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가 살았다는 유럽의 중세도 아닌 21세기 대한민국에, 그것도 꿈에서 상대를 괴롭히거나 힘을 빼앗는 드림헌터라니 조금은 생뚱맞은 이야기로군요."
"그냥 취미로 괴롭히는 게 아니라 상대의 힘을 빼앗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야."
몽마처럼 섹스를 통해서 정혈을 뺏는 것은 아니지만 박상태도 상대의 힘을 뺏기 위해서는 일정한 형식을 취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영욱을 제외한 두 사람은 이미 비몽사몽이라는 책을 읽었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 내용을 100퍼센트 맹신하는 듯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직은 아무 것도 모르는 영욱을 가르치는 분위기로 대화가 이어졌다.
"그럼 박상태 그 녀석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괴물이 되었다는 소리군요."
"그러니까 내가 그 녀석에게 쩔쩔 매는 거 아니겠어? 예전의 그 한심한 녀석이라면 질 리가 없잖아. 그것도 내 꿈속에서 말이야."
"내 꿈과 남의 꿈이 다른가요?"
"당연히 다르지. 그리고 둘의 꿈이 서로 만나야 싸움이든지 고문이든지 가능해지지. 그런 부딪침이 가능하니까 2QB가 실존하는 세상이라고 주장하는 거지."
"쉽게 말해서 사이버상의 공간에 함께 모여서 게임하는 것과도 비슷한 개념이라고 보면 될 거야."
김 병장도 설명을 거들었다. 젊은 사람이니까 온라인 게임으로 그 예를 들었다. 물론 영욱으로서도 그 편이 더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런 게임을 즐기지는 않지만.
"맞아. 내 꿈이란 결국 내 영역 안에서 꾸는 꿈을 말하는 것인데 드림헌터들은 그런 남의 영역을 어렵지 않게 파고들 수가 있지. 마치 강도나 도둑처럼 말이야."
"혹시 2QB 세상에서는 초능력이나 마법 같은 것도 쓸 수 있나요?"
"당연하지. 강력한 정신력이 있다면 강력한 초능력을 쓰는 것도 가능하지. 누구라도 꿈에서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게 가능한 것처럼 말이야. 어디 그뿐이겠어? 무엇이든지 소환해서 이용할 수가 있지. 마법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그게 그거겠지. 안 그래?"
영욱은 박상태가 허공을 딛고서 날아오른 다음 빠르게 떨어지면서 자신을 짓밟은 게 바로 마법이나 초능력의 발현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물론 꿈속에서나 실현가능한 이능異能이겠지만.
"그렇다면 제 몸이 천근만근이 되는 것도 그 녀석의 능력이란 말인가요?"
"네가 너무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염동력을 이용한 속박 초능력이라고 봐야겠지. 사실 나도 그런 느낌 잘 알아."
"그것도 아니라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주어서 마비나 스턴 상태로 만든 것이든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상대의 머리를 뜯어먹는 것이 그저 똑똑해지려고 그러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
김 병장과 김 대위는 서로 번갈아 앞을 다투어 대답했다. 바로 박상태의 초능력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는 소리였다. 본인들도 직접 당해봤으니까 모를 리 없다.
"상대의 머리를 뜯어먹으면 정신력이나 혹은 마법 능력이 늘어난다니 무척이나 당황스럽군요."
"너만 당황스러운 게 아냐. 세상 자체가 완전히 다른 곳이니까 이제 너도 그 세상에 대한 공부가 필요할 거야."
"그런데 그렇게 무지막지한 괴물이라면 그 녀석을 상대로 제가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영욱은 박상태의 정체를 알게 될수록 오히려 더 기가 죽었다. 사실 여태까지는 나름 오기로 버티고 있었지만 이제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더 이상 버티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런데 김 대위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약해지지 말고 무조건 버텨야 해. 아직까지 버티고 있었다면 너도 숨겨둔 한 수가 있다는 거 아니겠어?"
"숨겨둔 수가 있을 리 없잖아요. 그리고 겨우 다섯 번 버텼을 뿐이에요."
"그게 아냐. 피해를 당한 병사들을 조사해보니까 대부분 두 번이나 세 번을 넘기지 못했어. 그러니까 그 정도면 상당히 버틴 게 맞아."
"그건 그렇다 치고, 말씀을 듣자니 중대장님께서는 혹시 숨겨둔 한 수가 있다는 겁니까?"
"공개할 수는 없지만 있기야 있지.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조선시대 유명 무관 가문의 자손이야. 내가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한 것은 조국의 안위에 대한 나름대로의 사명감도 있지만 무관으로서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집안의 내력이기도 하지."
