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2화 〉 시간은 붙잡을 수 없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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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이슬을 머금은 잎사귀들, 정원을 날아다니는 나비들. 지저귀는 새.
유진은 평화로운 광경에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놀랍도록 세상은 평온했다. 마치 그녀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듯이. 그녀의 안에 있던 막연한 두려움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친구에게 등을 떠밀려 나온 외출이었지만, 유진은 곧 자기 발로 그 땅에 설 수 있었다.
저택안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땅을 파고들어 가는 무른 땅의 감촉이 유진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 땅을 다시 밞기까지 셀 수조차 없는 세월이 걸렸으니까.
한 행성을 뒤덮었던 종의 번성에서 종말까지,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지나 자연이 살아 숨 쉬는 대지를 밞게 된 유진은 묘한 감동마저 느꼈다.
죽음으로 얼룩진 메마른 땅을 얼마나 오랫동안 보았던가. 유진은 그 광경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수많은 시체들. 수많은 폐허들과 황야, 그리고 혼란스러워진 세기말. 영화나 게임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었지만 유진은 아무런 감흥없이 그 광경을 몇 번이고 지켜보곤 했다. 인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종말이겠지만, 유진에게는 끝없이 반복되는 종말의 반복일 뿐이었으니까.
여러 세계를 표류하며 수많은 종말을 보아온 유진에게는 그것 또한 일상이었으니까.
“...나비.”
나비를 본 게 얼마만이더라.
유진은 손등 위에 나비를 멍하니 바라보며,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가 마지막을 밞은 땅의 풍경은 푸른빛이라고는 네온사인밖에 없었던 곳이었다. 풀은커녕 식물이라곤 말라비틀어진 나무들밖에 없어져 버린 세상이었고, 식물이라는 건 부자들의 개인 온실에서나 볼 수 있는, 아니면 철저하게 출입이 제한 된 보호구역에서나 볼 법한 것이었다.
인류는 우주에 진출하겠다는 꿈을 이루기도 전에 스스로 쌓아 올린 문명에 의해서 무너져 내렸다. SF에서나 나올 법한 기술을 가지게 된 인류였지만, 인류가 한 선택은 그 기술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었으니까.
전쟁을 막으려면 막을 수 있었지만, 유진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아는 사람 모두가 죽어 버린 세상에 미련은 없는 상태였고, 세월을 거듭해 어였한 신이 되어 버린 그녀가 인간 세상에 개입하는 건 좋지 않은 일이라 여겼다.
한 번 개입하면 그들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유진은 종교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 믿을 것 하나 없는 시대에 그녀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곧 새로운 종교의 창시가 될 수 있었으니까. 혼란스러운 세상에 새로운 혼란이 생겨나는 것이다.
유진은 손을 털어 나비를 날려 보내고, 꽃으로 가득 찬 화원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관리되고 있었는지, 화원은 정성스럽게 관리되어 있었다. 유진은 조심스럽게 꽃을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운 꽃잎의 감촉이 손가락에 닿자, 유진은 묘한 감동마저 느꼈다. 수백, 아니 수천, 수만? 그녀조차 잊어 버린 까마득한 시간을 넘어 만진 꽃잎의 감촉은 낯설면서도 그리운,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으니까.
화원을 거닐던 유진은, 화원 한 켠을 장식하는 벤치에 앉아 주변의 풍경을 감상했다. 알록달록한 꽃들과 녹색이 모여 만든 풍경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장미가 강렬한 붉은빛을 자랑하고, 하얀 백합이 고고하게 피어 있고, 노오란 카네이션이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광경은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마저 흔들리게 할 정도로 마음을 편안 하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유진은 꽤 오랫동안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제 좀 더 깊숙이 들어갈 시간이었다. 유진은 화원 안쪽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예쁘네.”
저택의 위치가 숲속이었기에, 집 바깥으로 보이는 거목들이 화원의 분위기를 한층 더 고즈넉하게 만든다. 유진은 화원을 지나, 화원 한가운데에 있는 연못에 도착했다. 연못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유진은 연못의 한가운데 있는 바위와 그 위에 꽂힌 검을 보며 반가움을 느꼈다.
