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347화 (347/352)

〈 347화 〉 강시 아니라고(21)

* * *

“자, 들게. 좋은 차라네.”

“감사합니다.”

설마 독같은 게 들어 있겠어? 어차피 어지간한 독은 체내에서 해독해 버리겠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기분 같아서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뭐든 뜨겁게 먹는 중국에서 찬 물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수질이 워낙 별로다 보니 중국 땅에선 찬 걸 잘 먹지 않는 전통이 있었으니까. 여기서 시원한 거래 봤자 한국 기준으로는 미지근한 정도였다. 그 뜨거운 걸 더운 날씨에도 마신다고 생각하니, 한국이 새삼 좋은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유기농(?)으로 만든 차라 차 맛이 나쁘지 않긴 했지만.

“오늘 일은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오늘 무림 맹은 큰 피해를 입었을 걸세.”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는 무림 맹의 수장에게 최대한 예의를 차리며 겸양을 떨었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왔는데 막 나가는 태도를 보여 줄 생각은 없었다. 일단 나보다 훨씬 윗줄의 고수 앞에서 나대는 것도 미친짓이고.

그러니 얌전히 이야기나 들을 생각이었다. 대충 무슨 이야기할지 예상은 되지만.

“아닐세. 자네는 조용히 도망칠 수 있었어. 그럴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도 입증했으니 말일세. 하지만 자네는 어떻게 했나? 첩자를 찾아내고, 의화단의 무사들을 쓰러트려 진격을 막아 냈네. 자네 덕분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졌다네.”

“다행이네요.”

“다행이지, 암.”

우리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오갔다. 서로 간의 차 마시는 소리가 조용한 맹주실에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다시 입을 연 것은 맹주 쪽이었다.

“소소하게나마 답례를 하고 싶네만...원하는 것이 있나?”

뭘 요구해야 할까. 영약같은 건 일단 빼고.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돌아가는 방법이었다. 뭘 요구해야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잠깐 생각해 봐도 될까요? 갑작스러워서...”

“영약이나 무공 같은걸 원하는 건 아닌가 보군.”

“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주게. 최대한 들어 줄 테니.”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있는 그대로 이세계에서 표류했는데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다고 할 순 없었다. 이해도 못할 뿐더러,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확률이 높았으니까. 여기서는, 적당한 핑계를 대서 신선과 접촉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럼...제가 장백파의 신물을 찾는데 조금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신물이라...신물에 대해 말해 줄 수 있겠소?”

아, 방금 생각한 거라 아직 디테일한 설명은 힘든데. 나는 적당히 떠오르는 대로 장백파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거진 삼백 년 전의 일입니다. 저희 장백파의 신물이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도둑맞았습니다. 당시 장백파의 계승자는 그리 경지가 높지는 않은 사람이라, 속수무책으로 빼앗길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신물을 잃은 장백파는 급격히 쇠락하여 신물을 찾기는커녕 문파의 명맥을 이어가는 것만으로 도 벅찬 탓에 이제야 신물을 찾아 중원으로 왔습니다만...

같은 도가 문파인 화산과 무당에 그 단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래전 장백파가 중원의 도가 문파들과 교류할 때의 기록을 확인하면 신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화산과 무당에 저를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흠...”

적당히 내가 본 무협지를 스까서 만든 그럴듯한 이야기가 통했는지, 무림 맹주는 내 말을 딱히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히는, 의심스러워도 드러내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내 소개해주겠네. 이래 봬도 도사들과는 꽤 친분이 있으니 말일세.”

“감사합니다.”

“무얼, 그대가 살린 생명의 대가 치고는 너무 작은 보상이거늘. 혹여나 필요한 게 있다면 이야기하게.”

“아니예요. 소개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보상입니다.”

나는 최대한 예의를 차리며 겸손하게 맹주의 호의를 거절했다. 뭐든 들어 준다고 넙죽넙죽 받아먹으면 향후 활동에 지장이 걸릴 터였다. 아무리 호의라고 한들, 맹주의 목적은 이런저런 보상으로 나를 무림 맹에 묶어두는 것일 테니까.

무림 맹을 구한 젊은 영웅. 얼마나 구미가 당기는 이름값인가.

내가 맹주였어도 일단 붙잡고 봤을 거다. 지금 중국은 의화단이다 외세침략이다 하면서 혼란이 절정에 달한 시기. 곧 청나라는 멸망하고 군벌이 잠시 들어섰다 내전하고 알아서 크고 그럴 터였다.

굳이 의화단이 아니고서라도 지금 무림 맹은 청 황실, 외세들까지 싸워야 할 적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어느 세력이든 무림 맹을 곱게 보는 세력이 없었으므로, 어느 때보다 정파의 결집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리고 그 선전탑으로서 나는...스스로 말하긴 좀 부끄럽지만, 충분한 인재였다.

외모도 받쳐주지, 무공도 나름 훌륭하지, 무림 맹의 영웅이라는 나름 괜찮은 이름값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안 붙잡고 배기겠어. 내 처지에선 정파 무림 맹의 일이 생기든 말든 신선들고 접촉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들을 내비두고 가는 것도 좀 그랬다.

물론 원 역사에서 무림이 공상 속의 산물 정도로 치부되는 걸 보면 어쩌면 내가 사는 세계에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게 이 인간들이 죽어야 될 이유는 아니었다.

얘네들이 흔히 말하는 사파거나 마교였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그럼 바로 가세나. 자네들 속담으로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네?”

맹주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맹주전을 나갔다. 나는 잠시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맹주의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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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부상당한 무사들을 바라보던 턱수염이 배꼽까지 내려오는 노인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정말 신선 같은 분위기의 도사는 맹주님과 그 뒤에 있던 나를 보고는, 화색을 띄며 말했다.

“이런, 맹주님과 우리 제자를 구해 준 은인이 아닌가? 허허, 어서 오게.”

“화산파의 제자들 상태는 어떻소?”

“다행히도 죽은 자는 없지만...두 명은 검을 더 이상 들지 못할 것이오.”

검수가 다시 검을 들 수 없다는 것은 사형선고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저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폐인이 될까, 아니면 나름대로 살 길을 찾아 살아갈까. 어느 쪽이든 그리 긍정적이지 않을 거란 건 확실했다.

전 세계가 제국주의의 광기에 물든 시대. 이 시대에서 약자는 그저 잡아먹히는 먹이에 불과할 뿐이니까. 그 사실을 아는 나로서는 마음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미래를 얼추 아는 나라면 조금이나마 이 사람들을 살리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도대체 이 시대에서 몇 년을 보내야 할까.

“소저?”

“아, 참혹한 상황에 잠시 생각에 잠겼었네요...죄송합니다.”

“본 맹주도 무림 맹에 입맹한지 40년이 넘었는데도 이런 꼴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오. 도대체 언제쯤 평화로운 시대가 될지...”

지금의 맹주가 죽고, 세 번 쯤 맹주가 갈아치워져도 평화로운 날은 오지 않겠지. 세계대전이 터지고, 제국주의의 광기가 아시아를 휩쓸고, 냉전이 시작되고, 두 번째 냉전이 조짐을 보이는 중이니까.

인류 역사의 70%는 전쟁 중이었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잠깐의 평화는 있어도 모두가 발 뻗고 잘만한 평화는 영원히 오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조금정도는 괜찮겠지?

“잠깐 다치신 분 상태를 봐도 될까요?”

그래, 조금 정도는 괜찮을 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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