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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라한이 되어버렸다-310화 (310/352)

〈 310화 〉 시간은 붙잡을 수 없다(1)

* * *

아. 또 세상이 망해 버렸나.

유진은 저택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벌써 127번째 세상이 망한 걸 보고 있으니, 이제 와서는 으레 있는 연례행사 정도의 취급이었다. 너무 오래 살면서 못 볼 꼴이란 못 볼꼴은 다 봤으니, 이제는 세상이 눈앞에서 멸망해도 나오는 것은 한숨밖에 없었다.

“여긴 꽤 오래가나 싶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망해 버릴 줄은...”

창밖의 광경이 웅장한 중세풍 도시에서 폐허로 변해 버렸기에, 이젠 볼거리도 없어졌다며 유진은 투덜거렸다. 지나치게 오래 살다 보니 어느샌가 취미가 된 창밖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한동안 불가능해질 테니까.

“기록실이나 갈까.”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방인 기록실로 향했다. 방의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자, 아무도 없는 적막한 복도가 그녀를 맞이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세월이 지나 쓸데없이 비대해진 이 저택에 사는 존재는 얼마 되지 않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진은 소리라곤 발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복도를 거닐며, 과거를 떠올렸다. 밖을 나가지 않은지 수 백 년이 지났으므로, 새로운 경험이라곤 창밖으로 보는 광경이 전부였기에 유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과거를 되짚어 보는 일밖에 없었으니까.

첫, 세계, 그러니까 그녀가 태어났던 세상은 3번째 밀레니엄을 넘기지 못하고 멸망했다. 멸망의 이유는 지구가 사람이 살지 못 하는 죽음의 별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애초부터 인간이 아닌 그녀와 특별한 마법으로 보호받는 저택만은 멀쩡했지만, 그래도 첫 멸망은 그녀에게 있어 충격적이었다.

어느새 뿌리세계였던 세상이 가지세계가 되어 멸망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 이후로 유진은 세계의 경계에 머물며 이따금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면, 다른 가지세계가 나타나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구경하며 시간을 죽이곤 했다.

백 살이 넘은 시점부터 게임이든, 영화든 뭐든 그녀는 흥미를 잃어 버렸고, 유일하게 남은 취미는 그녀의 추억이 담긴 방을 둘러보며 시간을 죽이는 것과 창밖을 바라보는 일 뿐이었으니까.

끼이이익.

그녀가 인간으로서 살아온 세월이 담긴 방의 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유진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방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방안의 물건들은 한가운데서 전부 둘러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방 한가운데서 한 바퀴 빙둘러 벽에 빼곡하게 차 있는 액자들과 진열된 물건들. 유진은 그리운 눈으로 물건들을 바라보다 한 액자에 다가 갔다. 방에 있는 액자들 중에서도 가장 큰 액자였다.

액자에 끼워져 있는 사진은 언젠가 다 같이 찍었던, 그리운 얼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사진이었다. 한솔이의 결혼식 때 찍은 사진이었나. 유진은 사진을 보며 그리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저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은 오로지 유진 뿐이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신 뿐이었으니까.

유진의 손끝이 액자를 더듬었다.

“그래도 내가 네 고손자까지는 봤다. 요 흡혈귀야...”

한솔이는 어떻게 죽었더라.

유진의 기억 속에서도 이제는 너무 오래전 일이라 한솔이에 대한 기억도 빛이 바래 회색빛으로 변했다. 흡혈귀였기에 긴 생을 살아왔었던 한솔이는 300살 쯤에 남편을 따라간다며 조용히 영원한 잠에 빠졌다.

일반적인 사람에게 영생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으니까. 유진은 이해했다. 당장 1000살이 넘은 순간부터 그녀도 모든 것이 빛바랜 세상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으니까. 눈앞에서 누군가가 죽어도, 세상이 멸망해도, 모든 것이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이게 늙어간다는 건가. 유진은 여전히 처음의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정신이 점점 마모되어 가는 것을 느끼곤 했다. 희로애락도 점점 흐려지고, 모든 것에 흥미를 잃는다. 신이었지만 인간의 감성을 지닌 그녀였기에 생기는 일이었다.

