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3화 〉 강시 아니라고(17)
* * *
“소저,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소.”
“아, 그런가요?”
무공 익힌게 티가 나기는 하나보다.
그래도 단전에 내공을 딱히 넣어 둔 게 아니라서 맥을 짚어도 내공 한 줌 조차 발견하지 못하겠지만. 애초에 맥을 짚게 해주지도 않겠지만. 미쳤다고 내가 내 손목을 남정네가 잡게 하겠냐고.
내 손목 잡으려고 하면 그냥 손모가지를 잘라버릴 거야.
여자면...그냥 손 떼어내는 선에서 그치지 뭐.
남녀차별이라고 태클 걸면 니가 시커먼 남정네한테 손목 잡히고 만져지던가. 일단 나는 그런 취미 없다.
“오랜만에 제대로 운기조식해서 그런가 봐요.”
물론 한 적 없다.
애초에 내공을 담아두지도 않으니 운기조식을 해 봐야 큰 의미가 없잖아. 물론 내공을 일주천 시키면서 혈맥을 점검하는 용도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늘은 외부에서 초청한 고수분들의 비무였죠?”
“그렇소.”
어제는 구파일방이랑 오대 세가 위주로 비무를 했다면, 오늘은 외부 고수들끼리 붙여놓는 듯했다. 근데 세력과시용 비무를 하는 건 좋은데, 차라리 이 시간에 전쟁 대비를 하는 게 좋지 않나?
...나야 외부인이니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뭔가 수상쩍은 냄새가 났다.
“공자님. 이번 비무가 끝나면...다음 계획은 어떻게 될까요?”
“편제 개편이 예정되어 있소. 정파의 내로라 하는 무인들이 전부 무림 맹에 모였으니, 부대를 다시 개편하고 의화단과 싸울 준비해야 하니 말이오.”
“피 튀기는 전쟁이겠네요.”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오.”
그렇겠지. 전쟁은 언제나 그런 법이니까. 수많은 피가 흐를 것이고, 내가 아는 사람들 또한 끔찍하게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쟁을 멈출 방법은 없다. 내가 하느님 마냥 전지전능한 것도 아니고, 전직 여신이었던 듀라한에 불과하니까. 헤카테 말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다시 온전한 신이 될 거라고 하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곧 전쟁터가 될 이 땅 위에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지금까지의 경험이 증명했기에, 나는 우연히 얻은 자위수단을 가지고 중원땅을 돌아다녀야 한다.
...좀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한반도에도 가보는 건데.
아쉽게도 지금 시대는 서양 열강에 의해 동양이 개박살 나는 답도 없는 시기였다.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베트남, 인도 등등 서양 열강이 아주 미쳐 날뛰는 때라 한반도를 들르니 마니 할 시기가 아니었다.
가 봐야 을사조약 맺어서 나라 뺏기는 꼴밖에 못 볼 텐데 뭐하러 가. 그렇다고 내가 다 뒤집어엎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승리할 가능성은 얼마나 되나요?”
“...솔직히 말하면, 3할이 되지 않는다고 보오.”
단순히 인원수 차이 때문일까. 아니면 미쳐 돌아가는 세상과 의화단의 배후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답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네요.”
“그러니 비무대회를 여는 것 아니겠소? 우리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아직 이만큼 여유가 있다는 것을...”
대답하는 남궁수호의 얼굴이 착잡함에 물들어 있었다. 이미 코너까지 몰렸다고 할 수 있는 상황, 무림 맹에 모인 정파의 무인들은 어떻게든 반전을 꾀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연민섞인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그들의 일이니까. 내가 어쩌다 보니 외부에서 초빙받은 고수(?) 같은 포지션을 취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다.
즉, 내가 이 세계의 일에 너무 깊게 관여하기는 좀 그랬다.
그 판도라의 상자를 찾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괴물들을 다 조져놓고 다니긴 했지만, 그건 정말 아는 게 별로 없을 때였다. 마하 시절의 기억을 뒤져 보아도 다른 가지세계에 가 본 적은 없었고 돌아가려면 방법이 마법 소녀를 돕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그거랑 별개로 이 세계의 기술을 좀 배우긴 했지만, 일단 나를 가르쳤던 월향사부도 뭐 내가 무림을 구하라거나 그런 걸 원하진 않았다. 나 자체가 하드카운터인 신들과의 전투라면 모를까, 무림인들과의 대결은 아무래도 내가 뭘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내 수준이래 봤자 일류 근처일 텐데, 그 정도로는 이 험악한 무림에서 살아남질 못한다고. 근대 들어서 무림인들 수준이 전반적으로 떨어진다지만 그래도 나보다 실전경험 많고 수련도 오래 했을 거 아냐.
