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4화 〉 강시 아니라고(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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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이 위기에 처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점점 늘어나는 외세의 침략, 갈수록 심해지는 왕실의 부패, 점점 발전된 총기의 등장으로 인해 무림인의 입지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고, 쇠퇴의 조짐이 보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천 년 넘게 중원무림을 수호하는 정파의 문파와 세가들은 그런 상황에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 하는 상황이었다.
수 백 년전 청나라와 명나라의 전쟁에서 명나라의 편을 든 탓에 청나라의 탄압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청나라의 중원정복 이후 무림은 자연스럽게 예전의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는 여진의 후예들이 세운 제국이었고, 여진의 후예들이 힘을 가진 한족의 무림인들을 가만 놔둘 리가 없었으니까. 총의 효용성이 입증되어 관이 총기를 적극 채용한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수 천 년을 버텨 온 무림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리가 없으니, 청나라 건국 후 30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림은 예전의 위세를 잃었을지언정 계속해서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는 거다.
그 위세도 외세의 침략과 의화단의 등장으로 박살 나 버리고 말았지만.
설명 하는 내내 남궁수호의 얼굴은 어두웠다. 외부인에게 무림의 치욕을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이 적잖이 씁쓸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의화단을 그저 들고 일어난 민초들의 모임 정도로 생각했소.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니 자연스럽게 관이 백성을 지키지 않게 되었고, 결국 백성은 스스로 무장하여 보호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오. 몇몇 문파들은 그들을 돕고자 발 벗고 나서기도 했소.
...자신을 의화단의 대 사부라 주장하는 자가 마공을 쓰기 전엔 말이오.”
“마공...”
“그렇소. 명나라 말기 즈음에 일어난 정마대전으로 마교가 종적을 감추었기에 마공을 실제로 본 자는 손으로 꼽지만, 무림인들은 그게 마공임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소.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옥죄는 것 같은 끔찍한 기운. 검은빛으로 빛나는 기를 가진 것이 마공 외에 무엇이 있겠소?”
...확실히, 좀 역한 기운이긴 했다. 남궁 세가가 사용했던 내공은 그냥 조금 가공된 정기 같으 느낌이라면, 마공은 뒤틀린 황천의 정기 같은 느낌? 도대체 뭔 짓하면 그렇게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기분 나쁜 색체를 흩뿌리는 마공이 왜 배척당하는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마공이니 배척을 하려고 했겠네요?”
“그렇소. 우리는 그 사실을 황실에 알리고 의화단을 조기진압하려 했소. 그들은 무차별적으로 백성들에게 마공을 퍼트렸으니, 관도 그것을 좌시하지 않으리란 판단이었지.
하지만...”
“관이 의화단 편을 들어 준 거군요?”
“그렇소.”
의화단 시기면 나라에 망조가 제대로 든 시기긴 했지.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아, 이 시기에 조선은 이미 망해서 사라졌지? 대한제국 세우고 마지막 발악하고 있던 시기잖아. 의미 없는 발악에 가깝긴 했지만...
...지금가서 일제 조지면 식민지 안 되지 않을까?
그런 짓 하면 무슨 나비효과가 생길지 모르니까 할 순 없겠지만.
어차피 우리 세계 아니니까 깽판친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역사 한 번 바꿔보겠다고 싸그리 죽이는 짓을 하는 건 미친 짓이지. 애초에 중국이 뒤틀려 버린 시점에서 한반도나 열도나 내가 배운 역사와 같은 상황인지는 알 수도 없고.
“관이 의화단 편을 들었다...국가가 마공을 허락했다는 거네요?”
“그렇소. 아무리 오랑캐 왕조라지만 그런 선택할 수 있는 건지! 그때문에 정파의 입지가 위태로워졌소. 오랜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배워나가야 하는 정파의 무학과 달리 마공의 무학은 속성을 추구한 대신 주화입마에 걸리기 쉽소. 그런 마공을 평범한 백성에게 퍼트리다니...망할 마교놈들.”
남궁수호의 목소리에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한탄이 서려 있었다. 그는 나름대로 이 일에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흔히 있는 민란이라 생각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게 문제였소. 설마 의화단이 정파무림을 적으로 삼을 줄은...”
