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8화 〉 강시 아니라고(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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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저. 여기가 바로 우리 정파의 상징, 무림 맹이오.”
무림 맹으로 가는 길은 편안 했다.
창궁무애단에, 당가의 무사들까지 합쳐지니 어지간한 소문파 정도는 하룻밤사이에 멸문 시킬 수 있을 법한 전력이 모였기 때문이었다.
산적?
아무리 배운 것 없는 무식한 놈들이어도 이 행렬을 건드리면 문자 그대로 염라대왕과 1대1 심층면접을 보러 떠나야 할 각이 뻔히 보이는데 산적질을 할 놈이 있을까.
산적이 무공을 배워 봤자 대부분 이류~높아봐야 일류수준이라고 남궁수호가 이야기하던데 최소 일류, 3분의 1 정도는 절정 고수인 일행앞에선 바람앞의 촛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
당연하게도, 비슷한 이유로 의화단도 우릴 건드리지 않았다.
남궁 세가만 있을 때면 모를까, 당가가 합류한 이상 전면전은 미친 짓일 뿐이다. 남궁 세가야 검에 살고 검에 죽는 명문 검가(?家)이니 아무래도 암기같은걸 사용하는 데에 있어서 거리낌이 있지만, 당가는 독과 암기를 전문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경험많고 노련한 무인이라면 독과 암기에도 잘 대처하겠지만, 의화단은 속성으로 마공을 배운 단원이 대다수인 세력이라 독과 암기에 대한 대처능력이 없다시피 했다.
...어차피 의화단원들은 소모품 취급인 모양이라 그냥 개돌시켜도 되지만, 우리가 지나온 곳은 아직 의화단의 손길이 완전히 미치지는 못한 지역이었다.
그도 그럴게, 무림 맹이 근처에 있었으니까.
아무리 의화단의 위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고 한들 무림의 살아 있는 역사 그 자체인 무림 맹을 무시할 수 없으니까.
...남궁수호가 그렇게 설명했지만, 그래도 조금 의구심은 들었다. 뭔가 몰이사냥이라도 하는 것처럼, 무인들을 모으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 말이다.
남궁수호의 말에 의하면 지금 무림 맹에는 수많은 정파의 무인들이 모여 있다. 소문파부터 대문파까지, 보호받는 가솔이나 잡부들을 포함하면 수천 명은 되지 않을까.
중원의 스케일을 생각하면 수가 좀 적지만, 청나라 시대 이후 무림이 탄압당하면서 무림 전체의 세가 많이 줄어 버렸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부분 이긴 했다.
“정지! 누구십니까!”
일행은 무림 맹의 거대한 문 앞에 멈춰 섰다. 사람이 아니라 코끼리가 드나들어도 될법한 크기의 대문이었다. 굳이 이렇게 크게 만들 필요가 있는 건가? 이런걸 잘도 여닫네.
하긴 무림인들이 보초를 설 테니 문 크기는 상관없나?
“남궁 세가의 남궁수호가 왔다고 전해다오!”
“앗, 남궁수호 공자님! 당가의 무사분들을 데리고 오셨습니까?”
“그러네.”
“곧바로 열어드리겠습니다.”
거대한 대문이 경첩 긁히는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크기 만큼이나, 문은 느긋하게 열렸다. 문이 열리자 우리는 문지방을 넘어 무림 맹 안으로 들어섰다.
“엄청나네요.”
“나도 처음 무림 맹에 입맹 했을 적에는 소저처럼 놀랐었소. 이렇게 크고 웅장한 건물이 존재한다니...”
소저소저 거리는 거 좀 오글거리는데. 그렇다고 이름 부르게 하긴 뭐 하고. 그리고 눈빛도 부담스러웠다. 그 뭔가 스윗한 분위기 풍기려고 하는데 그러지 말고 좀 가면 안 될까? 나는 그냥 엔딩까지 쭉쭉 달리는 김치게이머의 심정으로 일이 진행됐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헤어져야 할 사람들이기도하고,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시간이 끌린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무림 맹에서 도가 문파 사람을 찾아봐야지.
이런 시대에 신선이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공자, 오셨소?”
“오랜만입니다, 청허진인님.”
“허허...건강한 것 같아 다행이오.”
진인? 도가문파? 어느 문파지? 나는 도가문파 출신으로 추정되는 장년인을 바라보았다. 장년인은 뒷짐을 진 채로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옷에 수놓아진 매화꽃이 그의 출신을 짐작케 했다.
화산파.
화산에 자리를 잡은, 구파일방 중 하나이자 매화이십사수검법으로 유명한 문파. 매화 검법을 사용하면 매화향이 난다고 하던데, 정말로 나는지 궁금하네. 한 번만 보여달라고 할까?
...보여달라고 보여 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청허진인과 남궁수호가 대화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둘은 서로 안부를 묻고는, 잠시 대화를 나누다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남궁수호에게서 들었소. 소저가 장백파의 후인이오?”
“그렇습니다.”
“장백파라...같은 도문으로서 소저를 환영하오.”
