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2화 〉 강시 아니라고(25)
* * *
이 시대의 총은 어떨까.
계단을 올라가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지금 시대는 못해도 1900년 전후. 의화단의 난이 그즈음에 시작되고 끝을 맺었으니 아마 맞을 터다. 냉병기의 시대는 수백 년 전에 저물고 화기가 완전히 무기의 주류를 차지해 버린 시대.
그리고 여전히 무공이 남아 있는 이질적인 세상.
권민을 자처하며 총을 무술로 상대하려 했던 의화단이 총에 무력하게 쓸려 나갔던 시대. 적어도 원 역사는 그랬다. 총기에 냉병기로 대응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똑똑히 보여 준 시대였기에, 총기라는 단어에 신경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과연 총기는 평범하게 발전했을까.
그 의문이 내 마음속에 불안감을 키워갔다. 상대가 들고 나올 무기를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었다.
임진왜란 시기에나 썼을 화승총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시대를 한참 뛰어넘은 총기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막말로, 연사화기가 나오면 아무리 무림 고수라도 답이 없을 터였다. 아무리 신체 능력이 뛰어나도 찰나에 탄을 쏟아부으면 그걸 다 쳐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절정이 아니라 환골탈태를 거친 화경 같은 절대 고수가 아니면 탄환의 벽을 뚫고 들어가기는 쉽지 않을 터.
내가 그런 생각하는 동안에도, 분노와 증오가 섞인 행렬은 점점 화산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걸음걸이에 내 발걸음을 맞추면서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이 있다면, 좋든 싫든 무슨 소리가 들릴 터였다.
“...이런.”
지옥이다.
고즈넉한 건물들과,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을 화산은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수많은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화산을 물들인 검붉은 꽃무리가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조용하군...”
기분 나쁜 고요함과 피비린내가 코를 찔러댔다.
우리는 잔뜩 긴장한 채로 화산파 안으로 들어섰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퇴각했나? 꽤 깊은 곳까지 들어왔음에도 화산파는 조용했다.
우리는 진형을 갖춘채로 점점 안쪽으로 들어갔다. 목적지는 장문인이 일을 처리하는 집무실이었다. 장로의 말로는 그 방 안에 유사시를 대비해 무공비급들의 사본과 비상금, 식솔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모양이었다.
적들이 없다면 그곳을 확인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생존자가 있다면 그곳에 있을 테니까. 어쩌면 그곳도 마교의 무인들이 찾아냈을지도 모르지만, 화산파를 대표하는 신공인 자하신공을 사용하지 못하면 그곳의 문은 열지 못한다고 한다.
통로 너머의 문도 현철로 이루어져 있어 천하에 손꼽히는 고수 정도가 아니면 흠집조차 내지 못한다는 것 같고.
“장로님.”
“...무슨 일인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나에게는 그게 울분을 한껏 참고 있는 목소리로 들렸다. 나는 서슬 퍼런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장로에게 입을 뻥긋거렸다.
전음을 하는 법은 사부한테 가르침 받기는 했는데, 좀 어려웠다. 무협지 주인공처럼 순식간에 배워서 알차게 써먹고 그럴 천재적인 오성은 나한테 없었으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전음쓰기를 포기하고 아주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쩌면 저희가 그 통로를 찾기를 기다리고 잊지 않을까요? 그제 일어난 혈사랬으니, 어딘가에 매복을 하고 있다가 저희를 덮치면...”
[알고 있네. 그때가 우리를 노리기 가장 좋은 때겠지. 하지만 확인은 해야 한다네. 그리고 그때가 역습의 기회가 될걸세.]
전음이었다.
좀 더 안전하게 가는 게 맞지 않나 싶었지만, 장로의 뜻이 단호하니 외부인인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표정이 좀 걸리는지, 내 귓가에 여행기간 동안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로님은 일부러 그들을 도발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도발?
확실히, 장문인의 집무실은 여러 건물에 둘러싸여있는 구조라 기습하기 좋은 위치였다. 게다가 비밀 통로도 장문인의 집무실에 있으니, 그들이 비밀장소에 진입하려면 어쨌든 장로가 장문인의 집무실까지는 가야 했다.