유진은 조심스럽게 연못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고요한 물에 파문이 달린다. 유진은 물 위를 밞고 바위 앞에 다다랐다. 바위에 꽂힌 검. 아주 익숙한 검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갇힌 여신도 아주 반가웠다.
“...오랜만이야.”
[...오랜만이느니라.]
전 여신이자 지금은 검에 갇힌 신세인 모리안은 까마득한 세월 만에 나타난 유진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마모되어 버렸군.
신들조차 피할 수 없는 기 세월에 깎이고 깎여 버린 자의 말로였다. 인간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유진이라면 더더욱 버틸 수 없었으리라. 처음부터 신이었던 자라면 모를까, 유진은 영혼은 신일지언정 신이 아닌 인간이었다.
“...내가 널 여기에 꽃아놨었나?”
[자기가 꽃아 놓고 기억도 하지 못하다니, 서운하느니라.]
“...그래. 미안 해.”
예전이라면 악감정이 남아 있었겠지만, 까마득한 세월 앞에 만난 모리안에게 유진은 그리움과 반가움만 느껴질 뿐이었다. 유진은 조심스럽게 검을 뽑아 들었다. 바위에 꽂힌 검은 오랜 세월 화원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새것처럼 반짝거렸다.
본질이 성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신의 영혼이 봉인되어 있기 때문일까. 유진은 알 수 없었다.
유진은 마법으로 성검을 작게 만들고 근처의 꽃을 하나 떼다 줄기를 늘려 목걸이를 만들어 성검을 걸어놓았다.
[세월이 지났긴 지났느니라. 네가 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하다니...]
“...천 년 넘게 마법 서적 읽다 보면 늘 수밖에 없어.”
지금은 그것마저도 안 읽은지 수천 년은 지났던가. 유진은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흠. 못 해도 수 천 년 정도는 집 안에서 움직일 생각도 안 하던 네가 화원에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더냐?]
“...어쩌다 보니.”
[흠...뭐, 원래 살다 보면 가끔 변덕이 찾아오는 법이니라.]
유진은 모리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유진은 연못에서 시선을 돌려, 다시 화왼 쪽을 바라보았다. 이 화원은 상당한 크기를 자랑해서, 다 보려면 적어도 30분 정도는 걸어야 했다.
[흠, 산책이라. 나쁘지 않은 일이니라.]
“...그러네.”
걷고, 또 걷는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화원을 거닐며, 유진은 오랜만의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만난 지도 벌써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느니라.]
“기억도 안 나.”
[그리 임팩트 있는 만남은 아니었느니라. 꼴사납게 다 만들어놓고 실수로 갇혀 버리다니. 그런 꼴불견이 따로 없지.]
“...그랬나? 솔직히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안나.”
[뭐, 중요한 일은 아니니라. 신에게 과거는 무의미 한 것.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가려면 앞만 바라보아야 하느니라. 과거에 갇히면 신이든, 인간이든 공평하게 그리움에 갇힐 뿐이니라.]
“...뭔가 쓸데없이 멋들어진 말이네.”
소소한 잡담이었지만, 유진은 오랜만에 기쁨을 느꼈다. 새로운 세계에 도착하면 일단 뛰쳐나가는 에포나를 제외하면 대화라곤 한 적이 없는 그녀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둘의 대화는 화원을 빠져나오기 전까지 쭉 이어졌다. 수 천 년 동안 대화를 하지 못했으니, 둘 상이에서 대화가 끊길 일은 없었다.
[...긴 삶에는 활력소가 필요하느니라. 네 애완동물 처럼 여행이라도 나가보는 게 어떻느냐?]
“...여행?”
[그렇느니라.]
여행, 여행이라...
어쩌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유진은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이 저택에 틀어박혀 있을 필요는 없고, 어차피 그녀가 나간다고 저택에 문제가 생길일은 없었다. 저택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관리하고 있을 뿐이니.
다만, 그럴 만한 동기가 없었다. 여행해도 엄연히 목적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 유진은 그럴듯한 목적이 필요했다.
적어도 의욕이 생기려면 그랬다. 목적 없는 여행은 더 헤매게 만들 뿐이었으니까.
“...괜찮을지도 모르겠네.”
그녀가 나가고 닫혀 있던 저택의 문이 다시 열렸다.
유진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며, 손가락을 튕겼다.
여행을 나가려면 준비가 필요하므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