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350화 (350/352)

〈 350화 〉 강시 아니라고(23)

* * *

일주일은 빠르게 지나갔다. 부서진 벽을 고치고, 건물을 수리하고, 연무장에는 기합 소리가 울려 퍼지는 시각은 내게 있어 꽤 특별한 시간이었다.

무협지로만 보던 세상에서 사람 냄새가 나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무림 맹에서 귀빈 대접을 받으며 꽤 편하게 지낸 덕도 있긴 하지만...그래도 요강 밖에 없는 건 좀 그렇긴 했다. 화장실, 그러니까 변소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가기가 좀 그렇드라. 수세식 화장실도 아니고 푸세식 화장실이라, 요강이랑 그게 그거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신체를 조절해 아예 배설물을 없애버리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안 그럼 저 요강을 계속 써야 할 판이었으니까. 정말 쓰기 싫었는데, 먹고 싸고 자는 게 사람인데 안 싸면 뭔가 좀 사람 같지가 않잖아.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만.

...단지 그거 때문에 정말 선녀가 아니냐는 괴상한 헛소문이 돌았지만, 비무 명목으로 적당히 몇 명 패니까 줄어들더라.

그렇게 몇 명 붙잡고 비무를 하다 보니 경험도 쌓고 해서 나쁘지 않더라. 내가 월향사부한테 죽어라 굴려지기는 했지만 실전 경험이라곤 의화단과 싸운 것밖에 없어서 좀 애매했는데, 비무를 하다 보니 실전에서 어떻게 써야 하는지 익숙해진 느낌?

뭔가 성장하는 맛이 확연하게 느껴진다고 할까. 마치 레벨업 하는 기분이라 생각보다 재미가 있었다. 물론 내가 특이한 케이스이기는 했다. 보통이라면 이런 식으로 성장하는 걸 체감하기가 참 어려운데 말이야.

게임이랑 다르게 현실은 성장이 체감이 거의 안 되니까.

“검강은 역시 힘든가...?”

검에 담긴 기가 흩어진다. 검기를 쓰는데 까지는 생각보다 쉽게 도달했지만, 검강은 도저히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역시 무공은 깨달음인가. 무협지에서 본 깨달음 구절 같은 게 스쳐 지나갔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애초에 내 무공은 야매에 가까운 무공이라 무림인처럼 경지를 쌓는다고 정말 고절한 경지에 이를지도 의문이었다. 애초에 신체 구조부터 미묘하게 다르기도하고, 내공을 써서 검기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마기도 아니고 순수한 내공도 아닌, 흔히 말하는 선기, 그러니까 신들 특유의 기운을 내공 대신 사용하고 있었으니 성질도 많이 다르니 무림인에게 통하는 이론이 내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성기사의 오러같은 게 내 기운과 비슷한 편이었다. 소설마다 설정은 다르지만 신성력으로 피어내는 오러에 가까운 느낌이라, 아무래도 나랑 비무했던 무림인이든 내 검기를 본 무림인이든 내 검기의 색을 신기하게 여겼다.

마기처럼 칙칙하고 불쾌한 기운이 아니라, 묘하게 사람을 편안 하게 하는 기운이라 큰 오해를 받지 않는 게 나름대로 내 이미지에 도움을 준 게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확히는 사람을 편안 하게 하는=사람을 천천히 죽음으로 이끄는 기운이란 게 함정이지만.

아무튼, 벌써 일주일이 지나 내가 화산에 가는 날이 왔다.

“소저, 준비는 끝났습니까?”

“네, 바로 나가겠습니다.”

애초에 가져온 짐이 없다시피 했으니 여기서 받은 돈으로 산 무복 몇 벌 말고는 챙길 것도 없었다. 그래도 검은 무림 맹 무사들이 쓰는 질 좋은 철검을 받았다. 무림 맹주는 그거밖에 줄게 없다는 게 아쉬운 눈치였지만, 영약 같은 건 부담스러워서 좀 그래.

나한테 영약이 거의 의미가 없는 것도 한몫했다. 단전에 내공을 모아두는 것도 아니고, 내공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기도하고.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정말 돌연변이가 맞다 싶었다.

무림인들이 사랑하다못해 집착하는 영약이든 무기든 나한테는 큰 의미가 없었으니까.

어차피 돌아가면 무공을 쓸 일이 있을 리도 없고.

그래도 괜찮은 영약 얻으면 가져갈까? 나는 어쨌든, 나리한테 몸보신용으로 하나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물론 어지간한 무협지는 좋은 영약은 일반인들한테는 오히려 독이 된다는 설정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으니, 안 가져가는 게 좋겠지.

애초에 작정하고 좋은걸 먹이려면 내 세계에도 괜찮은 게 많고.

근데 얘네들 밥은 먹고 있을지 걱정이네. 나 말고 요리다운 요리 할 줄 아는 애가 없다시피해서 죄다 배달만 시켜 먹을 거 같은데...보고 싶다.

“소저?”

“아, 죄송해요. 잠시 고향생각을 하느라.”

“하하, 여행자는 언제든 향수에 젖기 마련이죠.”