검붉은 바닥을 지나 집무실 문 앞에 도착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주변을 경계했다. 장로는 부서져 바닥에 널브러진 문을 밞고 집무실 안에 도착했다. 집무실 벽은 누군가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피의 주인은...
“장문인...”
장로가 쓰러지듯이 주저앉으며 벽에 기대어 죽은 시신을 쳐다보았다. 나도 그 시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벌집이 되어 버린 상체와 옷을 물들인 검붉은 액체. 환갑은 옛날 옛적에 넘긴 듯한 노인이 눈을 부릅뜬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원통함에 사무친 눈이었다. 이미 생기를 잃었지만, 나는 그 눈을 보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얼마나 화산파를 지키고 싶어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나는 억지로 얼굴에서 눈을 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가슴팍에 생긴 수십 개의 구멍과, 주변에 남은 상흔들이 얼마나 전투가 격렬했는지 보여주는 징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장로는 떨리는 손으로 장문인의 몸을 가지런히 눕혀놓았다.
이미 전부 뒤지고 간 듯 어지럽혀진 집무실이었지만, 장로가 손을 몇 번 휘두르니 장문인의 시체를 눕힐 공간이 나왔다.
“장로님...”
“...주변을 경계하게. 그들이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르니.”
화산파의 무인들이 아무런 말 없이 검을 뽑아 들고 언제든지 출수할 준비를 마쳤다. 나도 머리카락을 조금씩 늘리며 언제든지 날아올 총탄을 대비하고 있었다.
“...통로를 열겠네. 장문인이 몸 바쳐 통로를 막았으니, 안쪽의 식솔이 남아있을 수도 있을 터...”
장로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집무실의 물건들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조금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기운을 느끼는 데에는 시각보다는 기감이 더 유용했다. 나는 조금씩, 내 기운을 화산파에 흘려 냈다.
내 기운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거야말로 이 사태의 관계자 이리라. 그렇게 점점 영역을 넓혀 집무실 주변을 전부 뒤덮었을 즈음이었다. 나는 아주 실낱같은, 이질적인 기운을 발견했다.
그 기운이 느껴지는 곳은...
집무실 안쪽에서 무언가 긁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눈을 뜬 나는 자연스럽게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밀 통로가 열리는 소리였다. 마침 내 기감이 가리킨 방향도 비밀 통로 쪽이었다.
불길함을 느낀 나는 곧바로 머리카락을 길게 늘렸다. 채찍처럼 길게 늘어난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비밀통로를 향해 뻗어 나갔다. 하지만 그것보다, 바람을 찢어발기는 듯한 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
“...윽!”
장로님도 낌새를 느낀 것인지 다행스럽게도 총알이 팔을 스치는 데에 그쳤다. 그 누구도 비밀통로에 마교의 무인이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내가 할 일은 하나였다.
내 머리카락들이 비밀통로 안쪽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있는 대로 늘어난 머리카락은 그리 넓지 않은 비밀 통로를 점거하고, 상식을 무시하는 상황에 당황스러운 총성을 모조리 막아 내며 비밀통로와 집무실 사이를 완전히 차단했다.
“여긴 제가 막겠습니다. 장로님과 무사님들은 바깥을 경계해주세요. 집무실 문도 닫아주세요. 완전히 밀폐된 공간이어야 제 무공이 극대화 된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머리카락을 한도까지 늘려야 하는 탓에, 조절 실수로 머리가 떨어질 수도 있어서 미리 보험을 들어두는 거였다.
신조차 쉽게 자르지 못 하는 머리카락을, 일개 화기로 흠집이나 낼 수 있을까. 장로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하얀 실타래에 막혀 버린 비밀통로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곤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가 외치셨다.
“진형을 갖추거라! 어디서 적들이 나타날지 모른다! 적들은 화기를 사용하니 급소를 철저하게 보호하도록!”
좋아. 바깥상황은 얼추 해결 됐고. 이제 내부에 있는 녀석들을 쓸어버릴 시간이다.
나는 머리카락을 끝을 날카롭게 세우고 비밀통로안을 휩쓸어 버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