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화 〉 외전:저승사자와 여신과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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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놔라! 내가 누군 줄 알고!”
“아, 그거 드라마에서 들어본 적 있슴다. 그 대사 치고 나서 험한 꼴 당하는 게 국룰이지 말임다?”
혹시 정말로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순순히 따라가지 말임다?
저승사자의 살벌한 협박에 자신이 죽은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던 노인은 새파래진 얼굴로 다른 저승사자들에게 끌려갔다. 김차사는 한숨을 쉬며 만지작거리던 스마트폰을 품안에 집어넣었다.
지구 전체에 퍼진 전염병 탓에 저승사자들이 할 일이 늘어나고 있었다. 한반도를 담당하는 저승사자들은 휴가는커녕 정기휴무일도 반납하고 정신없이 죽은 영혼을 인도하고 있으니, 이제는 저승사자와 귀신이 구분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몇 달 전의 전쟁으로 저승사자의 숫자가 줄어든 것도 인력난에 한몫 했다.
그래도 세계를 구하는데 작게나마 공을 세운 공로로 승진한 김차사는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일은 부하를 시키면 그만이었으니까.
“귀찮지 말임다. 안 그래도 혼들이 순환이 안 되서 저승이 미어터질 지경인데 죽은 사람만 들어나니...”
“영혼을 이 세계에 방치해둘 순 없어요. 그러다 먹이터가 늘어나면 시말서 정도론 안 끝날거에요.”
“저도 잘 알고 있슴다 헤카테님. 그런데 이곳엔 무슨 일이심까.”
김차사는 현세와 저승의 경계에 나타난 여신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헤카테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괴짜기질이 강한 여신이기도 했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여신이었다.
당장 이곳에 갑작스레 나타난 것만 해도 그랬다. 헤카테는 저승을 관장하는 여신이 아니었으므로 이곳에 용무가 있을 리가 없었고, 결국 헤카테가 나타날 만한 이유는 실험에 관련된 것일 테니까.
그리고 그 실험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김차사의 신경을 건드렸다. 캐낼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캐내지 못하면 계속해서 신경이 쓰이리라. 오랫동안 저승과 신들 사이에서 전령역할을 해왔던 김차사였기에 직업병과 다를 바 없는 반응이었다.
“영혼이 많다면, 몇 개쯤 사라져도 문제없겠죠.”
“영혼을 사사로이 쓸 수는 없는 법임다.”
“저승도 이미 한계에 도달했을 텐데요.”
“괜찮슴다. 곧 순환이 시작되면 금방 줄어들 것임다.”
김차사는 헤카테의 제안을 빙 돌려서 거절했다. 상대의 위치가 위치인지라 대놓고 거부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돌려 말하는 것 정도는 문제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저 여신이 쉽게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건 확실했지만.
“변이자. 늘어나면 좋지 않을 거에요.”
“이미 엎어진 물을 주워 담을 순 없슴다.”
“더 쏟아지기 전에 막을 순 있겠죠.”
헤카테는 완고하게 자신의 의사를 피력했다. 김차사는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헤카테를 바라보았지만, 웃음기 하나 없는 무표정한 얼굴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몇 개만 집어가지 말임다.”
“고마워.”
헤카테는 김차사의 부하들이 데리고 있던 변이자의 영혼 몇 개를 집어 가져온 수정구 안에 집어넣었다.
“이정도면 충분하겠네요.”
“그럼 슬슬 저희도 일이 있으니 가보겠슴다.”
“아, 그전에 한 가지 일러둘게 있어요.”
“어떤 것 말임까?”
“경계에 금이 가면서 잠들었던 자들이 깨어나고 있네요. 호환 정도가 아니라, 오래전에 잠들었던 신들도요.”
“...잘못들었슴다?”
“잠들어 있던 신들이 깨어나고 있네요. 대부분은 힘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머리까지 멍청해지진 않았겠죠.”
헤카테는 무심한 목소리로 무시무시한 소식을 전해왔다. 김차사 입장에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안 그래도 저승사자 수가 부족해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 골치 아픈 일이 늘어나면 죽어나가는 것은 저승사자들이었다.
옛날 옛적 신화가 살아 숨 쉬고 있을 시절엔 제사장이든 신녀든 퇴마사든 무당이든 그런 영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있었기에 굳이 저승사자가 현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런 신비가 거의 사라진 세상에선 그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최악이지 말임다.”
