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71)

"해결책이 뭐야?"

"밤마다 아예 잠을 안 자기로 했어."

철야 알바를 뛰는 이유에 대한 설명인 셈이다. 또한 약간 야한 농담이기도 했다. 부부나 연인들끼리 밤에 잠을 자지 않으면 대체 뭘 할까? 

은영은 은영대로 영욱이 그런 결론을 내린 배경이 궁금했다. 그리고 그녀의 언니가 영욱을 데려오라고 했는데 그게 실패했으니 내심 짜증이 치밀 수밖에 없었다.

"오빤 이 대목에서도 그런 음담패설이 나와?"

"그럼 울까?"

"잠이 부족해서 어떻게 살아?"

"낮에 잠깐씩만 자두면 충분해."

"낮잠을 자면 악몽을 안 꿔?"

"아마도."

"참, 어제 부대에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어?"

은영은 영욱의 일탈에 대한 의심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넌지시 화제를 돌려서 어제의 일을 캐물었다. 거짓말을 하면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 영욱의 표정을 살피면서 눈을 반짝거렸다.

"설명이 아주 기니까 너도 우선 이 책부터 읽어봐. 그래야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이은석 교수의 비몽사몽?"

은영은 영욱이 건네준 책의 표지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은 책에 대한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영욱에게서 거짓말의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응."

"이 책을 읽고 나면 꼭 이야기해 줘야 해."

"당근이지."

"아침은 먹었어?"

"당근이지. 내가 아침 식사를 얼마나 정성스럽게 챙겨먹는지는 너도 잘 알잖아."

"또 개 사료를 먹은 거야?"

은영은 다정하게 잡고 있던 영욱의 손을 뿌리치면서 자신의 코를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장난이다.

"단순한 개 사료가 아니라 아토피 억제를 위한 최고의 시리얼이야."

"아무튼 오빠의 이모부도 참 특이한 분이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조카에게 개 사료를 먹으라고 보내줘?"

"그게 얼마나 비싼 건줄 알기나 해? 그리고 실제로 큰 도움이 된다니까 그래."

농담이 아니라 2kg 포장에 무려 4만 원이나 하는 비싼 애견사료다. 그것도 한두 포가 아니라 열 포씩 보내주니까 비싸다는 말은 농담이 전혀 아니다. 

그리고 아토피언들 중에는 나병 환자들처럼 별의별 이상한 것도 아토피 치료에 좋다는 이유로 먹기 때문에 개 사료를 먹는 것 정도는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영욱 역시 굼벵이나 지네 심지어 토룡탕도 숱하게 먹었지만 별로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어설프게 헬스 하는 사람들이나 건달들이 몸을 불리기 위해서 고급 애견사료를 먹는다는 말은 들어 보았어. 하지만 아토피 치료를 위해서 애견용 처방 사료를 먹는다는 건 아무래도 좀 깨지 않아?"

"수의사인 우리 이모부가 그 사료로 개들의 아토피를 치료하다가 하도 잘 낫기에 혹시나 하고 보내준 거였어. 이모부도 내가 어릴 때부터 아토피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거든."

"하지만 수의사가 사람을 진료하는 건 불법이잖아."

"얘가 지금 생사람 잡을 소리를 하네. 개 사료를 보내준 건 진료 행위가 아니잖아. 그것도 공짜로 말이야. 그게 어째서 진료 행위야?"

"아무튼 그걸 아침마다 챙겨먹는 오빠도 정말 대단해."

영욱은 은영과 함께 식사할 때를 제외하면 꼭 애견용 처방사료를 먹곤 했다. 

은영도 처음에는 질색했지만 최고급 애견사료는 어지간한 고기보다 품질이 더 좋다는 걸 서서히 인정하게 되었다. 그것은 애견사료를 먹은 후부터 영욱의 에너지가 늘 넘쳐났기 때문이다. 아토피도 더 많이 나아진 듯했고.

"내가 몸으로 느끼는 효과가 있으니까 그런 거지. 피부 상태가 확실하게 더 좋아졌어."

"난 몰라. 오빠 식구들과 친척들 이야기만 나오면 머리가 다 아프니까 얼른 수업이나 들어가자."

"괜히 어렵게 생각하지 마. 다 우리를 사랑하고 관심을 가져서 하는 행동들이니까……."

"나도 알아. 그래서 더 부담스러운 거야."

영욱의 부모님은 은영을 영욱의 여자 친구가 아니라 예비 며느리 정도로 생각했다. 가끔 용돈을 챙겨주는 것은 물론이고 툭하면 안부전화도 했다. 은영으로서는 그게 몹시 부담스러운 듯했다. 

"우리 부모님들은 딸이 없어서 그러시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이해해."

"그래도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야."

"나는 너 없으면 안 돼. 잘 알잖아?"

"몰라."

"그러니까 절대로 부담 가지지 마. 알겠지?"

"……."

영욱이 진심을 털어놓았지만 은영이 느끼는 부담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것은 영욱에게 관심을 가지는 식구들이나 친척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영욱의 부모님들이야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는 관심이지만 경상도에서 산다는 이모나 이모부도 그랬고, 특히 영욱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거의 매일 전화 통화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이른바 극성스러운 시월드인 셈이니 은영으로서는 당연히 부담스러운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결혼을 생각하고서 사귀는 것은 아니지만 남자친구인 영욱은 그렇지도 않은 듯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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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반복되는 설명이지만 나노공학은 아주 작은 작업을 크기 즉, 수 나노미터에서 수백 나노미터 크기의 물질을 만들어 내는 학문이다. 그리고……."

이희승 교수는 매번 나노nano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강조하곤 했다. 

밀리미터는 천 분의 일 미터이고, 덩치가 큰 세균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다. 마이크로micro미터는 백만 분의 일 미터이고, 대형 바이러스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다. 

그리고 나노미터는 십억 분의 일 미터이고, 아미노산의 크기를 나타낼 수 있는 단위다. 겨우 수소원자의 지름의 10배에 해당하는 것이니까 정말 작은 크기인 셈이다.