김 대위에게는 나름 숨겨둔 한 수가 있는 듯했다. 조선시대의 유명 무관 가문과 2QB 세상의 드림헌터 사이에 무슨 함수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중대장님께서도 곧 포기하고 싶을 정도라니 박상태 그 새끼가 엄청나게 강하긴 강한 모양이군요. 하지만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게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새끼가 중대장님에게 집중하느라고 저에게 힘을 쏟을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 힘의 집중에 관한 문제라면 일단 너부터 처리하고 나서 나를 상대하는 게 더 간단할 테니까……."
"그렇다면 저 자신도 모르는 능력이 저에게 있을 수 있다는 거군요."
영욱은 자신보다도 더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김 대위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자신도 모르는 것이 자신에게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김 병장의 표정 역시 영욱에게 숨겨둔 한 수가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그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영욱은 김 대위와 김 병장의 판단이 틀리지 않기를 진심으로 희망했다. 물론 영욱은 무관 가문의 자손이 아니다.
"그럴 거야. 나는 그렇게 확신해."
"저도 모르는 능력이라니 한 마디로 표현하지만 '대략 난감'이군요. 아무튼 뭔가 있으니까 녀석에게 절대로 굴복하면 안 된다는 거군요."
"맞아. 굴복하는 순간 신체의 일부나 숨겨둔 능력을 빼앗기게 될 거야. 하지만 밤마다 신물이 넘어올 정도로 두들겨 맞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을 테니까 끝까지 참고 버티라는 소리를 해 놓고도 미안한 생각이 절로 드네."
김 대위는 영욱을 격려하다 말고 오히려 자신이 용기를 잃어버린 듯했다. 그만큼 괴로운 밤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상황이 이렇게 급변하자 이번에는 영욱이 오히려 김 대위를 격려해야 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저도 끝까지 버텨볼 테니까 중대장님도 힘을 내십시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현실 세계에서 녀석이 숨은 곳을 알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2QB 세상에서는 천하무적일지 모르겠지만 현실 세계에서도 그렇지는 못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뱉어보는 말이었다. 강하다고 하더라도 마흔 명이 넘는 피해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당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총을 쏘아도 죽일 수 없는 괴물은 아닐 것이니까 찾아내기만 하면 해결이 가능할 것 같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서 벌써 육 개월 동안이나 버티고 있었어. 그런데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아……."
김 대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보냈던 지옥과도 같은 시간들을 반추했다. 영욱은 이제 거의 한계에 이른 김 대위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박상태가 더 괴물처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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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으로 돌아온 영욱은 우선 서점부터 들렀다. 그리고 <비몽사몽>이라는 책을 구입하기 전에 선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물론 그 책을 구입했다. 속독과 다독을 함께 즐기는 영욱은 어떤 책이든지 그런 식의 과정을 거쳐서 구입하는 버릇이 있다.
아무튼 <비몽사몽>이란 책은 자신이 반복되는 악몽을 꾸고, 박상태의 만행을 알지 못했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내용이 적힌 책이었다.
책의 저자 이은석 박사는 마치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설명을 덧붙여서 영욱의 궁금함을 해결해 주었다.
"제길! 1Q84의 세계도 아닌데 무슨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그 책에는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새로운 세상 2QB의 아침이 밝아온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2QB 세상에서 편안하게 잠이 들면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올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중대장 김 대위의 말로는 두들겨 맞다가 견디지 못하고 기절하게 되면 역시 현실 세계로 돌아올 수 있다고 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면서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이었다.
흔히 우리가 꿈속 세상이라고 아는 그 세상은 영혼들만의 세상이며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그대로 펼쳐지는 세상이라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2QB 세상에서도 자신의 영역 내에서만 머무르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하지만 영역 밖으로 나들이를 가거나 영역 내에 머무르다가도 운이 나빠서 드림헌터라는 강도의 방문을 받게 된다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도시 밖으로 빠져 나가는 행동은 자살 행위와도 같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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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합니다."
영욱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학가 부근에 있는 점집을 찾아갔다. 은영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서울까지 갈 시간적인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드림헌터라는 이름을 가진 극악의 몬스터 앞에서 사냥감 신세로 전락한 자신의 사정이 딱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영을 앞세워서 그녀의 언니가 운영하는 점집을 찾아가기에는 은근슬쩍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장차 처형이 될 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기죽기 싫다는 묘한 반항심 탓일 것이다.
"보아하니 귀신에 씌웠군. 그런데 아주 이상한 귀신이야."
"예? 그게 보여요?"
"내가 누군 줄 알아? 진짜 최영 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레알 박수무당이야. 레알이 무슨 뜻인지 몰라?"
진짜 무속인인지 사기꾼인지 도저히 분간이 되지 않는 사십 대의 남자는 처음부터 반말로 일관하면서 큰소리를 뻥뻥 쳤다.
