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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라한이 되어버렸다-346화 (346/352)

〈 346화 〉 강시 아니라고(20)

* * *

나는 머리카락을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냈다. 내 주변에는 시체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내 머리카락에

구역질 나.

당장에라도 토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나는 올라오는 토기를 꾹 참고 머리카락을 원래 길이로 줄였다. 머리카락을 줄이고 숨을 가다듬으니 그제야 소강상태가 된 전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다친 사람과 죽은 사람들이한데 뒤엉켜 있는 피비린내 나는 지옥. 한 때 맑은 공기로 가득했던 비무장은 이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소저, 고맙소.”

내 근처에서 싸우던 무사였다. 그리고 내가 위기의 순간에 구해 준 무사이기도 했다. 무사는 나에게 포권을 하며 감사의 표시를 했다. 나는 도저히 입을 열 기운이 없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 대답했다.

“...무사들이여, 모두 재정비를 하라!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먼발치에서 무림 맹주의 우렁찬 포효가 울려 퍼졌다. 전투가 길게 이어졌음에도 역시 맹주는 맹주인 건지, 조금도 피로가 묻어나지 않은 목소리였다.

“충!”

“이런 건 영화에서나 봤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의미 없는 헛소리를 내뱉으며 검을 다잡았다. 지옥참마도랑 다르게 튼튼하지 않아서 군데군데 이가 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일단 사부한테 배운 게 검법이기도 했으니까.

“네년...사술을 쓰다니! 정파에서 이런 비열한 술수를 부릴 줄이야!”

뭐래. 뜬금없이 기습해서 싸움 벌인 놈들이 주둥이만 살아가지고. 의화단원 사이에 숨어서 쓸데없이 목청만 높이는 꼴을 보니 쫄리는 모양이다. 그럴 거면 왜 쳐들어왔냐. 뭔가 무협지에 나오는 마교처럼 조온나 당당하게 오란 말이야.

쓰레기 새끼야.

도대체 의화단이 무림 맹을 쳐서 얻는 이득이 뭐길래 이런 개지랄을 떨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정말 자기네 세력에 반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쳐들어와서 민간인이고 무사고 가릴 것 없이 죽여대는 거야?

“이렇게 해서 도대체 뭘 얻으려고. 그러는 거냐고...”

“미치광이들에게 제대로 된 목적 따윈 없는 거요. 그저 자기 눈에 거슬리면 온갖 핑계를 대며

치워 버리려는 것밖에 없소.”

내 옆에 있던 무사가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아무리 피비린내 나는 혼란의 시대라고 한들, 이런 지옥을 아무렇지 않게 만드는 건 이상하다. 몇 명을 제외하면 저들에겐 제대로 된 이성도 없어 보이고. 나는 이 상황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저 뒤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의화단주를 노려보았다.

의화단주는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나를 마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상황이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원흉인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망할 년. 네년 때문에 우리의 대업에 차질이 생기다니!”

“어쩌라고.”

대업은 지랄. 그래 봐야 그냥 헛소리 하면서 거슬리는 놈 다 죽이고 권력 좀 잡으려는 반란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잖아. 아니지, 역사대로면 청나라의 개들이나 다름없는 놈들이니 개새끼들이라고 불러도 되겠어.

멀쩡한 칭호로 부를 생각 따위는 없었다. 저런 놈들이나, 동조하는 놈들이라 사람 새끼로 취급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나는 의화단주가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내가 수많은 시체의 산을 쌓아 올린 탓에, 의화단원들은 내게 차마 덤벼들 엄두조차 내질 못했다. 자기네들 동료가 나에게 쓸려가는 모습을 보았을 테니까.

내 머리카락에는 어떤 공격도 통하질 않으니 저들이 얼마나 저항을 한들, 나는 쓸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무림의 무공은 정말 특이한 케이스를 제외하면 다수전에서 그리 위력을 바휘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1대1, 많아봐야 두세 명 정도를 상정하는 무공이 많았으니까. 나처럼 머리카락을 무기로 쓰는 무공도 없을 뿐더러, 있다고 한들 나처럼 자유롭게 길이를 늘릴 수도, 검강으로도 상처 하나 입힐 수 없는 강도를 자랑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머리카락을 좌우 두 갈래로 나누어 뿔을 들이대는 황소처럼 내밀었다. 내 머리카락에 죽은 동료들이 생각나는 건지, 의화단원들이 뒤로 물러나며 내게 무기를 겨누었다. 무인들의 검 끝이 흔들리고 있었다.