"또한 이때 나타나는 새롭고 특이한 성질을 연구하고 관찰하는 학문이기도 하며……."

나노 기술은 이러한 나노미터 스케일의 물질들을 기초로 실생활에 유용한 나노 소재, 나노 소자, 나노 시스템 등을 만들어 내는데 밑바탕이 되는 학문이다. 

따라서 나노공학은 화학, 물리학, 생물학, 재료공학, 화학공학 등 많은 분야에서 연구 개발하는 융합 형태의 학문 및 기술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욱이 다니는 신소재공학과에서는 나노공학이 전공 필수 과목이다. 

일당 25만 원을 벌기 위해서 밤새도록 포클레인 작업을 하고서 곧바로 수업에 들어온 영욱이지만 이희승 교수의 강의가 평소보다도 더 또렷하게 들렸다. 

수업 시간 중의 약간 느슨한 부분과 쉬는 시간마다 머리를 부여잡고 활인심방의 구결을 외우면서 검지로 자신의 골을 때렸더니 졸리거나 멍해지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점심 식사 후 박상태가 나타날까봐 가슴을 졸이며 잠깐의 낮잠에 도전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악몽을 꾸지는 않았다. 그것은 박상태가 깨어 있는 시간임이 분명했다. 그도 잠이 들어야만 영욱의 꿈에 나타나서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만일 공포영화에 나오는 나이트메어와 같은 것이라면 낮에 잠깐 잠이 들어도 즉시 나타나서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저주받은 악몽이 아니라 실존하는 영혼들끼리의 부딪침이라고 봐야 했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영욱은 군대 생활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기 위해서 포클레인 기사 자격증을 취득하고는 그 주특기를 살려서 비교적 편하게 군 생활을 했다. 

그래서인지 요즘처럼 취업하기 어려운 세상에서는 꼭 대학에서 공부한 대로 취직해서 전공을 살리는 것보다는 그냥 포클레인이나 한 대 사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영욱의 아버지 박득환은 강원도 영월 출신이다. 현재 헌법재판소에서 서기관書記官으로 근무하고 있지만, 강원도에서도 제법 인맥이 많은 편이라 장차 영욱이 살아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장담하곤 했다.

물론 포클레인 한 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주로 묘 자리를 파거나 농로나 배수로를 정리하는 등의 간단한 작업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일감만 끊어지지만 않는다면 월급쟁이보다는 수입이 훨씬 낫다고 볼 수 있다. 박득환은 자신이 아는 지인들의 묘 자리만 파 주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고 단언하곤 했다.

더구나 이제는 드림헌터 박상태를 피해서 밤에는 잠을 잘 수 없게 된 영욱이기에 신소재공학이라는 전공을 살리는 것보다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아무튼 박수무당의 처방이 효과가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인 셈이었다. 영욱은 밤마다 철야작업을 해서 포클레인 다루는 실력을 진짜 달인 수준으로 올리는 한편 임금으로 받은 돈을 모아서 자신의 포클레인을 직접 장만하기로 했다.

물론 취업도 취업이지만 결혼하려면 대학 졸업장이 꼭 필요한 세상이니까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을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만일 자신이 대학을 그만두게 되면 남의 눈길을 의식하고 이것저것 따지기를 좋아하는 은영도 틀림없이 자신을 떠날 게 분명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특히 허영심이 많은 은영이 대학 중퇴 학력의 영욱과 결혼할 리가 없다.

작년에 군대를 제대한 후 2학년 2학기 과정에 복학했고, 이제 해가 바뀌어서 3학년이 되었으니까 네 학기만 더 버티면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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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주독야경의 세월이 흘러갔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이러한 영욱의 행복한 도피 생활에도 먹구름이 끼고 말았다.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날, 4월의 따뜻한 햇볕 아래서 여느 때처럼 달게 졸고 있던 영욱은 꿈속 세상 2QB에서 예기치 못한 박상태의 방문을 받고 말았다. 박상태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도망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뭐야? 아직도 낮인데 왜 나타난 거야?

-흥! 네 녀석의 얕은 수작을 내가 모를 것 같아?

-잘 아는 놈이 이제 나타나?

-좀 바빴지.

-아무튼 나를 잡으려고 하루 종일 잠을 잘 수는 없을 테니까 운이 좋았나보군.

-왜 하루 종일 잠을 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아무튼 넌 나를 벗어날 수 없어.

박상태는 오랜 만에 나타나서 그런지 말이 많았다. 전에는 단 한마디도 내뱉지 않고 그저 두들겨 패기만 하더니 이번에는 반가운 사람과 이야기라도 나누는 듯했다.

-미안하지만 쉽게 당해줄 생각은 없다. 자, 덤벼라.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정신력이 강해서 나를 즐겁게 해주는구나. 좋아. 아주 좋아.

-쉽게 당해주지 않겠다는데 뭐가 그렇게 즐거워?

-그것은 영양가가 높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저항해 봐야 말짱 헛수고겠지만 그건 네 마음이니까 말리지는 않겠다. 하하하!

-웃기지 마. 절대로 곱게 당해주지는 않을 테니까…….

-몸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주제에 끝까지 큰소리를 치는 거야? 오늘도 일단 좀 맞자.

꿈의 세상에서는 정신력이 마치 마법과도 같은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니까 드림헌터 박상태가 의지 하나로 영욱의 몸을 이상한 기운으로 꽁꽁 묶어둘 수 있는 것이다. 

-흥! 웃기고 있네.

-어쭈? 속박을 풀었어?

-내가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았어? 어서 덤비라고.

그러나 이번에는 영욱의 의지도 강하게 발휘되어서 그런지 몸을 옥죄던 속박 기운은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영욱의 정신력이 부족한 탓에 옥죄는 기운을 다 없애지는 못했다.

-쥐새끼보다 작은 크기로 감히 나를 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병신아.