3개월 무림인 속성코스만 받은 내가 고수들 상대로 활약하기는 힘들었다. 머리채 붙잡고 ‘WRYYYYYYYYYYY! 듀라한이다!’하면서 뚝배기 휘두를 것도 아니고. 대충 휘둘러도 위협적이긴 하겠지만.
통짜 만년한철로 만든 보검이라도 내 머리보다 튼튼하지는 않을 테니까.
...생각해 보니까 내 머리카락으로 검을 감싸놓으면 그게 명검 아닐까? 나중에 한번 해 볼 만한 가치는 있어 보였다. 내가 받은 검도 보급용으로 만들어진 적당한 검이니까.
나보다 무공 수위가 높거나 더 좋은 검을 쓰는 놈한테 대항하려면 그 정도 조치 꼼수 정도는 부려야지.
“잘 풀릴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소.”
내 상투적인 위로에 남궁수호는 비관적인 대답을 내뱉었다.
“오늘의 첫 비무는! 섬서성 출신의 한 번에 일곱 번의 권격을 날린다는 칠격권 박웅! 그 상대는 하남출신의 환검의 고수로 이름높은 비뢰검 비광!”
아, 이번엔 둘 다 모르는 고수네. 오대 세가나 구파일방은 나름 무협지를 보면서 대충이라도 무공 같은 걸 기억해서 어떤 스타일인지 알고 있었지만, 아예 내가 모르는 무공을 쓰는 고수들은 처음이었다.
원래 클리셰처럼 나오는 무공이 아니면 그럴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대충 별호를 보면 저 X동석 뺨치는 비주얼의 박웅이라는 남자는 덩치에 맞지 않게 날렵한 권을 쓰는 모양이고, 저 음침한 스타일의 비뢰검이란 별호를 가진 장발의 남성은 뭔가 수상한 냄새를 풍겼다.
음침하게 생긴 건 둘째치고 냄새가 구렸다. 비유가 아니고 진짜로 수상쩍은 냄새가 났다. 어딘가 맡아본 기억이 있는 냄새였다. 하지만 나 말고는 못 맡는 걸 보니, 어쩌면 단순히 내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수상쩍은 냄새를 맡은 거라면? 이게 의화단의 수작이라면?
말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잠자코 가만히 있는 게 좋을까?
애초에 내 말을 믿어 줄지 안 믿어 줄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이름 석 자랑 얼굴 말고는 알려진 게 별로 없는 외인이나 다름없고, 실력을 증명한 적 조차 거의 없었으니까. 내가 말해 봐야 의심만 받거나,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 비무가 시작되었다.
나는 비무장을 어지럽게 움직이는 두 인영을 멍하니 바라보다, 군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쩌면 이 냄새의 근원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비무장한 번, 관중석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던 나는 비무가 끝을 향해 달려갈 즈음에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냄새가 점점 더 진해지는데...”
“혹시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소?”
솔직하게 말할까, 아니면 대충 둘러댈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곳에 온 지 보름도 되지 않았지만, 정을 붙였다고도 말하기 그렇지만 다 꺼져가는 촛불이 나 다름없는 사람들을 방관하기에는 양심이 찔렸다.
나는 잠깐의 고민 끝에 어느 정도는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이상한 냄새가 나서요. 그, 의화단과 마주쳤을 때와 같은...”
“정말이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남궁수호는 내 말을 크게 의심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콩깍지가 끼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 능력을 신뢰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호재였다.
남궁수호는 내 말에 벌떡 일어나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화려한 복장의 노인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연륜이 있어 보이는걸 보니 최소한 장로, 어쩌면 무림 맹주인 모양이었다.
“이번 비무의 승자는! 비뢰검 비광이오!”
와아!
귀가 아플 정도로 울려 퍼지는 관중의 함성소리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남궁수호와 노인의 대화를 바라보았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표정이 심각한 것을 보니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함성소리가 잦아들 즈음, 남궁수호가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고는 내 귓속에 속삭였다.
‘소저의 말을 증명할 방법이 있소?’
이게 전음이구나. 마치 전화기 너머로 상대의 목소리를 듣는 느낌이었다. 나는 비무장에서 나는 냄새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한 번 시도해볼 가치는 있었다.
실패하면 착각이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