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9화 〉 강시 아니라고(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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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선녀님! 제발 저희 아버님을 고쳐주시오! 사례는 두둑이 주겠소!”
아니 이 미친놈들아 제발 그만해!
내가 무슨 소원을 들어 주는 기계쯤으로 보이냐! 나한테 이상한 기도 하지 마! 선녀라는 오글거리는 별호도 붙이지 말고! 물론 평생 장애인으로 살 놈을 멀쩡하게 고치는 게 어그로가 끌릴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이건 상상 이상이잖아.
나는 창문을 가리는 천 사이로 보이는 수많은 사람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수련을 하려고 했더니 숙소 앞에 사람이 모여 있더라. 이러다가 나 가지고 아주 종교를 만들 기세라, 나는 숙소에 꼼짝없이 박혀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아, 시원한 물 마시고 싶어.
누가 중국 아니랄까 봐 마실거라곤 술하고 차 밖에 없었다. 수질 구리기로 유명한 땅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얼죽아의 민족인 내게 있어서는 이건 그냥 쌩 고문에 가까웠다.
목이 마른 데 뜨거운 차를 마시라니! 이건 지옥이야!
나에게 차가운 물을 달라! 그전에 저 인간들 전부 쫓아내는 게 먼저긴 한데! 어떻게 쫓아내지?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다. 원래 저렇게 간절하게 달려드는 인간들 만큼 쳐 내는 게 어려운 일이 없으니까. 심지어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평판에 큰 손상이 갈 수가 있었다. 우연찮게 얻은 좋은 평판인데, 나락보내기는 좀 그랬다.
나는 시비가 가져다준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마시고는, 더 심해진 듯한 갈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에드는 게 없었다. 시비도 내가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아는지, 평소에는 몇 마디 말을 건네지 않고 방을 나갔다.
나는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질러서 성공하긴 했는데, 어떡하지?
곧바로 화산파나 무당파에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일주일 정도는 무림 맹에 더 체류해야 할 듯했다.
일단 지금 모인건 일단 모여서 힘을 합치자는 취지 하에 뭉친 거였고, 지금은 연락망을 좀 더 촘촘히 유지한 채로 일단 자기 문파로 돌아가서 전력을 재정비해야 하는 타이밍이니까. 그리고 나는 그때 화산파에 갈 생각이었다.
무당파는 아무래도 아직 덜 친해졌기도하고. 무당파 무사들은 다친 사람이 별로 없더라고. 역시 구파일방의 수좌 답다고 할까. 소림이랑 무당은 정파 하면 최고로 쳐주는 문파들이니까.
아예 북숭소림, 남존무당이라는 말이 대놓고 나올 정도니 두 문파의 위상은 말이 필요 없는 수준이지.
소림은 둘째치고, 무당이랑 인연을 맺지 못한 건 아쉬웠다. 화산파에 비해 좀 더 폐쇄적이라고 해야 되나, 그런 분위기에 쉽사리 접근할 수가 없었다. 크게 다친 사람도 없으니 접근할 명분도 없고.
어느 정도 속가분위기가 있는 화산과는 다르게 내부 분위기도 진짜 도가 그 자체라 여성이랑 접촉하는 것도 꺼려하더라고. 결국 무림 맹에서 뻐팅기다가 어찌어찌 화산파에 가서 신선을 찾아보고 그래야 한다는 거지.
...그전에 저 사람들부터 어떻게든 해야겠지만.
누가 해결해 줄거 같지도 않으니 내가 직접 나서야지.
나는 창문을 열고 창밖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백화선녀님이 나오셨다! 와아아!”
아 쪽팔려. 무림인들은 잘도 별호달고 다니는 구나. 어릴 때는 저런 별호 하나 갖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 나이쯤 되니까 쪽팔려 죽을 거 같아. 내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괴롭다고!