영욱도 언성을 높여서 큰소리쳤지만 막상 싸움에서는 전혀 박상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미 김 병장의 강력한 왼팔을 위시해서 마흔 명이 넘는 병사들로부터 힘을 빼앗은 박상태는 갑자기 거대한 킹콩처럼 커지더니 영욱을 마치 장난감처럼 집어던지거나 마구 짓밟았다. 거인으로 변한 박상태의 키는 얼추 10미터를 넘는 듯했다.

끄아아아.

거인이 된 박상태의 거대한 주먹에 얻어맞고, 큰 발에 개구리처럼 밟히는 고통은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문제는 2QB 세상이라서 그런지 아무리 짓밟혀도 죽지 않으니까 더더욱 고통스러웠다. 

영욱의 봄날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은영이 다른 수업을 듣고 있는 중이라서 쪽팔림은 면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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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화요일에는 2교시 수업이 없는 영욱이 1교시와 3교시 사이의 빈 시간을 노려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박상태가 또 나타난 것이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쳐다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나타난 박상태를 보고는 기함을 했다. 

-뭐야? 어떻게 알고 나타난 거야?

-너는 내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지. 오늘도 좀 맞자.

끄아아아.

거인이 된 박상태에게 밟히고 채이며 영욱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절규했다. 

고통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항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녀석을 피해서 철야 작업을 했던 한 달이라는 기간이 아까워서 차마 그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말이 쉬워서 주독야경이지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사는 게 그리 쉬울 리 없다. 그것도 한 달 이상이나 그런 생활을 이어왔다. 그렇다고 낮에 푹 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영욱도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차라리 손 하나를 떼어주고서 편히 자고도 싶었다.

'어라?'

하지만 한편으로는 묘한 오기가 치밀었다. 오기가 치밀자 자신을 속박하는 힘이 한결 더 약해졌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조차도 되지 않는 박상태의 덩치 탓에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도 않았다.

'나도 잠을 자지 않고 노력했지만 이 새끼는 지난 한 달 동안 정말로 많이 강해졌군. 그게 아마도 남의 영혼들을 마구 뜯어먹은 효과일 테지. 심지어 내가 포클레인을 타고 대적한다고 해도 쉽지 않을 정도로 강해졌군.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그러한 괴물 녀석의 속박을 어느 정도나마 풀어낸 영욱도 대단히 강해졌지만 박상태는 소위 말하는 넘사벽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영욱은 뭔가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염원대로 자신이 늘 작업하던 포클레인이 소환되었던 것이다. 

'어? 정말로 소환되었잖아. 좋았어.'

박상태가 깜짝 놀라서 잠시 구타를 멈춘 사이에 영욱은 얼른 운전석에 올라타고는 힘차게 시동을 걸었다. 다행스럽게 키는 꽂혀 있었고, 시동도 한 번에 잘 걸렸다.

부릉부릉.

-하하하! 겨우 그걸로 나를 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제야 서로 덩치가 비슷해졌군. 자, 덤벼라.

영욱이 소환해낸 포클레인은 볼보에서 만든 EC380D 기종인데, 최대 굴삭 반경이 무려 10.5미터나 되고, 최대 굴삭 깊이는 6.85미터에 달하는 대형 기종이다. 

작동 중량 또한 무려 41.4톤에 이를 정도로 크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박상태의 덩치를 고려하면 덩치 자랑을 할 상황은 아니었다.

-비슷해? 난장이에다 느려터진 포클레인으로 감히 나를 상대하겠다고? 정말 웃기는군.

-흥! 네 녀석의 허접한 운전 실력으로야 느려 터졌겠지만 나는 좀 다르지.

같은 부대 출신이니까 박상태도 포클레인을 몰았다. 하지만 둘의 포클레인 다루는 실력은 어른과 아이의 차이처럼 컸다. 군 시절에도 그랬지만 영욱은 지난 한 달 동안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시험공부도 며칠 밤만 새면 학점이 달라지는데 한 달을 지새운 영욱의 운전 실력은 상당히 발전했다. 게다가 2QB 세상이라서 그런지 포클레인의 움직임이 현실 세계보다 훨씬 더 빠르게 느껴졌다. 

그러한 모습을 보더니 박상태의 표정도 자못 심각하게 변했다.

-제법인데. 하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네 녀석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는데도 그런 말이 나와? 정말 웃기고 있네.

키가 10미터에 달하는 거인 박상태와 기계 삽을 포함한 팔의 길이가 10미터에 달하는 포클레인의 대결이 마치 거미와 전갈의 대결처럼 치열하게 벌어졌다.

쾅. 쾅.

주로 박상태가 빈틈을 노려서 공격하면 영욱은 포클레인의 기계 삽으로 그 공격을 막아내는 형태로 싸움이 이어졌다. 

2QB 세상이라서 그런지 박상태의 주먹은 쇠로 만들어진 기계 삽과 부딪쳐도 멀쩡했다. 아무튼 운전석에 있는 영욱을 움켜쥐려는 박상태의 시도는 영욱의 노련한 운전 솜씨로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다.

영욱은 자신이 지난 한 달 동안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철야 작업을 한 효과가 아주 크다는 것을 이 싸움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익숙한 자신의 자동차를 모는 것처럼 포클레인의 기계 팔이 빠르게 춤을 추면서 박상태의 변칙적인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선제공격을 펼칠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거대한 포클레인을 소환한 대가가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도구를 소환해서 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까지는 좋은데 그에 비례해서 정신력 소모가 엄청나게 커진 것이었다. 

비례가 아니라 거의 제곱에 비례하는 수준으로 빠르게 소모되었다. 중장비를 소환하는 것이 가능한 반면 그 유지비용이 몹시 크다는 사실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영욱은 자신이 포클레인의 소환을 취소하는 순간 다시 개구리 밟히듯이 밟히게 될 테니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악을 쓰면서 버텨냈다.

-버티는 게 가상하지만 이제 슬슬 동작이 느려지는 게 눈에 보인다.

