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4화 〉 에포나의 기묘한 모험(10)
* * *
“그러니까...그대가 말이라는 것이오?”
“응!”
이걸 믿어야 하나?
어딜 보아도 말 같은 부분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하다못해 그가 아직 현대인일 적에 물 건너 섬나라에서 유행했던 말딸처럼 말귀나 꼬리가 달려 있지도 않았다. 겉모습만 보면 아주 아름다운 미소녀가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그녀가 거짓말할 이유도 없었으므로 자칭 천마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의 말을 믿는 것뿐이었다. 믿지 않는다고 한들 다른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동향 사람을 만나서 반갑소.”
트럭에 치이고 무림에 환생하고 나서 얼마나 개고생을 했던가.
남궁 세가 방계의 방계로 태어나서 혜택이란 혜택은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그나마 재능은 있어서 젊은 나이에 절정 고수로 인정받을 정도로는 성장하기는 했다.
하지만 절정 고수의 혜택을 얼마 누려보지도 못하고 왠 장보도를 주워 숨겨진 무덤에 들어갔더니 이세계로 강제로 이동당한 그였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그의 인생 역경이었지만, 자칭 천마는 말을 아꼈다.
딱히 무협에 대해 아는 게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천마라는 이름을 자칭했으면 나름 쿨해야 할 것 아닌가. 적어도 그가 무협 소설에서 본 천마는 대부분 그랬다. 가끔 암컷천마같은 괴상한 물건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어쨌든,
“혹시 그대가 주인님이라 부르는 분에 대해 말해 줄 수 있겠소?”
“주인님은 주인님인데?”
전혀 대답이 되지 않잖소?
천마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도저히 대화가 성립되질 않았다. 처음만났을 때부터 괴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1대1로 대화해보니 더더욱 그랬다.
상대는 철저하게 마이페이스였다. 남의 말을 듣고는 있지만, 대답이 상식 밖이다. 아예 다른 소리를 하는 경우도 많고. 별로 대화하고 싶은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차라리 그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고 빨리 빠져나오는 게 상책이었다.
“그대는 나를 주인에게로 데려간다고 하지 않았소?”
“응!”
“어찌하여 나를 데려가려는 것이오? 내 입으로 말하기 그렇소만, 이 몸은 그렇게 재밌는 인간은 아니오.”
이세계에 와서 컨셉질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였지만, 컨셉질을 하는 건 내면에서 갈구하는 무협뽕을 채우기 위함이지 딱히 다른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생각해도 본인이 그렇게 재미있는 인간은 아니란 소리였다.
“그런 건 해 보지 않으면 몰라! 자넨 할 수 있어!”
“도대체 뭘 시키려는 것이오?”
“어...대화? 주인님이 무료해 하시니까 이야기꾼이 필요하거든!”
“그럼 나 같은 일개 모험가 나부랭이보단 이야기꾼을 고용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소인은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재담꾼은 아니라 그대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기는 힘들다오.”
“그런 건 해 봐야 하는 거야! 자신감을 가져!”
돌겠군.
돌려 말해도, 대놓고 거절해도 눈앞의 상대가 자기 요구를 철회하지 않을 거란 것을 눈치챈 천마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찌 되었든 눈앞의 상대는 용무가 해결되기 전까지 자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녀의 주인님과 만나야 한다.
천마는 적어도 그녀가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성격은 좋기를 바라며, 바지를 털고 일어났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차라리 최대한 빨리 끝내고 빠져나가는 게 낫다고 그는 판단했다.
“그럼 바로 가도록 하는 게 어떻겠소?”
“그럴까?”
어느새 한가득 안고 있던 당근을 전부 먹어 치운 에포나가 슬며시 팔을 뻗었다.
아, 이건 아닌데.
“잠깐! 내 발로 가겠소!”
“너 느리잖아!”
반박할 말이 없어 슬프군. 이곳에서는 나름 발이 빠르기로 유명한 그였기에, 더 뼈아프게 들려왔다. 눈앞의 상대는 달리는 것만으로 소닉붐을 일으키는 정신 나간 속도를 가진 인간, 아니 말이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 번 더 했다간 어지러워 죽겠소! 어차피 이 근처가 아니오!”
“1분이면 되는 걸 5분이나 달려야 하잖아!”
“너무 가깝지 않소!”
5분이면 충분히 빠르잖소!
“돌겠군. 5분이면 충분히 빠르니 조금만 참는 게 어떠시오? 댁의 주인이 5분조차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성급한 성격이오?”
“음...아닌데? 주인님은 정말정말정말 잘 참으시는데?”
“그럼 느긋하게 간다고 뭐라 하지 않으시지 않겠소? 그리고 소인을 데려가는 것은 약속된 사항이오? 시간제한이 있소?”
“없는데?”
“그럼 급하게 갈 필요가 없지 않소!”
또다시 에포나에게 끌려가고 싶지 않았던 천마의 혼신을 담은 외침이었다. 에포나는 그의 말도 ‘어? 일리가 있네?’ 하는 생각하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에포나가 따로 주인님이랑 약속한 건 아니었으므로 천마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냥 에포나가 느린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리라. 에포나의 사전에 느긋함이란 없었다. 뭐든 빠르게 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으니까.
“내가 급하게 가고 싶어!”
“돌겠군.”
천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저 쓸데없는 의지로 활활 불타오르는 눈이 그의 반발을 찍어누를 것이 분명했으니까.
“...조금만 더 느리게 갔으면 좋겠소.”
천마는 온몸에 내공을 두르기 시작했다.
“주인님~! 나 왔어!”
주인에게 말하는 것치고는 불손하군.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던 천마가 생각했다. 에포나가 그의 팔을 붙잡고 끌고 온 저택은 겉으로만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다. 일개 개인이 살기에는 너무 커다랗고, 그렇다고 인기척이 많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사용인은 없소?”
커다란 저택치곤 인기척이 없어도 너무 없군.
“없는데?”
“그럼 관리는 아예 하지 않는 것이오?”
그렇다기엔 담벼락이든, 저택이든 너무 깨끗했다. 관리가 되지 않은 저택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한 저택.
마법인가.
천마가 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마법사들이 숫자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괴물을 수하로 부리고 있는 자라면 강력한 마법사라고 해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숲 한가운데에 이런 저택이 있다는 것 자체도 기이한 일이었으니.
“이상하다, 주인님이 창문 열고 손을 흔들어주실 때도 됐는데...주인님! 나 왔어!”
저택은 고요했다. 그저 열리지 않았던 대문이 슬며시 열렸을 뿐. 에포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문을 열고 저택안으로 들어섰다. 천마는 잠시 그녀의 저택을 둘러보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주인님~! 에포나 왔어!”
대답은 없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에포나는 심통난 표정으로 저택의 출입문을 두드렸다. 에포나가 문을 두드리자 저택의 문이 열리고, 에포나의 앞에 곱게 접힌 쪽지 하나가 둥둥 떠다녔다.
에포나는 곧장 쪽지를 낚아채곤 내용을 확인했다. 쪽지에는 짧은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유진이는 밖으로 나갔어.]
“거짓말! 방구석 폐인인 주인님이 나갔을 리가 없어!”
에포나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변수였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던 변수였다.
에포나는 곧장 등을 돌려 저택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시오?”
“주인님을 만나러 갈 거야!”
“그럼 소인은 이제 떠나도 되겠소?”
“너도 만나러 가야지!”
젠장. 에포나에게 손목을 잡힌 천마가 눈을 감았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그가 떠올린 마지막 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