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3화 〉 시간은 붙잡을 수 없다(4)
* * *
여행 준비는 소박했다.
오래전 아직 사람 티를 못 벗었을 때와는 다르게, 완전무결한 여신이 되어버린 지금은 딱히 식사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잠을 잘 필요도 없었다. 저택에서의 수면도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니까.
가방 조차도 필요 없었다. 신 정도 되면 굳이 짐을 챙기기 위한 가방 같은것도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그녀의 창고에 아공간을 연결해 꺼내면 될 뿐이었다.
그 결과 여행자라고 하기에는 화려하고 실용성 따위 없어보이는 복장이 되었지만, 유진은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그런 걸 따지기에는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니까. 이것도 잠깐의 여흥에 불과하니, 유진은 적당히 근처를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저택을 둘러싼 숲은 척 보기에도 꽤 넓어보였고, 이곳을 돌아보는데만 며칠이 걸리리라. 유진은 허리춤에 모리안을 찬 채로 대문앞까지 걸어갔다.
...생각해보니, 에포나는 어디갔을까.
새로운 세계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튀어나가긴 하지만, 평소처럼 인사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저택 밖으로 나갔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평소처럼 변덕을 부린 걸 수도 있다고 유진은 추측했다.
에포나는 즉흥적인 성격이었으니까. 돌발 행동을 하는건 어릴 적부터의 버릇이었다.
어차피 에포나와 그녀는 주종관계로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때가 되면 알아서 에포나가 찾아오리라.
[아주 오래만의 외출이니라.]
“...풀어줄까?”
아주 먼 옛날에야 괘씸해서라도 그녀를 천년만년 가둘 생각이었지만, 실제로 그 만큼의 시간이 지나니 그녀를 향한 악감정도, 분노도 티끌만큼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유진은 모리안에게 물었다.
[흠...흥미로운 선택이느니라. 허나 거절하겠노라.]
“어째서?”
유진은 이해 할 수 없었다. 마모되고 마모된 그녀였지만, 육체가 없는 것 보단 있는 쪽이 더 낫지 않나? 지금의 그녀라면 적당한 육체를 공수해오든, 아니면 만들 수도 있었다. 애초에 신들은 할 생각만 있으면 영혼 그 자체로 육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단지 힘을 많이 소모한다는 점과 제약때문에 꺼려하기는 했지만, 지금 와서 그런 제약을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유진이 조금 힘을 보태면 그정도 패널티는 무시할 수 있었다.
[귀찮느니라. 이제와서 육체를 가진다 한들, 딱히 할 일도 없느니라. 검에 너무 적응해버려서 다시 인간의 몸에 적응하기도 번거롭느니라.]
“...그래?”
그렇게 육체를 갈망하던 여신이 스스로 육체를 포기하다니, 세월이 많이 지나기는 많이 지난 모양이라고 유진은 생각했다. 그녀가 이 상황에 처하게 된 원인이 모리안인걸 생각하면 그녀의 선택은 의외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검 속도 의외로 편하느니라.]
“...그래?”
유진은 모리안과 평화롭게 대화를 나누며 대문을 향해 나아갔다. 저택은 워낙 커서 저택 문에서 대문까지 나아가는 대에만 꽤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 10분 정도를 걸어, 유진은 거대하다 못해 코끼리도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의 대문에 손을 얹었다.
이대로 손에 힘을 주고 밀면, 미지의 세계가 자신을 맞이하리라.
“...가즈아.”
아주 오래전에 유행했던 유행어를 입에서 내뱉으며, 유진은 입을 열었다.
판테아의 심장이라 불리는 숲은 엘프들의 영역이며, 인간에게는 금지로 취급받는 곳이었다. 거대한 나무들이 숲을 뒤덮고 있어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을 뿐더러, 길을 잃기도 아주 쉬운 곳이었던데다 심지어 몬스터들이 돌아다니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각 숲을 둘러싼 나라들은 숲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엄격히 금했다. 숲 자체가 위험하기도 했을 뿐더러, 엘프들의 영역을 침범해서 득볼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간들에게 허락된 것은 숲의 외곽뿐. 대부분의 인간들은 숲 안쪽을 침범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인간이라 한들 목숨이 하나뿐이었므로.