게다가 나이에 맞지 않게 비속어를 남발하기까지 했다. 평소 같으면 비호감일 수도 있겠지만 아쉬운 영욱의 입장에서는 그게 오히려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영욱도 알다시피 최영 장군은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자 명장이다. 하지만 이성계에게 패하고 죽은 탓에 그 억울함이 사무쳐서 원혼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속 신앙에서 가장 강력한 숭배 대상이 되곤 한다.
특히 개성의 덕물산德物山에는 장군당이라는 최영 장군을 모신 신당이 있는데, 그것을 속칭 최영사崔瑩祠라 부르기도 할 정도다.
물론 진짜 박수무당은 많지 않겠지만 영욱의 상태를 한 눈에 알아보는 이 박수무당은 제법 그럴싸한 귀신을 모시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기 입으로도 진짜라니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쫓아낼 방법이 있나요?"
"당연히 있지."
"굿이라도 해야 하나요?"
"굿으로는 안 돼. 죽은 귀신이라면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 굿으로 떨쳐내?"
놀랍게도 이 박수무당은 영욱을 괴롭히는 영혼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 자 역시 2QB의 세상을 잘 알고 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로 영험한 무당이 분명했다.
"그럼 어떤 방법이 있다는 건가요?"
"잠을 자지 마. 그러면 너를 노리는 그 산 귀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잠을 자지 않고 살 수 있어요? 하루 이틀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밤에 자지 말고 낮에 조금씩 나누어서 자.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 놈도 잠이 들어야 내 꿈에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인가요?"
"맞아. 이제야 겨우 말귀를 알아듣는군."
박상태와 잠자는 시간대를 달리 하라는 박수무당의 방법에는 일견 일리가 있었다. 문제는 밤마다 잠을 자지 않고 버틴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실행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혹시 도움이 될 만한 부적 같은 건 없을까요?"
"없어. 산 귀신에게는 오로지 너의 온전한 정신력으로 버텨야만 해."
"정신력이라고요?"
"그래. 그게 바로 2QB 세상에서 이능을 발휘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야."
"혹시 이 책 읽어보셨어요?"
영욱은 자신의 가방에서 <비몽사몽>을 꺼내 박수무당에게 보여주었다.
"당연하지. 그 책은 신개념 무속인의 필독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지. 나도 서른 번 이상 읽은 책이야."
영욱은 상대가 굿이나 부적을 팔지 않으려는 박수무당이니까 오히려 더 믿음이 갔다. 짐작대로 그는 2QB의 세상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세요?"
"당연히 사실이지. 원칙적으로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사는 세상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산 자들의 영혼도 함께 어우러지는 곳이기도 하지. 그래서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기가 훨씬 더 쉬워졌다고 볼 수 있지."
"혹시 정신력을 강하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저에게 조언해 줄 수 있나요?"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넘어서는 훈련을 반복하게 되면 육체뿐만이 아니라 정신력도 점점 더 강해지게 되지.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바로 정신력의 도움이니까. 하지만 너는 이미 상당히 강한 것 같은데?"
용하다는 이 박수무당 역시 중대장 김 대위와 비슷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나쁜 말이 아니겠지만 도무지 그 근거를 알 수 없는 영욱으로서는 오히려 답답하기만 했다.
"하지만 제가 특별히 가지고 있는 비기秘技나 하고 있는 훈련 같은 것은 없는데요?"
"그럴 리가 있나. 잘 생각해 보면 분명히 있을 거야. 아무런 노력도 없이 공짜로 정신력이 강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확실해요?"
"확실해."
이쯤 되자 영욱은 정말로 답답해졌다. 맹세컨대 가문으로부터 전승되는 비기가 있는 것은 정말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반복했던 훈련이라면 어릴 때부터 앓아오던 아토피의 지독한 가려움을 참기 위해서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지만 그 호흡법이 정신력을 강화시킨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사실 아토피는 아직까지도 치료약이 없는 질병이다. 가려움을 일시적으로 덜어주는 스테로이드 제제를 치료제라고 오인해서 쓰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면역을 떨어뜨려서 오히려 더 큰 해가 된다.
영욱도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연고 대신 택한 방법은 참을 인忍이라는 한자를 마음속으로 수백 번씩 쓰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것이었다. 그게 영욱이 가진 호흡법이라면 호흡법이다.
옛말에 의하면 참을 인忍 자를 세 번 쓰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는데 수백 번을 써도 아토피로 인한 지독한 가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긁어서 더 심해지는 것 정도는 막을 수 있었다.
아토피를 앓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아토피언'이라고 지칭하는데 그 단어에는 엄청난 양의 눈물이 숨어있다. 남들 보기에는 마치 전염성 피부병이 걸린 것처럼 흉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그 지독한 가려움 때문에 하루에 두세 시간 이상 잠들 수도 없는 것은 아토피언이라면 누구나가 겪는 보편적인 고통이다.
