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335화 (335/352)

〈 335화 〉 강시 아니라고(9)

* * *

“...소저가 해동(조선)에서 이어지던 장백파의 후예라는 말입니까? 문파의 신물을 찾으러 중원에 왔고?”

“네.”

“장백파라는 문파는 나도 들어 본 적이 있소. 오래전에 명맥이 끊겼다고 들었는데?”

...대충 그럴듯하게 둘러댄건데 어쩐지 납득을 하는 모양이었다.

무림에 은근 일인문파가 많은 모양이네. 하긴 중원 역사가 몇 년인데 일인문파가 산 마다 하나씩 있다고 해도 이상하질 않았다. 무협지 주인공도 일인 문파의 계승자 이런 식으로 출신 정해 놓고 무슨무슨 이유로 강호출도 이러는 거 흔하잖아.

믿고 보는 클리셰란 거지.

그리고 그만큼 흔하다는 이야기기도하고.

물론 무협지 속의 이야기지만 적당히 그럴듯한, 그리고 호구조사가 매우 힘든 이 시대의 환경에 최적화된 설정임은 부정할 수 없다.

지들이 의심해 봐야 어쩔 건데. 어차피 나는 무공을 배운 적이 없어서 내공의 기운 같은걸로 사문을 추측할 수도, 내 지인을 찾아 정체를 캐물을 수도 없다. 오로지 내가 실토하는 게 아니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거다.

게다가 내 무협지 읽은 짬밥이 10년은 훌쩍 넘었는데, 어지간한 의심은 적당한 뇌 내 설정으로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문파가 망하다시피 해서요. 이제는 거의 일인 전승 문파가 되어 버렸답니다...”

“...안타깝구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는 것은 세상의 이치이니, 순리에 따라 쇠락한 것일 뿐이예요. 미안한 표정 지으실 필요는 없어요.”

아, 오글거려. 무협지에서 히로인들이 할 법한 말투로 이런 소리를 하고 있어야 한다니, 오글거려 죽을 것 같애.

차라리 에포나를 타고 우마뾰이를 외치면서 달리는 게 낫지.

...그건 아닌가?

아무튼, 그래도 남궁수호는 급조한 설정을 어느 정도는 믿는 눈치였다. 군데군데 구멍이 뚫리고 어설픈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무기가 있었으니까.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난 아름다우니까.

...무려 여신의 얼굴을 그대로 본뜬 외모니까, 순수하게 아름다움으로는 어지간한 인간은 따라오지도 못 하는 외모다. 정말 따라잡으려면 천하제일미 정도는 데려와야 하지 않을까.

애초에 신은 인간이랑도 풍기는 분위기에 차이가 있다. 아무리 인간인 척을 해도 몸에서 내뿜어지는 오오라가 다르기에 평범한 인간이라도 ‘뭔가 다르구나’하는 남궁수호 눈에는 내가 선녀처럼 보일 거다.

평소에는 자제하고 있지만, 작정하고 기운을 흩뿌리면 남자 하나 애간장 타게 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런 짓 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돌아가려면 수단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선을 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야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잡을 수 있는 게 내 상황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땅에 힘좀 쎄고 늙지 않는 몸으로 혼자서 버티는 상황은 꿈도 희망도 없잖아.

최소한 지방의 유력자랑 친분을 좀 쌓아두면 당장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편하게 지낼 수는 있다. 상황에 따라선 년 단위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으니, 남궁 세가와의 호감작은 필수였다.

무협지에서 단골처럼 등장하는 오대 세가의 수좌, 남궁 세가잖아. 어느 무협지를 가든 흑막, 주인공한테 참교육 당하는 일타삼류악역, 혹은 주인공의 강력한 조력자 중 하나. 천하 십 대고수든 백대고수든 남궁 세가의 가주는 무조건 껴있는 게 국룰이지.

그런 남궁 세가의 조력을 얻냐 못 얻냐는 향후 내 중원활동의 향방을 가를 것이다. 당장 내가 여기선 무명소졸이라 쓸데없는 시비가 걸릴 수도 있는 걸 ‘남궁 세가의 손님’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어느 정도 쳐낼 수 있고, 남궁 세가의 도움을 받아 화산이나 무당에 방문하기도 쉬워질 거다.