장백파가 도문이었나? 대충 둘러대는 용도로 장백파의 이름을 써먹었던 나는 서둘러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무림의 선배를 만나 영광입니다.”
“허허, 같은 도가의 사람을 만났으니 내 반가워서 그러는 것이니 너무 예의 차릴 것까진 없소.”
그래도 연장자한테 예의는 지켜야지. 어디든 친하지 않은 연장자한테 예의를 갖춰야 말도 아나오고 일도 편하다고. 힘 있다고 미쳐 날뛰는 놈이면 모를까.
“아닙니다. 장유유서라는 말이 있는데 어찌 그러겠어요.”
“역시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사람답군. 정말 예의 바른 소저시구려. 내 제자도 이리 예의가 발랐으면 좋겠소.”
“제자라 함은, 상아 소저 말씀이십니까?”
“맞네. 무공을 너무 좋아해서 탈인 아이지. 나쁜 아이는 아니건만...고수만 보면 대련을 신청하니 내 언제나 걱정할 수밖에 없다네.”
와! 무공 광!
클리셰적인 설정 감사합니다. 뭔가 클리셰에 나올 법한 게 조금씩 나오는 거 보니까 이거 사실 소설 속일지도 몰라. 차라리 내가 아는 무협지 속이었다면 훨씬 편했을 텐데. 이래서 회빙환이 인기인 모양이었다.
무슨 무협지인지 알기라도 하면 기연이든 숨겨둔 보물이든 구해서 돈 좀 모으고 그걸로 적당한 무공비급을 샀겠지. 천하제일고수가 되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적당한 무공을 배워 보고 싶은 것뿐이니까.
물론 마공은 빼고.
무공이 아쉬운 것도 아닌데 굳이 몸 상하는 마공을 배울 필요가 없지. 애초에 내 몸에 마공이 맞을지도 의문이고.
내가 이런저런 생각하는 동안, 일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사들은 일부 인원을 남기고 전부 숙소로 들어가고, 나는 어쩌다 보니 남궁수호와 청허진인과 함께 불편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일인 문파라...스승은 어찌 되셨소?”
“몇 해 전에 병환으로 돌아가셨답니다.”
나는 애써 슬픈 표정을 지으며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적당히 사문(?)에 대한 것을 묻지 않게 하기 위한 고육지책에 가까웠다. 말이 길어지면 거짓말이 탄로나기 쉬워지는 법이니까.
“...미안하오.”
“아니예요. 벌써 몇 해 전의 일이니까요. 아, 그런데 청허진인님께서는 화산의 무인이신가요?”
나는 적당히 얼버무리며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이런 상황엔 억지로라도 상황을 돌려서 배려를 하는 것처럼 보여주는 편이 나았다.
“그렇소.”
“화산파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화산의 검에는 매화가 깃들어 있다는 이야기를요. 검을 휘두르면 매화향이 난다고 하던데, 언제가 검술을 견식할 수 있을까요?”
“곧 친선 비무가 시작될 예정이니 그때 볼 수 있을 겁니다.”
친선 비무? 이 상황에서 비무를? 내가 의문스러운 눈빛을 남궁수호에게 보내자, 남궁수호가 내 의문에 답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수많은 무인들이 모였으니 서로의 무공을 겨뤄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나름대로 서열을 정리하는 게 단결에 좋기도 하니...”
“아, 친목과 단결을 다지기 위한 비무로군요.”
“전력 확인을 위한 비무이기도 하오.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러우니 기인이사들도 발 벗고 무림의 위기에 발 벗고 나섰고, 그중에서도 추리고 추린 인원들이 무림 맹에 도착한 것이니 서로가 서로의 전력을 파악하는 것이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좋으니 말이오.”
...세상이 요지경이라도 절차에 따라서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의화단이 바로 쳐들어 올리는 없으니, 가벼운 비무로 실력이라도 체크해 보겠다...라고 이해하면 되는 건가.
확실히, 무림 맹에 쳐들어오는 미친 짓하지는 않겠지. 아무리 숫적 우위가 있다 한들 정파의 내로라 고수들이 집결한 무림 맹에 직접 싸움을 거는 건 제살깎아 먹기나 다름없는 일이다.
나름대로 여유가 있다는 거지.
아니면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마냥 여유가 있다고, 니들 따위는 무섭지 않다고 선전을 하는 거거나.
“...소저?”
“아 죄송해요. 비무라고 하니 기대돼서요. 비무를 보는 건 처음이거든요.”
비무라곤 활자로 밖에 볼 수 없는 세상이라 처음이었다.
“그러시오?”
“아무래도 중원처럼 비무가 활성화 되기는 힘든 환경이거든요.”
“하긴, 조선도 외세의 침략을 받는 상황이니...”
“네. 그렇죠.”
“그럼 소저, 혹시 비무에 참가해 보시겠소? 말로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확실하고, 보는 것보다 실제로 해 보는 것이 더 확실하니, 한번 체험해 보는 게 어떻겠소? 소저도 나름 한 수를 가지고 있는 듯 하오만.”
“네?”
남궁수호는 갑작스레 뜬금없는 제안을 내게 건넸다.
내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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