특히 어린 시절에 아토피가 발현된 경우에는 그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밤새도록 긁어서 온 몸이 피범벅이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아이도 울고, 부모도 함께 울게 되는 것이 바로 아토피란 불치병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가려움을 참는 훈련이 정신력 강화에도 도움이 될까요?"
"당연히 도움이 되지. 그렇지 않다면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왜 생겨났겠어?"
만류귀종萬流歸宗은 불교에서 나온 사자성어로, 모든 물줄기가 결국 바다에 가서 하나가 된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박수무당의 확신에 찬 태도에 영욱은 어린 시절부터 지독한 가려움으로 점철點綴되었던 자신의 투병 경력이 박상태로부터 자신을 지켜낸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비기치고는 정말 초라한 비기였지만 그게 정신력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비기라도 발견했으니 밤에 잠을 자지 않고도 꽤나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부터 길게 잘 수도 없었으니까 크게 문제될 것도 없다.
그러고 보니 영욱은 자신이 쪽잠의 대가였다는 사실이 이제야 떠올랐다. 밤에 제대로 잘 수가 없으니 틈만 나면 의자에 앉은 채로 잠깐씩 졸아서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곤 했다. 그러니 박상태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영욱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복채로 지불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만, 이걸 가져가."
영욱이 자신의 지갑 속에 교통카드만 달랑 남긴 채로 돌아서는데 박수무당이 불러 세우더니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불쑥 내밀었다.
얼핏 표정을 보아하니 영욱이 낸 복채가 자신의 예상보다는 훨씬 많다고 여기는 듯했다. 사실 밤에 잠을 자지 말라는 게 해결책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복채에 갈음할 만한 뭔가를 주려는 듯했다.
"이게 뭡니까? 부적인가요?"
"산 귀신에게 듣는 부적은 없다고 했잖아. 대학생이니까 그 정도의 한자는 읽을 줄 알겠지?"
박수무당이 내민 부적 같은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한자가 유려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閉目冥心坐, 握固靜思神, 叩齒三十六, 兩手抱崑崙, 左右鳴天鼓.
"폐목… 명심좌, 악고정사신, 고치삼십육, 양수포곤륜, 좌우명천고, 맞나요?"
"제법이군. 무슨 뜻인지는 알아?"
"아뇨. 하지만 대충은 알 것 같군요."
영욱이 따로 한자를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득환을 따라서 중국어를 배우느라고 아는 한자가 제법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그리 어려운 한자도 아니라서 쉽게 읽어낸 것이다.
"이게 바로 퇴계 이황 선생께서 남긴 오리지널 활인심방의 구결이야, 레알 오리지널이지. 머리의 피로를 풀어주는 효과가 있어서 정신력을 강화시키는데 꽤나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 열심히 수련하도록 해."
"고맙습니다."
영욱은 허리를 구십 도로 꺾어서 고마움을 표했다. 말로만 듣던 비기를 이제야 가지게 된 것이니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선시대 율곡과 함께 양대 석학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퇴계 이황은 성리학에서의 독보적 해석과 독창적 이론의 전개했던 인물이다.
그는 중국에서 건너온 도교양생법의 일종인 '활인심'을 개선해서 '활인심방'이라는 구결과 도인법을 만들었는데, 하루 종일 책만 읽는 양반들의 건강과 정신 건강을 위한 일종의 도인술導引術이다. 그런데 그게 생뚱맞게도 박수무당의 손에서 영욱에게로 전해진 것이다.
"활인심방의 좌식도인법은 인체의 전면에서 흐르는 임맥과 인체의 후면을 흐르는 독맥을 원활하게 유통시키는 소주천 수련을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기의 순환이 양다리와 양팔은 물론이고 머릿속으로도 이어지는 대주천도 불가능한 것은 아냐. 그리고 미약하게나마 육체적 건강 증진에도 도움이 되니까 그리 알고 열심히 수련해."
박수무당이 무협 소설을 연상시키는 허황된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영욱은 감동스러운 표정을 유지하면서 그의 기분을 맞추는데 여념이 없었다. 상대가 흥분한 이럴 때일수록 장단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군대 생활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 이왕이면 구결에 대한 설명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별 거 없지만 원한다면 간단하게 알려주기로 하지."
"부탁드리겠습니다."
"폐목명심좌는 글자 그대로 폐목 즉, 눈을 지그시 감고, 명심좌 즉,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편안하게 앉는 거야. 이렇게 말이야. 기를 유통시키는 도인법이라고는 해도 심상 위주의 수련이니까 눈을 감는 것이 당연하겠지."
"그렇군요."
