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8화 〉 강시 아니라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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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랑 안 맞게 폭탄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살다 살다 폭탄을 머리로 막을 줄은 몰랐지. 이런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머리를 떼기는커녕 오또케 오또케 하면서 귀만 틀어막고 있었을 테니까. 듀라한이라는 몸뚱이가 이럴 땐 정말 쓸모가 넘친다.
뒤늦게 도착한 몸뚱어리와 합체한 나는 기절한 남자를 머리카락으로 들어 올렸다. 일단 피 냄새가 진동하는 이곳보다 적당한 공터에서 쉬는 게 낫겠지? 2차 습격이 없다고 단정하진 못하니까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게 급선무였다.
다행히도, 내가 옛날 ~살아남기 시리즈에서 본 불피우기 방법을 총 동원해 불을 피우는 순간 까지 또 다른 습격자가 나타나진 않았다. 힘겹게 불을 피운 나는 적당한 바위 위에 앉아 내가 구해 온 남자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이것도 참 무협스러운 만남이란 말이야.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운치 있게 일렁이는 불꽃을 보고 있자니,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나 없으면 밥 잘 챙겨 먹을 수 있을지 모를 애들 걱정부터, 이곳이 당최 어딘가 하는 것까지. 생각할게 많아도 너무 많았다.
돌아갈 방법도 생각해 봐야 되고.
일단 여기가 가지세계인지, 아니면 내가 그냥 지구의 어디 산에 떨어진 건지 알아내는 게 중요했다. 가지세계라면...금방 돌아가기 힘들 수도 있었다. 아마 다른 신들도 나를 찾으러 다니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구조를 기다려야 하나?
아마 내가 사라진 것을 눈치챈 신들이 나를 찾을 테니까 기다리면 되겠지만...그렇다고 가만히 있기도 좀 그랬다. 얘네들이 나를 금방 찾는단 확신도 없는 상황에다 이 세계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이 남자와 흑의인들의 혈투를 보면 대충 감이 오는 상황이니까.
내가 사는 지구라면 일단 저렇게 것멑넘치는 칼부림이 일어날 확률이 지극히 낮을 거 아냐. 아무리 지구가 사실 대놓고 판타지스러운 곳이라고 해도 저런 식의 무협스러운 칼부림이 일어나는 게 흔한 일이 아니다.
애초에 복식이 딱 봐도 역사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복장인 것부터 지구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요즘 시대에 무협지에서나 나올 것 같은 도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닌가?
세상에 미친놈들 많은데 그중에 시대착오적인 패션 입고 무림인 코스프레 하는 놈이 있을 수 있지. 그게 내 앞에 있는 놈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미친놈이 제정신일 리가 없잖아.
...일단 머리색부터 바꿀까?
하얀색은 너무 눈에 띄잖아. 여기가 무림같은 곳이라면 일단 눈에 띄는 머리색을 가진 거 자체가 문제가 되니까. 쓸데없이 백발 마녀니 뭐니 하는 낯부끄러운 별호 같은 거 생기고 쫒길 지도 모른다.
상상만 해도 오글거리네. 무협 소설에서 나오는 별호가 대체로 그렇긴 하지만. 혈수마제나 검황이라던가 태극검제라던가 뭔가 좀 중2병끼가 넘치는 별호가 많으니까. 아까 애도 쌍룡검이니 뭐니 했던 거 같은데.
...아니, 그 전에 이름이 남궁 뭐시기라고 외치지 않았나?
남궁 세가?
무협 소설에서 나오는 정파 세력 중에 으뜸으로 치는 곳 중 하나 잖아. 오대 세가의 수장 취급받는 곳이 남궁 세가고, 보통 삼류 악역...비스무리한 거로 자주 나오긴 하는데. 아무튼 그 남궁 세가가 맞으면 여기가 무림인건 확실했다.
...그냥 이런 고민할 것 없이 이놈 깨어나면 물어보면 그만인데.
깨어나기 전에 머리색이나 바꾸자.
나는 손에 마력을 담고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눈처럼 새하얀 내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칠흑처럼 어두운 검은색으로 변했다. 동양인은 역시 흑발이 제일 어울려.
