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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라한이 되어버렸다-314화 (314/352)

〈 314화 〉 시간은 붙잡을 수 없다(5)

* * *

푹신하다, 그리고 따뜻하다.

에실리는 눈을 떴다.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새하얀 머리칼이었다.

“예쁘다...”

에실리는 자기도 모르게 새하얀 머리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을 타고 흘러내린다. 매혹적인 광경에 에실리의 손이 물속을 휘젓듯 머리카락을 휘저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랬을까, 에실리는 뒤늦게 자신이 만지던 것이 머리카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에실리는 깜짝 놀라 튕기듯이 일어나 자신을 돌봐준 상대에게서 멀어졌다. 정황상 자신을 구해 준 것으로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낯선 이인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유진은 에실리가 자신을 경계하며 멀찍이 떨어질 때에도 가만히 구경하기만 했다.

“누, 누구세요?”

소녀는 지나친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널 구해 준 사람.”

유진은 멍하니 소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유진의 눈에 희미한 그리움이 깃들었다. 눈앞의 소녀는 나리를 꽤 닮은 편이었다. 이목구비는 조금 달랐지만,

생각해 보면 나리를 숲에서 처음 만났었지.

유진은 추억을 떠올렸다. 좋지 못한 만남이었지만, 끝까지 이어진 인연이었다. 유진이 굳이 소녀를 살려 준 이유도 그것이었다. 신경 쓸 필요는 없었지만,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게 해준 대가

라고 생각하면 한 번 살려주는 것 정도야 해 줄 수 있었다.

“가, 감사해요.”

에실리는 쭈뼛대며 유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유진은 개의치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공간에서 꺼내온 사과를 소녀에게 건넸다. 소녀는 허공에서 사과를 꺼내는 모습에 깜짝 놀라 유진을 바라보았다.

경계와 호기심이 섞인 복잡한 눈빛이었다.

“저기, 그, 어떻게 한거예요?”

“그냥 아공간에서 꺼내온 거란다.”

유진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지만, 소녀는 충격받을 수밖에 없었다. 세간에 알려진 유명한 대마법사도 이토록 자유자재로 아공간에서 물건을 꺼낼 수 없었으니까. 아공간은 아직 미지의 영역에 가까웠다.

애초에 아공간인 인간이 만들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마력이 필요했고, 개인 단위로 그 정도의 마력을 활용할 수 있는 건 일부 재능의 극을 달린다는 대마법사들도 온갖 마석과 마법 도구를 활용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문에 거의 실용성이 없는 기술로 워낙 유명했는데, 소녀는 눈앞의 아공간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눈앞의 여성을 보곤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고, 그런 사람들은 아주 유명했기에 에실리도 어느 정도 소문을 들었거나, 혹은 실제로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공간을 실제로 어느 정도 사용하기만 해도 대마법사 소리를 듣는데, 저렇게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 혹시 설원의 대마도사 시벨리아님...?”

“그게 누구니?”

“어, 그럼 백색 마탑의 토토님?”

“...처음 듣는 이름이네.”

스무고개 같은 질문 세례가 계속 이어졌지만, 유진은 모르쇠로 일관할 뿐이었다.

유진 처지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유진은 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유진은 그저 솔직하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굳이 거짓말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정체를 숨기시는 건가?

에실리는 끝없는 질문 끝에 그런 결론에 도달하고 그녀의 정체를 알아보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아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안다면 손가락 몇 번만 튕겨도 그녀를 죽여 버리는 건 일 거리 축에도 못 끼었다.

애초에 저렇게 고급스러운 복장을 입고 있다면 최소한 귀족, 어쩌면 어딘가의 왕족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자들은 노예 목숨을 벌레취급하니, 조금 거슬렸다가 그대로 목이 달아날 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그녀의 질문을 받아 준 것을 보면 그런 성격은 아닌듯하다고 에실리는 결론을 내렸다.

에실리는 눈앞의 여성이 보이는 자비에 과감하게 탑승하기로 했다.

어차피 에실리로선 이 숲을 혼자서 빠져나올 수도 없거니와 밖에서는 노예상들이 그녀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공산이 컸으니까.

살기 위해서라면 저 여자에게 붙어 있어야만 한다. 그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저, 저는 에실리예요. 그,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이름이라.

유진은 고민했다. 어떤 이름을 댈까.

본명인 이유진을 말할까, 아니면 새로운 이름을 만들까. 별것 아닌 고민이었지만, 유진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별로 본명을 말하고 싶지가 않다고 유진은 생각했다. 본명은 이미 그녀의 고향이었던 세계가 붕괴된 시점에서 아무도 부르지 않게 되었으니까.

새로운 세상에선, 새로운 이름을.

유진은 고민했다.

“나는...마하. 마하라고 부르렴.”

돌연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이었다. 유진은 나쁘지 않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마하.

마하.

마하...

이 이름을 다시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전생의 이름이자,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이름. 하지만 같은 정체성을 가진 그녀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 그럼 마하님. 저, 저를 거두어 주실수 있나요?”

받아달라, 라.

유진은 혼자서 조용히 여행을 할 생각이었다. 조용히 세상을 둘러보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예기치 못한 동행자라. 유진은 이 금발의 하프 엘프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귀찮게 혹을 붙인 채로 여행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안내인이 존재하냐 존재하지 않냐의 차이는 여행에서 꽤 큰 차이였다. 아주 오래전, 가족들과 함께 했던 해외여행을 떠올리며 유진은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오랜 세월을 살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아주 느긋하게 생각하는 법도 포함해서.

신들에게 시각은 썩어 넘쳤고, 인간처럼 급하게 살 필요가 없었으니까.

에실리는 그 모습을 조마조마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상 생살여탈권을 쥔 그녀의 한 마디에 살 수도 죽을 수도 있었다. 침묵은 30분이나 이어졌다.

에실리는 대답을 대촉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그저 입을 꾹 닫고 둘 사이에 있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 근방의 지리는 잘 아니?”

“네! 제가 그래도 이곳저곳 돌아다녀서 아르드리 왕국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아요! 바로 옆 왕국인 크리니우크 왕국도 가 봤구요!”

에실리는 사실상 떨어진 허락선언에 필사적인 자기어필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아주 오래전, 죽어 버린 그녀의 딸을 떠올렸다.

새로운 모험의 시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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