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절이라고요? 설마 아저씨를 사부로 모시라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왜 아니겠어? 그런 절차도 없이 내 소중한 기계체조를 가르쳐줄 것 같아?"
"혹시 절을 아홉 번이나 하라는 것은 아니겠죠?"
"절을 아홉 번씩이나 받을 생각은 전혀 없어. 딱 세 번만 하면 돼."
구배지례는 아홉 번 절하는 것이 아니라 절을 하는 아홉 가지의 방법을 말하는데, 영욱이 그것을 빗대어 말하자 진중권도 바로 맞받아쳤다. 절은 세 번 하는 것이 가장 큰 예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형이나 사저師姐 들은 없어요?"
"없어."
"연세도 지긋하신 것 같은데 아직까지도 제자가 없어요?"
"요즘 젊은이들이 포클레인 운전처럼 험한 일을 배우려고 해야 말이지. 게다가 너처럼 재능 있는 녀석들도 드물고 말이야."
"좋아요. 그럼 저녁에 뵙죠."
"말 나온 김에 지금 당장 절하는 게 어때?"
"그래도 신성한 의식인데 목욕재개라도 하고 해야죠."
일단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영욱으로서도 곰곰이 생각해보려는 의도였다. 요즘 세상에 제자가 되기 위해서 절을 하는 게 흔치도 않지만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파악하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리고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진중권을 물심양면으로 사부로 모실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것이었다. 영욱은 한 번 맺은 인연을 쉽게 저버리는 성격은 결코 아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맺은 인연들이 별로 없어서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에서 여자 친구 은영의 갑작스러운 이별 선언은 영욱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은영의 입에서 그런 말이 먼저 나오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그녀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식물인간이 되더라도 죽을 때까지 책임졌을 것이다.
"말만 해놓고 멀리 도망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아저씨나 도망가지 마세요. 저는 강해져야할 분명한 이유가 있으니까 염려마세요."
"좋아. 그럼 저녁에 보자."
"예."
영욱은 사부가 될 지도 모르는 진중권과 조금 더 놀아주고 싶었지만 1교시 나노공학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일어서야만 했다.
그리고 진중권도 낮에 자둬야 다시 밤에 작업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더 이상 술을 마시게 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애마 포크
드림헌터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사이코패스라고도 볼 수 있는 박상태와 얽히고 난 후부터 영욱이 몸으로 느끼는 세상은 갑자기 변해버렸다.
서기 2013년의 세상만이 아니라 꿈속의 세상인 2QB의 세상은 분명히 존재했고,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영욱으로서는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비몽사몽의 저자 이은석 교수는 어쩌면 두 세계에 모두 발을 걸치는 사람들을 대량으로 생산하려는 저의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꿈을 꾸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그들 중에는 꿈을 꾸고도 꿈을 꾸었다는 사실마저도 망각해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누구나가 밤마다 꿈을 꾸는 세상이 될 게 분명했다.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꿈을 꾸지 않는 사람마저도 사냥하려고 드는 드림헌터들이 설치고 다닐 테니까 누구나 문단속을 단단히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대를 뜯어먹어야 강해지는 약육강식의 세상이라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
사실 자신도 포클레인을 동원한다면 사람들이 곤히 잠든 건물이나 담벼락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문단속을 하는 것보다는 그럴 듯한 무기를 장만하고, 하루 빨리 강해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비책이 될 것 같았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처럼.
'그런데 박상태 이 새끼는 왜 다시 찾아오지 않는 것일까? 무슨 꿍꿍이속이 있기에 이렇게 꾸물거리는 거야?'
녀석이 킹콩처럼 덩치를 키웠지만 영욱 자신이 소환했던 포클레인을 제압하지는 못했으니 다른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껄끄러운 상대인 영욱을 포기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선가 다시 마주치게 되거나 찾아오게 될 것이니 영욱으로서는 빨리 강해져서 그를 제압하는 길만이 안전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 녀석이라면 뜯어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영욱의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다. 이미 마흔 명이 넘는 사람들을 뜯어먹은 괴물이니까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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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욱, 일어서!"
"예. 교수님."
언제나처럼 열정적으로 수업을 진행하던 이희승 교수가 갑자기 싸늘한 표정을 짓더니 수업삼매경에 빠져있던 영욱을 일으켜 세웠다.
"내가 왜 너를 일으켜 세웠는지 잘 알고 있겠지?"
"예?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괘씸한 녀석이군. 감히 나를 속이려고 하다니……."
"예? 속이다니요? 제가 왜 교수님을 속입니까?"
"끝까지 자백하지 않는구나. 그래, 무슨 일로 아침부터 한 잔 걸친 거냐?"
"죄, 죄송합니다. 철야작업을 같이 한 어르신이 자꾸 권하는 통에 딱 한 잔만 마셨는데 그게 문제였군요. 교수님의 후각이 아주 예민하신 것 같습니다. 하하!"
