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5화 〉 강시 아니라고(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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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단합을 위해, 무예를 겨루기 위해 만들어진 비무장은 순식간에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전쟁터로 변했다. 무림 맹의 무사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혹은 민간인을 지키기 위해 군중 들 속에서 나타난 의화단의 무사들과 싸웠다.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미약하게나마 손을 거들었다.
휘두르고, 베고, 찌르고. 세 달 동안 연습했던 검법으로 적들을 하나씩 제압하며, 나는 의화단들이 몰려오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저들을 막아야 했다. 시뻘건 눈으로 주변을 꼬라보며 무차별적으로 습격하는 인간의 탈을 쓰는 마인들을 막아 내야 했다. 무림 맹 무사들이 틀어막으려 하고는 있지만 갑작스러운 기습에 전열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에 무림 맹 측이 점점 밀리고 있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막아라! 우리 뒤에는 무공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막지 못하면 무림은 끝이다!”
누군지 모를 처절한 외침이 전장을 메웠다. 나는 몸을 회전시켜 내게 달려든 의화단원의 목을 단칼에 잘라버리곤, 그 회전력을 동력삼아 다른 의화단원의 목을 벴다. 사람을 죽인다는 꺼림칙함은 없었다.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전생의 기억 때문이겠지.
이유진 이전의 삶은 전쟁에 휘말리거나, 전쟁에서 날뛰거나 하는 삶이 많았으니까. 그 기억들 덕에 살인에 주저가 없다는 걸 좋아해야 할는지, 아니면 싫어해야 하는 건지...
복잡한 마음을 품고, 나는 내게 달려오는 무사들을 차례대로 베어 넘겼다.
중국 전역을 달군 의화단 답게, 그들의 물량공세는 도저히 끝이 보이질 않았다. 당장 내가 베어낸 의화단원만 오십을 넘어 백에 다다르고 있었으니까. 이대로라면 밑도 끝도 없는 물량에 압사당할지경이었다.
도대체 이놈들은 왜 이렇게 미친놈처럼 달려드는걸까. 전체주의의 광기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매국노들을 모두 죽여라!”
“매국노는 지랄.”
“지들 말 안 들으면 되다 매국노지.”
내 근처의 무사가 욕설을 내뱉으며 또 한 명의 무사를 베어냈다. 주변은 이미 무림 맹 무사와 의화단의 시체가 뒤엉켜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대로는 답이 없었다.
이게 디펜스 게임도 아니고, 사람이 직접 막는 이상 아무리 수준 차이가 나더라도 체력의 한계는 찾아오는 법이니까. 끝도 없이 몰려오는 의화단에 비해 내 주변에 서 있던 무사들은 점점 줄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버티면 나도 위험해 질 터였다.
도망쳐야 하나?
나 하나 몸 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나는 외부인. 내 목숨 하나 챙기자고 도망치는 것도 몹시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나는 만나야 할 사람이 있고,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 이런 데서 죽거나 곤욕을 치르고 싶지는 않았다.
피가 튄다.
나는 몸을 축축하게 적시는 피비린내에 머리가 아파 왔다. 쇳덩어리에 묻어 허공을 수놓는 핏물은 끔찍하기만 했다. 그냥 정체고 뭐고 다 밀어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뒷일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겐 내가 마교의 수하들보다도, 미치광이 마인들 보다도 더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힐 수도 있었다. 머리와 몸이 분리되는 여자라니, 강시로 오해받을 확률이 아주 높았으니까. 진퇴양난이었다.
하지만 싸우면서 흘끗 바라본 무림 맹의 고수들도 물량공세에는 답이 없는지 점점 밀리고 있는데, 내가 내 능력을 봉인하면서 싸우면서 역전의 빌미를 마련할 수 있을까?
내 능력을 사용한다면 적어도 상황을 반전시킬 여지를 만들 수 있었다.
머리를 분리할 필요 까지는 없다. 단순히...머리카락을 사용하면 될 일이었다. 검을 내밀어 무림 맹의 무사에게 휘둘러진 검을 막아 냈다.
뿔똥이 내 시선을 어지럽혔다. 이내 검을 든 의화단원은 이름 모를 무사의 손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고맙소!”
“그럴 시간에 한 명이라도 더 베는 게 좋을 거예요. 아, 그리고 음, 잠깐만 버텨주세요.”
나는 일부러 쌀쌀맞게 말을 내뱉곤 무사에게서 떨어졌다. 나는 내가 지키던 자리에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잠깐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자라나라 머리머리...”
우스꽝스럽지만, 능력을 좀 더 강하게 사용하기 위한 암시였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썼을 테지만,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는 자기 암시라도 날려야 집중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이 정신없는 난전 속에서 내 목소리를 듣지도 못할 테니.
머리카락이 늘어난다. 허리 근처까지 길렀던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길어져 사람 하나 정도는 묶을 수 있을 정도까지 늘어났다.
아직 부족해.
계속해서 머리카락을 늘린다. 머리카락을 푼 탓에 염색마법이 풀려가고 있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수많은 목숨과 내 정체를 조금이나마 드러내는 것, 저울은 한참 전부터 기울어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어느새 사람 하나둘 정도는 날릴 수 있을 정도로 길어져 있었다.
누군가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눈앞의 적들을 쓸어 버리고 어떻게든 상황을 호전시키는 것이었으니까.
“이게 무슨...”
머리카락이 휘둘러진다.
무림 맹 무사 종운은 기이한 광경에 휘두르던 검 조차 멈췄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의화단의 간부들도, 무림 맹의 장로와 맹주도 그 기이한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머리카락이 한데 뭉쳐 쇠사슬처럼 휘둘러진다. 머리카락은 마치 자아라도 있는 듯 움직이며 의화단을 뱀처럼 덮쳐왔다. 온갖 무기와 무기를 감싼 내기가 머리카락을 막기 위해 휘둘러졌지만 머리카락 한 올도 자르지 못한 것은 기이한 광경이었다.
도대체 저 여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녀를 보는 남궁수호의 눈이 복잡해졌다.
‘기이한 여인이라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정체를 짐작할 수가 없군.’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마치 힘줄처럼 꼬인 머리카락이 의화단을 날려 버리니 몰려오던 의화단의 기세가 주춤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무인이 아무리 힘을 써봤자 한 번에 상대할 수 있는 무인의 수는 하나.
하지만 자신을 유진이라 소개한 여인의 머리카락은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십 명의 의화단원을 날려 버리고 있었다. 정체가 무엇이든 그녀 한 명의 존재로 전황이 호전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무림 맹을 기습한 의화단의 공세를 멈출 수 있으리라.
“...사술인가?”
“에잉 쯧쯧. 그게 언제적 헛소리인가. 세상은 넓고 기인이사는 많거늘. 저런 무공이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네.”
개방의 장로인 당랑개가 허공진인에게 핀잔을 날리며 봉을 휘둘렀다. 당랑개가 휘두르는 봉에 맞은 의화단원의 머리가 박살 나며 뇌수를 뿌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무림 맹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노련한 무림인들은 지금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여겼다.
상황을 지켜보던 무림 맹주 독고무진은 그를 상대하던 의화단주를 순식간에 쓰러트리곤 외쳤다.
“기회가 왔다! 저 여인을 도와 백련교의 주구들을 처리하라!”
그의 검에서 태산도 쪼개버릴 듯한 시퍼런 검강이 솟아올랐다.
반격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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