앞선 이들의 최후를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난 나에게 덤벼든다면 저들도 똑같이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살인한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죄책감은 내가 아니라 저들이 가져야지. 애초에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죽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요...요괴다!”

누군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수많은 의화단원 중에 하나겠지. 나는 그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저들도 내가 다가오자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미쳐날뛰던 그들의 얼굴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새겨졌다.

“소저, 우리도 돕겠소.”

잠깐 사이에 정비를 마친 무림 맹 무사들이 내 주변에 몰려들었다. 아무리 수가 더 많아도, 마공을 익혀 육탄돌격을 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놈들과 달리, 무림 맹 무사들은 재능있는 자들이 무공을 익힌 자들이었다.

난전이라면 모를까, 진형을 갖추고 싸우기 시작하면 아무리 수가 많아도 이쪽에 피해를 입히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감히 사술을 쓰는 요녀 주제에 우리의 대업을...”

“대업 같은 소리 하네. 민간인이고 뭐고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게 대업이야?”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의화단주를 향해 나는 비웃음을 날렸다. 상황이 꼬이자마자 곧바로 후방으로 물러나서 명령이나 내리고 있는 놈이 말이 많네.

“의화단은 들어라! 물러나지 않는다면! 나 맹주 독고무진이 너희의 목을 치겠다!”

이명이 들릴 정도의 사자후가 뒤에서 터져 나왔다. 앞에 서 있던 의화단원들은 사자후를 견디지 못했는지, 귀에서 피를 흘리거나 안색이 시퍼래졌다. 이 정도면 완전히 전세를 뒤집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애초에 수많은 고수들이 모인 무림 맹에 물량만으로 들어온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라니. 그나마도 안에 첩자를 숨겨 놓고 기습을 한 건 꽤 먹혀들어가긴 했지만, 그 작전이 실패한 지금 만큼은 우리가 더 유리했다.

이미 적들 중 태반은 마공의 부작용인지 두 눈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고, 멀쩡해 보이는 놈들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거기에 사자후를 들은 탓인지 비틀거리기 까지 하는 걸 보니, 무공이 강한 건지, 아니면 뒤로 빠져서 영향을 덜 받은 건지 모를 의화단 쪽의 지휘관이 창백한 안색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움직여라! 저들을 공격하란 말이다!”

자기는 끝까지 뒤에만 있겠다는 건가.

하지만 아무도 그 명령을 듣지 않았다. 정확히는, 명령을 들어도 이행하지 못 하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아무리 마공으로 밀쳐날뛰는 놈들이라 해도, 한계는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생존본능도 경종을 울리고 있지 않을까.

‘지금 싸우면 무조건 죽는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게 인간이니까.

결국 의화단의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훈련받은 자들이 아니니, 겁을 집어먹고 와해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어딜 가느냐! 그러고도 너희들이 이 땅을 지킬 권민이더냐!”

지휘관 놈이 열심히 외쳤지만, 이미 와해된 병력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결국 지휘관도 등을 보이며 도망치려는 찰나, 내 옆에서 무림 맹 무사들이 뛰쳐나갔다.

“지휘관을 사로잡아라!”

상황이 얼추 마무리되어가는 듯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머리카락을 원 상태로 되돌렸다.

...근데 어떡하지?

나는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흘끔흘끔 거리며 눈치를 봤다. 역시 검으로만 어떻게든 했어야 했나? 혼란이 가시고 나를 보며 어색해진 공기에 내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을 즈음이었다. 갑작스레 누군가가 호탕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대 덕분에 의화단의 습격을 막을 수 있었네! 고맙네!”

무림 맹주였다. 무림 맹주는 과장된 웃음소리를 내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장백파의 후예가 중원의 위기를 해결했던 적이 있었네. 그런데 수백 년이 지나 이렇게 또 한 번 도움을 받게 되다니! 허허, 하늘께서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은 모양이야!”

“아...네.”

“무사들은 장소를 정리하라! 나는 무림의 새로운 영웅과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이쪽으로 오게나.]

까, 깜짝이야.

이게 말로만 듣던 전음입밀?

나는 나에게 호의적으로 바뀐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맹주의 뒤를 따라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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