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1화 〉 강시 아니라고(5)
* * *
객잔은 2층 구조로 되어 있었다. 1층의 반의반 정도를 차지한 2층은 위태로워 보였지만, 벽에 쌓인 세월의 흔적이 이 건물이 굳건히 버텨 왔음을 증명했다.
나는 내 몫의 식사를 느긋하게 즐기며 객잔의 풍경을 구경했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 소면 한 그릇을 순식간에 해치우는 사람들. 그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일하는 점소이들. 내가 생각하던, 무협 소설에 자주 나오는 객잔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소저. 혹시 피곤하다면 방을 잡아 놓았으니 올라가서 쉬시오.”
내가 멍하니 있었던 것이 피곤해서 라고 생각한 건지 남궁수호가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넸다. 소름이 끼쳤다.
생각해 보니 여자가 되고 나서 남자와 한 자리에 앉아 식사한 적은 거의 없었다. 라쿤 박사를 남자...라고 하기엔 좀 그렇잖아. 그쪽은 수컷이지.
“아, 괜찮아요. 그냥 이런 객잔에 온 건 처음이라서요...”
적당히 얼버무리며 젓가락을 놓는다. 식사는 솔직히 말하면, 좀 싱거웠다. 아무래도 MSG가 들어가지 않아서 그런 걸까. 그냥 내가 먹은 게 소면이라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잔치국수도 살짝 심심한 맛이 나곤 했으니까.
아니면 그냥 이 객잔 요리사, 아니 숙수의 요리 솜씨가 별로인 걸 수도 있고.
나는 텁텁한 입안을 이름 모를 술로 달랬다. 가장 좋은 술을 달라고 했으니 아마 꽤 좋은 술이겠지. 솔직히 술은 맥주 말고는 잘 마시는 편이 아니라서 잘 모른다. 넥타르는 술보다는 음료에 가까운 느낌이니 비교하긴 좀 그랬다.
애초에 인간이 만든 것과 신이 만든 걸 비교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신이 만든 요리는 요리라기 보단, 요리의 형태를 한 절세의 영약같은 거니까. 술이 아니라 무협지에서 자주 등장하곤 하는 대환단 정도는 가져와야 그나마 비벼볼 법했다.
“요리 솜씨가 썩 뛰어난 객잔은 아니군.”
역시 내 입맛이 이상한 건 아니었나보다. 나는 남궁수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뒤이어 젓가락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소저, 몇 가지 질문을 해보아도 되겠소?”
“질문...이요?”
귀찮은데. 하지만 귀찮은 티를 낼 순 없으니 얼버무리듯이 미소를 지었다.
야, 얼굴 붉히지마. 질문이고 뭐고 지금 얼굴에 죽빵 한 번 갈기고 싶어진단 말이야. 난 남자가 웃는 얼굴 보는 취미 없어.
“그렇소. 아무래도 소저를 돕기 위해선 이쪽도 알아야 할 것이 있어서 말이오.”
질문은 좀 곤란한데.
적당히 넘어가는...건 힘들 것 같고. 나는 잠시 뜸을 들이며 생각을 정리하며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소저가 가려는 곳이 정확히 어디...”
쾅!
남궁수호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객잔의 문이 굉음과 함께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에게 질문을 하려던 남궁수호를 포함한 객잔의 모든 사람이 입구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매국노들이 있다고 들었다! 외세에 빌붙은 자들은 나 의진천의 주먹을 받아라!”
누가 객잔 아니랄까 봐 벌써 싸움이 걸려오네. 나는 언제라도 몸을 뺄 수 있도록 의자를 슬쩍 뒤로 밀곤 술잔을 집었다. 지금 나는 고향에 돌아가려는 가련한 여인이라는 귀찮은 연기를 하고 있어서, 싸움에 끼어들 필요는 없으니까.
다행히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으니, 나는 잔에 술을 따르고 조용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다.
“매국노라니! 뚫린 입이라고 헛소리를 하는 군!”
매국노 어그로가 좀 쎈데. 나는 순식간에 일어난 남궁 세가의 무인들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무림인들의 싸움을 볼 수 있는 거 맞지? 근데 의화권이면 의화단이 쓰는 그 유사 무술? 같은 건데 상대가 되나?
무협지 초반부에 나오는 잡졸 포지션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구에서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는 의화단원들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많은 인원을 데려온 건지, 순식간에 객잔의 한 면이 의화단으로 가득 찼다. 마치 벌떼가 우르르 모여 있는 듯한 모양이라, 꽤 위협적인 분위기였다.
