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327화 (327/352)

〈 327화 〉 강시 아니라고(1)

* * *

“내 머리.”

내 인생이 어디서부터 꼬였는지는 잘 알지만, 그래도 적당히 꼬였으면 좋겠다.

여긴 도대체 어디야.

경계에서 작은 모임이 있다길래 갔는데 넥타르를 마시고 나서 기억이 없다. 내가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먹는 타입은 아닌데. 설사 술주정을 했더라도 뜬금없이 산속에서 눈을 뜨는 건 좀 이상하잖아.

일단 가지고 있는 거나 확인해보자. 스마트폰이랑, 이랑, 이랑...하나밖에 없네.

하긴 현대인이 스마트폰 말고 들고 다닐게 뭐가 있어.

“공기 참 좋네...”

대충 공기 좋고 물 좋은 산 어딘가에 떨어진 거 같으니 전화라도 해 보면 되지 않을까. 나는 현대인의 필수품, 현대인의 영혼 그 자체인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어? 왜 이래.”

뭐 어디 산골에 떨어졌길래 통화권 이탈이야. 근처에 기지국이 없나? 지금 보니 근처에 송전탑 같은 것도 안 보이네. 뭐 얼마나 산간 오지에 떨어졌길래 송전탑도 안 보이네.

...혹시 한국이 아닌가?

애초에 한국에서 술 마신 것도 아니고 경계에서 술을 마셔댔으니, 취해서 돌아다니다 외딴곳으로 떨어졌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솔직히 넥타르가 그렇게 독할 줄은 몰랐지.

신들이라고 어지간한 술로는 안취한다 이건가. 도수로 따지면 보드카보다 독한 거 같은데. 나름 튼튼한 몸을 가진 나다.

어중간한 술로는 취하기는커녕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지도 않는 내가 넥타르 한 잔에 맛탱이가 간 걸 생각하면 진짜 독한 게 맞다. 아무튼 그렇다.

결코 내가 술이 약한 게 아니다.

좆소시절 회식에 시달린 내가 술이 약할 리가 없지. 술이 약하면 살아남지 못 하는 것, 그것이 좆소의 회식이다.

...내가 뭔 생각하는 거야. 술이 아직 덜 깼나.

일단 돌아다니면서 여기가 어딘지부터 확인해 봐야지.

가능하면 산신령 같은 놈 하나라도 붙잡아서 물어보는 게 제일 쉽지만, 산신령이 흔하지는 않다. 나도 있다고만 들었지 실제로 본 적은 없다고. 웅녀는 실제로 만나 본 적이 있는 것 같지만.

일단 민가라도 발견됐으면 좋겠는데, 정말 아마존 같은 곳에라도 떨어지기라도 한 건지, 도무지 인적이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아니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도대체 얼마나 첩첩산중이길래 사람이 코빼기도 안 보이냐고.

“집에 가서 방송 준비해야 하는데...후, 시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불평을 하며 하염없이 길을 걷던 도중이었다.

챙­챙­

내 귀에 희미하게 쇳덩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경험에 미루어 보자면 검들끼리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근데 왜 검 소리가 나?

요즘 시대에 칼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절대 흔한 게 아닌데. 내가 다른 소리랑 착각한 걸 수도 있겠지만, 저 특유의 소리는 칼이 아니면 듣기 힘든데.

설마...아니지?

그럼 정말 많이 곤란한데.

나는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칼 소리가 들리는 곳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소리가 들린 근원지로 다가갈 수록, 칼 소리가 더더욱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규칙적으로 부딪치는 소리라고 생각했건만, 칼 소리는 쉴 새 없이 울려대고 있었다.

쉽게 볼 수 없는 상황인데.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이라고 몰래 구경이나 해볼까? 겸사겸사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으면 더 좋고.

나는 어깨를 지지대 삼아 머리카락으로 머리를 높이 들어 올렸다. 어지간한 나무 보다 더 높은 곳에 머리를 높여놓은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칼 부딪치는 소리가 난 장소로 조금씩 움직였다.

“아, 저기네...”

나는 머리카락을 한층 더 늘려 칼소리가 들리는 장소가 보일 때까지 머리를 높였다. 아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칼소리가 들린 장소에서는 치열한 혈투가 한창이었다. 청색 의복을 입은 남성과 흑색 의복을 입은 남성. 그리고 주변에 쓰러진 흑의인들.

청색과 흑색이 붙었다 떨어지며 잔상을 남긴다. 일반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몸놀림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무협지 같네.

무협지에서 묘사하는 비무가 저런 느낌이려나.

검이 화려하게 움직이며 허공을 수놓는다.

옛날 홍콩영화에서나 볼 법한 격렬한칼춤이었다. 부딪치고, 막고, 때로는 피한다.

숨 막히는 싸움이다.

나는 물어보려던 것도 잊고 멍하니 두 검객의 싸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싸움.

팝콘 마렵다.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싸움이었다.

현대에서는 정말 보기 힘든 목숨을 건 결투. 어디서 이런 구경을 쉽게 해볼 수 없으니, 말릴 생각이 들질 않았다. 이런 구경을 또 어디서 해.

신들이랑 어울리다 보니 사고가 좀 냉정해진 것 같기는 한데, 현대인이라는 게 원래 남들 생각 많이 해주는 그런 인종은 아니잖아. 모르는 사람이 죽었다고 슬퍼하고 막 그런 인종은 아니니까.

그치?

꽤 오랜 시간 이어진 전투는 청색 의복을 입은 남성의 승리였다. 흑색 의복을 입은 남성의 가슴팍을 베어낸 남성은 검을 집어넣고는,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섰다.

“!@&$!&!(@&!”

입에서 튀어나오는 게 한국어가 아닌 걸 보니 이세계든 아니면 다른 나라에 불시착하긴 했구나 내가. 여기서도 내 권능이 통하려나. 나는 저 남자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U#!!군! 뒷배가 누군지 말해!”

“...말하라고...해서...말할 것...같나?”

“큭...말하지 않으면...베겠다. 이 쌍룡검 남궁수호를 죽이라 보낸 자가 누구인지 당장 말해라!”

흑의인은 둘째치고 청색 옷을 입은 무사도 만신창이라 서 있는 게 고작이것 같은데. 검을 지지대 삼아 간신히 서 있는 모습이 지쳐 보였다. 그래도 목소리 하나는 우렁차네. 탱커를 시키면 잘할 것 같은 시끄러운 목소리였다.

“흐흐흐...말하라고...말해주는...자가 어디 있나...네놈은...여기서 죽는다...”

“...뭐?”

청색 의복을 입은 남자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자마자, 흑의인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려는 모양이었다. 구명절초? 아니면...

어, 이거 뭔가 불길한 플래그인데. 놔두면 둘 다 죽을 거 같은...

“안 돼!”

둘 다 죽으면 길은 누구한테 물어보라고!

에라이 시발, 달리기로는 제시간에 도착 못하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나는 머리통을 둘 사이에 던졌다.

메이저리거 부럽지 않은 속도로 날아간 내 머리가 둘 사이에 끼어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쾅!

내 시야를 새하얀 빛이 물들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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