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6화 〉 에포나의 기묘한 모험(12)
* * *
드래곤.
용이라고도 불리는 그것은 천재지변 그 자체였다.
수는 세자릿수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적지만, 마법에 능통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 그들은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 하는 무소불위의 존재. 누군가는 천재지변을 생명체로 빛으면 드래곤일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도망쳐야 하오!”
“엄청나! 대단해! 주인님한테 이야기해야지~”
“지금 그런 말이 나올 상황이오? 그대의 주인도 횡액에 당할 수 있잖소?!”
천마의 외침에 에포나가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천마는 이상한 말을 한다는 듯이 바라보는 에포나의 시선에 울컥했지만, 싸워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므로 분노를 참아냈다.
“주인님이? 저 용한테?”
그럴 리가.
주인님은 저런 용가리한테 죽을 분이 아닌걸.
에포나는 뭐라도 잘못 먹었는지 불을 뿜으며 날아다니는 용한테 주인님이 죽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용이래봤자 신도 아닌 유한한 수명이 있는 생물에 불과했다.
저 용이 얼마나 나이를 먹었다 한들 그녀의 주인에 비하면 갓난아기에 불과할 테지. 그녀의 주인님은 그만큼 나이를 먹은 신이었다. 애초에 에포나의 주인님, 유진은 신이었기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굳이 검을 꺼내지 않더라도 마법만으로 저 용을 때려잡을 수 있을 거라 에포나는 확신했다. 방구석에서 까마득한 세월 동안 마법만 공부한 주인님이 아니던가. 손짓으로 운석을 떨어트릴 수 있는 게 그녀의 주인님이었다.
“주인님은 안 져!”
“그대의 주인님이 죽지 않더라도, 우리는 위험하지 않소?”
위험한가? 사방이 불타는 숲 한가운데에 있어도 에포나는 별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다. 달음박질 한 번이면 숲을 벗어나는 건 쉬웠으니까. 그녀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이세계에 없었다.
애초에 유령마인 에포나는 이런 불구덩이 속에 있다고 죽을 수도 없었다. 애초에 살아 있어야 죽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정령이 불에 타 죽는 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나?
“위험해?”
“...그럼 이 상황이 위험하지 않단 말이오?”
천마는 답답한 속을 손으로 두드리며 되물었다. 눈앞의 소녀는 상식이 없다못해 아예 미쳐 버린 모양이었다. 불구덩이 속에 있는데 위험하지 않다니!
둘이 말다툼을 하는 동안에도 불길은 점점 그들을 포위한 채 좁혀 오고 있었다. 이대로 불길이 그들이 있는 곳까지 밀려오면 숯이 되어 버리리라. 천마는 에포나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납치된 상황이라지만, 눈앞에 사람을 두고 혼자 갈 정도로 천마는 모진 심성을 가지지 못했다. 천마를 자칭하지만 그의 뿌리는 정파였으니까.
“어서 빠져나갑시다! 그대의 주인을 찾는 건 빠져나간 뒤에도 늦지 않소! 그대의 말마따나 그대의 주인은 이런 불 속에서 생채기 하나 나지 않는 초인이 아니오?!”
“하지만 궁금하지 않아?”
“뭘 말이오?”
“이 용 말이야! 어디까지 불태울까? 궁금해!”
이런 미친년을 봤나!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하늘 위를 쳐다보고 있을 때가 아닌데!
혼자서라도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의 협객이라는 알량한 신념이 그의 발목을 옭아맸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숲을 뒤덮는 저 화마 때문에 점점 숨이 쉬기 힘들어져도, 눈앞의 소녀가 그의 도움 없이도 언제든 숲을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도 어떻게 도망치겠는가.
무림인은 자존심과 신념으로 사는 족속인데.
환생자인 그라도 전생에 살았던 시간 만큼이나 무림인으로 살아온 기간도 길었으니, 그도 어였한 무림인이었다.
쉽게 굽히지 않는.
그러니 그에게 선택이란 애초부터 한가지밖에 없었다.
“이보시오. 내가 아주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아오.”
“이야기? 뭔데?”
“이 불 속을 뚫고 헤쳐 나가는 남녀의 이야기라오.”
“그게 재밌어?”
에포나는 심드렁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천마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죽을 위기에 처하니 거칠게 쿵쾅대던 그의 심장이 오히려 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늘에 용이 떠 있고, 대륙 최대의 숲은 불타고...절대 살아날 수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살아남는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진진하지 않소?”
“그런가?”
“그렇소.”
재밌는 이야기에 집착하는 에포나라면, 이야기로 설득하면 된다. 천마가 생각한 방법이었다. 혼자서 도망칠 수는 없고, 불이 지척까지 다가와도 눈 한 깜짝 안 하는 소녀와 다르게 타 죽을지도 모르는 그는 절박했다.
그의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눈앞의 소녀는 몰라도 그는 숲과 함께 불타 죽으리라.
“재밌을 거 같아!”
에포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손목이 아닌 손이었다. 천마는 갑작스레 손이 잡히자 얼굴에 열기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불 속에 너무 오래 있었나 보군.
“가즈아!”
불 속에서, 한 쌍의 남녀가 돌풍을 일으키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시발, 시바아아아아아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불 중 하나를 꼽으라면 용의 숨결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생명체로 범위를 한정한다면 단연코 첫 손가락에 꼽을 만한 위력을 가진 것이 용의 브레스였다.
그런 브레스가 숲을 훑고 지나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재앙이었다.
그리고 숲의 동쪽에 살던 포다르게에게도 이 사실은 어마어마한 공포였다.
“내 치킨! 치키이이이이이인!”
숲 동쪽의 돌연변이 하피, 포다르게는 비명을 지르며 불길에 휩싸인 축사를 망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3년 동안 품종 개량을 위해 열심히 수를 늘려오던 닭들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해 버리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코카트리스를 잡아 오고, 닭이랑 교배시켜서 새 품종을 만들고, 이제 치킨을 위한 최고의 닭이 막 태어나는 참이었는데!
“치킨! 내 치킨!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내 치키이이이인!”
분노가 솟구친다. 전 재산이 날아간 것만으로도 이성을 잃을 만한데, 잿더미가 되어 버린 닭들은 그녀가 힘들게 인간들에게 귀한 약초들과 동물들을 잡아서 거래하거나 서식지에서 직접 잡아 온 것들이었다.
“용서 못 해...”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부짖던 포다르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망과 슬픔만이 가득하던 두 눈에는 그녀의 농장을 휩쓸고 가 버린 불만큼이나 뜨거운 분노가 깃들었다.
내 노력을 잿더미로 만든 새끼를 어떻게든 쳐 죽이고 말겠다.
그게 용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포다르게는 투지를 불태웠다.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주둥아리에 하이킥이라도 박아주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할 것 같았다. 최소한 닭값은 받아 내야 하지 않겠는가.
포다르게는 투지로 가득한 눈으로 용이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그녀가 가야 할 방향이었다.
날지 못 하는,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발이 빠른 하피인 그녀는 땅을 박찼다.
그리고 쫓는자와 도망치는 자들이 마주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