완강하게 오리발을 내밀던 영욱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양치질에다 구강청결제로 씻어내기까지 했는데도 이희승 교수의 코를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헌데 철야작업이라니?"
"요즘 밤마다 공원묘원에서 포클레인 기사로 알바를 뛰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밤을 샌다고? 안 무서워?"
공원묘원 알바라는 소리에 이희승 교수가 솔깃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꼬치꼬치 캐묻는다는 느낌마저도 들었다. 하지만 영욱으로서는 숨길 내용도 아니고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아서 조금 섬뜩한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일당이 꽤나 짭짤해서 벌써 두 달이나 계속 이어오고 있습니다."
"두 달이라고? 그럼 잠은 언제 자고?"
"낮에 잠깐씩 자두면 충분합니다."
"젊음이 좋긴 좋군. 하지만 내 수업 시간에 술 냄새를 피우는 것은 곤란해."
"죄송합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알겠어?"
"예. 주의하겠습니다."
"좋아. 이제 자리에 앉아도 좋아. 그럼 다시 수업을 진행하도록 하지."
영욱은 굳이 고백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지만 굳이 숨길 이유도 없어서 더하지도 않고 빼지도 않은 사실 그대로를 말했다. 물론 밤에 잠을 자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빼고.
하지만 이희승 교수의 표정은 묘했다. 공원묘원 알바에 대한 반응도 그랬지만 영욱이 밤잠을 자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는 듯했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긴 했지만 영욱에게 일부러 시비를 건 듯했다. 사실 대학생이 술 한 잔 마시고 수업에 들어가는 것이 음주운전처럼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영욱의 옛 여자 친구가 되어버린 은영이 헤어지기 전에 자신이 뱉었던 말을 번복하고는 얼마 전부터 같은 과의 복학생과 사귀기 시작했다. 새로 탄생한 닭살 커플은 계속해서 영욱의 주변을 알짱거리며 신경을 거슬러 놓았다.
아마도 영욱의 심력을 소모시키려는 박상태의 짓인 듯했다. 하지만 영욱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밤낮으로 전쟁과도 같은 하루를 지내다 보면 사랑 따위의 그런 사소한 일에 소모할 감정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속으로는 마음이 몹시 상했지만 겉으로 표현하기는 죽기보다도 싫어서 참고 또 참아냈다.
그러한 영욱의 포커페이스는 꽤나 강력했다. 서로 잘 어울리지도 않는 바퀴벌레 커플의 그러한 작업이 별로 효과가 없다고 판단되었는지 이번에는 교수에게 압력을 넣어서 시비를 걸고 나서게 한 듯했다.
물론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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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봐라!"
"예! 사부님."
그날 밤 영욱은 정말 놀라운 경험을 해야만 했다. 진중권에게 절을 세 번이나 한 것은 그저 해프닝에 불과했다. 영욱의 절을 모두 받고서야 비로소 사부가 된 진중권은 제자 영욱을 위해서 숨겨두었던 자신의 능력을 마치 살풀이처럼 보여주었다.
길이가 무려 10미터나 되는 기계 팔과 기계 삽을 이용해서 거대한 포클레인을 마치 비보이B-boy처럼 가볍고 현란하게 움직였다.
기계 팔로 짚고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포클레인의 몸체를 전후좌우로 들어 올려서 빠른 방향 전환과 위치 이동의 신기술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차체가 거의 90도로 섰다가 땅으로 떨어지면서 내려찍는 기계 삽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것은 마치 수컷 산양들끼리 높이 일어섰다가 떨어지면서 뿔끼리 부딪치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뿐만 아니라 차체와 함께 빠르게 회전하면서 발휘하는 공격은 마치 태권도의 돌려차기를 연상케 했다. 그것도 한 바퀴가 아니라 두 바퀴를 연속해서 회전하는 이단 돌려차기까지도 가능했다.
영욱은 자신의 선택이 이렇게 대단한 결과를 불러올 줄은 정말 예상치 못했다. 사실 무엇을 가르쳐 줄지는 알 수가 없지만 자신보다는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해서 사부로 모시기로 결심했다. 더구나 박상태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이용해서 조여오고 있는 상황이니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계체조가 이 정도로 대단한 것이라면 영욱 자신이 따라다니면서 애원해도 쉽게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수준인데 오히려 진중권이 강권하다시피 한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정말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기보다는 사부 진중권에게 무슨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말기암 선고를 받고는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든지 아니면 다른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을 것이다.
진중권이 가지고 있는 사연이야 어쨌든 간에 영욱으로서는 정말 대단한 행운을 만난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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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살풀이는 굿판처럼 진득하게 이어지더니 결국은 끝이 났다. 영욱은 깊은 감명을 받고는 기립박수까지 치면서 사부와 눈을 맞추려 했다.
"우와! 사부님. 정말 대단하세요."
"뭘 이 정도를 가지고 호들갑이냐? 너도 곧 할 수 있을 게다."
"그게 가능할까요?"