-너야말로 큰소리를 치고 있지만 주먹의 위력이 형편없이 줄었다는 걸 부인하지는 못하겠지? 반면에 나는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제법 눈매가 맵구나. 그래봐야 내 먹잇감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먹잇감이라고?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서 같은 전우들을 그렇게 사냥할 수가 있는 거지? 난 네 녀석의 심보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전우라고? 웃기지 마! 그들이 내 군대 생활에 얼마나 많은 애로사항이었는지 몰라서 그래?

-그건 네 녀석이 자초한 일이었지.

둘은 잠시 싸움을 멈추고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거친 호흡을 골랐다. 굳이 해묵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가 이런 방식의 전투를 이어가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네 녀석이 상대적으로는 덜한 편이긴 했지만 다들 당해도 싼 놈들이야.

-흥! 내가 널 괴롭혔다고?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다. 너 때문에 나도 얼마나 많은 얼차려를 함께 받아야 했는데 그런 말을 해?

-아무튼 선임이랍시고 거들먹거렸잖아.

-고문관 행세를 자처하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치려고 일부러 그런 거였구나. 나쁜 새끼.

-맞아. 나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 있었지. 그 결과 모두가 구제받을 자격이 없는 영혼들이라는 결론을 내렸어.

-내가 보기에는 네가 훨씬 더 큰 문젯거리였는데 오히려 이런 결론이 나올 수도 있구나. 아무튼 이곳은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

-맞아. 이곳은 강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세계지. 박영욱, 오늘은 즐거웠다. 내일 또 보자. 하하하!

대화를 나누던 박상태가 돌연 멀어지기 시작했다. 힘이 다 빠져서 후퇴한다기보다는 싸운다고 해도 영욱의 기계 삽을 뚫고 들어갈 뾰족한 방법이 없는 듯했다. 이른바 작전상 후퇴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영욱의 경우에는 정말 그에게 못되게 굴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을 지도 모른다. 영욱은 박상태가 멀어지자 갑자기 힘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아져서 엔돌핀이나 세로토닌 같은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나타나는 현상 같았다. 당연히 기가 살아서 큰소리가 버럭 나왔다.

-너 이 새끼, 선임의 이름을 막 부르다니 말버릇이 그게 뭐냐? 

-제대하고도 그런 말이 나와? 그리고 내가 너보다 생일이 빠른 거 몰라?

-하지만 생년은 느리잖아. 병신아.

-하하하! 농담도 잘 하는군. 오늘은 내가 바빠서 이만 가지만 과연 내일도 그렇게 주둥이를 놀릴 수 있는지 두고 보기로 하자.

둘은 동갑이고 생일도 박상태가 며칠 정도 빠르다. 하지만 군대란 그런 사회적인 신분이 통용되는 곳이 아니니까 영욱이 선임이고 박상태는 후임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미 전역했으니 이러는 이야기를 나누는 자체가 우습지만 영욱은 자신의 첫 승리를 자축하는 의미에서 한마디 내뱉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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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새끼! 내가 호락호락 당해줄 것 같아?"

4월의 따뜻한 봄날, 햇볕이 잘 드는 빈 강의실에서 깜빡 그러나 깊이 잠들었던 영욱은 큰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깨어났다. 

그러자 영욱의 곁에서 책을 읽고 있던 은영이 무척 당혹스럽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복잡한 도서관 대신 빈 강의실에서 간단한 리포트를 작성하거나 책을 읽고 있던 다른 학생들이 영욱을 쳐다보면서 인상을 찌푸렸기 때문이다.

"오, 오빠! 무슨 일이야?"

"아, 아냐. 그냥 잠꼬대야."

서둘러서 잔디밭으로 도망쳐 나온 두 사람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혹시 또 그 악몽을 꾼 거야?"

"응. 약아빠진 그 새끼가 오늘도 또 찾아왔어."

"낮에는 자도 괜찮다고 했잖아. 아무튼 이번에도 또 흠씬 두들겨 맞았어?"

졸면서 마치 발작하는 것처럼 온몸을 떨어대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영욱을 보자면 은영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기라도 했다는 듯이 다 안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아냐. 이번에는 포클레인으로 잘 막아냈어."

"뭐야? 그런 것도 가능해?"

"응. 힘은 훨씬 더 들지만 가능하긴 하더라고."

"그럼 그 괴물 녀석도 포클레인을 타고서 싸운 거야?"

"아니. 녀석은 영화에 나오는 킹콩처럼 거대한 괴물로 변신했어."

"오빠, 혹시 개꿈을 꾼 것은 아니겠지?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게 뭐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정신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더니 머리가 띵해서 돌아가실 지경이다. 잠시만……."

영욱은 서둘러서 자세를 잡고는 활인심방의 도인술을 펼쳤다. 정신력 소모가 너무 많아서인지 구역질이 나면서 머리가 띵해서 쓰러질 것 같았기 때문에 더 이상 은영과 대화를 지속할 수가 없었다. 

은영이 몹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영욱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지만 그건 나중에 설명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삼배지례

머리가 어느 정도 맑아질 무렵 영욱은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흔들고 있음을 느꼈다. 눈을 떠서 쳐다보니 바로 은영이었다.

"오빠!"

"왜?"

"3교시 수업 들어갈 시간이야."

"응?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응. 그 양반 자세로 30분 동안이나 머리를 부여잡고는 검지로 머리를 퉁기고 있었어. 남들이 보면 지독한 편두통이라도 겪고 있는 줄 알았을 거야."

"편두통이 아니라 머리 전체가 터져나가는 것 같았어."

정신력을 달달 긁어서 사용했던 후유증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영욱의 강한 인내력이 없었다면 포클레인을 소환할 수는 있어도 박상태가 싸움을 포기하고 후퇴할 때까지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녀석에게 짓밟히는 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박상태를 퇴치할 수 있었으니 기분만은 아주 좋았다. 

"지금은?"

"좀 나아."

"잠도 못자고 매일같이 철야 작업을 고수하니까 그런 거 아냐?"

"아냐. 그 녀석과 싸우느라고 정신력이 모두 소진되어서 그런 것뿐이야."