박수무당의 설명이 시작되자 영욱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시범을 보이는 그의 동작을 따라 하기 위해서였다. 박수무당도 활인심방을 꽤나 오랫동안 수련했는지 한 눈에 보아도 그럴 듯한 자세가 나왔다.
"악고정사신은 주먹을 악고법으로 쥐고서 생각을 없애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야."
"그런데 악고법이 뭐죠?"
"악고법이란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때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는 손의 모양을 일컫는 것이지. 이것이 바로 하늘이 준 최초의 수인법이라고도 알려져 있지."
"그렇군요."
박수무당의 자세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영욱도 투박한 손이지만 마치 신생아의 손처럼 부드럽게 움켜쥐려고 노력하면서 자세를 잡아나갔다.
"좋아. 그 정도면 자세가 괜찮은 편이야. 고치삼십육는 글자 그대로 윗니와 아랫니를 마주쳐서 서른여섯 번 북처럼 두드리는 것이야. 이렇게……."
따다다닥.
"참 쉽지?"
"예."
"양수포곤륜은 두 손으로 뒷머리를 가볍게 감싼 상태에서 자신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심호흡을 아주 천천히 하는 것이지."
"일종의 토납법吐納法인가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아닌 것도 아니지. 그리고 마지막 좌우명천고는 두 손의 손바닥으로 귀를 덮은 상태에서 양손 검지를 중지 위에 올려놓았다가 미끄러뜨리면서 머리 뒤의 뼈를 튕기는 것인데, 자신에게는 큰북을 치는 것처럼 상당히 큰 소리로 들리지. 이렇게 말이야."
영욱도 자신의 귀를 막고 두 번째 손가락으로 두들기자 정말 큰북 치는 소리가 들렸다.
"예. 제법 큰 소리가 들리네요. 그런데 검지로 계속 머리를 두들기고 있는 것인가요?"
"맞아. 폐목명심좌, 악고정사신 그리고 고치삼십육은 일종의 준비 동작이니까 처음 한 번이면 되겠지만 양수포곤륜의 호흡과 좌우명천고의 북치는 동작은 계속해서 이어가야 하는 것이지.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이지만……."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더 가진 돈이 없어서 죄송하군요."
"돈을 더 바라고서 준 것은 아냐. 그럼 산 귀신에게 물어 뜯겨서 병신이 되지 않도록 열심히 수련하도록 하게."
"예. 고맙습니다."
점집을 돌아서서 나오는 영욱은 뿌듯함을 느꼈다. 자신의 한 달 생활비를 몽땅 날린 보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뭔가를 얻어오기는 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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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보기 좋게 사기 당했군."
하지만 활인심방이라는 것이 인터넷만 검색해 보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흔해빠진 수련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영욱은 스마트폰의 껍데기를 덮으면서 깊은 신음성을 흘렸다. 당장 끼니를 해결할 식비도 없지만 여자 친구 은영을 만날 데이트 비용도 없으니 그야말로 낭패인 셈이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생활비를 더 보내달라고 할 수는 없다. 설사 보내달라고 해도 보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친동생 영길도 이번에 대학생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더 보내줄 생활비는 없다고 봐야만 했다.
*철야 알바
영욱은 공부에만 매진해야할 학기 중이지만 굶을 수는 없으니 알바를 뛰기로 했다. 포클레인 기사 자격증이 있고, 군대라는 2년의 경력이 있으니 알바를 뛰려고 들면 일할 곳은 얼마든지 있다.
사실 지난 학기 중에도 은영에게 줄 선물 마련을 위해서 목돈이 필요하면 가끔씩 알바를 나가기도 했었다.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이 처음인 영욱은 예쁜 여자 친구를 사귀려면 꽤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이번 학기 중에는 안 한다고 하더니 어쩐 일이야?"
"먹을 것이 떨어졌는데 별 수 있어요?"
"하하하! 요즘 아가씨들의 눈이 워낙 높아서 데이트 비용이 결코 만만치 않을 거야. 재벌 2세가 아니고서야 집에서 보내주는 돈으로는 어림도 없을 테지. 그렇지 않아도 요즘 일손이 달리던 참인데 잘 됐어."
포클레인을 무려 열다섯 대나 보유하고 있는 김길태 사장은 영욱을 무척이나 반겼다.
포클레인 기사의 일당은 숙련도에 따라서 15만 원에서 30만 원 정도 된다. 만일 자기 소유의 포클레인이 있다면 하루에 100만 원 이상의 수입을 올릴 수도 있겠지만 365일 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 정도의 임금이라면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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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웅!
돈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학생 신분에 수업을 빠질 수는 없으니 영욱은 철야 작업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밤에는 잠을 자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포클레인 작업과 새로 배운 활인심방의 수련으로 밤을 새기로 한 것이다.
"그럼 수고해."
"예. 사장님. 맡겨 두세요."
