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1화 〉 시간은 붙잡을 수 없다(2)
* * *
백 년? 천 년? 만년?
유진은 푹신한 의자에서 눈을 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자고 있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을 거라고 유진은 짐작했다. 창밖이 초록빛으로 뒤덮여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숲인가.
어느 세계, 어떤 세상일까. 유진의 안에서 미약한 호기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평소라면 그저 조금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겠지만, 이번에는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고, 나가 봐야만 한다고 유진의 직감이 속삭였다.
...의미가 있을까.
유진은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반쯤 일으킨 몸을 푹신한 의자에 반쯤 기대었다. 시각은 많으니, 느긋하게 고민하면 될 일이었다. 유진은 고요한 분위기의 방에서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나리를 만난 것도 울창한 숲속이었는데.
유진은 나리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세계의 경계에 붙어 있던 엘프의 숲에서, 나리는 유진에게 화살을 날리며 위협하다 사로잡혔다. 그리고 엘프의 부탁으로 얼떨결에 나리를 맡게 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게 도대체 언제적 일이었는지 모르겠네.
유진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피어올랐다. 정말 오래전 일이었다. 이제는 까마득해 기억나지도 않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는 기억이기도 했다. 유진은 손등을 매만지며, 나리와의 추억을 되새김질 했다.
첫 등교, 첫 취업, 첫...
결혼을 했었던가? 유진은 애매모호한 기억을 뒤지며 떠올려봤지만, 나리가 결혼했다는 기억은 존재하질 않았다. 유진이 기억하는 나리의 모습은 죽을 때까지 그녀와 함께였었으니까.
왜 결혼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천 년 가까이 사는 엘프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유진은 충분히 결혼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본인이야 생각이 없지만, 어른이 된 나리는 수치상 연령은 높았지만, 내로라 하는 연예인들도 한 수 접어 줄 정도의 미인이었으니까.
...보고 싶네.
유진은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사고를 이어가면, 나리에 대한 그리움으로 머릿속이 가득 찰 테니까. 기약 없는 삶을 사는 자에게 그리움이란 맹독이나 다름없었다.
대신에 정원을 거닐기로 했다. 작은 변덕이었다.
유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아무도 없는 외로운 복도에 유진은 발을 내디뎠다. 이번에는 추억들이 모여 있는 기록실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저택 밖으로 나가려면 그쪽 방향으로 나가야만 했다. 조금 걸으니, 유진의 시야에 허공을 날며 저택을 청소하는 빗자루와 걸레들이 보였다.
“...세연아?”
허무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유진은 오래전 사라진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언제 사라졌더라. 유진은 자기 기억에게 되물었지만 답은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세연이는 사라졌으니까. 그 뒤론 어느 곳에서도 세연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기에, 유진은 마음 한구석에 허전함을 안은 채로 세연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마지막 선물인지, 저택을 청소도구가 날아다니며 청소하게 되었지만, 유진은 세연이 남긴 마지막 선물이겠거니 하며 넘어가곤 했다.
유진은 청소도구를 지나쳐 계단 앞에 멈춰 섰다. 생각해 보면, 못해도 수천 년 이상 이 계단을 내려가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생활반경은 2층 뿐이었고, 1층은 아주 오랫동안 에포나 말고는 쓰는 사람이 없는 상태였다.
다른 신들은 세계의 경계에 모여 살든, 아니면 다른 세계로 넘어가 살고 있었으므로 그녀와의 접점도 사라진 지 오래. 유진은 아주 오랜시간 동안 혼자 살아오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도 없이 많은 세월이 지나 끝없이 마모되어가고 있음에도, 유진을 살아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깨끗하네.
같은 곳을 빙빙 돌며 청소하는 것처럼 보여도, 청소는 꼼꼼히 하는 모양이라고 유진은 생각했다.
...내려갈까.
계단앞에서 머뭇거리던 유진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하나씩 밞으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계단을 내려와 1층에 도착한 유진은 아무것도 없는 현관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열어본 적 없는 문이었다.