그나마 그녀가 감정을 드러내는 상대는 몇 안되는지인이었지만, 이제 그녀와 대화할 수 있는지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같은 신들끼리는 마주치지 않은지 한참 되어 버렸고, 그녀는 저택밖으로 나가길 꺼려 했으니 새로 친구를 사귈 일도 없었다.

애초에 그녀의 저택은 아예 분리된 이계나 다름없었으므로, 일반적인 사람은 접근조차 하지 못 하는 곳이었으니까. 신들의 거처란 언제나 그런 법이었다.

“...보고 싶네.”

유진의 시선이 자기 옆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 작은 엘프에게로 향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유진의 수양딸인 나리였다.

이젠 죽곤 없는.

나리는 엘프답게 수백 년을 살았지만, 그녀보다 길게 살지는 못했다. 유진은 나리가 죽기전 마지막으로 손으로 잡았을 때,

[나중에 봐요. 엄마.]

나중은 없어.

나리가 죽은 지 3000년이었다. 나중을 기대하기에는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기에, 유진은 그 말을 잊지 못하면서도 창밖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곤 했다.

그게 길 잃은 여행자 일지도, 어쩌면 다른 신일지도, 어쩌면 자기를 죽이러 올 누군가일지도 몰랐지만, 유진은 창밖 너머의 대문을 보며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기대를 품곤했다.

그게 삶의 유일한 낙이었으니까.

유진은 방의 물건들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방 밖으로 나왔다. 다시 한번 침묵이 자리 잡은 복도가 그녀를 맞이했다. 그래도, 그녀의 귀에 아주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요란한 소리였다. 유진의 시선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주인님! 세상이 또 멸망했어요! 이젠 어디로 가요!?”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에포나는 여전히 소란스러움이 묻어나는 발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디로든 가겠지.”

세상이 멸망하면 다른 뿌리세계든, 가지세계로든 가면 그만이다. 어느새계든 그녀에게 있어서 그저 풍경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고,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이 의자에 앉아 창밖이나 바라볼 생각이었으니까.

“그래도! 좀 아쉽네요! 이번 세상은 재밌었는데!”

“그래...”

“막 인간들이랑 마족? 인가하는 애들이랑 모여서 막 싸우고! 용사니 뭐니 하는 애가 세상을 구한다고 검 하나 들고 싸우는 거 구경하고! 재밌어보여서 파티에 참가했더니 용사가 나한테 고백도 했고! 연애는 잘 모르겠지만! 마왕이랑 싸우는 것도 재밌었는데! 마왕을 물리치고 그냥 이곳저곳 돌아다니니까 또 전쟁 벌어져서 구경하고, 용사가 나를 잡으러 오고! 신나게 달리다 보니까 또 세상이 멸망했어!”

아무리 봐도 너가 원인인 것 같은데.

유진은 어이없는 눈으로 에포나를 바라보았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본질은 바뀌지 않아서, 어릴 적 메이드 코스프레를 한 것 말고는 언제나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에포나였다. 유진은 에포나의 산만한 설명속에서도 어느 정도 세상이 멸망한 원인을 짚어냈다.

또 저 외모에 속는 인간이 생겨 버렸군.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망아지지만, 실체를 모르는 인간들은 에포나를 보고 반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외모만은 유진과 판박이었기에 쓸데없이 아름다웠던 데다, 언제나 활기찬 에포나의 모습은 남자의 마음을 뒤흔들기 좋았으니까.

하지만 에포나가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 하는, 질주본능을 가진 망아지라는 것이 문제였다. 무슨 일이 있든 달리고 싶으면 달리고, 쉬고 싶으면 쉬는 게 에포나였기에 유진이 아니면 에포나를 묶어두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통제불가능한 에포나에게 반했다 사라진 남자가 몇이었는지 유진은 알지 못했다.

“그래...재밌었니?”

“응! 주인님도 같이 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난 나갈 생각 없단다.”

그렇게 말하며 유진은 다시 그녀의 방을 돌아갔다. 에포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그녀의 뒤를 따라, 유진의 맞은편에 앉아 끊임없이 이야기를 조잘거렸다. 유진은 가끔 맞장구를 치면서도, 적당히 흘려넘기며 눈을 감았다.

그녀가 눈을 감고 잠깐 잠에 빠져들면 다른 세계로 이동하리라. 이 저택은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물건이었으니까.

이내 멸망해 버린 세상에 우뚝 선 저택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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