“다들 숙소 앞에서 무슨 일이신지...”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쓱 훑었다. 자잘한 부상부터 귀티나는 옷을 입은 사람들까지. 숙소를 경계하는 무사가 있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 탓에 제 역할을 못 하고 곤란해하고 있었다.
“백화선녀님! 백화선녀님이 아주 고명한 의술을 가졌다하여 이 금모가 왔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내가 아는 의술은 119누르는 것밖에 없는데?
“맞소! 백화선녀님이 근맥이 끊어지고 손가락이 잘린 무사의 상처를 붙여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발 저도 고쳐주십시오!”
아니 그거 두 명이라고. 손가락이랑 근맥 따로야!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소문이 완전 찌라시가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어쨌든 적당히 말을 잘해서 돌려보내야 하는데...그게 될지 의문이었다.
완전히 과열된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저들은 이미 이성따윈 없이 헛된 희망을 붙잡고 내게 몰려왔으니, 과연 내 말이나 제대로 들을지 의문이었다.
“소문이 과장된 듯한데, 그분들은 운이 좋았답니다. 다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상처가 아주 깨끗하여...”
“거짓말하지 마시오! 내가 옆에서 보았단 말이오! 그가 다시는 검을 쥐지 못할 것이라고 의원이 진단을 하는 모습을!”
저런 놈이...있었나? 어쨌든 저놈 때문에 아주 주옥 같은 상황에 처했다는 건 알겠다. 저렇게 말해 버리면 내가 뭘 할 수가 없잖아. 안 그래도 남발할 수록 좋지 않은 능력인데 이런 식으로 능력을 허비하게 되면 힘을 회복하는 데에도 시간을 소모할 게 뻔했다.
근맥이나 손가락 연결 같은 작은 부위붙이는 거야 그리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지만, 병을 고치거나 큰 상처를 치료하거나 하는 건 할 수야 있지만 완벽하지도 않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리고 사용하면 사용할 수록 내 힘을 소모하게 되니, 정작 중요한 때에 능력을 사용하지도 못하겠지.
“저는 의원이 아닙니다. 저보다는 무림 맹에 소속된 의원들에게 치료받는 것이 더 좋을 겁니다.”
“구파일방의 무사가 아니라 치료를 안 해주는 것이 아니오?!”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야, 사람을 잘못 봤구먼.”
이 정도면 나한테 치료해 달라고 온 건지 시비를 걸려고 온 건지 알 수 없을 노릇이었다. 사람들 분위기가 더 난폭해지자, 무림 맹 무사들도 내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고개를 끄덕일 거 같냐.
진짜 뒤질라고. 내가 사파쪽이었으면 니네 다 뒤졌어.
애초에 사파 쪽이었으면 그 전에 무사들한테 갈려 나갔겠지.
나는 이마를 손으로 짚은 채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저저 망할 놈의 새끼들 도와줄 생각을 아예 싹 사라지게 만드네. 어디서 가스라이팅질이야? 그렇게 나오면 나도 얌전하게 있을 생각은 없다..
“저기요. 제가 무슨 여러분들이 고쳐달라고 요구하면 무조건 고쳐주는 의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제 취한 조치도 응급조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치료받고 싶다면 의원을 찾아가십시오.”
근본적으로 저들이 여기서 시위하는 건 떼를 쓰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나에게 온 건 안 된 일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가스라이팅을 하려고 들면 나도 곱게 말을 들어 줄 필요는 없다.
“그 응급조치조차 베풀 생각이 없다는 말이오? 당신의 그 의술이면 수많은 무사들이 다시 검을 잡을 수 있소! 무공을 다시 쓸 수 있다는 것이오!”
니들이 검 잡든 말든 어디가 아프든 그걸 왜 나한테 묻냐. 이게 무림 맹 의원은 건드리기 좀 그렇고, 내가 아무런 뒷배가 없다시피 해서 더 지랄하는 거 같은데, 진짜 귀찮게 구네.
“제가 화타라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여기까지 왔소! 제발 우리를 도와주시오!”
“그럼 그 치료에 대한 대가는요? 지급할 수 있습니까?”
