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6화 〉 강시 아니라고(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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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가.
무협지를 좀 읽어 본 사람은 다들 안다는 암기와 독을 다루는 세가.
정파무림에서 암기와 독을 사용한다는 다소 이질적인 세력이지만, 일단은 정파에 속하는 경우가 많고 나름대로 협을 추구한다...라기 보단 또라이 집합소나 은원셔틀 용으로 등장하는 곳이다.
은근히 당가 사람이 주인공인 무협지가 별로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래도 암기랑 독이라 별로 멋있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보통 무협지의 주인공은 검을 쓰니까. 동양이든 서양이든 검은 주인공의 무기였다.
즉, 엑스트라 및 조연 전문 세가라는 거다.
“...이 안 가는 당가가 겁난을 당할 때 쓰려고 만든 곳일세. 그렇기에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수많은 탈출구와 중요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거대한 창고가 있지.”
“대단하군요.”
이게 무림 퀄리티인가?
방공호를 연상시키는 안 가는 굉장히 넓었다. 못해도 잠실운동장 정도의 넓이는 되는 것 같았다. 분명 땅속으로 온 것 같은데 이런 장소가 나오다니, 무공이 존재할 때부터 생각했지만, 이곳도 어지간히 판타지인 것 같았다.
드워프 왕국도 아니고 이런 넓은 장소가 나오다니, 누가 알았겠냐고. 심지어 천장에 박혀 있는 발광하는 보석은 무협에서 한 번씩은 꼭 나오는 귀한 보석인 야명주였다. 어떻게 알았냐면, 당가의 장로가 자랑 섞인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당가의 가솔들은 전부 피신한 겁니까?”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네. 당상필, 당문추, 당가량...당가의 무사들이 가솔들을 지키기 위해 희생 되었네.”
장로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슬픔이 서려 있었다.
아무리 오대 세가라도, 천하에 이름이 드높다는 당가도 무자비한 물량공세에는 답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나마 당가라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게 맞겠지. 정파에서 당가만큼 물량공세에 잘 대처할 수 있는 세가가 없으니까.
“...반드시 복수할걸세. 당가는 은원을 잊지 않기에 당가이니.”
“...쉽지 않은 일이지만,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복수에 찬 두 목소리가 안 가에 울려 퍼졌다. 나는 뒤편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 사실 적당히 돈이라도 받고 빠지는 게 좋았던 거 아닐까?
비장미 넘치는 분위기를 보니 전쟁이라도 불사할 분위기인데 괜히 전쟁에 휘말려서 개고생만 하게 되는 거 아닐까. 마침 시대도 전쟁이 쉼 없이 일어나는 격동의 19세기 말. 잘못하면 의화단과 정파무림의 전쟁이전에 더 큰 규모의 전쟁에 휘말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내가 과연 단서를 잡을 수 있을까?
...어렵겠지?
“...소저?”
“아, 죄송해요. 잠시 생각 좀 하느라...”
“피곤하면 먼저 가서 쉬겠소?”
“...아, 그래도 될까요?”
일단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겸사겸사 제대로 쉴 수 있으면 더 좋고. 내가 무림세계에 떨어진 지 사흘. 나는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며칠 안 잔다고 안 좋아질 몸은 아니지만, 그래도 쉴 수 있을 땐 쉬어두는 게 낫지.
눈치를 보니 중요한 이야기하기 전에 나를 떼어놓으려는 거 같기도하고.
내가 조력자인 것과는 별개로, 내가 완벽하게 신원이 보장된 사람이 아니기에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러니 나도 눈치껏 빠져서 쉬어야지. 느긋하게 쉬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면 되는 거야.
“장로님, 혹시 소저를 먼저 쉴 곳에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내가 시비를 불러 안내하라 하겠네.”
“그럼 푹 쉬시오.”
“감사해요.”
나는 장로가 부른 시비를 따라 휴식처로 향했다.
“아름다운 소저로구먼.”
당교진 장로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유진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다소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 그러면서도 내공이 한 줌도 느껴지질 않았다. 무림인은 아닌 모양이라고 당장로는 짐작했다.
동시에 의문이 피어났다.