"이 사부에게 맞아죽기 싫다면 해야 할 거다. 그럼 지금부터 나를 따라서 움직여 보거라. 이게 바로 기계체조의 기초 동작들이다."
사실 진중권의 포클레인이 보여준 움직임은 직접 보지 않았다면 죽었다가 깨어나도 따라하지 못할 정도로 난해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보았다고 하더라도 아주 천천히 보여주지 않으면 결코 따라할 수 없는 현란한 동작들이 마치 총검술 구분 동작처럼 펼쳐졌다.
영욱은 총력을 기울여서 기계체조의 기초 동작을 배워나갔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기계체조를 연습한다고 해서 포클레인의 차체에 내공이 쌓이는 것은 아닌 듯했다.
다만 평소에 움직이지 않던 각도로의 움직임에 조금씩 익숙해졌고, 그런 색다른 동작으로 인해서 느슨해질 수도 있는 볼트들을 공구로 바짝 조여 주어야 한다는 사실만 깨달았을 뿐이다.
아직까지는 연습 초기 단계라서 그런 것일 지도 몰랐다. 왜냐면 진중권의 낡은 포클레인은 자신의 포클레인과는 뭔가 좀 다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욱은 밤을 새워서 진중권이 가르쳐준 기초 동작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아직은 익숙지 않은 탓에 작업량은 조금 줄어들 수도 있겠지만 기계체조의 연습은 곧 작업과도 직결되기 때문에 하루 일당을 받아내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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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새벽같이 출근한 김길태 사장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영욱이 열심히 연습하고 작업한 덕분에 작업량이 어제보다 더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욱의 제의를 듣고 나자 김길태 사장의 표정은 더욱더 밝아졌다.
"좋아. 삼 년 동안 일한다는 조건으로 지금 네가 몰고 있는 포클레인을 넘겨주지."
"고맙습니다. 사장님."
"내가 더 고맙지. 앞으로도 잘 해보자고."
영욱에게 넘긴 포클레인의 신차 가격은 1억 5천만 원 정도이지만 연식이 있으니 중고 가격으로는 5천만 원이 조금 넘을 정도다.
포클레인을 불하해주고도 영욱의 일당으로 여전히 40만 원을 지불해야 하지만 계약 기간이 삼 년이면 충분히 남는 장사라는 계산이 나온 것이다.
왜냐면 영욱이 알바를 뛰더라도 어차피 한 대의 포클레인을 맡아서 운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포클레인의 감가상각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고, 자신의 포클레인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의 임금에 비하면 지불하는 알바 비용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영욱은 이제 보통 기사들의 네 배에 달하는 일을 해내는 괴물이니까 김길태 사장으로서는 대환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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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너를 포크라고 부르겠어."
그것은 영욱으로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애마에게 이름까지 붙여주며 포클레인 오너가 된 것을 자축했다.
어차피 포클레인과는 떠날 수 없게 된 이상 삼 년의 장기 계약은 별로 문제될 것도 없었다. 2년 동안 대학을 마치고 일 년만 더 근무하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달 수입이 결코 적지 않기에 생활비는 물론이고 추후 결혼하거나 성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저축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이제 자신의 애마가 생겼으니 현실 세계에서 기계체조 수련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을수록 2QB 세상으로 소환해서 운전하는 포크의 위력이 더 커지고 정신력의 소모는 더 줄어들 것이라 기대했다.
그것은 꿈속 세상에서 포클레인을 소환하고 움직이는 원동력이 정신력이지만 결국 평소에 하고 있던 일이거나 잘하는 것들을 형상화시키고 움직이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자기 소유의 물건이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예를 들자면 영욱도 탱크를 소환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조작 경험이 전혀 없으니 조종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탱크의 운전 방법을 몰라도 정신력으로 움직이고 심지어 포탄을 발사할 수도 있다.
다만 형편없이 느린 속도로 움직이거나 돌팔매질보다도 못한 포탄이 발사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것마저도 정신력이 아주 강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포클레인을 한 번 소환해봄으로써 간단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소환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소환하더라도 유지비가 아주 많이 필요한 탓에 지속 시간이 극단적으로 짧은 조루성 소환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소환된 탱크의 크기가 작아져서 미니 탱크나 장난감 수준의 탱크가 소환될 가능성도 높다.
어떤 형태의 도구를 소환해도 결국 상대방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위력은 자신의 정신력 크기와 그 소모량에 비례한다. 그러니 상대가 소환한 총을 맞는다고 해도 현실처럼 즉사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총 맞은 것처럼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기는 하겠지만…….
이러한 내용들은 박상태가 거인으로 변해서 자신을 짓밟고, 또한 자신이 포클레인으로 대항해 보았던 경험으로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보편적인 생물들처럼 치명적인 급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게임 속의 캐릭터처럼 보유한 체력이 다 닳아야만 비로소 죽는 개념과도 흡사했다.