"아무튼 오빠도 큰일이다. 무당이 되어야할 사람처럼 신이 내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보다 더 격렬한 발작을 해야 하다니……."

"네가 신내림을 어떻게 알아?"

영욱은 얼른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2QB 세상에서 포클레인을 운전하느라 몸을 과격하게 움직이기 했지만 발작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닌데 격렬하다는 표현에 기분이 살짝 상하기도 했다. 

"전에 이야기했잖아. 우리 언니에게 신 내린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거든……."

"너도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한 경험을 했구나."

"그래도 둘째 언니는 아주 잘 풀렸어. 손님도 많고, 남자 친구의 집안과 직업도 아주 빵빵해."

"나를 기죽이려고 하는 소리라면 이제 그만해. 이젠 약발이 다 된 것 같으니까."

비록 파김치가 되긴 했지만 박상태와의 싸움에서 무승부를 이끌어낸 영욱의 즐거운 기분을 은영이 망쳐버렸다. 여자들은 누구나 현실적인 동물이라서 말만 꺼내면 언제나 이런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누가 오빠와 비교하려고 한 소리래?"

"아무튼 군대 생활은 정말 알차게 보내고 전역했는데 호사다마라는 말처럼 이상한 스토커가 붙어버렸어. 아무튼 너에게도 고통을 안겨주어서 미안해."

"아냐. 난 괜찮아. 다만 오빠를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할 뿐이지."

밤잠 대신 낮잠을 잔 후로는 악몽을 꾸지는 않았다. 어제와 오늘을 제외하고는. 하지만 밤을 새워서 일을 해야 하니까 낮에는 수업을 듣거나 리포트를 준비해야 했고, 또한 책을 읽느라 바빴다. 

그러니 은영과도 예전처럼 즐겁게 싸돌아다니거나 영화를 보는 등의 정상적인 데이트는 불가능했다. 그런 기간이 무려 한 달이 넘었으니까 영욱으로서는 다소 불안했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비싼 커플링도 맞추고, 자그마한 보석이 달린 귀걸이도 선물해 주었다. 하룻밤에 25만 원씩이나 벌어들이는 돈이 결코 적지는 않으니 그 돈으로 선물공세를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다고 해서 여자의 마음을 잡아둘 수는 없겠지만 영욱으로서는 은영이 언제라도 자신을 떠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덜기 위해서 꽤나 비싼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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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결국 영욱이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둘이서 말다툼을 하고 나서 데면데면하게 굴던 은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영욱을 찾은 것이다.

"오빠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더 늦게 전에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미안한 이야기라면 하지 마. 안 듣겠어."

"아냐. 해야겠어."

"하지 마. 제발! 난 너 없이는 못 살아. 네가 내 첫사랑이야. 잘 알잖아?"

"오빠가 생각해도 우리가 사귀는 것은 더 이상 힘들 것 같지 않아? 그러니까 깨끗하게 헤어지자. 남자답게 징징거리지 말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응?"

며칠 전까지만 해도 괜찮다고 했던 은영이었지만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이별을 통보해왔다. 영욱의 불안이 결국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면 안 되겠니?"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데?"

"확실한 기간을 정할 수는 없어. 하지만 얼마 전처럼 대등한 싸움을 펼친다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다음날 다시 찾아오겠다던 박상태는 벌써 며칠째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영욱은 더욱더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요즘 오빠가 너무 바빠서 학회장으로서 해야 할 일은 고사하고 나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조차도 없잖아. 그럴 바에야 그냥 깨끗하게 우리의 관계를 정리하는 게 나아. 대신에 나도 당분간은 공부에만 집중할 테니까 너무 서운하게는 생각하지는 말고……."

남녀가 헤어지는데 이유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욱은 은영이 자신이 싫어졌거나 다른 남자가 생겨서 헤어지자는 것은 아니라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단호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가 이미 결론을 내린 이상 마음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영욱도 어쩔 수 없이 이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네가 곁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는데 좀 아쉽다."

"나도 옆에서나마 계속 도움이 되어주면 좋겠지만 솔직히 괴로워하는 오빠를 쳐다보는 게 너무나도 힘들었어. 특히 악몽을 꾸고 있는 동안의 표정은 정말 리얼하거든……."

"미안해. 그동안 내 생각만 했던 거였네."

"그렇지는 않아. 아무튼 우리, 앞으로도 친한 선후배로 잘 지내요."

"그래.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은영은 다시 존댓말을 사용함으로써 두 사람의 연인 관계를 완벽하게 청산해버렸다. 

영욱은 갑작스러운 은영의 이별 선언에 가슴 한 구석이 내려앉았지만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사실 언제라도 병신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서 떠나는 그녀를 붙들 용기도 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애원해 보았지만 역시 은영의 결심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사실 영욱으로서도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여자 친구를 사귈 여력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여자 친구에게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아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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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 강의의 요지는 바로 이 부분이다. 자세히 살펴보자면……."

영욱은 정말 오래간만에 교수님의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활인심방의 도인술을 펼치자 눈물이 핑 돌 정도의 슬픔까지는 아니었다. 물론 다른 날과는 달리 강의에는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강의를 전혀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은영에게 투자하거나 소모하는 시간을 활인심방의 수련과 공부에 투자한다면 장학금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박상태 녀석이 은영의 꿈에 나타나서 압력을 가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본인이 그런 말을 하지 않으니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럴싸하게 생긴 다른 녀석의 꿈에 나타나서 그 거대한 주먹으로 패면서 살고 싶으면 은영에게 수작을 걸라고 지시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박상태의 능력이라면 그 정도는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추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 미련을 두고 구차하게 행동하는 것이라 여기고 영욱은 은영과의 모든 추억을 마음 한구석으로 몰아서 정리해 버렸다. 

'잘 가! 넌 내 첫사랑이었어.'

은영을 진정으로 사랑했지만 지금의 영욱으로서는 그것을 추억하거나 보듬을 정신적 여력이 전혀 없었다. 알고 보니 사랑이라는 것도 여유가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일종의 사치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영욱의 경우는 그랬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영욱의 첫사랑은 이렇게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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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달이 빠르게 지나가서 5월 중순이 되었다. 한참 지나간 이야기이긴 하지만 영욱은 지난 4월 중순에 있었던 중간고사를 아주 잘 치렀다. 