“경계 쪽은 1년에 걸쳐서 보수될 예정이에요. 그 동안은 깨어난 존재들을 척살하든, 아니면 다시 잠재우든 하세요.”
“말은 쉽지 말임다...”
“대부분 힘을 회복하지 못했으니 저승사자 선에서 끝낼 수 있을 거에요.”
“바빠지겠지 말임다...”
“수고하세요.”
헤카테는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이 그렇게 말을 내던지곤 차원을 가르고 그 속으로 사라졌다. 헤카테가 사라지자 김차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뒤에서 쭈뼛거리는 부하 저승사자들을 돌아보았다.
“욕봤슴다.”
“어우, 헤카테님만 보면 온 몸이 떨린다니까요.”
“정말요. 너무 차가워서 피부가 시릴 지경이에요. 그나저나 방금 이야기, 기밀이죠?”
“그렇슴다. 다른 저승사자한테 이야기 하지만 않으면 됨다.”
원래는 단 둘이서 대화해야 할 만한 주제이기는 했지만, 김차사는 유들유들한 상관이었다. 새어나가지만 않으면 된다. 그리고 부하들이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이 바닥은 워낙 좁아서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퇴직은 꿈도 꿀 수 없게 될 테니까.
“그건 다행이네요. 어휴, 진짜 이 놈의 세상은 뭔 사건이 허구헌 날 터지는 지...”
“동감함다.”
“후...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김차사님도 수고하십쇼.”
“나중에 봄다.”
김차사는 부하들이 떠나가자, 한숨을 쉬곤 품속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당연하게도 누군가에게 연락하기 위함이었다.
“흠흠, 김차사이지 말임다. 혹시 잠깐 만나서 대화 가능하심까.”
“...그렇게 된 검다.”
“또 싸우라고?”
“그건 아님다. 시대가 너무 변해서 신들은 거동조차 못할 것임다. 다만 변이자들을 이용해서 영향을 끼치는 정도는 할 수 있으니 참고하란 이야기임다.”
유진은 김차사의 이야기를 듣곤 한숨을 쉬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놈의 트러블은 한시도 끊기는 법이 없어요.
“그냥 주의만 하라는 거지? 그걸 알려주려고 온 거고.”
“그렇슴다.”
“근데 굳이 직접 만나서 할 이야기였어? 그냥 전화로 하면 되잖아.”
“중요한 이야기니까 혹시 몰라서 말임다.”
유진의 지적에 김차사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변명을 내뱉었다. 당당하게 게으름 피우기 위한 명분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겸사겸사 커피도 마시고 싶었기도 했으니까.
“그나저나, 정말 좋은 집이지 말임다. 이왕이면 저도 집들이 때 초대해주셨으면 했지 말임다...”
“미안...사실 까먹었어.”
“어쩔 수 없지 말임다. 막 초대될 군번이 아닌 것도 맞지 말임다.”
신들이 단체로 모여 있는 파티에 끼기에는 급이 낮다는 걸 김차사 자신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상관들 사이에서 눈치 보며 즐겨야 하는 파티가 즐겁기나 할까. 여우가 딸 수 없는 포도를 신포도라고 여기듯이 김차사는 적당히 합리화했다.
“아마 유진양 주변은 조용할 것임다. 깨어난 신이나 요괴들도 지금의 유진양에게 걸리면 삼분카레 심세임다.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나타나진 않을 것임다.”
“그럼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는 거네?”
“그냥 나중에 발견되면 처리해주시면 됨다.”
“알았어. 그 정도야...”
유진은 저승사자의 부탁에 아무런 반발 없이 수긍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면 도와주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어차피 유진도 나름 여신의 환생으로서 세계를 지켜야 한다는 막연한 사명감 자체는 희미하게나마 남아있었으니까.
“그럼 저는 가보겠슴다.”
김차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를 복귀하지 않으면 그의 상사가 눈치 채고 그를 찾으러 다닐 시간이었다. 아무리 승진했다지만 그는 중간관리직에 불과했으므로, 어느정도는 몸을 사려야 했다.
“벌써? 간식도 좀 먹고 가지?”
“알겠슴다.”
김차사는 다시 소파에 착석했다.
...손님으로서 주인의 호의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래의 일은 미래의 내가 해결할검다.
김차사는 유진이 구워온 쿠키를 먹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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