2QB 세상에서는 체력이 아니라 정신력이 다 닳아야 하지만 영혼에 급소가 있을 리 없으니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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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이 진중권의 제자가 되어서 기계체조의 수련에 매진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6월 중순이 되자 각 대학들은 일제히 기말고사를 치르고는 길고 긴 여름 방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영욱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춘천에 남기로 했다.
"집에 안 와? 왜?"
"3학년이 도서관에서 공부해야지 집에 갈 시간이 어디 있어요? 대신에 자주 연락드릴 게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부모님에게는 취업 준비를 위해서 공부한다는 핑계를 댔다. 물론 취업 공부보다는 기계체조의 수련에 밤과 낮 시간을 모두 투자할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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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이 처음에 느꼈던 느낌처럼 사부 진중권은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모든 것을 필사적으로 가르치려고 들었다. 마치 대학병원에서도 포기한 말기암 환자처럼.
"그게 아니라니까. 다시 해 봐."
"예. 사부님."
영욱의 동작이 0.1퍼센트만 달라도 곧바로 진중권의 지적이 이어졌다. 물론 그것은 동작에 관한 지적만이 아니었다. 움직이는 속도와 균형 감각 역시 지적의 대상이었다.
"그게 아니라니까."
"죄송합니다. 다시 해볼게요."
길고 긴 여름방학 동안 밤낮으로 작업과 기계훈련이 이어졌다. 주간 작업과 철야 작업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해낸 것이다. 그리하여 70여 일에 이르는 여름 방학이 금방 지나가고 말았다.
찌릿.
여름 방학이 끝나는 날 밤, 무아지경에 빠져서 진중권의 움직임을 흉내 내던 영욱은 어느 순간 자신의 몸속에서 전기가 흐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 전기가 자신의 몸을 한 바퀴 돈 다음 애마 포크에게로 흘러가더니 마치 자신의 몸에서처럼 움직인다는 느낌으로 이어졌다. 포크와 자신이 연결된 것이었다. 아직 한 몸이 된 것은 아니지만…….
인체 역시 신경계에 의한 전기 신호로 이루어지는 복잡한 네트워크다. 결국 기계체조는 이러한 전기 신호의 강화와 조작하는 기계까지로 범위를 확장시키기 위한 하드 트레이닝이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전기가 계속해서 흐른다는 느낌이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느낌이 이어지는 동안의 일체감은 이미 영욱의 몸과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포크가 자신의 몸이나 마찬가지라는 일체감이 바로 그것이다.
찌릿.
수련을 계속하니 전기가 흐르다가 끊어지는 현상이 자꾸만 반복되었다. 하지만 그 발현 빈도가 조금씩이나마 높아지기 시작했다. 영욱은 무아지경에 빠져서 포클레인으로 비보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팔이 하나뿐인 외팔이 비보이가 유일하게 남은 손으로 땅을 짚고 팽이처럼 회전하거나 물구나무를 서는 것처럼 거대한 포크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동작의 부드러움과 빠르기로 보자면 아직까지는 별 것 아니지만 드디어 영욱도 포클레인의 무게가 자신의 뜻대로 줄어들었다 늘어났다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움직일 때는 가능하면 가볍게, 작업하거나 타격을 가할 때에는 차체 무게 이상이 되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 물론 아직은 겨우 10퍼센트 정도의 가감만이 이루어질 뿐이었다. 그래도 그 의미는 원활한 중심 이동처럼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영욱은 여름 방학을 거의 다 소모하고서야 겨우 사부 진중권이 가르치고자 하는 부드러운 움직임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기계체조의 파괴력과 작업 속도의 비밀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포클레인 역시 기계 팔로만 뻣뻣하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삽질 역시 원활한 체중 이동과 허리의 정교한 움직임과 든든한 하체의 도움이 필수적이듯이 포클레인의 작업 역시 그러한 총체적인 움직임이 필요했던 것이다.
빠른 반사 신경의 필요성은 효과적인 전투를 위해서도 요구되지만 효과적인 작업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던 것이다.
무지막지한 철골 구조물로 하는 작업이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에는 흙도 있고, 돌도 있고, 나무뿌리도 있고, 커다란 바위도 숨어있으니 빠른 힘의 가감이 무엇보다도 절실했다.
넓게 보고 미리 예측하는 안목도 중요하지만 순간순간의 반응 속도 또한 무엇보다 중요했다. 땅속을 들여다보는 눈이 없는 한 빠른 반응만이 살 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연료의 절감과 포클레인의 고장 감소와 작업 속도의 비약적인 향상으로 연결되었다.
우웅우웅.
영욱은 자신의 애마 포크와 혼연일체가 되어서 기계체조의 수련 겸 작업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어갔다. 이 모든 것은 영욱 몸과 포크의 차체 전체를 관통해서 흐르는 전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아직은 생체 전기 수준의 미약한 전기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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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겨우 기계체조 세상에 입문했군."
영욱이 오랜 시간의 무아지경에서 깨어나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사부 진중권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한마디 뱉었다.