현대든 중세든 고대든 연대든 아무튼 인맥이 최고야!

아, 연대는 빼고.

“소저를 의심해서 미안했소.”

“아니예요. 누구나 의심할 법한 상황이죠.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는 사람이 사실은 무인이었다던가...”

나는 말꼬리를 흘리며 남궁수호와 눈을 마주쳤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수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후려치고 싶다. 면상에 쩨트킥 한 번 날리고 싶다!

이게 다 한솔이가 방송에서 하는 여우짓을 착실히 흡수한결과였다. 웅녀 지분도 꽤 있었다. 웅녀는 그 폭력적인 몸매 때문에 굳이 여우짓하지 않아도 시선을 끌지만. 난 개보다 가슴 큰 여자를 현실에서 본 적이 없어...

한솔이도 마리아도 나름 크지만 웅녀 정도는 아냐.

“무림에는 노인, 여성, 아이를 무시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소. 제 한 수 숨기는 것은 무림인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니 그대를 탓할 생각은 없소.”

“감사해요.”

그러면야 나야 땡큐지. 아직 신뢰가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일단은 충분했다.

신뢰는 지금부터 조금씩 쌓아가면 되는 것이다.

“...흠흠, 감사해야 할 건 우리요. 혹시 모를 희생을 막아주셨지 않소.”

얼굴 좀 그만 붉혀. 쑥스러워하지마. 평범하게 대해!

내가 했지만, 이런 반응은 못 견디겠다고!

“...인사치례는 그만하죠.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요.”

“공자님.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알았네. 그럼 나가보도록 하지.”

이제 지긋지긋한 마차에서 나와도 되는 거지? 남자랑 둘이서 이러고 있는 거 정말 기분 더러웠는데. 내 인내심이 이렇게 뛰어날 줄이야. 이게 항아리 게임으로 단련된 인내심 맞지? 이제 x수들한테 놀림 받아도 화내지 않을 자신이 생길 거 같아.

여자도 아니고 남자랑 썸타는 시늉 하는 거 진짜 역하다고! 나는 그냥 나리랑 같이 오순도순 살고 싶은 건데 왜 자꾸 어디로 강제 표류 당하는 건데!

“따라오시겠소?”

“아...네.”

나는 남궁수호를 따라 마차를 나왔다. 마차의 문을 열고 처음으로 본 것은 낡다 못해 곧 무너질 것 같은 허름한 초옥이었다.

무협지 짬밥이 10년이 넘은 나는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거, 안 가(?家)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외진 곳에 올 리가 없잖아.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래. 누구를 만나는 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최소한 이들이 행선지를 숨기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은 느껴졌으니까.

당장 여기까지 올 때도 표국의 상행으로 위장하고 움직였으니.

“개미에게 당하는 마음속 괴로움 면하지 못하고(?心?????)

향기로운 나무 잎새는 난새와 봉황새의 잠자리도 되었을 것이다(???????)”

시인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영문 모를 대사를 주억거리고 있으니, 어디선가 남궁수호의 말에 화답하는 듯한 말이 들려왔다.

“뜻 있는 선비나 숨어사는 사람들은 원망하고 한탄하지 말아라(???人???)

예부터 인재가 크면 쓰이기가 어려웠노라(古??大??).”

“후배가 강호의 대선배님을 뵈옵니다.”

“늦지 않게 왔구나.”

지천 명(50세)쯤 되어 보이는 장년의 남성이 초옥 뒤편에서 나타났다. 강호의 고수라서 그런지, 기척하나 느껴지지 않은데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것처럼 나타난 모습에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무림고수는 저런 식으로 멋있게 등장해야지.

“우리 쪽에서 보낸 서찰이 도착한 모양이로구나. 당규영은 같이 오지 않았느냐?”

“...그는 지금 남궁 세가에서 치료받고 있습니다.”

“...살아는 있는 모양이로구나.”

당가에서 남궁 세가로 전령을 보낸 건가. 그 전령은 중상을 입어서 치료 받는 중인 거고. 단편적인 정보밖에 듣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졌다.

근데 나 여기 있어도 되는 거 맞나? 좀 눈치 보이는데.

...아니면 내가 첩자라도 여기 인원들 선에서 쉽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나, 돌아갈 수 있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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