...이래도 이목구비가 서양인이라 위화감이 느껴지긴 하겠지만.
무협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역용술 같은 건 못쓰니까 어쩔 수 없지.
“으음...”
“정신이 들어요?”
“여긴...”
“안전한 곳이예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난 남성은 나를 바라보고는, 눈을 크게 뜨곤 만화처럼 순식간에 몸을 튕겨 일어난 채로 나를 경계했다.
“다, 당신은 누구요!”
“누구긴요. 당신 구한 사람이죠.”
“...크흠. 미안하오. 오랫동안 쫓기느라 의심암귀가 들어서 말이오.”
뭐 그럴 수 있지.
목숨이 실시간으로 위협받는 상황이면 그럴 만 했다.
“구해 줘서 감사하오. 은공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소.”
“운이 좋았죠.”
나를 만난 게 운이 좋았지. 내가 아니라 일반인이었으면 지금쯤 습격자들이랑 한 덩어리가 돼서 얼굴도 못 알아봤을 거야.
“...혹시 습격자들은 어떻게 됐소?”
“폭발에 휘말려 전부 박살 났어요.”
끔찍한 광경을 굳이 묘사할 생각은 없었다. 폭탄에 정통으로 맞은 시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말 안 해도 알 테니까. 남궁뭐시기는 내 말에 침음성을 흘리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근데 이놈 꽤 훤칠하게 생겼네.
“그런가...어떻게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군...”
“폭탄이 뒤로 튕겨서 시체가 방패막이가 되어 준 것 같아요.”
사실은 내 머리가 막아 낸 거지만, 그걸 말할 수는 없으니 대충 얼버무렸다.
“...정말 천운이었군. 혹시 소저의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소?”
“이유진이예요.”
“중원 사람이 아니군.”
“조선에서 왔어요.”
남궁 뭐시기가 살짝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긴 했지만, 나는 뻔뻔한 얼굴로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외가에 색목인 핏줄이 섞여 있어서요.”
“그렇군...웬만하면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것이 좋을 거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미친놈들이 날뛰고 있으니 조심하란 이야기요.”
미친놈들? 무림은 언제나 미친놈들끼리 날뛰는 곳이잖아. 정파건 사파건 칼에 피 못 묻혀서 안달인데.
“그렇군요...혹시 여기가 어딘지 아시나요? 길을 잃었는데, 어딘지 모르겠어요.”
“허어...아녀자 혼자 돌아다닐만한 곳은 아닐진데. 이곳은 산천이오.”
사천...사천...사천 짜장? 뭔가 익숙한 이름인데, 어딘지를 모르겠네.
무협지에서 꽤 자주 나오던 지명으로 기억은 하는데 어딘질 모르겠어. 유명한 세력이 존재했던 지방이었던 거 같긴 한데.
“어딘지 모르는 눈치이구려. 사천당가가 있기로 유명한 지역이오.”
“아! 사천당가!”
나 그거 알아! 정파면서 독이랑 암기 쓰는 애들! 그리고 맨날 히로인 하나씩 배출하는 애들! 정파 주인공이면 맨날 히로인에 사천당가 애들 꼭 들어가더라.
“...과거의 일이지만 말이오.”
“과거?”
“조선에서 오신 분이라 요즘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르나 보군. 가능하면 최대한 빨리 고국으로 귀환하기를 바라오.”
...뭔 일이 있는지는 몰라도 무협지마냥 뭔가 굉장히 피곤한 상황이 중원에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폭탄 들고 다니는 자폭병이 있는 시점에서 당연한 거긴 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자폭병 같은 게 나오지는 않는다고.
진짜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이잖아.
그걸 현실에서 저지른 미친놈들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중원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물어봐야겠다. 궁금하기도하고, 어쩌면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혹시 중원에 무슨 일이라도 터졌나요?”
“...의화단이 색목인들을 잡아 죽이고 있소.”
의화...단?
어디선가 들어 본 거 같은데...
...어?
잠깐, 의화단이 거기서 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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