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333화 (333/352)

〈 333화 〉 강시 아니라고(7)

* * *

검기(?).

무협에서 내공, 서양판타지 쪽에서는 흔히 오러라 불리는 것을 검에 형상화 하는 경지를 말한다. 검기를 다룰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소설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고수라고 불리는 경지의 초입쯤으로 여겨진다.

검강?

그건 10대 고수니 뭐니 하는 괴물 딱지들한테나 허용된 영역이니 논할 가치도 없다. 실제로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하여튼, 검기란 건 굉장한 절삭력을 가지고 있다. 검기를 두른 목검과 검기를 두르지 않은 철검이 부딪치면 철검이 잘릴 정도로. 그리고 그쯤 되면 내공으로 신체를 강화하는 것도 가능한 경지라 사실상 무술 좀 배운 일반인과 무림인을 가르는 선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검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려면 오랜 수련이 필요하긴 하지만.

“검기에...베였는데...멀쩡하다고?”

“사술이다!”

내게 삿대질하며 사술이라고 외치는 의화단주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술같은 짓은 지들이 하고 있으면서 내가 머리로 검기 씌인 검 하나 튕겨 냈다고 사술타령이야, 타령은. 나는 소란스러운 군중들을 무시하고 내게 검을 휘두른 마인의 멱살을 잡았다.

분노 때문인지, 당혹스러워서인지 인상을 한껏 찡그린 마인은 나보다 몸집이 크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힘의 차이는 명확했으니까.

마인은 마치 짐승처럼,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목을 할퀴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내가 마인을 집어던지는 게 더 빨랐다. 피구공처럼 날아간 마인은 이내 다른 마인과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닥을 굴러다녔다.

아, 그냥 의화단주한테 집어던질 걸. 어차피 던질 애들은 많으니 상관없긴 하지만.

“...괜찮소?”

“저는 됐으니까 일단 여기부터 빨리 정리하죠.”

금방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상황은 남궁 세가 쪽에 점점 나빠지고 있었지만, 내가 난입함으로서 전황이 다시금 뒤집혔다. 아무리 상대가 미친개처럼 달려드는 마인이라지만, 나에겐 그리 위협적인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어중간한 마기로는 나한테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 아무리 강해봤자 신보다 강할 리가 없잖아.

이젠 오만데서 공공재 취급받는 천마정도 아니면 어중간한 마기로는 나한테 악영향을 주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마기에 잠식되어 폭주하는 놈들이라 그리 강하지 않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단지 미친개처럼 달려드니까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뿐이었다.

“이런 개 같은...”

“언제까지 뒤에서 명령만 내리려고?”

나는 난장판 속에 다리가 하나 부서진 의자를 집어 들었다. 저 의화단주라는 놈은 뒤에서 계속 명령질만 하고 있었으니, 일단 저놈을 박살 내야 상황이 정리될 것 같았다.

팔에 힘을 준다. 나름 돌팔매질 해 본 몸이라 약 50여 미터 정도의 거리 밖에 있는 상대를 맞추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팔을 뒤로 젖혔다가, 던진다.

곧이어 파공성과 함께 나무 의자가 마인들 사이를 가로 질러 날아갔다.

그 살벌한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의자로 쏠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목적지가 된 의화단주는 기겁하며 몸을 숙였다.

의자는 아슬아슬하게 의화단주의 몸 위로 지나갔다.

하지만 내가 의자를 던진 것은 페이크, 그러니까 무협식으로 하면 허초에 불과했다.

나는 의자가 날아간 직후에 그 뒤를 따르듯이 의화단주에게 달려들었다. 그저 발 끝에 힘을 주고 도약한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표범처럼 의화단주를 덮쳐들 수 있었다.

나는 의화단주가 가까워지자 무릎을 앞으로 내밀었다. 인간이 타격에 사용할 수 있는 부위 중에 가장 강한 부위 중 하나라는 무릎으로 찍어 버리기 위함이었다.

의자를 피하느라 날아오는 내 존재를 뒤늦게 파악한 의화단주는 피할 방법이 없었다.

무릎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타격감과 함께 남자가 쓰러졌다. 쌍코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은 걸 보니 코뼈가 부러진 모양이었다. 지휘관이 쓰러지자 미친 듯이 날뛰던 마인들의 분위기도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상황이 순식간에 정리되기 시작했다. 나는 의화단주의 뒷목을 잡은 채로 그 광경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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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소.”

“...제가 빨리 나섰다면 다른 분들도 다치지 않았을 텐데요.”