김길태 사장도 그러한 영욱의 계획을 반겼다. 반경 30km 내에 인가라고는 단 한 곳도 없으니 포클레인의 엔진 소리나 작업 중 발생하는 소음으로 인한 항의나 민원이 들어올 리 없다. 사실 영욱이 맡은 일은 공원묘원의 확장을 위해서 산을 파내고 계단식으로 터를 닦는 작업이다.
쉽게 말하자면 아무도 없는 공동묘지에서 혼자 철야 작업을 하게 된 셈이다.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고서야 선택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괴물 박상태와 용돈 부족이라는 사면초가에 몰린 영욱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살아있는 귀신이 무섭지 죽은 귀신 따위는 별로 무섭지 않은 영욱으로서는 오히려 편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친한 친구들이나 후배들에게 기대서 한 달을 넘길 수도 있겠지만 굳이 알바를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여자 친구 은영 때문이다.
아주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같은 학과에서 가장 예쁜 후배를 여자 친구로 만들었으니 남에게 뺏기기 않게 관리를 잘해야만 했다. 그러니 돈도 없이 여자 친구에게 빌붙을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포클레인 작업은 군대 시절 내내 했던 일이니 마치 자신이 직접 삽질하는 것처럼 익숙했다. 그러니 무념무상으로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작업을 이어나가면서 영욱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내가 예전에 자주 들락거리던 인터넷 아토피 사이트가 떠오르는군. 아토피 치유에 도움이 된다며 올려놓은 수많은 글들의 대부분이 쓰레기지만 쓸 만한 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 다만 너무 돈이 많이 들거나 투약 기간이 너무나 길고, 그 효과가 미진해서 쓰레기로 분류되거나 사장되었을 뿐이지…….'
영욱은 활성화된 인터넷으로 인해서 정보의 홍수를 경험하고 있는 세대다.
문제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어느 게 옥석이고 어느 게 쓰레기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박수무당이 건네준 활인심방 역시 그런 판단이 필요한 내용이다. 하지만 얼떨결에 큰 비용을 지불하고서 얻은 것이니 돈이 아까워서라도 열심히 수련해 볼 생각이었다.
사실 아토피가 불치의 병이긴 하지만 그것을 극복해낸 인간 승리의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영욱도 어느 정도는 아토피를 극복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인간 승리자들이 자신의 비밀 처방을 100퍼센트 밝히는 경우는 없다. 잠만 제대로 잘 수 있다면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던 초심과는 달리 막상 아토피에서 해방되자 자신이 가진 비방?
方을 돈으로 바꾸고 싶은 욕심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사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확보를 위해서 쳐놓은 법적인 규제 때문에 개인이 약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구멍은 전혀 없는 세상이다. 자칫 잘못하면 의료법과 약사법 위반으로 철장 신세를 지게 될 가능성만 컸다.
또한 허심탄회하게 알려주는 경우라고 해도 다들 믿지를 않았다. 잘 알려지지도 않은 이상한 약을 너무나도 오랜 기간 동안 먹어야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믿더라도 실천에 옮기기는 어려웠다.
영욱은 몇 년 전 누군가의 치유 성공 사례를 읽다가 사용된 약제가 사람의 내장內臟을 튼튼하게 만드는 성분임을 알 게 되었다. 장 누수증후군에 관한 내용과 그에 대한 보강이 바로 기적의 주인공이 제시한 아토피 치유의 핵심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장의 상피 세포는 외부와 내부가 소통하는 출입문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고 한다. 또한 소화, 흡수, 운동, 신경물질 분비, 면역 기능의 중심이 되는 곳이기도 했다.
이러한 기능은 소장의 융모絨毛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데 소장의 융모들은 치밀한 결합에 의해 서로 단단히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에 의학 용어로는 치밀한 연합tight junction, 줄여서 TJ라고 부른다.
이러한 TJ의 기능은 불필요한 외부 물질이 우리 몸속으로 흡수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어떤 이유들에 의해서 이러한 TJ의 구조적 변화와 이로 인한 소장으로의 투과도의 증가가 아토피와 같은 자가 면역성 질환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즉, TJ의 기능이 손상됨으로 인해서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들이 들어오게 되고, 이것들이 과도한 면역반응을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균이나 독소는 물론이고 영양 성분의 일종인 단백질마저도 9,000달톤Dalton 이상의 크기로 흡수되면 이를 이물질로 간주하고는 면역반응이 일어난다는 게 현재까지 알려진 아토피 질환 발생 이론 중의 하나다. 그게 식이성 아토피의 가장 유력한 발병 이론 중 하나다.
달톤은 원자나 소립자 등의 영역에 사용되는 원자 수준의 질량을 표시하는 단위다. 탄소 원자 하나의 질량이 겨우 12달톤이니까 9,000달톤이라고 해도 어마어마하게 가벼운 무게인 셈이다.