5월 말에 영욱을 제자로 받아들였으니 근 100일 만에 이룬 쾌거였다. 퉁명스러울 정도로 투박한 표현이지만 진중권은 제자의 작은 성취를 진심으로 기뻐했다.
"고맙습니다. 사부님. 그런데 이 정도면 상당한 수준인 것 같은데 겨우 입문이라고요?"
"그래. 이제 겨우 5퍼센트 정도의 작은 성취일 뿐이야. 물론 배운 기간을 고려하자면 그 정도도 대단하지만 네 적을 무찌르려면 아직도 멀었어."
"그건 잘 알고 있어요. 아무튼 오늘 작업은 충분히 한 셈이니까 해장 막걸리나 한 잔 하러 가시죠. 시간이 좀 이르지만 선술집은 이미 열었을 겁니다."
"당연하지."
겨우 5%의 성취라고 하니까 총 20권의 책을 마스터해야 하는데 이제 겨우 한 권을 익힌 셈이다. 그래도 천자문을 뗀 것처럼 책거리는 하는 게 정상이다. 물론 떡 대신 막걸리 파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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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한 잔 받아."
진중권은 언제나처럼 영욱에게도 술을 권했다. 제자이기 이전에 예비역 복학생이니까 성인으로 대접하는 의미도 있고, 밤새도록 힘들게 수련하고 작업한 것에 대한 격려인 셈이다. 마치 농부들이 마시는 농주처럼.
"마시고 싶지만 오늘은 1교시 수업이 아주 깐깐한 교수님의 강의라서 좀 그래요."
"여름 방학에 무슨 수업을 해?"
"오늘이 2학기 개강하는 날이잖아요."
"벌써 그렇게 되었나? 시간 참 빠르게도 흐르는군. 어서 한 잔 받으라니까."
영욱이 거듭 사양했지만 오늘 따라 기분이 너무 좋은 진중권이 막무가내로 술을 권했다.
"저도 사부님 덕분에 좋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너무나도 행복한 여름 방학이었습니다. 특히 오늘은 입문한 날이니 저도 한 잔 마시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희승 교수님 수업이 첫 시간에 있어서 정말 곤란해요."
"그래도 오늘은 마셔. 정 문제가 된다면 한 번 정도는 수업을 빼먹어도 되잖아."
"그럴까요?"
"자, 건배!"
"예. 건배!"
사부 진중권의 거듭되는 강권에 영욱은 어쩔 수 없이 몇 잔 마셔야했다.
"건배!"
"예. 건배!"
진중권은 자신의 제자 영욱이 채 넉 달도 되지 않아서 기계체조에 정식으로 입문한 것이 너무나도 기뻤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해도 최소한 일 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밤낮을 초월한 영욱의 노력은 뛰어난 재능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건배!"
"예. 건배!"
그러니 한 잔의 술로 그동안 제자의 노고와 자신의 노심초사를 치하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한 잔이 아니라 어느새 여러 잔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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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이란 딱 한 잔만 마시고 운전하면 꼭 음주 검문에 걸리는 것과 비슷한 법이다. 음주 사실을 또 어떻게 알았는지 이희승 교수가 눈알을 부라리면서 맨 뒷자리에 앉아있는 영욱에게로 다가왔다.
"박영욱! 내가 두 번 다시 술 냄새를 피우며 내 강의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것도 학회장인 자네가 솔선수범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새 학기 첫 시간부터 이래도 되는 거야? 응?"
"죄송합니다, 교수님. 책거리 기념으로 사부님께서 딱 한 잔 하사하시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부라고? 대체 어떤 교수가 네 사부야? 교수라는 자가 아침부터 학생에게 술을 강권해?"
이희승 교수는 영욱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사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질투를 느끼는 듯했다. 어느 교수라도 학생이 아니라 제자를 원하기 때문에 그런 질투는 당연할 지도 모른다.
"대학교수님이 아니라 제게 포클레인을 가르쳐주시는 사부님이 있습니다."
"난 또 무슨 소린가 했네."
"그런데 양치질을 서너 차례나 했는데도 술 냄새가 납니까?"
"자네는 내가 누구라는 걸 잊었어?"
영욱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 교수가 거들먹거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드러냈다.
"그야 나노공학의 최고 권위자인 이희승 교수님이 아니십니까? 혹시 나노바이오 기술의 응용으로 벌써 개의 후각을 능가하는 경지에 이르신 겁니까?"
"눈치가 아주 빠르군. 아무튼 나와의 약속을 어겼으니까 자네는 당장 내 강의실에서 나가주게. 어서!"
"제발 살려주십시오. 교수님."
정말 나노바이오 기술의 응용으로 알코올 냄새를 알아차린 것인지는 몰라도 이희승 교수의 후각은 남다른 면이 있었다. 영욱은 자신의 음주 사실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2학기 첫 수업부터 쫓겨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겨우 한 시간 강의를 듣지 못한다고 죽는다는 소리를 해?"