대학자 퇴계 이황이 만들었다는 활인심방은 공부하는 사람에게 확실히 큰 도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신력의 강화에도 큰 도움이 되는 듯했다.

영욱은 잠이 들면 늘 포클레인을 소환해서 박상태의 습격에 대비하곤 했다. 처음에는 5분에 불과하던 소환 시간이 조금씩 더 늘어나더니 이제는 거의 10분을 소환해도 별로 무리가 없었다. 

박상태는 다음날 영욱을 다시 찾아올 거라고 해 놓고서는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영욱의 포클레인 수비가 만만치 않았음을 의미했다. 그러니 어디선가 더 큰 장비를 작동시키는 연습 중이든지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불편한 생각 때문에라도 영욱은 더욱더 포클레인의 운전 연습에 열중했다. 그것은 2QB 세상에서나 철야작업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우우우웅!

열심히 노력한 효과는 있었다. 얼마 전부터는 영욱이 하룻밤 동안 작업한 일의 양이 보통 포클레인 기사들의 세 배를 넘어섰다.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 향상이 불과 두 달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일당은 보통 기사들의 두 배인 40만 원을 받게 되어서 김길태 사장이나 영욱이나 모두 만족했다. 일을 세 배로 한다고 임금을 세 배나 주지는 않았지만 두 배를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일당 25만 원을 받았으니까 정확하게 두 배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금액이 분명했다.

영욱도 세 배의 작업량을 자랑했지만 그래도 포클레인 달인의 경지까지는 아직도 거리가 멀었다. 김길태 사장이 부리는 사람들 중에는 네 배 이상의 작업량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달인이라면 바로 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언젠가 영욱도 멀찌감치 떨어진 채로 그 사람이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기계가 아니라 마치 학권을 구사하는 소림사 출신 고수의 움직임과 비슷하다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진중권이라는 아주 유명한 이름을 가진 그는 김길태 사장 밑에서 자신 소유의 포클레인으로 작업하는 기사 중 하나인데 당연히 주간에만 일해서 영욱과 함께 작업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영욱이 밤새도록 해놓은 작업의 양과 질을 진중권이 낮에 볼 수 있고, 영욱 역시 진중권의 작업량과 질을 살펴볼 수 있으니 서로가 상대의 존재에 대해서는 느끼고 있었고,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김길태 사장의 농간으로 두 사람 모두 묘한 경쟁심이 발동한 것도 사실이다.

"진 씨보다 일을 잘 하면 너도 임금을 세 배로 쳐주지. 암, 주고말고."

"진 씨 아저씨가 저보다 포클레인을 더 잘 다룬다는 말인가요?"

"넌 겨우 세 배, 진 씨는 무려 네 배야. 그러니까 너와 비교하기는 어려울 정도지."

"저도 낮에 작업하면 속도를 더 낼 수 있어요. 야간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서 하는 말이세요?"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보다 더 잘할 것 같지는 않아. 진 씨는 너처럼 최선을 다한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자신의 포클레인으로 작업하는 사람이니까 기본적인 하루 일당이 40만 원이나 된다. 그런데 진중권은 무려 네 배의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160만 원을 받아야 정상이다. 그걸 김길태 사장이 다 줄 리는 없으니까 세 배에서 절충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무려 120만 원을 가져간다는 소리였다. 영욱은 겨우 40만 원이니까 자존심이 팍 상했다.

김길태 사장은 진중권의 임금에 관한 부분은 쏙 빼놓고 영욱의 자존심을 살살 건드렸다. 영욱이 임금을 더 올려달라는 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얄팍한 수작이기도 셈이다.

"사실 제 생각에도 진 씨 아저씨가 저보다는 나은 것 같아요. 하지만 저도 계속해서 실력이 늘고 있으니 머지않아서 앞지를 수도 있을 겁니다."

"계속해서 실력이 늘어난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많지 않아. 어느 정도 수준에서 벽을 만나 정체되기 일쑤지. 오히려 퇴보하는 경우도 많고 말이야."

김길태 사장은 둘의 대결이 이루어지기 힘들 거라고 단언했지만 의외로 빨리 대결의 순간이 오고 말았다. 

대규모 공원묘원 확장 공사로 인해서 작업해야 할 일은 많고, 보유한 포클레인의 숫자에는 한정이 있으니 김길태 사장은 자연스럽게 야간작업할 기사들을 모집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일에 진중권이 자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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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태 사장의 기대와는 달리 야간작업에 자원自願한 사람은 오직 진중권뿐이었다. 수당을 50% 더 준다는 말에 자원할 마음을 먹고 있던 사람들도 진중권이 지원하자 모두 꼬리를 말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박영욱과 진중권이라는 두 괴물과 함께 작업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라면 모르겠지만 둘이 만나면 자연스럽게 경쟁이 되어서 불을 뿜게 될 것이니 괜히 병신 취급이나 당하지 않으려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게 현명한 처신이다.

이런 이유로 어느 날 밤 두 사람은 결국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네가 박영욱이야? 이제 보니까 아직 젖비린내가 물씬 나는 애송이였잖아."

"그 젖비린내는 제 몸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라 아마도 제 애인으로부터 묻혀온 냄새일 겁니다."

영욱은 싹싹하게 인사했지만 진중권은 그 인사를 곱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는 말이 곱지 않자 영욱도 참지 않았다. 키는 영욱이 훨씬 더 컸지만 나이는 진중권이 두 배 이상이나 많았다. 둘은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경쟁의식을 드러내면서 부딪쳤다.

"뭐라고? 하하하! 이 녀석이 제법 맹랑하군."

"그나저나 아저씨는 홀아비였어요? 몸에서 고독한 냄새가 풀풀 나네요. 좀 씻고 다니지 않고……."

"내 애인은 포클레인이야. 그러니까 기름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하지."