영욱은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먹고 소화시키는 일에 신경을 많이 써서 적어도 가려워서 밤잠을 설치는 수준에서는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운동을 하거나 날씨가 더워서 땀을 흘리게 되면 여전히 피부가 따갑고, 가끔 술을 한 잔이라도 마시면 보기 흉할 정도로 벌겋게 달아오르기는 한다. 하지만 평소에 겉으로 보기에는 많이 깨끗해진 편이다.
아무튼 인터넷에서 범람하는 무수한 정보들 중에서 나름 정답에 가까운 치료법을 찾아냈던 것처럼 지금 자신에게 굴러들어온 활인심방의 구결 역시 어려움에 처한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러한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영욱이 가진 장점들 중의 하나였다.
"폐목명심좌, 악고정사신, 고치삼십육, 양수포곤륜, 좌우명천고."
영욱은 작업 도중 잠깐씩 쉬는 시간들을 적극 활용해서 활인심방을 수련했다. 수련 방법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처음에는 서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법 그럴듯한 자세가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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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플라시보 효과일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괜찮은 것 같은데……."
활인심방을 수련한다고 해서 당장 정신력 강화에 도움이 되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포클레인 작업의 효율만큼은 제법 늘었다.
그게 활인심방의 도움인지는 명확하지 않아도 육체적으로 큰 부담이 갈 수 있는 철야 작업을 했는데도 시험 기간 동안에 밤을 새워서 공부할 때보다도 컨디션이 좋았다. 정신적인 피로를 푸는 것은 물론이고 육체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도인법이라더니 정말 그런 듯했다.
포클레인 기사들 중에는 포클레인의 기계 삽을 마치 자신의 손처럼 움직이는 사람들도 가끔씩 있다. 흔히 말하기를 달인의 경지라고 한다.
그러한 경지에 이른 달인들의 작업량은 다른 포클레인 서너 대의 작업량보다 많을 수도 있으니 무엇이든지 수련하고 집중하기에 따라서 그 작업 효율은 천차만별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포클레인은 기계지만 마치 곤충의 다리나 로봇의 움직임처럼 움직여야 하는 탓에 자동차처럼 달리기만 하는 것과는 달리 기사의 능력이 아주 중요하다. 물론 자동차 운전도 드라이버의 능력이 아주 중요하지만 포클레인은 더 중요하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영욱은 가까운 미래에 사람이 탑승해서 운전하는 대형 로봇들이 개발된다면 포클레인 기사들이 가장 먼저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만큼 포클레인의 움직임은 로봇을 많이 닮아 있었다. 비록 손이 하나뿐인 장애인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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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왜요?"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한 김길태 사장의 입이 쩍 벌어졌다. 철야 작업은 아무래도 효율이 많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이 놀란 듯했다. 물론 작업량이 적어서 놀란 것은 아니다.
"박영욱, 너 대체 뭐하는 놈이야?"
"혹시 작업이 잘못된 곳이라도 있나요?"
"아냐. 완벽해. 그리고 철야 작업인데 어떻게 이렇게 많이 작업한 거야?"
"아하! 난 또……. 주변이 조용하니까 오히려 집중이 더 잘 되더군요."
"좋았어. 일당 20만 원이 전혀 아깝지 않아. 수고했어."
김길태 사장은 일당 15만 원만 쳐줄 생각이었지만 작업량을 보니 차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철야 작업이라고 해서 임금의 1.5배나 2배를 쳐주는 정규직은 아니니까 오히려 일당을 후려치는 게 그로서는 당연한 발상이다. 하지만 그것도 보통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이왕 쓰시는 김에 5만 원만 더 쳐주세요. 남들보다 1.5배 이상은 한 것 같은데……."
"젊은 녀석이 웬 돈을 그렇게 밝혀?"
1.5배가 아니라 평균 작업량으로 따지자면 거의 두 배 가까이 했다. 그걸 잘 알기에 김길태 사장도 영욱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하지는 못했다.
"오죽하면 학기 중에 알바 뛰러 나왔겠어요? 게다가 여자 친구의 입과 눈이 얼마나 고급인지 정말 죽겠어요."
"좋아. 5만 원을 더 주는 대신에 계속해서 나와야 해. 며칠이라도 더."
김길태 사장으로서는 임금을 많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영욱이 임금으로 받은 돈을 다 소진할 때까지 일하러 나오지 않을까봐서 하는 말이다. 생각 같아서는 일당으로 주지 말고 월급제로 지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업계의 관행상 그럴 수는 없었다.
"좋아요. 시험 기간만 빼고 계속 나올 게요. 일감은 충분하죠?"
"일감이야 넘쳐나지. 그런데 매일같이 철야 작업을 하고도 수업을 들을 수 있겠어?"