"당연히 죽지요. 저는 교수님의 명강의를 듣는 낙으로 살아가고 있는 제자입니다. 제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 녀석이 아침부터 막걸리 한 사발에 완전히 인사불성이 다 되었나 보군. 어서 나가지 못해?"
"사랑합니다. 교수님."
하하하!
호호호!
영욱의 돌발적인 대사와 제스처에 학생들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좋아. 그렇게 내 강의가 듣고 싶으면 저 뒤에서 서서 들어."
"고맙습니다. 교수님."
"아직 고마워하기에는 일러. 수업이 끝나면 나를 따라오게."
"예. 교수님."
영욱은 덩치에 걸맞기 않게 손으로 하트를 만드는 등의 애교를 부리고서야 강의실에서 쫓겨나는 것을 겨우 면할 수 있었다.
나노 바이오기술Nano biotechnology은 바이오기술에다 나노를 접목한 기술이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바이오 물질을 나노미터 크기의 수준에서 조작하거나 이를 분석하고 제어할 수 있는 과학과 기술을 칭하는데 이희성 교수는 이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인 권위자다. 그러니 나노 수준의 음주측정기를 개발하지 않았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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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내 강의를 듣는 낙으로 살아간다고 하니까 나노바이오 분야에 대한 조사를 하고, 내가 납득할 만한 수준의 리포트를 제출하도록. 그럼 가보게."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교수님께서 납득할 만한 수준의 리포트를 학생인 제가 어떻게 작성합니까? 다른 대학교에 있는 교수님이 작성해도 그 납득納得이란 것을 얻어내기가 쉽지 않을 텐데……."
"리포트를 내기 싫다면 내 강의에 들어오지 말게."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교수님."
이희승 교수는 영욱이 자신의 연구실로 따라 들어가자마자 다짜고짜 무리한 수준의 과제물을 떠안겼다. 술을 먹고 강의에 들어간 것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루라는 말이었다.
그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요구하는 리포트니까 매우, 아주, 몹시 힘들 게 분명하지만 영욱으로서는 하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강의에 들어가지 못하면 자동적으로 F학점을 맞게 될 것이고, 그리 되면 졸업전선에 지장이 생길 것이다.
게다가 그 동안 이희승 교수가 자신을 그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까 달리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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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이희승 교수로부터 엄청난 수준의 리포트 제출을 지시받고는 3교시와 4교시 수업 시간 내내 혼자서 투덜거리며 화를 삭여야만 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잔디밭 근처에 있는 나무그늘에 앉아서 혼자 쓸쓸하게 도시락을 먹은 후 잠시 눈을 붙였는데 놀랍게도 꿈속에서 박상태가 나타났다.
영욱은 짜증을 해소할 만한 상대가 나타나자 두려운 마음보다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헤매게 될 확률이 더 높겠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었다.
-어이! 박상태! 정말 오랜만이군.
-애써 강한 척하기는……. 그래, 여자 친구로부터 버림받은 소감이 어때?
영욱이 먼저 알은체를 하자 박상태는 오히려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바꾸어서 영욱의 아픈 곳을 건드리며 정신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욱은 은영과 헤어진 지도 꽤나 오래되어서 이제는 별로 고통스럽지도 않는데 박상태는 뭔가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전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분이 아주 더럽지. 분명히 네 짓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 표정을 보니 그게 사실이었군.
-맞아. 내가 시킨 일이 맞아.
-치사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런 방법까지 동원해서라도 나를 이겨야겠어?
-그야 당연하지. 하지만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 할 거야.
-뭘 고마워 해?
-그 여자는 너와 어울리지 않아. 그러니까 너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이지.
-미친 놈. 대체 무슨 소리를 늘어놓으려는 거야?
-얼굴은 꽤나 반반하지만 네 여자 친구로서는 자격 미달이더군.
-설마 덮친 건 아니겠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봐, 박영욱! 나도 취향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라고…….
박상태는 상당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항변했다. 은영 같은 여자는 한 트럭 실어다 줘도 싫다는 그런 표정이었지만 박상태의 못 생긴 얼굴을 보니 쉽게 수긍하기는 힘들었다.
-그럼 무슨 의미로 자격 미달이라고 한 거야?
-제대로 겁을 주지도 않았는데 저항을 포기하고서 항복하는 걸 보고 하는 말이야.
-내 여자 친구였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은영이라면 강원대학교에서도 손꼽히는 미몬데 너는 몬스터라서 그런지 눈이 머리 꼭대기에 달린 모양이군. 그리고 그녀가 모자란 게 아니라 네가 괴물인 거지. 마흔 명을 넘게 먹어치운 몬스터를 연약한 여자가 어떻게 당해?
영욱은 박상태의 항변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게이가 아니고서야 은영을 그렇게 무시할 남자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흥! 아직도 마흔 명 정도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오십 명이라도 되나?