"아무튼 한 수 부탁드립니다."

"좋아. 잘 보고 배우라고."

둘은 나란하게 서서 작업을 시작했다. 영욱은 작업하면서도 시선을 온통 진중권의 작업에 두고 있었다. 그의 포클레인 운전 솜씨는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었다. 영욱처럼 빠르게, 열심히 움직인다기보다는 아주 부드럽고 깔끔한 동작으로 일관했다. 

무엇보다 포클레인과 기계 삽의 동선動線이 아주 짧았고, 적절한 계획 아래 움직인 덕분에 불과 몇 삽 뜨지 않아도 땅이 평평하게 골라지고 깊은 구덩이가 파졌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작업의 효율이 아주 좋다는 소리였다.

'완전 예술이군. 포클레인의 팔과 삽이 마치 무술을 수련한 사람의 손처럼 움직이는군.'

영욱은 진중권이 한 수가 아니라 몇 수 위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 자신의 장점은 부지런함이지만 그 부지런함으로 따라갈 수 있는 작업 속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포클레인이 기계로서 움직일 수 있는 이상의 극한의 각도와 동작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기계 삽의 움직임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시야가 워낙 넓어서 작업해야할 공간 전체를 한 눈에 파악하고는 너무나도 효과적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작업을 하다보면 땅을 파내야하는 곳도 있고, 파낸 흙으로 북돋워야할 곳도 있고 단단하게 다져야할 곳도 있는데 그에 필요한 흙의 양을 귀신같이 파악해 내는 덕분에 필요 이상의 동작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큰 돌과 나무뿌리가 있는 것도 미리 파악해서 작업의 효율을 높였다. 그러니 작업이 어려운 곳을 피해서 주변에서 먼저 작업하다 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큰 돌과 나무뿌리가 노출되곤 했다. 

그게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는 영욱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잡다한 효율들이 모여서 결국은 목숨 걸고 일하는 영욱보다도 더 빠른 작업속도를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겨루어봐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영욱이지만 결코 작업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자 앞서 나가던 진중권이 뒤를 돌아보면서 살짝 약을 올렸다.

"뭐해? 벌써 포기한 거야?"

"그럴 리가 있나요? 하지만 확실히 저보다 몇 수 위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너도 어린 나이치고는 만만치 않아. 기계 삽의 위력적인 움직임과 동작이 아주 깨끗해."

"고맙습니다. 하지만 진즉 찾아가서 배우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노력하다 보면 너도 할 수 있을 거야. 아무튼 이제부터 슬슬 속도를 내어볼까?"

"좋습니다."

부우웅!

진중권은 영욱에게 한 수 가르쳐주느라 천천히 움직였던 것이다. 덕분에 그의 작업을 보면서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배운 영욱은 이제 배운 것을 연습하면서 작업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덜커덩.

처음에는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지만 자정이 지날 무렵부터는 기존의 작업보다 조금이나마 속도가 더 붙기 시작했다.

진중권은 여태까지도 실력을 감추고 있었던지 영욱의 작업 속도를 보아가면서 딱 기를 죽일 만큼만 자신의 작업 속도를 높여 나갔다. 아무튼 둘은 목숨 걸고 경쟁하듯이 작업을 했다. 

부우우웅!

두 대의 포클레인에서 엔진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질수록 바닥이 평평하게 골라지고, 커다란 계단식으로 층을 쌓은 공원 묘원의 예비 묘지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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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주간 근무를 뛰기 위해서 출근하던 작업 기사들이 두 사람이 밤새 벌인 만행을 발견하고는 짜증부터 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진중권과 영욱은 아침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작업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 마지막 피치를 올리고 있었다.

"젠장! 저것들이 정녕 인간들이야?"

"진 씨야 이 바닥에서 30년이나 굴러먹었으니까 그렇다고 쳐. 하지만 저 어린 녀석은 대체 뭐야?"

"강원대에 다니는 대학생이라던데 포클레인학과에라도 다니는 모양이야."

"그런 학과가 있기나 해?"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야."

"진 씨가 조금 빠른 것 같지만 별로 차이나지도 않아."

진중권이 작업한 량을 눈으로 가늠해보던 기사 하나가 신음 소리를 흘렸다.

"젠장! 아무튼 둘 다 인간들이 아냐. 그리고 진 씨는 오늘은 기필코 다섯 배의 장벽을 넘어서겠는데?"

"제길, 우리도 평균 이상은 하는데 저 녀석들 때문에 체면이 말이 아니군."

"어차피 미친놈들은 제정신이 아니라서 이길 수가 없으니 그냥 포기하자고."

포클레인 기사들이 술렁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둘의 작업은 끝났다. 두 사람의 경쟁은 당연히 진중권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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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샘 작업과 한 판 승부로 인해 급격하게 사이가 가까워진 진중권이 영욱을 공원묘원 입구 근처에 있는 선술집으로 이끌었다.

"영욱아. 대포 한 잔 먹고 가."

"저도 그러고는 싶지만 오늘은 1교시부터 수업이 있어서 좀 곤란해요."

"1교시가 언제부터인데?"

"아홉 시요."

"그럼 아직도 세 시간이나 남았는데 뭘 그래? 남자라면 술도 한 잔 마실 줄 알아야 해."

"그러죠. 아저씨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 막걸리는 제가 쏘겠습니다."

"당연하지."

결국 패자敗者인 영욱에게 술 한 잔 사라는 소리였으니 영욱은 진중권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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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한 잔 받으세요. 아저씨의 작업 모습은 정말 예술입니다. 존경합니다."

"하하하! 존경까지야……. 그런데 너는 무슨 격투기 연습이라도 하는 것 같던데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거야?"

"이건 제가 군에 있을 때 알게 된 특급비밀이지만 아저씨께만 알려 드릴게요. 곧 탑승용 전투로봇이 상용화될 겁니다. 그래서 미리 연습이라도 해 두려는 거죠. 하하하!"