‘무림인이 아닌 자가 어째서 남궁 세가와 함께 이곳에 왔지?’
무림인이 아니라는 것은 무공을 배우지 않은 일반인이라는 뜻.
“...그렇습니다.”
“정인이신가?”
“아닙니다. 그저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일 뿐입니다.”
남궁수호의 얼굴에 불그스름한 기가 보였다. 당장로는 그 모습에 너털웃음을 흘리며 남궁수호를 바라보았다.
‘좋을 때지. 좋을 때야. 시대가 난세가 아니었다면...’
“은근히 마음이 있긴 한 것 같구먼. 끌끌...그래서 저분은 어느 세가의 소저신가?”
“세가의 소저가 아닙니다. 본인의 말로는 장백파의 후예라 했습니다.”
“장백파...라. 먼 옛날에는 걸출한 무인들을 여럿 배출했던 문파였지. 당장 명 시절의 십 대고수 중에 하나가 장백파의 무인 아니었나. 청의 등장 이후로 쇠락하다가 결국 무맥이 끊겼다는 이야기를 내 들은 것 같은데...”
당장로는 말끝을 흐리며 남궁수호를 바라보았다. 남궁수호는 그의 눈빛을 담담히 받아넘기곤 입을 열었다.
“...첩자는 아닐 겁니다. 첩자라고 하기엔 너무 어설플뿐 더러, 마공의 기운은커녕 청량하지만 어딘가 서늘한 기운을 품은 분이니. 첩자로 돌리기엔 너무 아까운 분입니다.”
“오히려 그런 특징 때문에 첩자일 수도 있네. 아무도 첩자라고 생각하지 못할 인물상이니 말일세.”
첩자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고 인상이 옅어 존재감이 떨어지는 인물이어야 한다. 하지만 당교진 장로는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상식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상식에 얽매이면 가족이 죽는다.
의화단은 들불이 퍼지듯 순식간에 세를 불려 중원의 큰 세력으로 자리 잡은 단체였다. 그리고 대놓고 마공을 권장하는, 심지어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는 단체이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 상식적인 행동을 보이리라 생각하는 것도 미련한 짓이라고 당교진 장로는 생각했다.
“...일단은 주의하게. 혹여나 첩자라면 아주 위험한 상황에 부닥치게 될걸세.”
“알겠습니다.”
하지만 남궁수호는 그녀가 첩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교진 장로의 말대로 첩자라고 하기에는 어설프기도 했고, 그녀에게 느껴지는 것은 고향에 대한 향수 뿐이었으니까. 적어도 그가 보기엔 그녀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여행자에 불과했다.
“...뭐, 이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지금 중요한 건 첩자 이야기가 아니니 말일세...”
“지금은 당가의 안전과 오대 세가 및 구파일방의 결속이 최우선이지요.”
“그러네. 갑작스러운 습격에 피신하느라 한동안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네. 다른 세가나 문파도 습격을 받았는가?”
“...청성과 종남이 무너지고 제갈세가와 하북팽가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외 작은 소문파들은 여럿 멸문당한 상황이라, 정파 내에서도 의화단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상황이 심각하군.”
이미 정파무림은 의화단의 습격으로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소문파부터 대문파까지 피해를 입어 남은 잔존병력을 끌어모아야 하는 상황이었고, 무림 맹은 하루가 멀다 하고 숨 가쁘게 각 문파들에게 전령을 보내고, 병력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청나라 황실의 견제를 받는 상황이라 무림 맹 또한 위축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파에 대한 견제 및 마두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남은 몇몇 단들이 남아 있었다.
의화단의 10만을 넘는 압도적인 머릿수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병력을 모아야만 했다.
그래야 최소한 건드리면 너희들도 큰 손해를 볼 거라는 발악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먼저 공격할 수는 없었다.
의화단은 너무 강력한 명분을 틀어쥐고 있었으니까.
부청멸양(???).
청 왕조를 받들어 외세를 물리쳐라.
반하는 자들은 중원의 땅에 설 자격 없는 매국노이니, 전부 죽여라.
그들을 공격하면 매국노가 되고, 공격하지 않으면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국노가 되어 공격받는다.
남궁수호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암담한 현실에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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