-상상력을 좀 더 발휘해 봐.
-그럼 백 명이라도 되나? 불쌍한 사람들을 괴롭히느라고 그동안 바빴겠군.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그럼 얻어터지고 몸의 일부를 물어 뜯기는데 그게 불쌍하지 않다는 거야?
-아직도 2QB 세상을 그렇게 몰라? 아무튼 답답해서 그냥 말해주기로 하지. 얼추 이백 명은 돼.
무슨 이윤지는 몰라도 박상태가 은영을 싫어하는 것은 분명했다. 이젠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않은 표정으로 다른 이야기를 이어갔다. 박상태는 영욱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뭐라고? 이백 명이라고?
-그래. 그러니까 이제 그만 저항을 포기해. 넌 상대도 되지 않으니까.
-싫어. 오히려 200명을 삼킨 네 녀석을 먹어치우기로 결심했어.
박상태의 표정을 보건데 거짓말은 분명히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렇게 강해졌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숫자상으로는 다섯 배나 되니까 다섯 배까지는 아니더라도 느껴질 만큼 강해져야 할 것 같은데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리고 꿈속 세상에서는 아직 바깥출입도 제대로 못하는 영욱이지만 이상하게도 박상태를 처리할 자신은 있었다. 박상태가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것도 이길 자신이 있어서겠지만 영욱은 전혀 떨리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 몇 달 동안 열심히 수련했던 기계체조 기초 동작 덕분에 자신의 애마 포크를 다루는 실력이 아주 많이 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자신의 몸을 가누고 버티는 일에는 제법 능숙해졌지만 영역을 벗어나는 일은 그리 수월치가 않았다. 2QB라는 꿈속 세상에서 영욱이 장악할 수 있는 영역은 공원묘원과 흡사한데 그 넓이는 겨우 만 평방미터 남짓에 불과했다.
그 바깥의 풍경은 마치 안개에 가린 듯했고, 나가봐도 실제로 짙은 안개 속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억지로 나간다면 못나갈 것도 없지만 시야의 불리함과 함께 거리가 멀어질수록 아주 높은 산에 올라간 것처럼 힘들어져서 외출은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니 박상태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서 헤집고 돌아다니는 데 대해서 일말의 존경심과 두려움까지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아무튼 싸워야할 순간이 왔으니까 영욱은 상대에 대한 일말의 존경심과 두려움은 얼른 버리고 자신의 애마 포크를 소환하고는 얼른 운전석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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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벼라. 오늘은 결판을 내주겠다.
-꿈도 야무지군. 그 장난감 같은 포클레인으로 버티는 것은 이제 끝이다.
-흥! 마치 탱크라도 준비해 온 것처럼 말하는군.
-빙고! 대한민국 대표 탱크인 흑표를 준비하느라고 시간이 좀 걸렸지.
놈은 놀랍게도 거대한 탱크를 소환했다. K2흑표는 3명의승무원이 탑승할 수 있고, 전투중량이 무려 55톤에 이르는 괴물이다. 최대 속도는 70km이고, 야전에서의 이동 속도도 무려 50km에 달하는 괴물 중의 괴물이다.
항속 거리는 450km이나 되고, 잠수 도하 길이도 4.1m에 이른다. 엔진 출력이 1,500마력에다 120mm 55구경 활강포와 12.7mm와 7.62mm 기관총을 탑재하고 있다.
물론 소환이 가능하다고 해서 탱크의 위력을 다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미리 기가 죽을 필요는 없지만 영욱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프레시맨
영욱은 애써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탱크란 혼자서 제어할 수 있는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 두려움은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
-너 혼자서 승무원 세 명의 역할을 다 해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괴물이겠군.
-당연히 혼자서는 무리겠지. 하지만 내가 누구야?
-몬스터지.
-하하하! 고상한 말로는 드림헌터라고 부르지. 나처럼 헌터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노예들을 몇 명 정도는 부릴 수 있지.
<비몽사몽>에는 드림헌터들의 능력을 구분해서 설명한 부분이 있다. 겨우 헌터로 불릴 정도를 프레시맨Freshman이라고 부른다면 그 다음의 단계를 사퍼모어Sophomore라 부르고, 그 다음은 주니어Junior 그리고 마지막은 시니어Senior라고 부른다.
그것은 대학교 1학년을 프레시맨, 2학년은 사퍼모어, 3학년과 4학년은 주니어, 시니어라고 부르는 것과 동일한 명명법이다.
박상태가 자신의 경지를 겨우 헌터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라고 표현했으니까 극강의 몬스터로 보이는 박상태도 드림헌터들 사이에서는 겨우 신입생에 불과한 프레시맨일 뿐이었다. 그 말이 가지는 의미를 깨달은 영욱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다.