물론 농담이다. 박상태를 대비해서 포클레인으로 전투 연습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조만간 전투로봇이 상용화될 리는 없다. 

그것도 탑승용 로봇이라면 더더욱 불가능한 꿈이다. 사람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숙달된 조종사의 경제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인간의 생명을 중시하는 것이 요즘 세상의 트렌드다. 그 결과물이 무인화나 기계화이니까 탑승용 로봇은 그러한 취지에 전혀 맞지 않다고 봐야 한다.

"이미 전역한 군인이 전투는 해서 뭐하게?"

"전역하고 나서 보니까 이 사회가 진짜 전쟁터지 뭡니까."

"진짜로 싸움을 잘 하려면 그렇게 과격하게 움직여서는 곤란해. 이제는 너도 어느 정도 깨달았겠지만."

"아저씨의 움직임처럼 그렇게 부드럽게 움직이면 전투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밤새 많이 훔쳐 배운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하하!"

"물론 그렇게 하면 돼. 하지만 그건 그냥 손동작일 뿐이잖아. 권투처럼 손으로만 싸우던 시대는 이미 지났어. 요즘은 종합 격투기 시대잖아. 안 그래?"

"예. 하지만 제가 싸울 줄을 알아야 말이죠."

"네가 원한다면 가르쳐줄 수도 있어."

술잔이 오갈수록 둘 사이의 이야기도 점점 더 깊어지기 시작했다. 진중권은 영욱이 원하는 바를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듯이 입안의 혀처럼 굴었다. 

"작업은 어떡하고요?"

"작업이 곧 훈련이지. 그게 아니라면 배워서 뭐하게? 정말 포클레인으로 전쟁이라도 치르겠다는 거야?"

"그렇다면 빠르게 이동하면서도 작업이 가능하다는 말인가요?"

"당연하지. 강력한 힘은 당연히 빠른 속도에서 나오는 거니까. 배울 거야 말 거야?"

"가르쳐 주신다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가르쳐 줄 수는 있지만 문제는 내 신조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거야."

"당연하죠. 무한 리필로 막걸리를 대접해 드릴게요."

진중권이 거의 막걸리 중독 수준임을 파악한 영욱은 그게 가장 원하는 대답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영욱의 대답에 진중권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퍼졌다. 사실 진중권으로서는 막걸리 값이 문제가 아니라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필요한 듯했다.

"좋아. 내가 죽을 때까지 막걸리를 사준다면 가르쳐 주기로 하지."

"그러죠. 그런데 무슨 무술 같은 것은 아니겠죠?"

"왜 아니라고 생각하지?"

"그런 게 흔한 세상은 아니잖아요."

"흔하지 않다는 것과 없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는 거 몰라?"

"그렇다면 제가 횡재한 거네요."

둘 사이의 이야기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욱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마법의 존재 여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초능력이 존재하는 2QB의 세상도 있는데 현실 세계에 내공이나 기를 이용하는 무공이 있다고 해서 놀랄 이유가 없다. 아니, 이 세계에도 그런 게 있어야 어느 정도는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여겨지기까지 했다. 김 대위도 비기를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 웬 떡이냐 싶었다.

"과연 그럴까? 그리고 가르쳐 준다고 해서 잘 배울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

"그야 그렇겠지만 왠지 잘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요."

"손동작은 제법 잘 따라하더군. 하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야."

"그게 빙산의 일각이라면 정말로 기대되는군요."

"하지만 문제는 또 있어. 제대로 배우자면 네 소유의 포클레인이 있어야 해."

진중권이 잔을 비우는 족족 막걸리만 따라주면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결국 이런 이야기까지 나오고 말았다.

"그건 왜죠?"

"포클레인이 평소에는 하지 않던 동작까지 길들여야 하는데 남의 기계로는 좀 그렇잖아. 애써 길들여놓고 다른 놈에게 갈 수도 있고, 또 과격한 동작들을 차체가 견뎌낸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야."

"하지만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서 포클레인을 장만해요?"

"장기 계약을 하면 미리 불하받는 것도 가능해."

"누구와 장기 계약을 해요?"

"그야 당연히 김길태 사장이지. 새 것을 주지는 않겠지만 지금 네가 모는 것 정도만 해도 충분할 것 같아. 그동안 네가 잘 길들인 것도 있고 말이야."

영욱은 진중권의 말에서 뭔가 다른 것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영욱 자신만 단련하는 것이 아니라 포클레인을 탄 채로 포클레인과 함께 단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포클레인에 무슨 기운이라도 불어넣는 건가요?"

"정확하게 짚었군. 땅만 잘 파는 포클레인이 아니길 원한다면 자신이 부리는 기계에도 응분의 대가를 지불해야지."

"잘하면 변신 마법이라도 부릴 것 같은 분위기군요."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할 지도 모르겠지만 꿈속 세상에서는 변신 마법도 충분히 가능하지. 물론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르면 현실 세계라고 해서 불가능할 것도 없지."

진중권은 술 한 잔을 마시고는 한 마디 대답하고, 다시 마시고는 또 대답하기를 반복했다. 영욱은 빈 술잔에 술을 따르느라고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아저씨도 꿈속 세상을 아세요?"

"잘 알지. 그리고 너만 포클레인으로 싸우는 게 아냐. 사실 네가 말하는 어지간한 전투로봇보다는 포클레인이 훨씬 더 효율적이지."

"저는 정신력만 충분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다른 게 또 있었군요."

"생각보다는 아는 게 많군. 그 정신력에 2QB 세상으로 소환한 포클레인이 더 잘 감응하게 만드는 체조가 있어. 기계로 하는 체조니까 그게 진짜 기계체조인 셈이지. 하하하!"

진중권이 영욱에게 가르쳐줄 싸움 기술은 바로 기계체조였다. 기계를 사용해서 하는 체조이기도 하지만 기계를 강화시키는 체조이기도 한 듯했다.

"기계체조라니 이름 한 번 멋지군요. 그런데 언제부터 가르쳐주실 거죠?"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가르쳐줄 준비가 되어 있어. 네가 절만 한다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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