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7화 〉 강시 아니라고(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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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입니다.”
내게 배정된 방은 깔끔한 침실이었다. 잘 깔린 이부자리와 목 마를 때 마시라는 건지 비치된 주전자와 찻잔, 그리고 방구석에 있는 요...강?
요...강?
아, 여기 1890년대 쯤이었지. 중국에 수세식 화장실이 들어온 게 1930년 쯤이니, 아직은 요강을 쓸 시기였다. 요강은 진짜 오랜만에 보는데. 실제로 써본 적은 없지만...설마 용변보려면 요강에서 싸야돼?
진짜?
...최대한 빠르게 집에 가야 할 이유가 늘었네.
다른 건 몰라도 요강에 볼일을 보고 싶지는 않아! 내가 인간이 아니라 신 취급이기는 하지만 이 모호하게 인간에 걸쳐 있는 몸뚱어리 탓에 용변은 봐야 한단 말이야! 사람처럼 자주는 아니지만 어쨌든!
“...씁. 일단 쉬자...”
나는 요강을 눈에 안 보이게 치워두고 이불 속에 몸을 뉘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까지 이 세계에 떨어져 겪은 일을 떠올렸다.
외딴 산속에 떨어지고, 남궁 세가의 공자를 구하고, 의화단한테 습격을 당하고, 어쩌다 보니 동행하게 되고, 이곳 안 가에 왔다.
고작 이틀 정도의 일일 뿐인데 쓸데없이 밀도가 높네. 돌아갈 방법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어떻게 해야 될까.
가장 좋은 방법은 존재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신선과 접촉해서 돌아갈 방법이나, 하다못해 단서를 얻는 거다. 지구로 바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세계의 경계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거기서 부턴 일사천리니까, 방법을 찾는다.
...겸사겸사 무공도 배워 보고 싶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어디 마실 나온 것도 아니고 세계가 난장판인 시대에 떨어진 거니까 잘못 나대면 영영 못 돌아갈지도 모른다.
...내가 듀라한인 것도 철저하게 숨겨야 하고.
제약은 많고, 해야 하는 일은 많다.
머릿속이 이리저리 뒤엉켜 제대로 사고가 이어지질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소저, 잘 잤소?”
“아, 네. 공자는 잘 주무셨나요?”
“흠흠, 그렇소.”
저저 얼굴 붉히면서 대답하는 것 좀 봐라.
한 대 때려주고 싶네.
하지만 신원 보증인 겸 물주를 때릴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충동을 억눌렀다.
여기서 쓸데없이 소란을 피웠다간 계획의 근간이 시작부터 박살 날 테니까. 최소한 이들 앞에서는 적당히 정의로운, 장백파의 후계자라는 가면을 쓰고 있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는 게 좀 걸리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설명만으로도 대하소설을 써야 할지경인데다, 애초에 저들은 내가 하는 말에 반도 이해하지 못할게 뻔했다.
“혹시 그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우리는 무림 맹으로 향할 생각이오. 현재 무림 맹에는 낭인부터 구파일방의 일원까지, 수많은 무림인들이 대기하고 있소. 우리는 그곳에 합류해 앞으로의 일을 정할 것이오.”
무림 맹에 죄다 모여 있다고? 진짜 상황이 심각한 모양이었다.
무림 맹에 전부 모인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의미고, 정파가 전부 모여서 힘을 합해야 할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 힘을 합해야 할 일은 보나 마나 의화단과 배후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련교, 아니 마교일 테고.
그럼 나도 일단 무림 맹까지 가야 하는 건가.
무림 맹은 과연 어떤 곳일까.
소설마다 모습이 다르긴 하지만 정파의 연합체라는 점과 권모술수가 오가는 곳이라는 건 대부분 비슷했다. 물론 정말로 의협심 강한 협객들이 모인 곳일지도 모르지만, 수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데 과연 그렇게 될 리가.
게다가 밖으로는 서양과 일본이, 안으로는 부패한 청나라 황실과 의화단이 중원을 헤집고 다니는 상황에서 무림 맹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무림의 거대문파들이 모였다지만, 결국 문파들의 연합체에 불과한 무림 맹이?
“무림 맹은 어디에 있나요?”
“동정호 근처에 있소. 무림 맹 건물 위층에서 보는 동정호의 경치가 장관인 것으로 유명하지. 내 나중에 안내해주겠소.”
“감사해요.”
그냥 니 할 일이나 해. 꼬시려고 하지 마라.
“그래서, 혹시 언제 출발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틑날 새벽에 출발할 것이오. 당가의 정예들과 함께 출발할 터이니 필요할 것이 있다면 지금 말하시오.”
“음...적당한 검 하나만 구할 수 있을까요? 길이는 상관없어요.”
무림인들에 비하면 좀 모자라보이겠지만, 그래도 지옥참마도를 대신 할 검이 있는 편이 좋았다. 내가 무슨 금강불괴라서 맨손으로 검을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머리뿐이라면 이야기는 좀 다르겠지만.
아마 검강으로도 내 머리에 상처를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신들이 작정하고 때려도 통증밖에 안 느껴지는 게 내 뚝배기인걸.
여차하면 머리라도 내밀어서 살아남아야지.
...세연이 보고 싶다.
내가 없으면 걔 햄버거는 누가 주지?
...아니다, 내가 지금 세연이 걱정할 때가 아니지.
“...검수셨소?”
남궁수호가 내 손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가 의아해할만 했다. 내 손에는 굳은살이 아예 없었으니까. 애초에 신에 의해 개조당한 신체였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내가 검술을 정식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 전생의 기억에 의존해서 휘두르고 있었을 뿐이니까.
“아니요. 최소한 몸을 보호할 만한 무기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요.”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창궁무애단이 소저를 보호할 테니.”
내게 검을 주지 않겠다는 남궁수호의 완고한 의지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뭐라고 부탁해도 안 줄 게 뻔하고, 괜히 요구해서 의심의 시선을 받아도 곤란하다. 어쨌든 지금은 내가 도움을 받는 입장이니까. 나대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거다.
가만히만 있어도 중간은 간다.
나는 온몸으로 그 명언을 실천할 생각이었다.
도가문파에 문의하는 건 무림 맹에 가서도 가능할 테니까.
“그럼 오늘 하루는 푹 쉬시오. 저는 바빠서 이만 가겠소.”
“네. 공자님. 수고하세요.”
나는 조용히 남궁수호를 배웅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누군가랑 더 마주치는 것보단 조용히 방안에서 명상이라도 하고 싶었으니까. 애초에 친한 사람도 없고, 시선도 신경 쓰이고...그냥 방구석 폐인마냥 박혀있는 게 더 나으니까. 다른 사람 호감을 살 일하기엔...남자 놈들 시선이 좀 많이 신경 쓰여서.
아, 나도 심법 같은 거 배워 보고 싶네.
그러면 수련 같은 거라도 하면서 시간 좀 죽일 텐데.
이왕 온김에 삼재공 같은 거라도 서적 좀 구해볼까. 삼재 검법이나, 삼재공이나, 막 그런 무림에 널리고 널린 기초 심법 말이야.
원래라면 양생공 취급도 못 받겠지만...내가 배우면 달라지지 않을까?
적어도 시도해볼 가치가 있었다.
물론 무공비급을 구하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라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무림 맹이라면 그런 서적 하나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을 테니 조금이라도 기대감을 품는 건 나쁜 일은 아닐 거야.
나도 막 경공도 쓰고 어?
나는 혼자 남은 방안에서 애써 행복 회로를 돌리며 히죽히죽 웃었다.
눈가가 촉촉한 건 기분 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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