내가 치료해주었던, 화산의 무사는 넉살좋게 웃었다. 군데군데 옷 사이로 보이는 붕대가 그가 이 전투에서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알 수 있는 증거였다.

운이 좋지 않았다면, 지금쯤 하얀 천에 덮여 화산으로 운구될 시신 사이에 껴 있었을 테니까. 아니면 평생을 수련했던 검을 놓아야 한다는 절망감에 미쳐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름 모를 무사는 실실 웃으며 나를 일행에게로 안내했다.

“욘석아, 빨리 좀 오지 그러느냐.”

“하하...죄송합니다.”

“또 무공생각하다가 늦었냐?”

화산파 무사들은 전쟁을 겪었다는 사실이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일부러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걸까. 나는 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면사라도 사올 걸 그랬나?

사람들이 죄다 쳐다 보니 얼굴이 뚫릴 것 같았다.

“흠흠, 소저, 그럼 출발하겠소.”

다행히도 사람들의 시선을 끊듯이 전에 내게 감사를 표했던 화산파의 장로가 헛기침하며 눈치를 주고는, 말에 올라탔다. 나도 내 말에 어색하게나마 올라탄 채로 화산파 일행을 따라 무림 맹을 떠났다.

­­­­­­­­­­­­­­

화산파.

구파일방에서도 손꼽히는 성세를 자랑했던 문파이면서, 도가 문파로서 무당과 경쟁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문파 중 하나다. 유명한 절기는 이십사수매화 검법. 암향표, 자하신공 같은 게 대표적이었다.

적어도 대부분의 무협지에서 화산파가 나오면 통하는 국룰 같은 거였다.

요즘은 화산파 출신이 주인공인 무협지도 많이 나오더라. 예전에는 살짝 쩌리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말이야.

아무튼, 그런 화산파는 섬서성의 허리 쯤 되는 곳에 자리 잡은 문파였다. 그 밑으로는 화산파와 앙숙관계인 종남파가 있고, 제갈세가도 보통 섬서 끝자락 쯤에 있는 거로 아는데...여기에 제갈세가가 있었나?

잘 모르겠네.

제갈씨를 못 본 것 같은데. 무협지야 언제나 내용이 천차만별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구파일방 자체가 나오지 않는 무협지도 꽤 존재하니까.

“저기 저 산 보이십니까? 저 산이 바로 화산입니다.”

“와...대단하네요.”

중국의 오악(五?)중 하나인 화산의 모습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인상적이었다. 구름이 낀 꼭대기와 암석으로 된 봉우리에서 힐끗 보이는 분홍빛은 괜히 사람들이 화산을 영산이라 부르는지 단번에 납득하게 만들었다.

내가 지리산도 설악산도 가 봤지만, 아예 규모 면에서 비교가 안 되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이런 곳에 사니 신선 소리도 듣는구나 싶었다. 근데 화산파는 화산 중턱쯤에 있다고 들었는데, 저걸 다 올라가야 하나?

말타고 올라갈 수 있는 거 맞나? 말도 다치는 거 아냐?

“이 중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이죠. 단언컨대,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화산만큼 아름다운 산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종호라는 이름의, 내가 치료해주었던 무사가 자신만만한목소리로 화산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화산에 대한 애정이 진득하게 느껴졌다.

이 사람은 화산을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종호와 대화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화산파 무사들이 들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역시 고향에 돌아오니 모두 기쁜 모양이었다.

나는 언제쯤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까.

화산에 진짜 신선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곧 있으면 말에서 내려야 할 겁니다. 화산은 산세가 험해서 말을 도저히 타고 갈 수 있는 환경이 안 되거든요.”

그럼 경공써서 달려야 한다는 건데, 생각해 보니...경공은 배운적 없는데?

“경공으로 올라가야 하나 보네요...”

“그렇죠. 걸어서 올라가려면 두 시진은 걸리니 말입니다. 경공 수련도 할 겸 경공으로 오르내리는 사람이 많죠. 화산파의 제자들은 어릴 적부터 화산파를 오르내리면서 경공 수련을 하거든요.”

“힘든 수련이었겠네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가장 좋은 때였던 것 같습니다. 마음 놓고 수련에만 집중해도 되는 시기였...음?”

“멈추거라. 마을 분위기가 이상하구나.”

화산파의 무인들이 검 자루에 손을 얹었다. 언제라도 출수 할 수 있도록 경계하는 자세였다. 나도 슬며시 손을 검자루에 손을 얹으며, 주변을 살폈다. 대화에 정신이 팔려서 몰랐지만, 이상하게도 화산파 아래를 빼곡하게 둘러싼 마을에 활기가 없었다.

뭔가 눈치를 보는 듯한, 그리고 뭔가 일이 일어난 듯한...

수상한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건 내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을 직감하게끔 했다.

모두가 그렇게 경계하고 있던 때에, 눈에 익숙한 낡은 도복을 입은 남자가 헐레벌떡 그들에게 달려왔다.

“호연! 왜 여기에 있나!”

“아이고 어르신! 큰일 났습니다! 화산이, 화산이...습격 당했습니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더니.

마교인지 의화단인 모를 놈들은 나를 순순히 집에 돌려보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