유진은 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주 느긋한, 그리고 우아한 발걸음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살아오며 자연스럽게 익힌 발걸음이었다.
현관문에 손을 얹는다. 그저 밀기만 하면 열릴 문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문에 손을 얹은 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유진의 마음속의 두려움과 공허함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가 봤자 무슨 의미가 있는데?
바깥에 나가 봤자 더 그리워질 뿐이야. 차라리 다시 돌아가 의자에 앉고 눈을 감아. 그거면 모두 잊을 수 있어.
쉬운 일이었다. 그저 의자에 앉아 눈을 감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평소에는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그녀의 가슴속에서 호기심과 미지에 대한 기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의 인생은 이미 회색빛으로 물들어 버렸고, 누군가 색소를 넣어 주지 않는 한 흑백의 세계에서 유진은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유진은 천천히 문 앞에서 몸을 돌렸다. 다시 방을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툭툭.
“...뭐야?”
유진은 자신을 툭툭 건드리는 빗자루를 내려다보았다. 빗자루는 마치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요란하게 움직였지만,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유진에게 있어선 그저 빗자루가 오작동 하는 것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유진은 빗자루를 무시하고 2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빗자루는 자기 말을 들으라는 듯이 그녀의 앞을 다시막아 세웠다. 유진은 다시 무시하려 했지만, 필사적으로 몸을 흔들며 의사를 표현하는 빗자루의 행동에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유진은 물었지만, 빗자루가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대신 빗자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사 표현을 시도했다. 빗자루는 끝부분으로 열심히 문을 가리켰다.
“...문을 열어 보라고?”
끄덕끄덕.
그저 반복해서 여러 번 기울일 뿐이었지만, 유진에게는 그것이 자기 물음에 대한 긍정으로 보였다. 어째서일까.
고작 빗자루가 나가보라는 권유를 하는 걸까. 빗자루마저 답답할 정도로 자신이 이 저택에 한구석에 장식된 인형처럼 박혀 있었기 때문일까. 유진의 마음속에서 여러 추측이 맴돌았다. 확실한 것은, 이 빗자루가 그녀가 문을 열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그것보다 이 빗자루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게 유진의 마음에 걸렸다. 단순한 오지랖일까. 하지만 빗자루 따위가? 유진이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겨 있자, 빗자루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친구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또 다른 빗자루와 걸레, 양동이까지, 수많은 청소도구가 절대 통과시켜 주지 않겠다는 듯 계단을 막아섰다. 유진은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어이없어하면서도, 도대체 이들이 바라는 것이 뭔지 고민했다.
청소 도구들은 의사를 더 명확히 표현하기 위해, 유진을 ㄷ자 모양으로 둘러쌌다. 뚫린 부분은 현관문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후. 알았어. 나갔다 오면 되잖아. 그러니까 돌아가.”
유진은 한숨을 쉬며 다시 문 앞으로 향했다. 그러곤 문 앞에 멈춰 서서, 다시 문에 손을 갖다 대었다.
이대로 밀면, 문이 열리고 정원이 모습을 드러내리라.
그것만은 확실했다.
...열고 싶지 않아.
바깥이 두렵다. 아주 오랜세월을 정체된 채로 살아왔기에, 유진은 변화를 두려워했다. 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변화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 변화가 긍정적인 효과를 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변화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새로운 희망일 수도, 절망일 수도 있었다. 기나긴 세월 속에서 잃기만한 그녀는 더 이상 잃을 만한 무언가를 만들고 싶지 않아 했다.
유진이 그렇게 멈춰 서 망설이고 있을 즈음이었다.
[내가 밀어 줘야 해?]
“뭐?”
끼이익.
문이 열린다. 유진은 뒤를 돌아보며 자기 등을 떠민 누군가를 찾아내려 했지만, 그녀의 등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흙의 구수한 냄새, 눈부신 햇볕이 유진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럴 거면 평소에도 좀 티를 내라고. 햄버거 귀신아.”
유진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쳐졌다.
작지만, 햇살처럼 밝은 미소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