“부청멸양!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한 몸 바치는 의화단의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자가 어찌 그리 뻔뻔한가! 의화단에 참가하지 않는 무인은 곧 외세와 줄을 대고 있다는 뜻! 네놈들의 목을 가져가면 의화단주님께서 기뻐하시겠지!”
“...엉망진창이군. 그대들의 아래에 들어가지 않으면 전부 매국노 반역도로 몰 생각인가?”
남궁수호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비아냥댔다. 원래 세계에서의 의화단 행적을 생각해 보면 저런 말이 나올 법했다. 재내들 중국버전 탈레반이잖아. 지네 말 안 들으면 중국인이고 외국인이고 고문하고 죽여 버리는.
유쾌함이라고는 1도 섞여 있지 않은, 그야말로 광기에 물든 집단이 의화단이다. 그리고 아마 이곳에서도 그 악명은 여전한 듯했다. 지네 편 아니면 죄다 매국노라고 외치는 꼴 보면 딱 그렇잖아.
그냥 지네 말이 법이고 진리인 거지.
“그깟 오합지졸들로 우리 창궁무애단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창궁무애단의 무사 중 하나가 의화단을 비웃었다. 솔직히 내가 보기에도 물량 말고는 딱히 눈에 띄는 점이 없어 보이긴 했다. 보통 무협지에서 창궁무애단 정도면 본가 최정예급은 되니까 이런 어중이떠중이들이 물량공세로 밀고 들어와도 막을 만 하지 않을까.
물론 객잔이 박살 나겠지만, 원래 객잔은 박살 나라고 있는 거다. 무협지 국룰이니까 밑줄 쫙 그어라.
“소저는 피해 있으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예 뒤쪽으로 물러났다. 적당히 사람들 사이에서 구경이나 해야지.
내가 빠지자, 남궁수호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무사들이 모두 검을 뽑아 들었다. 군무와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무공을 본다는 생각에 흥분되는 마음을 애써 감추고 겉으로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이제 막 시작된 싸움을 지켜보았다.
싸움의 양상은 밑도 끝도 없이 몰려오는 의화단을 창궁무애단이 막아 내는 구도였다. 곳곳에서 칼 소리가 들리고, 비명이 들린다. 당연하게도 비명 소리의 주인은 대부분 의화단이었다.
의화권이라는 무공은 그리 뛰어난 무공은 아닌 듯했다. 애초에 무술이라곤 TV에서 틀어 주던 이종격투기 말고는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의화단원들의 동작은 조잡했으니까. 동네 양아치들이 모여서 무림인이랍시고 나대는 꼴이 참 볼썽사나웠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창궁무애단에 유리한 전황과는 다르게 무사들은 긴장한 기색이었다. 마치 무언가 큰 것이 올 거라는 것처럼 움직이는 그들을 보며, 나는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물량때문인가? 얼핏 봤을 때 그래도 100명은 안 되는 것 같은데. 이대로 가면 충분히 다 처리하든지 도망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저 이름 모를 대장 같은 놈은 왜 아직도 뒷짐지고 서 있는 거지?
의문이 켜켜이 쌓여 간다. 하지만 어느 하나 해소되는 것은 없었다. 답답해.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질 모르겠어. 하지만 물어볼 수도 없으니 가만히 짱박혀서, 저들의 의도가 뭔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고작 이런 실력으로 우릴 막으려고 했냐?”
“설마. 이건 그냥 맛보기일 뿐이오.”
뭔가 숨겨진 한 수가 있는 모양인데.
의화단주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쳤다. 내가 잡작스러운 손뼉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돌연 전장에 역한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독?
아냐. 독은 아니다. 내 주변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뭐지?
이 역한 냄새의 정체가 뭐길래 사람들이 전부 저런 반응을 보이는걸까. 나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내가 잠깐 전투에서 눈을 뗀 사이에 전투의 양상이 달라져 있었다. 일방적으로 적들을 몰아내던 창궁무애단이,
밀리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직감적으로, 이 역한 냄새와 의화단이 관련 있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역한 냄새를 풍길 수 있는 게, 의화단이 아니고 또 누가 있을까.
나는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미쳐날뛰기 시작한 의화단을 보며 혀를 찼다. 처음 보는 거지만, 이 역한 냄새, 그리고 당혹스러워하는 무인들, 갑작스레 밀리기 시작하는 진형. 순식간에 내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에 핏줄이 불거진 의화단원.
무협지를 본 사람들이라면 으레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공이다!”
마인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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