사실이 그랬다. 처음부터 내가 도왔다면 창궁무애단원들이 다칠 일은 없었을 거다. 애초에 상대가 갑자기 마공을 쓰면서 폭주한 게 문제였지 이들이 약한 게 아니었으니까.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놈들이라 까다로웠던 것이다.

“...난세를 살아가는 무인에겐 저마다 비밀이 있는 법이오. 그대는 가만히 있어도 해결될 일을 우리를 위해 나서 주었소. 그거면 충분하오.”

...무난하게 넘어가서 다행이네. 보아하니 나를 사정이 있어 힘을 숨기는 기인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설명할 필요가 없는 건 좋은데, 나를 보는 시선이 좀 부담스러워졌다.

전에는 지켜야 할 아름다운 히로인을 보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정체불명의 은 거기인을 보는 듯한 느낌.

이게 더 좋은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다.

...좋게 좋게 생각하자. 어차피 헤어져야 할 일이고, 어쩌다 보니 은인X2가 되어 버렸으니 이참에 노잣돈이라도 요구해서 떨어져 나가는 게 좋을 수도 있다.

“그럼 푹 쉬시오 소저.”

“네, 공자도 푹 쉬세요.”

나는 남궁수호와 헤어져 내게 배정된 객실로 들어갔다. 객실은 엄청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깔끔한 편이었다.

나는 곧장 침상에 드러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쓸데없이 피곤한 하루였으니,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남궁수호 일행 옆에 있으면 귀찮은 사건에 말려들 수 있다.

그건 확실했다. 의화단은 남궁 세가의 공자를 노리고 있고, 그 옆에 있으면 나도 덩달아 노려지게 될 테니까.

...이미 늦은 것 같긴 하지만 곧 헤어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점이 너무 많아서 그냥 헤어지기에도 그랬다.

분명 남궁수호가 지나가듯이 말했던 것. ‘당가는 망했다’는 말. 시대가 무협 소설에서 매번 튀어나오는 명나라 초기 쯤이 아니라 청나라 말기, 1890년대인 시점에서 내가 아는 무협 지식이 대부분 통용되지 않으리란 것은 짐작할 수 있다.

한 번 정리해 보면,

당가는 망했고,

남궁 세가의 공자는 중요한 일을 위해 사천에 왔으며,

의화단은 마공을 사용했다.

단편적인 정보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정파는 지금 엄청난 위기에 봉착한 게 아닐까.

가령, 의화단의 뒤에 마교가 있고, 정파가 그 사실을 눈치채고 의화단을 막으려 한다던가?

내 머릿속에 그럴듯한 무협지가 그려진다.

부패하고 무능한 윗대가리들 탓에 망조가 들어 버린 청나라, 외세의 침략에 반발해 일어난 의화단, 의화단 뒤에서 암약하는 마교. 그리고 그걸 막으려는 정파.

내가 마교를 흑막으로 의심하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의화단의 모태가 백련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련교는 명교를 부르는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그리고 보통 무협지에서는 명교를 마교의 다른 이름으로 설정하곤 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마공을 대놓고 사용해도 막지 못할 정도로 나라가 개판이 났다는 이야기다.

뭐 한 번을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네.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이런 개판이 난 상황에서 찾는 게 수월할 리가 없지. 애초에 멀쩡해도 찾기가 힘든 게 문제였다.

지금으로서는 도가문파들 쪽에 들려서 신선과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 소림은...모르겠다. 그럼 화산, 점창, 무당, 종남이 네 가지 문파를 돌아야 하는 건가. 일단 지도부터 구하고 싶네.

“...애들은 잘 있으려나.”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애들 생각이 났다.

나리, 에포나, 한솔이, 유라, 웅녀, 마리아...

애들 잘 있겠지?

나 없다고 밥 대충 챙겨 먹으면 안 되는데...

...똘똘한 유라가 어떻게든 해주지 않을까. 가사능력이 폐급인 한솔이는 기대할 수가 없으니.

나는 눈을 감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려면 빨리 자둬야지.

나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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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저, 우리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소.”

“임무요?”

“그렇소. 남들에게 밝히진 못 할 일 말이오.”

하는 거 보면 대충 안다.

“어, 그러면 이쯤에서 헤어질...”

“소저. 우리를...도와줄 수 있겠소?”

“네?”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남궁수호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땅은...무림은 큰 위협에 직면해 있소. 아주 큰 위협 말이오.”

남궁수호가 비장한목소리로 고했다.

무림이 위기에 처했노라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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