 동안 가끔씩 공원묘원에 가서 오빠의 모습을 몰래 쳐다본 적이 있었어. 그게 바로 내 마음이야."
"헷갈리게 만들지 마. 너는 새로 사귄 애인과 함께 해외여행을 떠났다고 알고 있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건 일부러 그렇게 소문을 낸 것뿐이야. 박상태 그 자식이 협박해서 어쩔 수 없었어."
영욱은 협박을 당했다는 은영의 말투에서 박상태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끝마다 그 자식이라는 욕을 섞어서 사용하는 걸 보니 오히려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물론 영욱은 그러한 의문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새 애인과 잘 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좀 아쉽구나."
"그 오빠는 그저 그런 역할을 했을 뿐이야. 아무튼 그곳에서 밤마다 포클레인을 타고 마치 댄스 베틀을 벌이는 것처럼 맹렬하게 훈련하는 걸 봤어. 그런데 꿈속 세상에서도 그렇게 멋있게 싸운 거야?"
한밤중에 여자 혼자서 겁도 없이 공원묘원으로 영욱을 보러 왔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이 영욱을 떠난 적이 없음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것도 '밤마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한두 번 지켜본 게 아니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간접적인 사랑 고백에도 불구하고 영욱은 별로 감동하지 않았다.
"응. 녀석이 탱크를 몰고 나타났다는 사실만 빼고는 거의 똑같아."
"미쳤어. 탱크 소환이 정말 가능해?"
"너도 <비몽사몽>을 읽어봤으니까 잘 알 거 아냐. 그 녀석의 말로는 자신이 드림헌터 중에서도 겨우 프레시맨 수준이라는데 내 느낌으로는 티라노사우루스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놈이었어."
영욱은 한 번의 무승부와 한 번의 판정승으로도 박상태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했다. 운이 좋아서 이겼지만 가슴 한 구석에는 늘 서늘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탱크 소환이라는 말에 은영이 깜짝 놀라는 것과도 다르지 않았다.
"오빠가 그렇게 힘든 상황인데도 여자 친구라는 사람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힘들게 만들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 몬스터 녀석이 꾸민 짓이니까 너로서는 어쩔 수 없었을 거야. 그리고 나도 너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고……."
"힘들지 않았어?"
"평소 같으면 너와의 이별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버렸을 지도 모르겠지만 워낙 다급한 상황이라서 그렇게 큰 스트레스가 되지는 않았어. 그럼 씻으러 가볼게."
"응. 오빠."
말을 하면서 은영의 반응을 살핀 결과 의심스러운 점도 많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날아갈 것 같았다. 겉으로는 끝까지 시큰둥하게 반응했지만 이러한 반전이 싫을 리가 없다.
태어나서 엄마를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사랑했던 여자인데 그녀로부터 배신당했다는 것은 거의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느껴지는 큰 아픔이었다.
서로가 싫증이 나고 사랑이 식어서 헤어진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일방적으로 이별 선고를 받아야 했으니 자괴감은 물론이고 패배감마저도 들었다. 그런 이별 경험이 여러 차례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겪는 이별은 정말 가슴 아픈 경험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싫어지고 실망스러워서 떠난 게 아니라는 걸 확인했으니까 온통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굴욕감과 자괴감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어쩌면 은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눈꺼풀을 덮고 있던 사랑이라는 콩깍지가 사라지자 마냥 아름다고 좋게만 보이던 그녀에게서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욱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직도 그녀는 완벽에 가까운 여신이었다. 외모로 보나 키로 보나 센스로 보나 적어도 이곳 강원대에서는 퀸카가 분명했다. 최고의 퀸카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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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저 오빠는……."
은영은 다시 시작하자는 자신의 제의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함은 물론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영욱의 뒷모습을 보며 짜증이 잔뜩 섞인 일성을 내질렀다.
자신이 사귀자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뜻에 따를 줄 알았는데 전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실망이 컸던 것이다.
"꼴에 자기도 남자라고 자존심을 세워보겠다는 거야? 뭐야? 그래봐야 나를 거부할 수는 없을 거야."
은영은 투덜거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성급함을 반성하고 있었다. 둘째 언니가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치지 말라고 했는데 자신의 성급하고 섣부른 판단으로 영욱에게 절교를 선언했던 것이다.
새로 사귄 복학생이 꽤나 그럴 듯하게 보여서 영욱을 차버렸지만 막상 사귀어보니 완전히 맹탕이었다. 부자이긴 했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부자라고 해서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영욱이 박상태의 냄새를 풍기는 일이 발생했고, 그 의미를 잘 아는 은영으로서는 다시 영욱과 교제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괜찮아. 오빠에게 새로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충분히 빼앗을 자신이 있는데 아직도 솔론데 돌이키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하지만 평소에도 영욱의 자존심이 꽤나 강하고, 뒤끝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실수였음을 이제야 겨우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매달리면 결국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의심치 않았다.
"언니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거야? 귀신이 따로 없네. 하지만 이미 다른 사람의 제자가 되어버린 걸 이제 와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은영은 알지도 못할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으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
킁. 킁.
"젠장……."
학교 앞 사우나에서 열심히 씻어냈지만 육식동물의 냄새는 끝끝내 가시지를 않았다.
그나마 이제는 악취로 느껴질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야릇한 냄새가 났다. 육식동물의 노린내와 비슷한 냄새였다.
어쩌면 그게 드림헌터가 가지는 고유의 체취일 지도 몰랐다. 영욱은 자신이 얼떨결에 드림헌터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냄새를 감추지 않으면 쓸데없이 다른 드림헌터들의 주목을 끌거나 심지어 곤란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킁. 킁.
"이제 좀 낫군."
그래서 사우나에서 제공하는 남성용 스킨로션을 듬뿍 발라서 냄새를 지우고자 했다. 향이 강한 화장품을 바르니까 냄새가 어느 정도는 숨겨진 듯했다.
*육감의 발달
킁. 킁.
"뭐야? 이 노린내는?"
하지만 사부 진중권은 화장품의 진한 냄새를 뚫고서 노린내의 정체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젠장! 비누로 수십 번을 더 닦았는데 그래도 냄새가 나요?"
"내가 바본 줄 알아? 그런데 설마 그 녀석을 이긴 거야? 벌써?"
"예. 사부님. 운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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