“아무리 수가 많다고 해도 정파무림을요?”
“단순 머릿수 차이로 보면 정파는 의화단에 비하면 한 줌도 되지 않소.”
물량차이가 엄청나다 이거구만.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무림인도 인간이라는 거다. 머릿수가 몇 배, 심하면 10배 이상 차이나니까 제대로 된 싸움이 성립이 안 되는 거지. 게다가 그 인원수의 상당수가 마공을 익혔다? 그야말로 답이 없었다.
“...그럼 지금 정파 무림은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는 거네요.”
“그렇소. 그런데 소저, 소저는 중원의 소식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사천까지 오게 된 것이오? 이곳까지 왔다면 이미 파다한 소문을 들었을 것인데 말이오.”
남궁수호의 눈에 살짝 의구심이 깃들었다. 내가 왜 중국의 중심부를 지나야 올 수 있는 사천에 이르기까지 아예 중원에 일어난 난리를 눈치채지 못한 것에 의구심을 품은 모양이었다. 그 의 의심이 이상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 평범해 보이도록 위장을 하기는 했지만, 내가 객잔에서 보여 준 움직임은 조금 어설퍼 보이기는 해도 꽤 실력 있는 무림인이어야만 보여 줄 법한 행동이었으니까. 거기에 산에서 남궁수호를 찾아내 보호한 것, 그리고 현 청나라의 사정에 어두운 것.
따지고 보면 이상한 것 투성이었다. 적당히 둘러대긴 했지만 실력을 드러낸 지금 내가 했던 말의 진위여부를 다시 체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남궁 세가는 지금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니.
어쩌면 내게 도움을 요청한 것도 감시의 의미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고수. 그것도 과거를 알 수 없는 수상한 무림인(?)이라면 누구라도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난 그냥 뜬금없이 19세기 중국에 표류당한 가여운 듀라한이지만.
근데 진짜 어떻게 돌아가지?
얘네들 돕다 보면 돌아갈 방법이 생길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헤어져서 화산이든 무당이든 가서 신선들이랑 접촉을 해?
그래도 같은 정파인 남궁 세가의 도움을 받는 게 훨씬 수월하겠지?
신선을 만나는 방법을 모르니 찾긴 해야 하는데, 남궁 세가의 도움을 받으면 화산파든 무당이든 점창이든 간에 좀 더 쉽게 출입할 수 있을 테니까.
이런 상황에서 외부인을 쉽게 문파 내부로 들여보내줄 것 같지도 않고.
...그리고 어쩌면 의화단의 배후에 유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 가지세계의 특이점이 무림에 있었으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뿌리세계에도 무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기처럼 대놓고 존재하는 시대는 아니다. 그러니, 좋든 싫든 나는 이 전쟁에 끼어들어야만 한다.
...세연이라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에포나라던가.
아니지, 에포나는 취소. 생각해 보니까 미쳐날뛰는 망아지인 에포나가 있으면 정신적으로 고통받기만 할 것 같아. 차라리 햄버거 성애자인 세연이가 백 배는 낫지. 지옥참마도도 쓸 수 있고.
...사실 지옥참마도만 있으면 충분히 귀환각을 재볼 수 있을 텐데.
신들이랑 교류하면서 신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어느 정도 터득해 둔 상태였으니까. 힘들긴 해도, 지옥참마도가 있으면 어거지로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 있는 틈을 만들 수도 있었다. 내 마음대로 형태를 바꾸는 것도 가능해서 써먹기도 좋고.
...지옥참마도 생각하니까 진짜 아쉽네.
근데 지금, 이런 거 생각할 때가 아니잖아. 적당히 둘러댈 말을 찾아야지.
뭐라고 해야 적당히 납득할까. 나는 적당히 먹혀들 만한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다.
신비문파의 1인 전승자?
세외 문파의 문파원?
조선의 명맥이 끊겨 버린 무가의 후손?
무협지에서 봤었던 온갖 설정이 떠오른다. 하지만 뭐든 간에, 찰나의 시간에 디테일한 스토리를 생각해내기에는 어려웠다.
이런 쪽에 재능이 별로 없기도 했고.
...어쩔 수 없지.
“저는...”
그렇게 나는 있지도 않은 과거를 뱉기 위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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