나를 몰아 붙여서 자원봉사하게 할 생각인지 뭔지 몰라도 그럼 돈이나 좀 내놓던가. 무슨 일이든 거저 주어지는 건 없다. 치료받고 싶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가져와라.
“어찌 그런 말을! 그러고도 그대가 도를 수양하는 도사라고 할 수 있소? 백도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냐는 말이오!”
도사고 백도고 내 알바는 아니다. 나는 그냥 의화단 하는 꼬라지가 짜증 나서 적어도 사람답게 구는, 나를 도와 준 정파를 돕는 거지 막말로 나를 대우해준다면 사파나 마교로 가도 되는 사람이다.
거기서도 단서를 아주 잡을 수 없는 건 아닐 테고.
물론 진짜 갈 생각은 없지만. 미치광이 소굴에 직접 뛰어들 리가 있나.
어쨌든, 아까부터 이 인파의 대표인지, 아니면 선동꾼인지 모를 무사를 향해 나는 입을 열었다.
“제가 도사고, 백도의 사람이라 하여 사람들을 무상으로 고쳐주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일개 무인일 뿐이고, 의원조차 아닙니다. 그리고...아침부터 이렇게 모여서 아녀자를 핍박하는 게 정파의 무인이 할 짓입니까?”
나는 받은 대로 그 무사에게 돌려주고는, 갑작스레 조용해진 인파를 노려보았다. 풀어놓지 않고 있던 기운을 슬쩍 흩뿌려놓은 채였다.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내가 뿜어낸 기운이 꺼림칙 했는지 인파가 점차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곤 크게 한숨을 쉬곤 창문을 닫았다.
이래서서야 식당에 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미안 하네. 내가 좀 더 빠르게 조치를 취했어야 했네. 부상자들을 선동한 무사는 엄히 처벌할 것이니 심려치 말게.”
“후...아니예요. 저들도 급해서 그런 걸 테니까 너무 심하게 벌을 주실 것까진 없어요.”
나는 기름진 식사를 끝마치고 난 뒤 뜨거운 녹차를 호호 불어마시며 맹주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맹주가 나를 꽤 마음에 들어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 참이었다.
이거 완전 일개 병사가 육군참모총장이랑 독대하는 그런 분위기인데.
그래도 다른 잡것들이 들러붙지 않는 건 큰 장점이었다. 나 혼자 있으니까 온갖 놈들이 다 들러붙으려 하던데, 여자들은 질투 섞인 눈으로 날 보는 년들이 태반이고. 그나마 맹주님이랑 같이 식사를 하니 막 다가오진 않더라.
“자네 인기가 많구먼.”
“쓸데없이 피곤하네요. 그리고 주목받고 싶지는 않은데...”
“허허, 때론 명성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는 법이라네. 하지만 명성은 얻고 볼일. 백도에서 명성만큼 중요하게 보는 것도 없으니 말일세. 적당히 활용해 보게.”
맹주님이 하는 말 치고는 좀 많이 속물적으로 보이는데. 하긴 맹주 자리를 엿바꿔 얻은 것도 아닐 테고, 당연히 이런저런 정치적 술수 같은 것도 써서 올라가셨을 테니 이런 일에 빠삭한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기회가 되면요. 그런데 무림 맹 상황은 여전히...좋지 않은가요?”
“할 일이 태산같이 불어났다네. 그래도 자네 덕분에 우리에게 기회가 생겼다네.”
“기회요?”
“그러네. 자네 덕분에 말이야. 덕분에 반격의 실마리를 잡았으니, 이제는 준비할 일만 남았네.
”
맹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방법이 있겠지요. 나는 6일 뒤에 화산파로 돌아가는 일부 무사들이랑 같이 화산파에 가기만 하면 되니까.
“다행이네요. 이제 무림에 다시 평안에 찾아오면 좋겠어요.”
“...그렇게 될 걸세.”
무림 맹주님은 무거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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