김길태 사장의 입장에서 보자면 낮에도 작업하고 밤에도 작업할 수 있다면 돈을 두 배로 버는 일이니 마다할 리가 없다. 밤에는 당연히 쉬어야 하는 포클레인을 이용할 수 있으니 거의 공짜로 버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주독야경이란 말도 있잖아요. 문제없어요."
"주경야독晝耕夜讀 아닌가?"
"그게 그거죠. 헤헤. 그럼 저녁에 또 올게요."
"그래."
작업 결과에 영욱 자신도 놀랐다. 자신이 남들보다 일을 잘하는 편이긴 하지만 두 배까지나 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작업의 효율이 무려 두 배나 늘었으니까 활인심방의 효과가 상당하다고 봐야만 했다.
다른 종류의 방법이라도 그런 식으로 두뇌의 피로를 풀어준다면 작업의 능률이 오를 수 있을 테니까 꼭 활인심방의 효과가 커서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과거 시험에 급제하기 위해서 애용하던 방법이었다니까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다고 봐야 했다.
영욱 역시 모처럼 악몽을 꾸지 않은 탓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악몽을 꾸지 않은 것은 물론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았기 때문이지 활인심방의 효과 때문만은 아니다.
아무튼 간에 산 귀신을 피하려면 밤에 잠을 자지 말라고 했던 박수무당의 어처구니없는 충고가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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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다. 서둘러야 해!"
영욱은 학교 근처에 있는 자신의 자취방에 들러서 샤워를 한 후 서둘러서 아침을 챙겨먹었다. 그리고 책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서두른다고는 했지만 1교시 강의에 늦지 않으려면 광속으로 달려야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집 앞에서 여자 친구 은영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와달라고 애원해도 자취방 부근에는 오지 않던 그녀기에 영욱의 놀라움은 컸다.
그러고 보니까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된 탓에 밤새도록 연락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했다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한편으로는 화도 많이 나 있었다.
"은영아, 아침부터 여긴 웬일이니?"
아침부터 연인들이 붙어 다니면 남들의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영욱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자취방 앞이니 더 그랬다. 물론 남들이 오해를 할 만한 행동은 단 한 번도 저지른 적이 없지만.
"오빠야말로 밤새도록 어디 갔었어?"
"나야 알바 뛰고 왔지."
"뭐야? 달초부터 벌써 생활비가 다 떨어진 거야?"
"응. 어제 부대에 가면서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한 달 생활비를 다 써? 혹시 나 말고 다른 여자가 생긴 거 아냐? 솔직하게 말해."
영욱이 부대에 사들고 간 것은 겨우 통닭 두 마리였다. 거짓말을 하면 바로 알아차리는 은영이기에 이미 거짓말임을 알아차리고서 다그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녀의 입장에서는 영욱의 돈이 곧 그녀의 돈이기 때문에 화를 낼 만도 했다.
물론 영욱으로서도 50만 원이나 되는 한 달 생활비를 복채로 날렸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그녀가 가자고 했던 그녀의 언니에게 간 것도 아니니까 더더욱 숨길 수밖에 없었다.
"미쳤어? 너 하나로도 벅차."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빌리면 되는데 학기 중에 철야 알바를 왜 뛰어? 내가 사채업자라도 돼?"
"내가 여자 친구의 돈이나 축내는 한심한 놈으로 보여? 그렇다면 잘못 본 거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리고 수업 시간에 졸면 오히려 돈을 낭비하는 격이고 말이야."
영욱이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면서 언성을 높이자 은영도 어쩔 수 없이 다른 방향으로 말을 돌렸다. 영욱도 기운이 펄펄 넘치는 젊은 남자답게 기회만 있으면 껄떡거리곤 했다. 하지만 은영이 전혀 틈을 주지 않아서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 사실은 은영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욕구불만이 생긴 영욱이 어제 기어코 자신을 떼놓고 사라지더니 군대가 아니라 직업여성에게라도 가서 큰돈을 쓴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여자 친구를 사귀는 등의 양다리를 걸칠 위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영욱의 마음은 자신을 향한 일편단심임을 잘 알고 있기에.
"졸지 않을 테니까 성적 떨어질 일은 없어."
"만일 성적이 떨어지면 오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를 원망할 테니까 알아서 해. 우리 둘의 데이트 때문이라고 그러실 게 분명하니까."
"그럴 일 없어. 그리고 이번 학기에는 꼭 수석을 차지할 테니까 두고 보라고."
"나야 오빠의 실력을 믿지만 문제는 그 반복되는 그 악몽 때문이잖아."
"그 문제는 해결책을 찾았으니까 염려 마."
"누가 도와준 거야?"
"도와주긴 누가 도와? 나 혼자서 생각해 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