“헉...헉...”
거친 숨소리가 고요한 숲속에 울려퍼진다. 낡다 못해 옷의 기능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헤진 옷을 입은 소녀가 숲을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횃불을 든 장정이 뒤를 쫒았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에 저년을 잡아야 돼!”
“시발, 그냥 버리면 안 되냐?”
“그딴 소리하기 전에 더 빨리 달려! 저 년 놓치면 우린 죽은 목숨이라고!”
그들은 한밤중에 시작된 끝이 보이지 않는 추격전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지금 도망쳐 나가는 소녀는 노예 하프엘프였고, 이쁘장한 외모로 꽤 비싼값에 대부호에게 팔릴 예정이었으니까.
보초가 졸고있던 사이에 도망친 저 하프엘프 소녀를 잡지 못하면 일을 망친 대가로 시체가 되거나, 늦게 잡으면 이 숲을 돌아다니는 웨어 울프들이 그들을 찢으리라. 어느 쪽이든 그들은 죽고 싶지 않았기에, 숲을 가로지르는 소녀를 잡아야만 했다.
그리고 소녀는 도망쳐야만 했다. 숲의 안쪽에는 엘프들의 도시가 있으니, 그곳에만 닿으면 최소한 목숨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 아무리 순혈주의가 남아있는 엘프라지만 하프엘프라고 마냥 차별하는 것은 아니었고, 어쨋든 노예상에게 다시 붙잡히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소녀, 에실리는 살고 싶었다. 비록 부모도 살해당하고 천애고아가 된 그녀였지만 그게 삶을 포기할만한 이유가 되지는 않았으니까. 그녀는 충실하게 부모님의 유언을 따라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남자애로 변장하고 일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구걸을 하거나 산에서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기도 했다. 반쪽이라고는 하나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에, 숲의 가호를 미약하게나마 받을 수 있는 것이 위안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오래가지않아 인신매매범에게 잡혀버리면서 끝나고 말았다.
심장이 거칠게 뛴다.
에실리의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져나갈 것처럼 쿵쾅대고 다리는 찢어질것 같이 아파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아무리 살고 싶다고 한들 목숨을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부호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무리 어린 그녀라도 모를리가 없었으니까.
에실리는 다른 노예들이 만들어준 기회를 헛되이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엘프에게 유리한 숲이라고 한들 작은 소녀가 도망치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잡았다!”
“이거 놔!”
“이 망할 꼬맹이가 귀찮게 하고 있어!”
에실리를 쫒았던 남자중 하나가 에실리의 뺨을 몇대 후려쳤다. 머리를 뒤흔드는 충격에 에실리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미친듯이 달렸기에 에실리의 몸은 작은 충격에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형님, 일단 여긴 위험하니까 교육하는 건 돌아가서 하기로 합시다.”
“그래, 이년은 돌아가서 확실하게 조지자고...”
그들이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섬찟한 공포가 그들의 뒤에서 나타났다.
셋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마치 누군가가 목에 칼날을 갖다댄 것처럼, 그들은 이유모를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좆됐다.
노예상들은 아무말 없이 식은땀을 흘리며 서로 눈치를 보았다. 아무리 오래 일한 사이라도 그들에게 동료애 같은게 있을 수가 없었으니, 서로를 미끼로 던지고 도망가려는 수작이었다.
침묵이 흐른다.
공포가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늦었어.
“...!”
그들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밝게 빛나는 두개의 달 이었다.
에실리는 흐릿한 시선으로 두 시체 사이에 쓰러져 하늘을 바라 보았다. 노예상의 목을 날려버린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에실리는 도망칠 기운도 없어 멍하니 자신의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전 여기까지인가 봐요.
에실리는 눈을 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