탱크를 몰고 나타난 박상태 때문이 아니라 사자들과 하이에나들이 우글거리는 아프리카 정글에서 자신은 이제 겨우 사마귀 수준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작고 왜소한 수컷 사마귀에 불과했다. 하지만 자칭 프레시맨이라는 박상태는 아마도 곤충을 사냥하는 카멜레온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아직 밖으로 나가보지는 못했지만 2QB라는 꿈속 세상은 그야말로 정글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자신의 영역 속에서 잔뜩 움츠린 채로 그냥 잠만 자다가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비몽사몽>을 읽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원초적인 공포였다. 아무튼 박상태가 노예들까지 소환한다면 영욱으로서도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 뭔가 수단을 동원하지 않으면 정말 위험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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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놈 같으니라고……. 나와의 일대일 대결은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는 모양이군.
-강자일수록 부하가 많은 법이니까 애들처럼 굳이 일대일 대결을 고집할 이유는 없겠지.
-군대 시절에도 넌 항상 그런 식이었지. 그러니까 고문관 취급을 받은 것이고…….
-누가 고문관이었다는 거야? 내가 그 녀석들을 모두 왕따시킨 거야. 알아?
영욱은 회심의 격장지계에 걸려든 박상태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마지막 도발을 시도했다.
-좋아. 자신 없으면 노예들을 죄다 불러내도 좋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더 불러도 돼.
-개새끼! 일대일이면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좋아. 일대일로 싸워주지.
영욱이 박상태의 자존심을 벅벅 긁어대자 그도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싸우겠다고 대답했다. 박상태의 자존심이 워낙 강한 탓에 눈에 보일 정도로 빤한 격장지계가 통한 것이다.
사실 포클레인이 탱크와 싸워서 이길 가능성은 거의 전무한 상태니까 그로서도 굳이 전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부르릉.
결국 탱크와 포클레인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현실 세계에서라면 말이 되지 않는 싸움이지만 2QB 세상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영욱으로서 다행이라면 박상태가 포탄을 발사하지 않고 탱크를 움직여서 직접적인 충돌을 감행해 온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임이 분명했다.
전차의 중량이 55톤인데 반하여 영욱의 애마인 포크의 중량은 불과 41.
톤 정도이다. 게다가 두 기계의 이동 속도도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그러니 포탄이나 기관총을 쏘지 않는다고 해도 당해낼 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영욱과 포크는 이미 기계체조를 석 달 이상 수련한 몸이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한 몸이 된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도망갈 자신은 있었다.
-어디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봐!
영욱은 포크의 길고 튼튼한 기계 팔에 의지해서 가파른 곳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동안 기계체조 기초 동작을 열심히 수련한 영욱은 무한궤도로도 오르지 못하는 급경사를 기계 팔을 이용해서 오를 수 있었다. 비보이처럼 한 팔 텀블링도 마다하지 않았다.
K2 전차의 등판능력도 무려 60도로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수준이다. 하지만 암벽 등반가처럼 손을 사용해서 오르는 포크보다는 못했다. 포크는 마치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직각의 벽에 가까운 암벽을 타고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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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이군.
-그동안 놀고 있은 것은 아니니까 당연하지.
-짧은 기간을 고려하면 정말 대단해. 하지만 그런 곳에서는 오히려 포탄을 피하기가 어려울 거다. 어디 맛 좀 봐라.
펑! 펑!
결국 박상태는 포크를 따라 낭떠러지를 오르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대신 탱크를 세워두고 120mm 55구경의 주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이건 반칙이야. 살려줘.
영욱은 넉살을 떨면서 얼른 포크의 소환을 해제하고는 그냥 맨몸으로 달아났다. 아무리 기계체조를 익혔다고는 하지만 절벽과 비슷한 곳에서 포크를 탄 채로 포탄을 피하기는 무리였다.
영욱은 마치 다람쥐처럼 절벽을 내달렸다. 가파르고 위험한 곳이라고 해도 그동안 막노동으로 단련된 영욱에게는 거의 평지나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동안 수련했던 기계체조는 기계인 포크의 움직임뿐 아니라 운전기사인 영욱의 반응 속도를 상당한 수준으로 높여 놓았다는 점도 한몫했다.
폭발적인 영욱의 움직임은 마치 산양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탄의 넓은 폭발 반경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펑. 펑.
직격탄은 간신히 피했지만 포탄의 폭발 여파로 튀어나오는 돌조각에 맞아서 온 몸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겉으로는 얼른 복구되어서 멀쩡한 모습이었지만 정신력의 소모도 많았고, 무엇보다 숨이 턱에 닿아서 더 이상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뭐야? 현실 세계도 아닌데 숨이 왜 이렇게 가쁘지? 영혼도 숨을 쉬어야 하는 건가?'
영욱은 정신력뿐만이 아니라 심폐 기능도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숨이 가쁠 정도로 달려본 적이 없어서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펑. 펑.
아무튼 박상태의 포탄 사격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미치겠구나. 저 새끼는 그동안 정말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어버렸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포기하자.'
'아냐! 이제 저 녀석도 힘들 때가 되었어. 그러니 조금만 더 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